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4.18. 우리문화유산답사-선비의 고장-경북 예천-<27>
2015.04.18
우리 문화유산 답사
선비의고장-예천을찾아서
(27)
글, 사진: 김 한 종
(사진: 초간정 전경)
경북예천은 소백산맥의 자락속에 산자 수명하여 예부터 농업이 발달하고 선비가 많이 태어난 곳이다.
757년 신라 경덕왕 16년에 수주군에서 예천군으로 바뀌면서 지금의 안동시 풍산읍, 풍천면, 문경시 산양면, 안인현 등이 포함되었다. 후삼국시대에는 후백제 견훤의 지배하에 있다가 고려태조 왕건에 의해 정복됨으로서 후에 상주목으로 남아있다가 안동부에 속하게 되었다.
조선조에 와서 태종 때 다시 예천군이 되었다. 세종 때에 예천군의 선비들인 권씨, 윤씨 가문의 사람들이 중앙에 많이 진출하였다.
근대에 와서 이 고장 유지들이 남명학교를 세워 인재양성에 노력하였고 1919년 3.1운동 때에도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렇듯 예천은 전통과 문화가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다.
신라시대에 건립된 소백산 자락의 용문사는 대장전, 윤장대 등 문화재가 남아있고 이 일대에는 불교문화재로 개심사지 5층 석탑, 한천사의 철조 비로자나불 등이 이번 답사대상이다
특히 예천 권씨 문중의 초간 종택이 중요한 민속자료로서 오늘날에도 그 후손들이 가꾸고 지켜가고 있다. 특히 권씨 문중의 “권 문해”(權 文海)가 쓴“초간일기”는 조선조 선조 때의 관직에 있을 때의 일을 기록한 17년간의 기록은 당시의 조선 시대의 전반적인 국정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사료로 지금도 문중에서 보관 중이며 “백승각”에서 보관중인 중요자료인 <자치통감강목>이 도난 당하는 일이 발생하여 귀중한 문화재가 사라질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사진: 예천 일대 답사 지도)
1.예천 권씨 초간 종택(醴泉 權氏草澗宗宅): 중요 민속 자료 제 210호.
예천 권씨 종택은 현 소유자인 “권 영기” 씨의 13대 조인 “권 오상”이 지은 가옥이다. 그는 조선 선조 22년 (1598) 초간 “권 문해”(權 文海)의 조부이다. 이 건물은 임진왜란 전에 지은 것으로 아직도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대수마을의 숲이 우거진 낮은 뒷동산을 배경 삼아 다소 경사진 땅에 동남향으로 위치해 있다. 안채, 사랑채,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래는 대문간 채, 사랑채의 좌측에 다른 부속 채가 딸려 있었다. 안채는 정면 5칸, 측면 5칸의 “ㅁ” 자형 구조로 되어 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팔자 모양을 한 팔작 지붕이다. 조선 중기의 가옥의 양식을 보여주는 건축물이다.
(사진:권씨 문중 초간 종택 전경)
a) 초간 종택 별당(草澗 宗宅 別堂): 보물 제 457호.
이 집은 초간 권 문해(1534~1591)의 조부인 권 오상이 지은 별당으로 알려져 있다. 평지 위에 세운 집 체에 난간을 둘러서 다락집모양으로 꾸몄다.
왼쪽에 온돌방을 두고, 오른쪽으로 3칸의 넓은 대청을 이었다. 대청 앞면은 문짝이 없이 개방하고 옆 면과 뒷면은 판 벽을 쳤다. 네모로 다듬은 기둥에 주두만을 얹어 지붕 틀을 받친 소박한 외형에 비해 이 집의 죽림리 마을은 풍수지리상 명당자리로 유명하다
(사진: 초간 종택 별당 전경)
b) 초간 일기: 보물 제 879호
이 책은 초간 권 문해가 쓴 친필 일기이다. 그는 명종 15년(1560)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정언, 장령, 시간, 집의 등 청요직(淸要職)과 동부승지, 좌부승지 등의 내직을 지내고, 안동, 대구부사, 공주목사 등의 외직을 역임 하였다.
조선 선조 13년(1580)에서 24년(1591) 까지 11년 동안 일상의 대소사와 국정의 진행 내용 등 자기가 겪은 다양한 일을 “先祖日記”, “草澗日記” “辛卯日記”의 순으로 기록하여 남기었다.
“선조일기”는 공주목사와 삼사의 관직에 있을 때인 선조 13년 11월 20일 에서 17년 7월 까지 5년간의 일기로 일상과 관직에서 겪은 일을 상술하고 있다.
“초간 일기”는 1580. 12. 20~1584. 7월 까지 먼저의 선조일기를 그대로 정서 한데 이어 1590년 4월 6일까지 이어간 일기로 주로 행서채로 쓰고 있다.
“신묘일기”는 승지로 있을 때인 1591. 7~10. 6일 까지의 일기로 주로 국정운영에 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당시 사대부의 생활뿐 아니라 정치, 국방, 사회, 교육, 문화, 지리 등 국정에서부터 다방면에 이르는 일을 다루어 당시의 사회상을 연구하는 중요한 사료로 평가된다.
C) 예천 권씨 종가 문적(文籍): 경북 유형 문화재 제 170호
조선 인조 때의 학자 죽소(竹所) “권 별”(1589~1671) 이 쓴 <해동잡록>과 <죽소일기> 등 두종의 저술이다. 권 별은 초간 “권 문해”의 아들로 평생 고향에서 처사로 지냈다.
<해동 잡록>은 문헌 설화집으로 역사의 사적과 인물열전에 나오는 사람들을 왕조, 성씨 별로 분류해 일화를 정리해 놓았다. 국내 최초의 왕조 별 인물사전으로 14권 14책으로 1670년에 완성되어 정조 22년(1798)에 가서야 일부분이 판각되었다.
(사진: 백승각 전경)
<죽소일기>는 인조 3년 을축년(1625) 정월부터 다음해 12월 까지 일상사를 담은 친필 일기이다. 1책으로 가로 24㎝, 세로 28㎝의 닥나무 종이에 썼다. 두 저서 모두 권 문해의 초간일기와 함께 별당 옆에 “백승각”(百承閣)에 소장되어 있다.
D) 백승각
서고 및 유물각으로 이용되고 있는 백승각은 초간정사 옆에 지은 서고 였으나, 후에 사당 옆으로 옮겨와 도난에 대비해 새로이 지었다.
“대동운부군옥” 판각 677본과 “자치통감 강목”전집 등 문서들을 보관하였으나 자치통감강목 전질이 최근 도난 당하였다.
(사진: 대동운부군옥 판각 모습)
e) 초간정(草澗亭): 경북 문화재 자료 제 143호
이 건물은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을 저술한 초간 권 문해(1534~1591)가 세우고 심신을 수양하던 곳이다. 그는 관직생활과 당쟁에서 벗어나 자연을 즐기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와 지은 정자로 맑은 계곡과 푸른 소나무 사이 암석 위에 위치하고 있다.
조선 시대의 사림의 은거생활과 무위자연의 자연관을 보여주는 명승지로 바위를 돌아 흐르는 계류가 운치를 자아내는 곳으로 이곳 “초간정 원림”은 명승 제 51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 선조 15년(1582)에 처음 지어진 이 건물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중건. 지금의 건물은 초간의 현손이 1870년 중창한 것으로 기암괴석과 주변의 경관이 조화를 이루어 관광지로 각광을 받고 있다.
정자 채는 사주 문을 통하여 들어가며 뒤쪽과 오른쪽이 절벽을 이루고 있다.
자연 기단 위에 주초를 놓고 네모기둥을 세운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치마 팔작 집이다. 정면 3칸 중 앞 면의 좌측 2칸은 온돌방을 배치하고 나머지 4칸은 통 칸의 대청으로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측면은 사방으로 난간을 설치해 두었다.
(사진: 초간정 전경)
2. 석송령(石松靈): 천연기념물 제 294호.
이 석송령은 소나무의 한 품종으로, 가슴높이의 줄기둘레가 4.2m, 키가 10m에 이르는 큰 나무로 약 600여 년 된 것으로 추정된다.
일명 반송(盤松) 또는 부자나무라고도 불리며, 현재도 마을의 단합과 안녕을 기구하는 동신목으로 보호받고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약 600 여 년 전 풍기지방에 큰 홍수가 났을 때 석관천(石串川)을 따라 떠내려 오던 것을 지나가던 과객이 건져 이 자리에 심었다고 하며, 그 후 1930년 경에는 당시 이 마을에 살던 “이 수목”(李 秀睦)이란 사람이 영험있는 나무라는 뜻으로 “石松靈”이라는 이름을 짓고 자기소유의 토지 6.600㎡을 상속 등기해 주어 이때부터 이 나무는 수목으로서는 드물게 토지를 소유한 부자나무가 되었다.
(사진: 감천면 천향리의 석송령 전경)
3. 주마산 한천사(走馬山 寒天寺)
a) 한천사 철조여래좌상(鐵造如來坐像): 보물 제 667호
광배와 대좌가 없어진 이 철조 불상은 철불들이 많이 조성되던 신라 말 불상계통을 보여주고 있는 우수한 작품이다.
얼굴은 우아하면서도 침잠한 인상을 풍기는데, 건강한 상채, 당당한 어깨, 양감있는 젖가슴, 결가부좌(結跏趺坐)의 의젓한 모습, 탄력있는 다리와 함께 신라 말 불상으로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뛰어난 기량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긴 상체라든가 편편한 콧잔등, 두드러진 인중 등에서 신라 말의 특징이 잘 드러나고 있어서, 당시 유행하던 신라 말 철불상들 가운데 걸작의 하나로 보인다.
(사진: 철조여래 좌상 전경)
B)한천사 3층 석탑: 경북 유형문화재 제 5호
이 탑은 통일 신라 시대 후기에 건립된 전형적인 3층 석탑이다. 서남향으로 세워진 한천사 대적광전 정면에 위치하여 2중 기단 위에 3층의 몸 돌을 세웠다.
상륜부에는 노반(露盤)과 복발(覆鉢)이 남아있다. 몸 돌부는 몸 돌과 지붕 돌이 각각 한돌로 되어 있으며 몸 돌 받침은 4단씩이고, 3층 지붕 돌 정상부에 찰 주공이 파져 있다.
경내에 있는 철불 좌상과 제작연대가 같은 것으로 추정되며 통일 신라시대 후기의 일탑식 가람의 일례로서 시대양식의 비교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높이는 3.6m로 소형의 우아한 석탑이다.
(사진: 한천사 3층 석탑 전경)
4. 개심사지(開心寺址)5층 석 탑: 보물 제 53호
이 탑은 고려 초기에 처음 건립된 개심사에 위치해 있던 탑으로 높이가 4.3m 이고, 이중 기단 위에 5층의 몸 돌을 올리었다.
상층기단 덮개 돌 밑에 새겨진 <統和 27년 庚戌年>이라는 석탑기에 의하여 이 탑이 고려 현종 원년(1010)에 건립된 것으로 판단된다.
1층 몸 돌 남쪽 면에 자물쇠가 꼭 채원진 문 모양의 조각 좌우에 칼을 거머쥔 금강 력사상을 배치하였다. 아래 기단 각 면에는 머리는 짐승이고 몸은 사람인 문관 복장의 12 지신상이 조각되어 있고, 윗 기단 각 면에는 물건이나 무기를 든 팔부중상(八部衆像)이 조각되어 있다. 몸 돌부가 안정되어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고려시대의 수법을 잘 나타낸 아름다운 탑이다.
(사진: 개심사지 5층 석탑과 12지신상 전경)
5. 동본리 3층 석탑: 보물 제 426호
이 탑은 높이 4.0m이며 탑의 규모가 크지 않으나 짜임새를 갖춘 아름다운 탑이다. 예천읍 남북으로 흐르는 한천의 둑 안쪽 근처의 주택과 한 켠에 석불입상 앞에 위치하고 있다.
탑신 부는 몸 돌과 지붕 돌이 각각 한돌이고 몸 돌에는 각각 모서리 기둥이 새겨져 있다. ‘
1층 몸 돌은 길고 크며, 2 층 이상의 체감률은 온화한 편이다. 몸 돌은 처마 밑이 수평이고 받침수는 1 층과 2층은 5단이고 3층은 4단이다.
석재 구성에 있어서도 규칙성이 있으며, 상단 기단의 1 구씩의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조각한 것이 특징이다. 조각 양식으로 보아 9세기 통일 신라 시대의 석탑이다.
(사진: 동본리 삼층석탑-하단 사천왕상 전경)
6. 동본리 석조여래 입상(石造如來 立像): 보물 제 427호
이 석조여래 입상은 높이는 346 ㎝로 원래는 무릅 이하가 땅속에 묻혀 있었으나 1960년에 신도들이 발굴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괴량감(傀量感)이 넘치는 신체, 평판적인 상체, 좀 어색한 자세이면서 네모진 얼굴 등에서 그 당시에 서있는 불상 양식을 잘 반영하고 있는 것 같다.
하체에 나타난 평행 계단적인 옷 주름, 가슴의 띠 같은 승강기 표현 등은 “도피안사 상”(到彼岸寺像)이나 “축서사 상”(蹵棲寺像)과 흡사한 9세기 불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활기찬 미소를 띤 풍만한 괴량감을 지닌 얼굴에서 당대의 거구불상에서 나타난 뛰어난 조형성을 말해주는 대작으로 평가 된다.
(사진: 석조 여래 입상 전경)
7. 용문사(龍門寺)
용문사는 경북 예천군 용문면 내지동에 위치, 산세가 수려하고 울창한 수림이 운치를 더해주는 천 년의 고찰이다. 현재 불교 조계종 제 8교구 직지사의 말사이나 규모가 아주 크다.
신라 제 48대 경문왕 10년(870)에 “두운조사”에 의해 창건되어 고려 시대에 와서 큰 가람을 형성하게 되었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두운조사가 산밑에 이르자 산 정상의 바위에서 용이 나타나서 용문사라 이름을 부치었고, 창건 도중 16냥이나 되는 은병을 캐내어 절의 공사비로 충당하였다 한다.
이 후 왕건이 삼국을 통일하여 고려를 세운 후 936년 태조 19년에 사찰을 중건하였고, 1171년에는 태자의 태를 봉안하였고, 세조 3년에는 교지를 내려 용문사 잡역을 감면토록 하였고, <소백산 용문사>명명하였다.
1200년의 역사 가운데 국보급 문화재가 다수 있다. 대장전, 회전식 장격각인 윤장대, 목각 탱화 및 목각 삼존 불, 세조의 교지, 팔상 탱, 천불 탱, 목조아미타불 여래좌상 등 보물급이 다수 있다. 영남 제일의 강원으로 자리매김 되어 있다.
a) 대장전(大藏殿): 보물 제 145호
대장전은 단층 맞배 지붕의 다포계 건물로서 정면 3칸, 측면 2 칸짜리 남향으로 정좌하고 있는 법당이다. 고려 명종 3년(1173)에 건축되었고, 부처님의 말씀이 담긴 경전과 경판을 모셔 놓았다.
우리나라의 맞배 지붕으로 서는 가장 균형미가 잡혀 있으며 기둥 위 붕어, 연꽃, 귀면 등의 조각들은 화재를 막아주는 부적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용문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사진:대장전 전경)
내부는 마루를 깔았고 중간 뒷 편에 불 단을 마련해 좌,우 협시를 거느린 작은 여래상을 안치하였고, 후불 벽에는 목각 탱이 걸렸는데 현재로서는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불 단 앞 좌우에 고려 명종 3년에 설치되었고, 인조 3년(1625)에 중수 된 회전식 윤장대(輪藏臺)가 한 쌍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것이다.
b) 윤장대(輪藏臺): 보물 제 684호.
윤장대는 인도의 고승이 대장경을 용궁에 소장하였다는 고사에 따라 용이 나타난 이곳에 대장전을리 짓고 부처님의 호국을 축원하기 위하여 조성한 것으로, 대장경을 보관하던 용도로 쓰였다.
고려 명종 때 “자운스님”이 처음 조성 하였다. 대장전 내부의 좌우 일자로 모셔져 있으며 좌우 윤장대의 크기나 모양은 같으나 창호의 형태가 다르다. 부처님의 법이 사방에 퍼지라는 의미와 우리나라 지세를 고르게 하여 난리가 없고 비바람이 순조로워 풍년이 들라는 의미도 있다고 한다. 이를 한번 돌리면 과거급제와 죽음 복을 받는다는 전설이 있다. 전경신앙(轉經信仰)의 예를 보여주는 귀중한 보물로서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세계적인 문화유산이다.
(사진: 윤장대 모습)
C) 목각좌상(木刻坐像) 및 목각탱화(木刻撑畵): 보물 제 989호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는 “목각 탱”은 숙종 10년(1684)에 대추나무로 조성된 것으로 <목각 후불탱>중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목각 탱의 기본 구조는 상하가 긴 장방형이지만 좌우로 운문광선을 표현한 능형의 조각을 덧붙여 장엄하게 장식하고 있다. 조각면에 중앙에 봉인되어 있는 본존불은 보상당초문이 새겨진 화려한 키형 광배를 등지고 결가부좌하고 있으며 아미타불을 묘사하고 있다. 본존불 이외의 대중들은 사천왕, 8대 보살, 두 제자들인데 모두 상, 중, 하 3행으로 배치시키고 있다. 하열은 사천왕상으로 본존 대좌 좌우로 2구씩 일렬로 서 있으며, 중앙과 상열에는 각기 좌우 2 보살씩 모두 8대 보살이 배치되었고, 상열의 보살 좌우에 다시 무릎을 꿇고 합장하는 2대 제자를 배치하여 구도의 의미를 살리고 있다. 목각 탱 앞 면에는 삼존 목불 좌상이 놓여져 있는데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오른쪽은 관세음 보살, 왼쪽은 대세지 보살이다. 사바 세계에서 고통 받는 중생들을 안락과 평온의 극락세계로 인도하고자 하는 아미타 부처님의 서원이 잘 나타나 있다.
E) 교지(敎旨): 보물 제 729호
조선 시대 닥종이로 만든 교지로서 경상감사와 예천군수에게 전지를 내려 절을 잘 보살피고 잡역을 면제해 주도록 한 내용이 실려 있으며 세조의 친필 수결이 있다. 숭유억불 정책으로 사찰탄압이 심했던 시대였음에도 당시 용문사의 위상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관리의 임명장인 교지는 조선 세조 3년(1457)에 내린 용문사의 잡역의 면제를 인정하는 사패교지(賜牌敎旨)(즉 공로가 있는 자에게 나라에서 부역을 면제해 준다는 문서이다)이다.
교지는 가로 44.8㎝, 세로㎝ 66.5로 국왕의 수결이 있는 희귀한 것이다.
(사진: 왕의 수결 교지 원본)
f) 괘불(掛佛): 보물 제 1445호
야외에서 법회를 할 때 사용하는 것으로 1070㎝x675㎝ 의 장대한 이 괘불은 숙종 31년(1705)에 제작된 것이다. 주존 석가여래와 좌 우 협시 보살은 문수와 보현보살로서 화려한 천의와 보관장식이 매우 다채롭다. 협시 보살 후방에는 2대 제자인 가섭과 아난이 합장한 자세로 있다. 이 괘불은 이 방면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g) 천불탱(千佛撑): 보물 제 1644호
1709년 제작되어 현존하는 용문사 불화중 제작연대가 앞서 있는 것이다. 5폭에 삼베를 이어 만든 붉은 바탕에 백선으로 결가부좌한 천불의 모습을 표현하였다.
존사의 얼굴과 신체는 육색, 나발은 청색으로 옅게 채색하여 시각적인 단순함을 추구하였다. 주홍색의 바탕에 최소한 색만 올리고 백선의 묘선이 강조된 이러한 불화를 선묘불화라고 하는데 그 전통은 <사경변상도>에서 찾을 수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