땡큐 이영옥 2007. 4. 30. 16:51

  수원 화성 순례-세계문화 유산

 

수원 화성(水原 華城)세계 문화 유산

이조 제 22대 정조대왕은  영조대왕이 57년의 재위 끝에 승하하시어  왕위를 이어 밭았다. 정조는 영조대왕의 세자인 장헌세자(사도세자)혜경궁 홍씨 사이에 태어나서 생전에 아버지인 사도 세자가 당쟁에 휘말리면서 뒤주 속에 갇혀 생을 마감하는 기막힌 사실을 감내하며 왕자수업을 받았다.

정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비명에 간  부친에 대한 애절한 마음으로 효심이 지극하였다. 정조대왕 13년에 양주 비봉산에 있던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수원 화산으로 옮기기로 하고 유택을 마련하고 영우원(永祐園)이라 칭하였다. 구 읍치에 살던 사람들은  현재의 위치인 팔달산 아래로 옮겼다. 수원도호부는 원래 화산아래 자리잡고 있었다.

당시 정조는 수원부에 10만 냥을 하사하여 백성들의 집과 이사비용을 보상하였다. 또 신 읍치에 살게 될 백성에게 10년간 세금을 면제하였다.  이로 인해 농업과 상업 활성화를 통해 수원은 큰 도시로 성장하였다.

 1793년 정조는 수원을 화성(華城) 유수부로 승격시켜 한양 남쪽의 중심도시로 만들었다. 1794년 한양 남쪽 100리 지점인 수원 팔달산 아래 화성 행궁을 짓고 이를 보호하기 위해 다산 정 약용의 설계에 기초하여 정조 18년(1794.2.28~1796.9.10)에 서 부터 2년 9개월간 1,820여명의 인력을 동원, 성 둘레 길이 5744 m, 면적은 130 ha 에 이르는 성곽을 축조하였다.

화성은 팔달산에서 시작하여 평지 읍성의 형태로 쌓았고, 실학의 기반아래 당시로서는 가장 합리적인 공사방식으로 축성하였다. 영중추 부사 채 제공(蔡 濟恭)의 총괄지휘와 조 태심의 실무지휘로 당시에 새로운 기계인 거중기, 녹로 등을 사용하여 거대한 석재를 운반하여 축성하였다.

거중기는 당시 실학자인 다산 정 약용이 고안한 것으로 몇 개의 도르레를 병열로 연결하여 무게를 분산하는 방식이다. 약 7.2 ton  정도의 무거운 돌을 들어올리는 기기로서 화성을 단기간에 축성하는 대단한 기기였다.

축성에 대한 모든 기록이 상세하게 남겨져 있어 당시의 상황을 세밀하게 파악할 수 있게 하였다. 이처럼 화성은 조선 후기 문화의 결정체이고, 당시로서는 계획된 신도시 였다.

 화성은 19세기 이 후 나라의 국력이 쇠퇴하면서 점차로 훼손되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서양문물이 들어오고 학교가 성안에 세워지면서 행궁(行宮)의 일부가 당시의 소학교로 사용되었다. 급기야 1910년 한일 합방 후 일제에 의해 화성 행궁과 성이 파괴되기 시작하였다.

일제는 행궁에 군청, 경찰서, 도립 수원의원 등을 설치하면서  행궁이 목적 외로 사용 됨으로서 급속히 훼손 되었다. 또 새 도시개발을 핑계로 성벽을 허물어 그 석재를 다른 건축물 재료로 사용하면서  성곽은 허물어 졌다.  해방과 더불어 그대로 방치되었다가  6.25 동란을 거치면서 원래의 모습은 없어지고 파손 되었다.

 5.16 군사혁명을 거친 후 나라가 안정되면서 화성 전체가 사적 제 3호로 1963.1.21 지정 되었다. 성벽은 1964년 부터 부분적으로 보수 하였다.  그 후 1975년 부터 5년 동안 계획된 복원공사로 현재의 모습을 찾았다. 화성은 전체가 1997년 12월  UNESCO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행궁은 1995년 부터 발굴작업을 거처 2002년 1단계 복원공사로 대부분의 건물이 복원되었다. 마침내 2003년 10월에 개관하였다.

 성곽 둘레에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건축물을 설치 하였는데  대개 10개 분야의 구축물을 성곽을 쌓으면서 사이 사이에 연결하여 축조하였다.

첫째로는 4 대문이다. 팔달문, 장안문, 화서문, 창룡문 이 동서 남북으로 나있다. 이중 팔달문과 장안문이 남북의 정문으로 석축으로 쌓아졌다. 2 층에는 문루가 있다. 또 벽돌로 쌓은 반원형의 옹성(甕城)이 문을 둘러싼 형태이다. 동으로 창룡문도 옹성으로 둘러 쌓여졌고, 서쪽으로 화서문이 성안 마을과 연결되어 있다.

두 번째로는 장대(將臺)가 있다. 화성에는 2 개소에 장대가 설치되었다. 팔달산 위에 중앙에 위치한 서장대는 일명 화성장대(華城將臺) 사방 백리가 내려다 보이는 곳으로  성 주변을 살피고 군사를 지휘하던 화성의 중심 장대이다. 동쪽에 있는 동장대는 낮은 언덕 위에 위치한  장대로 주로 군사훈련에 사용된 곳으로 넓게 자리잡고 있다.

세 번째는 포루(砲樓)  화성에는 방어용 대포를 발사할 수 있는  5 곳에 포루가 지어 졌다.

서포루, 북동포루, 동포루, 남포루, 북서포루로서 벽돌로 쌓았고, 3층 정도의 지대 위에 혈석 (대포를 쏘기 위해 구멍을 뚫은 돌)을 전면에 2개, 좌우로 3 개씩 구축하고 그 위에 벽돌을 쌓았고 안쪽으로는 나무판을 대어 2층으로 구분한 것이다.

네 번째는 포루(舖樓)가 있다. 성곽에서 바깥으로 나간 곳인 치성(雉城)위에 설치한 것으로 군사를 숨겨두어 노출되지 않게 하는 곳으로 5군데에 있다. 동북포루, 북포루, 서포루, 동일 포루, 동이 포루 등이다. 아래쪽 부분은 돌로 기초를 쌓았고  중간에는 벽돌로 쌓았다. 그 위에 건물을 짓고 마루를 깔고, 문루를 만들고 좌우로는 활 쏘는 구멍도 만들어 놓았다.

다섯번째로는 공심돈(空心墩)이 있다.  이것은 2곳에 있는데 서부 공심돈과 동부 공심돈 이다. 병사가 안으로 올라 적을 살필 수 있는 망루이다.  동북 공심돈은 직접 들어가 볼 수 있게 공개되어 누구나 들어가면 둥글게 한바퀴 돌아야 올라 갈수 있다.  아주 특이한 건물로 벽돌로 둥그렇게 돈대를 쌓아올려 만든 요새지 이다.

여섯번째로 수문(水門)을 들 수 있다. 화성을 가로지르는 수원 천의 북쪽에 세운 북 수문이 현존하며 편 액은 화홍문으로 달려있다. 견고하고 멋진 모양의 경관을 가진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한편 남 수문은 북 수문에서 750보 남쪽으로 자리잡았고 1796년  정조 20년 3월 25일에 준공되어 사용되었으나 1922년 7월 대홍수로 유실된 후 아직 복원되지 않고 있다.  팔달 시장 근처로 그 앞에는 남 수문 외도와 내도의 도면이 안내 판에 그려져 있고 복원의 날을 기다리고 있다.

일곱번째로 암문(暗門)을 들 수 있다. 암문은 문자 그대로 비밀통로로 쓰이던 곳으로 5 군데에나 있다. 서남 암문, 북 암문, 동암 문, 서 암문이 그것이다. 적에게 들키지 않게 물자를 성안으로 들여올 수 있는 곳으로, 유사시에는 돌과 흙으로 메워 폐쇄하게 하였다.

여덟번째의 구조물로는 노대(弩臺)가 있다. 서노 대와 동북 노대이다. 서노 대는 팔달산 정상에 쌓여있어 주위를 제압할 수 있다. 쇠뇌(다연발 화살)를 쏘던 방어시설로 아주 중요한 곳이다. 동북 노대는 평지 성위에 치성되어 벽돌을 쌓아 만든 동북쪽 방어 시설이다.

아홉번째로 성 둘레의 구조물로 (雉,치성)가 있다. 이것은 모두 10개로 일정한 거리마다 성곽에서 바깥으로 연결된 성을 쌓아 돌출 시킨 곳으로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을 선제 공격하기 위한 시설이다.

 열번째로 봉돈(烽墩)이 있다. 봉화대로서 적의 침입이나 비상을 알리는 시설이다. 남쪽으로 넓은 평지 위에 성벽위로 돌출 시켜 쌓은 5개의 봉화대이다. 성벽에 구멍을 내어  적으로 부터 방어 할 수 있게 하였다.

이외에도 성곽 둘레에는 각루(角樓) 4 곳에 설치되어 주위를 감시 할 수 있게 하였다. 동 북 각루(방화 수류정), 서북 각루, 동남 각루로  3 곳에 설치되어 주변을 감시하기도 하고, 때로는 휴식을 할 수 있는 곳이다. 이중 동북각루는 방화 수류정이라고 하며 경치가 뛰어나다.

이렇게 성곽을 다양한 형태로 쌓아 유시에 대비한 완벽한 축성술로 모든것이 기록으로 남아있다. 성벽은 주로 외측만 쌓아올리고 내측은 자연지세를 이용, 흙으로 돋아 축성하여 자연과 조화를 이루었다. 이처럼 화성은 실학사상의 영향으로 벽돌과 석재를 혼용하여 축성을 하여 동양의 축성술의 결정채를 이루었다. 그리고 부속시설로 화성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을 건립하였으나 국력의 쇄 퇴로 거의 소멸된 것을 축성직후 발간된 화성성역 의궤에 의거 연차로 복원하였다. 

이제 화성순례에 나서보자. 서울에서 전철로 수원 역에 내리면 역사 밖으로 나와 좌측으로  Bus Stop  으로 가서 11,11-2, 13, 36, 39 번 버스를 타고 팔달문 앞에서 하차한다. 남문 건너편 언덕위로 올라가면 화성입구와 팔달사 안내가 나온다. 먼저 안내센터에 들러 화성 홍보물을 받는다. 성은 자유로이 개방되어 좌측으로 성벽 안으로 난 계단 길과 포장 길을 서서히 오른다.성벽은 안으로는 1~1.5 m  내외 높이로 쌓았으나 밖에서는 3~5 m 정도의 높이가 된다. 성벽에는 근안총, 원안총이 일정한 간격으로 뚤려 있다. 근안총이란 성벽 가까이 적군이 오면 총이나 화살을 쏘는 데 사용하고 원안총은 먼 곳을 향하여 쏠 수 있으며 2:1로 설치되어 있다.

제법 가파른 계단길이나 포장된 길을 따라 오르면 오른쪽으로는 잘 자란 소나무가 건강한 숲을 이룬다.  봄철이라 벗 꽃이 만발하여 더욱 아름답다. 맨 먼저 성곽에서 만나는 것이 남치.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란 성곽에서 바깥으로 좀 튀어 나오게 한 시설로서 성벽에 접근하는 적군을 좌 우로 공격하기위한 시설로 화성에는 10개의 치가 있다. 치란 꿩치 자로, 꿩이라 놈은 자기 몸을 잘 숨기고 주변을 살피는 습관의 동물이기 때문에  이 뜻을 따서 또는 雉城이라 이름 붙였다.  제1 치는 팔달문과 남포루 사이에 있다.

성을 자세히 관찰하면서 오르니 포장도로도 나오고 화성 관광 열차가 다니는 도로가 나오며 성 밑으로 도로가 나있다. 그 위로는 이원수 작시 홍 난파 작곡의 고향의 봄의 악보를 새긴 노래비가 서있다. 이 고장 출신인 홍 난파(1898~1941) 탄생 70 돐인 1968년에 세워진 것이다. 그의 얼굴이 새겨지고 고향의 봄 노래가사와 악보가 새겨져 있다.

계속 오르면 이제는 수원시 팔달문 근처와  시내가 훤하게 보이고, 화성의 둘레가 내려다 보인다. 다음에 나타나는 것이 성곽에 서있는 남포루다. 5 개 포루 중 하나로 팔달문과 서남문 사이에 있다. 1796년 7월 9일 완공되었고 적의 접근을 막아 화포(火砲)를 쏠 수 있는 곳이다. 치성보다 발전된 형태이다. 팔달문 주위를 수비하기위한 것이다.

 성벽을 따라 계속 오르면 제일 높은 곳의 좌측에 서남 암문이 나오고 서남 포사가 서있다. 화성의 5 개 암문중의 하나로 성곽의 깊은 곳을 적이 알지 못하게 출입구를 내어 논 것이다. 이는 사람과 군수물자의 통로이다. 문 위에는 안팎으로 낮은 성가 귀를 설치하였고 포사(舖舍)가 설치되어 있다. 포사란 성밖의 위험을 성안으로 알리는 시설물로 깃발을 휘두르거나 대포를 쏘아 전달한다. 서남 포사는 서남 암문 위에 지어 놓아 군사가 항상 지키게 되어있다.

암문 밖으로 길다랗게 나간 치가 50여 m 나 연결되고, 여기에도 좌 우로 한 개씩의 돌출된 치가 있다. 맨 끝 마지막 지점에 서남 각루가 세워져 있다. 이는 주변을 감시하고 휴식도 할 수 있는 곳이다. 길다란 통로를 용도라 하며 그 끝에 세워진 루는 1796년 4월 16일 공사를 하였고, 화양루(華陽樓)라는 편 액이 걸려있다.

용도에서 나오면 이제 성곽 길은 오른쪽 능선으로 이어진다.  잔디가 깔려있고 성안의 길은 포장이 되어 있다. 다음에 나오는 것은 서삼치(西三雉)로 서포루와 서남 암문사이에 있다.

깨끗하게 단장된 성안 길을 가면 어느덧 바깥으로 나가는 큰문에 이른다. 이것은 보수당시에 만든 통로로 밖으로 안내소와 화장실이 있다. 이 화장실은 너무 깨끗하고 아름다운 시설이다. 언제나 향내가 나고 푸른 식물이 창문 위에 심어 있다. 깨끗하게 관리 하느라고 비용과 노력이 필요하지만 참으로 대단한 아이디어다. 이곳에서 밖으로 나오면 옛날 돌로 성곽의 기초부분이 축성된 것을 직접확인 할 수가 있다.

잠시 휴식 후 성안으로 들어가 가볍게 걸으면 숲속으로 世界文化遺産 華城이란 화강석비가 산듯하게 반긴다. 1997년 12월 화성이  UNESCO 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을 기념하기위한 것이다.

왼쪽으로 치성 위에 지은 목조건물의 서포루가 나오니 이는 초소나 군사 대기소다. 이곳은 서암문이 적에게 발각되어 공격 받는 것에 대비한 설치이다.

우측으로 종각이 나타나는데 이는 효원의 종이라 명명되었다. 종의 크기는 12.5 ton, 높이는 3,54m 로 요금을 내고 치는 것이다. 1~2명에 1000원으로 3 번씩 칠 수 있다. 제 1 타종은 부모님의 은혜와 효도를 다짐하고, 제 2 타종은 가족의 화목과 건강을 기원하고, 제 3 타종은 자신의 발전과 소원을 바라면서 울린다.

성을 따라 가면서 암문이 나온다.  이 문은 지형을 잘 이용하여 아래로 내려가서 나가게 되어 있어 얼른 눈에 띠지 않는다.  서암문을 지나오면 화성 장대가 위용을 자랑한다.

이곳에서는 화성전체가 내려다보이고 수원시가 앞뒤로 모두 눈에 들어온다. 서장대라고도 하며 팔달산 정상 (128 m)에 있고 華城將臺  편 액은 정조가 친히 쓴 것이다. 1794년 9월 29일 건축한 것이다. 1795년 정조가 윤 2월 12일 현륭원(융릉-사도세자 능) 참배를 마치고 서장대에 올라 성을 수비하고 공격하는 훈련을 직접 지휘하였다 한다.

 서장대 뒤로는 서노대가 사방을 제압하고 서있으나 이곳에서 다연발 활인 쇠뇌를 쏘기 위해 높이 지은 것이다. 정 8 각형으로 평면의 벽돌로 쌓았고, 위로 올라갈 수 있다.

이제는 팔달산 아래로 내려가는 성곽 길이다. 우측으로는 아주 싱싱한 소나무가 군락을 이루어 건강한 숲을 자랑한다. 그 사이로 화성안의 구시가지가 보인다. 왼쪽으로 화성 행궁이 내려다 보인다. 이제는 서이치(西二雉)를 보면서 가파른 계단 길을 내려간다. 흰 깃발이 소나무와 어울리고 계단 길 옆으로는 석등이 일정한 간격으로 네모난 형태로 설치되어 있다.

서포루에 이르니 이곳은 화성의 전투지휘소인 서장대와 가까운 거리다. 5 개 포루 중 중무장한 곳이다. 이제는 성안의 마을을 내려다보며 가나 옛 마을은 간데없고 최근에 지은 양옥이 주류를 이루고있다. 서일치를 지나며 거의 평지에 가까워진다.

내려가는 왼쪽으로 서북각루(西北角樓) 가 나온다. 화성의 4개 각루 중 하나로 숙지산 자락이 보이는 곳으로 화서문 일대의 군사를 지휘하던 곳이다. 1층은 온돌이 설치되어 밤에 지키는 군사가 사용하게 되었다. 옆으로는 최근에 아름다운 성안의 정원이 가꾸어져 온갓 꽃이 아름답게 피고있다. 이제 평지로 내려오면서 화서문(華西門)에 이른다. 우측으로 돌을 부친 건물이 어울리지 않게 넓게 자리 잡은 것은 수원도서관 건물이란다.

화서문은 4 대문 중 서쪽문으로 1796년 1월 8일 건축되었다. 서쪽인 남양만, 서해안 방면으로 연결된 통로로 원래의 모습을 간직한 것으로 보물 제 403호로 지정되었다.

편 액은 초대 화성유수 채 제공(蔡 濟恭) 이 썼으며  옹성 안 홍예문 좌측 성벽에는 성문공사를 맡은 사람들과 책임자를 명시한 공사 실명판이 있다. 그 옆으로는 서북 공심돈이 서있다. 공심돈은 화성에 3개가 있는데 이곳은 1796년 3월 10일에 완공되었다. 내부는 3 층으로, 2,3층은 마루를 깔고 사다리를 놓았다. 화서문 주위의 망루 역할을 한 것이다.

평지로 가면서 장안대로가 훤하게 보이고 장안문과 화서문 중간에 위치하여 근처의 북서포루와 함께 평지 성곽으로 다가오는 적을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다음에는 성곽위로 얕게 돌출한 곳에 북서적대가 나오니, 이는 옹성과 성문에 접근하는 적을 막기위해 성문좌우에 설치한 것이다. 성곽보다 높게 축조하여 적군의 동태를 감시하던 곳이다. 이제 남북으로 대로가 뚤린 장안문에 이른다. 문 오른쪽으로 대로가 연결되어 성문 옆으로 달란다. 여기서는 성문을 통해 밖으로 나가야 장안문의 전모를 볼 수 있다. 가장 큰 규모의 성문으로 근처에서는 보수공사가 한창이다. 장안문은 옹성으로 둘러 쌓였고 고색이 창연하다.

장안문을 지나 다시 평지의 성곽위로 올라가 북동포루를 지나면서 성 아래로 내려오니 연포갈비 집이 나온다. 12시 부터 팔달문에서 시작한 순례가 2 시간을 넘겼다.  여기서 늦은 점심식사로  수원 갈비를 맛볼 수 있다.  그 동안 일본인 관광객 10~20명의 그룹을 만났다.

이곳이 일본 관광객이 식사하는 곳이다. 깨끗한 시설과  서비스가 돋보인다. 30분 동안 식사 후  다시 나와 길을 건너 성곽 밑 산책 코스로 오른다. 이제 수원천이 남북으로 흐르는 화홍문(華虹門-일명 북수문)에 이른다.  수구 7 개가 옛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둥글게 화강석 석재를 다듬어 수문을 만든 것이 규격이 일정하게 보인다.  이 북수문은 1795년 1월 13일 완성한 것이다. 편 액을 화홍문이라 하였다. 華는 화성을 의미하고, 虹자는 무지개를 뜻하는 글자다.

물보라가 수문으로 넘처나는 경관을 화홍관창(華虹觀漲)이라하며 수원 팔경의 하나다. 물이 통과하는 수문에는 쇠창살을 설치하여 외부로 부터의 침입자를 막았다.

방화 수류정의 정자를 지나 밖의 연못의 경치와 어울려 여유를 선사하는 곳이다. 화성의 백미라 한다. 다시 조금 올라가면서 북암문이 나오고, 동북포루를 만난다. 지세가 높아서 방화 수류정(동북각루), 동암문, 동장대를 엄호하는 위치이다. 성밖의 경치도 아주 빼어난 곳이다. 지하로 난 동암문을 지나 이제 동장대(연무대)로 향한다. 이 곳은 아직 보수 중이라 들어갈 수 없어 유감이다.

서장대와 더불어 화성에 주둔했던 장용외영(壯勇外營) 군사들을 지휘했던 지휘소의 하나이다. 1795년 8월 25일 완성하였다. 이곳은 군사훈련과 무예를 닦는 곳으로 연무대라고도 불린다.

지형은 높지 않으나 사방이 트여있어 시야가 넓으며 동쪽 성안을 관장하는 군사 요충지이다.

장용영(壯勇塋)은 정조대왕이 왕권 강화를 위해 창설한 직속 친위 부대이다. 1785년에 정예군사를 선발하여 만든 국왕 호위 부대이다. 장용위(壯勇衞)를 확대 개편하여 만든 1만 2천명의 군영으로 운영되었다. 이곳의 장용외영은  행궁에 주둔하는 군사가 주둔하던 외영 이었다.

이곳에서 화성 관광열차가 출발하는 곳이다. 열차는  2대 54 인 승으로 3 량으로 구성되었다.앞 부분은 정조대왕을 상징하는 용머리 형상을 하고 객차는 임금이 타던 가마를 형상화하여 만들었다. 매일 오전 10~17시까지 운행한다. 팔달산 강 감찬 동상 앞에서 이곳 연무대 까지 운행한다.

코스는 팔달산-화서문-장안공원-장암문-화홍문-연무대로 편도로 운행한다. 대인 1500원 어린이 700원이다. 이 곳 연무대 옆 넓은 광장에는 국궁장이 운영중이다. 이곳에서 옛 문화를 체험하는 활 쏘기를 할 수 있으며 1 회당 1000원, 총 20 발 한도내에서 체험 가능한 곳이다.

다시 국궁장 옆으로 올라 성곽 안으로 따라가면 동북 공심돈이 우뚝 서있다. 동장대 근방의 군사시설을 보호하기위한 망루 역할을 하는 곳이다. 1976년 7월 19일 완성. 둥근 원형 위에 벽돌로 쌓은 것으로 화성에서 가장 특징있는 건축물이다. 내부는 나선형의 벽돌계단을 돌아 올라 꼭대기로 나가 먼 곳까지 관찰할 수 있다. 최근에  내부에 전기시설이 되어있어 밤에도 올라 갈 수 있다. 컴컴한 공심돈을 나오니 화사한 봄날의 향기가 온몸을 감싼다.

발걸음을 재촉하여 검은 벽돌로 쌓은 동북노대에 이르니 이것은 창룡문과 동북 공심돈의 중간지점에 자라 잡아 반달 모습의 요새로서 다연발 쇠뇌를 쏘기 위한 곳이다. 그 앞에는 순시라 쓴 푸른 깃발에 붉은 글자가 인상적이다.

평지로 나오면서 언덕을 돋은 곳에 쌓아진 성을 따라 창룡문(蒼龍門)에 이른다. 4 대문중 하나로 1795년 10월 17일 완공.  창룡이란 곧 청룡으로 좌 청룡, 우 백호를 의미한다. 성문을 보호하기위해 반달 모양의 옹성을 쌓았다.  이곳에도 좌측 석벽에 성문 공사를 한 사람들의 실명을 새겨 놓았다.

동일포루를 지나 이제는 직선으로 연결된 성곽을 따라가며 동쪽의 수원 시가지를 바라보니 올림픽 경기장이 돋보이고, 수원 제일교회의 높은 첨탑이 검은 색 갈로 유난히 돋보인다. 성 밖에도 아름다운 꽃 길이 조성되고 산책하는 사람이 많다. 이제는 평지의 치를 지나면서 봉돈(烽墩)에 이른다. 성곽에 맞물려 검은 벽돌로 쌓아올린 5 개의 봉화대로 아담하게 쌓아 올렸다. 사방경계와 정찰을 하던 곳으로,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빛으로 신호를 보냈다 한다. 용인의 석성산 봉화대와 서해안의 홍천대 봉화와 연결된다.

이제 마지막 동이포루에서 내려와 수원천변에 이른다. 이곳에는 남수문이 있었던 곳이나 1922년 홍수로 유실된 후 아직 복원되지 않았다. 다리 위에는 팔달시장이 연장되어 사람들로 붐비며 여기서 팔달문 까지는 성곽이 없고 도로와 시장으로 앞으로의 복원이 과제이다.

이렇게 해서 약 6 km 의 성곽순례는 제자리로 돌아 오는데 3~4시간으로 완벽하게 화성의 유산을 몸으로 체험하면서 성곽 순례를 마치는 계기가 된다.

 이제 화성 행궁으로 발길을 옮겨 홍보관과 복원된 행궁을 둘러보며 우리역사의 뒤안길을 배우게 된다. 행궁은 정조가 이곳에 와서 묵었던 주 행궁과 보조 건물이 좌우로 있으며 최근 드라마 대장금의 촬영지로 관광화되어 찾는 사람이 많다.

행궁의 입구 신풍루 앞에는 지금도 공사가 한창이다. 안으로 들어가면 600년 된 느티나무가 장관이고 소원을 비는 부적이 몇 줄로 둘러 처져 있다.

화성 행궁에는 봉수당(奉壽堂)이라는 정당이 있고 정조는 이곳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열었다 한다. 장수를 기원한다는 뜻의 봉수당은 1789년 정조 13년에 완공 하였다.

행궁의 침전으로 장락당(長樂堂)이 있으며 편 액을 정조가 직접 썼다 한다. 복래당(福來堂)은 행궁 내당으로 옛날 화성유수의 거처로 최근의 대장금 촬영지이다.  유여택(維與宅)은 정조가 행차 시 집무하던 곳이다.  행궁 밖으로는 정조대왕의 신위를 모신 화령전(華寧殿)이 있어 초상화를 봉안하고 있다.

화성과 행궁 등 부속시설을 이렇게 복원하고 성곽 안과 밖으로 서치라이트 같은 조명시설을 갖추고, 성곽을 따라 흰색, 붉은색, 청색기를 날리게 한 것은 한층 문화유적의 가치를 높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