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종 여행기/우리문화유산 답사

(7) 경남 울산, 양산, 부산 일대의 문화유적

땡큐 이영옥 2013. 4. 29. 11:16

 

 

(7) 경남 울산, 양산, 부산 일대의  문화유적

 

경남 양산, 울산, 동래, 부산 해안가 일대는 옛 신라시대의 주거지로 바다를 끼고 있어 기온이 온화하고 해산물이 풍부하여 신라시대의 중심지였다.

불교문화가 융성해 지면서 이 일대는 수많은 국찰과 불탑이 세위지고 불교문화의 요람지가 되었다. 특히 통일 신라 시대의 불교문화가 융성하면서 경주를 중심으로 불국사, 석굴암 등 우리문화 유산의 정수가 집중되어 있는 곳이다.

 이번에 답사하는 곳은 신라시대에도 울산이 당시에 바닷가에 위치해 신라인들에게 새로운 외래문화가 유입되어 울산을 중심으로한 수많은 사찰이 세워졌다.

처용설화가 삼국유사에 실려 있으면서 그 당시 이 고장이 화랑도들의 수련장이었고 해로로 당나라에서 불교가 들어오고 고승들이 이곳에 와서 여러 사찰을 지었던곳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통일 신라 시대의 태화사, 청룡사, 망혜사, 간월사 등은 그당시 창건되었으나 천년의 역사속에 지금은 그 터전만이 전해지며 석탑과 부도 만이 당시의 화려했던 불교문화의 융성을 말없이 전해 주고 있다. 또 가지산 기슭에는 거찰인 석남사가 자리잡고있다.

두동면 천전리에는 신라시대의 화랑들이 수련하면서 암벽에 새겨놓은 글씨외 그림들도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있다.

언양읍 대곡리에는 이곳에 선사시대에도 사람들이 모여살은 흔적이 바위 암벽에 문자대신 그림으로 새겨져 있어 그 당시의 생활상을 전해주고 있으며, 반구대 암각화는 각종 동물들의 모양과 당시의 생활상을 바위에 새겨 놓았으나 수많은 세월의 풍화속에 이제는 그 족적을 찾아보기가 여려운 실정이다.

그보다 이른 시대의 살았던 거대 초식 동물인 공룡들이 서식지도 이 일대로 그 발자국이 남아있어 우리 고대사의 연대를 앞지르게 하고 있다.

지금은 우리나라의 임해 산업 공단으로 중화학 공업의 발생지이자 근대 산업을 일으켜 우리 나라를 산업국가로 발전 시키는 요람으로 되었다. 울산일대를 돌아보면 이곳이 우리나라의 발전의 중심지로서 그 입지가 투렸하다는 사실을 알 수가 있다. 공단을 건설한 만한 입지가 충분하고 가운데로 태화강이 흐르고 바다에 항구가 접해있어 예부터 발전의 중심지였다.

 이조시대 부터는 왜구의 잦은 침략으로 동래를 비롯한 부산 일대에는 성곽을 쌓아 노략질을 방어하던 유적이 곳곳에 산재하여 있으며, 부산, 양산 일대의 통도사, 범어사와 같은 거찰이 이 일대의 불교 문화를 이끌어 왔다.    

경부고속도로가 생기면서 이제는 교통의 요지로 되었고 쉽게 접근하여 당일로 이 일대를 돌아 볼수 가 있다.

경부고속도로 언양 IC 에서 나와 우선 언양 일대의 문화유산을 둘러보면서 가까운 거리에서 부 터 동선을 따라 이동하면서 맨 먼저 시내에 중심부에 솟아있는 얕으막한 학성 공원부터 이 답사여행을 시작 하여 본다.

 

 

                        (사진: 답사지의 도로망 및 위치도)

 

                          (사진 ; 경주 교외의 능원에 까마귀 때)

               

 

 

1)태화사터 부도와 학성(鶴城)산성

신라 선덕여왕 12(AD643)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올때 부처의 머리와 어금니, 사리 100알과 부처님이 입던 가사 한벌을 가지고 왔다.

사리는 셋으로 나누어 하나는 황룡사 탑에 봉안하고, 또 하나는 태화사 탑에 봉안하고, 나머지는 양산 통도사 계단에 가사와 함께 봉안하였다고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그로 미루어 태화사도 대찰이었음을 알수 있으며, 사찰경내에 태화루가 이곳의 명승지로 손꼽히었으나 절이 폐사되고,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렸다.

그 후 오랬동안 절터였던 태화동 바탕골 기슭에 뭍처있던 십이지상 부도가 1961년에 발견됨으로서 이곳이 태화사 터로 추정되었다.

이 십이지상 부도는 그 후 1974년 지금의 학성산성 자리로 옮겨오면서 보물 제 441호로 지정되었다. 이 부도는 석종형으로 아주 독특한 형태를 가지고 사리 장치를 두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남면의 감실형 사리공이 특이하다. 감실 아래쪽의 부도를 감싸고 있는 십이지상도 아주 특이한 것으로 십이지상도가 부도에 새겨진 예는 찾아보기 어렵다.

 

(사진: 십이지상 부도)

 

몸돌 표면의 감실은 크기가 높이 29, 너비 28, 깊이 27로 만들어 졌고, 위쪽면이 곡면이고, 안으로 가면서 좁아지고, 밖으로는 홈이 파여 물이 들어가지 않게 조각되었다. 십이지상은 마모되어 흐미하나 짐승얼굴에 사람몸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현재 발견된 석종형 부도로는 가장 오래된것으로 9세기 통일 신라 시대로 추정 된다.

 지금 부도가 옮겨져 있는곳은 정유재란 때인 선조 30(1597) 일본 장수 가토 기요마시(가등 청정) 가 조선을 침공하여 쌓은 학성 산성이다.

성곽 축조에는 울산 읍성의 돌을 이동하여 쌓은 것이다. 성곽 축조 후 이곳에서 왜군과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의 전투가 벌어져 사상자가 발생했으나 그 후 도요도미 희데요시(豊申 秀吉)이 죽자 가토의 왜군이 부산성으로 퇴각함으로서 학성은 방치되었다.

 

2) 영축산() 망해사 (望海寺)터 삼층석탑 (보물 제 173)과 부도

 

신라 49대 헌강왕(875~885) 때 세운절. 창건에는 처용설화가 깃들어 있다. 헌강왕이 출타 중 동해 어귀에 이르자 졸지에 구름과 안개가 끼어 길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측근 일관이 동해의 용()의 장난으로 그러니 좋은 일을 해야한다고 진언하였다. 이에 근방에 절을 세우라고 말했더니 금세 날씨가 좋아졌다. 그래서 이곳을 개운포(開雲浦)라 부르고 영축산 동쪽 기슭에 절을 짓고 망해사라 불렀다. (삼국유사 권 제 2 처용랑과 망해사 조) 그 후 용의 아들 인 처용이 왕을 따라 서라벌로 와서 왕을 도왔는데 그가 바로 처용이다.

그후 처용은 아름다운 아내를 맞이하고 고위직에 올랐다. 그러던 어느날 저녁에 집에 돌아오니 역신이 아내와 함께 잠자리에 들은 것을 보고,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고 물러나니 그것이 바로 처용가이고, 춤은 처용무가 되어 전해져 내려왔다고 한다.

 그 후 절은 소실되어 없어지고 절터에 통일 신라시대의 석조 부도 2기가 남아있으니, 동부도, 서부도의 2개 였다. 일제시대에 도굴되어 파괴된것을 1990년에 복원하였으나 마모가 심하다.

 망해사터 부도는 둘다 전형적인 팔각 원당형 부도로 조각의 수법이 같다. 동쪽의 것은 높이가 3.4m, 이고 서쪽의 것은 3.3m로 비슷하다. 서쪽 부도는 온전하게 모습을 지니고 있는데 동쪽 부도는 심하게 훼손 되었다.

서쪽 부도는 장방형 판석 위에 높은 지대석을 쌓고 그 위에 기단부를 놓았다. 기단부는 팔각으로 상, , 하대석으로 이루어졌다. 팔각의 하대석 받침과 연꽃으로 장식하였다.

팔각기둥 모양의 몸돌은 각 면에 귀 기둥을 조각하고 창문 모양을 새기고 하나 건너로 4면에 문 모양을 조각하였다.

 동쪽의 부도는 구성 양식이 똑 같으나 도괴되어 파괴가 심하다.

 

 

                        

                        (사진: 망해사터 서쪽 부도)

 

 

                               (사진:망해사터 동쪽 부도)

   

 

 

 

 

3)청송사(靑松寺) 3층 석탑(보물 제382)과 부도(浮屠)(지방유형문화재3)

 

청송사터에 기단 일부가 파손됀채 묻혀 있던 것으로서 통일 신라 시대에 세워진 3층석탑. 1962년 해체 복원 당시 상층 기단에서 청동 사리함이 발견되었고 그안에 청동여래 입상 1점과 유리, 수정, 옥 등 30여 점의 유물이 나왔다. 상하로 나눠진 기단위에 3층 몸탑이 올려졌다. 일층의 몸돌이 지나치게 큰 반면 지붕돌의 처마는 짧다. 지붕돌은 모두 5단 받침이다. 상륜부는 없어졌고, 잔체적으로 통일 신라 시대의 지방 석탑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부도도 청송사 터에서 발견된 것. 모두 3기로 조선 시대 돌종모양(石鐘形) 부도로 고승들의 유골을 모시기위한 돌탑이다.

왼쪽 부도위 높이는 3 m, 지대석, 기대석, 연꽃 좌대, 탑신의 차레로 짜여져 있다. 기대석 남북 면에는 인왕상을, 동서면에는 연꽃무늬를 돋을 새김했다. 탑몸의 밑부분에는 산스크리트문자가, 귓 부분에는 연꽃 봉우리가 새겨져 있다.

가운데 부도는 높이가 2.2m로 기대석 4면에 연꽃 무늬를 돋을 새김했다. 탑 몸에는 서응당 진흡대사(瑞應堂 眞洽大師)라는 글자가, 아래에는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다.

오른쪽 부도는 높이 1.2m 로 가단도 없이 탑의 몸체만 있고 무늬도 없다.

 

                                              (사진: 청송사터  3층탑 전경)

 

 4) 양산 통도사(1972년 영축총림 승격)

 

경부 고속도로 통도사 IC에서 1km로 가까운 거리다.

신라 선덕여왕 때인 AD 646년에 자장율사가 창건. 해인사, 송광사와 함께 삼보 사찰의 하나.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져온 석가의 진신사리(眞身舍利)와 가사(袈裟)를 봉안하여 불보사찰(佛寶寺刹)이라 부른다.

해인사는 부처님의 말씀()팔만대장경을 간직하고 있는 법보사찰(法寶寺刹), 송광사는 보조국사 이래 열여섯명의 국사를 배출한 승보사찰(僧寶寺刹)로 이름나 있다. 불교의 요체인 佛,,僧의 삼보가 사찰에 따라 강조된 것이다.

  통도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금란가사(금실로 수놓은 가사)를 모시기 때문에 삼   보 사찰 중 으뜸으로 친다.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신 사리탑이 있는 제 1 적멸보궁(寂滅寶宮)이기에 대웅전에는 불상이 없다. 따라서 정자형 법당 사면에는 각각 다른 이름의 편액이 걸려 있는데 동쪽은 대웅전, 서쪽은 대방광전(大方廣殿), 남쪽은 금강계단(金剛戒壇), 북쪽은 적멸보궁(寂滅寶宮)이라 쓰여 있다.

 우리나라의 8대 총림(많은 승려와 속인들이 화합하여 함께 모이는 것을 나무숲에 비유한것)중의 하나다.

 요즘은 승려들의 참선수행의 전문도량인 선원(禪院), 경전 교육기관인 강원(講院), 계율 전문 교육기관인 율원(律院)을 모두 갖춘 사찰로 통도사, 해인사, 송광사, 수덕사, 백양사, 동화사, 범어사, 쌍계사가 8대 총림이다.

 총림의 수장은 방장(方長)이고, 모든 승려들은 행자교육을 마치고 사미계(沙彌戒)를 받으면 강원이나, 선원, 율원에 입방, 4년간의 교육을 수료해야 비구계를 받을 수 있다.

 

통도사의 유적과 유물

 

a) 통도사 석당간(石幢竿): 경상남도 유형 문화재 제 403

당간은 사찰입구에 세우는 깃대로 특별행사가 열릴 때 큰 깃발을 달아 놓는 곳이다. , , 목재, 석재 등이 있다.

통도사 당간은 기단부 전체가 중수 되었지만 지주는 원래대로 있다. 지하에 묻친 2 개는 원석 그대로 이며 지상 부분은 간공(竿孔)을 뚫는 등 용도에 맞도록 한것으로 높이가 7.54m이다. 탑의 기단부와 같이 장대석을 놓아 사방의 하대윤곽을 잡은 다음 간격을 좁혀 조금 짧은 장대석으로 기단을 만들고, 기단의 남북 양쪽에 지주가 맞물릴수 있게 유구를 두었다. 그리고 지주 상하에는 타원형으로 2 개의 간동을 만들고 동서 방향으로 장대석을 보완한 다음 다시 그 중앙에 간대(竿臺)를 놓고 당간을 세웠다. 당간 중앙에는 음각으로 南無阿彌陀佛을 새겨놓았다. 남아있는 석당간은 현재는 많지는 안으나 이곳에 것은 고려 말기에 것으로 추정된다.

 

 

b) 천왕문(天王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 250

사찰로 들어오면서 일 주문을 지나 천왕문으로 오면 이는 통도사 경내 3개의 영역 가운데 하위 영역인 하로전(下爐殿)출입문에 해당된다.

 

사천왕은 천상 세계에서 가장 낮은 곳에 불법을 수호하고, 중생들이 부처의 가르침에 따라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게 인도하는 수호신이다.

 불교 세게에서 설정한 수미산(須彌山)을 중심으로 동쪽은 지국천왕, 서쪽은 광목천왕, 남쪽은 증장천왕, 북쪽은 다문 천왕이 다스린다.

사찰에 천왕문을 세우는 이유는 사찰의 수호신의 의미도 있고, 이 수호신이 절안의 모든 악귀를 물리치고 청정도장이라는 신념을 갖게하는 뜻도 있다. 수미산은 부처가 거처하는 곳이니, 이를 땅에 재현한 곳이 절이고, 이 문을 통과하는 중생은 부처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 건물은 고려 충숙왕 6(1337)에 취암(翠岩)대사가 창건, 그러나 현재의 건물은 19세기에 중건된 것으로 보인다. 익공개(翼工系)의 맞배지붕으로 구성된 단순하고 소박한 구조다. 통로 좌우로 나무로 만든 4명의 험상궂은 천왕상을 배치하여 위협적인 자세로 이곳을 통과하는 중생을 일깨워 주는듯하다.

 

c) 영산전(靈山殿): 경남 유형 문화재 제 203

영산은 영축산()의 준말로 석가모니가 가장 오래 머물면서 자신의 가르침을 제자들에게 전하던 곳이다. 이곳을 참배하면 부처가 제지들에게 법화경(法華經)을 설파한 영산회상에 참석한 것과 같다고 한다. 이 영산전은 신앙의 정도에 따라 나누어진 통도사의 세 영역가운데 입구에서 가까운 하위영역 (下爐殿)의 중심 불전으로, 동서로 양옆에 약사전과 극락전을 거느리고 있다. 이런 구도는 조선 후기 불화에서 삼세불(三世佛)로 표현 되었다. 삼세불은 중앙에 자리잡은 현세 부처 석가모니불과 왼쪽에 자리잡은 약사불, 오른쪽에 자리잡은 미래극락세계를 주관하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말한다.

 

세 건물로 이루어진 구조는 바로 이런한 삼세불의 배치와 일치한다. 현재의 건물은 1704년 숙종 30년에 송곡선사가 중건한 것이다. 조선시대 사찰의 중심 불전으로 소박한 맞배지붕 형식이다. 통도사 전체의 중심불전인 대웅전과 맞추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다포계의 화려한 장식을 사용해 품격이 높다. 내부 벽에는 다보탑과 법화경의 내용이 담긴 그림이 그려져 있다. 석가의 생애를 묘사한 팔상도는 1775(영조 51)에 제작된 것으로 귀중한 자료다. 이 팔상전은 보물 제 1041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진: 팔상도-상(1,2,3). 중(4,5,6). 하-(7.8) 전경)

 

d) 불이문(不二門):  경남 유형문화재 제 252

불이문은 대웅전과 금강계단으로 향하는 마지막 문인 동시에 통도사의 3개 영역 가운데 중간영역(中爐殿)의 출입구에 해당하는 문이다. 不二란 진리 그 자체를 다르게 표현한 말로 본래 진리란 둘이 아닌 하나라는 뜻이다. 그리하여 일체에 두루 평등한 불교의 진리를 이 문을 통해서만 만날 수 있으며, 이 가운데서 불국토가 실현된다고 한다. 이 문을 통해 참된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 모든 번뇌를 벗게되기 때문에 이문을 해탈문(解脫門)이라고도 한다.

 

 이 문은 고려 충렬왕 31(1305)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현재의 건물이 언제 중건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다포계의 팔작 지붕이 천왕문과는 다르다.

 중앙의 대들보를 쓰지 않고 코끼리와 호랑이가 서로 머리로 받처서 지붕 무게를 지탱하는 구성이 특이하고, 기둥도 뚜렷하게 배흘림 양식으로 처리하였다.

 

e) 대웅전 및 금강계단(金剛戒壇): 국보 제 290

 

 

신라 선덕여왕 15 (AD 646) 자장율사가 지은것으로 통도사의 핵심이다.

계단(戒壇)이란 계()를 수여하는 의식이 행해지는 장소로 통도사의 창건의 근본은 바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금강계단에 있다.

현재의 금강계단은 창건이후 수차례 중수되었으며 초기의 구조는 알 수 없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계단은 2 층으로 위층 가운데에는 마치 가마솥을 엎어 놓은것과 같다라는 기록이 있다. 그리고 계단의 사방에 불좌상(佛座像)을 비롯하여, 천인상, 신장상 등 다양한 조각이 새겨져 있는데 이들은 고려나 조선 시대의 중수과정에서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대웅전은 임진왜란때 소실되어 인조 23(AD 1645) 우운대사(友雲大師)가 중건한 건물이다. 건립 연대가 확실한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건축으로 지붕의 청동으로 만든 찰간(刹竿)을 비롯하여 백자연봉과 무쇠와 청동으로 만든 기와등은 일반 건축에서 예를 찾기 어렵다.

대웅전의 가장큰 건축적 특징은 지붕모양의 丁 자형이러는 구조다. 정면과 측면의 구분없이 사방의 모든 방향이 정면성이 보이는 독특한 방향성에 있다. 특히 내부에는 불상을 모시지 않았는데 이는 대웅전 뒤에 있는 금강계단에 석가여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금강계단은 대웅전 북쪽의 넓은 마당에 장방형의 울타리를 두르고 그안에 지대석을 깔고 방형의 이중 기단 중앙에 대좌를 놓고 그 위에 석종형 부도를 모시었다.

울타리는 한변이 13.7m이며, 하층 기단은 약 9.8m, 높이가 0.82m. 상층 기단은 한변의 길이 7m, 높이 0.4m의 크기로 되어 있다. 대좌의 지름은 1.5m, 부도의 높이는 1.5m이다. 울타리 안의 하층 기단의 네 모서리에 사천왕 상이 각각 하나씩, 울타리 바깥 정면 양쪽에 신장상이 조각된 석물이, 그리고 중앙에는 석등과 간주가 놓여있다.

 

 

부도를 받치고 있는 대좌의 연꽃 조각, 석종형 부도의 몸통에 새겨진 비천상 등이 돋보인다. 창건 이후 수많은 중수를 기록하고 있으니, 고려 우왕(禹王) 3 (1377) 부 터 7차례나 중수기록을 갖고 있다.

 

                        (사진: 부도 뒤에서 본 적멸 보궁) 

이외에 상로전 영역에는 명부전, 일로 향각, 응진전, 삼성각, 산령각이 있다.

주변에는 부속 암자들로 안양암, 자장암, 극락암, 비로암, 백운암, 취서암 등이 있다.

자장암은 자장율사가 머믈던 암자로 안양함과 함께 통도사 8경으로 유명하다.

 

f) 통도사 성보 박물관

 이 박물관이 보유하고 있는 불교 문화재는 시대별 유형별로 다양하며 지정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다. 소형 사경 변상도와 높이 15m 의 초대형 괘불에 이르는 600여점이나 되는 불교회화를 소장하여 국내 유일의 불교회화 전문박물관으로 평가된다.

1. 통도사 역사실: 창건 이래 유구한 역사를 이어온 전래품을 조각, 공예, 전적 등으로 구분하여 전시함으로서 통도사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다.

2. 불교 회화실: 국내 유일의 불교 회화 전문 박물관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자료를 보유하고 있다.

 즉 영산전 영산회상탱(보물 제 1353), 극락보전 아미타 후불탱(보물 제 1472)

3. 괘불전: 괘불은 불교 회화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그림으로 야외법회시 거는 의식용 불화이다. 박물관 중앙에 높이 10m 이상의 전시대에는 매년 봄, 가을 2차례에 걸쳐 전국 사찰 소장 괘불 특별전을 여는데 현재는 옥천사 괘불이 전시되어 있다.

4. 기증, 기획 전시실: 월저 김 진조 선생, 혜각 스님, 전 조계종 종정 월하스님 등의 기증품을 전시하여 특정 주제를 조명하고 있다.

5. 모래 만다라(Sand Mandara): 통도사 성보 박물관의 하늘과 맞다은 불교왕국 티벳 특별전 기념으로 티벳스님 돈덴 놀부(Dhonden Norbu) 4명의 스님을 초청하여 제작한것으로 너비 2m 크기의 8각형 위에 티벳 현지에서 가져온 옥석가루와 모래를 사용하여 그린 그림.

야만타카(죽음의 신)를 표현한 것으로 죽음의 공포, 번뇌, 탐욕 등을 소멸시키는 의미다. 중앙에는 아촉불을, 그 둘레 사방위에는 비로자나불, 보생불, 아미타불, 불공성취여래를 배치 하고 64개의 연꽃잎으로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만다라는 불교와 관련하여 기하학적으로 구성되는 그림인데 만다라 제작 자체가 깨달음을 찾아가는 과정이라 한다. 

 

                    (사진:석가 금동불상)

 

 

                                           (사진: 옥산사 후불 탱화 전경)

 

 

 

 

 

5) 간월사지와 석조여래 좌상

 

간월사지는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 5호다.

간월사는 신라 진덕여왕(647~654)때 자장율사가 세웠다. 1592년 임진왜란때 폐사 이후 이조 인조 12 (1634)에 재건하였다 하나, 현재는 금당지 등의 건축터와 축대, 주초석, 장대석 등만 남아있다. 1984년 발굴조사로 금당지는 가로 13.72m, 세로 10.72m 의 크기의 사각형으로 정면 3, 측면 3칸의 규모였다. 근처에서 청동여래 입상, 청동 보살 입상 등이 출토되었다.

절터 좌우로는 2기의 석탑이 남아 있으며 통일 신라 말 불교미술의 귀중한 자료이다.

 

 

간월사지 터아래 바위면에는 마애불이 새겨져 있다.

현재 간월사지 주위로는 온천이 개발되어 그 둘레로 호텔 등이 산밑으로 둘러 쌓여 있다. 사적지로서의 중요성이 사라지고 말았다.

석조여래 좌상은 보물 제 370호이다. 이 좌상이 모셔진 불당은 1979년에 세운것이다.

 

이 불상은 울산 지역에서는 유일한 지정 보물이다. 받침인 대좌의 일부와 불상 뒤 원광인 광배가 없어졌으나 전체의 형태는 잘 남아있다. 목 윗 부분이 떨어져 나간 것을 복원한 것이다. 옷은 U자 모양의 계단식 법의이다. 손은 왼손을 무릎 위에 놓고 오른손을 내리어 땅을 가리키고 있는데 이런 손모양을 하마촉지인(降魔觸地印)이라고 한다. 불상을 모셔둔 대좌는 3단으로 되어 있는데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화려한 편이다. 높이는 1.35m이다. 어깨 부분이 약간 좁고 몸은 풍만하나 질량감이 부족한 통일 신라 말기의 불상 조각 양식이다.

 

6) 석남사

울산 광역시 상북면 가지산에 있는 사찰이다. 운문산, 천왕산 영축산 등 영남 알프스 산군에 둘러 쌓여 있다.

 신라 헌덕왕 16(824) 도의 국사(道義 國師)가 창건. 이조 중엽 1674년 탁영, 선철 선사가 중수하였고, 그 후 1912년에 우운스님이 중수. 현재와 같은 도량의 면모를 갖갖추 된 것은 1957년에 와서 비구니 인홍 스님이 6.25 때 폐허가 된것을 중수하고, 정수선원을 개설하여 비구니 선수행 도량으로 사찰 면모를 일신하였다.

현재는 조계종 비구니 선원으로 참선수행 도량이다. 문화재로는 보물 제 369호로 석남사 부도와 울산시 유형 문화재 5호인 삼층석탑, 문화재 자료 4호로 석남사 수조가 있다.

 가지산을 일명 석안산이라고 불리며 산의 남쪽에 있다하여 석남사로 불리었다. 양산 통도사의 말사로서 여승의 수련장으로 유명하다.

a) 석남사 승탑: 보물 제 369 (1963.1.21)

승탑이란 이름난 스님들의 유골을 모시기 위해 세운 돌탑을 말한다.

 

이 승탑은 높이 3.52m 의 팔각 원당형으로 도의 국사의 사리탑이라고 전해 지지만 자세한 것은 알수가 없다. 1962 5월에 해체 보수되었는데 이때 중단석 위 중앙에서 직사각형의 사리공이 발견되었다.

 하대석에는 사자와 구름무늬가 조각되어 있고, 중대석에는 창모양의 안상(眼象) 속에 꽃무늬 띠를 새겼고, 8판 연꽃 대좌위에 놓인 탑신석 전후에는 문비명(文碑銘)이 조각되어 있으며 그 전면 좌우에는 신장(神將)입상이 조각되어 있다. 신라말기 부도중에서 뛰아난 작품이다.

 

b) 석남사 3층 석탑: 울산 유형 문화재 제 5(1997.10.9)

 

이 탑은 2층으로 된 기단위에 세운 3층 석탑이다. 원래는 대웅전 앞뜰에 위치하고 있던 것을 1973년에 극락전 앞으로 옮겨 세웠다. 높이는 5m, 2.3m로 통일 신라시대의 양식으로 소박하고 단아한 것이 특징이다.

모서리에 각을 둥글게 처리했으며, 상륜부는 보수했는데 노반석, 앙화(위로 향한꽃), 보륜(寶輪), 보개(寶蓋) 등을 갖추고 있다.

                                      (사진: 석남사 3 층 탑 전경)

 

7) 반구대 암각화(盤龜臺 巖角畵): 국보 제 285 (95.6.23)

(울산 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991번지 소재)너비 10m, 높이 3m.

 

 암각화란 글자 그대로 바위 위에 다양하게 그려진 그림으로 전세계 거의 모든 지역과 시대에 걸처 나타나는 인간의 오래된 표현의 일종으로 볼 수있다.

울산 태화강가 지류인 대곡천 변의 절벽에 300여점의 암각화가 새겨져 있다. 반구대 암각화의 새겨진 그림은 바다와 육지동물, 사냥과 포경 장면 등 동물의 생태적 특징과 당시의 생활상을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바다 동물은 고래, 거북, 물고기, 가마우지 등이 있으며 육지동물은 사슴, 멧돼지, 호랑이, 표범, 여우, 늑대, 너구리 등이 새겨져 있다. 암각화에 표현된 배와 작살, 부구를 이용하여 고래를 사냥하는 장면은 과거 고래를 잡고 이를 숭배한 뛰어난 해양어로(海洋漁撈) 문화가 울산만에 존재 하였음을 보여 준다.

암각화의 제작 연대는 울산과 동남해안 일대의 패총 유적에서 출토된 동물유체 분석결과와 울산만 고환경 연구등에 비추어 볼 때 대부분 신석기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며, 일부 그림은 청동기 시대로 여겨지는 것도 있다.

세계에 수 많은 암각화 유적이 존재하고 있지만, 반구대 암각화처럼 수 많은 동물과그 종류를 구분할 수 있을만큼 상세하게 표현한 암각화는 찾아보기 어렵다.

 반구대 암각화는 현존하는 세계 최초의 포경유적일 뿐만 아니라 북 태평양의 독특한 선사시대 해양문화를 담고 있는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 평가되고 있다.

 

 

 

               (사진 국보 제 285호 반구대 암각화 모습)

 

8) 울주 천전리 각석: 국보 제 147 1973.5.4) 너비 9.5m, 높이 2.7m           (울산 광역시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 산 210번지 소재)

 

천전리 각석은 1970 12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견된 암각화 유적으로, 대곡천변에 있는 윗 부분이 15도 가량 경사진 형태의 바위에 각종 동물모양과 동심원, 나선형, 음문, 마름모와 추상적인 문양, 역사 시대에 새겨진 돛을 단배, 말과 용 등의 가는선 그림, 신라시대 명문 등이 새겨져 있다.

 

 

청동기 시대로 추정되는 추상적인 문양들이 암면의 전면에 걸쳐 분포되어 있으며 이러한 추상적인 도형 그림은 농경의 풍요와 다신을 비는 일종의 종교적 상징으로 해석된다.

신라시대로 추정되는 날카로운 금속 도구를 이용하여 그어서 새긴 세선화는, 말을 끌거나 타고 있는 인물상, 돛을 단 배, 말 등이 행렬을 이루고 있으며, 용 그림 등도 확인된다. 신라시대 명문은 을사(乙巳), 기미(己未) 등을 통해 6세기 초에 기록으로 추정되며, 명문은 크게 법흥왕의 동생 사부지갈문왕(徙夫知葛文王)이 을사년(서기 525) 6 18일 새벽에 천전리로 놀러와 새긴것과 사부지갈문왕 부인 지몰시혜(只沒尸兮)가 남편이 죽자 그리움에 사무쳐 그의 흔적이 남은 천전리 계곡으로 어린 아들(후에 진흥왕)과 함께 찾았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천전리 각석은 선사시대뿐만 아니라 고대사 연구에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유적이다.

위면은 쪼아서 새기는 기법으로 기하학적인 무늬와 둥물, 추상적인 인물등이 조각되어 있으며, 아랫단은 선을 그어 새긴 그림과 글씨가 뒤섞여 있으며, 기마행렬도, 동물, 용 등 다양한 내용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는 상단과 하단 부분의 그림을 그린 부류가 서로 다름을 의미한다. 오랜시간에 걸쳐 여러 사람이 이루어 놓은 작품으로 이해되며, 선사시대부터 신라 시대 까지의 생활모습을 그리고 있다.

고령의 양전리 암각화는 단일 문양으로 그려져 있는 반면 천전리 각석은 여러시대의 모습을 다양하게 담고 있어 더욱 의미가 깊은 유적이다. 암질은 자색쉐일(중생대 백악기의 퇴적암류인데 사암과 함께 외층을 이루어 발달하지만 입도가 낮을수록 박층으로 쉽게 부서진다. 풍화에는 다소 강한 편이지만 열에는 약한 암석이다)로 바위그림을 새기기에 매우 적합한 재질이다.

 

             (사진: 상-각종 도형의 모습, 하-마모되어가는 도형 모습)

 

 

9) 복천동 고분군

북천동 고분군은 부산에서 가장 대표적인 고분군으로 경주 다음으로 최대였으며 많은양의 유물이 나왔다. 야외에 고분군이 자리한 곳은 동래 중심가 북쪽의 마안산의 중앙부에서 서 남쪽으로 길게 뻗어 나온 구릉상에 위치하고 있다.

1969년 주택공사로 고분군의 일부가 파괴되면서 세상에 알려진 후 1995년 까지 부산대학교와 시립박물관 팀이 발굴조사 하였다. 지금까지 조사된 유구는 모두 130여기에 달하며 출토유물은 9000여점에 이른다.

유물로는 토기류, 철기류, 장신구류, 인골, 말 이빨 같은 동물의 일부도 포함되어 있다. , 은으로 만든 유물은 적지만 철로만든 유물은 많다. 무구류(武具類)와 갑주류(甲胄類)가 많다. 부장품의 대부분인 토기류는 다양하며 보물 제 598호로 지정된 마구식 각배와 오리모양 토기가 대표적인 것이다.

                  (사진: 복천동 고분군이 자리잡은 능선전경)

 

이곳의 고분군은 경주의 대형고분을 제외하면 남부지방에서 최대이며 유물도 경주고분 다음으로 많이 출토되었고 종류도 다양하다. 특히 방어용 무기인 갑운과 투구는 복천동 고분의 중요한 것으로서 고대 갑운연구와 고대 한일 관계사의 연구에 중요한 것이다.

이 고분에서 발굴된 것은 시대별로 복천 발물관에 잘 분류하여 전시하였으며 아래에는 대표적인 53호분과 54호분을 다루기로 한다. 두 고분은 유리지붕으로 덮혀 현장에 그대로 보존되었고 발굴당시의 출토품이 전시되어 있다.

 

 

a)    53호 무덤과 출토유물:

 능선 중앙에 위치하는 53호 무덤은 5세기 중엽에 조성된 대형 구덩식 돌 덧널 무덤(수혈식 석곽묘)으로, 덧널 무덤(목곽묘)형식의 부곽이 딸려있는 구조다. 완전한 상태로 발견됨으로서 당시 무덤의 구조와 유물의 부장상태를 알 수 있었다.

무덤속에서 토기, 철기, 목걸이, 귀걸이, 숫돌 등 모두 310 여점의 부장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토기가 가장많다. 토기 종류로는 굽다리 접시, 항아리, 그릇받침, 등잔모양 토기, 신발모양 토기 등이 있으며 특히 등잔모양과 신발모양 토기는 당시 가야인의 부장 풍습을 이해하는데 좋은 자료다.

 

굽다리 접시는 신라계, 함안계 등 여러 형식으로 나누어 지는데 아라가야가 있었던 함안 지역의 토기가 확인되어 이 무덤의 주인공이 서부 경남지역 사람으로 추정된다. 철기는 대부분 주곽에서 출토되었는데 복천동 고분의 다른 무덤에 비해 출토량이 적고 무기류의 비중이 낮은 것으로 보아 여성의 무덤으로 추정되며, 부곽의 빈 공간에서는 순장자로 보이는 인골의 흔적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b)  54호 무덤과 출토 유물

복천동 54호 무덤은 4세기 말에 축조된 대형 덧널무덤(목곽묘)으로, 주곽과 부곽을 갖추었다. 무덤의 일부가 훼손되었으나, 무덤이 깊어 부장 유물은 양호한 상태였다.

유물은 토기, 철기, 목걸이 등 200여점이 출토되었으나 대부분이 토기류이다. 토기는 굽다리 접시, 항아리, 손잡이 달린 굽다리 항아리, 그릇 받침대 등 형태가 다양하며 철기로는 투구, 재갈, 덩이쇠, 화살촉, , 도끼, 관못 등이 출토되었다.

 

 

함안을 중심으로한 서부 경남 지역과 일본계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이것은 부산지역의 가야 집단이 당시 일본 지역과 물적 교류를 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며 53호 무덤과 같이 순장자를 매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10) 동래 읍성(東萊 邑城): 부산 광역시 지정기념물 제 5

            (동래구 복천동, 안락동, 명륜동, 칠산동 일대)

이 성지는 조선시대 동래부의 행정 중심부를 둘러싸고 있었던 읍성이다. 충렬사 뒷산에서 마안산을 거쳐 동래향교 뒷 산 까지의 구릉지와 현재의 동래 시가지 중심지역인 평탄지를 일부 포함하는 지세에 전형적인 평산성 형식으로 쌓았다. 산성과 평지성의 장점을 두루 갖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읍성이다. 삼한시대 이 후 동래에는 독로국이라 불리는 성읍국가가 있었던 것인데 그때 이성이 쌓아졌다. 그러나 동래성의 기록은 고려사의 현종 12(1021)에 동래군의 성을 수리한 기록이 나와있다.

조선시대의 동래부는 대일 외교상 중시되어 관아의 규모도 크고 제일 격식도 높았다. 3품의 부사가 재임하는 왜적 방어의 제 1 관문이었다.

1592(선조 25)4 14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일본군의 1차 공격 목표가되어 동래부사 송 상현(宋 像賢)을 위시한 군,,민의 장렬한 전투가 벌어졌던 최대 격전지였다.

임진왜란 이후 방치되었던 성을 1731 (영조 7)에 동래부사 정 언섭이 나라의 관문인 동래의 중요성을 감아하여 훨씬 크게 쌓았다. 그때의 성이 지금 읍성의 기원이다. 증축된 성의 규모는 약 3.8km , 읍성에는 동서남북의 문과 인생문 및 암문이 있고 각 문에는 문루가 있었다.

동문은 지희루, 서문은 심성루, 남문은 무우루, 암문은 은일루 라고 하였다. 중요한 문루였던 남문에는 익성(翼城)을 두었는데 앞쪽의 세병문, 뒤쪽의 주조문의 이중 구조로 되어 있다. 나머지 문에도 옹성(甕城)을 부설하여 적이 성문을 쉽게 공격할수 없게 하였다.

일제시대의 시가지 정비계획으로 평지의 성은 철거되고 산지에만 성곽의 모습이 남아있다. 지금 성내에는 북문과 인생문, 동장대, 서장대, 북장대가 복원되었고, 치성(雉城), 여장(女牆)등이 부분적으로 복원, 보수중이다.

 

11) 금정산 범어사(金井山 梵魚寺)

 

신라 문무왕때인 서기 678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화엄 10사찰 중의 하나이다.원효대사도 거처갔고 근대의 만해스님도 이곳에서 수도 하였다.

동국여지 승람에 금정산 정상에 세길이나 되는 높은 바위가 있는데 그 위에 황금색 우물이있는데 둘레가 10척 깊이가 7촌이었다.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고 한마리의 물고기가 범천(梵天) 에서 내려와 그속에서 놀았다 하여, 그 황금빛 우물은 金井山의 이름이 되었고 하늘에서 내려온 물고기는 梵魚寺가 되었으니, 참선을 위주로 하는 禪刹 大本山(선찰 대본산)이다  

의상대사와 관련된 또다른 이야기로 동해의 왜인들이 10만 병선을 이끌고 신라를 침략해오니, 문무왕의 꿈속에 신인이 나타나 의상 스님과 함께 금정산의 금샘에 가서 밤낮으로 기도하면 왜적을 물리칠수 있다고 하여 그대로 하니 땅이 크게 진동하여 부처님과 천왕과 문수동자 등이 현신하여 동해로 나가 왜적을 격파했다. 이에 문무왕이 크게 기뻐하여 의상스님을 국사로봉하고 금정산아래 호국사찰을 세운 것이 범어사이다.

범어사는 지금은 조계종 8총림의 한곳이다. 범어사의 유적과 유물을 몇가지 소개한다.

a)당간지주: 부산 유형 문화재 제 15

고려말 조선 초기에 범어사 입구에 세워졌다. 이 당간은 간석과 기단부는 없고 지주만 남아있다. 지주는 좌우 기둥 모두 가로 50, 세로 87, 높이 4,5m 되는 거대한 돌로 세워졌다. 지주의 안쪽에는 전방형의 간구가 있어 당간을 고정 시켰다.

 

 

b) 조계문: 보물 제 1461

 

 

일주문인 범어사의 조계문은 삼 해탈문(三解脫門)이라 고도 한다. 1624년 묘전 화상이 중수시 건립하였다 한다. 1781년 백암선사가 현재와 같은 건물로 중수하면서 돌기둥을 세웠고, 일렬로 배치된 초석 위에 배흘림의 두리 기둥을 세운뒤 다포(多包)의 포작(包作)과 겹처마 위로 맞배지붕을 올려놓은 복잡한 구조로 되어 있다.

 

c) 천왕문:

조계문을 올라가면 300여년 된 천왕문이 있었는데 2010년에 어느 방화범이 불을 지른것을 복원한 것이다. 소실 전에 있던 대로 복원하여 동쪽을 지키는 지국천왕은 비파를 들고 있고, 남쪽을 지키는 증장 천왕은 보검을 들고, 서쪽을 지키는 광목 천왕은 여의주를 들고, 북쪽을 지키는 다문천왕은 보검을 들고 있다.

 

d) 대웅전: 보물 제 434

1614년에 묘전화상(妙全和尙)이 축조 하였다고 한다. 이 대웅전에는 본존불로 석가여래, 좌우로 미래불인 미륵보살과 과거불인 갈라보살 등 삼 세분이 모셔져 있다.

 

e) 지장전:지옥에서 고통받는 죄지은 중생을 구제하고자하는 지장보살이 모셔져 있다.

f) 팔상전-독성전-나한전:

3개의 전각이 병렬형태로 나란이 한건물에 위치한 곳은 범어사가 유일하다. 독성전(獨聖殿)은 천태산에서 깨달음을 얻은 나반존자를 모시었고, 나한전에는 아라한 16나한을 모시었다. 팔상전에는 석가의 일대기를 8폭으로 그린 팔상탱화가 모셔져 있다.

 

g) 관음전:  유형문화재 제 5

이곳의 관음전은 백두대간에서 뻗어내린 낙동정맥의 끝자락이라 기가 서린곳으로 관음보살이 모셔져 있다. 범어사에서 크게 중생을 구제해 준다는 관세음 보살로 유명하다.

이 답사를 마치면서 다시 통도사 앞에서 중식을 하고 머너먼 귀향길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