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종 여행기/라오스 태국여행기

라오스-태국 여행기

땡큐 이영옥 2012. 1. 28. 11:18

 

 2012.01.06

 

  라오스,태국여행기

 

            . 김 한 종. 사진. 이 영 옥

 

  (사진: Phoukhon Phienhfan 정상에서)

 

(1) 동남아 오지로 가는 길

임진년 새해가 밝아왔다. 금년에 첫 여행지로 이번에는 오지여행을 하기로 한다.

2008년 뉴욕 타임스가 선정한 가장 자연이 잘 보존된 지역으로 동남아의 내륙 국가인

라오스를 선정 하였다. 요즘은 세계가 하나가 되어 모두다 문명의 이기를 누리고 살아가나, 라오스 산악지대에서는 아직도 부족 형태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여러 부족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초점을 맞추어 보려 한다.

자연에 순응 하면서 산간에서 문명의 이기와는 멀리 떨어져 사는 소수민족의 마을을 순방하며 그들이 어떻게 자연가운데 살아가며, 문화를 보존하여 가는가를 직접 살피려 한다.

첫째 날. 오늘이 소한 이라 올 겨울 들어 추위가 맹위를 떨친다. 겨울 방학 기간이라 공항버스는 승객이 만원이다. 간신히 2사람이 뒷자리를 차지하고 인천공항에 오니, 08:25분이다.

전산 장애로 타이항공의 티켇 발급이 지연되어 한 시간 이나 늦어 아시아나 라운지에 들어가 잠시 쉬었다가 Gate 122 에 와서 TG 629 홍콩 경유 방곡 행 비행기에 오른다.

 

 

                                      (사진: 타이 항공사  TG 629 )

 

 TG 629 기는 인천에서 방곡까지 3662 km, 5시간 30분 소요된다. 허나 홍콩을 경유하기 때문에 시간은 더 걸릴 것이다. 비행기는 이륙 후 기수를 돌려 덕적도 아래로 해서 태안 반도 상공을 거처 광주상공을 지나 제주도로 건너와 남지나해로 향한다.

한 시간이나 늦게 출발했으나 화창한 날씨에 맛있는 기내식과 더불어 승무원들의 친절에 14:45분에 홍콩 첵랍콕 공항에 내려 이동하여 다시 한번 검색을 통과하여 46 Gate로 이동한다.

이제 2078 km를 왔다. 다시 휴식 후 TG 629에 오르니 홍콩 시간 15:40. 이번에는 홍콩 방곡 1687km 이다. 방곡에서 또 다시 라오스의 수도 비엔티안 까지 515 km1시간 10분에 가야 한다. 기내 여성 승무원 Cabin Attendant Nidchaya Chanruang 이 광고모델로 아주 미모의 스튜어디스다.    

           

비행기는 하이난 섬과 중국본토 해협을 날아 통킹 만을 건너 하롱베이 섬 위로 날아 인도 차이나 반도로 들어오니 구름이 많이 끼어 아무것도 안 보인다. 구름위로 태양만이 눈부시게 빛난다. 라오스 루앙 프라방 상공으로 해서 태국국경을 넘어 17:30분에 착륙을 준비한다.

방곡의 Suvanabhumi 공항에 내리니 Vientiane(비엔티안) TG 574를 타기 위해 1km 이상을 이동해야 한다. 저녁시간이 없어 일본식 라면 가게에서 해물라면으로 요기를 하고 게이트를 찾아가니 19:00 시다. 방곡공항에는 뒤에서 해가 지고 있으니.

 TG 574 기는 20:15분 이륙하니 방곡시내는 일천만 인구를 품은 도시답게 불빛이 찬란하다.

기내에서 마시는 화이트 와인 덕에 피로가 풀리고?

현지시간 21:10 (한국보다 2시간 늦다) 내륙국가, 예전에 공산 Pathet LaoKongre대위가 반란을 일으킨 나라, 월남전 당시 호지명 루트가 지나간다며, 미국으로부터 혹독한 폭격을 당한 나라, 메콩강이 흐르는 나라 라는 상식밖에 없는 미지에 나라이다.

 

                  (사진: 방곡 수바나프미 공항의 광고 사진)

 

 

 

 

 

라오스 전도

비엔티안방비엥시엥쾅폰사반루앙프라방

 

 

(2) 내륙국가 라오스에 오다

 

수도 Vientiane

한국에서 아침 7시부터 17 시간이 넘게 3번의 비행기를 타고 라오스에 수도 비엔티안에 도착하니 한국시간으로 자정이 되었다.

낮 선 비엔티안에 이르니 하늘이 너무 어둡고 도시도 희미하다. 불이 드문 드문 보이고 현지시간 21:05분 착륙하여 공항을 나와 시내로 간다.

인구 60여 만. 기다림이 미덕인 나라라나, 모든 것이 느리게 움직여야 한다나?

주변의 5개의 국가로 둘러 쌓인 내륙국가, 밤에 결혼식을 올리는 나라라나?

지금은 건기(乾期)로 낮에는 28~32°c 로 밤에는 선선, 모기조심, 정수된 물만 먹어야 하고 감기에 조심하여야 한다.

이 나라는 월남전이 끝난 1975년 이후 조용한 나라가 되었고 세계의 이목을 한번도 받은 일이 없는 나라다.

우리가 탄 버스는 어둠이 내린 뒤라 야시장으로 가니 메콩강이 보이고 어느새 Don Chan Palace 호텔에 이른다. 이 나라 수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란다. 이 나라는 16개 주, 1 특별시로 구성, 음주운전 단속이 없는 유일한 나라다.

                 (사진: 비엔티안에서 최고 층 건물인 호텔 전경)

 

호텔 이름인 Don Chan 다리 섬 이란 뜻이란다. 21:55분 도착 8015호에 투숙.

 라오스란 어떤 나라인가?

정식 국명은 Lao Peoples Democratic Republic 이며 면적은 236,88 k, 인구 약 700 , GDP 1100$. 베트남, 캄보디아, 태국, 미얀마, 중국에 둘러 쌓인 동남아 유일의 내륙국가이다. 국토의 80%가 산악, 구릉, 고원지대로 이루어지고 중앙에 자르 평원이 있고 안남 산맥이 베트남과 경계를 이룬다. 농경지는 3%에 불과하다. 열대 몬순 기후로 5~10월이 우기(雨期), 11~4월이 건기(乾期)이다. 종교는 크메르의 영향을 받아 소승 불교 90%, 기타 정령 신앙 등이다.

 라오스의 역사를 간단히 살펴본다.

 이 지역에는 석기시대부터 인류가 살았다는 유적이 발견 되었으나 실제로는 중국 운남성 남쪽에서 살던 부족이 1253년 몽골 족의 침입으로 라오스 쪽으로 남하하였다. 이때 샨(Shans) , 시암 족 (Siamese), 라오 족 (Lao), 몽 족(Hmong) 등이 라오스로 내려와 산간에 화전을 일구며 살았다.

13세기경에 와서 파 응옴(Fa Ngum)이 주변의 부족을 규합하여 1353년에 루앙 프라방을 중심으로 란상(Lan Xang) 왕국을 건설 하였다.

백만 마리의 코끼리라는 의미의 왕국이다. 이 왕국은 인도차이나 반도의 최 강국이었으나 그 후 12명의 통치자가 이어 갔으나 1545세타티랏(Setthathirat)왕이 미얀마의 침입을 막고 1560년에 루앙 프라방(Luang Prabang)에서 비엔티안으로 수도를 옮기었다.

 

 

                                     (사진: 메콩강  제방공사  현장)

 

그리고 그는 비엔티에에 탓 루앙(That Luang)사원을 지었다. 란상 왕국은 그 후 200여 년간 번성을 하다가 1603년 미얀마의 침공으로 붕괴되었다. 

1637년에 란상 왕국을 재건한 술리나옹싸(Sulinyavongsa)는 불교발전의 기틀을 마련하고 태평성대를 이루었다. 1713루앙 프라방, 비엔티안, 참파삭3개 지역으로 분열, 이후 샴(Siam)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 후 1886년 후에는 프랑스가 진출하여 라오스를 통합한 후 식민지로 되어 라오스라는 국명을 사용하였으나 2차 대전 후 프랑스가 쇠약해 지며 일본군이 라오스를 지배하였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다시 프랑스가 진출하였다. 1953년 프랑스와 조약으로 독립국가로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내전으로 파테트 라오와 대립으로 혼란하였고, 1954년 프랑스가 디엔비엔푸(Dien Bienfu) 에서 공산 월맹군에게 대패하자 프랑스의 라오스 통치는 끝났다.

 

                                 (사진: 호텔 밖 작은 기도 사원) 

 

베트남 전쟁으로 남부가 월맹군의 침략루트로 이용되었고, 1973년에 가서야 파리협정으로 내전이 끝나 연립정부를 수립하였으나 인민혁명당이 우익파를 무너뜨렸고, 75년에 가서 베트남과 캄보디아가 공산화되자 파데트 라오가 혁명을 일으켜 수파누봉, 수바나 푸마 등의 라오스 왕정을 몰아내고 마침내 라오스 인민공화국(Lao Peoples Democratic Republic) 을 수립하였다.

공산 라오스 정부는 80년대 후반 소련으로부터 원조를 받고, 일본, 미국, 프랑스 등과 관계개선 후 경제 개발을 시작, 사회를 개방하고 2004 11월 아셈회의가 비엔티안에서 개최, 변화의 바람이 부나 아직은 자연과 순수한 인간의 마음이 변하지 않은 지구상의 유일한 나라이다.

 이렇게 강대국들의 각축장으로 시달리다가 프랑스 대신에 미국이 공산주의 팽창을 막으려고 베트남 전쟁에 개입하면서 1963~74년 까지 동부 라오스, 방비엥 이동 지역에서부터 남부에 이르는 라오스는 월맹의 병력 및 군수물자를 운반하는 호지명 루트”를 봉쇄한다는 미명하에 수많은 폭격세례를 받고 국토가 초토화 되었다.

 B-52 폭격기를 동원하여 융단폭격을 감행하였고, 200만 톤 이상의 폭탄을 퍼부었다. 그리고 월맹군의 남하를 막는다고 고엽제를 사용하여 국토는 초토화 되었다.

 이 폭발물은 30%가 불발탄이 되어 지난 30년 동안 수많은 라오스 민간인이 사망하고 부상을 당하는 어이없는 일이 일러났다.

 라오스의 전 국토의 40%에 이르는 지역이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지역으로 되어 가난을 부채질하였다. 미국과 유엔이 나서서 불발탄 제거 작업을 벌여 120 넘는 지역에서 80만개를 제거 하였다. 라오스엔 어디를 가나 불발탄이 전시되어 있다. 지구상에서 강대국들의 만행으로 약소국이 인간 이하의 삶을 살아야 하는 슬픔을 언제 까지나 참고 가야 하나?

   Vientiane 주변의 문화재를 찾아

  둘째 날. 오늘은 일찍 일어나 아침 뷔폐를 마치고 Don Chan Palace Hotel 을 나가 주변을 산책한다. 이 호텔은 비엔티안에서 가장 높은 15, 5성급 호텔이나 국제 수준급은 아니다. 앞으로는 시내가 내려다 보이고 뒤로는 메콩강이 흘러가고 있다. 아침은 월남 국수를 뜨겁게 말이 먹으니 속이 편하다. 매운 고추가 들어가 맵고 고수냄새가 난다. 밖으로 나오니 정령을 모신 곳에서 향을 켜고 기도하는 여성이 한 사람 있다.

 뒤로 해서 강변으로 나가니 메콩강의 제방을 쌓고 도로를 포장 중이다. 강변은 한산하고 호텔

옆에는 컨벤션 센터다. 이곳에서 결혼도하고 회의도 개최 할 수 있다. 이곳에서 결혼은 계약서와 지참금 제도가 있다.        

 

 

                            (사진: 호텔 옆 컨베션 센터)

 

 비엔티안은 메콩강을 끼고 서북 평야지대에 위치한 수도로서 백단 숲의 도시란 의미이다. 인구는 60만 정도. 주변은 벼농사의 고장이고, 지금은 경제 중심지다.  

메콩강 사이에 대통령 궁이 있고 그 앞으로 란상 대로가 나있고, 도로 끝에는 프랑스에서 독립한 것을 기리기 위하여 기념 문이 세워져 있고 이곳에 오르면 비엔티안 시가지를 한 눈에 조망 할 수 있는 파리의 개선문과 같은 곳이다. 이제 수도 주변의 문화재를 찾아가 본다.

 

                      (1)     Wat Sisaket (시사케 사원-박물관)

 

원형이 그대로 보존된 사원으로 1819~24 아누봉 (Anouvong) 비엔티안의 마지막 왕이 5년에 걸 처 지은 사원. 1825(Siam) 군이 처 들어 와서도 이곳을 사령부로 써서 그대로 보존 되었다. 목이 잘려진 수 많은 불상이 회랑을 따라 모셔져 있다. 이 회랑에 있는 커다란 청동 불상은 18세기에 제작한 것이다. 회랑을 따라 불상이 가득하고 벽에는 감실(龕室) 6층 높이로 마련되어 2개의 작은 불상들이 그 속에 안치되어있다. 이 사원의 불상은 총 6480 개나 된다 한다.

 

                           (사진: 시사케 사원의 불상과 감실 모습)

 

 이 사원은 1935년에 복원되어 지금은 목이 잘린 불상을 전시한 박물관(Museum)으로 사용되어 침략자들의 만행을 고발하고 있다.

1)      파괴된 붓다상(Broken Buddha Statues): 수백 개의 목이 잘린 대소 불상이 창고 안에 쌓여 있다. 이 불상은 Siam 군대가 침공 시에 만행을 저지르고 땅속에 묻은 것을 비엔티안 지하에서 발굴한 것 들이다.

 

                                 (사진: 목이 잘린 불상들)

2)      관욕통: 나무로 된 용의 모습이다. 크기는 1 m의 높이고 길이는 2 m 정도로 용이 비상하는 모습이다. 물을 용의 꼬리 쪽에서 부으면 머리 쪽으로 나와 부처님을 그 아래에 모시고 목욕시킬 때 사용한 것이다.

 

                               (사진 : 관욕통 모습)

3)      벽화(Mural Painting): 불교 벽화로 법당 안팎에 벽에다 붓타의 일생을 그린 불화가 10여 면이 있다. 동남아 소승불교 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다.

4)      중심 사당: 중앙에 대형불상이 안치되어 있다. 좌 우로는 소형이 각기 한 개. 옷을 입혀 드린 불상도 있다. 그 밑에는 화려한 장식이 있다.

 

 

(2) Wat Ho Phra Keo(왓 호 프라 케오-박물관)

 

란상 왕조시대인 1565년에  사이 타티파(Xaise Thatipath) 왕이 왕궁 옆에 지은 것으로 왕실의 전용사원이었다. 그러나 1779 Siam의 침입으로 붕괴되었다. 그 후 복원되어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초기에 이곳에 있던 에메랄드 불상은 1779년 침입자들이 가져가서 현재는 태국에 있다. 전시관에는 소형으로 에메랄드 모형 불상이 있다.

 

 

                          (사진: 왓 프라 케오 사원-현재는 박물관)

 

                                     (사진: 박물관 붓다상)

 

(3) 독립 기념문

1975년 이 나라가 사회주의 국가가 되면서 1962년 건축을 시작하였으나 정정불안으로 미완성인 채로 있다가 1995년에 와서야 중국이 우정 기념으로 지어준 것으로 시내 중심가에 우뚝하게 서있다. 시멘트 구조물이라 오래되어 균열이 심하다.

맨 위 7층 높이의 전망대에 오르면 시내가 전방위로 다 보이고 특히 북쪽으로는 우리가 묵었던 호텔이 멀리 보이고 그 너머로 메콩 강도 보인다.

 

                           (사진: 라오스 정부 청사 전경)

 

전망대로 오르는 중간 4면에는 뾰족한 탑이 4 면의 방향으로 서 있다.

이 기념탑은 Lanexang Ave 북동쪽에 자리잡고, 파리의 개선문(The Arc de Triomphe) 을 본 따서 만들었으나 너무 기교가 떨어진다. 당시에는 수도 비엔티안의 승리의 문(The Victory Gate of Vientiane) 이라 불렀다. 영어로 Vientiane은 라오스 어로는  위안짠이라고 불리며, 달의 도시란 의미다.

 

 

                                         (사진: 비엔티안의 승리의 문 전경)

 

                                    (사진:  승리의 문 천장의 벽화)

 

(4) 왓 닷 루앙(Wat That Luang)

16세기에 세타티랏(Setthathirat) 왕이 14세에 즉위하면서 수도를 루앙 프라방에서 비엔티안으로 옮긴다. 수도를 옮기면서 왕권을 강화하려고 사원을 건축한 것이다. 원래 탑 주변에는 4개의 사원이 있었으나 지금은 북쪽과 남쪽에만 있다. 사원 입구에는 세타티랏 왕의 동상이 서 있다. 사원 중앙에는 45 m 높이의 스투파(Stupa=)가 솟아있고 부처님의 가슴뼈와 머리칼이 모셔져 있다 한다. 이곳에서는 탑돌이 행사가 이루어진다.

 

                                              (사진: 세타티렛 왕의 동상)

                    

 

                              (사진: 닷 루앙 사원의 대탑)

 

(5) 프라 닷 루앙(Phrathat Luang)

  이 사원에는 비석이 많은데 마모가 심해 판독이 불가능하다. 모퉁이에는 미얀마에서 온 금불상이 서있다. 사원 주위를 빙 둘러 처진 회랑에는 전시품이 없어 황당하다. 가운데 솟아 있는 중앙의 탑은 금빛으로 빛난다.  큰 탑을 둘러 쌓고 있는 주위에 작은 스투파들은 시멘트로 만들어져 균열이 심하다. 탑돌이는 원래 시계방향으로 하나 반대로 하는 경우도 있다. 최근 사망하여 추모를 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사진:쁘라 닷 루앙 사원 탑)

이제 비엔티안 시내를 돌아보고 나서 주차장에 오니 현대자동차가 많이 주차하고 있고 우리가 타고 다니는 대형 버스도 현대차다. 모두 이런 것들은 한국에서 사용한 후 중고차로 이곳에 와 재활용되고 있다.

시내 관광을 마치고 Chowon Koera 에서 점심식사를 한식으로 한기로 한다. 삼겹살 구이, 잡채, 콩나물, 김치, , 맥주를 함께하며 마침내 미역국도 등장한다.

 

                            (사진 : 비엔티안의 코리아 가든 초원)

 

나오다가 식당 게시판에 한국의 Jin Air 항공사의 인천에서 비엔티안 까지 직항이 운항한다는 광고를 보게 된다. 매주 화, , 2. 기간 2011.12.31~2012.3.3.

 3 4일에 USD 650, 4 5일에 USD 1100. (8명 이상).

U 711 인천(09:00)출발비엔티안(12:25)도착, U 712 비엔티안(13:25) 출발→인천(20:35)도착.

 

  중부도시 방비앵으로

 

 참으로 세상 많이 좋아졌다. 이런 오지 나라에도 한국의 항공사가 운행을 한다니!

이제부터 라오스의 중부 도시  방비엥”(Bangvieng)으로 향해 190km를 가야 한다. 물론 버스로 가는데 도로 사정이 만만치 않음이 문제다.

방비앵 지역이 카르스트 지형이 형성되어 비경이 연출된다니 일단 가볼 일이다. 이런 지형은 중국의 계림, 석림에 이어 하롱베이에서 우리는 아주 빼어난 풍광을 보아왔기 때문에 카르스트 지형에 일가견이 있으니 말이다.

방비앵으로 가는 길은 일차선 도로로 포장도로이나 깨끗하지 못하고 배수로도 없는 도로로 보인다.

가는 길 주변으로는 사원이 많이 눈에 띤다. 또 조그만 탑들을 만들어 파는 상점도 즐비하다. 도로 가에는 남방 열대 지방답게 팜트리 등 열대식물이 늘어서 있고 길 옆 논에는 벼들이 싱싱하게 자라고 있다.

(Hmong)족이 사는 마을을 지나고, 가다가 새해맞이 축제 장이 열리는 곳에서 차를 멈추고 보러 간다.

 마을 건넌 넓은 공터를 지나서 나무숲에 차들이 많아 주차하고 있고, 폭죽, 풍선 터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린다.

 가까이 가니 15~20세 미만의 예쁘게 차려 입은 처녀들과 총각들이 정장을 차려 입고 우리의 테니스 공 같은 것을 서로 주고 받고를 반복한다. 그들은 여럿이 그룹으로 나누어 여자는 한 줄로 남자들도 한 줄로 횡으로 서서 서로 공을 주고 받기를 반복한다. 그러면서 남녀가 서로 대화를 나누면서 자기의 짝을 고르는 공개적인 짝짓기를 하는 풍습으로 새해마다 열리는 축제란다.

                  (사진:상-하. 축제장에서 파트너를 찾는 몽족 처녀들)

 

 

                                   (사진: 몽 족 처녀들과 함께)

 

축제장 주위로는 각종 노점상이 늘어서 있다. 물고기 굽는 곳, 꼬치고기를 굽는 곳, 과일 마차, 음료수 판매대 등 다양한 먹거리가 주위에 둘러 있다. 또 가장자리로는 풍선을 세워놓고 꼬챙이를 던져 맞추어 터뜨리면 경품이 당첨되는 놀이가 진행 되면서 풍선 터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이 축제가 행해지는 장소는 방비앵으로 가는 도로상에 폰홍(Phonhong) 17 km 앞에 있는 숲 속에서 진행되고 있다. 이들은 모두 몽족으로 독특한 풍습으로 보인다. 몽족들은 자녀를 많이 두고 주로 산간지역에서 사는데 농사를 지으려면 일정한 자녀를 두어 노동력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다시 출발하여 가니 논에는 모내기를 하는 농부들이 바쁘게 움직인다. 토요일이라 결혼식을 하는 모습도 2~3건이나 목격되기도 한다.

 중간에 주유소에서 휴식을 취하며, 사탕 수수 대를 압착기로 눌러 즙을 낸 음료수에 어름을 넣어 파는 노점상에서 다 함께 한 컵씩 사서 빨대를 사용하여 마셔본다. 제법 당도가 높고 설탕보다 순수하고 부드러운 천연의 맛을 풍기고 있다.

 

 

                                     (사진: 사탕 수수즙을 함께 하며)

 

휴식 후 다시 출발하니 이번에는 산간으로 올라가는 도로가 나오며 억새가 한창 피어 아주 탐스럽게 바람에 흔들린다. 마침내 방비앵 27 km 전방까지 왔다.

도로 가에는 건어물을 비롯한 수산시장이 성업 중이다. 이 어물들은 근처 남승호수에서 잡아 말리거나 소금에 절여 파는 시장으로 도로변 양쪽으로 상가가 200 m정도로 형성 되어 있다.

 

 생선 말린 것, 우리로서는 무엇인지 알 수 없는 것을 말려 묶어 놓은 것, 멸치 등 이 좌판에 펼쳐져 있는데 파리들이 극성이다. 이런 바다도 없는 내륙국가에서 생선을 다량으로 잡아 말린 것을 파는 노점상이 즐비하니 참 신기한 풍경이다. 또 트럭에다 생선을 잡은 것을 푸대나, 스티로 폼 상자에 그대로 싣고 와서 이곳 상인들에게 넘기는 것을 보니 더욱 신기하다.

어느덧 해가지기 시작하니 17:30분이다. 가는 길 산비탈 너머로 빛을 발하며 기울어진다. 안개 낀 산에 가리면서 석양이 하늘을 물들인다. 오른쪽 도로 멀리 처음으로 세멘트 공장을 만난다.

멀리 해질녘에 산이 중국의 계림처럼 나타나 음영을 드리면서 희한한 경치를 감상하니 어느덧 Bangvieng 호텔에 이른다. 한 시간 휴식 후 저녁에 모인다. 커다란 물고기를 대나무에 꿰어 구은 것을 안주 삼아 맥주를 마시며 이곳의 쌀밥도 맛본다.

 

 

                                    (사진: 도로 가의 건어물 시장 풍경)

 

 이 외진 곳에 이런 관광지가 있다니? 우리는 20:00시가 넘어 산책에 나서니 방비앵의 밤거리는 어느 도시 못지않게 환락의 거리다. 음식점, 기념품 점, 맛사지 업체, 노래방, 옷 가개 등이 길 양편으로 1 km 이상 연결되어 주로 백인들이 붐빈다. 이들은 모두 배낭 여행객들로 보인다. 우리 부부도 한동안 산책하면서 한국인 젊은이 한 사람을 만난다.

 한 잔 술을 걸친 자세로 말이 많다. 이렇게 모든 물가가 싸고 자유롭게 살 수 있으니 이곳이 낙원이란다. 유럽계 여성 둘이 술에 취해 남자들과 희롱을 하며 함께 어울려 걱정스런 추태를 연출한다.

 

 

 

 

 

 

 방비앵(Bangvieng)의 숨은 비경(秘境)

셋 째날: 새벽 일 찍 일어나 밖으로 나가서 산수경치를 보니 계림이 연상 된다. 건너 봉우리의 안개 속에 모습이 한 폭의 동양화 같았다. 주위에 핀 "하늘의 우산 꽃"의 향기를 맡으며 송강 변의 아침정기를 마음껏 마신다. 아침으로 쌀 국수, 비빔밥 등 간단한 식단으로 해결한다. 

 1) 송강의 Boat Tour

 

아침 08:00시에 나와 신선한 공기를 마시며 호텔 뒤 선창으로 나와 2인 씩 모터보오트에 타고 물살을 가르며 상류로 올라간다.

바위 봉우리들이 강변으로 쏟아 질듯이 솟아있다. 사이 사이로 물위로 지나는 간이 다리의 정겨운 모습은 동화에 나오는 장면을 연상 시킨다. 참으로 이런 오지에 절경이 있다니!

 

 

                                              (사진: 송강의 강변 풍경)

 

 

 

 

깎아 지르듯이 솟아있는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서있는 나무는 자연의 걸작품이다. 삽 다리 밑으로 통과하여 30여분간을 상류로 올라가서 되돌아 온다. 뾰족한 바위틈에 수십 년을 견디어온 나무들의 생명력을 배워야 한다. 내려오면서 보니 두 여인이 강바닥에서 파래를 손으로 채취하는 것을 본다. 강바람이 싱그럽게 얼굴을 스치면서 45분에 걸친 Boat Tour는 끝난다.

요금은 5km 80,000 K/ 2p라고 써있다. 보오트장 옆에 남송 빌라 리조트의 아름다운 경치도 마음을 사로 잡는다. 이제 다시 출발하여 동굴로 향한다.

 

2) 탐장 동굴

송강 변으로 와서 다리를 건너가 입구에 이르니 168개의 계단이 기다린다. 석회암 동굴에 이르니 송강이 발아래 흐르고 동굴 안으로 들어가니 통로가 잘 다듬어져 있고 발전기를 돌리는 전기 시설이 되어 있고, 관람 트레일이 잘 조성되어 있다. 종유석, 석순이 여러 모양으로 늘어서 있고, 타 지역에서 본 동굴보다는 규모가 작다. 300 m 앞에 이르니 개발된 동굴의 끝이다.

돌아나오면서 송강을 내려다보는 포인트로 나온다. 강 건너 들판이 시원하게 전개된다.

방비앵 지역의 산세와 송강이 어울려 조화를 이루고 있다.

 

 

                            (사진: 탐장 동굴 내부의 모습)

 

 

 

Phonsavan(폰사반)-시엥쾅 지역을 찾아서

 

버스가 출발하여 포장도로를 따라 이제는 동부에 있는 도시 폰사반으로 간다. 길 왼쪽으로 방비앵 고등학교가 산뜻하게 보인다. 이 학교는 한국의 Koica(국제 원조 재단)가 지어 기증한 것이라 한다. 여기서 218 km의 험한 길을 가야 한다.

버스는 Nadeo 초등학교를 지나 루앙 프라방 213 km 표지판을 뒤로하고 지나면서 이제 길은 비포장 도로로 바뀐다. 먼지가 심하게 일면서 도로 가에 납골 탑이 늘어선 것을 지나 간다.

도로는 점차로 커브가 심하고 억새가 우거진 산골로 들어가 고개를 올라간다.

Kasi 지역을 지니면서 길가에는 노란 뚱딴지 꽃이 즐비하게 피고, 그 위로는 수목이 무성하다.

 Vieng Tong을 지나니 언덕으로 몽족의 전통가옥이 들어서 있고, 도로 가에는 귤을 아주 예쁘게 쌓아놓고 파는 노점상이 줄지어 있다. 해발 500 m에서부터 오른쪽으로 바위산이 나타나니 점입가경이다.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는 정말 절경을 이룬다.

뾰족 뾰족한 바위 봉우리들이 늘어서 보이면서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수직으로 절벽을 이룬 봉우리들이 200~300 m의 스카이 라인을 형성한다.

 Namkene Village Kasi 지역에 이르니 11:40분이다. 이곳에는 Hot Spring Water Resort 에서 휴식. 이곳에는 35°С의 천연 온천수가 바위 밑에서 솟아나 조그만 연못을 이루고 있어  쉬어가는 곳이다. 우리도 온천수가 솟아나는 곳으로 가서 발을 벗고 뜨거운 온천수에 담가 본다.

 

 

 

 

                  (사진:  Hot Spring Water Resort  주변 풍경)

 20 여분을 휴식한 후 출발하려니 소를 가득 실은 트럭이 앞에 선다. 뿔이 달린 검은 소가 눈이 슬픈 표정이다. 오늘이 도살장으로 가는 날일까?

멀리 두 개의 기암 봉우리가 대비를 이루니 이 고갯길은 그야말로 비경의 길이다. 길 아래로는 억새의 하얀 솜털이 휘날리고 “Keo Koung” 고개를 넘어가니 산세가 점점 더 절경이다. 이렇게 멋진 풍경이 숨어있는 나라가 이제 성큼 우리에게 다가온다.

 

 

                           (사진: 해발 1285 m정상의 레스또랑 모습)

 

 왼쪽 산꼭대기로 빨간 지붕을 이은 건물이 보이니 우리가 중식장소로 예약을 한 곳이다. 구비구비 산길로 오르면서 12:40분에 해발 1285 m 정상에 “Phoukhon Phiengfan Restaurant” 에 이르러 식사를 한다. 산정에 유일한 식당이고 경치가 빼어나서 사람들로 만원이다.

식사 후 큰 통나무 아래로 내려가니 멀리 구름에 쌓여 있는 산을 배경으로 사진을 잡아보나 역광으로 아쉽다.

도로 가에는 산간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대대로 살아온 원주민의 마을이 옹기종기 모여 잇다.  근세의 프랑스의 지배, 일본의 침략, 그 후 베트남 전쟁에서 이들의 생활터전은 송두리째 파괴되었으나 이들의 삶은 계속되고 있다. 강대국의 횡포는 이제 사라져야 한다. 그들의 전쟁놀음이 순박한 산간부족의 생활을 망가뜨렸으니?

전쟁은 이 고요한 산간마을에서 화전을 일구어 대대로 살아가는 몽족들에게 무엇을 남겼는가?

  Baykato 산간 마을을 지나 고도가 더 높아진다. 이 지역도 프랑스, 일본, 미국의 전쟁에 말려 희생된 지역이며, 미국이 호치민 트레일을 초토화시키면서 이 산간 부족들은 아무 이해 관계없이 생활터전을 송두리째 폐허화되었다.

이런 더러운 전쟁이 이젠 더 이상 지구촌에서 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미국의 폭격으로 초토화된 폰사반 지역으로 간다. 이제  “Ban Long Mien” 산간마을을 지나 고산 지대에서 내려간다.

 산간마을의 삶이 그저 평화롭기만 하다. 빨래를 해서 도로의 나무기둥에 걸어 말린다. , 개 등도 자유롭게 먹이를 골라 먹는다.  산간도로가 이제는 포장이 좀 나아졌다. 드문 드문 마을이 나오면서 어느새 15:20분이 되어 폰사반 80 km 지점에 이른다.

 

                                 (사진: 산간의 원주민 몽 족 마을 풍경)

 

 바나나 밭에서 휴식 후 하루 종일 버스로 이동하니 지루하여 이번에는 걸어서 가기로 한다.

산간도로를 1~2 km를 걸어서 내려 간다.

 다시 버스에 올라 “Namchat” 마을 다리를 건너 가니 마을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이를 잡는 모습도 보인다.

산길은 오르고 내리기를 계속하다가 16:20분 부 터 내리 막 길이 계속되고, 소들이 논에서 마른풀을 뜯어먹고, 호수가 나타나면서 넓은 경작지가 전개된다.

17:05분 이 되어 폰사반 지역으로 들어온다. 폰사반 지역은 베트남 전쟁 시 미국의 폭격으로 당시에는 초토화된 곳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40년이 흘러 상처가 남아있어도 이제는 신도시로 건설되고 있다.

시내로 들어와 Naveng Road 에 이르러 우선 시장구경을 하기로 한다. 서민의 시장을 둘러 봄으로서 그 나라의 사정을 짐작하기가 쉽다. 과일, 야채, 닭고기, 돼지고기, 물고기, 고슴도치 잡은 것이 피가 묻은 채로 판매대에 올라있다. 30여 분간 사람들로 붐비는 사장 통을 골고루 돌아 다니면서 사람 사는 냄새를 맡아 본다.

해가지면서 시내 높은 언덕에 위치한 Phonsavan Vansana Hotel 에 이른다. 날씨가 생각보다 추운 곳이다. 어느새 별이 총총히 돋아나고 멀리 시내는 불빛이 하나 둘 밝혀진다. 6호실에 들어와 짐을 정리하고 나갈 즈음 불이 나가 정전이 계속된다. 산골에 위치한 도시라 무척 한기가 차갑다.                  

 

                              (사진:폰사반 반사나 호텔)

 

 넷째 날. 지난 밤은 무척 추어 간신히 참아내다 날이 밝아오니 닭 울음 소리가 조용한 아침을 흔들어 놓는다. 아침식사도 호텔처럼 부실하기 짝이 없다.

아침 일찍 출발하여 시내로 나오니 항아리(Jar) 평원 5 km의 표지가 나온다. 그러나 우리는 방향을 달리하여 폰사반에서 남으로 30 km 지점에 있는 무앙콘으로 간다. 이곳은 14~18 세기에 무앙쾅 왕국의 수도였던 곳이다. 한때는 베트남과 태국을 잇는 교역지로 크게 번창하였고 사원이 많은 도시였다. 그러나 이곳도 월남전 당시 호지명 트레일에 속해 폭격으로 폐허가 된 곳이다.

 

1) Wat Si Phom(왓 씨 폼 사원)

거의 폐허의 터전 위에 부처님이 고고하게 앉아있는 모습은 어쩌면 처량하게 보인다. 포탄에 맞고 총탄에 맞아 오른팔이 깨지고 왼쪽 귀도 부상한 채로 40년 가까이 흘러온 세월을 견디어낸 것은 어쩌면 붓다이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왼손목도 깨지고 왼귀도 부상, 입은 약간 삐뚜러 졌으나 오른손만은 원형 그대로다.

 

 

                          (사진: 시 폼 사원의 부상한 채로 앉아있는 부처님)

 

 부처님을 둘러싸고 있는 주위의 4기둥도 손상이 심하다. 그러나 전쟁의 포화 속에 살아남은 부처님은 그래도 꾿꾿하게 앉아 있으니 참으로 감동적이다.

 16세기에 화려한 시대를 뒤로하고 전화 속에서도 근근이 버티어 온 것도 어쩌면 불심 때문이었으리라. 벽돌로 쌓고 시멘트로 치장한 Buddha. 정문에는 Namlinhsoung Bridge 라고 써 있으니 무슨 의미일까? 참 이것이 문화재인지 아무런 표시도 없이 그저 평지 위에 무심히 서있는 것이다.

2) Wat That Pun Tower(탓 푼 사원 탑)

무앙콘 벌판에 솟아있는 탑으로 둥근 흙 기반 위에 30 m 높이의 벽돌로 쌓아 올린 탑이다. 연대는 1287년으로 알려져 있다. 탑 둘레로는 오랜 세월 돌보지 않아 풀이 나있고 탑의 중간 위로는 앞, 뒤로 나무가 3그루씩 뿌리를 내려 자라고 있다. 탑 둘레를 돌아보니 거대한 탑인데 관리 부재로 현재 방치되고 있다. 탑 밑으로는 통로가 앞뒤로 뚫려 있다.

 

 

                                          (사진: 탓 푼 사원의 방치된 탑)

 

 

문화재인지 알리는 안내 표지판도 없으나 박스를 차려 놓고 입장료는 징수 한다.

이곳에 방치된 2곳의 유적지를 돌아보니 300년 왕도의 폐허가 세월의 무심함에 실려가고 있다. 이제 이곳을 출발하여 자르(항아리)평원으로 간다.

 

3) 몽족 마을 방문

 

자르 평원으로 가다가 12 km 지점에서 한가한 농촌마을을 만난다. 이번에는 산간 부족인 몽족이 사는 민가를 방문한다. 전통 가옥들이 언덕에 들어선 마을로 들어가니 새끼 돼지들이 마당에서 먹이를 찾고 잇다. 어린 아이들도 한가하게 놀고 있다.

한 민가로 들어가니 입구 삿대 위 회에 닭이 한 마리 매어 있다. 문 앞 기둥에는 나무조각으로 된 문 패 같은 것도 달려있다. 안으로 들어가니 입구에 불씨를 살려놓아 훈훈하다.  의자, 주방 기구, 직조 짜는 틀, 구형 TV 등의 가구가 주위에 놓여 있다.

이 집에는 20대에 부부가 아이 한 명과 살고 있다. 침실은 뒤쪽의 커튼으로 막고 침상이 하나 있다. 모든 생활이 한 지붕 밑에서 이루어 지고 있다. 이 집을 떠나 자르 평원으로 2.5 km 거리에서 좌회전하여 들어간다.

4) Plain of Jars(항아리 평원)의 신비를 찾아

이 평원은 마치 우주인이 만들어 놓은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곳이다. 기원전 2500~3000 년간에 조성된 항아리가 고원평야에 흩어져 있으니 신기한 일이다.

이것을 만든 화강석은 이 일대에는 없고 여기서 60 km 떨어진 곳에 있으니, 고대 왕국에서 만들어 거인들이 이곳으로 운반한 것으로 추측된다.

  1단지는 25 Hectar 334개의 항아리가 넓게 자리잡고 있다. 이것들이 물 저장고 인지, 납골 함인지 추론이 분분하다. 이 지역은 월남전 당시 포탄이 200여 만 톤이나 집중 투하되어 초토화 되었으나 이 항아리들은 남아 있고, 그 여파인지 여기 저기 바르게, 기울어지게, 쪼개진 채로 풀밭 위에 남아 있다.

 

 

                                           (사진: 항아리 평원에서)

 

 

 

 이 단지에는 크기가 다양한 항아리가 많은데 이것이 만약 무덤이라면 당시의 왕국규모와 비교하면 너무나 많다.

항아리를 만든 통짜 화강암은 가운데를 둥글게 파냈고 입구는 정교하게 다듬어져 원형을 이루고 있다. 크기는 다양하며 지금은 물이 고여 있다.

 No-013 번의 항아리는 뚜껑이 덥힌 항아리로 유일하다. 깨어진 뚜껑 사이로 들여다 보니 아무것도 없다. 무덤이라면 이 많은 항아리에서 부장품이 하나라도 발견되어야 할 텐데 그런 것이 없다. 도대체 무슨 용도로 이렇게 둥근 구덩이를 팠을까?  의문투성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납골함이나 무덤으로 생각한다.

이 지역에는 1964~1973년 사이에 폭격으로 생긴 폭탄구멍(Bomb Crater)이 여러 군데 있다. 지름이 5~15 m, 둘레 35~50 m의 크기나 지금은 물 웅덩이로 잡초만 무성하다.

이곳에도 불발탄이 많아 발굴한 지역은 땅에 MAG 라는 조그만 표석을 밖아 놓아 알리고 있고 발굴이 안된 지역은 철저히 통제되고 있다. 이제 이곳을 떠난다.

 

5) Tour Information Center

 

가다가 인포메이션 센터에 들러본다. 월남전 당시 이곳에 투하된 폭탄 중에 불발탄을 수거 하여 모아논  곳이다. 연료탱크도 2, 탄약통, 대공 포, 기관 포 등 (미국제)이 녹슨 채 전시 되어 있고 센터 안에는 사진과 더불어 설명문, 지도 등이 자세히 벽에 전시되어 있다.

 

 

                         (사진: 폰사반 지역에서 발굴된 포탄들)

 

 

 길 건너 Craters Restaurant 앞에는 베트남 전에서 수거한 폭탄이 문 앞에 큰 것 작은 것을 모아서 전시되었고 식당 이름도 전쟁의 상흔으로 표시하였다.

 이제 폰사반의 옛 페허를 둘러보고 출발 하여 13번 공로로 가야 한다. 루앙 프라방 까지는 장장 232 km를 가야 하기 때문에 미리 시내에서 점심식사를 하기로 한다. 시내에 중국찬관에서 중국식 6코스 식사 후 12:45분 에 출발한다. 가다가 탐프라 동굴을 방문한다. 

 

6) 탐프라(Tham Pra) 동굴

 

언덕 위에 있는 30평 정도의 동굴로 전쟁 시 피난처로 생각된다. 위로 난 구멍이 하늘로 나있어 우연인 것 같은데 이것도 지상에 폭탄이 투하되어 생긴 구멍으로 해가 들어온다. 출입구 바위 벽에는 석청이 달려 있다. 일설에 의하면 전쟁 당시 안에다 금괴를 숨겨 놓았던 곳이란다.

천연동굴로 입구 아래에는 큰 부처님이 금 주단을 두르고 앉아있다. 안으로 들어가니 동굴은 미로로 연결되어 있고, 석영이 섞여있는 돌도 보이고, 조그만 거북이 형상도 있다. 안으로 깁숙히 들어가니 이곳이 전쟁 시 야전병원으로 쓰이면서 수술대로 썼던 낡은 평상이 노여 있다.

 

 

                                             (사진: 팀프라 동굴안의 부처님)

 

동굴 방문을 마치고 15:45분에 루앙 프라방 도로로 진입. 푸콘 18 km 전방에 억새가 무성하고 삼거리에서는 학교 수업이 끝난 학생들이 삼삼오오 책가방을 메고 산간 마을 집으로 돌아온다.

이곳까지 오는데 험한 산길로 평균 1400 m안남 산맥을 넘어오느라 모두 피곤해 지처 있다. 도로 가에는 빗자루를 만드느라 어린이나 여인들이 작업을 한다.

 

푸콘 삼거리에 이르니 16:40분이 되었다. 제법 도시가 크다 이곳에서 비엔티안은 좌측으로 루앙 프라방은 우측으로 가야 한다. 그런데 아직도 126 km가 남았다. 이곳 시장 터에서 바나나 구이도 사먹으면서 한참을 휴식을 취하였다.

다시 출발하여 17:00시가 넘도록 산길은 계속해서 휘돌아 간다. 어느덧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고 달이 솟아 오른다. 옛 왕도로 가는 길은 험하고도 멀어 이제 어둠 속으로 계속 달려 간다.

20:30분이 되어 겨우 루앙 프라방에 입성한다. 큰 도시라 사람들로 붐비고 불빛이 그래도 도시답게 환하다.

 

 

                                    (사진 : 루앙 프라방 고도 상가 거리)

    

800년이나 된 고도에선 버스는 운행할 수 가 없다. 우리는 버스를 버리고 12 인승의 소형차로 갈아타고 시내로 들어간다.

 

  

 Luang Prabang(큰 탑) 고도를 탐방하며

 

루앙 프라방에 고대 왕도는 전체가 1995 UNESCO 지정 문화재이다. 우리는 우선 저녁을 해결하기 위해 야시장으로 찾아간다. 도심 한복판에 야시장은 관광객들로 붐비는 곳이다. 시장으로 들어가다 좌측으로 먹자 골목으로 방향을 잡아간다. 담벼락 밑으로 양쪽에 좌판에 여러 가지 음식이 먹음직스럽게 큰 접시에 담아 놓았다.

이곳에도 뷔폐식이라 몇 가지를 주문하여 앞 접시를 놓고 덜어다가 먹는 방식이다. 전등불을 밝혀 논 길다란 좌판에 양쪽으로 갈라 앉아 주문한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물고기 군 것, 닭 가슴살 구이, 국수, 푸른 콩깎지, 오이와 도마도 등을 맥주와 함께 야시장 식사를 한다.

 

 

                              (사진: 루앙 프라방  먹거리 야시장)

 

Beer Lao 5% 맥주는 음료수 삼아 마시며 생선구이를 안주로 한다. 식사 후 30 여분간 야시장을 구경하며, 파장이 되어 갈 때 입구에 모여 오늘의 숙소인 Grand Hotel로 돌아오니 10:10분이다. 오늘 오후 6 시간의 장거리 버스투어의 피로가 겹친다. 내일이 라오스의 절정을 만나는 날이다.

 

1) 탁발 공양 참여하기

 

다섯째 날. 새벽 일찍이 일어나 06:00 시에 시내로 나가 라오스 스님들의 첫새벽 탁발 공양행사에 참여하여 본다. 이 거리에서는 약 300여명의 스님들에게 보시, 공양을 새벽과 함께 시작한다.

이곳에서는 승려들이 새벽 5시가 되면 공양에 나서는데 이때는 맨발에 주황색의 가사를 입고 바리를 들고 신도나 공양을 하려는 관광객 앞으로 일 열로 줄을 서서 걸어온다. 그러면 보시하려는 사람은 밥통을 열고 숱 가락으로 조금씩 나누어 바리에 담아주고 반찬도, 과일도 적당량을 나누어 바리에 담아준다.

 

 

                                  (사진: 루앙 프라방 새벽 공양 모습)

 

 

 

 

 

루앙 프라방 사람들은 새벽에 공양을 함으로서 하루가 시작되고, 승려들도 하루의 끼니를 해결하는 것이다. 스님들은 오후에는 물만을 마시고 음식은 먹지 않는다.

전 세계에서 온 관광객들도 라오스 사람들과 함께 공양의식에 참여한다. 우리들은 밥을 마련 할 수 없어 새벽에 공양을 위해 밥이나, 공양 물을 사서 하는 것이다. 대개 밥은 찰밥을 하여 공양하는데 이곳에서는 그릇에 담아 공양 밥을 팔고 있다. 둥근 바구니에 뚜껑이 달린 밥통에 찰밥을 담아 3$에 팔고 있다. 이 밥을 딱 밥이라고 부른다. 공양은 주로 여성들이 많이 하며 중요한 불교의식이다.

오랜지 색의 가사를 목까지 감고 큰 스님이 앞장서고 서열대로 서서 간다. 삭발은 눈썹까지 민다.

미얀마에서는 결혼 식후 피로연 대신에 공양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때는 우리 같은 외국인도 식사를 해결 할 수 있다. 대개 방석에 무름을 꿇고 공양을 한다. 승려들이 바리를 들고 천천히 걸어오면 미리 준비한 음식, 반찬, 과일 등을 바구니에 넣어주는 풍경이 새벽마다 연출된다.

 승복으로 주황색 가사는 정신적으로 맑음을 표시한다. 동자승도 섞여 있고, 가난한 사람들이나 어린이들은 스님들이 받은 공양 물을 나누어 받아가기도 한다.     

2) 아침시장 돌아보기

탁발 행사를 둘러보고 07:00시부터 아침시장으로 이동한다. 라오스인의 생활을 깁숙히 음미해보기 위한 행사이다.

시장에는 싱싱한 과일, 야채, 생선, 산 개구리, 소의 족, 매생이 등 우리와는 많이 다른 물건들이 시장 좌판에 노여 있다. 이곳에서 는 모든 생 것들이 다 시장에 나와 잇다. 아침 시장이 너무 다양하고 사람들로 붐비어 이동하기가 어렵다. 타국에서 온 스님도 시장에 등장한다.

 

 

                                 (사진: 새벽시장의 좌판 모습)

 

 

 시장 보기를 끝내고 다시 호텔로 돌아와 07:30 분부터 호텔 앞 메콩 강변으로 나가 야외 테이블에서, 쌀 국수, 뷔폐 등으로 강을 바라보며 시원한 기분으로 식사. 강변에는 조각배가 떠가고 고요한 풍경이다.

식사 후 강가로 내려가서 강물을 가까이 보니 의외로 물은 탁하여 그대로는 사용하기가 쉽지 않다.

 

 3) Wat Xieng Thong(시앵 통 사원):1995 UNESCO지정 문화재

 

1565년 세워진 사원으로 루앙 프라방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외관을 자랑한다. 처음 세워진 이후 여러 차례 침공에도 훼손되지 않고 잘 보존되었고 나라의 후원으로 유지되었다.

건축양식은 높은 지붕 용마루로 부 터 붉은 흑벽돌 기와의 3단으로 정교하게 내려오면서 이어져 거의 땅끝까지 곡선으로 이어져 독특한 라오스 형식으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본당 비한(중심사원)의 벽에는 힌두신화와 부처님의 생애를 묘사한 그림이 유명하다. 출입 문에는 금색으로 압살라(Apsala)와 라오스 왕국의 상징인 코끼리와 여러 동물이 그려져 있다.

 

 

                                 (사진: 시엥 통 사원의 전경)

 

                           (사진: 본당 사원 내부 모습)

 Siam이 침입, 1875년에 2차로 침입하였으나 이 사원만은 온전하게 남았다.

본 사원 주위로는 조그만 기도용 소 사원이 2~3개가 서 있다. 소 기도원 외벽에는 화려한 색유리로 모자이크 한 깨달음의 나무, 해탈에 이르는 길, 라오스의 여러 일화, 농경사회의 생활상을 그림으로 표현하여 눈길을 끈다 

 

 

 

정문 오른쪽으로는 시사봉 왕이 1975년 사망 후 아들 시사봉 왓타나가 건축한 사원으로, 그 안에는 왕의 장례식 때 쓴 금상여가 있다. 상여 앞에 황금색으로 칠을 한 용의 머리가 높게 아주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다.

 

                                     (사진: 상여의 모습)

 

                                 (사진: 출입구 좌우의 조각들)

밖의 입구 위에는 나무 판에 라마야나의 이야기를 조각하여 금칠을 하여 아주 찬란하다. 불교 사원인데도 라마신을 모시고 있다.

 

 5) Wat My Swanafom(미 스완나폼 사원)

1795년에 건축한 사원으로 구조가 특히 아름다운 사원이다. 라오스 불교의 고승 프라 상카(Phra Sankharath) 있던 곳이다. 새해 신년이면 금불상을 모시고 행사를 하는 곳이다. 포티코(주랑)을 장식한 거대한 금박을 입힌 부조는 1967 년에 복원한 것이다.

 벽에 부조는 시멘트로 조각을 하였으나 금색을 입혀 찬란한 색갈이다.

이 사원은 Chao Anervorth 에 의해 건축하면서 195년이나 걸렸다 한다. 현재 건물은 19921. 31일 수리 되었다고 안내판에 소개 되었다.

 

 

                                 (사진: 미 스완나폼 사원 전경)

 

6) Luang Prabang 왕궁박물관

왕조 4대에 걸친 프랑스 식민지시대인 1904년에 지었다. 중앙에 사원이 있다. 왕궁으로 쓰였으나 1975년에 왕정이 폐지된 후 박물관이 되었다. 가는 날이 장날 이라 화요일이 휴관이다.

왕정시대의 업무를 보던 정전이 안에 있고 뒤로 연회를 여는 홀이 있고 왕실의 침실 등이 네모형 건물 안에 배치되어 있다.

 입구 우측으로 박물관 옆에 새로 지은 사원이 아주 찬란한 금색으로 빛난다. 이 사원은 루앙 프라방의 최대 불상을 모시려고 지었다 한다.

 

 

(사진: 왕궁 박물관에 새로 지은 사원)

 

 

 

                        7) Phou Si Hill(푸씨 언덕)

 

이 언덕은 왕도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모두 218개의 계단을 오르면 시내가 사방으로 훤하게 보인다. 그 언덕 중앙에는 1804년에 만든 탑이 솟아있다. 메콩강이 유유히 흐르고, 시내가 고요하고 숲 속에 쌓여있는 모습이 평화롭게 보이는 명소이다. 그 아래로는 루앙 프라방을 지키는데 사용되었던 대공포가 전시되어 있다. 이곳에서 일몰을 감상하면 일품이다.

                                         (사진: 푸 씨 언덕의 탑)

 

 아래를 내려다보면 박물관 옆에 새로 지은 사원이 유난히 돋보인다.

 800년 된 왕도에는 사원만이 68개가 있고 도처에 장경각과 참선방이 있어 명실공히 불교가 국교인 나라답다.

이제 루앙 프라방에서 중요한 사원은 다 순방 하였다. 양식도 비슷하고 모시고 있는 부처님도 다 같은 것이다. 정오가 되어 이번에는 프랑스식 레스또랑에서 주문식사를 한다. 식사 후 메콩강 변으로 나가 티타임을 갖기로 한다. 강으로는 유람선이 자주 다닌다.

이제 왕도에서 모든 일정을 마감하고 14:00시에 공항으로 이동한다. 조용하고 자그마한 공항이라 모든 것이 쉽게 진행된다.

15:50분에 54석에 프로펠라 추진식 비행기에 올라 이륙하니 메콩 강위로 날아 강줄기를 따라가다 높은 산지를 넘어가니 산 아래로 구름이 걸려 있다. 정말 라오스는 공중에서 보면 산악으로 둘러 쌓여 있는 것 같다.

18:00시가 되어 방콕 수바나푸미 공항에 접근하니 아래로는 Siam 만이 끝없이 넓고, 고도를 내리니 논 밭에 물이 흥건하다. 확실하게 방콕은 물의 도시.

어둠 속에 공항을 나와 시내에서 유명한 곳인 Royal Dragon Restaurant에서 태국의 민속 쇼를 보면서 중국식 식사를 하면서 한동안 쉰다.

버스로 방콕 시내를 벗어나 아유타야로 간다.  한 시간 후에 Krungsri River Hotel 이 여장을 풀었다.

 

 

                                        (사진: 루앙 프라방 공항의 비행기)

 

  

 

 

(3) 태국의 문화유산을 찾아

 

타일랜드는 어떤 나라인가?

 

먼저 나라부터 개관해 본다. 면적은 513.120, 인구 65,998,436(2010 통계).  종교로는 불교 95%, 이스람 5%.  종족은 타이 족 75%, 중국인 14%.  입헌 군주제로 양원제를 채택한 나라이다.

역사를 살펴보면 5 600년 전 Ban Chiang 이란 곳에서 청동기 유적이 발굴되어 오래된 기록이 있으나 그 후 구체적인 역사기록은 몬 족, 크메르 족, 타이 족의 이동이 이어지면서 주로 중국 남부에서 이동해온 종족들이 11~12세기에 앙코르 지역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통치했다.

12세기 초 타이 족은 Lanna, Phayao, Sukhothai조그만 공국을 건설 하였다.

1238년에 와서야 타이지도자들은 크메르에 대항하여 최초의 독립왕국인 수코타이(Sukhothai) (행복의 새벽을 의미) 왕국을 세웠다. 이 후 417년 간 33명의 통치자가 나와 아유타야 지역의 독특한 문화를 이루었으나, 크메르의 영향에서 벗어나 아라비아, 인도, 중국과 교류 이후 아유타야 왕국은 미얀마 세력의 침공으로 인해 붕괴 되었다.

그 후 Taksin 왕이 미얀마 세력을 몰아내고 새로이 Thai 왕국을 건설 Thon Buri 에 도읍을 정하고 1782년에 와서 Chakri 왕조의 초대 왕인  Rama 1 세가 지금의 차오프라야 강 유역인 방콕으로 천도하였다. 그 후 태국은 입헌군주제를 채택하였다.

 

                            (사진: 태국의 현 국왕 푸미폰의 모습)

 

1932년 부 터 현 라마 9세인 푸미폰 아둔야(H.M. King Bhumibol Adulayadej) 국왕까지 계속되고 있으며 왕은 국회를 통해 입법권, 수상의 내각에서 행정권, 사법부에서 사법권을 행사하고 있다.

 국토의 28%가 삼림지대, 41%가 경작지, 주로 남방 불교를 신봉하고 있다. Thai 라는 국명은 자유를 의미하는 태국어에서 유래하며 외세의 지배를 한번도 겪은 적이 없는 입헌군주국이다.

 태국이 서구 열강의 침략을 받지 않은 요인은 인도차이나 반도를 양분하고 있던 영국(버어마, 인도 동부), 프랑스(남북 베트남) 사이에서 완충지대 역할을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프랑스에 캄보디아, 라오스의 종주권을 내준 것이다.

1932~1987년 사이에 태국의 열 네번이나 헌법이 제정, 개정 되었다. 그 후 국회와 민간 정치인 간의 정쟁은 군사정부를 위한 꼭두각시 역할을 한 것이었다.

 태국의 교육은 국제학교가 특징으로 100여 개가 전역에 있다. 유치원부터 대학 과정까지 기숙사 형과 비 기숙사 형이 있고, 미국식, 영국식, 프랑스식 교육형태로 공, 사립으로 나누어 져 있다. 학기는 5~9, 11~3월이다.

 태국은 여행자의 천국으로 불린다. 수많은 사원의 불교 문화유적, 골프, 해양 스포츠 등 다양한 즐길 거리가 많고, 항공편도 싸고 다양하다. 시차도 2시간이라 우리나라 사람들의 최적의 관광지로 부상 허였다.

 

 

                                  (사진 방곡의 새벽의 사원 전경)

 

 

태국전도

 

(방콕아유타야수코타이칸차나부리방콕)

 

 

(1) Ayutthaya 왕조의 옛 도읍지

 

여섯째 날. 오늘 부 터는 태국의 옛 왕조의 유적지를 찾아보려 한다. 그 동안 태국은 한국사람들에게는 아주 가까운 나라였다. 주로 방곡, 파타야, 창마이 등은 수많은 한국사람이 부담 없이 다녀 올 수 있는 관광지로 보편화된 곳이다. 이번에 방문하는 곳은 태국의 역사에서 두 개의 왕조가 도읍지를 정하고 어떻게 발전하여 왔는가를 유적을 통해서 확인해 보고 십은 생각에서다.

아침 일찍 일어나 호텔 주변을 산책하려 하나 도로에 둘러 쌓여 있고 너머로 메콩강이 보이나갈 곳이 없는 곳이었다. 이제 08:00시에 호텔을 나서서 Ayutthaya(아유타야)의 옛 왕조와 만나려 한다.

아유타야는 417년 간 Thailand의 수도로서 UNESCO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도시 전채가 역사공원으로 되어 있다. 이 세계 문화유산의 중요한 곳을 방문한다.

 

1)    Wat Yai Chai Mongkol

 

                           (사진: 와이 차이 몽콜 사원의 체디)

 

이 유적지는 남동 방향에 자리잡고 있다. 거대한 (Chedi)이 서 있어 멀리서도 볼 수 있다.  이 사원은  Pra Vanarat Maha Thera문하에서 수학한 후 Ceylon 에서 돌아온 수도승들을 위해 1357 우통(U-thong) 왕이 건축하였다. 수도승의 유골은 Pa Kaeo Sect이다. 그로 인해 이 사원의 승들은 주로 명상에 몰두하였다. 이 사원은 고승이 머물렀던 곳으로 최고의 사원을 의미하는  Wat Chao Phya-thai 로 명명 되었다.

이 사원에는 미얀마가 1592 1차 침공 시 아유타야가 승리, 이를 기념하기 위해 Naresuen(나래수앙) 왕이 쌓은 전승 기념탑이 중심에 있고 높이가 72m나 된다. 주위에는 수많은 불상이 장방형으로 놓여있어 장관을 이룬다.

 

 

                               (사진: 와이 차이 몽콜 사원의 회랑의 부처들)

 

 

오른쪽의 부처는 고승  Phra Vanarat 이고 왼쪽의 부처상은 Phra Buddha Kosacham 으로 알려 졌다.  Chedi(체디)는 안에 공간이 있고 불상이나 보물을 보관한다.  Stupa(스투파)는 내부 공간이 없이 쌓은 탑이다

입구 양 옆에는 요사채가 있다. 탑이 모두 3개인데 하나는 붕괴되었다. 사방으로 108개의 부처가 둘러 앉아 있다. 중앙에 큰 탑 주위로 4개의 소탑이 호위하듯이 서 있다.

 경내에 있는 본당, Sara Din 나래수앙 왕 때 지었고, 여러 종교행사를 할 때 사용하였고 아주 고승이 있었던 곳으로 중앙에 큰 불상이 있다. 그 뒤 밖에 있는 대형 와불상은 지난번 홍수로 침수 피해를 입어 보수 중이다.

                                           (사진:  대 와불은 수해로 보수중) 

 

2)    Wat Maha That(마하 탓 사원)

이 사원의 건축은 1374년에 보롬마차티랏(Borommarachathirat)1세 때 시작하여, 1388~95 년간에 라미수앙(Ramesuan) 왕의 통치기간에 완성 되었다. 그러나  Songtham 왕이 권좌에 있을 때 주탑(Khmer Style Tower)이 붕괴되었다. 그러나 Prasatthong 왕의 통치기간(1630~55)에 재건 완성 되었고 그때 탑의 높이가 더해졌다.

 

                            (사진: 사원 중앙의 부처상) 

 이 사원은 다시 1732~58년 사이에 Borommakot 왕 시대에 왕실사원으로 다시 복원되었고 그때 4개의 주랑(Portico) 이 추가 되었다. 1767년에 아유타야 왕조가 쇠퇴하였을 때 사원이 불타고 폐허가 되었다.

이곳의 사원과 불상이 목이 잘리고 초토화 된 것은 부처님의 가호를 이 지역이 더 이상 누리지 못하게 하자는 처사였다. 그러나 잘려진 불두(佛頭) 하나가 큰 나무아래 나무뿌리에 쌓여 솟아나 있어 부처님의 자비와 신비를 보여 주고 있다. 몸채는 사라지고 머리만 아유타야 시대의 양식으로 남아 있다. 

 

   

                   (사진: 마하 탓 사원의 나무뿌리에 쌓인 불두 모습)

 

 이 사원은 당시의 대국이었던 앙코르제국의 사원의 양식인 크메르 양식(Khmer Style)을 따랐으며 흑 벽돌을 쌓아 올리고 그 사이에 불상을 안치하고 있다.

본전에는 52개의 탑이 있었다 하나 붕괴되어 버렸고, 주위의 대, 소의 탑들은 모두 옛 모습이 간데 없고 풍화되어 가는데, 현재로서는 그대로 보존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붕괴된 본전 위에는 잡초를 기계로 깎는 인부가 분주하게 움직이며, 제초기 돌아가는 소리만 요란하게 폐허에 울려 퍼진다.

모퉁이에 서있는 불상은 몸체는 큰데 머리가 잘린 채 홀로 쓸쓸히 서 있느니! 사원의 회랑 4개 면에는 수백 개의 파괴된 불상들은 그저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준다.  

 

3)    Wat Phra Si Sanphet( 프라 시 산펫 사원)

 

1350라마티보디(Ramathibodi) 1세 치하에 아유타야 왕조 성립 때부터 1448 삼 쁘라야(Sam Phraya) 왕 때까지 이곳에 왕궁이 자리잡고 있었다. 훗날 Borommatrailokanat 왕이 이곳에 사원을 짓도록 명하였다.

그의 통치기간 후에 그의 아들 Ramathibodi 2세가 2개의 체디(Chedi) 를 지으라고 명하였다. 하나는 그의 부왕의 유물을 보관하고, 다른 하나는 그의 동생의 유물을 보관하기 위한 것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Ramathibodi 2세 유물을 보관하기 위한 것이다.

 

 

                      (사진: 프라 씨 산 펫 사원의 거대한 체디의 모습)

 

1500 년에 와서 라마디보디 2는 높이 16 m, 붓타의 입상을 세우라고 명하고 170 kg의 금으로 치장하였다. 당시의 Phra Si Sanphet Buddha 가장 신성시 되었고 이곳에다 왕실과 가족의 유골, 유품을 다 이 체디에 보관하였다. 이 사원은 완전한 왕실 사원이었고 어떤 승려도 상주하지 않았다.

 

                              (사진: 산 펫 사원  소탑)

그 후 이 사원의 불상은 1767년에 아유타야가 미얀마에게 침공을 당했을 때 불상을 녹여내기 위해 불을 질러 약탈해 가고, 찬란하던 당시의 모습은 사라져버렸다. 검은 색 갈의 불상으로 변하여 이 세상을 황량한 시선으로 내려다보고 있다.

 

4) Phra Mongkonbophit (프라 몽콘 보핏 사원)

 

초기 아유타야 시대에는 왕실의 장례식장은 없었다. 그러나 화장이 거행됐던 곳은 훗날 새로운 사원 터가 되었다. 1610년에 Songtham 왕은 붓다 상을 보관하기 위해 Mandapa(네모난 지붕 구조 사원)를 짓도록 하였다. 거기다가 Phra Mongkonbophit 불상을 안치하였다. 그리고 나중에 Wat Chichiang 사원과 화장한 터에 탑을 지으라고 명하였다.

그러나 Sua 왕 시대에 벼락이 처 만다파가 무너지고  몽콘보피트는 넘어졌다.

1955년에 와서 Phra Mongkonbophit 는 복구되었다. 그 당시에 붓다의 유품이 왼쪽 어깨 위에서 발견되어 지금은 Chao Sam Phraya National Museum 에 안치 하였다. 당시의 버마 수상 Nai Uhnu 가 아유타야를 방문해서 200.000 바트를 기증해 중심 사원(Viharn)을 만들고 금으로 치장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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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쁘라 몽콘 보핏 사원의 황금 붓다-당시 버마의 우 누 수상이 기증)

 

5)    Wat Chai  Watthanaram(차이 왓타나람 사원)

 

 이 사원은 1630년에 쁘라사통(Prasatthong) 왕이 명하여 지은 사원이며 그의 어머니를 위해 지은 것이다. 앙코르 왓트 사원과 유사하며, 캄보디아와의 싸움에서 이긴 것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다. 캄보디아 타입의 중앙 탑과 주위의 4개 탑과 둘레의 8개의 작은 탑이 모두 같은 형식이다.

가운데 대 탑은 35 m의 높이고 초기 아유타여 양식이 가미되었고, 우주의 중심인 수미산을 상징한다. 1767년에 당시의 왕도였던 아유타야가 버마의 침입을 받아 사원은 이때 군인들이 주둔하였다.

992년에 복원을 하였으나 최근 홍수로 3 m 이상이나 침수되어 입장이 불가능하다. 가운데 중심 탑은 수미산을 상징하며 이문으로 들어가면 세상을 떠나 해탈의 경지로 가는 것을 의미한다.

 

                (사진: 차이 와타나람 사원의 중앙 탑 )

 

당시의 왕들은 이렇게 내세의 안녕을 위하여 사원을 지어 부처님께 바치는 것이다. 그러나 백성들은 재력이 없으니 대소의 불상을 만들어 바친 것이 당시의 시대상이다.

 

 이제 오전에 사원 순례를 마치고 아유타야 기차역으로 이동한다. 우리는 2등급 기차를 타고 수코타이로 이동한다. 12:15분에 기차를 탈 예정인데 10분 늦어진다. 모든 트렁크를 기차에 올리고 좌석에 앉으니 승무원이 도시락과 냉수를 공급한다. 호텔에서 가져온 샌드위치, 빵 등을 더하여 점심을 기차에서 하며 이제는 배냥 여행 기분으로 기차여행에 들어간다.

작년에 인도의 평원을 달리었던 것처럼 이곳의 곡창지대를 달린다. 한 시간 만에 Lop Buri 역에 이른다. 들판에는 논마다 벼가 무성하게 지란다. Nong Tag 역은 서지 않고 지나가니 주변에는 옥수수 밭이 드넓은 평야에 자리잡고 계속된다.

 물이 고인 논에서 하얀 해오라기가 기차의 기적 소리에 놀라 날아오르고, 멀리 산밑으로는 대형 불상이 차창으로 보인다. 급행이라 작은 역은 그대로 통과한다. 평야라 협궤의 선로는 직선으로 달린다. 농촌 들판을 달리며 경적을 울리니 마치 우리나라에서 60년대의 추억의 기차여행 기분이다.

Khao thong 정거장에 14:40분에 멈추니 근처의 학교에서 수업을 마친 여학생들이 많이 타고 기관사 2명이 교체되고 우리가 주문한 캔 매주가 이 역에서 배달 된다.

논밭에는 농약을 사용안해서 각종 새들이 무수히 날아다닌다. 15:50  Bangmalnak 에서 잠시 정차하니 하얀 갈대가 춤추듯 바람에 나부끼고 검은 새 떼들이 하늘로 날아오른다.

 

 

                             (사진: 수코타이로 가는 기차 차창 밖의 풍경)

 

  Phicht 역에 이르니 노란기와 태국의 국기가 함께 나부끼니, 지나 12 5일 푸미폰 국왕의 탄생 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한 것이란다.

어느덧 5시간이 넘는 기차여행이 끝나는 순간 우리는 17:20분에 피싸누록(Phitsanulok) 소도시에 내린다. 역 광장에는 오트바이 행열이 붐비고 기관차가 전시되어 있다. 이곳에서 창마이로 가는 교차 역이라 교통이 붐빈다.

 수고 타이는 여기서도 한 시간 이동하여야 한다.

 

(2)          Sukhothai 왕조의 옛 도읍지

 

수코타이는 근대시기의 태국역사가 시작된 곳이다. 앙코르 제국의 지배를 받던 타이인들이 수코타이 지역에 독립왕조를 세우면서 비로서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수코타이란 말의 뜻은 행복의 새벽 이라는 의미다. 오랫동안 이 지역의 샴족은 앙코르왕국에 속해 있었으며 부족단위로 농사를 짓다가 13 세기에 들어와 중국 남부 대리국에서 살다 몽골 족에 쫓기어 온 세력과 더불어 이곳 수코타이에 정착하고 왕조를 열게 된다.

태국영토 내에서 수코타이 왕국은 태국 최초의 통일국가를 세우고 약 100(1257~1350) 동안 독립된 왕조를 유지하고 강성헀던 왕국이다. 3대 왕인 랑캄행 대왕때 가장 국력이 왕성하였으며 1350년에 남쪽에 아유타야 왕국에 패해서 흡수 되었다.

 

 

                               (사진: 피싸누록 시의 역전 풍경)

 

 

비록 단명의 왕조였지만 영토확장과, 불교의 융성, 태국의 문자의 발명을 이루어 명실공히 태국 역사의 중심을 이루었다. 1238년부터 샴 왕국의 도읍지로 건축이 이루어 졌다.

그 당시 찬란했던 불교문화유산은 지금도 수코타이 지역에 193개의 유적으로 남아있어 짧은기간 동안 이룩한 유산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이 지역의 수코타이 역사공원은 동서 2 km, 남북 1.6 km의 성벽으로 둘러 쌓여 있고 내 외부에 방대한 유적이 자리잡고 있다. 1991 UNESCO 문화유산으로 지정 되어 있다.

역사공원은 도심에서 19 km 옛 고도에 위치하고 있다.   

짧은 기간에 놀라운 건축술로 100여 개의 사원과 불탑, 왕궁과 수많은 불상을 만들었고 도시 전체를 해자(垓子)를 파서 2중으로 두르고 성벽과 망루도 갖추었다.

건축술은 앙코르 양식에다 스리랑카 양식을 가미하여 독특한 스타일의 수코타이 양식을 이루었다. 18:40분이 되어 마침내 버스는 수코타이 호텔에 도착. 숲 속에 단층으로 넓은 터에 자리잡아 한참을 이동해야 한다. 식사도 뷔폐식이나 가지 수도 적고, 함께하는 민속공연도 허술하다.

 

 

                                      (사진: 수코타이 호텔 모습)

 

일곱 번째 날: 오늘은  Sukhothai 지역의 문화재를 탐방하는 날이다.

이곳의 사원지역 전체가 Sukhothai Historical Park 로 되어 있고 140여 년의 통치기간 중 약 100년 동안의 사원과 왕궁을 조성한 것이다. 이전부터 있었던 앙코르 제국의 힌두사원을 불교사원으로 개조한 것으로 보인다.

 이곳의 모든 건축물은 정치적인 것과 종교적인 요소가 합해 이루어진 것이다. 짧은 기간에 수많은 역사유적이 조성되어 앙코르, 스리랑카 양식의 이어 연꽃을 새긴 수코타이 양식으로 발전하여 왔다.

 

1)    Wat Mahathat ( 마하닷   사원)

왓  이란 부처님의 유물을 보관했던 곳으로 붓다의 목뼈와 머리카락을 보관했던 왕실사원이었다. 고대도시의 중심에 자리잡고, 두 개의 성벽과 해자로 이루어져있다. 대웅전(Viharn) 10, 체디() 198개나 있다. 탑 상륜부에는 연꽃 봉우리를 올려놓은 것같이 뾰족하게 만들어 졌다.

이곳에서 나는 홍토(紅土)로 빗은 붉은 벽돌로 쌓았는데, 한군데는 현무암같이 보이나 이는 홍토가 오랜 기간 풍화되어 현무암처럼 구멍이 숭숭 뚫려 있기 때문이다.

이 사원은 초대 왕인 인트라딧때 부 터 건축을 시작, 람캉 행 대왕 때 까지 계속되었다. 이 사원은 206 m200m 벽돌 담장과 해자로 둘러 싸여 있다. 벽돌 담장은 우주의 경계를, 해자는 바다를 상징한다.

 

 

 

 

 

 

                                         (사진: 마하탓 사원의 중앙 탑)

 

 

 

 본당 중앙 사원으로 오르니 이곳은 외교사절을 맞던 곳이다. 중앙의 부처님 뒤의 탑은 수코타이 양식의 대표적인 모형이고, 중앙 로는 왕이, 중간 길은 귀족과 대신들이, 맨 좌, 우의 통로는 제물 운반 인들의 통로로 이용되었다 한다. 본 사원의 부처님의 오른편 손가락이 아주 수려하게 조각되어 있다. 열주 회랑 사이에 좌대(座臺)는 고승이 앉았던 자리다.

중앙 체디 탑 기단부에는 스님들의 탑 돌이 모습이 빙 둘러서 조각되어 있다. 이 탑 안에 Buddha의 목뼈와 머리칼이 보존되어 있다는 설이고, 양 옆으로는 스리랑카 양식의 탑이 2, 그 사이로는 크메르 양식의 작은 쁘랑()이 섞여 있다. 크메르 양식의 작은 탑 박공에는 부처님의 일대기가 그려져 있다.

이곳 수코타이 양식의 부처는 온화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것이 특징이다.

왓 마하탓에서 수코타이 특유의 연꽃봉우리 모양의 체디를 중심에 쌓아 올리고, 그 주위로 크메르 쁘랑, 스리랑카 체디를 배치한 것은 수코타이 왕국의 권위를 높이고 종교적 위상을 높이기 위함이다.

 

2) Wat Sri Sawai ( 씨 사와이 사원)

 왓 마하탓 남서쪽 300 m 떨어진 곳에 위치. 12~13세기 앙코르 시대의 시바신을 모시기 위한 힌두 사원이었다. 그러나 수코타이 왕조가 들어서면서 입구에 불당을 건축하면서 불교사원으로 개조 하였다.

 

 

                                         (사진: 씨 사와이 사원의  중앙 탑)

 

앙코르의 영향을 확인 할 수 있다. 시바신을 모신 가운데 탑은 20 m나 되고 앙코르 지성소 같다. 현재는 부조가 없고, 벽화만 있는 것이 특징이다. 정문으로 들오오면 중앙 로와 양 옆으로 회랑이 있다.

 

 

중앙 로에 6, 양쪽에 12 개의 기둥이 있는 것으로 보아 회랑이 있던 곳이다. 본전의 문을 들어서면 중앙에 큰 체디, 그 중간에 앙코르 양식의 쁘랑()이 있고 쁘랑 중간 좌, 우에 비쉬니 신이 조각되어 있다. 중앙의 큰 체디 지하는 지성소나 감실이 있다.

3)   Wat Sa Sri(사 씨 사원)

 

왓 마하탓 남쪽이 위치. 14세기 후반 건축. 호수 섬 내에 지은 사원으로 아름다운 연못의 사원이란 뜻. 스리랑카에서 유래한 소승불교를 상징하는 사원. 입구에 큰 문이 나있는 불탑에서 걸어 나오는 부처님 상이 너무나 자연스러워 시선을 집중시킨다.

본당은 해자를 건너와서 접근하게 되어 있고, 부처님이 가운데 높이 모셔져 있고 회랑이 양쪽에 있다. 지금은 중앙 통로 회랑 기둥만 7개씩 남아있고 그 옆줄로도 7개 씩이 도열되어 있다.

 인공 연못에는 또 다른 섬을 만들어 다리 위에서 보면 체디와 불상이 균형을 이루고 있다.

 

 

                (사진: 사 씨 사원의 탑에서 걸어 나오는 모습의 부처)

 

                         (사진:  중앙 사원 붓다)

4)   Wat Chana Sonkhram (차나 송크람 사원)

 

왓 마하탓 북쪽에 있는 사원이다. 14세기의 세워진 체디 하나가 수코타이 양식의 정수이다.

대웅전이 있었던 자리는 기둥만 남고, 회랑에는 8개씩의 열주가 서있고 체디 옆으로는 부속 탑이 양쪽에 하나씩이 남아 있다.

 

5) 랑캄 행 대왕 의 기념상

수코타이 왕조에서 최고의 대왕으로 존경 받으며 그는 타이 문자를 창제 하였다.

 동상 앞에는 모자가 엄마의 생일을 맞아 대왕에게 참배하고 있었다. 동상 양쪽으로는 대왕의 업적을 기리는 조각과 코끼리를 타고 전쟁에 나가는 것이 부조 되어 있다.

                                        (사진: 랑 캠 행 대왕의 동상)

많은 사람들이 참배를 오며 특히 이날은 제복을 입은 군인들이 대왕 앞에 줄을 서서 참배하는

모습이 감명을 준다.

 

6)   Wat Pro Phai Luang ( 프로 빠이 루앙 사원)

 

 수코타이 고대도시 성곽밖에 위치하고 있다. 처음에는 힌두교 사원으로 지었으나 앙코르 제국의 자야바르만 7세의 의해 대승블교 사원으로 개축된 것이다. 이곳에는 크메르 제국의 영향이 커서 왓 씨 사와이 와 이 사원이 두 양식이 혼합된 사원으로 볼 수 있다.

당시에는 코끼리를 부처님의 뜻을 전하는 전령사로 보았으며, 힘이 센 것을 상징 하였다. 경내에는 앙코르 형식의 홍토로 쌓아 올린 탑이 3개나 있는데 중앙 탑과 남쪽 탑은 무너지고 북쪽탑 만이 남아있다. 성소 안에서 자이바르만 7세의 불상이 발견 되었다. 그로 인해 이 사원은 대승불교 사원으로 앙코르 시대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하나의 탑에는 가루다가 보이고 회랑 앞에는 작 은 체디의 흔적이 보인다. 벽돌로 쌓았으나 탑의 상층이 붕괴되고 기단위로는 주위로 불상이 5개나 목이 떨어진 것이 서 있으며 중앙의 것은 크고 좌우로는 2개씩 작은 몸체만 남아있다. 4개의 면이 똑 같은 구조로 되어 있다.

 

 

                                  (사진: 쁘로 파이 루앙 사원의 대탑 )

 

이런 폐허에 사원 터에서 부처님의 흔적을 찾아보는 것은 구도에 길로 가는 것이리라. 현대에 와서 깨끗하게 복원되어 산뜻하게 서있는 사원보다 무너지고 쓰러진 옛 터전에서 과거의 정신 유산을 추구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다.

 

7)   Wat  Sri  Chum: Phra Achama

  성곽 밖 북쪽으로 약 1 km 떨어진 곳에 너무나 큰 부처님이 법당 뒤에 몬톱(외벽이 두꺼운 건물) 이라는 거대한 건물 안에 서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놀라게 한다.

 

 

                          ( 사진: 쁘라 아짜마 사원의 거대한 불상)

 

 이 사원은 13 세기에 건설 되었는데 여러 면에서 이곳의 사원과는 달라 보인다. 일 명 보리수 사원 이라고도 부른다.

전면으로 폭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면 문과 마주한 정면에 거대한 불상이 서 있다. 높이가 무려 15 m나 된다. 쁘라 아짜마라고도 불리는데 눈이 부리부리하다. 이 부처를 둘러싼 몬톱(외벽)의 두께는 3 m 나 되며, 뒤쪽으로는 출입구가 없다.

 

 이 부처의 길다란 오른손 가락이 우아하며 아주 여성적으로 가늘고 길고 매끄럽게 조각되어 보는 이의 시선을 끈다. 지금도 당시에 붙여놓았던 금박이 아직도 남아있어 주목을 받는다.

 

 

                                (사진: 쁘라 아차마 부처의 오른손 모습)

 

 8) Wat Chang Lom(창 롬 사원)

 

 이 사원은 우리가 묵은 수코타이 호텔 뒤에 위치해 있다. 역사공원 밖 동북쪽 성벽 밖에 위치하고 해자로 둘러 쌓여 있다.

의외로 큰 100m157m의 큰 터에 자리잡은 고대 기념 사원이다. 가운데 종탑 모양의 큰 체디(Chedi))가 서있고 기단 둘레로는 32마리의 코끼리 조각이 둘러싸고 있다. 중앙에 붓다가 모셔있는 비하라(법당)은 작은 탑들로 둘러싸여있다. 전체 사원 구역은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1384년에 발견된 돌에 새겨진 조각에는 불교 고승인  Phanom Sai Dam(파놈 사이 담)의 생애가 그려져 있다.

이렇게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도 방치되고 있는 중요사원이 있어 다시 한번 수코타이의 옛 유적지에 대한 보존이 시급하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다.

 

 

               (사진 : 창 롬 사원의 중앙탑과  기단 둘레의 코끼리 조각상)

 

 

 

 

 

  

12:25분 모든 탐구 활동을 끝내려 한다. 이곳의 역사공원은 이곳에서만 운영되는 소형차를 이용해야 한다.

중식시간이 되어 이번에는 Sabaidee Restaurant 에서 주문식사로 태국의 음식을 시식하기로 한다. 너무 오랫동안 기다려 한국인의 정서에 맞지 않은 곳이지만 인내심도 중요하다.

식사 후 14:20분 수코타이 공항으로 이동한다. 아주 한가한 공항으로 무슨 리죠트 같은 풍경이다. 가는 길에는 바나나 밭, 부겐베리 꽃이 만발하여 아주 고즈넉한 농촌 풍경이다.

 

                       (사진: 수코타이시내만 다니는차량)

수코타이 공항은 조용하고 깨끗한 시골 공항이다. 시간이 남아 앞에 넓은 연못가로 가서 티 타임을 가진다. 연못에는 검은 고니 3마리가 유유자적하며 놀고 있고 나중에 하얀 놈 4마리가 합류하여 무리를 이루니 역시 동물의 세게도 무리 지어 다니는 것이 보기가 좋다.

공항 청사는 수코타이 양식의 단층 청사로 지붕이 단아하고 멋지다. 주변의 조경이 잘 어울려 공항 같은 분위기와는 멀고 어느 휴양지에 온 느낌이다.  

  TG 214기는 프로펠러 추진기로 17:05분 꽃이 아름답게 핀 활주로를 이륙하여 고즈넉한 전원풍경을 벗어난다. 한 시간 남짓, 18:10분경 착륙을 준비하니 방콕시의 석양풍경이 물의 도시답게 아름답게 빛난다. 그리고 이내 어둠이 내리고 19:00 에 수바나푸미 국제공항을 나와 고가도로를 타고 차오프라야 강을 건너 20:20Anantara Hotel 이 이르러 649호 에서 쉰다.

 저녁은 20:40분 호텔에서 민속공연을 보면서 강변이 내려다 보이는 야외에서 마감한다.

 

 

 (4) 동남아의 중심도시 방곡 주변으로

   Dumrun Saduak Floting Market

 여덟 번째 날: 오늘은 07:00 시에 출발하여 방곡 근교의 담넌 사두억 수산 시장으로 간다.

도로변으로 가면서 50분이 넘어 시내를 벗어나면서 도로변의 천일 염전을 만난다. 먼 제방으로 부 터 바닷물을 끌어들여 천일염을 만드는 곳이다. 양쪽 도로변에 광범위한 염전이 계속된다.

 

이곳의 수산 시장은 개인 집을 연결한 것이 미로처럼 이어져 된 곳이다. 가는 도로 가에는 바나나, 야자나무가 무성하고 열매가 많이 달려 있다. 08:25분에 주차장에 도착한다. 시장거리로 들어가 배를 타기 위해 선창에 이른다. 조그만 관광용 Boat를 타고 20 분간 수상 시장을 한 바퀴 도는 것이다. 물위로는 각종 먹거리와 상품을 실은 배가 가득하게 오고 가며 그 사이로 우리들의 배는 수로를 헤치고 나아간다.

                           (사진: 담 란 사두악 수상 시장 풍경)

 

 야채, 야자 열매, 고기, 과일, 일용품, 각종 기념품 등을 보오트에 싣고 수로를 다니며 관광객을 상대로 장사를 한다.  물가로는 옷 가게, 기념품 점, 모자, 티 셔츠, 인형 등 갖가지를 걸어놓고 파는 점포가 줄지어 있고 배에서 올라가 시장도 볼 수가 있다. 이곳 주민들의 모습은 없고 모두 외국인 이다. 한 바퀴 돌아오니 어느새 사진을 찍어 접시 중앙에 부착한 것을 사라고 내민다.

대단한 기동성이다. 안 사면 가운데 사진만 떼어내고 다시 활용하면 되니 참 기발한 아이디어다.

 

콰이강의 다리를 찾아서

 

1939년에 일본은 군부가 대동아 공영 이라는 아세아 침략 정책을 내세워 중국 남부 운남성에서부 터 시작해 태국, 미얀마를 점령하고 인도로 진출하려고 이곳 Kanchanaburi(칸차나부리)Kwai(콰이)에 다리를 건설한다.

이 다리 건설에 동원된 전쟁 포로들의 노동력으로 건설한 다리는 그야말로 죽음의 행진이었다. 수많은 일본 군과 더불어, 영국군, 태국군, 네데란드 군 포로들이 이곳에 동원되어 마라리아에 죽어가고 굶주림에 쓰러지면서 목조와 철골로 다리를 건설하면서 일본군의 잔학상에 죽어간 사실은 영원히 지울 수 없는 범죄행위다.

이 다리 공사에도 일본군 통역관으로 차출된 한국인이 있다는 사실에 우리는 숙연해 졌다. 전쟁이 끝나고 연합군이 승리하여 모두 돌아가는데 한국인은 일본군의 앞잡이로 몰려 전범으로 처형 되어 머나먼 이국 땅에서 산화한 영령이 있다 하니 전쟁의 상흔은 아물 길이 없는 것이다.

이 다리공사를 배경으로 당시의 상황을 영화화한 작품을 잠시 회상해 본다.

 

 

                                        (사진: 콰이강의 철교 모습)

 

  The Bridge on the river Kwai

 셈스 피겔이 제작한 2차 대전의 전쟁 영화로 2차 대전 중 일본이 인도차이나 반도를 점령한 후 인도로 진출하기 위해 태국 서부 칸차나부리 지역 콰이강 위에 목조다리를 건설한다. 당시 연합군의 전쟁포로 1 6천명과 5만여 명의 노무자를 동원하여 다리와 그 위로 철도를 건설하는데 투입하였다. 태평양 전쟁이 1939 2차 대전으로 확대되면서 일본은 Banpong 에서부터 콰이 강을 건너 Thamakham 까지 약 4 km로 처음에는 빨리 공사를 하기 위해 강 위로는 100m의 나무다리를 포함 300m 의 구간은 11개의 철교구간으로 건설하여 공기를 단축하여 불과 1년 만에 완성하여 수 많은 죽음을 동반하여 The Death Railway(주검의 철길) 라고 불리었다.

 

 

                                (사진: 당시의 주검의 철길의 사진)

 

 포로들은 수용소에서 굶주림과 중노동과 질병에 시달려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그 수용소를 배경으로 일본군의 잔학상과 만행을 고발하며, 특히 일본군 장교 세수에 하야카와의 잔인한 행동에 영국군 장교 알렉 기네스의 불굴의 대결을 중심으로 펼 처 지는 전쟁 영화로 1950년대 초반에 청년들의 심금을 울린 영화다.

 특히 보기 대령의 행진곡은 휘 바람 곡조로 인기를 끌고, 포로들의 애환을 잘 표현하였다.

감독은 데이비드. , 원작은 피에르 볼의 프랑스어 소설이었다.

이 영화는 1957년 아카데미 작품상, 남우 주연상, 조연상, 감독상 등 7개 부분의 수상으로 당시의 영화계의 화제였다.

당시  Kanchanaburi는 조그만 마을로 인구 31.327명의 조그만 도시였다.

우리는 먼저 JEATH 박물관에서 2차대전의 비정함과 일본군의 만행을 만나려고 한다.

 JEATH 란 이곳에 전쟁포로로 동원 되어 노역에 종사한 나라들을 의미한다, Japan, England, Australia, Thailand, Holland 5국의 머라 글자를 따서 붙인 것이다. 박물관은 그 당시 포로들의 수용소 막사를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이곳에서 희생된 모든 사람을 위하고, 전쟁과 제국주의의 만행을 영원히 기억하여 다시는 이런 불행이 일어나지 않기를 기원하기 위해서다.

 이곳에는 이런 유사 박물관이 5곳이나 되니, 자료가 사진 이 대부분이라 가능한 일이다.

11:15분 간차나부리 시내에 들어와 좌회전하니 기차역이 보인다. 관광용 간이 차가 운영되나 만원이다. 건너편 다리 넘어 협곡길이 절경인데 기차를 타야 하는데 시간이 맞지 않는다.

 날씨는 37°С로 아주 무더위다. 도로변에는 이곳에서 희생된 화교들의 묘와 이곳에서 다리 공사 시 희생된 사람들의 묘지가 연이어 있다.

 우선 12:00시에 박물관을 관람하기로 한다. 박물관 이라야 당시의 포로막사를 그대로 본뜬 것이다. 나무로 짓고 이곳의 대나무로 지붕을 덮은 곳으로 바람이 잘 통한다.

 전시 품이라야 당시의 포로들이 공사 시 동원되어 혹사당하는 사진이 전부이고, 잔혹한 일본군의 만행을 몰래 찍어 논 것이 전부이다. 당시에 사진이니 모두 흑백이다. 군데 군데 당시의 도구들도 있고 사용하던 무기류가 약간 전시되어 있다. 당시를 스케치한 그림도 한쪽에 전시되어 있다. 노역에 종사하고 영양실조로 뼈만 남은 앙상한 모습, 죽어가는 젊은이의 모습도 기록으로 남아있다.

 

 

                (사진: 당시 포로들의 영양실조로 야왼 모습)

 

목조 다리가 완성 되었으나 연합군의 폭격으로 붕괴된 모습 등 일본군의 만행을 찍은 빛 바랜 사진이 대부분이다.

 사진은 약 100매 내외이며 건설과정과 죽어가는 포로들의 참상이 표현되어 있다. 왼쪽 통로에는 당시의 만행을 삽화로 그린 것이 빛이 바랜 채 전시되어 아주 황량한 모습이다.

한 쪽으로는 당시 쓰던 폭약, 폭탄, 총기와 복장도 전시되어 있다.

이곳을 관람하고 철길 옆 River Side Restaurant 에서 점심을 중국식으로 강을 내려다보고 진행 한다.

 식사 후 걸어서 다리를 건너 갔다 오기로 한다. 많은 인파가 걸어서 다리를 감상한다.

 이제 모든 일정을 마치고 14:15분 방콕으로 돌아가는 길에 오르니 체증이 심하다.

 

 

 

                               (사진: 콰이강의 철길 다리의 난간에서)

 

 중아 분리대에는 노란색, 붉은 색 칸나가 화려하게 피어 있으니 이 꽃들은 매연에 강한 모양이다. 마침내 17:25분 방곡 시내에 들어온다. 수로 가의 집들은 판자촌이고 멀리 시내에는 고층 빌딩이 즐비하니 대비를 이룬다. 시내를 다니는 승용차는 대부분 일본 산이다.

 

시간이 여유가 있어 방콕 시내에서 맛사지 를 하기로 한다.

Thai Phurm Massage3 에서 한 시간을 쓰기로 한다. 한 시간의 여유를 편안한 마음으로 발 맛사지를 다 함께 받으며 휴식을 취한다.

 다시 출발 하여 시내 중심가에 있는 Baiyoke Sky Hotel 로 간다. 이 건물은 77층으로 이곳에 전시내를 관망하는 장소가 뷔폐장이다. 19:40~20:40분 까지 한 시간 동안 방콕시내 야경을 내려다 보면서 즐기나, 너무 사람이 많고 분위기가 소란스럽다.

 

                              (사진: 방곡의  Baiyoke  호텔의 광고)

 

시내는 지난번 수해로 인해 아직도 900여 개의 달하는 업소가 미가동 상태란다.

버스로 20:55분에 마침내 수바나푸미 공항에 이르니 더욱 인파가 붐빈다.

 TG 656 기로 11:45분에 이륙하니 방콕 ~서울은 3662 km이다.  5시간 30분 소요된다.

 남부 라오스 상공을 지나 베트남 다낭 위로 해서 하이난 섬 앞바다로 나간다. 새벽 3시가 되어 남지나해로 나가니 서울은 새벽 5시로 나온다. 이제 1시간 30분 남았다. 어느덧 제주도 상공을 날아 군산 상공을 통과하여 태안반도에서 서해로 나간다.

 

 

                         (사진: 방곡의 수바나푸미 공항의 조형물)

 

 잠 시 후 영종도에 내리니 아직도 컴컴한 새벽이다.  공항을 나서니 한겨울의 추위가 엄습하며 우리는 또다시 복잡한 일상으로 돌아온다.  The end-     2012. 01. 22 

 

  PS: 본 여행기는 현지에서 구입한 팜프렛 및 사적지의 안내자료를 참고로 하여 작성 하였다.

인명이나 지명은 영어식 표기를 사용하였다. 의견을 달리하시는 경우나 더 충실한 자료를 주시면 수정하곘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