땡큐 이영옥 2010. 4. 27. 18:54

1.     Jordan-Amman

 

                             (사진 :  요르단 전국지도)

 

요르단의 간략한 역사: 아랍권이 오스만 터키를 밀어내고 나니, 영국이 프랑스와 비밀협정으로 이곳을 분할 통치하기 위해 살리모 협정을 체결. 세계 1차 대전 때까지 영국과 프랑스가 이곳을 지배한다. 요르단과 이락은 영국이, 시라아와 레바논은 프랑스가 통치한다.

1967년 이전에는 요르단의 경계가 West Bank까지 였으나 그 후 이것이 유태인과 팔레스타인 분쟁의 도화선이 된다. 영국이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는 유태인을 위해 나라를 세워 주겠다고 발포아 선언을 한다. 이는 독일을 견제하려는 술책이었다. 이때부터 팔레스타인과 기존 유태인의 분쟁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 후 영국은 1946 UN에 신탁통치로 넘기고 나가니, 19481차 중동전이 발발. 마침내 유태인이 팔레스타인 지역을 30%나 차지한다. 일부 난민은 West Bank와 가자 지구로 들어가니 이스라엘은 이때 독립국가를 선포하였다.

팔레스타인 인들은 이로 인해 요르단 발가 지역에 난민 촌을 이루고 정착. 19672차 중동전으로 가자 지구, 서안지구를 다 이스라엘이 장악. 이때부터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PLO(Palestain Liberation Organization-팔레스타인 해방기구) 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실지회복을 위한 투쟁이 시작되었다. 이 후 요르단은 1996년 이스라엘과 평화 협정을 체결하여 이스라엘은 요르단과는 관계개선을 한다.

수도인 암만은 A B C D 구역을 나누어 주민을 거주 시킨다. 그러나 A, D지역은 생활여건이 너무나 차이가 심하다. 주택, 생활 여건에서 너무 큰 격차가 난다.

 

 

 

                                            ( 사진: 수도 암만  시내 모습) 

우리나라는 요르단과 외교 관계를 맺고 한국이 여러 분야에 진출했다. 암만의 국제공항은 금호건설에서 시공하였다. 한국 교민은 350명 내외며 선교사로 활동하는 사람이 100여명 된다. 교육열이 높아 인구의 40%가 학생이며 이 나라에서는 공무원이 최고이며 퇴근시간은 13:00~13:30분이다.

 국가의 공식 명칭은 Hasim Kingdom of Jordan으로 면적은 약 9㎢에 인구 600만 정도다. 전 국토의 75%가 사막이다. 모래와 자갈로 뒤덮였으나 대부분 개발 가능한 것으로 생각된다. 지하수도 많으나 개발이 안되어 물 사용이 제한 받고 있다. 입헌 군주제. 초대 훗세인 국왕이 1999년 사망 후 그의 아들 압둘라가 국왕이 되었다. 상원은 명예직으로 전직 각료가 주이며 하원은 80석 이다. 90% 가 이스람교를 신봉한다. 실업율이 50%에 이르며, 일교차가 큰 나라다. 평균 800 m 고지대에 위치.  GNP 3~3500$. 북쪽지역은 그래도 농경지가 많다.

 이제 요르단의 세계 문화 유산을 하나하나 살펴보기로 한다.

1)            제라쉬(Jerash):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

 고대 도시로서 그리스의 지배를 거처 로마 시대에 와서야 번영. 그 후 동 로마 제국의 통치하에서 기독교 중심 도시로 되었다. 이스람이 들어오면서 침체되니 AD 747년 지진으로 도시가 사라져 버렸다. 1800년 대에 와서야 발굴. 황금기엔 인구가 5만 명이 넘었고 영역이 3~5. 해발 평균 550 m지역이다.

 이 지역은 로마 시대의 쌓은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개선문을 지나서 유적이 산재해있다.

                          ( 사진: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문) 

   

이 문은 AD 129년 도시의 성벽 남쪽 450 m 지점에 하두리아누스 황제의 방문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곳은 그리스 점령 시 건설된 도시 위에 이스람이 다시 세운 도시로 “Oval Plaza” 는 모임의 장소이다. 둥글게 둘러 쌓여있고 가운데 중심기둥이 우뚝 서 있다. 이곳에서는 민속 축제가 매년 열린다. 이제 몇 군데 유적을 살펴본다.

 a) 원형극장: 이곳에는 극장이 3 군데나 있다. 남쪽의 극장이 가장 크고 반원형 좌석은 통로 3 , 2층 계단으로 되어 잇고, 전면에는 무대가 넓다. 무대 밑과 객석 아래 반원형 바닥은 구조가 시리아의 보스라(Bosra)” 의 극장과 유사하다. 아래 둘레의 12개의 “ O “ 자 모양으로 둥글게 파진 곳이 있는데 이것은 음을 흡수하는 역할을 한다. 그 앞에서 크게 소리 처 보니 과연 음향이 흡수되어 줄어든다.

 

                                  (사진: 원형극장의 관중석) 

 

b) 교회 터:  AD 331년 국교가 기독교로 바뀌면서 비잔틴 시대의 교회가 건립된다. 이곳은 3개의 교회가 있던 터로 맨 윗 교회는 제단의 위치가 동쪽으로 있으니 기독교 교회로 여겨진다. 바닥에는 앞에는 글자, 뒤로는 모자이크로 기록되어 있고, 요한의 업적, 낙타 등의 문양이 그대로 남아있다. 지붕만 없는 교회다.

가운데 교회는 안쪽으로 큰 기둥이 4개가 우뚝 서 있다.

                          (사진: 교회터 바닥에 새겨진  글씨)

 

 c) 알테미스 신전(Artemis Temple) : 이집트의 아스완에서 가져온 화강암 안에 아취형으로 신상자리가 마련되어 있다. 기둥의 중앙에는 철심이 밖 혀 있고, 한 개의 기둥은 바닥과 면한 자리에 스푼을 물리고 미니까 흔들리는 것을 알 수 있다. 엄청난 무게인데 참 히 안한 일이다. 신비로운 현상이라 할 수밖에 없다.

                              (사진: 알테미스 신전 전경)

    d) 프로 필리온 신전입구: 알테미스 신전은 이곳을 통해간다. 토로 앞은 좌 우로 대로가 나있어 시장길이다. 알테미스 계단 길로 표시되어 있다.

 e) 분수대: 둘레가 돌로 쌓여있고 가운데는 신상이 있던 자리가 있고, 그 앞에는 아주 큰 분수대가 둥근 돌로 만들어 놓여 있다.

 f) 경기장: 아주 대형 트랙의 경기장인데 지금은 복원 공사 중이다.

제라쉬 북쪽 문은 복원공사 중이고, 남쪽 문은 현재의 입구로 되어 있다. 앞에 길은 고린도식 장식으로 되어 있으며, 이런 열주가 200 m 이상 도열되어 있어 장관을 이룬다.

 

 제라쉬를 떠나 이제는 암만으로 들어와 10:20분 암만성에 이른다.

 

2) 암만성: 암만성은 해발 800 m 고지대에 자리잡고 있다. 암만성이 있던 자리는 대부분 폐허의 상태이고 유적지 자리만 남아있다. 둥근 돔이 있는 곳이 중심이었고 그 앞으로 신전이 발굴되고 있다. 아래로는 로마식 극장만이 원형대로 남아있다. 성 아래 왼쪽으로는 난민 촌이 무질서 하게 보인다.

고대 도시로서 요르단의 아크로포리스인 암만성은 로마시대의 요새가 남아있다. AD 2세기에  “Hercules” 에게 바 처 진 사원이 터만 남아있고 6세기에 비잔틴 교회의 유적이 남아있다.

 

                         (사진 : 암만성 중심 유적지) 

 

허큘레스 사원은  “Marcus Aurelius” 황제(161~180)때에 지어졌다. 그러나 지금은 전면에 있던 고린도 식 열주만 4개가 남아있다.

 암만성 안에 있는 고고학 박물관에서 한동안 휴식을 겸해 요르단의 고고학 유물을 살펴본다.

 

                        (사진: 허큘리스 사원 유적지) 

 

 이제 암만성을 떠나 2시간 거리에 있는 십자군성 (카락성)을 찾아간다.

도로 가에는 멀리 보리 밭, 오리브 나무, 그 사이로 별장이 여기 저기 서있다. 유채꽃이 만발하여 너무 아름답다. 가는 도중 마다바 시에서 중식을 하고 쉬어 간다. 이 도시는 기독교 중심 도시로서 이스람과 공존을 한다.

 카락성으로 가는 도로는 “King’s Way” 로 불리는 고속도로로, 모세가 이집트에서 유태인을 이끌고 이 길로 해서 가나안으로 갔다는 것이 출애급기에 묘사되어 있다.

 가는 길 대로변에 농경지와 주택이 많으며, 유목민의 마을도 보인다. 유목민 들은 지금도 텐트를 치고 산중턱에 살기 때문에 구별하기가 쉽다. 그들은 텐트를 검은색이나 갈색으로 치고 2~3칸으로 나누어 침실, 주방, 거실로 쓰고 거실에는 카페트를 깐다.

언덕 길을 내려가니 아르논 계곡이 나타난다. 둘레가 20~30 km 정도의 거대한 계곡으로 정면으로 땜이 80 m 높이로 축조되어 있다. 산은 온통 회색의 돌산이다. 그 사이로 길은 구비 구비 돌아 내려가고 굴곡이 심하다.

 이 계곡은 무집의 길(Mujib Wadi)로 일년 중 7개월만 개방된다. 내려오니 산이 풍화작용으로 위에서 부터 무너져 내리고 있으나 그래도 수목이 자라고, 들꽃이 핀 곳이 드문 드문 있으니 자연의 조화는 오묘하다. 다시 길은 올라가면서 댐 쪽으로 가니 댐에는 물리 넘 처 난다. 길은 올라가면서 구절양장처럼 꼬불거린다. 언덕을 다 오르니 아주 광활한 평원으로 농작물이 가득하고 푸른 초원이 펼처 진다.

 

                      (사진: 아르논 계곡길- Mujib Wadi) 

 3) 카락성(Al Karek Castle) :  유목민의 도시로 인구는 1만 명 정도다.

 2 차 십자군 원정 전에 축성 하였다. 1000 m 위에 난공불락의 성으로 아랍의 사라딘장군이 십자군을 물리치고 정복하였다. 1095년에 성을 쌓고 군인들이 사용하던 방을 지하 7층 까지 쌓았다. 환기 통으로 물건을 내려 받아 사용하였다 한다. 창은 밖에서는 좁게, 안에서는 넓게 보이도록 돌로 쌓았다.

군인의 숫자와 관계없이 성을 크게 쌓아 7만 명이나 수용이 가능 하였다. 방마다 수로를 만들어 물을 쓸 수 있게 하였고, 성 아래를 향해 무기를 쏠 수 있게 아래로 향해 창을 설계하여 방어를 용이하게 하였다. 십자군이 40 년간이나 통제 하였다.

 

                                 ( 사진: 카락성 전경) 

 

마을이 성안에 있어서 이제는 더 이상 발굴은 어렵다. 성의 북쪽은 해자로 둘러 쌓였다. 네개의 직 사각형의 탑이 성벽을 연결하였다. 남쪽의 복원은 아랍인들이 하였다. 그때 물 저장소가 건축 되었다. 성의 윗 쪽에서는 사해와 요르단의 계곡을 바라볼 수 있다.

 성을 떠나 아래로 내려오니 도로 가에 비밀통로가 숲 속에 감춰져 있다.

 

 이제는 요르단의 유일힌 항구 도시 아카바로 간다. 가는 길은 해가 지면서 서서히 황무지가 보이며 고압선만이 철탑과 더불어 차창으로 지나간다. 텅 빈 2차선 도로로 마을이 보이고 흑갈색의 길이나 주변의 주택과 색갈이 같아 구별하기가 어렵다.

19:00시가 되어 광활한 구릉지대를 지나니 해가 홍해 너머로 사라지면서 서서히 하늘이 반사되어 밝아지면서 어둠이 내린다. 이제 가로등이 밝아지며 차는 산길을 올라가니 야경이 아름답다. 마침내 아카바 항구가 보이고 건너편의 이스라엘의 에일라트 항의 야경이 너무 황홀하다.

 

                            (사진: 아카바 항의 해안가 전경) 

 

시내로 들어가 해안가를 돌아 호텔에 이른다. 늦은 저녁을 뷔폐로 들면서 양주를 한잔 한다.

다음날 일찍 아카바에서 홍해 바닷가를 산책한다. 홍해의 맑은 물이 빛나고 열대의 야자수가 줄지어 있는 휴양지다. 아침인데도 바다 수영을 즐기는 사람이 있다. 바다 건너 에일라트 항은 더 큰 도시로 고층건물이 즐비하다. 홍해로 향한 두 나라의 관문이 대조적이다.

아카바는 규모가 작고 지저분하고 특히 해변가는 아주 불결하다.

해변을 떠나 이번에는 “Wadi Rum” 사막으로 향한다. 도로에 나가니 주변 바위산이 검은 기름띠가 형성되어 바위로 검은 줄이 형성되어 종,횡으로 나있다. “Rock Oil” 은 가공비가 많이 들어 경제성이 없다. 기름띠가 벨트처럼 둘러 처진 바위산이 계속된다. 사막으로 나가니 드문 드 문 풀 포기가 난 데가 있다. 페트라 남쪽 100 km 지점에 있는 붉은 모래 사막으로 간다.

4) 와디럼 사막(Wadi Rum Desert)

 이번에는 붉은 모래사막 와디럼(달의 계곡)을 답사한다. 안내센터에 이르니 사막 한가운데 단층으로 여러 가지 구조물이 들어차 있다. 입구에서 찝 차, 낙타, 걸어가는 것을 선택하여야 한다.우리는 도요다 적재함을 개조해 6 인승 차로 만든 것을 타기로 한다.

총 720 km2 의 넓은 지역으로 높은곳은 1754 m 의 럼 산(Jebel Rum) 이며, 주로 500m 내외의 붉은 암반으로 되어 있다.

사막 한복판에 붉은 모래 길을 달린다. 좌 우로는 바위산이 기기묘묘한 형태로 나타나고, 그 사이로는 모래밭이 나있고 풀이 자라고 있다. 낙타가 사람을 태우고 폭양에 사막을 걸어가는 모습은 한 폭의 그림 같다.

 

                   (사진:와디럼 사막 주변의 붉은산) 

 

 이 사막은 풍화, 침식작용에 의해 붉은 사암이 무너져 사막이 된 것이다 지금도 사막은 살아 있어 풍화작용이 계속되고 있다. 이 곳에서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Lawrence of Arabia) 가 촬영된 곳이다. 우리는 중간에 천막에서 휴식을 하며 차 한잔씩을 마신다.

 다시 출발하여 마지막 골짜기 앞에서 차를 멈추고 이번에는 바위틈에서 물이 흐르는 계곡사이로 들어간다. 몸의 중심을 잡아야 물기 있는 바위를 걸을 수 있다. 조금 들어가니 하늘 문이 나오고 동굴 같은 사이 길이 계속된다.

 

                 (사진: 와디럼 사막 가운데 물이흐르는 좁은 암반 계곡)

 

 물이 있는 곳에서 돌아 나오니 큰 나무 밑에 낙타가 손님을 기다린다. 나오다가 붉은 모래 산 앞에서 멈추어 이번에는 신발을 벗고 붉은 모래 산을 오르는 체험을 한다. 맨발로 뜨거운 모래를 밟으며 오르니 제물로 찜질을 하는 것 같다. 조그만 정상 위에서 주변을 둘러보다가 내려온다.

 

                (사진:  와디럼 사막 가운데 붉은 모래산) 

 

다시 차에 올라 사막을 질주하여 입구에 이르니 관광객으로 초만원이다.

 

 불은 사막 체험을 하고 우리는 이제 페트라로 간다. 암만 275 km 표지판을 보고 달리니 끝없는 사막으로 가게 된다. 중간에 유목민의 텐트가 보이고 양떼가 움직이는 것이 점 점으로 보인다. 낙타에 물건을 싣고 엄마와 아이가 함께 텐트를 향해서 걸어가는 모습도 보인다.

 사막을 가로 지르는 도로에는 관광버스, 승용차만이 분주히 달린다. 태양은 한낮이라 폭염으로 내려 쬔다.

 Kingway 로 들어가서 달리니 유목민 소년이 양떼를 몰고 간다. 낙타도 눈에 띠고 길은 Wadi Musa(모세의 계곡)방향으로 나간다. 요르단의 도로는 사해길, KingWay, 사막도로의 3개가 종단으로 나있다.

 우리는 페트라 입구 전망대에 이르러 한동안 페트라를 내려다보고 사진에 담아본다. 붉은 계곡 사암 사이로 뚤린 길이 실처럼 보인다.

5). 페트라( Petra): 세계문화유산

 옛 나바티안 상인들이 예멘의 항구를 통해 인도로부터 수입한 물건을 낙타로 전설의 도시 페트라로 운반 하였다. 이곳에서 지중해 건너 로마 제국으로, 페르시아 제국으로 운반되어 팔려 나갔다. 이 도시는 Wadi Musa (모세의 계곡) 에 형성된 좁은 협곡 시크(Siq) 를 통해 도시로 진입하는 길 이외에는 없다. 입구부터 100 m 높이의 이르는 붉은 사암이 1 km나 미로처럼 이어져 있다. 그로 인해 이 도시는 외침이 없이 번영을 누리었다.

a) 협곡의 길 (Siq) :  1 km의 이르는 협곡의 길을 말한다. 협곡 통로에 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흔적만 남아있다. 사람 어께 높이로 길옆 바위 위에 홈을 파서 물을 보내는 물 수로가 바위를 파서 연결되어 있다. 협곡의 높이는 20~30m 내외이다. 들어가는 곳에 100 m 정도로 왼쪽에 출구를 막아 댐으로 사용하고 바위의 검은 띠는 Rock Oil 로서 사암을 검게 보이게 한다. 바위 벽 위로 파인 곳은 신상을 모셨던 자리로 보인다. 좁은 도로를 들어가면서 무화과 나무가 한 그루 잘 자란 곳에서 뒤를 돌아보면 연인이 얼굴을 맞대고 있는 듯한 바위를 보게 된다.

 

                        (사진:  Siq- 협곡으로 들어가는 관문) 

 

 b) 카즈네 피라움( Khazneh Firawn-파라오의 보물): 이는 일설에는 나바티안 왕의 무덤과 신전이라는 주장도 있다. 이곳 시크 통로 유적지에서 가장 불가 사의한 건축물이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는다.

카즈네 피라움은 정면 2 , 넓이 28 m, 높이 40 m, 뒤의 붉은 바위 벽을 파서 만든 네모난 건축물로 가장 독창적인 고대 건축으로 평가 된다.

이 건축물은 나바티안족의 최 전성기인 아레타스 3(BC 84~56) 기간에 만들어 졌다.

아랫단은 6개의 주랑 현관으로 되었고, 윗 단은 위에 항아리 모양의 원추형의 지붕과 둥근 토로스(Tolos) 로 되었다.  양쪽으로 원형 기둥과 박공 지붕이 2개나 있다. 신상을 모시고 꽃으로 장식한 것으로 보아 장제(葬祭)기능을 하였던 곳으로 판단된다.

 

                 (사진: 세계 7 대 불가사의 중 하나- 카즈네 휘라움)

 

아래 기둥 사이에 말을 탄 기사, 저승사자 가 잇고, 포도덩굴이 좌우에 조각 되었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리스, 로마 시대의 조각이 더해지고 있다. 2 층의 중앙엔 원형 무덤이 있다. 앞면 맨 위 중앙에 석류모양이 조각되었고 중간층에 깔 떼기 모양, 양쪽에 독수리의 조각은 수호 동물로 보인다. 학명으로는 Al Kazneh 라고 부르며 보물 창고였다는 설도 있다.

바위 절벽을 깎아 만든 공간, 정면 중앙 큰방이 제사 방이고 2 층에는 왕의 무덤으로 사용된 흔적이 있다. 입구 밑 지하에 철망으로 덮은 공간은 지하 무덤으로 보인다.  이 일대에서 현재 발굴된 무덤만 80여 개로 보고 있다.

 c) 카스르 알 빈트 피라움(Qasr al Bint Firawn): 붉은 사암의 계곡을 따라 내려가면 피라 딸의 성 이라는 신전으로 이집트 나일 계곡의 신전과 흡사하다. 1~2세기 초에 건설한 것으로 주변에는 대소의 무덤흔적이 바위에 굴로 뚤어져 있다. 무덤 위 벽면에는 여러 가지 조각을 한 대형무덤이 줄지어 있다.

 

                       (사진:  신전으로 불리는 무덤)

 

 d) 야외 원형 극장: 더 내려가면 왼쪽으로 붉은 바위산을 통째로 파서 만든 반원형 경기장이 나와 놀라게 한다. 무대와 바위 벽을 둥글게 파서 원형으로 계단을 만든 극장으로 3000 명을 수용 할 수 있다. 세상을 놀라게 하는 발굴이었다.

 e) 궁전 무덤(Palace Tomb): 원형극장 건너편으로 오른쪽 바위군 전면에 파내려 간 궁전의 무덤으로 고린도 양식의 기둥이 조각되어 있다. 왕과 가족의 무덤으로 아래층에 관을 넣는 공간이 여럿 있고 위로는 18개의 고린도 식 열주가 늘어서 있다. 그 사이로는 납골 무덤으로 쓰던 돌을 판 공간이 있다.

 

                         (사진: 궁전 무덤 전경) 

 

 f) 납골 무덤(Urn Tomb): AD 70년 경에 Malichos 왕을 위해 만든 것으로 추측되며 발굴 당시에 높이와 깊이가 대단했다.  전면은 4개의 열주로 된 입구가 있다.

 

우리는 시크의 협곡을 따라 수 km의 바위를 파고 무덤 군을 조성한 나바티안 인들의 장례문화의 일단을 체계적으로 볼 수 있었다.

이제 다시 협곡을 걸어 올라 오면서 다시 한번 붉은 사암에 남겨진 그들의 선인들의 수세기에 걸친 섬세한 조각 무덤을 보고 후세에 대단한 유산을 남긴 것에 경의를 표하게 된다.

한동안 휴식을 하면서 출발 준비를 한다.

 17:10분이 되어 사막도로로 나와 암만 방향으로 달리니 카락성 65 km, 암만 120 km 지점에 이르니 고도계가 해발 888 m의 지점임을 알려 준다.

 어둠이 내리면서 암만 신내로 들어와 Al Fanar Palace 호텔에 들어와 늦은 식사를 한다.

요르단은 엄청난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으나, 기초 인프라를 좀더 갖추어야 한다. 화장실, 휴게실, 도로 등도 좀더 현대화 하여야 한다. 유적지에 대한 조그만 팜프렛 이라도 마련하여야 한다. 안내 센터와 유적에 대한 홍보, 해설판도 마련하는 것이 외국인에 대한 예우이다.  

          (사진: 국경 검문소 알랜비 근처를 흐르는 요단강)

 

 다음날 오전 일찍이 요르단 이스라엘 국경 검문소 알렌비로 이동한다. 비옥한 농지로 요르단 강이 보이는 곳을 지나 09:00 시경 요르단 측의 출국 승인을 받고 이번에는 이스라엘 측에 입국을 대기한다. 09:40Allenby Bridge Crossing Point 에서 대기한다. 이곳은 지면보다 낮은 곳으로 해저 300 m 지점이다. 예전에 바다였던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