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남미 여행기<2>
중남미 여행기
(잃어버린 문명을 찾아서)
계미년이 어수선하게 저물어가고 갑신년 새해가 밝아왔다.
금년에는 먼 곳부터 답사여행을 떠나기로 계획을 하고 그 첫 실천으로 중남미를 선정 하였다. 새해 벽두 1월 2일
이 튼 날 아침 08:30분에 L.A 공항에 착륙. 복잡한 수속을 시작, 양손 검지 손가락 지문 입력과 사진 촬영을 끝내니 어느덧 한시간이 지났다. 휴대품을 찾아가지고 트렌스퍼 지역으로 옮겨 가방을 열고, 검색대로 이관 시킨 후 106 Gate 로 이동.
날씨는 흐리고 비가 오는 가운데 공항 활주로 사이로 갈매기가 날아다니고, 음울한 날이다.
4시간 30분이 지나 13:00시경 Sao Paulo 행 Varig 8837 호로 옮겨 타고, 또 다시 10시간 비행 끝에 Sao Paulo 공항에 내리니 이곳은 한국의 반대편이라 한여름의 후끈한 열기가 다가왔다.
남미의 중심지 “ Sao Paulo”
호텔로 이동하여 우선 간단히 아침식사를 한 후 시내 관광에 나섰다.
제일 먼저 찾은 곳이 박물관이다. 역사가 일천한 관계로 주로 1800년대 이후의 사용되던 생활용구, 교통 수단, 총, 칼 등 일상 용품이 주로 전시 되었다. 1822년 독립 당시의 Portugal 왕의 황태자 Pedru 1세가 Brazil 의 독립을 포르투갈 점령 군에게 선언하는 장면을 그린 큰 폭의 그림이 가장 인상적이다. 전체적으로 정체성이 부족한 듯한 느낌이다. 여기서 간단히 Brazil 의 역사를 살펴보자.
(사진: Sao Paulo 박물관 전경)
브라질의 역사는 포르투갈의 개척의 역사이다. 1500년경에 포르투갈인 F. 카브랄이 발견하여 북동부에 식민지를 개척하면서 원주민을 추방하고 아프리카 노예를 들여와 사탕수수 재배가 시작됐다. 19세기에 Napoleon 이 포르투갈을 점령하자 이에 쫓겨 브라질로 건너온 페두루 1세가 1822년 독립을 선포한 것이다. 1888년에 노예제도를 폐지하고 커피 재배를 대량으로 하기시작. 1950년이 되어서 비로서 민주정부가 수립되었으나 혼란의 연속 이었다.
세계 산소량의 30%, 담수의 25%, 거대한 산림 자원 등 열대 밀림의 아마존이 자랑거리.
이 나라의 자랑은 국민 모두의 축구열정, 700개가 넘는 축구 팀, 1만 3천명의 등록선수, 커피와 정열의 삼바 축제가 브라질의 국력이다. 1억이 넘는 인구, 자원 부국에 세계 9위의 경제 대국이다. 원주민인 인디오는 소수민족으로 전락, 이제는 보호를 받는 신세가 되었다. 서구화된 남부지역에 유럽 풍의 생활양식이 넘치고 있다.
우리 교민은 60년대의 농업이민 108명이 최초로 왔으나 이제는 대도시로 나와, 원단, 봉제공장, 의류판매로 유통망을 장악하고 한인 사회를 따로 구축하여 살아가고 있다.
상파우로 대도시는 남미의 허브 도시이다.
박물관을 본 후 미술관으로 이동하였으나 휴관이어서 유감. 특이한 형태의 건축미를 감상하고, 길 건너 시민들의 휴식처인 “이비라 페라” 공원으로 이동하여 산책. 신년 연휴라 공원은 많은 사람으로 붐비고, 개를 동반한 노인세대, 조깅 족 등 다양한 사람들이 즐긴다.
공원 숲속은 대나무를 크게 키운 것이 멋이 있고, 노란 대나무 줄기가 하늘을 찌를 듯이 자라난 것도 장관이다. 일일 초 등 이곳의 꽃도 여러 가지가 피어나고, 나무가 환경에 따라 옆으로 가지가 휘어져 자란 모습도 특이하다.
(사진: “이비라 페라” 공원의 대나무 숲)
공원을 지나 독립기념탑 광장으로 이동, 박물관과 한 선상에서 넓은 곳에 자리잡아 시내를 내려다 볼 수 있었다.
시내로 들어가서 대성당에서 미사가 진행되는 것도 보고 성직자가 유난히 많은 것도 눈에 띤다. 시장 거리를 방문하니 아주 저렴한 쇼핑 거리이다. 의류, 신발 등 전문상가로 사람이 엄청나게 붐빈 다.
13:00시경 “청와장”이란 한인 식당에서 불고기, 김치찌개 등으로 식사. 주인은 이민 온지 33년 된 한인으로 이제 돈을 벌어 노년에는 귀국하여 살겠다고 한다. 식사 후 공항으로 이동, 이과수행 국내선을 타고 16:30분 출발. 화창한 날씨에 비행기는 “Iguasu”(이과수) 공항으로 오면서 낮게 비행, 주변의 녹지대는 끊임없이 전개되고 Iguasu 폭포를 공중에서 좌, 우로 보는 기회를 준 기장에게 감사할 뿐이다. 붉은 색의 흙탕 물이 떨어져 내리는 폭포를 바로 위에서 보는 것, 우측이 더 장관이다. 공중에서 이런 대 파노라마를 볼 수 있다니!
공항에 내리니 숨이 막힐 정도로 덥다. 주변 숲이 너무 정돈이 잘되어 가지런히 가꾸어진 농장을 방불케 한다. Hotel International 801 호에 여장을 풀고, 20:00시에 Brazil 식 식당에서 만찬. 여러 가지 고기를 긴 대에 꽂아 구워서 썰어주는 방식의 식사이다. 칵테일 바에 나가 데킬라 칵테일을 한잔 씩 하고 고단한 하루를 마감하였다.
대자연의 향연 “Iguasu” 폭포
1월4일(일). 이제부터 호텔 조식을 색다르게 한다. 주로 과일을 먼저 취하고 음료수를 더한다음, 한 두개의 빵으로 가볍게 한다.
오늘은 09:10분 에 출발하여 Iguasu Fall 의 브라질 편을 먼저 보기로 한다.
널따란 광장 입구에 도착하니 사람들로 붐 빈다. 티켙팅을 한 후 차를 타고 폭포 전망대로 다가갔다.
인디오 말로 “이구”는 눈 물, “아수”는 크다는 뜻으로 <거대한 물>이라는 의미다. 입구의 전망대에서 보는 이과수는 그 광대함에 단연 사람들을 압도한다. 폭포의 폭이 5 km, 최고 높이 100 m, 낙차에서 퍼지는 요란한 굉음이 천지를 진동한다. 그 외에 숨어진 폭포도 수 없이 많다. 275개의 이르는 폭포는 장관이다.
(사진: 브라질 쪽의 Iguasu 폭포의 전경)
관광로를 따라 들어 가면서 점점 천하의 절경으로 들어가는 듯하다. 왼쪽으로 숨어진 폭포가 들어 나면서 시야는 넓어지고 물은 점점 붉은 색으로 변해간다. “Cataratas Trail” 을 따라 2 km 를 걸어 가면서 오른쪽으로 폭포의 장관은 연속되어 마치 온 세상이 폭포 속으로 이어 지는 듯 하다. 오전 내내 걸어가면서 마침내 Argentine 쪽 폭포와 만나는 “Devil’s Throat”<악마의 목구멍>에 가까이 가니 이쪽보다 저쪽 아르젠틴 쪽의 관광객이 더 많은 것으로 보였다. 마지막 “악마의 목구멍” 골짜기를 바라 보면서 Brazil 쪽 “Gargenta do Diabo” 라는 전망대에 이른다. 끝까지 나아가니 물보라로 눈을 뜨기 어렵다. 절벽 아래로 무지개가 수 없이 생겨 자연의 신비함을 더해 준다.
새로 지은 왼쪽 언덕의 전망대 “Canas Port” 에 오르니 100여 m 아래의 폭포 하단이 내려다 보이면서 공포감을 더해 준다. 멀리 보는 전망대에서 폭포를 내려다 보니 이 또한 절경이다. Snack Bar 에서 Ice Cream 한 개씩을 들면서 폭포 관광을 마감한다.
레스토랑 야외에서 폭포의 상류를 바라보면서 멀리 Argentine 쪽의 관광객을 바라보며 부패로 점심 식사. 매년 70만 명 이상이 방문하는 <Iguasu> 폭포는 유역 면적은 1852.60 ㎢ 이고, 고도는 164 m , 1939년 1월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오후에는 “Macuco Safari” 코스를 가기 위해 다시 입장료를 지불한다. 모기와 해충에 물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오일을 노출 부위에 바르고 공원 내를 운행하는 < Electric Vehicles> 를 타고 숲길을 들어간다. 천혜의 자연 원시림이 그대로 보존된 곳이라 낮에도 하늘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숲이 짙고 깊다. 중간에 내려서 걸어서 1 km 를 이동하면서 소 폭포도 구경 하면서 Trail 을 따라가니 “Boat Tour” 장이 나타난다. 우리는 여기서 구명조끼와 우비를 갗춰 입고 신발을 벗고 맨발로 보트에 올라탔다. 20여명이 탈수 있는 보트로 우리는 흙탕물로 벌건 강의 상류를 지나 이과수 폭포로 향해 올라간다. 배가 흔들리고 출렁거릴 때마다 비명이 울려 퍼지나 요란한 물소리에 묻혀 버린다.
(사진: 보트를 타고 올라간 폭포 상류에서 이과수의 모습)
“악마의 목구멍” 밑까지 들어가면서 세찬 폭포 물을 맞으니 눈을 뜰 수가 없고 정신도 차라기 어려울 지경이다. 온몸이 물에 젖고 귀가 먹먹하다. 폭포로 다가가면서 거의 기절할 지경이다. 20여분 간의 Boat 접근을 한 후 제자리로 돌아오니 오후 3시경이다. 대충 물을 닥고 언덕에 오르니 태양이 너무 뜨겁고 하늘이 푸르고 날씨는 너무 쾌청하다. 잠시 쉬면서 <Electric Vehicles>를 가다리는 동안 우리는 모두 동심의 세계로 환상 여행을 한듯한 기분이다.
제자리로 되돌아 오면서 한번 더 차를 갈아타고 입구에 오니
다시 우리는 “Bird Park” 로 이동, 공원 입구에서 500 야드나 떨어진 곳으로 17 Hectar 에 넓은 “Forest Shelter” 에 150여 종류의 “Tropical Birds” 약 900여 마리가 살고 있는 곳이다.
(사진: 입 부리가 큰 새의 모습)
Trail 을 따라 가면서 각종 희귀 새, 특히 입 부리가 희한한 새들이 많고, 홍학의 무리는 너무 색갈이 붉어 인기 독점, 자라 등 물고기도 볼거리다. 한바퀴 돌아 30여종의 나비가 서식하는 “Butterfly House” 를 마지막으로 보면서 한시간이 넘는 <Bird Safari> 를 마감 하였다.
우리는 Golf 장과 좋은 환경이 갖춰진 I.C.R.I Resort 로 이동하여 421 호 실에 여장을 풀었다. 간단히 휴식 후 Brazil, Argentine, Paraguay 3국이 만나는 국경 지대를 방문. 세 나라 국경선에 강이 서로 합류하는 곳에 각국 땅 언덕에 기념비가 세워진 것이 강 건너로 보인다.
Brazil 쪽은 위가 녹색, 노란 색, 흰 색의 삼색으로 된 기념비가 세워 졌고 이는 국기의 색깔과 동일하다. Brazil 쪽 Parana 강 입구는 붉은색의 이과수 강 물이 흘러 내리나, 큰 강에 합류하니 금방 푸른색으로 변해 버린다.
1월 5일 (월). 오늘은 아침 09:00시 Argentine 쪽 폭포를 보기위해 국경검문소에 이르니, 검문 코스가 여러 개 있어 단체로 통과가 쉬웠다.
09:30분 조그만 궤도 열차가 출발하는 역에 도착, 한가한 시골 정거장이나 공기는 아주 깨끗하고 녹음이 짙다. 태양이 몹시 뜨겁게 내려 쪼인다. 역에 도착
안전하게 놓여진 다리를 계속해서 강을 건너니 멀리 물보라가 나타난다. 직선으로 건너가니 과연 넓은 강 바닥에 엄청난 양의 물이 “악마의 목구멍”으로 모이면서 회오리를 치며 함몰 되듯이 내려 쏟아진다. 진짜 거대한 소용돌이를 형성하며, 굉음을 내며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물줄기는 역으로 물이 솟아 오르는 듯이 보인다.
(사진: Argentine 쪽의 “Devil’s Throat” <악마의 목구멍> 의 전경)
물보라가 퍼지면서 옷이 다 젓고 얼굴에도 물기가 찬다. 어제 본 Brazil 쪽이 건너편에 보이고, 점심 식사한 식당이 강 건너로 보인다. 어제는 볼 수 없었던 광경이 이곳에선 연출 된다. 자연은 두 나라에 공평하게 관광자원을 나누어 주었다. 주변에 강바닥에서 자라난 나무가 있어 햇볕을 피할 수가 있었다. 12:00시경 기차역으로 되돌아와 2번의 궤도 열차를 타고 입구에 나오니 버스가 기다린다.
점심에는 구운 소고기, 양 고기 등을 주로 하고 과일을 먹는 코스다.
오후에는 세계 최대의 “Itaipu” 발전소 방문이다. Brazil 과 Paraguay 사이에 Parana 강에 축조된 것으로 2000년에는 93.4 Million M.W.H 를 생산, 세계 7대 기적의 하나다. “ Itaipu” 발전소는 Brazil 전기의 25%를 공급 한다.
총 발전량, 12.6 Million K W, 면적 1350 K㎡, 저수량 2.9 Billion ㎥, Length 170Km, 총 18기의 발전기가 가동 된다.
버스로 댐 위쪽에 오르니 끝없는 물의 세상이다.
최 남단 도시 “Calafate” 의 풍경
1월6일(화). 아침 06:30분 기상. 07:40분 출발. 08:30분 Patagonia 지역 Santa Crus 주 Calafate 공항으로 가기 위해 서둘러 Buenos Aires 공항으로 이동. 국내선을 타고 12:00시경 남쪽 지역인 Calafate 의 텅 빈 공항에 내리니 드넓은 땅에 비행장만 덩그라니 자리 잡았다. 주변은 얕은 민둥산이 보이고 앞은 멀리 Antes 산맥의 정상이 눈을 이고 끝없이 뻗어가고 있다. 하늘은 맑고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제법 선선한 곳이다. 시내로 향해 30여분을 달리니 길 옆에는 고산 식물, 구절초 꽃, 민들레 등 이 한창 피어 바람에 나부낀다.
(사진: Calafate 의 호수와 풍광)
13:00시경 부패 식당에서 점심식사. 구운 고기에 신선한 과일을 곁들인 식사는 풍부하다.
14:30분 소형차로 출발. 총 80 km 로 가는 길이 50 km 는 포장도로 이다. 끝없는 들판으로 길은 나있고 오른쪽에 대형 호수가 전개되는 그림 같은 풍경이다.
“ Argentine Lake” 로 길이가 20km, 폭 4 km 로 빙하 호수로 푸른색의 수면이 잔잔하다.
“페레토 모레노”로 가는 길은 이제 비포장 도로라 먼지가 일어 난다.
도시명 <Calafate> 는 고산에 자라는 나무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이다. 이 소 도시는 약 3천명의 주민이 살며 관광이 주 산업이다. 1,2층 짜리 호텔이나 음식점과 기념품 점이 전부이다.
현 Argentine 대통령 “Kichino”가 이곳 출신이라 작년에 겨우 이 길이 반쯤 포장 되었다고 한다. Santa Cruz 주는 한반도의 1.5배로 인구는 20만이다.
남극의 빙하 “페레토 모레노”의 비밀
우리차는 16:00시경 “페레토 모레노” 빙하 앞 호수 선착장에 도착. 멀리 빙하가 눈앞에 거대하게 전개된다. 이 빙산은 1927년 “페레토 모레노”라는 사람이 처음으로 발견하여 명명한 것이다. 빙산의 폭이 4 km, 길이 50 km의 만년 빙산이 거대한 빙벽을 형성하고, 호수로 계속 밀려내려 붕괴되어 떠 다닌다. 배를 타고 빙산에 가까이 가니 빙산의 모습도 다양하다.
갈라져 마치 상어의 입처럼 보이는 것, 뾰족 뾰족 Pinnacle 형이 대부분이다. 희다 못해 햇볕에 푸르게 보인다. 왼쪽 언덕으로 오르는 길에 빙하 Trail Course 가 보이고 관광 객이 빙하 위에 보인다.
(사진: 페레토 모레노 빙하의 전경)
17:30분 경 다시 차로 빙하에 가까이 접근하여 보니 빙하의 모습이 가관이다. 계속하여 굉음을 내고 붕괴하여 바다로 떨어진다. 이곳의 빙하는 대개 300만년으로 추산되어 지구의 먼지로 상당히 오염되어 있다. 검은 모습을 보니 청소라도 하여야 할 것 같다. 400여 m 아래로 향하는 트레일 코스로 가까이 접근하니 모양도 다양하다. 주변에는 들꽃이 한창 피어 계절이 여름임을 보여준다.
태초부터 형성된 빙하 관광을 마치고 20:00시경 시내로 들어와 소, 양고기를 통째로 훈제로 굽는 식당에서 와인을 곁들여 만찬을 한 후 20:00시경 “Bahia Hotel” 9호실에 휴식.
자연에 도취되어 하루를
1월 7일(수). Calafate 에서 2일째. 아침 09:30분 Estancia Alice 양 목장에 가는 날 이다.
양털을 깍는 요령, 방법, 양의 종류 등 설명은 자세하나 알아들을 수 없어 유감이다. 양털 1 kg 에 3$이나 지금은 털을 자르는 기간이 아니라 볼 수가 없다.
양의 방목지대로 나와 개 2마리가 양을 모는 광경을 보는 것도 관광거리다. 양 30여 마리가 이리저리 몰리는 것을 보니 순한 양이 측은 하기도 하다. 말을 타거나 Nature Trail 을 하거나 선택 관광지이다. 1~13 Trail Course 는 새가 주로 서식하고 있어 숲 지대 위는 새의 관찰지이다. 호수 가를 따라 멀리 1 Km 이상을 걸어 푸른 물의 호수 가를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설명을 들어가며 산책한다. 약 2.46 Km 로 왕복 2시간 정도 소요. 멀리 Andes 산맥의 흰 눈 덮인 산 군이 흰색으로 빛나고 뛰어난 경관을 자랑하며 각종 새의 서식지로서 환경이 갖추어져 있다.
12:20분 경 목장 식당에서 양 고기, 소고기 바비큐 위주로 식사를 마치고 다시 숙소로 와서 휴식. 오후 일정은 찝차로 앞산으로 차량 Trekking. 우리말고 또한 그룹과 합류하여 3대의 찝차가 산을 오르는 모험 코스. 여기도 주인이 있는 농장이라 울타리가 도처에 산재. 그때마다 열고 들어가 정상에 오르니 Calafate 시내가 한눈에 보이고 안테스 산맥의 장대한 산세와 멀리 피츠로이 산의 뾰족한 위용이 보인다.
(사진; Calafate 산악 트레킹시 정상의 모습)
바람이 심해 잠시 후 이동. 40도의 경사진 비탈로 내려오는 코스는 전율의 극치다. 차가 제대로 정비 되었는지 불안하다. 무사히 내려와서 건너편 바위지대에 올라 이상하게 생긴 왕모래의 규암으로 구성된 바위지대를 살피었다. 이곳에서 잠시 머물다가 코스를 달리하여 하산하면서, 철분이 섞여, 바위색갈이 둥글게 이상한 색을 가진 모자형태로 보이는 지대에 도착. Tea Time 을 가지며 휴식. 암석 연구가라면 채취하여 연구할 흥미로운 곳이다. 이 바위의 구멍 속에 새가 알을 품고 있는 것을 발견, 카메라에 담는 잔인한 인간의 모습을 보이다니? 산을 내려와서 피자로 간단히 저녁을 대신한 후 공항으로 서둘러 출발.
남미의 아름다운 항구 “Buenos Aires” 와 “Eva Peron”
20:30분 출발. 12:00시경 Buenos Aires 공항 착. Abasta Hotel 408 호에 휴식.
1월 8일 (목).Buenos Aires 공항은 착륙하기 전 휘황한 야경이 제일이다.
바둑판식의 가로에 전등을 밝혀 놓은 것이 질서 정연하고 구획이 분명하여 공중에서 내려다보는 경치는 정말 남미의 파리로서 불려도 손색이 없다. Patagonia 지방으로 가기 전에 투숙하였던 방이라 편안한 심정이다.
이제 Argentine 의 역사를 한번 살펴보자. 이곳은 16세기 이후 스페인 침략으로 도시가 형성 되었다. 17세기 부 터 식민지 수탈을 본격화한 스페인은 Buenos Aires 를 수탈을 위한 무역항으로 발전 시켰다.
나폴레옹에 의해 본국 정부가 정복 되면서 이곳에서 1810년 본국 정부와의 독립을 선포하면서 비로소 Argentina 의 통일 정부가 성립. 그 후 정쟁과 내란을 되풀이 하면서 이웃 파라과이와의 전쟁도 겪으면서 궁지에 몰리었다. 19세기 말부터 유럽 이민이 활발해지고 근대화가 진행 되었다.
1946년 “페론”이 대통령이 되면서 사회주의 노선에 기울어 지면서 독재 체제를 구축하였다.
그 후 군부 쿠테타로 실각 후 계속 정정이 불안하여 발전을 저해 하였다. 1973년 페론이 다시 대통령에 복귀하고 그의 부인 “이사벨 페론”이 부통령이라는 희한한 체제가 탄생 되었으며 페론이 사망하자 세계 최초로 여성 대통령이 탄생하는 국가가 되었다. 그 후 계속 군부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다시 민정이 들어 서기를 반복하면서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고 경제적으로 위기를 맞이한 대표적인 나라이다.
(사진: Peron 이 대통령시절 연설 하였던 대통령 궁의 테라스 전경)
에바 페론 (1919-1952) 그녀는 누구인가? 그녀는 팜파스의 농장에서 주인과 요리사였던 어머니 사이에 사생아로 태어 났다. 빼어난 미모로 수도에 진출하여 24세의 나이로 그 당시 후안 페론에 눈에 띠어 그와의 동거 생활을 하며 야심을 키운 희대의 여장부이다. 그녀는 노동자, 빈민, 여성들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힘을 써 일약 스타로 부상 하였다. “후안 페론”이 죽을 때의 그녀의 나이는 34세였다. 일명 “에비타”라고 불려진 그녀는 “거룩한 악녀이자 천한 성녀”로 영화의 주인공이기도 하였다. 오늘날에도 정치적, 경제적 혼란도 뿌리가 깊은 것이다.
그들의 문화를 말할 때는 “사랑과 갈망, 상실의 춤인 탱고”를 빼 놀 수 없다. “보카”의 지저분한 항구 도시에서 발상한 탱고 춤, 해마다 2월 중순이면 탱고 축제가 열려 아메리카의 꿈을 실현하려는 이주민들의 후예의 사랑과 슬픔이 재현되고 이제는 세계적인 관광 상품이 되었다.
오늘은
(사진: Eva Peron 의 묘소 전경)
검은 오석 돌과 대리석으로 장식한 조각품이 초 호화판으로 묘지를 장식하고 있다. 관을 그대로 돌로 된 집에 안치한 것이 유리창을 통해 밖에서도 볼 수 있고, 유품도 그대로 함께 있어 죽은 자와 산자의 구별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각종 도판으로 된 명패가 묘지마다 장식품으로 부착되어 있다. 생화를 비롯한 조화도 대리석 묘지를 더욱 호화롭게 장식하고 있다.
세기의 여걸인 “Eva Peron” 의 묘지도 이곳의 한 골목에 설치되어 빼놓을 수 없는 관광거리 이다. 묘지 공원도 이렇게 도심 한복판에 설치되어 관광객의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도 문화의 한 부분이다. 죽었다가 환생한 슬픈 소녀의 조각상이 석물로 장식된 묘지도 있어 그에 얽힌 애환을 들으니 심금을 울린다. 거리에는 고양이가 득실대고 좁은 골목마다 사람이 넘친다.
길거리에는 방탄조끼를 입은 경찰관이 순시를 하고, 총기를 자유로 소지하는 나라의 치안 상태가 두렵다.
도심으로 나와 7월 9일 대로를 달려본다. 폭이 140 m 이고 왕복 10차선에다 중앙에 공원이 있어 그야말로 아주 시원한 대로 임을 자랑하고 과연 <남미의 파리> 인양 아름답다.
세 번째로 방문한곳이 “Cathedral Metropolitan” 으로 입구 우측에 꺼지지 않는 성화가 타오른다. 내부로 들어가니 초 호화판 성당으로 그 규모가 엄청나고 조각품도 대단하다. 독립 영웅 “ Saints Martin” 장군의 석상이 오른쪽에 서있어 참배 객이 줄을 잇는다.
시내를 오가면서 “오벨리스크”가 높이 솟아 있어 어디서나 눈에 띤다. 이 거리는 “5월대로”라 명명되어 세계적인 자랑거리다. 대통령 궁의 화려한 색상도 그대로 유지되고 “Peron” 부부가 연설하면서 등장하였던 테라스도 관광 상품이다.
대부분의 도로가 일방 통행이고, 지하철도 100년이 넘어서 남미에서는 최고로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국회 의사당,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의 동상도 명물이다.
Tango 의 발상지인 “보카지구”에 이르니 관광객이 초만원이다. 원색으로 채색된 낡은 집이 줄지어 있는 거리도 구경거리, 이렇게 탱고는 서민들의 애환서린 춤임을 보여준다. 그 앞에 Tango 춤을 남, 여 가 관광객과 더불어 추는 것도 1$ 로 누구나 원주민 무희나 춤 신사와의 연기도 펼칠 수 있다. 골목마다 넘치는 인파, Tango 춤의 그림도 끝없이 전시되었고 기념품도, 노점상도 거리를 메우고 있다.
(사진: 보카 지구에서의 Tango 시범)
이곳에서 삼바 춤을 놓칠 수 없다. 우리는
아름다운 항구 도시 Rio de Janeiro
1월9일(금).어제 Rio de Janeiro (1월의 강 의미) 로 올 때 Sao Paulo 를 출발한지 20분 후에 갑작스럽게 비행기가 2 m 이상을 급강하하는 바람에 모두 놀라 그 후휴증이 오늘도 계속된다. 오늘은 08:30분 호텔을 출발. 해발 710 m 의 코르코바 언덕 암산 위에 서있는 “예수상”의 방문이다.
두 팔을 벌리고 Rio de Janeiro 과네바라 만을 향해 굽어보고 있는 1145 ton 이 넘는 예수상은 정말 이 아름다운 미항의 상징이다. 예수상 아래에서 대서양을 바라보는 조망은 이 도시가 세계 3대 미항 중 으뜸이라는 생각에 손색이 없다. 점점히 떠있는 섬과 건너편 슈가 로어프 산, 좌측으로 13.9 km 의 릿데로이 Bridge 의 전경 등 어느쪽을 보아도 뛰어난 경치이다.
(사진: Corcovado 언덕에 세워진 예수상 전경)
이 만의 건너편에는 대서양으로 연결된 1.8 km의 바다로 면한 곳으로 바닷물이 유입된다. 그러나 여기서 내려다본 이 항구는 망망대해에 둘러 쌓인 요새처럼 보인다. 오르고 내려오는 데에는 궤도열차가 운행되어 편하게 누구나 즐길 수 있어서 좋았다.
점심 식사로 Tourmo 식당에서, 일식 회, 고기 등 상당히 질 높은 식사를 즐기면서 아프리카산 “아마룰라” 750 ml 한 병을 62$에 제공하였다. 오후에는 입빠나바 해안을 산책, 대서양의 파도치는 나른한 오후 한시간을 산책. 파도타기와 썬 탠 족의 아가씨를 보는 즐거움도 괜 찮다. 큼직한 야자열매의 즙을 스트로크로 마시는 여유도 가지며 휴식을 가졌다.
다음은 “마라까낭” 축구 경기장을 방문하는 순서이다. 이 경기장은
축구선수의 발자국이 바닥에 조각된 입구에서는 수 많은 선수 중에 “Pele” 의 발자국이 단연인기. 실내에 있는 조각작품은 조각 대전에서 최 우수작 수상작인 “승자의 기쁨, 패자의 눈물”이라는 작품은 자그마하나 그 표정, 기법 등은 대단한 걸작이다.
(사진: Maracana 축구장 입구에 새겨진 축구 황제 Pele 의 발자국)
다음에 방문할 곳은 삼바 축제 장, 금년은 2월 20일 시작이라 지금 축제 시설이 한창 공사중이다. 800 m 에 이르는 축제의 거리는 관람석이 계단식으로 되어있고 축제 팀이 그 앞으로 행진하게 되어있다. 40$~500$ 의 입장료이나 벌써 마감 되었다 한다.
다음에 찾은 곳은 “까페드로” 성당. 성당은 높이 92 m, 둘레 314 m, 의 원추형 건물로 그 옆 탑과 더불어 명물, 내부는 엄숙한 분위기이고 미사가 진행 중이다.
오후 늦게 슈가로푸 산으로 관광차 간다. 2단계로 케이불 카가 설치되어 있어 일단계 바위봉에 오르니 시내와 대서양의 풍광이 발아래 전개되어 감탄을 자아낸다. 커피 한잔식 하면서 안개가 자욱하고 어느새 비가오니 유감. 너무나 절경이 마치 중국 계림의 산수 경치를 방불케 한다. 비가 와서 일찍 하산해서 일식 집에서 고급 초밥과 더불어 칵테일 한잔식으로 분위기 띠우고 하루를 마감. Rio de Janeiro 의 아름다운 도시, 꼬빠까바나 해변 등 정말 신들이 창조했다면 너무나 불공평한 세상이다.
1월10일(토). 오늘은 새벽 04:00시에 기상하여 호텔 로비에서 차 한잔 씩하고, 05:00시에 출발, 08:00시에 Sao Paulo 행 비행기에 올라 50분만에 도착 후 기내에서 한시간 이상을 기다린 후
안테스 고원의 옛 도시 “Rima”
11:30분 Rima 공항에 도착, 나오니 12:30분.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니 도시 전체에 짓다 만 집이 너무 많다. 경제 사정으로 연차적으로 집을 짓는다니? 벽에는 낙서가 어느 곳 보다 지저분하고 미관상 너무 좋치 않다. 시내로 들어 오면서 구 시가지를 지나니 너무 허전하다.
Saints Marco 대학이 국립대학으로서
태평양이 바라보이는 해안도로를 따라가니 시원한 바다 바람이 불어오고 비키니 차림의 파도타기 하는 사람이 많다.
중국식 점심 식사 후 해안공원 <미라 플로레스>에 이르니 토요일 오후를 즐기는 사람으로 공원은 만원. 가운데 두 연인이 끌어안고 사랑하는 모습의 조각상이 바다로 향한 곳에 있어, 젊은이의 우상으로서 돋보인다. 신혼 부부의 촬영 장소로도 사용된다.
다음은 이 나라의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는 <황금 박물관> 관광 코스.
고대부터 장식품, 귀고리, 쪽 집게, 목걸이 등 장신구가 주종을 이루고, 모두 금,은으로 주조된 것이다. 금이 흔한 곳이다. 갑옷, 투구 등도 금으로 된 것도 볼거리다. 방대한 양의 전시품을 너무 조밀하게 전시하여 오히려 가치를 손상시키는 것 같다.
이 박물관에서의 앞 권은 미라 전시관이다. 한국에서 ‘82년에 “잉카문명 전시전” 에서 본 것 들이다. 전시관 1 층에는 각종 총기류, 칼 등 너무 다양하고, 종류도 너무 많다. 좀더 짜임새 있게 전시 하였으면 좋았을 텐데? 이 모든 것이 개인이 수집하여 기증한 것이라니.
한시간 30분 정도를 관람하니
(사진: Rima 시내의 왕궁 전경)
대통령 궁, 시청, 대성당이 다 광장을 중심으로 좌우에 있다. 여기서도 여섯시 정각에 근위병 교대식을 한다. 대성당은
광장의 사람들이 대체로 지저분하고 무질서 하다.
12:00시경 Melia Rima Hotel 616호실에 들어가고, 내일은 새벽 03:30분에 기상이다.
페루는 어떠한 나라인가?
페루는 B.C 2,000년 전부터 안테스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원시사회를 형성, B.C 15 C~A.D 1 C 에 이르러 차빈 문화를, 이후 1 C~14 C 까지 지역별로 나스카 문화, 치무문화, 와리문화 등을 발전시켜 남미 최고의 문화를 자랑한다. 이러한 지역 문화를 통일한 것이 바로 잉카제국이다. 12 C 부터 쿠스코를 중심으로 문화를 형성했던 이 인디오 들은 태양의 아들이라는 “망고 카파크”라는 지도자를 중심으로 “잉카제국”을 건설 하였다. 잉카제국은 16세기 초기까지 안테스를 중심으로 현재의 에쿠아돌, 볼리비아, 콜롬비아, 아르헨티나, 칠레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에 잉카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이러한 잉카 제국은 내부 다툼으로 약화되어, 1532년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피사로”에 정복당해 잉카 제국은 멸망하게 된다. 그 후 300여년간 인디오 말살 정책으로 수난의 역사가 시작 되었다. 그들은 쿠스코에 아르마스의 왕궁을 헐어버리고 그 자리에 광장을 세우고 교회를 세웠다.
(사진: 아르마스 왕궁 터에 세워진 Cusco 의 옛 성당 전경)
그 후 아르헨티나의 “산 마르틴” 장군이 Rima 를 해방시켰으나 그리 오래가지 못하였다. 그후 1800년대의 혼란기를 겪고 칠레와의 전쟁으로 남쪽 지방을 빼앗기고 20세기에 들어와서도 독재와 구테타로 점철되어 왔다. 1980년대에 들어와 민주정치의 기틀이 마련되었으나 혼란의 연속, 1990년 7월 선거에서 일본 이민계인 일본인 “후지모리”가 집권하여 경제적인 안정을 누리는 듯 하였으나 부정 부패에 휘말려 2000년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현재는 원주민 출신의 “톨레도”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나라를 이끌고 있다.
이 나라는 면적이 130만 ㎢, 인구 2천700백만, 수도 Rima 는 1200백만이며, 가난한 사람이 수도로 몰려와 주변 언덕에 판자 집을 짓고 산다. 전기도 물도 없이, 시내에도 집을 짓다 만 것이 도로변에 즐비하다. Rima 시내에는 한국산 대우 자동차 “Tico” 가 3만 여대나 영업용으로 굴러 다닌다.
낙서는 왜 그리 많은지 어지럽다. 치안이 불안하여 어제 한국 교민 한 분이 은행에서 돈을 찾아가지고 나오다가 피습 살해 되었다 한다. 애석한 일이다.
1월 11일(일). 쿠스코로 가는 비행기를 타기위해 04:30분 호텔을 나와 공항에 오니 그때서야 해가 떠오른다. “호르게차베” 공항에서 ‘Peru Tans’ 항공 231 편을 타기위해 서둘렀다.
비행기에 올라 09:00시경 이륙하여 한시간 비행 거리 인데, 상공에서 안테스 산맥의 산 군이 구름위로 솟아있고, 또 멀리 높은 산들은 눈으로 덮여 환상적이 경치를 보여 주었다.
Inca 제국의 고대도시 “ Cusco”
Cusco 공항에 내려오니 2800 m 고원 지대의 분지에 꽤 큰 도시가 형성 되어있다. 주변에 산에는 나무가 하나도 없고, 푸른 밭이 높은 곳까지 일궈져 있어 경작되고 있다.
‘Zu 2115 Bus’ 편으로 공항을 출발. 쿠스코 대성당에 이르니 일요일이라 예배 준비 중이어서 들어갈 수가 없다. 외부에서 보니 기단이 석조로 정교하게 축조된 위에 성당 건물이 들어서고 그 아래로는 수로가 연결되어 있다.
이 골목을 지나 “아르마스” 광장에 08:00시에 도착. 이곳은 잉카 제국의 1~13대 왕의 왕궁이 있던 자리에 스페인 정복자들이 15 C 에 헐고 광장을 조성한 곳이다. 정면에는 대성당이 웅장하게 자리잡고, 일요일이라 참배 객이 줄지어 오고 있다. 쿠스코란 ‘미친개’라는 의미의 도시를 생각하며 광장 한가운데 서있는 8대왕 “파차쿠카”의 동상을 둘러 보았다. 이 광장에는 카페, 선물가게, 레스또랑이 주위에 들어서 있다. 옛날 구식 건물에, 그대로의 거리, 길바닥에는 돌이 가지런히 깔려 있어 이곳이 그 옛날 구 시가지임을 나타내 주고 있다.
(사진: “삭사이만”의 성채 유적)
이 도시의 광장을 떠나 다음은 이 도시 외곽에 자리잡은 “삭사이만” 성채를 방문하는 것, 도시에서 벗어난 언덕에 1100 m 에 이르는 성벽을 쌓았다. 구조가 지그재그로 4분의 1정도 남아있고, 300 Ton 이 넘는 돌이 성채를 쌓는데 동원되었는데 그 당시 이런 무거운 것을 어떻게 이동 하였을까? 돌을 잘 다듬어 꼭 맞게 빈틈없이 쌓아올려 종이장도 들어 갈 수 없을 정도이다.
정말 너무 완벽하게 맞추어 쌓은 기술이 놀랍다. 이곳에서 쿠스코 시내를 내려다보니 집의 붉은 지붕이 붙어 있는 모습이다. 지진을 피하기 위해 다닥 다닥 부처서 지었단다. 산정에는 물 저장소가 있는데 건너 편 언덕 위에서 물을 끌어 왔다는데 이 고산 지대에 물이 있다니 이해가 안 된다.
다음에는 미로 유적지 방문. 이런 돌로 쌓은 미로에 미이라를 안치했다는 곳도 있고. “푸카푸카라”라는 성벽은 붉은 돌로 기단이 처져 있고, 옛날 검문소로 사용되었던 곳으로 추정. 마지막으로 “담보마차이”라는 물의 신전 방문. 해발 3700 m 에 위치한 곳으로 제사를 지내기 전 왕의 목욕소 인데 이 높은 곳에 서도 물의 량이 상당한데 두 줄기가 계속 떨어져 나온다. 주변을 돌로 둘러 막아 성처럼 보이는데 경계병이 서는 곳이 또 돌로 세워 져 있다. 거의 정상인데 물의 근원이 어디인지, 규명이 안 된다니 신비스런 샘터이다.
(사진: “담보마차이”의 물의 신전 전경)
오전 관광을 마치고 시내로 내려와 “우르밤바” Inca Land Hotel 에 오니 12:20분. 201호에서 오늘 아침 너무 일찍 일어난 관계로 휴식을 취했다.
잠시 휴식 후 자유롭게 우르밤바 시내로 나아갔다. 흙으로 지은 집이 전부인 시내를 도로를 따라 산책. 시장거리, 시청, 방송국이 있는 중앙 광장까지 걸어서 다니기도. 자전거 삼륜차가 택시로 사용되는 거리 풍경, 집집마다 지전분 하게 보이며 문을 연 곳에선 이곳 특유의 냄새가 나서 문제다. 수퍼 마켙에서 전통차도 구입하여 보고, 광장에 앉아 이들의 일요일 오후를 살펴보기도 하였다. 모든 생활이 우리나라의 50년대 중반을 연상 시킨다.
영원한 수수께끼 잉카 유적의 현장
1월 12일(월). 오늘은 “Machupicchu” 에 오르는 날이다.
08:30분 Estacion 에서 기차 승차. 09:45분 출발하여 마추피추 역에 10:20분 도착. 여기서 부터는 버스로 산으로 오르는데 10여 번을 굽이 굽이 돌아 위험하기는 하나 이 구간만을 운행하는 수단이라 안전할 것 같다. 힘겹게 굽이 돌아 산을 오르니 마침내 마추피추 봉이 멀리 나타났다.
출발 시에 비가 오던 것이 점차 산으로 오르면서 개이기 시작, 구름이 산 봉우리에 걸려 있어
입구에 이르니 11:20분. 성인 20$, 학생 $10 로 입장료가 비싼 편. 폭양이 내려 쪼여 뜨거운 날이 되었다. 일주일 내내 비가오던 날이 개였다고 즐거운 표정들이다.
이 마추피추 고원 산간 도시는 표고 2400 m 에 세워진 천혜의 요새이다. 아무리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앞세운 피사로의 군인들 일지라도 그 당시엔 접근할 수 없었으리라. 기묘한 산세에 둘러 쌓인 고원 산간은 한 마을을 형성 하기에 알맞은 조건을 갖추었다.
(사진: 잉카제국의 요새에서)
잉카인들이 이곳에 침략자를 피해서 였는지, 또는 무슨 이유로 이런 산간에 가옥을 짓고, 궁전과 신전을 갖추고, 그들만의 세계를 구축하였는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미국인 Biram Bingham 이 1911년에 이곳을 발견하였을 때는 이 도시가 완전히 나무와 숲에 묻히어 형체를 알아 볼 수가 없었으나, 이곳을 탐사하면서 숲을 제거하고 붕괴된 부분을 복원하면서 현재의 모습을 갖춰간 것이다.
이곳은 돌이 풍부한 곳이라 돌을 적당한 크기로 잘라 벽을 쌓고 그 위에 지붕을 이은 것으로 확인 되었다. 그리고 물을 해결하기 위해 산 곳곳에 양수 장과 수로를 만들고, 물은 주로 건너편 산으로 부터 공급 받는 것으로 되어있는데 2000 m 이상의 이런 고지대에 물이 풍부했다는 사실에 놀라울 뿐이다.
경사가 45도 내외인 곳이라 계단식 밭을 위하여 돌로 밑을 쌓아올린 것은 정말 경이적인 일이다. 이들은 이곳에서 자급 자족을 하고 신에게 제사 올리고, 그들만의 생활을 영위 하였으리라. 2시간 30분에 걸친 트레일을 돌며 자세히 살피니 옛날 잉카인들의 세계에 몰입하게 되었다. 마지막 “Wayna Machupicchu” 봉은 왕복 한시간 반이 걸려 일행과의 균형을 위해 그 밑에서 오르기를 포기 하였다.
주거 지역으로 접어 들면서 제법 큰 형태의 가옥을 지은 것으로 보아 상당한 사람들이 거주 하였으리라 추측된다. 그러나 1300명에서 1만 명이라는 숫자는 믿기가 어려웠다.
(사진: 마추피추의 주거 유적)
이 높은 곳에서의 생활은 자급자족 이외에는 생존수단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계단식 경작 밭의 면적과 연계해보고, 또 물의 공급량과 상관 관계가 중요한 것이다.
아무튼 이곳에 살았던 잉카인들은 도대체 그 후 흔적을 남기지 않고 어디로 증발 하였단 말인가? 문자가 없어 기록이 된 것이 없으며, 후세의 연구가들의 추론적인 연구 밖에 없어 현재의 신전 터, 궁전 터, 주거 시설 등의 용도를 알 수 없어 아쉽다. 제단에서 하늘, 현세, 지하신 을 위해 제사할 때 야마를 묶어 놓았다는 바위, 신전 입구 문, 문을 차단하는 장치를 한 고리의 흔적. 태양 신전이라는 곳에는 제물을 바치는 제단이 있고 가장 중심에 세워져 있다.
울림의 방은 5명이 돌이 들어간 곳에 서서 소리를 내면 메아리가 친다. 그 외 해시계라는 돌의 모습은 정확히 오늘날의 나침반을 놓고 측정하여도 정북의 방향으로 설정되어 하지와 동지를 해의 그림자로 판단 할 수 있게 하였다.
군데 군데 지붕을 복원하여 놓은 모습이 오히려 이 고원 마을에 어울린다.
14:00시경 답사를 마치고 입구의 식당에서 부패로 식사 후 버스로 하산. 기차 역에 와서 16:00시에 기차로 출발하여 Inca Land Hotel 에 돌아오니 18:00시경. 이제 “우르밤바”를 떠나 “쿠스코”로 가기 위해 3000 m 가 넘는 산길을 2시간 이상을 달려야 한다. 이곳은 다시 비가 오고, 산으로 오르니 우르밤바 시의 가로 등이 제법 질서 있게 보였다.
Cusco 시내 식당에서 오후 늦게 식사를 하면서 이곳의 민속 춤울 30여분간 관람하고 늦게 Cusco Hotel 216호 실에 투숙. 위의 포만감으로 인해 이곳 특유의 요리를 시식하지도 못한 채 점심과 저녁을 먹지 않은 상태로 취침. 고대도시의 야경은 볼만한데 유감이다.
1월 13일(화). 오늘은 Cusco 를 떠나 Rima 로 가기 위해
(사진: 원주민이 제공한 사진)
다른 것은 Cusco 의 유적을 좌, 우에 3 곳씩, 여섯 곳의 사진을 배치하고 가운데 각자의 스넵 사진을 넣은 것이다. 참 놀라운 상술이다. 우리 일행은 모두 그 노고에 놀라 한 장 당 1$씩 을 지불하고 원하는 것만 구입 했다. 그러나 잠시 후 공안 단속원에 걸려 불법 영업이라고 단속이 되니 너무 안타깝다. 어디나 서민들의 생은 이렇게 어려운 것인가?
그러나 더 가관은 그렇게 일찍 나왔는데도 비행기는 연발이 되어 11:00시경에 뜬다니 후진국의 현상일까? 지방 공항의 흔한 일인가? 한시간 거리의 비행기를 타기위해 8시간 이나 걸리다니 이래서야 어떻게 관광 사업을 할까? 참 한심한 사태이다.
12:00시경 Rima 공항에 내리니 열대의 열기가 확 다가온다. 공항을 나오니 이번에는 두둑한 모습의 한국인 가이드
그저께 왔던 대로 태평양 연안을 향해 달리니 벌써 2번째로 오는 길이다. 해변을 지나면서 안개가 자욱하여 분간하기가 어려운 것도 2일 전이나 마찬가지다.
사막의 유적지와 Ica 박물관에서
시간이 너무 늦어 13:00시경 점심도 거르고 15분 만에 “Pachacamac” (창조 라는 의미) 사막 유적지에 이른다. 시내에서 이렇게 가깝고 태평양이 바로 아래로 바라다 보이는 곳에 모래 언덕이 수백만 평이나 존재 한다니 참으로 신비스럽다.
이곳에 태양신을 섬기던 인디오 조상들의 신전이 축조된 유적지가 있다. 진흙으로 구워 만든 벽돌로 기단을 쌓아 올리고 밑 단에는 벽화를 그린 흔적이 남아있다.
“Sun Temple” (태양의 신전) 은 1440~1533년 대에 축조된 것으로 그 당시 인디오 들이 농사가 잘 될 때엔 바다를 향해 제물을 바친 다는 전래 습관이 이 제단에서 행해지던 곳이라 한다.
(사진: 모래사막의 유적지)
1500년 경의 중부 Andean Area 의 유적으로 아주 광대한 모래 언덕 위에 Temple 이다.
주거 형태의 기초 기단, 묘지 등이 산재해 있다. 이런 곳이 시내에서 얼마 떨어져 있지 않고 바다에 면해있어 잘 개발하면 좋은 유적 관광지가 될 것이다. 이런 것이 남아 있는 것은 건조한 기후에다 비가 안 오기 때문이다.
홍보물, 입장권, 안내문 하나 없이 콘세트 가 건물에 고작 모형도가 전부이니 외국인 관광객에겐 애로 사항이다.
시간에 쫒기어 점심도 김 밥 도시락으로 버스 안에서 해결하고, 14:00시경 사막 유적지 입구에 나와 빈약한 홍보관을 보니 더욱 아쉬움이 남는다.
14:30분 경 이 곳을 나와 고속 도로에 진입하여 끝없는 황무지 벌판을 달린다. 태평양을 오른쪽으로 보면서 펼처지는 황무지는 풀 한 포기, 나무 한그루 없는 그야말로 불모지의 연속이며 그 사이로 4차선의 고속도로는 달린다. 도로변의 조그만 모양의 혼을 모신 곳이 유난히 자주 눈에 띤다.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의 영혼을 가능하면 그 자리에 모신다는 관습에서 나온 것이라 한다. 차창 밖으로 가끔씩 마을이 나타나고 닭을 키우는 농장이 보이기도 한다.
끝없는 허허 벌판이다. 3시간을 달려 18:00시 가까워서 “Ica” 박물괸에 도착하였다. 너무 멀고 시간이 촉박하여 박물관 직원의 퇴근 시간을 지연시키면서 이곳의 문명을 살펴본다. 이곳도 지역 박물관이라 입장권, 홍보물도 없으니 참 어렵다.
기원전 2000년 경에 Paracas 문명 시대의 유물관.
미이라를 만들 때 감싸는 천이 Cotton 으로 화려하게 수놓은 천으로 여러 번 감싸서 매장하면 수분이 없고 건조하여 미이라가 된다고 한다. 천의 색상이 화려하다.
다음은 Nasca 시대 유물. 기원전 200년에서 부터 서기 600년대 까지로, 이때는 토기에 그림을 넣어 제작 하고, 비가 안 와서 수로를 만들어 물을 끌어다 쓴 방법 등이 전시 되었고, 작물 보관 항아리도 거죽에 채색 문양이 그려져 있다.
이곳에는 평생 나스카 문화를 발굴, 연구한 독일인 Maria, R G Newmann (1903-98)의 사진이 걸려 있다. 그녀는 고등학교만 나온 독신 여성으로 전 생에를 Nasca 문화를 연구한 유일한 여성이다. 그 외에 사막의 그림인, 새, 원숭이, 불새 등 12개의 그림이 사진으로 전시 되 어 있다.
Wari 문화 (100~600 A D), Chincha 문화 (1000~1450 A D), Inca 문화(1450~1535년) 의 연대별로 문화 유물이 전시되어 있으나 시간에 쫓기어 유감이다.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Homias 미라> 로서 몸 전채가 가장 완벽하게 남은 미이라다.
이외에 수많은 두개골 미이라가 전시되어 이들의 사후 미이라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있었다. 해가 넘어갈 무렵이 되어 버스를 <와카치나> 호수의 언덕 모래 산 밑에 주차 시키고 모래 산에 해질 무렵에 오르니 이 또한 장관이다. 고운 모래가 산을 이루어 이곳에 올라 일몰 광경을 보는 것도 운치가 있으나 언덕위로 오르기 전 해가 지고 있어 낭패다.
(사진: Mossone Hotel 뒤에 모래 산의 전경)
너무나 고운 모래, 오염이 안된 모래 산을 밟으며 산 중턱에 오르니 어느덧 해는 서산으로 넘어간다. 능선에서 휴식을 하다가 내려와서 오아시스 마을에 있는 “Mossone Hotel” 107호에 들어와, 늦은 식사 후 오아시스 주변 산책을 어둠 속에 나서서 한바퀴 돌아왔다. 이런 모래 산 밑에도 평화로운 마을이 있다니 오늘 밤은 좋은 꿈을 꿀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1월 14일(수). 오늘은 새벽 05:00시에 기상. 날이 밝으면서 모래 산의 모습이 문밖으로 보이고 호텔 정원의 큰 나무로 시원한 느낌이 든다.
천연 생태계의 보고 “Ballestas Isles” 일주
Paragas 의 모래 유적과 바다 생태계를 보러 “Ballestas Isles”(바예스타 섬) 로 향하는 모우터 보우트에 17명이 탑승. 30여분을 태평양 바다로 나가니 왼쪽 섬 언덕위로 “촛대바위”의 모습이 나타났다.
폭 57 m, 길이 140 m 로 전부 모래 표면에 새겨진 모습이다. 모래의 철 성분으로 검은 색이 난다. 비가 내라지 않고, 바람도 없어 모래 위에 새겨 놓은 것이 변하지 않았다. 연간 강우량이 2 mm 정도라니? 이것은 아마 옛날 해적들이 표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 같다.
다음은 배를 돌려 바예스타 섬으로 향하니 섬이 빙 둘러 있고, 바위가 뚤 린 하늘 문이 여러 곳에 형성되어 있다.
물개, 바다사자, 펭귄, 바다 갈매기, 페리건 등의 천국이다.
(사진: Ballestas 섬 물개들의 모습)
배가 동굴 속으로 들어가고 나오면서 펭귄은 무리 지어 서있고, 갈매기는 새까맣게 날아다니고, 갈매기의 앉아있는 모습이 넓은 정방형으로 건너 섬 위에 형성되어 있다. 물개가 수백마리가 으르렁 거리며 세력다툼, 자리다툼을 벌이는 모양은 이곳이 아니면 볼 수 없으리라. 갈매기는 바위틈에서 어미가 새끼를 거느리고 돌보느라 바쁘다. 묘하고 신비하게 바위구멍마다 새가 기생한다. 갈매기가 수십만 마리나 되니 똥 냄새도 대단하다. 갈매기 똥을 국가에서 수거하여 마대에 넣어 와이어 줄에 매달아 배로 운반한다. 갈매기 똥은 비료로서 최고란다.
모래 사막에 펼쳐진 수수께끼 그림들
10:00시경 2시간에 걸친 섬 관광을 마치고 귀환하여, 서둘러 “Nasca” 로 출발. 13:20분 3시간 만에 Nasca 경 비행장에 도착하니 “ Aero Condor, Nazca Liner” 라 쓰여져 있다.
경 비행기에 4인씩 탑승, 모래 언덕 벌판 위를 700~800 m 의 고도로 비행하며 12개의 모래 위에 그려진 그림을 둘러보는 경 비행기 관광이다.
세계에는 수 많은 불가사의한 유적이 많다. 그러나 이 나스카의 거대한 모래 위의 그려진 지상화는 누가, 언제, 왜 , 어떻게 이 황량한 불모지에 정교하고 거대한 그림을 그려 놓았을까?
이 수수께끼 같은 그림들은 남북으로 50 km, 즉 우리가 지나온 도로를 양쪽으로 광활한 평원위에 18개의 형상과 100여 개의 기하학적 무늬가 그려져 있고 그것들이 어떻게 손상을 입지않고 오늘날 까지 이어져 오는가? 미스터리는 미스터리를 낳는 다나?
경비행기에 올라 제일 먼저 본 것이 “원숭이” 모형 그림인데 무려 길이가 122 m , 폭이 91 m 나 되며 경 비행기에서도 사진이 잘 잡힌다. “콘도르” 모습은 135 m 나 되고 “도마뱀”모형은 188 m, 동물상 중 가장 큰 것은 274 m 의 거대한 “알카트라스 새”의 그림이다. 외계인 제작설이란 “우주인”상은 30 m 나 되며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사진: 나스카 사막에 그려진 “콘도르”의 전경)
그 외에도 이 모래 평원에는 약 1.6 km 에 달하는 삼각형의 모형, 마치 비행기 활주로 처럼 보이는 수많은 선과 알 수 없는 도형들은 후세 연구가들이 풀어야 할 숙제이다.
이 모래 위의 유적을 보고나니 수백 km를 달려온 피로가 상쇄되는 느낌이다. 시간에 쫒겨 점심시간도 가질 수 없어 14:50분에 출발하면서 각종 과일과 음료, 카스텔라를 준비하여 버스안에서 해결하면서 길고도 먼 길을 달려 21:15분 Rima 시내로 들어왔다. 아리랑 식당에서 2번째로 한식으로 식사 후 21:40분 Rima 공항으로 달려 갔다.
1월15일(목). 새벽 한시 30분 Rima 공항을 출발하여 가장 고단한 하루를 시작. 기내에서 하루 밤을 보내다니!
Mexico의 거대한 유적-테오티우아칸
한시간 시차가 나는 Mexico 시에 아침 08:00시에 도착하여 세관을 나오니 상냥한 아가씨 “오 정화” 양이 다가온다.
모두 기내에서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7시간 비행 끝에, 아침을 위해 레스또랑에 오니 비로소 안도감이 생긴다.
간단한 아침식사(오므렡 과 빵) 와 coffee 로 피로를 풀고, 멕시코 시티 북쪽 약 50 km 지점에 있는 “테오티우아칸”으로 이동.
“테오티우아칸”이란 사람이 신이 되는 장소라는 뜻이다.
이곳의 피라밑 군은 기원전 2세기경에 축조된 것으로서 당시에는 이곳이 라틴 아메리카 최대의 도시로서 이곳 고원 분지를 중심으로 A.D 350~650 년 사이에 번창하였다. 도시면적은 20만 ㎢ 정도, 인구는 20만 정도로 추산 된다. 이 곳을 아즈텍 문명 유적으로 분류한다.
아즈택 문명은 7세기 중엽 무슨 이유인지 갑자기 사라져 버린 문명이다.
(1) “케살코아틀”( Tempo de Quezalcoatl) 신전
이것은 사방이 성벽으로 둘러 싸여 있다. 신전의 장식이 가장 우수한 것으로 전면에 깃털 달린 뱀으로 장식되었으며, 물과 농경의 신과 비의 여신의 조각으로 둘러 싸여 있다.
(사진: 케살코아틀 신전기단에 조각 장식)
이들 문명이 갑자기 사라진 것은 천재지변, 질병, 전쟁, 이주, 외계인설 등 5가지 이유중의 하나라고 추측되고 있다.
기우제, 농경 제를 주관하던 신전으로 생각된다. 달력이 365일과 260일의 2개의 달력이 사용되었으리라 추측. 이 신전의 배치로 보아 4개씩 3면, 12개에다 중앙에 대형 1개로 되어 13개월로 추정(20일ⅹ13개=260일)되며 월별로 제사의식을 가진 것 같다.
천문 기상 등을 통해 기우제를 지내며, 백성들을 통치하기위한 행위로 비의 신, 농경의 신을 모시고 풍년을 기원한 것으로 되어있다.
신전 표면은 돌로 쌓아졌고, 내부는 흙으로 채워졌다. 이 신전 피라 밑 안에서 54구의 시신이 발견 되었으며, 양손이 묶인 채로 여서 아마 산 제물로 바쳐진 듯하다.
(사진: 가장 중심부에 축조된 달의 신전 전경)
다음에 간 곳은 선인장, 용설란 등 난 종류의 농장을 방문하니 우리나라와 달리 선인장이 각종 생활용품으로 만들어 지는 것을 체험. 용설 난은 15년 후에 줄기가 자라 꽃이 피면 마르게 된다. 그전에 가운데 솟아나는 대를 자르면 용액이 나오는데 이는 위장병, 당뇨병에 특효약이 되며, 24시간 발효하면 음료가 된다. 데킬라 종류의 알콜 원료가 되고, 줄기는 옷감을 짜는실로도 된다. 참 이용가치가 대단한 식물이다.
선인장이 음료로, 실로, 종이로, 비누로 또는 실과 바늘(가시)이 되어 실생활에 이용되니 참으로 신기하다.
데킬라를 먹는 방법은 손등에 소금을 조금 놓고 왼손으로 튀겨 입안에 넣고 레몬을 입에 짜넣고 술을 마신다는 것이다. 또 선인장에서 나오는 실에 염색을 하여 각종 직물을 짜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이런 식물의 이용가치가 나라별로 큰 차이가 있다니?
(2) “케살파팔로틀”신전 ( Palacio de Queszalpapaloti)
달의 신전으로 가기 전 지하 신전의 내부를 관람. 내부는 기단을 쌓고, 그 위로 수직으로 쌓고, 다시 그 위에 단을 쌓는 식으로 축조되고, 독수리, 뱀, 재규어가 지하신전에 벽화로 그려진 것을 볼 수 있다. 벽은 화산 돌, 천장은 나무, 위는 석회를 발라서 굳힌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650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복원 하였고, 이곳의 의식은 신의 노여움으로 멸망을 늦추기 위해 사람의 심장을 받친다는 것이다. 달의 신전에서 제사를 관장하던 신관의 주거지라 한다.
(3) 달의 신전( Piramide de la Luna)
정면에 위치한 달의 신전은 이 유적지 전체를 제압 하듯이 당당하다. 높이가 46 m, 밑변 150ⅹ120 m, 110개의 계단으로 350년경에 축조 되었다. 맨 위에는 계단이 없으나 그냥 올라갈 수 있다. 위치로 보아 중요한 종교의식을 여기서 지낸듯하다. 그것은 이 신전의 위치로 보아 남북의 직선길 2~4 km 의 “사자의 길”을 통해 제사 행렬을 이루어 성대한 의식을 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곳 신전에 산자의 심장을 바치면 독수리가 채어 간다는 것이다.
달의 신전 뒤로는 높은 산이 둘러 있는데 신전의 모습과 흡사하게 솟아 있어 이곳이 태양의 신전 보다 중요한 곳으로 보는 것이다.
달의 신전 2번째 계단 입구에서 발견된 석관에서 3인의 유골이 나왔다. 달의 신전 좌, 우의 신전들은 소규모의 제사 시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측 된다. 이 신전 건축에는 150년 내외가 소요된 것으로 추측되니 당시 인구를 20만으로 추정하면 이 또한 수수꺼끼 같은 일이다.
(4) 태양의 신전( Piramide del Sol )
가장 큰 신전인 태양의 신전은 높이 65 m, 밑변의 길이 225 m, 248개의 계단으로 축조된 거대한 피라미드이다. 테오티우아칸 유적 중에서 최대의 축조 물이고 세계에서 3번째로 크다. 종교의식을 위하여 축조된 것으로 평평한 정상에는 예전에 신전이 세워져 있던 것으로 생각된다. 연 2회 태양이 이 피라미드의 바로 위에 오는 날에는 후광이 비친다고 한다.
(사진: 가장 규모가 큰 태양의 신전 전경)
에집트의 피라미드는 왕의 묘소인 반면 이곳의 피라미드는 신에게 제물을 바치는 제사의식을 행하는 것으로 전혀 다르다. 아무튼 이 거대한 신전을 쌓기 위한 돌과 흙은 실로 엄청난 양이다. 그 당시 어떠한 수단과 방법으로 이를 축조 하였는지 도저히 믿어지지 않으나 기록이 없어 추측밖에는 도리가 없다.
점심 식사는 시내로 돌아와 한국식당인 “영빈관”에서 하였다.
오후에는 시내 탐방으로 카도릭 성지인 <떼빠시> 언덕에 이르니 이곳은 기적이 일어난 곳이다. 이곳에다 1531년 “후안 디에고”가 카도릭으로 개종하여 교회를 지었고, 1950년 개축하였으나 너무나 낡았다. 그가 17년간 살았던 장소에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이곳 광장에 “과달루페” 성당은 역사적 유물이다. 왼쪽으로 기울고, 옆의 건물은 또 오른쪽으로 기울어 졌으나 신의 가호로? 붕괴를 막지 않았나 할 정도로 심하게 기울어 졌다. 이 근방에는 모두 5개의 교회가 나란히 있으나 지진이 심해 지반 침하로 언제 붕괴될지 위험하다. 새로 지은 교회 내부는 웅장하고 예배가 진행중이다.
해가 질 무렵에 멕시코 시티의 중심지인 “소칼로 광장”에 이르니 인산 인해다. 하기식을 위해 군인이 트럭을 타고 와서 군대의식을 하고 국기를 내린다.
(사진: “소칼로” 광장의 대성당 전경)
1573년에 건축한 대성당은 대단한 위용을 갖추었으나 건물 외부가 너무 오래되어 우중충하다. 내부로 들어가니 황금 장식물이 전면을 곽 채운 성당에서 미사를 집전 중이다. 금이 많은 나라라 제단에 모든 치장 물이 금으로 장식되어 더욱 빛나 보였다. 대성당 옆에는 발굴된 신전이 자라잡고 있었다. 예전에는 멕시코 시티가 아즈택 문명의 중심 도시 였으나 스페인 정복자들은 모든 건축물을 헐어버리거나 매몰 하여 버렸다. 현재도 지하를 발굴하면 고대문명의 잔해가 나온다. 대성당 옆에 “마요르 템플”이 바로 아즈텍의 유적이다.
주변에는 대통령 궁과, 시 청사 건물 등이 광장을 에워싸고 있으나 나무가 없고, 바닥마저 돌로 깔아놓아 삭막하다.
저녁은 일 식당에서 회, 튀김 등 Corona 맥주를 곁 드려 간단하게 진행. 오늘은 길게 휴식을 할 예정. Sheraton Maria Isabel Hotel 1064 호에 투숙.
1월 16일 (금). 어제 Mexco 시내 관광에 이어 피로를 풀 겸해서 늦게 나가기로 하였다. 우리는 일찍 나와 호텔 주변을 산책하니 독립 기념탑 주변이라 시내 중심부 이다. 아침이라 출근하는 차량이 가로를 메운다. 미국 대사관이 바로 옆이라 이른 아침부터 Visa 를 발급 받으려는 맥시칸들이 끝없이 줄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곳에서도 미국 Visa 받기가 이렇게도 어려운가?
(사진: Mexcico 독립 기념탑 전경)
국립 인류학 박물관-돌의 문화
요금은 37$, 입구 중앙에 분수대 기둥이 X 자로 균형을 이룬 특이한 조형 물로 분수가 내려온다. 맨 먼저 방에 들어가니 지구상의 각 종 인류의 모습이 정면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금만 측면에서 보면 두개골로 변해 각 인종의 사후 두개골을 비교해 볼 수 있는 곳이다. 이 박물관은 순수한 자국의 유물, 특히 고대 아즈택, 마야 문명 등의 전 과정이 돌로 표현된 문명임을 보여준다.
다음 방에선 유리 밑으로 기원전 100만년 전의 맘모스 유골을 볼 수 있었다. 다음 방에선 고대에는 이곳에서도 무덤에 시체와 더불어 부장품이 매장 되었음을 보여준다. 병, 식기 등 생활도구와 함께 매장되어 있는 무덤 속이 공개되어 있다.
다음 방에선 테오티우아칸 신전의 조각이 재현되어 전시되었고, 벽화도 재현 되었다.
죽은 자는 천으로 염을 하고 돌 가면을 씨워 앉은 채로 매장 한다.
중앙 홀엔 달력의 원리가 조각된 둥근 돌로 된 조각이 안치되어 있고 가운데에는 사람이 혀를 내밀고 있는 것은 인간의 심장을 바치라는 의미이며, 태양의 신 시대는 2012년에 멸망한다는 예언이 새겨 있다. 둘레에는 12 지간이 새겨있고 밑에는 동 시대의 신이 싸우는 모습도 조각되어 있으며, 달력의 원리가 포함되어 있다 한다.
사람이 죽으면 각종 비단 채색 천으로 싸서 묻고, 돌 가면을 얼굴에 씨우고 각종 부장품을 넣어 매장하는 것이 중요한 풍습이고 서민층도 이렇게 했다 한다.
2시간의 관람을 하는 동안 고대 맥시코의 유물부터 마야문명 까지 섭렵할 수 있었다. 이 박물관은 순수한 한나라의 고대부터의 체계적인 문명을 볼 수 있었고 이 문명의 특징은 “돌의 문명”이고, 모든 표현은 조각을 통해 후대에 전달 되었다는 것이다.
세계적인 휴양도시 Cancun
영빈관 식당에서 중식을 마치고 공항으로 이동, 16:00시경 출발하여 17:30분 Cancun 공항에 내리니 현지 안내자가 안 나와 한시간 이상을 기다리는 이변이 속출 하였다.
뒤늦게 칸쿤 해변에 “ Tu Cancun Beach Hotel” 1045호에 투숙하여 Seafood 로 저녁식사. 와인을 즐기며 현지 민속 쇼를 관람하고 마지막 밤을 보냈다.
칸쿤은 인구 25만 명의 휴양도시로서 호텔의 앞 뒤로 바다를 끼고 있어 세계적인 휴양지로 유명하며 누구나 머무르기를 선망하는 곳이다.
(사진: 세계적인 휴양지 Cancun 해변의 아침)
1월 17일(토). 오늘 아침은 06:15분 일출을 보기 위하여 부지런하게 일어나 해변으로 나갔으나 구름이 가려 해돋이는 불가능 하였다. 카리브 해의 시원한 푸른 물과 바람을 맞으면서 휴식. 아침 식사 후 07:45분 안내자의 교통 사고로 인해 다른 여행사의 여행객 6명과 합하여 대형 버스로 칸쿤에서 “ Chechenizsa”로 205 km 떨어진 장거리 투어에 나섰다.
Chechenizsa 의 마야 유적의 비밀
Merida 정글 속에 밀림에서 번영한 마야 문명. 기원전 3세기경 부터 거대한 피라미드 군이 생겨나기 시작. “체첸이사”는 유카탄 반도에서 가장 뛰어난 유적지이다. 체첸이사란 마야어로 “우물가의 집”이라는 의미이다. 유카탄 반도의 최대의 성스러운 샘이 있어 불리어 진 것으로 생각된다.
중 남미의 문명을 크게 나누면, 300~600년간이 아즈택 문명, 800~1200 년간이 마야 문명, 1500~1650년이 잉카 문명으로 크게 구분 된다.
이곳 유카탄에는 1930년 몸값 10원으로 한국인 1233명이 최초로 두 달이 걸려 배로 이민 온 “애니깽”의 슬픈 역사가 깔려있고 지금도 한인 3세들이 “Merida” 지방에 흩어져 살고 있다 한다. 칸쿤이라는 지명은 마야어로 “방울 뱀”이란 뜻이다.
Maya 는 수학, 천문, 건축술이 발달한 유일한 문명이다. 이 곳 체첸이사 유적지에는 후기인 800~1200년 간의 문명은 주로 왼쪽에 있다. 300~600년의 토르테카인의 침범으로 인한 유적은 오른쪽이며, 이 유적은 모두 연례 의식의 행사를 위한 장소이다.
대 “꾸쿨칸” 신전 (깃털 달린 뱀의 의미)은 91개의 계단으로 축조되었고 91ⅹ4=364+1 로 되었으며, 조각은 눈, 코 등 이 두드러지며 이 신전은 비를 주로 관리 한다는 곳이다.
윗 쪽 정북 방향에 제사 방이 있고, 동으로 향해서 내부는 62개의 계단이 있는 Pyramid 식으로 축조 되었다. 층계는 좌,우에 음,양 각 3개씩을 위로 쌓아 올렸고, 아래 중간에서 박수를 치면 울림 현상이 일어난다.
년 26월ⅹ2주=52주로 계산이 되어있다. 1800년대에 와서 복원이 되었고 지금도 복원 공사가 계속된다. 돌은 모두 석회암 질이다.
(사진: 마야의 수수꺼끼 꾸쿨칸 신전의 위용)
좌측 뒤로는 “전사의 신전”으로 이곳은 심장을 바치는 곳이다. 사람이 신전위에 누워있고 뱀이 아가리를 벌리는 조각이 되어 있어 이곳에서 포로의 심장을 바친 것으로 추정된다. 극심한 가뭄, 질병, 재해 예방을 위해 산 사람의 심장을 바치며, 그 심장은 독수리가 먹고 비상 한다고 한다. 신전 오른쪽에는 기둥이 864개가 서있어 예전에는 천주나 되어 이 기둥들 사이는 제사관들의 숙박처와 휴식처로 사용된 듯하다.
생자의 심장을 제공하는 자는 군 경력자 만이 될 수 있다.
다음은 연못 자리로 이동 <죽음의 길> 끝에 200 m 거리에 석회암으로 된 깊이 22 m 인 연못은 “회생의 샘”으로 불리며 기우제를 지내던 곳으로 추정 된다.
전사의 신전 맞은 편에는 “폭타포” 라는 길이 150 m, 폭이 46 m 의 공 경기장이 있다. 양쪽 7명씩, 14명이 경기를 하며 경기장 벽에 걸린 링으로 된 돌 구멍에 넣는 경기가 벌어지며, 왕이나 귀족들이 관람하는 곳이 입구 오른쪽에 높이 세워져 있다.
패하는 쪽의 전사의 목을 베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고 벽에는 양쪽 각기 7명 씩이 공놀이 하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 여기서 목이 베어진 자의 두개골의 모습이 왼쪽 무덤의 벽면에 수 십 명의 두개골이 조각 되었으니 끔찍한 곳이다.
(사진: 무덤밖에 담에 조각된 심장을 바친자의 두개골 조각)
이곳은 1824년에 개발 되었다. 2시간에 걸 처 우리는 체첸이사의 유적지를 관찰하고 이곳을 떠나 늦은 식사를 하고 칸쿤 공항으로 이동.
17:00시에 칸쿤 공항에서 L.A 로 출발. 5시간 30분을 비행하여야 한다. 시차는 3시간 L.A 가 늦다. 이제 모든 일정이 끝나고 골치 아픈 세관 심사를 거치고 출발.
한국은 눈이 오고, 깨끗한 세상이 온다면?
L.A 공항에서 또 수하물을 찾아 세관의 무차별한 검사를 거처 인천 공항으로 보내니 여유롭던 시간도 사라졌다.
12:00시에 이륙하여 장장 13시간의 지루한 비행 끝에 인천 공항에 내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