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9.17.우리문화유산답사-한국정신문화의 고장-안동일대-(31)
2015.09.17.
우리 문화 유산답사
한국정신문화의 고장
(31)
<안동일대>
글,사진:김 한 종
(사진: 전교당 연수 모습)
경북 안동은 우리 나라 정신문화의 정수가 있는 곳이다. 동쪽으로는 태백산맥 자락에 진보, 영양에 이르고, 북서쪽으로는 소백산맥이 경계를 이루고 영주와 봉화, 풍천과 예천이 있고, 중앙으로는 낙동강의 본류가 흐르고, 안동호가 자리잡아 천혜의 자연경관이 뛰어나 신비를 더해주고 있다.
이러한 고장에 불교, 유교, 최근에 기독교로 이어지는 전통 종교가 정착하여 한국의 정신 문화의고장으로 문화유산이 가득한 곳이다.
경북 북부의 중심으로 신라 혁거세 원년인 BC 57년에 “창녕국”이 세워졌고, 경덕왕 때 “고창군”으로 불리었다. 고려 태조 13년(930) 이곳 병산에서 태조 왕건과 후백제 견훤의 싸움에서 성주인
<김 선평>, <권 형>, <장 정필> 등이 왕건을 도와 공을 세워 그들이 이곳 <태사묘>에 봉안돠어 있고 그로 인해 <안동도호부>로 승격되었다.
(사진: 안동시 지도)
고려 공민왕 10년(1361) <홍건적의 난>이 일어나 왕이 이곳으로 피신하였고, 이조 고종 32년 (1895)에 안동에 관찰부를 두고 동북부 17개 군을 관할하였다. 1974년 안동 땜이 건설되었고, 1995년에 안동시와 안동군이 통합 13면 10개 동으로 되어있다. 현재는 인구가 168.282 명으로 제자리 걸음이다.
가장 오래된 불교유적으로 화엄교의 본산인 <봉정사>(국보로 극락전, 대웅전 등)가 있고, 동방의 주자로 불리는 퇴계(退溪) <이 황-李 湟> 선생이 태어난 곳, 임진왜란 때 명재상 서애(西厓) <류 성룡-柳 成龍>, 또 학자이자 뛰어난 전략가로 진주대첩을 이룬 <김 성일-金 誠一>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또 한말에 독립 투사로 임시정부 시절 국무령을 지낸 석주(石柱) <이 상룡-李 相龍>(1858~1932)선생이 태어난 고장으로 독립운동가의 가문을 이루고 있다.
그로 인해 당시에 학문의 전당인 향교와 서원이 발달하여 도산 서원, 안동 향교, 병산 서원 등 지금도 26개나 현존하며 년 2회 봄, 가을에 향사(享祀)를 봉행하는 정신 문화의 본거지이다.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아 목판, 서적, 무형문화가 전수되어오면서 23개나 되는 박물관의 도시로 거듭나고 있다.
다채로운 민속문화의 발달로 “하회별신굿 탈놀이”, “차전놀이” 등 서민들의 놀이문화가 이어져 오고 있다.
최근에 영국의 현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한국방문 시 이곳 “하회마을”을 찾아 양반문화의 본류인 풍산 류씨의 동성마을의 “양진당”과 “충효당” 등 고택을 찾고, ”하회별신 탈놀이”와 전통음식을 함께하면서, 이곳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문화의 고장으로 2010. 7. 31일 우리나라 중요민속문화재 제 122호로서 UNESCO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는 영광을 안게 되었다.
이처럼 오랜 전통을 이어가면서 수많은 문화재가 이 일대에 산재해 있어 수 차례 광범위한 답사를 하여야 할 것으로 생각되며 이번 답사가 그 첫 번째가 되며 앞으로 몇 차례 보완하여 안동의 정수를 정리하기로 한다.
이번에는 먼저 유교문화와 하회마을 중점적으로 방문하여 소개하려 한다.
1.학봉 종택(鶴峯 宗宅): 시도 기념물 제 112호
이 집은 의성 김씨 학봉 김 성일(金 誠一)(1538~1593)이 살았던 곳이다. 학봉은 퇴계 이 황의 제자로 성리학에 깊은 이해가 있었으며 27세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조선 선조 1년(1568)에 문과에 합격한 이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의 학문은 영남학파의 학문적 전통계승에 큰 영향을 주었다.
학봉 종택은 원래 지금의 자리에 있었는데 지대가 낮아 물이 들어오자 영조 38년(1762)에 이곳에서 100m 떨어진 곳으로 옮기었다. 그 후 1964년 다시 지금의 위치에 안채만 옮기고 사랑채는 남겨두어 소개서당(邵溪書堂)으로 쓰도록 하였다. 안채는 오른쪽 3칸이 대청이고, 왼쪽 2칸이 안방이며 그 끝이 부엌이다. 이 건물은 많은 변화를 거첫지만 종택으로서 품위를 간직하고 있다.
(사진: 학봉 종택 전경)
a) 운장각(雲章閣): 김 성일 선생의 유물관(1987년 개관)
운장이란 “저 높은 은하수처럼 하늘 가운데서 빛난다.”(倬彼雲漢, 爲章于天)라는 시경의 한 구절에서 나온 것이다.
운장각은 경연일기, 해사록 등 학봉의 친필유고와, 사기, 고려사 절요 등 조선 초기의 간행된 전적 261점과 교지, 간찰 류의 고문서 17종 242점 등 총 73종 503점이 국가보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선생이 사용하던 안경, 벼루 등의 유품과 후손의 서적, 고문서 등이 보관되어 있다.
학봉은 문과에 급제하여 내외 청 요직을 두루 거치고, 명나라와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내치와 외교에 전력을 다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어려움을 극복하고 초유사(招諭使), 경상우도 관찰사로서 관군과 의병을 총지휘하여 임진왜란의 삼대첩인 진주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계사년(1593) 4월 왜적과의 계속된 전투와 굶주린 백성의 구휼에 진력하던 중 진주공관에서 순국하였다. 청렴 강직한 성품과 애국애민의 삶으로 이조판서 대제학에 추증되고 문충공(文忠公)의 시호를 받았다. 학봉은 퇴계선생의 적전고제(嫡傳高弟)로서 학통전수의 징표인 병명(屛銘)을 받았으며, 후학들은 조선 성리학의 정맥으로 면면히 계승되어 한말 민족 독립운동에 까지 이른다.
그의 유문(遺文)을 한대 묶은 <학봉전집>이 전해온다.
(사진: 운장각 전경)
l ”바다에는 이 순신, 육지에는 김 성일”
학봉은 진작부터 “진양은 호남의 보장이다. 진양이 없으면 호남이 없고, 호남이 없으면 나라를 어쩔 수 없다. 적이 노리는 바가 이곳이니 방어를 늦출 수 없다. 끝까지 목숨을 걸고 지킬 것이다.” 라고 하여 군량조달지로 호남방어를 위한 진주사수 전략을 세웠다. (선조실록에서)
이는 충무공 이순신이 “호남이 없으면 국가도 없다”(若無湖南 是無國家)라는 전략과 일치한다.(이 충무공 전서에서)
학봉은 이 전략하에 산속에 있던 <김 시민>을 불러 초모관으로 삼고, 성(城)과 호(濠)를 다스리며 수성태세를 갖추게 했다. 성 밖에는 <최 경희>등 호남의병과 <곽 재우>,< 김 준민>, <윤 탁>, <조 응도>,<정 유경> 등 각지의 의병을 협력하게 하였다. 결사대를 조직하여 적의 포위를 뚫고 남강을 건너 성안으로 무기를 공급하여 마침내 3만의 왜적을 격퇴하여 “진주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리고 승전의 모든 영광을 휘하 장수와 의병에게 돌리고, 그 중심인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진주수성 승첩장”으로 조정에 보고 하였다.
2. 임청각(臨淸閣): 국가 보훈 지정 현충시설(보물 제 182호)
임청각은 중종 14년(1519년) 에 형조좌랑을 지냈던 고성 이씨 <이 명>(李洺)이 지은 집으로 원래는 99칸의 집이었으나 지금은 70여 칸만 남아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민가의 하나로 독립운동가로 대한민국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石州) 이 상룡(李 相龍)(1858~1932)의 생가이며 그의 아들과 손자 3대에 이르는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유서 깊은 곳이다.
용(用)자가 가로 누운듯한 독특한 평면 구성으로 이루어진 긴 건물은 남녀와 계층별로 매우 뚜렸한 공간 구분을 이루고 있어 건물의 위계질서가 매우 분명함을 알 수 있다.
별당 형식의 정자건물인 군자정(君子亭)은 임청각의 사랑채로서 평면이 “丁”자를 옆으로 누인 형태이다. 이 정자 내부에는 이곳을 찾은 시인, 묵객들의 아름다운 자연에 취해 지은 시들이 걸려 있다.
임 청각이란 당호는 퇴계 이 황의 친필로 도연명의 귀거래사 중 ”동쪽 언덕에 올라 길게 휘바람을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짓기도 하노라”에서 따온 것이다. 건물 앞으로 흐르는 낙동강과 영남산 자락에 터전을 잡은 건물이 자연환경과 잘 어울린다.
(사진: 군자정 전경)
3. 도산서원(陶山書院): 사적 제 170호
이 서원은 조선 선조 7년(1574) 에 건립한 것으로 퇴계(退溪) 이 황(李 滉)<1501~1570>의 위패를 모시고 후손과 제자들이 향사하며 후학을 양성해 온 곳이다. 영지산을 뒤로 하고 동취병, 서취병으로 둘러 쌓인 아늑한 골짜기 안에 안동호를 바라보며 자리잡고 있다. 선조가 이름을 내렸고 편액은 동왕 8년(1515) 석봉(石夆) 한 호(韓 濩)가 썼다.
이 서원은 영남 유림의 정신적 구심점으로 대원군의 사원 철폐령 당시에도 그대로 존속한 전국 47개 서원중 하나이다. 1969~70 년에 정부의 고적보전 정책으로 성역화되어 보수하였고 유물전시관인 <옥진각>을 신축하여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도산 서원의 소유고서 100여 종과 5.000여 책과 <퇴계 문집>을 비롯한 목판 총 37종 2.790 판을 보존과 학술연구를 위해 지금은 한국국학진흥원에 위탁 보관하여 오고 있다.
(사진: 도산 서원 전경)
★ 퇴계 이 황의 생애와 사상
퇴계 이 황은 이조 연산군 7년 1501년에 태어나 선조 3년 1570년에 작고 하였다.
그는 주자학을 이 땅에 도입하여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계승하여 조선의 성리학을 뿌리 내리게 한 위대한 석학이었다.
그는 우주만물은 理와 氣에 이원적 요소로 구성되었고, 이에 인간은 이,기의 도덕적 가치를 확립하고, 그 완성으로 인의예지(仁義禮智)의 4 단론과 칠정론(七情論)을 주장하여 학문적으로 완성하여 성리학의 근본을 이룩하였다.
(사진: 퇴계 이황 선생 모습)
그의 理,氣의 이원론적 주 이론은 理로서 4단을, 氣로서 칠정을 다스려 인간이 선한 마음을 간직하여 바르게 살아가고, 모든 사람은 순리대로 다스려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理는 인간의 타고난 본성으로
1) 측은지심(惻隱之心): 불쌍히 여기는 마음. 2) 사양지심(辭讓之心): 양보하는 마음.
3) 수오지심(羞惡之心): 부끄러워 하는 마음. 4) 시비지심(是非之心):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마음
이라 하여 4단을 주장하였고,
氣는 인간 기질의 성정으로서 칠정론을 주장하였으니
1) 희(喜)-즐거워하는 것. 2) 노(怒)-노여워 하는 것. 3) 애(哀)-슬퍼하는 것. 4) 구(懼)-두려워함.
애(愛)-사랑는 것. 6) 오(惡) - 미워하는것. 7) 욕(慾)-욕심을 내는 것. 즉 인간의 마음을 잘 다스려야 살아간다는 사상을 정착시키고 그의 제자 류 성룡, 김 성일 등 많은 후학을 양성하고, 그의 이런 사상은 후세에 계승되어 유학계의 본류를 이루고 오늘날 퇴계사상 연구로 이어가게 되었다.
a)전교당(典敎堂): 보물 제 210호
사원의 중심이 되는 건물로 선조 7년(1574)에 건립된 대강당이다.
건물의 구조는 매우 간소하며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집으로 강당인 대청과 거실인 온돌방 (한존제-閑存齊)으로 구성되어 있다. 쪽 마루는 건물 뒷면의 대청 뒷부분과 온돌방의 오른편에 설치하였다. 대청의 윗부분은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으며 선조가 하사한 현판의 글씨는 명필 <한 석봉>이 쓴 글씨 이다.
(사진: 도사서원 안에 한석봉의 친필 현판)
b) 도산 서당
퇴계선생께서 4년에 걸쳐 지으신 건물로 몸소 기거하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거처하시던 방은 “완락제(玩樂齊)”라 하였고 마루는 “암서헌(巖栖軒)”이라 하였다.
(사진: 도산 서당 전경)
C) 정우당(淨友塘)
퇴계선생은 꽃 중의 꽃으로 군자라는 연꽃을 심고 정우당이라 칭하였다. 연꽃은 진흙탕에 살면서도 몸을 더럽히지 아니하고, 속은 비고 줄기는 곧아 남을 의지하지 않으며 향기는 멀수록 맑다.
d) 장판각(藏板閣)
서원에서 찍어낸 책의 목판본을 보관하는 곳이다. 선조 어필(宣祖 御筆), 퇴계선생 문집, 유묵, 언행록, 병서(屛書), 도산 12곡(陶山12曲) 등의 목판 2.790장을 보관해 오다가 보존과 학술연구를 위해 한국국학 진흥원으로 이관 보존하고 있다.
e) 역락서제(亦樂書齊)
퇴계 선생께서 도산서당에서 학문을 강론할 때 정 사성(鄭 士誠)을 비롯한 제자들이 힘을 모아 세웠다. 현판의 글씨는 퇴계선생의 친필이다.
f) 광명보(光名宝)
책을 보관하는 서고로서 현판은 퇴계 선생의 친필이다. 동,서 두 곳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습해를 방지하기 위해 누각식으로 지었다. “光明”은 “많은 책이 서광(瑞光)을 비추어 준다”는 뜻이다.
g) 천광운영대-천연대(天光 雲影臺-天淵臺)
퇴계 선생은 서원 경내를 중심으로 양편 산 기슭이 절벽을 이룬 동쪽을 천연대, 서쪽을 운영대라 불렀다. 천연대는 시경에 나오는 “솔개는 하늘높이 날아오르고,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노네”(鳶飛戾天 魚躍于淵)라는 글에서 따온 것이고, 운영대는 “빛과 구름 그림자 함께 돌고 돈다.”(天光雲影共徘徊)라는 주자의 “觀書有感”이란 시에서 인용한 것으로 도산서원 일대를 엄숙한 수도의 장으로 꾸며 천리의 이치를 깊이 사색하고 자연의 심오한 참뜻을 깨우치기 위해 조성한 자연 체험장이다.
h) 도산서원 상덕사(尙德祠)와 정문(보물 제 211호)
상덕사는 조선 선조 7년(1574)에 건립되었으며 이 황의 위패를 모시고 향사를 지내는 곳이다. 도산서원에 제일 뒤쪽에 위치하며, 정면 3칸, 측면 2칸이다.
정문은 기단을 화강암으로 만든 돌로 4단을 쌓은 후 그 위에 기둥을 세웠다. 정문은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홑 처마에 맛배 집이다. 건물의 구조는 전교당과 비슷하며 네모 기둥에 공포를 두지 않은 간략한 굴도리 집이며 부연이 없는 홑 처마로 꾸며 매우 검소한 건물이다.
(사진: 퇴계의 위패를 모신 상덕사)
i) 시사단(試士壇): 지방 유형 문화재 제 33호
조선 정조 16년(1792) 에 정조가 평소에 흠모하던 퇴계선생의 학력을 기리고 지방선비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서 어명으로 특별과거인 “도산별과(陶山別科)”를 보인 장소 이다. 총 응시자 7.288명 이었고 왕이 직접 11명을 선발하였다.
(사진: 시사단 전경)
j) 유물전시관(옥진각)
서원구내 좌측에 새로 지은 전시관이다.
전적 류로 도산 12곡, 언행록, 자성록, 근사록, 선학 10도 외 유묵 78권과 그가 사용하던 유품 , 혼천의, 백자 타호, 매화 등 15점이 보관 전시되어 있다.
4. 하회(河回)마을: 중요민속자료 제 122호
이 마을은 풍산 유씨가 600년간 대대로 살아온 한국의 대표적인 동성 마을 이며, 와가와 초가가 오랜 역사 속에서도 잘 보존된 곳이다. 특히 조산시대 대표유학자인 류 운룡과 임진왜란 때 영의,정을 지낸 류 성룡 형제가 태어난 곳으로도 유명하다.
마을 이름을 하회라고 한 것은 낙동강이 “S”자 모양으로 마을을 감싸 안고 흐르는 데서 유래되었고 물이 돌아가는 곳에 있다 하여 우리말로는 ”물도리동”으로 불린다. 하회마을은 형국상으로 태극형, 연화 부수형, 행주형에 해당하여 이미 조선 시대에서 부터 사람살기에 가장 좋은 곳으로 유명하여 졌다. 마을의 동쪽 태백산맥에서 뻗어 내려온 해발 327m의 화산(花山)이 있고, 이 화산의 줄기가 낮은 구릉지를 형성하면서 마을의 서쪽 끝까지 뻗어 있으며, 수령이 600여 년 된 삼신당 느티나무가 있는 지역이 마을에서 가장 높은 중심부에 해당한다.
(사진: 하회마을 조감도)
하회마을의 집들은 삼신당 느티나무를 중심으로 강을 향해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좌향이 일정하지 않다. 한국의 다른 마을들의 집들이 정남향 또는 동남향을 하고 있다는 것과는 상당히 대조적인 모습이다. 또한 큰 와가(瓦家)를 중심으로 주변의 초가들이 원형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는 것도 특징이다.
하회마을 에서는 서민들의 놀이인 “하회별신굿 탈놀이”와 선비들의 풍류놀이인 “선유출 불놀이”가 현재까지도 온전히 전승되었고, 우리나라의 전통생활문화와 고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는 문화유산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a) 양진당(養眞堂): 보물 제 306호
이 집은 풍산 류씨 대 종택으로 풍산에 살던 류씨가 하회마을에 최초로 들어와 15세기에 지은 집으로 임진왜란으로 화재를 겪고, 여러 대에 걸쳐 지어진 흔적이 남아있다. 대 종택답게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며, 문중의 모임을 이곳 사랑채에서 가진다.
“양진당”이라는 이 집은 풍산 류씨 족보를 최초로 완성한 류 영(柳 泳 1687~1761)의 호에서 따온 것이다.
(사진: 양진당 전경)
b) 충효당(忠孝堂): 보물 제 414호
이 집은 서애 류 성룡(1542~1607)의 종택으로 17세기에 지어 졌다. 류 성룡은 벼슬 은퇴 후에 귀향해 풍산현에 있는 초가집에서 죽음을 맞이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그의 손자와 제자들이 생전에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충효당”이란 이름은 “평소에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라”는 말을 강조한 데서 유래한다. 12칸의 긴 행랑채는 류 성룡의 3세 손인 류 상조가 병조판서를 제수 받고 군사들을 수용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사진: 충효당 안채)
c) 영모각: 보물 제 160호
영모각은 류 성룡의 유물을 전시해 놓은 전시관으로 1966년 6월에 개관하였다. 이 건물은 하회마을 충효당 내에 있으며 면적은 179㎡이다. 류 성룡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의정으로 이 순신과 권 율 같은 명장을 조정에 천거하였다. 현 영모각의 현판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친히 쓴 것이다. 전시관에는 <징비록-懲毖錄>(국보 제 132호), <류 성룡 종손가의 문적>(보물 제 160호),<류 성룡 종손가 유물>(보물 제 460호)등이 소중히 보관되어 있고, 기타 영의정 임명 교지, 도체찰사 교서, 선조 친필 밀유부서 등 귀중한 유물과 문서가 보관되어 있다.
또 그가 사용하였던, 가죽신, 갑옷, 건대, 유서통, 인장, 투구 등 서애가 사용하였던 물품이 전시되어 있다.
d) 화경당(和敬堂)
조선 정조 21년 (1797)에 류 사춘이 사랑채, 날개채, 대문채를 짓고, 철종 13년(1862)에 증손자 류 도성이 안채, 큰 사랑채, 사랑을 지었다. 집의 구조가 웅장하고 내갓 집의 격식을 완벽하게 갖추어 전형적인 사대부 가옥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큰 사랑채의 누마루에 앉으면 아름다운 풍광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다. 300 여 년의 세월을 품고 서있는 큰 사랑채 뒤편의 소나무는 하회마을을 굽어보고 있는 강물의 형상을 하고 있어 또 다른 볼거리이다. 화경당 이란 화(和)로 어머니를 섬기고, 경(敬)으로 임금을 섬긴다는 뜻이다.
e) 민속주-안동 소주: 경북 무형 문화재 제 12호
안동소주는 고려 시대 이후 명문가의 가양주로 계승되어 왔으며 안동의 술 담그기 전통비법인 증류식 소주로 경북 무형 문화재 제 12호로 기능 보유자인 <조 옥화> 여사가 정성 들여 빚은 술이다.
안동의 “맑고 깨끗한 물과 옥토에서 수확된 양질의 쌀”을 가지고 전승되어온 전통 기법으로 빗어낸 증류식 소주로 45도의 높은 도수에도 마신 뒤에는 담백하고 은은한 향취에다 감칠맛이 입안 가득히 퍼져 개운한 맛으로 유명하다.
증류식 소주로 장기간 보관이 가능하며 오래 지날수록 풍미가 좋아진다는 장점을 가진 전통 민속주이다.
l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안동 방문
1999년 4. 19~22 일 당시 김 대중 대통령의 초청으로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과 부군 필립공이 한국방문 시 21일에 이곳 하회마을을 찾았다.
여왕은 하회마을 충효당 앞에 기념식수를 하고, 김치와 고추장을 담그는 것도 보고, 담인재에서 “하회별신굿탈놀이”를 관람하고 생일상을 받았다.
안동 농산물 시장에 들러 경매과정도 보고 “봉정사”에 가서 한국의 전통 불교 사찰도 둘러보고, 북도 처보고 돌탑을 쌓기도 하였다.
당시에 여왕은 질문도 하여 큰 관심을 보여 주었고, <안동은 전통 문화를 간직한 도시>라고 불러 주었다.
(사진: 엘리자베스 여왕과 부군 필립공)
안동 하회별신굿 탈놀이
하회마을 상설 공연장인 전수관에서 년 중 1~2월을 제외하고 매달 수요일, 토요일 오후 2~3시에 공연한다.
상설 공연장인 전수관은 야외무대이며 이 마을에 600여 년 전부터 전승해 내려오는 탈춤이다.
총 10개 마당으로 구성되었고 이매 탈(바보탈-국보 제 121호), 초랭이 탈 (양반의 하인으로 등장하는 인물), 영반 탈, 각시 탈, 선비 탈, 백정 탈, 할미 탈 등으로 무동마당, 백정마당, 할미마당 등 여러 마당으로 나누어 공연한다.
탈춤이 시작되기 전 부정한 것을 물리치는 마당이 “주미마당”으로 옛것에 대한 정화와 새로운 것의 희망을 보이는 것이다.
이매 탈은 가장 신비롭고 사라의 전설을 간직한 바보 탈이다. 턱이 없는 이매 탈은 항상 웃는 얼굴로 바보짓을 통해 세상의 졸부들의 위선을 풍자하고 천진난만한 웃음으로 모든 욕망을 털어내는 탈이다.
초랭이 탈은 비뚤어진 입으로 세상의 부조리와 위선을 풍자한다. 초랭이의 언어유희와 춤은 화합과 평화를 추구한다.
양반 탈은 얼굴은 주황색, 머리에 눈썹은 검게 하였고, 코는 매부리 코에 콧날이 벌어지어 강한 인상을 주며 양반의 여유로움을 표현하고 있다.
선비 탈은 역삼각의 작은 얼굴, 도끼눈에, 콧대는 찡그리고, 눈썹은 곤두서 있어 화가 난 표정이나 위엄과 강인함을 보여 준다.
할미 탈은 얼굴바탕이 검고 노색반점을 찍어 기미를 나타내고, 머리와 눈썹은 검은 칠을 했다. 눈을 둥글게 뚫었고 미간을 길고, 작은 코가 솟았다.
모두 양반과 서민의 풍자를 하며 웃음과 해학이 넘치는 공연으로 한 시간이 짧은 공연으로 가슴이 시원한 느낌을 준다.
(사진: 하회별신굿 공연 장면)
5.병산서원(屛山 書院): 사적 제 260호 (1978.3.31 지정)
병산 서원은 조선의 대표적인 유교 건축물로서 서애 류 성룡과 그의 3남 류 진을 배향하는 사원이다. 전신은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으로 고려 말 부 터 사림들의 학문의 전당으로 1614년 서애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존덕사를 세워 위패를 봉안하였다.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퍠령이 내려졌으나 제외되어 남아 있었다. 3월, 9월 초정일(初亭日) 에 향사하고 있다.
전체 면적은 6.285 평이다. 1572년 류 성룡이 지방관으로 있던 시절 현재의 자리로 이전, 임진관으로 불렀으나 1607년 중건, 1614년 존덕사를 세워 서원으로 바뀌었다.
1863년 사액서원(賜額書院)으로 승격, 강당은 1921년에 지었고, 사당은 1937년에 다시 지었다. 부속건물로 복례문(復禮門), 만대루(萬對樓), 장판각, 주사 등이 있다.
서원의 정문인 복례문과 만대루를 지나면 동재, 서재가 있다. 동재 뒤편으로 서있는 것은 서원관리인이 살았던 고직사(庫直舍)이고, 입교당 서쪽 뒤편에 서있는 것은 목판과 유물을 보관하는 장판각이다. 입교당의 동쪽 뒤편에 있는 계단을 오르면 사당으로 들어가는 내삼문과 사당인 존덕사(尊德祠)가 있고, 내삼문 동쪽에는 전사청이 있다. 열려있는 복례문 앞에 서서 안쪽을 바라보거나 서원 안에서 만대루를 통해 바깥을 내다보면 어디 하나 막힘이 없이 탁 트여 있어 건물과 건물 밖의 자연이 하나인 듯 느껴진다.
병산 서원은 서원이 번성하던 시기의 한 본보기로 여겨질 만큼 지은 솜씨가 빼어나고 보존이 잘되어 있는데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과 조화를 이루도록 지은 점에서 한국서원 건축의 백미이다.
(사진 병산 서원 전경)
a) 만대루(晩對樓)
만대루는 휴식과 강학의 복합공간이다. 2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큰 누각에 다른 서원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하고 아름다운 면이 있다. 휘어진 모습 그대로 서있는 아래층의 나무 기둥들과 자연 그대로의 주춧돌, 커다란 등나무를 깎아 만든 계단, 굽이도는 강물의 형상을 닮은 대들보의 모습은 건축물 조차 자연의 일부로 생각했던 조상들의 의식을 그대로 보여준다.
“만대”는 두보(杜甫)의 시 <白帝城樓>중 “푸른 절벽은 저녁 무렵 마주하기 좋으니”(翠扉宣 晩對) 라는 구절에서 따왔다. 그 이름처럼 해질 무렵에 이층 누각에 올라서 바라보는 낙동강과 병산의 경치는 아주 으뜸이다.
(사진: 만대루 전경)
b) 강학영역(講學領域): 입교당(立敎堂). 동재. 서재
강학영역은 학문을 연구하는 공간이다. 정면으로 보이는 건물은 “가르침을 바로 세운다”는 뜻의 입교당인데 원장과 유생들이 모여서 강론을 했던 곳이다.
강당은 서원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이다. 강당의 동쪽 방인 명성재(明誠齋)는 원장이 기거하던 곳이며, 서쪽 방인 경의재(敬義齋)는 교수와 유사들이 기거하던 곳으로 학교 교무실이다.
강당 정면에 서 있는 석조물은 밤에 불을 밝히던 정료대이다.
강당 앞 마당 좌우에는 유생들이 학문을 닦으며 기거하던 동재와 서재가 마주보고 있는데 나이가 든 유생들은 동재에 기거하였다. 서재의 작은 방은 장서실로 책의 보관을 위해 온돌을 놓치 않고 마루를 깔았다.
입교당의 대청마루는 한가운데 앉아 만대루를 통해 병산을 바라보면 강과 산으로 수놓은 일곱폭의 병풍을 펼쳐 놓은듯이 아름답다.
C) 제향영역(祭享領域): 내삼문. 존덕사. 전사청
제향영역은 향사를 지내는 공간과 이를 준비하는 공간이다. 내삼문을 들어서면 서애 류 성룡과 그의 3째 아들이자 제자인 수 암 류 진(柳 袗 1582~1635)의 위패를 모신 존덕사가 있다.
류 진이 이곳에 추가로 배향된 것은 현종 3년(1662)이다. 사당은 신성한 공간이며 위엄을 갖추어야 하기에 내삼문의 좌우로 담장을 둘렀다. 경사진 지형에 사원을 짓고 가장 높은 곳에 사당을 배치한 것은 이러한 까닭이다. 또한 강학 공간은 선비 정신에 따라 검소하고 단아하게 꾸민 데 비해 제향 공간은 단청도 하고 태극모양으로 장식을 하여 대조를 이룬다.
(사진: 내삼문 전경)
전사청은 제사를 지내기 전날에 제수를 보관하던 곳으로, 평상시에는 제기와 제구를 보관하고 있다. 사당과 같은 울타리에 있는 것이 보통인데, 이 사원의 전사청은 별도의 담장을 두르고 내삼문의 동쪽에 있다. 매년 음력 3월, 9월 초정일(음력 1~10일 사이에 날 중 천강이 <丁>으로 된 날) 에 향사를 지낸다.
답사에서 안동이 우리의 정신문화의 발상지라는 사실에 새삼 주목하며, 퇴계 사상과, 그를 따르는 영남학파와 류 성룡 부자와 김 성일 선생의 발자취를 좀더 연구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다.
이번 안동일대를 모두 답사하여 불교, 유교, 기독교 유적과 여러 가지 탈 춤과 각종 문화 행사를두루 섭렵하는 계기를 마련하고, 20여 개가 넘는 각종 박물관을 함께 다루어야 할 것이나 너무 광범하게 퍼져 있어 다음 기회에 다시 답사하여 종합적인 답사기를 쓰기로 한다.-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