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8.20 우리문화유산답사-이씨조선의 발상지-전주일대-(30)
2015. 08.20
우리 문화 유산 답사
이씨조선 발상지에서
< 조선의 얼을 찾아 가는 길>
-전주 일대-
(30)
글, 사진: 김 한 종
(사진: 태조 이성계 어진)
지금은 고속도로로 쉽게 갈 수 있지만 전주는 한양에서 먼 거리였다.
호남 평야로 내려간 입구 복판에 자리잡아 멀리로는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땅이었다.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중심지로 온산이라 불리었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 한 후에 전주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고려 시대에는 완산으로 불리다가 조선 태종 때에 전주로 불러진 것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역사적으로 본다면 견훤의 후백제의 도읍지였으며, 조선시대에 <李 成桂>의 5대조부터 살았다는 기록이 있어 전주는 이씨 조선의 발상지로 일컬어진다.
(사진: 전주 일대 답사지도)
그 예로 기울어져가는 고려말기에 왜구의 침입이 잦아지자 <우 왕>이 이 성계를 시켜 지금의 지리산 근처 황산에서 왜구를 무찌르고 개선하다가 그의 조상이 살던 전주 외곽 자만동에서 승전기념 잔치를 하면서 “대풍가”를 불렀다는 기록이 오목대에 남아있다.
그 후로 함경도 북방에 여진족을 평정하고, 나아가 고려 말 <우 왕> 때 명나라를 치기 위해 요동 정벌에 나섰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한 역사를 돌이켜보면 그는 장수로서 고려 말 <최 영> 장군 휘하를 벗어나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한 꿈을 이루어가는 시기였다.
당대에 고려는 최 영 장군을 위시한 충신 <정 몽주> 같은 고려의 왕실을 지키려는 신하가 있는 반면, 쇠잔해가는 나라를 버리고 새 왕조를 꿈꾸는 삼봉 <정 도전> 같은 인물이 이 성계를 옹립하여 새로운 왕조를 열려고 한 것이다.
당시에 그가 승전에 돌아오면서 이곳에 그의 조상이 남긴 얼을 이어받아 조선이 건국되면서 전주는 이씨 조선의 발상지로서 역할을 하였다.
그로 인해 전주에는 중앙동, 풍남동 등에는 이씨 조선 창업과 관계되고 왕실의 발상지였다는 유산이 곳곳에 남아있다.
전주성의 남문이었던 풍남문, 전주객사, 조선 창업의 역사가 담긴 경기전과 그곳에 보존된 태조의 어진(御眞)은 이곳이 조선 왕조를 연 이씨의 근거지였음을 상기시켜 준다.
이번에 조선 왕조 창업의 발자취와 1800년대에 천주교의 전래지로 이곳에서 수많은 순교 복자가 탄생한 곳으로서 전주인의 개화기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이다. 시내 “경기전”(慶基殿) 앞에 전동(全洞)성당은 천주교의 성지로서 자리를 굳건히 하고 여기를 중심한 일부 종교인들의 반골 성향도 강한 곳이다.
아울러 종교적인 개화에 맞서 완주군 산속 깊은 곳에 자리잡은 화암사는 이런 전주의 유교 사상과 신흥종교의 발전과는 달리 멀리 백제시대에 사찰이 숭유배불(崇儒排佛) 정책에도 살아남아 오늘날에도 불교가 아직도 산속에 은둔 할 수 있는 실체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이런 여러 가지 역사에 얽힌 전주일대를 이번에 다양한 유산을 찾아보는 계기를 마련하고, 문화유산을 온전하게 지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전주의 한옥 마을에서 느껴보고, 우리는 이제 새로운 문화 일지를 써가는 시대에 이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1.오목대(梧木臺): 전북 기념물 제 16호
오목대는 太祖 李 成桂가 남원에서 왜구를 무찌르고 돌아와 전주 이씨 종친들을 모아 “대풍가”(大風歌)를 부른 곳이다.
고려 말엽 1380년 왜구의 침략이 빈번해져 백성들이 불안에 떨자 <우 왕>은 이 성계를 전라, 경상, 충청 3도를 관장하는 순찰사로 임명하고, 남원으로 내려가서 왜구를 소탕할 것을 명령 했다.
당시 북쪽의 거란족의 침입을 막아내며, 영웅으로 추대 받던 이 성계가 남원에서도 적장 “아지발도”를 무찌르고 말을 1600여필이나 포획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용비어천가에 기록을 보면 이 성계가 첫 번째 화살로 아지발도의 투구 끈을 끊고, 두 번째의 화살로 이마를 맞혀 투구를 벗기자 그의 부하 <이 지란>이 화살을 날려 사살했다고 전해 진다.
왜구를 전멸시키고 승리감에 찬 이 성계는 개성으로 가는 도중 길목에 있는 오목대에서 전주 이씨 종친들을 불러모아 크게 잔치를 베풀었다. 집안 어르신들을 모시고 잔치를 벌이며, 발 밑에 펼쳐진 전주시가지를 보면서, 호탕한 모습으로 대풍가를 불렀다. 대풍가란 중국의 한나라를 세운 <유 방>이 자신의 고향인 풍현 패촌에서 불렀다는 노래다.
북방에서 거란족과 여진족을 무찌르며 승승 장구하던 이 성계는 남원 황산 전투에서 승리 함으로서 명실공히 고려의 실력자로 부상 하였다.
그리고 무능한 정권에 실망했던 백성들은 승승장구하던 이 성계 장군을 보고 “목자득국”(木子得國-이씨가 나라를 얻는다)의 노래를 불렀다. 고려의 실력자로 고려가 멸망하기 전 12년 전의 일이었다.
누각 왼편으로 1900년대에 와서 고종의 친필로 새겨진 <太祖高皇帝駐畢遺址>(태조고황제주필유지)라는 비석이 비각 안에 모셔져 있다. 이는 조선을 창업한 “태조께서 말을 멈추고 머물렀던곳”이라는 뜻이다.
왜 고종은 이런 비각을 세웠을까? 아마도 기울어져 가는 조선을 바로 세워야 하겠다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사진: 태조 고황재 주필유지비)
2.이목대(梨木臺)
지금은 기린대로로 인해 오목대와 이목대가 나뉘어져 있지만, 원래는 자만동으로 같은 곳이었다. 1930년 전라선 철도가 지나가면서 맥이 끊어 졌다. 자만동은 전주 이씨가 자리잡고 살았던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여기에도 고종이 친필로 쓴 <穆祖大王舊居遺址>(목조대왕구거유지) 라는 비각이 서있다. 즉 이 성계의 4대조인 목조대왕(穆祖大王) <이 안사>(李 安詞)가 살았던 터라는 뜻이다.
(사진: 이 안사가 살았다는 터전의 비각)
“이 안사”와 얽힌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어린 시절 이 안사는 아이들과 전쟁놀이를 하고 있었는데 그때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났으나 이 안사가 이를 물리첬고 호랑이는 도망갔다.
1270년 이 지역의 토착 세력이었던 이 안사는 당시 전주목사와 대립하다가 170 여 호의 주민들을 거느리고 외가가 있는 삼척현으로 옮겨갔다고 한다. 그는 다시 삼척현에서 17년을 살다가 함경도 의주로 이주한 뒤 원나라에 귀부했다. 그 뒤 이 성계의 부친인 <이 자춘>이 다시 고려에 귀부할 때 까지 함흥 일대를 다스렸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3. 경기전(慶基殿): 사적 제 339호 (전주시 완산구 태조로 44)
이곳 경기전 일대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 성계의 초상화를 보관하기 위해 세운 경기전을 비롯한 많은 역사유적과 유물이 자리잡고 있다.
본래 경기전은 옛 전주부성 동남쪽에 광대한 면적을 차지하고 많은 부속건물을 거느린 웅장한 규모였으나, 일제 강점기에 절반의 땅을 잃고 부속건물은 철거 되었다. 이후 점차 복원되어 옛모습의 일부나마 되찾은 경기전 경내에는 조선 예종대왕의 태를 묻어 두었던 태실과 그것을 기념하는 비석, 그리고 조선 왕조 실록을 보관하던 전주사고(全州史庫)가 있다 경내 뒤쪽에는 진주 이씨의 시조인 <이 한>과 그 부인의 위패를 모셔둔 “조경묘”가 자리잡고 있다.
a) 경기전 정전: 보물 제 1578호
경기전 정전은 조선 왕조를 세운 태조 이 성계의 초상화를 보관하고 있는 곳으로 태종 10년(1410)에 세웠다.
태조의 초상화를 보관하는 건물은 원래 개성, 영흥, 전주, 경주, 평양 등 5곳에 있었는데, 이곳 경기전 정전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임진왜란 때(1592) 모두 불타버렸다.
(사진: 경기전 전경)
경기전 정전도 정유재란(1597) 때 불탓으나 광해군 6년(1614)에 다시 세웠으며, 회랑을 두어 최고의 사당임을 나타내었다.
경기전 입구에는 말에서 내리는 속임을 표시한 하마비. 붉은 색 갈의 홍살문, 내삼문, 외삼문, 그리고 초상화를 모신 전각으로 구성 되었다.
b) 태조 어진(太祖 御眞): 국보 제 317호
정전의 한가운데 감실을 두고 <태조 어진>을 모셔 놓고 있다. 청룡포를 입고 전신상 어진으로 건국자의 위엄이 서려있다. 1872년 고종 9년에 새로 모사한 어진이며, 원본은 초상을 물에 씻어내고 백자 항아리에 담아 진전 북쪽에 묻었다.
태조 어진을 봉안한 감실안에는 습기와 냉기를 제거하고 병충해를 막기 위해 부용향을 담은 붉은 색의 향 주머니를 넣어 두었다. 감실 앞쪽에 어진을 호위하는 운검 한 쌍을 세워 두었으며, 정전 좌우편으로 용신, 봉선, 흉개, 청개 등의 의장물을 배치하였다.
(사진: 경기전 안에 태조 어진)
C)예종대왕 태실(胎室) 및 비: 전북 민속자료 제 26호
이 태실은 조선 예종 대왕의 태를 항아리에 담아 넣어둔 석실이다. 왕가에서는 아기가 태어나면 그 태를 소중히 여겨 석실에 보관하여 왔는데 이를 태실이라 한다. 원래 선조 11년(1578) 완주군 구이면 원덕리 태실 마을 뒷산에 세웠다가 영조 10년(1734) 다시 고처서 세웠다.
1929년 일본의 조선총독부가 태 항아리를 가져 가면서 파괴되어 구이 초등학교 부근에 있던 것을 1970년 이곳으로 옮기었다. 이 태실은 팔각형 돌 난간 안에 기단석을 놓고 그 위에 둥근 돌을 얹은 다음 지붕 돌로 덮었다. 비석은 태실과 함께 옮긴 것이고, 예종대왕의 태실 임을 알리는 글과 비석의 건립연대를 앞면과 뒷면에 각각 새겼는데 그 건립연대는 선조 11년(1578)이다. 잘 보존된 거북모양의 받침돌과 뿔 없는 용의 모습을 새긴 머릿 돌이 돋보이는 비석이다.
(사진: 예종대왕 태실 비와 태실 전경)
d)전주사고(全州史庫):
1439년 외사고의 설치가 결정 되었으나, 1445년 실록봉안이 이루어질 당시까지 전주에 사고가 건립되지 않았다. 따라서 전주사고에 보관하기 위해 내려 보낸 <태조실록>~<태종실록>은 전주성내에 승의사(僧義寺)에 안치되었다.
이 후 실록은 1464년 가을에 전주객사 북쪽에 있는 진남루(鎭南樓)로 옮겨졌다가 1472년 세종실록과 예종실록이 완성됨에 따라 전주에 <양 성지>(梁 誠之)를 봉안사로 파견하고 이를 계기로 경기전 동쪽에 실록각을 건립하였다. 이 후 실록은 임진왜란이 일어날 때까지 각 왕대의 실록이 순차적으로 봉안되었다.
전주사고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하여 <고려사>,<고려사 절요> 등 각종서적 총 1322책이 60개의 궤(실록 47궤, 기타 13 궤)에 담겨 보관되고 있었다.
(사진: 복원된 전주사고 전경)
e)임진왜란과 실록의 보존사
조선 왕조 실록이 후대에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경기전 참봉 ”오 희길”과 태인지방 선비 “손흥록”, “안 의”를 비롯해 무사 <김 홍무>, 수복<한 춘> 등 전라도 사람들의 죽음을 불사한 노고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들은 실록을 정읍 내장산으로 옮겼고, 다시 왜구의 침입이 예상되자 내장산에서 아산으로 옮겼다. 이 후 다시 해주로 옮겼고, 임진왜란이 소강상태에 이르자 1595년에 강화도로 옮기었다.
1597년 다시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실록은 평안도 안주를 거처 묘향산 보현사 별전으로 옮겨 임진왜란이 끝날 때 까지 보존하였다. 이 실록은 임진왜란 후 영변부 객사를 거처 1603년 강화도로 옮겨 졌다.
이후 실록은 전주사고 본을 바탕으로 만들어 정족산, 태백산, 오대산, 적상산에 각기 1부씩 보관하였으나 일제 때에 반출되는 불운도 겪었다. 그러나 마니산(정족산)사고 외에는 모두 소실되었다.
*조선 왕조 실록
우리나라는 조선시대 부 터 춘추관과 예문관을 상설하고 사관을 두어 날마다 시정을 기록하였으며 한 임금이 전왕대의 역사를 편찬하여 이를 실록이라 하고 특별히 설치한 사고에 봉안하여 왔었다.
조선 왕조에서 실록을 편찬한 것은 1409년 태종 9년부터 1413년 태종 13 년 까지 4년간의 태조실록 15권을 편찬한 것이 처음이며 1426년 세종 8년에 정종실록 6권을 편찬하고, 1413년 세종 13년에 태종 실록 36권을 편찬 한 후 태조, 정종, 태종의 3조 실록을 각 2부씩 만들어 1부는 한양의 춘추관과 다른 1부는 충주사고에 봉안하였다.
그러나 그 후 다시 1445년 세종 27년에 2부씩 만들어 전주, 성주에 사고를 짓고 보관하였다.
1592년 선조 25년 임진왜란 때 춘추관, 충주, 성주의 3사고는 모두 소실되었고, 전주사고 만이 병화를 면하였다. 그것은 <손 흥록> <안 의> 등이 실록을 내장산 용굴암에서 이안, 사수하였기 때문이다.
전주사고에는 실록 784권 614책 47궤, 기타 전적이 64종 556책 15궤가 봉안되어 있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실록각이 소실되었는데 1991년에 이를 복원하였다.
조선 왕조 실록은 국보 제 151호로 1997년 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사진: 사고에 보관된 실록 사본 모습)
F) 조경묘(肇慶廟):전북 유형 문화재 제 16호
조경묘는 전주 이씨의 시조인 이 한<李 翰>과 그의 부인의 위패(죽은 사람의 이름을 새긴 나무 패)를 모신 사당이다. <이 한>은 신라 때 사공(司公-도성을 쌓고 고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의 벼슬)이라는 벼슬을 지냇고, 그 부인은 경주 김 씨이다.
조선을 세운 이 성계는 <이 한>의 21대 후손이다. 조경묘는 조선 영조 47년 (1771)에 세워 졌으며, 영조가 세손 정조로 하여금 쓰도록 한 <이 한>과 그 부인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철종 5년(1854)에 경기전과 함께 보수해 오늘의 모습을 갖추었다.
조경묘는 경기전과 함께 전주가 조선 왕조의 발상지임을 상징하는 곳이다.
(사진: 조경묘 전경-미개방)
G) 어진 박물관(御眞 博物館)
어진 박물관은 <태조 어진> 전주 봉안 600주년을 맞이해 2010.11. 6 일에 개관. 이곳에 국보 제 317호인 태조 어진, 세종, 영조, 정조, 철종, 고종, 순종 의 어진이 보관 전시 되었고, 일월오봉도, 용선, 봉선 도 보관되어 있다.
태조 어진의 역사, 제례유물, 채여, 가교 등과 가마유물, 태조 어진 봉안 행렬도 등이 전시되어 있다. 태조에서 25대 철종 대 까지 현존 어진은 <태조, 영조, 철종>의 3개 어진이 남아있다. 세종과 정조 어진은 기록으로 전해지는 모습을 후대에 그린 것으로 표준영정이다.
여러 차례 전란으로 소실되었고, 6.25 동란 때도 부산으로 이안했다가 1954년에 일부가 소실되었다.
(사진: 어진 박물과 전경)
이외에 경기전 부속건물로 제사를 맡아 관리하는 수복청, 마청(말을 두는 곳), 용실(제수용 음식을 만드는 곳), 조과청(떡, 다식 등을 만들어 보관), 어정(임금이 마시는 우물), 수문장청(경기전을 지키는 수문 꾼의 숙소), 전사청(제기 등을 보관하는 곳), 동재, 서재(제관들이 제례의식을 거행하던 곳)등이 있다.
4.전동 성당: 사적 제 288호 (전주시 완산구 전동)
이 성당은 조선 시대의 천주교도의 순교 터에 세운 성당이다. 정조 15년(1791)에 최초의 순교자 윤 지충(바오로)과 권 상연(야고보), 그리고 순조 원년(1801)에 호남의 첫 사도 <유 항검>(아우구스티노)와 윤 지선(프란치스코) 등이 풍남문 밖인 이곳에서 박해를 받고 처형되었다.
이들이 순교한 뜻을 기리고자 1908년 프랑스 신부<보두네>(Baudounet)가 성당 건립에 착수하여 1914년에 완공. 어머님의 품처럼 포근 하면서도 웅장하고 화려한 로마네스크 식 복고풍의 이 건물은 인접한 풍남문, 경기전과 더불어 전통문화와 서양문화의 융합의 상징이다.
성당 입구 우측에는 전주교구 순교 복자 24위(여성 7명 포함)의 사진과 세례명이 나이와 더불어 기록되어 있다.
(사진: 전동 성당 전경)
5.풍남문(豊南門): 보물 제 308호
이 문은 조선시대 전라감영의 소재지였던 전주를 둘러싼 성곽의 남쪽 출입문이다. 전주성에서는 동서남북에 각각의 출입문이 있었으나 현재는 이 문만 남아 있다.
고려시대에 처음 세웠으나 정유재란 때 화재로 소실되었다. 영조 44년(1768)에 전라감사 <홍 락인>이 다시 세우면서 풍남문이라 불렀다.
<풍남>이란 풍퍠(豊沛)의 남쪽이란 뜻이며. <풍패>란 중국의 <漢>나라 고조가 태어난 곳으로 조선왕조의 발원지인 전주를 그곳에 비유한 것이다. 성문 위에 세운 누각 윗 층의 기둥이 아래층의 기둥과 하나로 연결된 것이 특징이다. 도심에 자리하여 옛 전주성의 면모를 느낄 수 있다.
(사진: 풍남문 전경)
6.전주객사 (풍패지관):보물제 583호
조선 초기에 세운 객사 (풍패지관)로 전주를 찾아온 관리나 사신의 숙소였다.
본관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나무 패를 걸어두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이면 여기에 경의를 표했으며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에는 축하 의식을 행하였다.
본관에 현판인 <豊沛之館>의 풍패는 중국 한나라 고조가 태어난 지방으로 조선왕조의 발원지인 전주를 비유한 말이다.
전주 풍패지관에는 본래 좌우에 날개 채가 딸린 본관을 비롯한 많은 건물이 있었다. 최근 동쪽 날개 채를 복원하여 본관의 옛모습을 되찾았고, 경내에는 풍패지관을 지키던 수직사가 남아있고 지금은 열린 공간으로 되어 있다.
(사진: 전주객사-풍패지관 전경)
7.전주향교: 사적 제 379호 (전주시 완산구 향교길)
향교는 조선시대에 지방 자제의 교육을 담당하기 위해 나라에서 세운 학교이다.
전주향교는 세종 23년 (1441)에 경기전 근처에 지었다가 전주 서쪽의 화산 기슭으로 옮기었다. 그러나 향교가 전주성 밖에 있어 불편하다 하여, 선조 36년(1603) 전라감사 장 만(張 晩)이 다시 지금의 자리로 옮겨 지었다.
현재 경내에는 공자 등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 공자 부친의 위패를 모신 계성사(啓聖祠), 중국과 우리나라의 유학자를 모신 동무(東廡), 서무, 명륜당 그리고 학생기숙사인 동제, 서제 등 많은 건물이 남아있다.
a) 대성전: 전주 유형 문화재 제 7호
대성전은 공자를 모신 사당이다.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시대에는 향교에 공자를 모시는 사당을 두고, 유학을 장려했다. 이 대성전은 효종 4년(1653)에 다시 세우고 대한 제국 융희 원년(1907)에 다시 고처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성전에는 공자의 위패를 가운데 모시고, 동,서쪽으로 맹자 등 4성인, 공자의 제자 10인, 주자 등 중국 송나라 때 유학자 여섯 사람을 함께 모시었다. 동무, 서무에는 신라시대 설총을 비롯한 중국과 우리나라 유학자 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향교에서는 매달 음력 초하루 보름에 사당에 향불을 피우고, 매년 봄, 가을 에는 석전대제(釋奠大祭)를 지냈다. 관청의 후원을 받아 향교의 선비들이 주관하여 치렀던 이 제사는 공자의 뜻을 기리는 큰 행사이다.
(사진: 대성전 전경)
8.완판본 문화관: 기록 문화의 성지
완판본 이란 전라감영이 있었던 전주(완산)에서 발간한 옛 책과 그 판본을 말하며, 조선 시대 목판 인쇄는 서울의 경판, 전주의 완판본, 대구의 달성판, 그리고 경기의 안성판이 있었으나, 그 중 판본의 종류나 규모에서 전주의 완판본이 최고라고 할 수 있다.
완판본은 16세기 후반부터 우리나라 출판문화를 보급하는데 큰 몫을 담당했는데, 주로 중앙관서나 감영, 향교, 서원 등이 책의 간행을 주관했다. 이 중 상업적인 판매를 목적으로 출판된 완판본, 방각본은 전국적인 보급망을 갖추고 서울의 경판본과 경쟁할 정도로 성행 하였다.
전주의 완판본이 이렇게 활성화된 것은 전라도와 제주도를 관할하던 전라감영의 출판물이 많았고, 책에 대한 수요층이 증가하여 서적시장이 활성화 되었으며 책을 제작하기 위한 한지가 대량으로 생산 되었고, 목판을 제작하기 위한 목재와 기술력이 우수한 각수들이 많았고, 판소리의 소설화 요구와 한글 소설을 통한 한글 대중화가 이루어 졌기 때문이다.
이곳의 완판본 문화관은 전주의 왕성 했던 출판문화를 중심으로 기록문화의 땅 전주의 문화를 재조명 하고자 설립되었으며, 이를 통해 전주의 경제, 문화, 사회, 사상 등이 총체적으로 담겨 있는 완판본을 새롭게 정리하여 전주의 미래가치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곳 완판본 문화관에서는 출간된 완판본을 직접 만나볼 수 있으며,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완판본과 인쇄문화 출판사가 왜, 어떻게 전주에서 융성 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밖에 목판 인쇄 체험과 제본 체험 프로그램을 통해 완판본이 성행했을 당시 기법으로 책을 직접 만들어 볼 수 있다.
조선시대의 정부의 요청에 따라 전주 감영에서 많은 서적들이 출판되면서 지역의 학문이 크게 발전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대부들의 요청에 따라 사가에서 문집과 서적들이 출판되었다. 이렇게 사가에서 출판된 서적들을 <사간본> 이라고 하며 약 250 여 종에 이른다.
(사진: 전주 완판본 문화관 전경)
전주는 조선시대에 출판을 위한 각수, 한지, 출판인, 서포(출판사)등이 발달하였고, 조선 후기에 들어서 대 토지를 소유한 사람들의 경제적인 여유와 인쇄기술, 유통구조가 발전하면서 서민들의 요청으로 판매용 책인 <坊刻本(방각본)>이 많이 간행 되었다. 당시 전주에서 간행된 책은 다음과 같이 세 종류로 구분할 수 있다.
a) 교육과 생활도서:
전주에서는 전라감영과 향교 등을 중심으로 유교경전과 왕권강화 등을 위한 서적을 발간하는 한편, 일상적인 생활에 필요한 기초 한자, 관혼 상제, 편지쓰기, 한방 등을 배우기 위한 교양도서들이 많이 발간 되었다.
한자 학습을 위한 천자문, 전운옥편, 어정규장전운, 상례유초(상을 당했을 때 예를 갖추는 것), 유서필지(관공서의 문서 작성법) 등이 출판되었다.
b) 유교경전:
조선조 유학자들이 애독했고 과거시험의 기본교재로 사용되었던 “사서삼경”이 주였다. 사서는<논어>, <맹자>, <대학>, <중용>으로 성리학의 기초를 이루며, 유교적 소양을 지닌 지시인 들은 <시경>, <서경>, <주역> 등을 공부하였다.
완판, 방각본 중 “사서삼경”은 다양한 서지적 특징을 보이는데, 다른 방각본과는 다르게 아주 큰 책으로 발간되었으며, 휴대하기에 편하게 수진본(袖珍本)으로도 발간 되었다.
c) 완판 방각본 고전소설:
완판본 방각본의 반이 소설이며, 가장 오래된 판본은 조선 후기 숙종 때 서포 김 만중이 쓴<구운몽>으로 이를 필두로 1916년까지 113년간 이나 발간되었다.
또 완판본 한글고전 소설은 <별원봉기>(1823), <구운몽> (1962), <죠웅전>(1866) 등이 발간되었다. 특히 완판본 한글 고전 소설은 매우 우수하여 근대소설 발달에 영향을 크게 주었다. 현존하는 완판본 한글 고전소설은 23가지로, 이중 판소리계 소설로는 <춘향전>, <심청가>, <화룡도>, <토별가> 등 이고 나머지는 영웅소설이다. 이런 영웅소설은 약 50여 종류나 된다.
9) 전주 한옥 마을
전주의 한옥마을은 완산구의 풍남동과 교동 일원의 면적 296.330㎡에 산재 되어 있다. 현재 995가구 2.202명이 거주하고 있다. 총 708동의 건물 중 한옥이 543개이고 나머지 165동은 개조된 것이다.
원래는 자연 부락으로 마을이 형성 되었으나, 665년 신라 문무왕 때 완산주가 되면서 전주 읍성이 축조 되었다. 읍성을 중심으로 고려 시대에 한백당, 오목대 등이 지어지고 그 주위로 자만동 마을이 형성 되었고 지금의 한옥 마을의 모태가 되었다.
(사진: 전통 한옥마을 지정 당시의 모습)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일본인들이 전주읍성에 들어와 서문 밖에서 거주하였다. 당시 일제는 호남평야의 쌀을 수탈해가기 위해 전주에서 군산항까지 도로를 내기 위해 1911년에 전주 읍성의 남문을 제외하고 철거되면서 도로가 생기었다. 일본인들이 이 도로변에 벗꽃 나무를 심어 나중에 벗꽃 길로 유명해진 “전군가도”가 생기었다. 당시 일본인 들이 성안으로 들어오자 한국인들은 교동과 풍남동에 한옥 촌을 짓기 시작하여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지금의 한옥마을이 형성된 것이다.
100년 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지금의 형태를 이루었으니, 경주나, 안동의 한옥 마을과는 달리 도시 환경과 구조에 맞게 발전 되어온 도시형 한옥이다. 그로 인해 전통 체험과 먹거리 등이 들어차면서 지금은 관광명소로 자리잡고 있다.
전주시가 한옥마을에 본격적인 투자를 시작한 것은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이다. 당시 월드컵 경기장을 개장한 전주시는 월드컵과 함께 전주를 관광도시로 만들기 위해 한옥마을을 관광지로 조성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부터 전주시는 태조로 등 전통문화거리를 조성하고, 전통 한옥 생활체험관, 전통문화센터, 공예품 전시관 등 전통 문화시설을 갖추게 된다.
한옥마을로 사람을 끌어드리는 것은 바로 먹거리에 두고 있다. 예부터 전주 비빔밥, 콩나물 국밥, 한정식, 칼국수, 순대국밥, 막걸리 등의 먹거리 개발로 먹방 투어의 거리로 자라 잡아가고 있다. 한옥과 커피에 이어 한옥카페가 들어오면서 젊은이들이 모여들고 밤 문화가 형성되니 이제는 전통적인 한옥 문화와는 거리가 먼 곳으로 되었다.
전주가 2010 국제 슬로시티로 지정되면서 한옥마을은 2014년에는 방문객이 600만 명을 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7번째로 슬로시티로 선정되었다.
(사진: 먹거리 마을로 전락한 모습)
9.전주 역사 박물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스로건 아래 전주의 역사와 문화를 재조명 하고 전주학의 메카를 꿈꾸는 곳이다. 2002.5. 24 일 개관하였다.
1층: 전주 역사실로 선사시대~고려시대 까지 전주의 역사와 문화를 개관.
선사시대의 유적과 유물로 본 전주의 모습, 마한시대의 소 국가의 탄생과 백제의 전라도 병합, 백제의 부흥운동과 통일 신라 시대의 온 고을 전주의 탄생, 후백제의 왕도 전주, 고려 시대의 전주 등으로 구성 되었다.
2층: 기증 유물실. 개관당시 고 김 철순 선생이 기증한 300여 점의 민화와 개인 문중에서 기증한 유물전시, 승암사 소장 불서, 칠산군 파 종중문서, 황녀 “이 문용”의 8곡 병풍 등 전시.
3층: 기획전시실로 사용..
4층은 동학 농민 혁명실로 1894년 일어난 농민 혁명의 사상, 배경, 전개과정이 전시.
5층은 조선시대의 전주의 역사와 문화로서 조선 왕조의 발상지, 전주감영, 조선 왕조 실록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진: 전주 역사 박물관 전경)
10. 한벽당(寒壁堂): 전북 유형 문화재 제 15호
승암산 기슭 절벽을 깎아 세운 누각으로 옛사람들이 “한벽청연”(寒壁晴烟) 이라 하여 전주팔경의 하나로 꼽았다. 한벽루에 푸르스름하게 피어오르는 전주천의 물안개가 장관이다.
한벽당은 조선의 개국공신으로 벼슬길에 올랐던 월당 ”최 담”이 벼슬을 그만두고 전주에 낙향해 1404년에 건립한 정자다. 처음에는 그의 호를 따서 “월당루”라고 불렀다. ”한벽” 이라는 이름은 주자의 시구 “벽옥한류”(碧玉寒流)에서 따온 말인데 정자 아래의 바위에 부딪혀 옥처럼 부서지는 시리도록 찬물을 뜻한다.
최 담은 문과에 급제해 호조참의와 집현전 직제학 까지 올랐다. 낙향 후 전주 한옥마을에 전주 최씨의 문중 집터와 종가를 조성한 사람이다. 조선 시대의 사대부들은 살림집만이 아니라 경치 좋은 곳에 누각을 하나 지어야 그곳에 제대로 정착했다고 생각했다. 최 담은 한벽당을 지음으로서 낙향의 대미를 장식한 것이다.
1931년 일제가 한벽당을 헐어내고 철길을 내려 했으나, 전주의 유학자들이 막아냈다. 1985년 한벽당 바로 밑으로 4차선의 한벽교가 가설 되었다. 600년 전주천의 역사를 머금은 한벽당은 오늘도 도도하게 서 있다.
(사진: 숲에 쌓인 한벽당 전경)
11. 완주 화암사(完州 花岩寺): 보물 제 662호
화암사는 고산현 북쪽 불명산속에 자리잡고 있다. 골짜기가 깊고 사람의 발길이 닿기가 어려운 산속에 자리잡고 있다. 계곡으로 난 바위 길로 올라가 벼랑위로 난 계단 길을 한동안 올라야 겨우 다을 수 있는 사찰로 금산사의 말사이다.
(사진: 불명산 화암사 전경- 안으로는 우화루)
a) 우화루(雨花樓): 보물 제 662호
이 건물은 극락전의 정문과 같은 성격의 누문 형식인데 정면만을 누문 형식으로 하고 후면은 단층건물로한 반 루각식으로 되어있다. 현재의 건물은 조선조 광해군 3년(1611)에 세워진 것으로 여러 차례 중수되었으나 크게 변형되지 않은 것 같다.
정면 지층의 기둥은 4칸이나, 2층에서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되어 있다. 공포는 안과 밖이 모두 3 출목 형식의 다포집 양식이며, 공포부재의 조각 솜씨로 보아 조선 초기의 양식이 가미된 느낌이 든다. 내부는 남쪽 중앙에 고주 2개를 세워 대들보를 그 위로 얹고, 한쪽으로 이어진 퇴량은 평주 위 공포에 얹게 하였다. 천정은 연등천정이며, 대들보와 고주 위에서는 화반 형식의 포작을 짜서 동자기둥의 기능을 하도록 하였다.
b) 극락전(極樂殿): 국보 제 316호
이 건물은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하앙식 구조물로. 조선 선조 38년(1605)에 지은 것이다. 하앙은 기둥과 지붕 사이에 끼운 긴 목재인데, 처마와 나란히 경사지게 놓여 있다. 이것은 처마와 지붕의 무게를 고르게 받친다. 극락전 앞쪽 하앙에는 용머리를 조각하였으나, 건물 뒤쪽 하앙은 꾸밈없이 뾰족하게 다듬었다. 건물안에는 “아미타삼존불상”이 있다. 하앙식 구조로는 중국과 일본에서 많이 볼 수 있지만 한국에는 이 건물이 유일한 것으로 목조 건축물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사진: 화암사 극락전 전경)
c) 화암사 동종: 전북 유형 문화재 제 40호
극락전 안에 있는 이 동종은 조선시대에 만든 것으로 전체 높이는 107㎝, 밑지름 70㎝, 종 머리 에는 용모양의 고리가 있고, 종 어깨 위 가장자리에도 꽃 잎 무늬의 장식이 줄지어 있다. 그 밑으로는 폭이 8㎝인 간소한 꽃무늬 띠를 둘렀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 종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타 광해군(1608~1623) 때에 다시 만들었는데 , 새벽이면 저절로 종이 울려 스님과 신도를 깨웠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이 무기를 제조하려고 쇠붙이를 가져가려고 일본 헌병이 사찰로 오자 종이 스스로 울려 스님들에게 미리 알렸기에, 스님들이 땅속에 종을 묻었다가 광복 후에 꺼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전주 일대에는 위에서 본 것처럼 전주 이씨의 본산으로 태조 이 성계의 5대조인 목조, 익조, 도조 환조 등 조상들의 얼이 서린 곳으로 조선의 발상지임을 말해주고 그 뿌리를 자랑하면서도, 숭유배불 정책에도 멀지 않은 불명산 자락에는 화암사라는 조계종의 전통 사찰이 고색창연하게 자리잡고, 600년을 넘어 유지되어 문화의 본 고장임을 말해주고 있다.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