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9.26~10.07
발칸 여행기
스로베니아-크로아티아-보스니아-몬테네그로
글, 사진: 김 한 종
(사진: 네프스키 교회 전경)
프로로그
지구상에서 사회주의 공산국가인 소련이 개혁 개방으로 무너지고 나서 15개의 독립국가로 탄생하여 1차로 발틱 3국, 코카서스 3국을 순방하여 그들이 어떻게 국가정체를 유지하고 문화를 보존하였는가를 탐방하여 글과 사진으로 세상에 내놓은바 있다.
이번에는 유고연방의 공산국가가 티토의 사망으로 어떻게 해체되고 6개의 나라로 분화되면서 그들의 민족을 통합하여 국가를 세우고 그 정체성을 유지하여 가고 문화적 전통을 발전하였는가를 탐사하는 발자취를 따라가 보기로 하였다.
이 발칸지역은 중세부터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그 왕가가 디나르 알프스 이동을 지배하였고 아드리아 해안을 따라서는 로마제국이 영토를 확장하면서 찬란한 문화를 이루어놓았다. 디나르 산맥이 가로막아 보스니아지역은 산지가 대부분이라 발전이 더디었고 몬테네그로도 산악지대라 농업, 목축이 주였고, 이러한 사정은 마케도니아도 내륙지역이라 발전이 더디었고, 세르비아지역은 다뉴브 강이 흐르는 평원을 끼고 있어 평야지대가 대부분이고 농업, 공업이 발달하고 강을 통한 물류산업이 발달하여 중세기부터 찬란한 문화가 발전하였다.
근대에 들어와 발칸 전쟁(1912~13)이 끝나고 제 1차 세계대전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패배한 후 이 지역에 스라브 민족이 결집하면서 세르비아, 스로베니아, 크로아티아가 왕국을 수립하였다. 1929년 알렉산다르 1 세가 국명을 유고스라비아 왕국으로 선포하면서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존속하였다.
(사진:유고연방의 분화-세르비아,스로베니아,크로아티아, 보스니아,몬테네그로,마케도니아 6국)
2차 대전이 끝나고 1945년 11월 “티토”가 사화주의 기치아래 당시에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 스로베니아 등 5개국을 포함하는 유고 연방을 결성하였다. 당시 유고 연방은 면적이 255.804㎢, 인구가 2.400만 명에 이르는 강국으로 부상하였다.
그 후 1980년 티토가 사망 후 민족분규가 일어나고 1989년 동유럽의 자유의 물결로 공산정권이 차례로 붕괴되면서 6개 연방중 스로베니아(91.6.25), 크로아티아(91.6.25)가 맨 먼저 분리 독립을 선포하면서 독립하였고, 그 뒤 마케도니아(91.11.7),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92.3.2)가 차례로 분리 독립하면서 연방이 해체되었다. 그 후 1992년 5월 22일 UN에 가입하면서 명실공히 독립국가가 되었다.
다시 세르비아가 몬테네그로 지역을 합하여 1992. 4. 27일 신 유고 연방을 수립하였다. 2006년 이 후 몬테네그로 마저 독립하면서 연방이 완전 해체되었다. 그 사이 크로아티아 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두 나라 내부의 민족문제로 내전이 확대 되었고, 크로아티아는 혹심한 내전으로 중세 유적이 수없이 파괴되어 국제적인 보호운동이 전개 되었다. 그 동안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도 민족 분규로 내전이 격화되어 민족간에 대량학살이 자행되었다. 그 후 세르비아는 이 지역을 다시 장악하기 위해 우수한 군사력으로 내전을 일으켜 크로아티아를 비롯해 옛날 영토를 회복하려고 전쟁을 일으켰으나 국제전으로 비화하여 세계의 여론에 호소한 여러 나라 중 특히 크로아티아를 비롯한 찬란한 유적의 파괴를 일삼았고 사라예보 등 중세도시의 파괴가 심해져서 국제적인 관심을 일으켜 드브로브닉 같은 유산을 지키자는 세계 지성들의 호소로 유럽 연합과 유엔의 개입과 평화노력에 굴복하게 되었다. 특히 코소보 지역을 장악 하기 위해 알바니아 계 인종청소를 감행하면서 이 지역의 옛날의 영화를 누려보려던 만행을 하던 “미로세 비치”는 전범자로 낙인 찍혀 국제적 고립상태를 불러 들였고 마침내 유럽연합과 유엔의 평화노력을 수용하였다. 그로 인해서 세르비아는 내륙국가로 전락하고 세계는 그는 전범자로 국제 법정에 세웠으나 2006년 3월 11일 감옥에서 사망하였다.
(사진: 1990년 미로세비치가 유고 대통령으로 당선 직후 인사하는 모습)
그 후 10여 년이 지나도 그 후휴증과 파괴의 상처는 남아있으니 안타까운 일이다. 당시 파괴된 유적들은 점차 복원되어 이번에 탐방을 하게 된 것이다. 전쟁과 나라 민족간 분쟁이 어떻게 인류의 문화유산을 말살하였고, 복구되었는가를 탐구하는 여행으로 마련되었다..
세르비아 지역은 기원전 3세기부터 2000여 년 간 내려오면서 전쟁과 민족 분규로 40여 번이나 파괴되고 건설되는 발칸의 화약고 역할을 하였다. 더욱이 19 세기 초 부 터는 거의 20년마다 전쟁으로 파괴와 건설 반복되어 중세의 유산이 많이 훼손 되었다.
이제 수년이 흘러가고 옛날 내전의 상처는 유엔과 여러 나라의 도움으로 회복 되었으나 세르비아 지역은 아직도 내전에 상처가 많이 남아있다. 이제 이런 곳으로 중세 문화유적의 발자취를 찾아 떠나본다. 아울러 옛날부터 왕국을 유지해오던 불가리아는 가장 평화적으로 민주화되었고, 대국인 루마니아는 차우세스쿠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 민주화 운동으로 3000여명이나 회생되는 대가를 치르는 과정을 거처 민주화 되었다. 이제 이러한 어려운 과정을 거친 발칸 지역의 회복된 문화유적을 탐방하는 기회를 마련한 것이다.
(사진: 발칸지역의 전도)
1. 먼나먼 발칸
추석이 지나더니 날씨가 갑자기 가을로 접어들었다. Aeroflot 250기는 13:25분에 이륙하니 서해바다의 흰 물결 사이에 점점이 떠있는 섬 위로 날며, 바다에는 하얀 꼬리의 물을 가르며 어선이 지나고, 이륙한 비행기는 산동반도 방향으로 나아가 북상하면서 발해만 상공으로 향한다.
총 비행거리 6875 km에 9시간 내외를 비행해야 한다.
베이징 상공 1만m 이상 고공에 이르면서 시속 800km이상으로 날아 내몽고를 지나 고비사막위로 날아 울란 바타르 상공을 지나면서 바이칼 호수 하단에 이른다. 2958km를 날아 어느덧 이르그측크를 지나 노보르시스크 상공에 이르러 3694km를 비행하니 카자흐스탄 북방 광활한 평원지대를 지나니 이제 모스크바 시간 영역으로 들어간다.
(사진 :Aeroflot 250기의 모습)
모스크바와의 시차는 5시간 늦게 간다. 어느덧 지루하던 비행은 우랄산맥을 넘어가니 현지시간으로 10:30분 모스크바 상공에 이르니 교외의 아름다운 전원주택과 호수가 그림같이 보이는 상공을 낮게 날아 공항에 착륙. 기내에서 나오니 찬바람이 세차게 불어와 옷을 여미게 한다.
버스로 15분 이상 장거리를 이동하여 다시 보안 검색대를 통과하여 비엔나 행 터미널로 이동하여 2시간의 트랜짇 시간이 생기니, 새로 지은 청사는 넓고 높고 시원하나 면세점은 아직 미 입주 공간이 많아 썰렁하다.
비엔나행 Su 2354기는 한국시간 보다 7시간차이가 나면서 거기서 또 한 시간 늦은 22:15분에 이륙하니 모스크바 시내의 야경이 눈부시고 휘황하다. 우리는 한국을 떠나온 후 밤새도록 비행을 한다. 현지시간 10:25분 비엔나 착. 공항 터미널에 나오니 벽에는 요한 스트라우스의 악보가 그려져 있고 수하물 을 찾는 곳 벽에는 “Klimt” 의 그림이 그려져 있어 역시 예술의 본고장임을 보여준다. 백을 찾아가지고 걸어서 공항을 나와 NH Vienna Airport Hotel에 11:00시에 도착. 참으로 머나먼 발칸반도이다.
2. 슬로베니아(Slovenia): 면적 2만 273㎢. 인구 194만. 수도 류블라나
대부분이 산악, 산림지대로 구성된 나라. 율리안 알프스가 뻗어 있고, 트리그라브 산(2863m)이 높이 솟아있고 그 산 기슭에 브레드, 보힌의 2개의 빙하호가 있다. 과거 유고연방으로 부 터 최초로 독립을 쟁취한 나라로 광, 공업이 발달하였고, 기후는 아드리아 쪽은 지중해성 기후이고 동부는 대륙성 기후이다. 수도는 류블라냐로 인구는 고작 35만 명으로 학생이 5만 명이나 된다.
a) 블레드(Bled) 호수, 섬, 교회
아침 8시에 출발하여 비가 오는 가운데 산지가 많아 바닷가로 내려오면서 수많은 터널을 지나고휴게소에 진입하여 09:30분에 휴식. 도로 가에는 아주 목가적인 풍경으로 안개가 하얗게 덥히고, 바람이 불어오면 푸른 초원이 나오고 빨간 지붕에 주택이 서있고, 그 주위에 목초지가 조성되어있고 소 몇 마리가 풀을 뜯고 아주 한가하고 평화로운 모습이다.
(사진: 브래드 섬- St.Maria Church 전경)
우리는 비엔나를 떠나 스로베니아 국경 가까히 오면서 이제는 비가 그치고 다시 휴게소에서 30분간을 쉬고 나서 브래드 호수로 간다. 12:25분 국경선에 도착하니, 아무도 없어 무사 통과 후 아주 긴 터널을 지나면서 이제는 슬로베니아 영내로 진입한다. 첫 마을이 나오고 이곳은 알프스 산록이라 노인 시설이 많으며 온천수가 풍부하며 주민은 6천 여명이라 한다.
12:45분 브래드 IC 로 나오니 안개 속에 주택들이 가려 있고 주위로는 빌라가 대세이다. 조용한 마을에는 각기 특이한 모양의 주택이 들어섰고 베란다에는 화사한 색의 꽃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 마을의 “Muraka” 라는 식당에서 칠면조 튀김을 주로하여 식사를 하고 후식으로 애플파이를 하게 되니 유럽의 패턴상 시간이 너무 지체되어 중식을 마치고 브래드로 떠난다.
버스를 달려 브래드 섬에 도착하니 가는 비가 내린다. 우리는 섬으로 향하는 배에 오르니 조그만 배는 사공이 혼자 나룻배로 저어서 섬으로 건너간다..
블래드 호수는 “Alps”의 눈동자” 라고 불리는 빙하 호수로 과거 유고 연방의 “티토” 대통령의 별장으로 유명한 곳이다. 이 호수는 23도C의 광천수가 유입되어 여름에도 한기가 돌고 물고기가 훤히 보일 정도이다. 또 호수 한가운데에 떠있는 듯한 브레드 섬은 그림같이 보인다. 이 섬의 언덕 위에 서있는 교회는 성모 마리아 승천교회로서 카도릭 교도들의 성지 순례지의 하나이다.
블래드 호수는 걸어서 돌아도 2시간이면 족하다. 동서로 2.1km, 남북 1.4km, 수심은 최고가 30m로 물속이 훤히 드려다 보이며 투명하다. 한가운데 작은 섬이 물위에 떠있고 계단으로 오르면 탑이 솟아오른 교회가 나타난다. 작은 교회 탑이 하늘을 떠 받치고 있는듯하다.
이 교회는 슬라브족의 여신 “지바의 신전”이 있고, 이것이 6~7 세기에 카도릭으로 개종한 스라브 인들이 이곳에 교회를 세운 것이다. 9~10 세기에 로마네스크 석조 양식으로 지었으나 1511년에 대지진으로 파괴된 후 17세기에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된 것이다.
(사진: 행복의 종을 치는 사람들)
교회 내부에는 중앙의 성모상과 예수상, 그 양 옆에 11세기 이 섬의 주인이었던 “헨리 2세”와 그의 아내 ”쿠니쿤다”상이 서있다. 이곳에는 로마 교황이 기증한 “행복의 종”이 있어 유명하며, 1534년에 세운 종탑에는 슬픈 사연이 깃들어 있다. 즉 “프리크리나”라는 여인의 남편이 살해되어 죽자 종을 만들어 울림으로서 남편에게 사랑을 전하려 하였으나 종을 만들어 운반하다 배가 뒤집혀 물속에 갈아 안았다. 그로 인해 그녀는 수녀가 되어 수도원에서 일생을 마쳤다. 그 후 교황이 이 슬픈 사연을 듣고, 지금의 종을 선서하니 이를 “행복의 종” 이라 부르며, 누구나 이 종을 울리면 소원을 이룬다는 전설이 서려 있다. .
b) 브래드 성(Bled Castle
높이가 100 m의 절벽에 세워진 성이다. 영주 헨리 2세가 브리크린 대주교에게 브래드를 하사했던 1004년에 축성 하였다. 이 성에서 내려다보는 브래드 호수의 경치는 압권이다. 800년 이상 유고 왕가의 별장으로 성 내부에는 고딕 양식의 교회, 로마네스크 양식의 별채, 역사 박물관이 있다. 이 성에서의 압권은 화장실이라는데, 100m 아래의 호수로 떨어 진다는데?
성인 7 Euro 소아, 노인 3.5 Euro 로 비싼편이다.
(사진 브래드 성-지금은 박물관으로)
브래드성에서 내려다 보는 브래드호수의 경치는 더 아름답고 평화롭다. 너도밤나무 꽃이 만발한 성 주변의 경치가 가슴 가득 사랑을 넘치게 한다. 호수를 중심으로 브래드 섬, 종탑이 뾰죽한 교회,마을의 너도 밤 나무 꽃, 이름 모를 꽃들 그리고 새봄을 맞아 새로 나온 잎새들이 태양빛에 반사되어 연녹색을 숲 속의 나무 잎들이 녹색의 농도를 다양하게 보여주고 있다. 대부분의 성들은 방어용 요새로 사용되었지만 아름다운 절경이 함께 있는 브래드 성은 요새로서의 역할보다는 800여 년 동안 유고슬라비아 왕가의 별장으로 사용했었다고 한다
우리는 비가 오는 가운데 미끄러운 브래드 성을 조심스럽게 내려와 이제는 포스토니아 동굴로 향해간다.
c) 포스토니아(Postojna) 동굴
스로베니아의 좁은 국토의 27%가 카르스트 지형이다. 석회암이 침식 용해, 융기하면서 수많은 동굴을 형성 하였으니 스로베니아에는 약 500여 개의 크고 작은 동굴이 있으며, 그 중 포스토니아 동굴은 세계에서 2 번째로 큰 규모이고 유럽에서는 가장 크다. 이 동굴은 빗물이 땅속으로 스며 이산화 탄소를 녹이어 갈라진 틈으로 탄산칼슘으로 녹아 떨어져 석순이 되고, 바닥에 떨어진 것은 종유석이 되었고, 이것이 그 위로 계속 쌓여 자라면 석순이 되고, 이 둘이 합해서 자라면 석주가 되었다. 백 년이 지나가야 겨우 1㎝ 정도 자라고, 수많은 세월이 흘러가야 종유석, 석순이 되어 아래위로 자라나 서로 닿으면서 멋있는 석주가 된 것이다.
우리는 입구에서 무개차를 타고 우리말 MP 3해설기를 장착하고 광장에서 내린다.
이 동굴은 1213년에 발견 되었으나 1818년에 가서야 동굴탐사가 이루어 지고 1872년에 관광열차가 부설 되면서 전기시설과 안전장치를 하여 개방하였다.
동굴의 길이는 27 km이나 현재는 3.5km만 개방되어 있고, 수많은 형태의 종유석이 찬란하게 늘어서 있고, 광장도 여러 개며 그 안에 조그만 산도 가득하니 정말로 자연이 빗어낸 신비경이다.
“헨리 무어”는 이 지상에서 가장 경이로운 자연 미술관이라고 격찬하였다. 관람은 90분으로 안내원이 배치되어 입구에서 무개 열차를 타고 약 2km를 들어가서 여기서부터 1.5km를 도보로 관광을 하게 되니 급커브에 오르막 내리막이 이어지어 비경을 더욱 신비롭게 하여준다. 동굴 내부를 좀더 관찰하면서 몇 군데를 아래에 옮겨본다.
(사진: 포스토니아 동굴 입구)
(사진: 포스토니아 동굴 단면도)
1) 거대한 산(Great Mountains): Old cave를 지나 10분을 달린 후에 거대한 산 밑에서 멈추고 여기서 무개차에서 내려 언어 그룹별로 해설을 들으며 걸어서 탐사한다. 조금 들어가면 45m 에 이르는 동굴 안의 언덕이 나오며, 이는 100만 년 전에 동굴 위로 물이 스며들어 바닥에 떨어져서 형성된 것으로 두께가 50m에 이르는 거대한 석순, 천장에서 떨어지는 석회 물방울이 수 천 년간 쌓여 거대한 석회석이 된 것이다. 이곳은 입구보다 40m나 높고 천정의 석회석 두께는 30m나 된다. 표면에서 물이 석회석 층 사이 크랙에서 새어 나와 그 크랙이 천정에서 끝나서 동굴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크랙이 점점 커져 동굴의 안전이 문제가 된다. 천정이 붕괴되어 동굴이 통로가 커지고 또 천정 석회석이 균형이 깨지면서 부서져 내렸다. 이곳의 길이는 120m, 넓이는 80m, 넓이는 240.000㎥나 된다.
(사진: 종유석과 석순이 맞다아 석주가 된 모습)
2)스파게티 홀(Spaghetti Hall): 흰색, 붉은색의 석순이 군락을 이루어 신비감을 준다. 즉 작은 투뷰 홀(tube Hall)로 천장 위에 나란히 국수처럼 매달려 있다. 이것은 물이 바위 틈새로 흘러 표면으로 나와 칼시움 카보네이트(CaCO3)를 용해하면서 공기 속에 Co2(Carbon dioxide)량이 물방울 속의 양보다 적어져 칼시움 카보네이트를 침식해서 이런 국수 발 형태로 된 것이다. 빨간 색갈이 나는 것은 석순 안에 철분이 산화되어 나타난 것이며, 흰색은 망간이 산화되어 변한 색이다. 이곳 천장에는 종유석이 가늘고 길게 자라 마치 국수가락처럼 매달려 있어 이 일대를 스파게티 홀로 부른다.
3) 러시아 다리: 1차 대전 때 러시아 전쟁 포로들이 러시아 다리를 건설한 것으로 높이가 10m로 러시아 회랑과 The beautiful cave을 연결하는 큰 산의 서쪽에 있다.
다이아 몬드 홀: 대리석 처럼 하얀 종유석으로 불빛이 비추면서 마치 다이아 몬드처럼 빛을 발한다. 이는 동굴 속의 조명이 빗어내는 현상이다. 100m 지하에 형성된 것이다.
4)콘서트 홀: 큰 광장으로 1천명 이상 수용할 수 있어 일명 콘서트 홀이라 불린다. 이곳에서는 메아리의 파장이 퍼지면서 동굴 벽에 반사되어 6~7 초간이나 구부러져 지속되어 되돌아오니 아주 장엄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연출하여 현대적인 시설을 한 콘서트 홀을 연상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길이가 65m, 폭 40m, 높이가 40m로 면적으로는 3000㎡로 동굴에서 최초로 1929년 심퍼니 오케스트라가 연주되기도 하였다. 이 홀은 방문자들이 기념품을 사고 무개차로 동굴입구로 나가기 위해 관람을 마치고 쉬는 곳이다. 최근 2007년에는 스로베니아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국경일 축하 연주회를 개최하여 2000여명이 참석한 곳이기도 하다.
5)휴먼 피쉬(human fish): 포스토니아 동굴 안에 수조에는 생명체로 양서류가 있는데 네개의 다리가 있으며, 눈은 퇴화하여 없으며, 수명은 80~100년이나 살며, 1 년간 먹지 않아도 생존한다., 여기서는 프랑크톤을 먹고 살며, 지구상에서 가장 유일한 생명체로 알려졌다.
포스토니아 동굴 탐사 후 우리는 국경선 근처로 이동하여 “Safir” Hotel 에서 하루를 쉬기로 한다.
아직 시차적응이 되지 않아 3시간 남짓 자고 새로운 일정을 위해 08:00시에 출발하여, 08:50분에 크로아티아 국경 검문소에 이르니 간단하게 여권만 확인 후 통과한다.
크로아티아 영내로 들어오니 도로변에는 주택건물에 유고 연방 내전 시에 총탄자국이 그대로 남아있다.
3. 크로아티아(Croatia): 면적 56.542㎢, 인구 450만 수도는 자그레브.
초생 달 모양의 국토로, 지중해 쪽의 달마타아 해안, 알프스 산지, 도나우 평원으로 구성된 나라다. 달마티아 해안으로는 1000여 개가 넘는 섬이 떠 있고 지중해성 기후로 온화하다. 이 나라는 중세이전부터 내려오는 고대 도시의 건축물로 유럽의 보석으로 여겨지는 문화유산이 가득하다. 1990년대에 유고내전, 코소보 사태로 산업시설이 파괴되었고, 농업국에서 공업국으로 가다가 지금은 관광산업으로 발전하고 있다.
당시에 세르비아 군인들은 우수한 무력으로 크로아티아를 무차별하게 공격하고 인종청소에 가까운 살륙을 자행 하여 국제적인 비난에 직면하고 문화유산을 파괴하는 천인공노할 일을 저질렀다.
(사진: 크로아티아 전도)
버스가 가면서 09:00시경에 오른쪽으로 아드리아 해가 나타나고 산밑으로는 주택들이 아름답게 들어서 있다. 크로아티아 제 1 항구도시 “리에카”를 지나니 도로의 오른쪽 산 위로 성벽이 보이고 버스는 이제 수도 자그레브 방향으로 간다. 도로는 A-6, E-65 4차선 고속도로이다.
우측 계곡으로는 하얀 비구름이 밀려오면서 금방 비가 내린다. 우기도 아닌데 어제부터 수시로 비가 자주 내려 기후도 천의 얼굴을 가진 것일까?
산간지대라 오늘도 터널이 연속되며, 터널은 대개 왼쪽으로 곡선형으로 굽어나가다가 오른쪽으로 나가는 것이 정형화 되어 있다. 도로주변 산에는 모두 석화암산이라 큰 나무는 뿌리를 못 내리고 얕은 잡목만 무성하다. 처음으로 넓은 농토의 밭이 있는 평야지대를 통과하여 “karavac”으로 향한다.
유고 내전 시 현장이 그대로 보존된 지역이 나타난다. 당시에 치열했던 전쟁의 상처가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파괴된 주택, 건물이 그 당시대로 보존되고 있고 당시에 동원되었던 탱크, 무기 종류도 전시되어 있어 내전의 참혹성을 상기시켜 준다.
“Split” 지역으로 내려오면서 농토가 나타나고 구릉지에는 주로 옥수수 밭이 많다. 산자락에는 벌써 이곳도 가을이 물들고 잇다. 우리는 12:00시가 되어 “Gravorac” 호텔에 이르러 점심식사를 한다. 메뉴로는 숲, 송어 찜, 후식으로 복숭아 2개씩. 메인인 송어 찜에 마늘 소스와 후추를 가미하여 맛을 내어 먹고 50분만에 다시 출발한다. 도로 가에는 독일어로 ”Zimmer” 이라는 광고판이 자주 등장하는데 “방 있음” 이라는 뜻이다. 날씨가 시원해지고 마침내 13:10분 경에 호수에 이른다.
a) 플리트비채(Plitvica)국립공원: 1979년 UNESCO세계자연유산 지정.
16개의 호수와 92개의 대소폭포로 이루어진 곳이다. 투명하고 청록색의 빛나는 호수와 호수 사이로는 18km의 산책로가 이어져 있어 그야말로 선경을 이루어 관광객들로 만원을 이룬다.
석회암이 물에 녹고 침전되어 호수가 끝임 없이 변화하고, 크게 상부와 하부호수로 나눈다.
상부호수는 프로스칸스크(Prosacnsko) 호수부터 코자크(Kozjak) 호수까지고, 하부는 134km 의 코라나(Korana) 강 유역, 사바타비치(Savatavci)폭포에 이르는 석회암 지형이다. 상부 호수는 크며 수심이 깊고 숲이 무성하며 수많은 폭포로 연결되어 있다.
하부 호수들은 작고 수심이 얕으며 바닥이 석회암이고 갈대가 무성하다.
(사진: 프리트 비채 국립공원의 폭포 원경)
상부 호수 는 전부 11개로 그 중 3개를 스크린 해 본다.
1) 프로스칸스크 호수(Prosacnsko jezero): 가장 위에 위치하고 있다. 물의 마녀를 위해 제사를 이곳에서 지낸다. 900m이상의 주변 산에서 흐르는 물이 초록색의 빛을 발한다. 해발 636m, 면적이 0.68㎡, 길이 2100m, 폭 180~400m로 숲과 호수가 4계절 내내 조화를 이룬다.
2) 시가노박 호수(Ciganovac jezero): 집시들이 익사 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해발 620m에 위치하며, 면적 0.07㎢으로 최대 수심은 11m 이다.
3) 작 호수(Kozjak jezero): 30 마리의 어린 염소가 굶주린 늑대를 피해 어름이 언 강 위를 건너다 익사 했다는 데서 유래한 호수다. 해발 534m에 위치하고 최고 수심은 46m로 면적은 0.83㎢다. 북쪽에서 남동쪽으로 뻗어있어 이 곳에서는 가장 큰 호수이다.
Buregeta 폭포 옆을 흐르는 물이 코작크 호수로 흘러 들어가며, 호수 서쪽의 “스테파니아”(Stefanija) 섬이 있다. 섬은 물보다 9m 정도 높아 너도 밤나무와 헤이즐 나무가 아주 무성하다.
하부호수 4개의 호수 중 2개를 살펴본다.
1) 밀라노박 호수(Milanovac jezero): 양치기 소년 “Mile”이 익사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하부 호수 중 가장 큰 호수로 해발 532m, 깊이 18m, 면적 0.03㎢로 호수주변이 20m 절벽으로 둘러 쌓여 있다. 절벽에 나 있는 구멍들은 크고 작은 동굴 형태를 갖추고 있다.
2) 노바카비차 호수(Novakavica jezero): novakovica의 항해에서 호수 명이 유래 되었다. 해발 503m, 깊이 3m, 면적 0.03㎢. 이곳에서는 폴리트비채 계곡의 수많은 폭포를 볼 수 있다. 그 중 “Sastavci” 폭포는 역류량에 의해 암석이 침하되어 76m 높이에서 떨어지는 장관을 연출한다. 이 물이 “Plitvica” 호수를 따라 흘러가면서 물안개를 이룬다.
(사진: 사스타 비치 폭포 원경)
우리는 13:10분에 “플리트 비체´호수 공원 입구에 와서 입장권을 사서 수 많은 사람들의 틈새를 뚫고 들어가 조망대에서 가장 높이 걸려있는 폭포를 감상한다. 트레일을 따라 폭포 밑으로 가서 포인트에서 사진에 담고 다시 올라와 상부호수의 둘레 길을 따라 걸으면서 14:10분 선착장에서 유람선을 타기를 기다린다. 15:45분에 유람선을 타고 반대편 선착장에 이르러 내려서 이번에는 폭포가 떨어지는 곳들을 트레일을 따라 걸으면서 자연의 걸작품을 감상하며 굽이 굽이 돌아 먼저 내린 선착장에 1 시간 만에 돌아와 다시 유람선을 타고 입구로 나오니 16:30분, 약 3시간 반을 호수와 폭포둘레의 트레킹을 마감하였다.
(사진 : 상부 호수 안의 섬 풍경)
우리는 다시 버스로 출발하여 오늘의 숙소인 “Sibenik”으로 출발하여 간다. 목표까지 119km라는 표지판을 지나 달린다. 주말이라 화물차 등 대형 차량이 없어 한가한 가운데 73km 지점을 통과하니 아드리아 해가 오른쪽으로 나타나고 시간은 17:50분이 되었다.
Eu 국가들은 토, 일요일에는 고속도로의 화물차 통행을 금지하니 빠르게 도착하였다. A-1 도로는 이제 40km 남아있는 지점 부 터는 잡초가 무성한 들판이 나타난다. 다시 오른쪽으로 아드리아 해가 나타나고 쉬베닉 8km 남았으니, 마침내 어둠이 내리기 전에 오늘의 숙소인 “Solaris Niko Hotel” 에 이른다. 저녁을 끝내고 산책을 나와 캠핑카 촌으로 해서 바닷가를 산책한 후 오늘의 일과를 마감한다.
b) Zadar(자다르): 달마시아 지방의 중심도시
약 3000년의 역사를 간직한 곳으로 초기 로마제국에 의해 정복 된후 모든것이 로마색채가 강하게 남아있다.
그중에 St.Donat(도나트) 교회는 자다르에서 가장 중요한 건축물이며 상징적인 교회로 27m높이의 삼위일체 탑이 솟아있다. 즉 9세기의 비잔틴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 누스가 주교 "도나트"의 업적을 기리기위해 교회를짓고, 16세기 이후에 St. Donat 로명명하였다.
교회는 원통형으로 지었고 내부는 이중공간으로 되었고 중세와 르네상스시대와서는 성 도나트를 기리는 음악회가 열리기도 하였다. 교회 옆으로는 11세기에 지은 주교궁이 있다. 이 건물은 로마시대 이후 여러번 개축하였고, 지금의 외관은 1830년대에 지은것이다.
(사진: St. Donat 교회와 탑 전경)
c) Sibenik(쉬베닉): 도시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자다르 남동쪽으로 74km 떨어진 도시로 가면서 보는 해안도시다. 달마티아 지역의 소도시들이 대부분 로마시대에 건설되어 로마식 분위기를 주는데 쉬베닉은 아드리아 해를 내려다 보는 언덕 위의 요새로 경사면에 위치. 이 도시는 크로아타아 인에 의해 7 세기에 건설된 작은 마을이다. 중세의 항구를 중심으로 언덕 기슭에 펼쳐진 성벽과 구 시가지는 한 폭의 그림이다. 나무가 많치 안아 섬처럼 푸른 바다와 어울러져 아주 이색적인 풍경을 연출하는 아름다운 해변도시이다.
대리석 자갈 길로 덥힌 구 시가는 중세식 건물로 가득하고, 그 중 성 야고보(St.Jacob) 대성당이 대표적 건축물이다. 15~16세기에 지은 것으로 이탈리아, 달마티아, 토스카냐의 3 개 문화권의 영향을 받았고 고딕, 르네상스 양식이 섞여 아주 아름다운 성당으로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 되어 있다.
(사진: St. James 성당의 내부)
문을 중심으로 사자가 떠받치고 있는 문 기둥 위로는 발가벗은 몸을 가리고 있는 아담과 이브의 수즙은 모습이 인상적이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면 화려하지 않으면서 깔금해서 인상적이다.
(사진 : 쉬베닉의 해안가 풍경)
아침 일찍 쉬베닉 Niko 호텔에서 나와 산책한다. 정원으로 나와 가을이라 지금은 손님이 없어 쓸쓸한 리조트 단지를 지나 바다로 나오니 아드리아 해의 푸른 물이 잔잔하고 초생 달이 하늘에 걸려 있다. 캠핑카들도 깊은 잠에 빠졌고 아드리아 해의 수면위로 하늘이 밝아오고 있다 수영장도 쓸쓸하다. 소나무 숲길에는 수백 년의 연륜을 자랑하는 고목들이 이상한 모습으로 자랐다. 이 호텔의 주변은 풍요롭고 해안가의 섬들도 점점이 떠있는 모습이 너무 아름답다.
이 해안가는 북 유럽 사람들이 찾아오는 최고의 휴양지로서 지금은 가을이 지나가는 시기다. 캠핑카들이 머물러 있는 곳도 한산하나 큰 개를 데리고 캠핑온 가족도 있으니?
아침을 마치고 우리는 트로기르로 출발하여 아드리아 해안선 800km를 이어가며 두브로브니크로 가는 도로는 240km, 스프릿 70km 라고 표지판이 알린다.
도로 가에는 얕은 오리브 나무가 열매를 가득하게 달고 있다. “Split E-65, A-1 고속도로 우린, 이제 트로기르로 간다.
D) 트로기르(Trogir): 1997년 도시전체를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
스프리트-달마티아 카운티의 아드리아 해안의 도시로 BC 3 세기에 건설된 항구도시로서 로마제국의 왕족, 귀족이 사는 중세의 석조 건축물이 가득하고 13~15 세기에 성벽을 쌓았다. 당시에는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벽을 구축하고 다리 밑으로 운하를 뚫어 트로기로는 당시에는 섬으로 되었었다.
로마시대의 양식이 잘 보존된 교회, 탑, 궁전, 요새가 밀집되어 있다. 15세기에 지은 로마네스크식의 시 청사, 13 세기의 시피코 궁전, 카메르렌고(Kamerlengo) 요세, “성 로브르 성당” 등이 유명하다. 특히 로브르 성당의 현관에는 거장 “Radovan”의 “아담과 이브”의 장식이 유명하다.
1) 카메르렌고 요새: 이 요새의 탑은 “Veriga Tower” 라는 이름으로 1380년에 세워졌다. 그 후에 “Kamerlengo” 요새로 확장되면서 1420~37년 사이에 “Marin Radoj”에 의해 오늘날처럼 쌓아졌다. 요새는 해자로 둘러 쌓였고, 그 안에 우물, 교회와 거주처가 지어졌다. 요새는 작은 마을로 되었다. 북서쪽 탑은 작은 돌로 쌓은 보루였다. 탑으로 오르는 통로는 북쪽으로 나있다. 오스트리아 통치시절엔 군인들이 사용했고 그 후에는 저장을 위해 사용되었다.
(사진: 카메르렌코 성 전경)
그 후 낙후되었다가 2차 대전 후에 다시 복원 되었다. 여름에는 무대로 밤에는 극장으로 사용 되었고 성에 오르면 시내 전체와 바다를 조망하는 전망대 구실을 한다.
우리는 처음에는 북문으로 들어갔고 이곳에는 옛 마을이 있으며 북문 위에는 17세기에 세운 예수상이 서 있고, 그 안에 오래된 건물에는 지금은 도시 박물관이 들어서있다. 이 작은 옛 도시는 걸어서 한 시간이면 다 다닐 수 있다. 나는 트로기르라는 작은 중세도시와 요새 성을 올라가 보고 마을의 좁은 골목길을 다시 둘러보았다.
2) 로렌스 성당(St. Lawrence)<성 로브르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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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는 성 로렌스대성당을 찾아간다.
출입구 문기둥의 조각들이 정교하고 재미있고 사자가 받치고있는 기둥 양쪽에는 이브와 아담이 벌거숭이 몸을 수줍은듯 가리고 서있다.유럽의 다른성당들에서는 보지못했든 아담과 이브의 모습이고 인상적이다.
성 로렌스 대성당의 종탑에 올라가본다.어느 도시이든 종탑이나 도시를 전망할수있는 높은장소에서
도시를 전망하면서 종탑에 올라 트로기르의 바다와,항구에 정박해있는 요트들,붉은색지붕들과
파란하늘의 흰 구름이 만들어 내는 아름다운 도시 트로기를 다시 한번 즐긴다.
(사진: 로렌스 성당의 1240년대의 Radovan의 문)
이 소도시를 다시 출발하여 두브로브니크 180km 전방의 거리에서 안개가 자욱한 해안도로를 지난다. 좌측의 산 경사지에는 나무가 자라고, 우측의 바다로 향한 좁은 경사지에는 드문 드문 붉은 지붕을 인 주택들이 바다를 향해있다. 산 위로는 석회암이 쏟아져 내릴듯이 급박하게 도로위로 솟아있고, 도로 아래로는 아드리아 해의 태양이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밀어 바닷물이 반짝인다. 한 시간 넘도록 아름다운 해안가를 달리니 붉은 지붕에 하얀 벽, 진한 자색의 사포니아 꽃이 벽을 장식하고 있다.
E) 스프리트(Split):
달마티아 지방의 중심부로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시내의 건물은 대부분 1 층은 레스토랑, 카페이고 2층 부 터가 가정 집이다. 현재와 과거가 공존하는 곳으로 15세기 지진으로 폐허가 되었으나 구 시가가 복구되어 중세의 흔적이 가득한 도시이다. 그 중에 디오클레티안 (Diocletian’s Palace)궁전은 305년 로마의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물러나면서 그의 고향인 이곳에다 지은 궁전이다.
스프리트 앞 바다에 있는 브라츠(Brac)섬에서 운반해온 섬 화석과 대리석을 사용 하여 295년 부 터 10년간 공사를 하여, 동서 181 m, 남북 215m규모의 성벽 안에 황제의 궁전과 시가지를 조성하였다. 성안의 시가지는 비잔틴, 베네치아 양식을 가미하여 축조하였다. 현재는 아드리아 해변에 접해 있는 황제의 거실, 알현실, 주피터 신전, 세례당이 남아있다.
(사진 : 디오크레티안 궁전의 옛 평면도)
1) 디오크레티안 궁전: 1979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
현재의 오픈형 열주광장은 행사장이다. 남북 35m, 동서 13m로 16개의 코린트식 열주가 서있고 위로는 아치로 연결되어 있다. 이곳은 지금도 야외 극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바닥은 모두 대리석으로 일정한 크기로 네모나게 잘라 평면으로 깔았다.
열주 광장 동쪽에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무덤을 지하에 넣고 지은 성당이 있다. 이것이 도미니우스 대성당이다. 안에는 “성 도미니우스”의 관이 안치되어 있다. 그는 황제의 박해로 304년에 순교한 성인이다.
성당 내부의 천장 기둥 사이에 디오클레티안과 그의 아내 프리스카의 얼굴이 조각되어 있다. 성당 내에는 예수의 고난을 묘사한 아부타시우스의 제단은 예술품으로 1448년 제작된 것이다. 대성당 입구에는 기원전 2세기에 만든 이집트 스핑크스가 서 있고, 그 위로는 날개 달린 사자가 있다. 성당 옆에는 로마네스크형식의 거대한 종탑이 서 있으니 이는 14~16 세기에 축조된 것으로 높이가 60m나 된다. 광장과 이어진 샛길로 가면 제우스(주피터) 신전이 있고 나중에는 이것이 세례당으로 바뀌었다.
(사진:디오크레티안 궁전의 열주 전경)
l 지하 궁전:
Diocletian’s Palace 의 지하 홀과 복도는 바다로부터 들어오는 남문과 궁전의 중앙 광장의 (Peristyle)계단으로 들어올 수 있는 연결통로이다. 지하공간에 돌로 벽을 쌓고 그 위로 둥글게 돌을 박아 아취를 만들고 지붕은 돔형으로 둥글게 쌓았는데 붕괴되지 않은 신기한 구축물이다. 이곳은 황제의 일상 거주지역으로 윗 층의 배치에 영향을 주었다. 지하 구조는 바다수면 높이 위로 황제의 궁을 높이게 하였다. 그로 인해 남문의 입구는 태양빛과 여름바람이 쉽게 들어올 수가 있게 되었다. 지하 궁 구조 공간은 과거 수세기 동안 그대로 있었으며 구분하는 벽체만 다시 세우거나 변경하였다. 지하 홀은 여러 가지 목적으로 사용되었는데 중세 초기부터 근대에 이르기 까지 포도주나 올리브를 짜는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도시가 지하 구조물 위로 발전하면서 이 지하 홀은 쓰레기와 여러 폐기물로 채워졌었다. 50여 년 전에 와서야 지하 방은 청소가 되어 지금처럼 공간으로 되었다. 요즘은 지하 홀이 전시장, 공연장, 기타 기념품 상가로 사용되고 있다. 궁전 가운데 커다란 중앙 홀은 바다 쪽 통로와 지상 궁전의 광장으로 나가는 연결통로로 사용되고 있다.
(사진: 지하궁전의 내부 모습)
2)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245~316년):
로마시대 공화정 시대의 전제 군주제를 수립한 왕으로 원래의 이름은 “Diocles”(디오크레스)였다.
해방 노예의 아들로 천민 출신이었다. 일개 졸병으로 “누메리아투스”황제의 친위대 장관으로 출세하면서 누메리아투스 황제가 암살 당한 후 군대의 추대로 284년에 황제가 되었다.
그는 현재 터키를 중심으로 한 동 로마 지역을 통치, 니코메시아(현재 터기의 이즈밀 근처)를 중심으로 한 제국을 통치하였다. 그러나 제국을 통치하고 유지하는데 막대한 비용이 들고 연이은 전쟁으로 재정난에 빠져 그는 군제, 세제, 화폐제도를 개혁하면서 전제군주제를 강화하였다.
집권 말기인 303년에는 그리스도교에 박해를 가해 순교자가 속출하면서 305년에 퇴위하였다.
3) 성 도미누스 종 탑 (St. Dominus’Bell Tower):
열주 광장 뒤로 종탑이 솟아있는데 입장료는 2 유로이다. 좁은 입구로 들어가 계단을 올라 철사다리를 타고 5분여 간 오르니 시내와 해안이 발아래 보이고 큰 여객선이 항구에 정박 중이다. 사면으로 시내의 풍경을 사진으로 담으며 한동안 시내를 내려다 보았다.
(사진: 성 도미누스 종탑 전경)
이 종탑의 건축은 13세기 초반에 시작하여 300년간을 계속하였다. 즉 “Nicholas Florentine, Andrija, Alesi 등의 거장들이 건축에 참여 하였고, 상부에 4개의 종이 매달려 있고, 그 위로도 철계단이 설치되어 있고 최고 높이는 60m로 전 시내를 360도 조망할 수가 있다. 이 종 탑은 1890~1906년 사이에 현재처럼 복원되었고 견고하게 돌로 쌓아 올려 아주 수려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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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Bell Tower 에서 본 시내 전경)
우리는 이 중세도시의 대리석의 바닥 돌이 깔린 좁은 골목을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다니며, 과거로 돌아가고 있었다. 어떤 건물벽에는 내전 당시의 총탄 자국이 훈장처럼 남아있다
다시 출발하여 가니 17:30분이 지나면서 해가 서쪽으로 기우니 해안이 멀어지고 좌측으로는 돌산이 장벽을 이루고 차는 이제는 산간도로로 들어와 보스니아 국경선을 향해 간다. 18:28분에 드브로브니크 95km 지점에서 보스니아 영내로 진입하여 이번에도 검문소를 무사 통과하면서 차는 “neum”이라는 마을로 간다. 해안도로에서 아래로 내려와 다시 해안가의 좁은 도로로 내려가니 포장된 마을 길로 들어가 새로 생긴 마을의 “Poseidon Hotel”에 이르니 바닷가에 바싹 지어서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 호텔이라 부를 수 없을 정도로 통로가 비좁고 사람도 없어 내가 지하 식당으로 내려가 우리를 위해 요리를 하고 있던 사람을 불러와 비로서 체크인을 할 수 있었다. 그래도 이 튼 날 아침 호텔 아래 산책로를 따라 아침 바다를 산책 할 수가 있어 다행 이었다.
네움의 바닷가 호텔을 아침 일찍 출발하여 코토르로 가면서 Jadran Hotel Supermarket에서 로즈 와인 1 병을 11 유로에 서서 물 대신 마시며, 8번 해안도로를 따라 두부로브니크 방향으로 간다.
다시 유고 연방 시절로 돌아가 이 지역의 사정을 적어본다. 91년에 스로베니아가 독립하면서 유고는 보스니아와 연방을 유지하면서, 다시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제지하고 보스니아 와는 분리 전쟁이 계속되고, 다시 유고 즉 세르비아는 몬테네그로와 연방을 구성하였다. EU의 경제제제로 96년 국민 투표에 부처 80%의 찬성을 얻어 또 분리된 몬테네그로 공화국(1만4천㎢)이 떨어져 나갔다. 몬테네그로 는 산악지대가 대부분이고 디나르 알프스산맥이 가로 질러가고 있다. 버스는 이제 두브로브니크 30 km 전방을 통과 하니 아드리아 해변가로는 그림 같은 주택이 점점이 보이고 도로는 일요일이라 한산한 가운데 우리는 먼저 코도르로 간다.
두브로브니크 도시를 오른쪽으로 보면서 몬테네그로(검은 숲 의미)국의 코도르를 먼저 보기 위해 달린다. 도로가에는 사이프러스 나무, 포도나무, 바닷가로는 오리브 나무가 무성하다. 멀리 두브로 브니크 해안선 양쪽에 정박해 있는 유람선이 보이고 건너가는 다리에서는 사고가나 통행이 불가능하다. 다리 건너로는 누드 촌이 있는 섬이 있고 우리는 먼저 코도르로 간다. 두브로브니크는 가면서 창 밖으로 도시 경치를 보는 것이 더 아름답다.
(사진: 두브로브니크 시 전경- 건너 도로에서 본 )
몬테네그로 검문소에 이르니 10:30분. 처음으로 여권을 다 걷어가서 심사를 한다. 그 사이 소나기가 쏟아지며 바람이 거세게 불어온다. 디나르 알프스산맥의 높은 봉우리에 구름이 걸려 비가 내리니 우리는 주유소에 쉬면서 마켇을 둘러본다. 우리가 탄 버스는 해안도로를 달려 코토르 행 전마선에 버스를 싣고 15분간 바다를 건너 코도르 고도에 이른다.
4) 몬테네그로(Montenogro):
면적 13.812㎢. 인구 672.180명. 수도는 포드고리차. 몬테네그로인 43%, 세르비아 인 32%로 구성 되어 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 서북쪽으로 경계를 이루고 북동쪽으로는 세르비아와 203km의 국경선이며 남동으로 알바니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크로아티아와는 14km만 접하고 있다. 아드리아 해 쪽으로는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로, 북쪽으로는 2000m 가 넘는 산 봉우리들이 있어 여름 내내 눈을 볼 수 있다. 가운데에 “Skadar” 호수가 자리잡아 아름다운 나라이다. 산지와 협곡, 강, 호수가 어우러진 나라로 각종 식물과 동물이 살기가 좋다. 오리브, 레몬, 오렌지, 포도, 무화과 등이 풍부하며 특히 양질의 포도로 와인이 유명한 농업 국가다. 1910~18 년까지 왕국을 이루었으나 그 후 세르비아에 통합 돠어 2003년 2월 까지 연방을 형성하였으니 2006년 국민 투표를 거처 독립되었다.
a) 코토르(Kotor): 구 시가지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뫁테네그로 나라로 들어가는 입구 아드리아 해안가에 있다. 아드리아 해에 면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3각형 형태의 구 도시 전체가 성벽으로 둘러 쌓여 있다. 성벽의 길이는 5km, 높이 5m, 폭은 1.5m로 축성 되었다. 코토르는 앞으로는 바다, 뒤로는 험준한 산들이 둘러싸고 있는 천혜의 요새이다.
(사진: Kotor 중세도시의 성과 해자)
1500년 전 비잔틴 제국의 “유스티니아” 황제가 조성한 도시로 당시에 무역과 문화, 예술의 도시였다. 산의 요새인 곳으로 올라가면 코도르 구 시가가 3 각형 모양의 성안에 자리잡은 것이 뚜렸하게 보인다. 중세기를 거치면서 30여 개의 교회와 7개의 수도원이 들어선 종교 중심지였다.
구 시가지 밖으로는 바다가 보이고 요트가 정박하나 지금도 중세도시의 분위기가 지배하고 1602년에 세운 시계탑, 1166년에 지은 로마네스크 양식의 “트리폰”(St. Tryphon)성당 등이 고색창연하게 남아있다. 성 니골라스 성당을 둘러보고 시간에 쫓겨 아쉬움을 남기었다.
(사진: Kotor 중세 도시 전경- 번호는 건축물의 명단)
우리는 이 고 도시에서 중식을 하고 다시 듀브로브니크를 향해 떠난다. 다시 바닷가로 나와 아까탓던 전마선에 버스를 싣고 바다를 건너가니 비가 오던 날이 개이고 마침내 두브로브니크 시내에 성벽 문 앞에 이르렀다.
걸음을 바쁘게 하여 성내의 주요 유적을 두루 둘러보고 이런 아름다운 중세의 도시가 내전으로 파괴되는 것을 막아낸 지식인들의 용기에 찬사를 보낸다.
* 듀브로브닉(Dubrovnik): 1979년, 1994년 두번이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이 중세의 도시는 에메랄드 빛 바다 위에 떠있는 “아드리아 해의 보물”이라 칭한다. 전 도시의 지붕을 덮고 있는 붉은 기와는 모두 손으로 만들어 색갈이 다양하다. 당시에 해양무역으로 축적된 재산과 15~16 세기에 발전을 이루어 당시에 로마제국의 베네치아 항구와 필적이다.. 구 시가지에는 당시 모습으로 유적들 사이로 연결된 대리석 길은 유난히 빛난다. 1991년 8개월간 유고 연방군의 공격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어 70%에 이르는 유적이 파괴되었으나 전세계의 후원으로 5년만에 복구하여 다시 94년에 재지정 되어 전 유럽의 가장 대표적인 문화유산으로 부상 하였다.
시의 역사는 7세기 슬라부족이 침입하자 로마인들은 작은 섬”래그더”로 대피해 요새를 쌓기 시작하고 작은 다리를 놓았다. 972년에 다리 감시용 탑을 만들고, 섬 안에 “성 브레이스”교회를 세웠다. 9~10 세기 인구가 증가하면서 다리를 없애고, 앞 바다를 매립하여 땅을 넓혀 지금의 “스트라툰대로(플자차 거리)가 탄생 하였다.
“래그더”는 동서무역의 중계 거점이 되어 번영, 14 세기에 래그더는 도시기반을 잡고 1345년 성벽을 구축 요새를 세웠다. 16세기에 오스만 터키가 지배하였으나 해상 무역의 중심지로 발전하였으나 1667년 지진으로 붕괴되었으나 재건, 성벽과 절벽으로 둘러 쌓인 도시로 발전하여 1808년 까지 자치국가를 유지 하였으나 그 후 나폴레옹의 지배를 받아 헝가리 제국에 귀속 되었으나 이 후에는 독자적으로 독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오늘날 듀브로브니크 구 시가지 성벽에는 내전에 상처가 그대로 남아있다. 빨간색으로 표시돤 곳은 파괴되어 없어진 건물자리, ▲ 표시는 폭격으로 파괴된 건물, ● 표시는 폭격으로 손상된 도로 표시다.
성 전체가 중세도시로 성안에는 렉터 궁전, 프란체스코 수도원, 대성 당, 스폰지 궁 등 고색 창연한 건축물이 있고,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약국이 지금도 성업 중이며, 성안에서 시장도 열리고, 과일과 와인, 오리브 오일이 최고의 인기품목이다. 옛 건물마다 사람이 살고 있으며 도시의 기능이 그대로 존속되고 있다.
1) 성벽: 듀브로브니크의 성벽은 전체가 1940m이다. 육지 쪽으로는 4~6m의 두께, 바다 쪽으로는 1.3~3m로 쌓았고 성벽의 최고 높이는 25m 이다. 도시의 방위는 이 성벽 방어시설로 보호된다.
(사진: 두브로브니크의 바다쪽 성곽 모습)
북쪽으로는 1464년에 완공된 민체타 탑, 동쪽에는 터키의 침략에 대비해 지어진 레벨린, 도시의 남동쪽은 16세기에 조각가 “파스코예 밀리체비치” 가 조각한 St.Ivan이 지키고 있으며, 서쪽은 1461년에 “프로란틴 미켈로조” 의 작품인 “보카르”가 도시의 입구와 항구를 지키고 있다.
거대한 모습으로 서있는 “로브리에나쯔” 요새는 바다와 육지를 마주보며 도시 전체를 보호한다. 이 견고한 성벽 외에 2 개의 원형 탑과 12개의 사자 탑, 5개의 보루와 첨탑이 있다. 육지 쪽의 성벽에는 해자가 있고 바다 쪽으로는 120문의 포가 도시를 지켜내게 되어 있다.
성곽 내로 통하는 입구는 2개이고 15세기에 지어진 “플로채”와 다른 하나는 “필레”이다. 필레문은 단단한 쇠사슬로 열고 닫았다.
(사진: 필레 성문)
성 블라호의 석상이 지키는 이 문을 통과하면 중앙거리인 프라차로 이어진다. 중앙거리는 서문과 동문을 이어주는 거리다.
2)오노프리오 분수(Onofrijeva Fortana): 성벽 문을 들어서면 바로 광장이 나오고 프라차 거리의 입구이며 동문과 서문을 이어주는 대로이며 대리석으로 바닥을 장식한 대로이다. 그 앞에 큰 분수대가 자리잡고 주위에 물을 쏟아내고 있다. 이 분수는 나폴리의 건축가 “오노프리오 델라 카바” 가 1438년에 만든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물에 손을 씻고 성스런 거리에 들어선다.
(사진: 오노프리오 분수대 전경)
3)렉터 궁전(Rector Palace): 렉터란 두브로브니크 왕국의 최고 통치자를 부르는 말이다. 이 궁전은 두부로브니크의 중앙관리 기관으로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고딕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로서 화재와 지진을 견디어왔다. 이곳에서 통치자가 거주했으며 당시의 의회와 사무실이 있었던 곳이다. 연회장으로 사용되었으며, 한때는 감옥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현재 여기에 소장되어 있는 가구, 각종 예술품, 당시에 사용했던 동전들, 열쇠 등이 전시된 박물관이 소중한 유물을 보유하고 있다.
(사진: 렉터 궁전의 전경)
4)브라호교회: 이 교회는 1706~15년 사이에 베네치아 출신의 건축가 “마리노 그로펠리”에 의해 지어졌다. 교회 앞에는 이 도시의 수호자인 전사 올란도가 칼과 창을 들고 동상으로 서 있다. 이 자리에 있던 예전교회는 1667년 대지진으로 무너지고 새로운 교회를 지은 것이다. 교회의 내부 장식은 성 브라호의 모습을 주제단에 은빛으로 그려 장식하였다. 대 화재에도 불타지 않은 수호성인인 브라호의 조각상에 시민들은 매년 2월 3일 행사를 하고 있다.
(사진: 브라호 교회 바로크식 내부 모습)
5) 스폰자 궁전: 성 브라호 교회 동상 건너편에 는 이 도시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스폰자 궁전이 위치하고 있다. 1516년에 건축가 “파스코예 밀리체비치”가 지은 것이다. 당시 왕국시절에 이 궁전 내에 행정기관, 은행, 문서 저장고, 무기 저장고가 있었다. 이 궁전은 대지진을 견디어온 이 도시의 부와 명예의 전당이었다. 당시의 상인들의 모임도 있었고, 16세기에 우나니모스 아카데미가 설치된 곳이기도 하다. 현재 이곳에는 두부로부니크의 역사기록, 공식문서를 보관하고 있다. 그 옆의 종탑은 의회의 소집을 알리거나 위험을 알리는 역할을 하였으며, 또 그 옆에 1444년에 지은 시계탑은 높이가 31m로, 매번 정시를 알렸던 동종이 있다.
(사진: 스폰자 궁전과 시계탑 전경)
6)성모 승천 성당: 렉터 궁전 광장에 13세기에 지어진 성모 마리아 승천 성당이 자리잡고 있다. 이 성당은 1192년 십자군 원정대가 돌아오던 중 로크섬 근처에서 선박이 난파되었으나 무사히 살아남은 것을 기념하여 지었다 한다. 그러나 이 대성당은 1667년 이 지역의 대지진으로 무너진 것을 재건한 것이다. 현재 이 성당 지하에는 진귀한 유품이 보관되어 있다. 12세기의 성 브라호 머리와 다리가 금으로 된 유물 함에 모셔져 있으며, 교회 십자가, 예술가 들의 그림이 보관되어 있다.
(사진: 성모 승천 교회 전경)
7)도미니크 수도원: 14세기에 지어진 수도원으로 고딕 양식의 정문이 유명한데 조각가 “보니노 밀라노”가 1419년 지은 것이다. 고딕 르네상스 양식의 회랑과 천장 장식이 아름답다.
(사진: 도미니크 수도원 내부 제단 그림-"St. Magdalen"-16c Titian 작)
회랑의 뜰에는 돌로 장식된 우물이 있다. 이곳의 박물관은 초기 간행된 책, 공문서, 금은 세공품들, 15~16 세기의 이곳 예술가들의 작품이 보관되어 있다. 이 수도원 맞은편 거리에는 이 도시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St. Nikolas 교회가 위치하고 있다.
두부로브니크의 위의 몇 군데의 유산을 둘러보고 이제 17:30분에 성곽으로 올라 시원한 바람을맞으며 크로아티아 깃발이 바람에 휘날리는 1810년에 쌓은 성문을지나 성곽으로 올라 바닷가를 바라보면서 성곽투어를 한다. 걸어가면서 성안의 여러 건축물을 살펴보니 파괴된 것도 그대로 복원이 안된 채 있고 총탄 자국이 그대로 있다. 성곽에는 바다를 향한 초소도 있고 옛날에 사용했던 대포도 전시하여 놓았다. 성벽 위를 걸어가면서 산 쪽을 바라보니 밝은 햇살에 성벽이 빛난다. 바다로 향한 성벽을 한참 돌아가니 성 안쪽으로 농구 틀이 놓인 조그만 운동장도 나오니 고등학교가 자리한 곳이다. 30여분간 성벽 투어를 마치고 내려와 이번에는 18:00시에 쾌속유람선을 타고 앞 바다로 나가 이 중세도시의 풍광을 보기로 한다. 먼 바다로 나가 해지는 중세도시의 고색 창연한 건축물이 멀어져 가는 모습도 한편의 그림 같다. 10km 정도의 거리 섬 앞에서 배를 돌려 다시 어두운 거리를 산책하며 하루를 마감한다. 이곳에서 책 한 권, 중세도시를 새긴 조그만 도자기 하나를 현지 화폐인 쿠나로 결재를 하였다.
(사진: 바다에 나가서 본 두브로브닉의 해안 풍경)
우리는 두부로브니크의 대형 숙소인 “Grand Hotel Park” 에서 하루를 보낸 뒤 이 튼 날 다시 출발한다. 어제는 소나기 형태의 비가 온 후라 아침은 아주 쾌청한 가을날씨다. 버스는 다시 아드리아 해안을 달린다. 푸르다 못해 진한 쪽빛 물결이 건너편 산 능선과 어울려 그림 같은 풍경이다.
09:20분 어제 왔던 해안도로로 다시 Split 방향 170km 지점을 지나가니, 도로길 아래 붉은 지붕의 집 2채가 아주 고고하게 보인다. 고기를 잡는 어부가 사는 집일까? 어선도 농토도 눈에 보이지 않으니 어떻게 살아 갈가? 어제 투숙 했던 네움(Neum)에서 수퍼 마켓에 들러 다시 화이트 와인을 13 유로로 카드로 결재를 하였다.
네움을 지나자 왼쪽으로 넓은 평야가 나타나고 밭과 포도농원이 이어진다. 멀리 바다가 보이고, 이제는 내륙 산간으로 들어간다. 이제 우리는 Split 방향으로 가다 보스니아의 사라예보(Sarajevo) 를 향해 도로를 우측으로 나간다. 지방도로에 들어가니 교통이 막히고 10:40분 마침내 보스니아 국경에 이르니 입국심사가 1시간 넘게 걸린다.
6.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Bosnia-Herzegovina)
보스니아는 내륙구가로 면적. 51.197㎢, 인구 4.613.414명. 수도는 사라예보. 종족은 보스니아인 48%, 세르비아 인 37.1% 등이며, 종교는 이스람교 40%, 세르비아 정교 31%다.
과거 유고 연방 가운데 가장 후진국으로 목재가 주 생산품이다. 내전으로 마비 상태에서 벗어 났으나 아직도 발전이 더디다.
1908년 오스트리아에 병합된 뒤 세르비아인들이 비밀결사로 활약하면서 1914년 수도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가 암살되어 제 1차 대전의 도화선이 되었던 곳이다. 이 후 유고 연방에 편입되어 1990년에 내전으로 인종 청소로 이어져 20만 명의 사상자와 100만 명의 난민이 발생 하였다. 그 후 1995년 12월에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연방으로 탄생하여 1 국가 2 체제가 되었다.
이제 우리는 지루한 입국심사를 마치고 “메주고리에”(Medugorie)로 간다.
a) 메주고리에 성모 발현지 순례
1981.6.24일에 6명에 아이들에게 성모가 나타나 평화의 메시지를 주었다는 곳이다. 아주 조그만 시골마을이 성모발현으로 인해 지금은 새로 교회도 지었고 전 세계에서 수많은 순례자들이 모이는 성지로 되었다. 메주고리에 마을에 이르니 수많은 카도릭 신도들이 성모 발현지로 순례를 간다.
(사진: krizevoc 정상의 십자가 앞에 모인 순례자들)
마을 산으로 하얀 석회석 돌들이 아무렇게나 박혀 있어 위험스런 산길인데도 수많은 신도들이 묵주를 들고 천천히 오른다. 20분 오르는 사이에 돌로 만든 성모마리아 상이 곳곳에 서있어 신도 들은 마리아 상 앞에 모여 기도를 드린다. 정상에 이르니 인자하고 엄숙한 성모상이 서있고 더 나아갈 데가 없다. 이번에는 하산 길로 내려오니 카도릭 신부와 많은 신도들이 검은 성모상 앞에서 미사를 올리고 기도를 드린다. 입구에 내려와 메주고리에 마을에 있는 야고보(St. Jacob) 성당에 이른다. 이 성당은 로마네스크와 고딕 양식으로 1969년에 재건축된 곳이다. 성당을 둘러보고 야외의 넓은 미사장을 지나 십자가의 길을 걸어 간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가 성수를 흐르게 해 치유를 한다는 예수상에 참배를 한다. 우리는 14:00시에 메주고리에를 떠난다.
b)모스타르(Mostar)다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2005)
모스타르는 헤르체고비나의 중심지이고, 아드리아 해로 흘러드는 네레트바 강안에 위치. “모스타르”란 네레트바 강 바로 위의 다리를 지켰던 “다리의 파수꾼” 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중세의 건축물이 많은 도시로, 1556년 건설된 모스타르 다리, 로마시대의 성, 이스람교 사원 등 유적이 많이 남아있다. 이 일대에는 포도 등 과일과 섬유, 목재 가공업이 발달되었다.
모스타르 다리는 중세의 다리로 처음에는 목조다리였으나, 1566년 오스만 터키 시대의 “하이레딘”(Mimar Hairedin)이 폭 5 m, 길이 30m, 높이 24m로, 단일 아치형 다리로 1088개의 흰색 돌로 바닥을 깔아 만들어 당시에는 가장 아름다운 다리로 평가 되었다.
(사진: 중세도시 모스타르의 다리 전경)
북동쪽, 남서쪽에 양안에 탑이 한 개씩 서 있다. 다리 양쪽으로는 카도릭 교인과 이스람 교인이 분리하여 거주하고 있었고 생활 약식이 서로 달랐었다. 현재는 이스람 계와 크로아티아 계를 연결시키는 상징물로 다리에 “Don’t forget 93”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이 다리도 내전으로 파괴되었으나 세계각국의 지원으로 2004년 재건되어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 되었다.
모스타르의 프란시스 교회(Franciscan Church)는 바울과 베드로 성당으로 내전 당시에 파괴되어 아직도 복원 중이고 5000여권의 진귀한 종교 서적을 소장하고 있으며, 종탑도 30m로 크게 솟아 있다.
(사진: 모스타르의 St. 프란시스 교회 전경)
이제 사라예보로 가는 길로 들어가니 길이 강가로, 산 아래로 구불어지고 좁아지고 있다. 도로변에는 가끔 히치하이커가 나타나 손을 들어 차를 태워 주기를 바란다.
어둠이 내리면서 18:30분이 넘어 우리는 사라예보에 이른다.
C) 사라예보 (Sarajevo):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
1992년 3월 당시 유고로 부 터 독립한 보스니아가 그 과정에서 생긴 이스람계,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계의 민족 분쟁 당시 내전의 중심지였던 곳이 바로 사라예보다. 이 도시는 기독교, 이스람교가 함께 공존하면서 두 종교의 건물이 공존하고 있다. 그로 인해 1 차대전의 도화선이 된 곳이었다. 시내를 흐르는 말야츠카 강 변의 라틴다리 주변에는 1 차 대전 기념 박물관이 있고, 이스람 풍의 거리와 시장, 모스크 등이 있다.
이곳은 1973년 4월 우리나라의 이 애리사, 정 현숙 선수가 세계 탁구 선수권 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곳으로 당시에 한국이름이 알려지기도 하였다. 시내에는 아직도 구식 전차가 다니고 구 시가지에는 중세 건물이 즐비하여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다. 우리는 중심 광장에 진입하여 모스크를 방문하고 중세 상인들의 숙소를 둘러 보았다. 16세기 당시 무역상인이던 캬라반들이 묵었던 2층 목조건물이 지금도 그대로 남아있고, 아래층은 상가로, 이층은 변호사 사무실로 사용하고 있다.
D) 라틴다리
세계 제 1차 대전의 도화선이 된 다리다. 1914년 6월 28일 당시의 오스트리아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가 군사 훈련 참관 차 사라예보를 방문 중 이 다리에서 비밀결사 단원인 “프린치프” 에게 암살 당한 후 세르비아 정부에 최후 통첩을 낸다. 사건 한달 후 7월 28일 마침내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게 선전 포고를 함으로서 세계 제 1차 대전이 발발하였다.
(사진: 사라예보 시의 라틴다리- 야간 풍경)
이 튼 날 아침에 우리는 사라예보를 떠난다. 호텔을 떠나 사라예보 교외로 나가니 시내에는 건설중인 건물이 많고 도로변 3각형 지점에는 내전 당시 희생된 사람들의 공동묘역에 검은 오석의 비석이 줄지어 있으니 대략 1천기는 넘는다.
시내를 벗어나 산간으로 들어가니 숲이 무성하고 벌써 단풍이 들고 구릉지 위로는 초지가 나오고, 주택들도 낡은 것이 대부분이다. 굴뚝으로는 벌써 연기가 모락모락 오르니 이곳은 우리나라보다 겨울이 빠르다.
발칸 산맥을 넘어 가려니 안개가 자욱하며 차가 산길에서 내려오면서 큰 마을이 나타나고 도로에 사람이 다니는 것이 보인다. 밭도 보이고 초지가 언덕위로 푸르게 전개되고 “Sabac 5km”라고 쓰인 도로 표지판이 나온다. 3 시간이 지나면서 베오그라드 165 km 남았다는 표지판이 나오고 옥수수 밭, 밀밭이 계속된다.
(사진 : 보스니아 내전시의 희생자 묘역)
사바강가 보스니아 검문소에 이르니 어느덧 11:22분이다. 여권을 걷어내고 20분만에 심사를 끝내고 강다리를 건너 이제는 세르비아 검문소로 통과하여 간다.
19번 도로로 나와 “Sabac”으로 간다. 이제 넓은 평야지대로 나가니 추수가 끝난 들판이라 아주 거칠게 보인다. 2시간을 가니 또 30분을 쉬어야 한다. 주유소에서 쉬면서 칠레산 와인 한 병을 11유로에 카드로 결재한다. 다시 버스가 출발하여 이제부터는 넓은 평야지대를 가로질러 사바강 다리를 건너간다. 도로 면이 고르지 못해 차가 몹시 흔들린다.
사라예보 헐리우드 호텔을 떠난지 6시간이 지나서야 고소도로 E-75로 나오니 베오그라드 외곽 50km 지점 부 터 4차선 고속도로다. E-70 도로로 구 시가지로 들어가니 고층건물이 나오는데 방송국건물이다. 우측으로 보이는 주거용 아파트들은 너무 낡았고 어수선하다. 도심 부로 들어가 정부청사 거리로 가니 전쟁 당시에 국방부 건물은 참혹하게 파괴된 채로 이제야 보수 중이다. 군 사령부 건물도 내전 시 파괴되어 붕괴직전이다. 기타 정부 건물들도 너무 낡았고 때가 끼었다.
오래된 건물들이라 세척하고 보수하면 고색창연한 건물이 될 터인데 안타깝다.
7. 세르비아(Serbia):
1929년부터 2003년까지 유고스라비아(남 슬라브 족의 땅 의미)라는 국명으로 나라가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진 공화국이다. 발칸 전쟁(1912~13)이 끝나고 제 1차 세계대전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패배한 후 이 지역에 슬라브 민족이 결집하여 세르비아, 스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세 나라를 합처 왕국을 수립, 1929년 알렉산다르 1 세가 국명을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선포하여 제 2차 대전이 끝날 때 까지 존속한 나라였다.
(사진: 베오그라드 중심을 흐르는 도나우강)
1945년 11월 “Tito”를 수반으로 유고연방을 선포하였으니 당시 유고연방은 면적이 255.804㎢, 인구 2.400만의 대국이었다. 당시 세르비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 지금의 마케도니아(코소보 지역)의 6개국이 합쳐진 연방이었다.
그 후 1980년 티토가 사망 후 민족분규가 일어나고, 1989년 동유럽 공산정권의 붕괴로 6개 연방 중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가 91.6.25일 독립을 선언하고, 마케도니어 (91,11.7),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92.3.2) 가 차례로 분리 독립하면서 연방이 해체되었다.
1992년 4. 27일 세브비아와 몬테네그로가 다시 신 유고 연방을 수립하였으나, 후에 2006년 몬테네그로가 분리 독립하면서 완전히 해체되었다.
현재의 세르비아는. 유고 내전 후에 6개국으로 분리되면서, 면적이 88.361㎢, 인구 7.379.339 명의 소국으로 전락하였고 내륙국가가 되었다. 민족은 세르비아인 66%, 알바니아인이 17%로 다수를 이루고 있다.
a) 베오그라드(Belgrade)
기원전 3세기부터 이 지역의 중요도시로 성장하였으나 2000년간 주요 분쟁지역의 중심에 서서 무려 40번이나 파괴되고 다시 건설된 도시였다. 19세기 초부터 현대에 이르기 까지도 20년마다 전쟁으로 파괴가 반복된 불행한 중세도시로서 현재도 사회주의 시절에 음산한 분위기가 남아있다. 발칸의 화약고로 “하얀 도시”라는 뜻이다. 사바강과 도나우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하여 현재는 인구가 160만 명으로 내륙의 중심도시다.
도심 강변으로 군사용 성채와 성벽 등 과거 세르비아 왕국의 흔적이 남아있다. 도심에는 지금도 내전 당시 NATO 군의 폭격으로 부서진 국방부 건물, 군 사령부, 정부 청사 등이 흉물스럽게 남아있다. 아직도 내전에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지금도 새로이 건설 중이다.
그러나 3세기 부 터 중세 유적에 이르기 까지 유적이 많이 남아있어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나 다름없다.
1. 칼레메그단 요새(Kalemegdan Fortless)
도심 서북 사바강과 도나우강의 합류점에 위치하여 베오그라드의 상징적인 요새이다. 전쟁 박물관, 성채, 망루가 있으며 도나우강의 일몰이 화려하다.
이곳 강으로 향한 곳에는 거대한 동상이 서 있다. “Victor”의 동상으로 손바닥에 독수리를 쥔 무사의 동상으로 한세기 동안 베오그라드를 지키는 상징물이다. 조각가 “Ivan Mestrovic” 작품이다.
성곽으로 오르면서 고대도시의 옛모습을 밟아 나간다. 성곽을 따라가면서 야외무기 전시장을 돌아보고, 성문 밖으로 나오니 왕과 왕족들이 거주하던 터가 있고 해자가 둘러있다. 동문으로 나가면서 로마 시대에 쌓은 성문에서 역사 탐방을 마감한다.
(사진: 칼레메그단 요새의 남문 )
2. 미하이로바 거리(Kneza Mihailova)
베오그라드의 중세의 거리로 보행자의 천국이며 우리나라의 명동 같은 쇼핑가이다. 세르비아 왕국의 “크네즈 미하일로 오브레노비치” 왕의 기마동상이 광장에 서있다. 시내 거리에는 역사적인 건물이 전면에 고딕 양식, 로미네스크 양식의 화려한 조각으로 장식되어있으나 보수를 요하거나 새로 깨끗하게 세척을 해여 할 정도로 우중충한 모습이다.
(사진: 미하일로바 거리의 로마네스크 조각으로 장식된 건물)
3. 사보르나 정교회(Saborna Orthodoxy Church)
크라야 밀라나 (Kralja Milana) 거리 남쪽 공원에 위치한 하얀 색 갈의 그리스 정교회로 지금도 공사 중이며 하얀 벽이 주는 신비로움으로 다가오고 세계최대의 교회이다.
베오그라드의 Best Western Hotel을 07:00 시에 출발하여 나오니 세르비아의 평원이 발칸의 농업과 목축업의 주산지이다. 이제 발칸 산맥을 넘어 불가리아로 가는 E-75. 1. 고속도로로 “Nis”시로 달린다. 니쉬시는 세르비아와 발칸의 교차로에 위치한 세르비아의 최대도시다. E-75 고속도로는 그리스의 데살로니카와 아테네를 연결하는 E-80 도로로 들어가니 “Sophia, Istanbul” 과 동방으로 연결되는 “황제의 길”로 달리니, 말하자면 “Nis”는 발칸 반도의 중심지다. Nis 시의 성곽은 1723년에 축성되었고 그 후 게르만에 의해 파괴되었다. 1945.10.14일 해방되어 오늘날 세르비아 남부지역의 행정, 의학, 문화의 중심지이다. Nis 전방 80km 지점에 이르니 평지에 조성된 묘지 1000 여기가 나란히 잠들어 있다. 크로아티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는 국토가 대부분 산지인 반면에 세르비아 남부는 광활한 평야로 농업이 발달한 곳이다.
초겨울 날씨모양 바람이 을씨년스럽다. 이제 차는 Sophia방향으로 가기 위해 고소도로에서 나와 이제는 발칸산맥을 넘어가는 도로로 들어간다. 도로 옆으로는 협궤 열차길이 나란히 가는데 아직 발칸에 와서 기차를 본일이 없다. 오른쪽 계곡위로 급경사 절벽 석회암 바위에 단풍이 곱게 내려 앉았다. Sophia-Istanbul-Pirot 행 2차선 도로로 나오니 이제 소피아는 88km 남았다. 해바라기 밭이 계속되고, 우리는 차의 2시간 주행으로 다시 휴식에 들어간다. 11:47분 마침내 세르비아 국경선에 도착하여 불가리아 검문소로 걸어서 넘어가 개인적으로 입국심사를 받는다.
(사진: Serbia 정교회- St. Sava Orthodox Church 의 야경)
8. 불가리아(Bulgaria). .
불가리아 영내로 넘어오면서 이번에는 통행세를 내야 한다. 발칸산맥을 넘어가는 산길로 들어오니 이제 Sophia(Sofia)는 36km 남았다. E-80 도로에 나오니 평원으로 늦가을 들녁이다. 불가리아도 역시 해바라기 밭이 나오고, 우리나라의 “Samsung” 광고판이 나오고 소피아 시내로 들어가는 길목에는 각국의 승용차 판매장이 나란히 나오면서, 시내의 고층 아파트가 보이고 개울이 흐르는 시내도로 양쪽에는 상가가 계속된다. 불가리아는 한 시간 빠르니 14:25분이 이곳의 시간이다.
불가리아는 면적이 110.879㎢, 인구는 720만 명이다. 불가리아인이 84%, 터키인 8%이고, 종교로는 동방 정교 83%, 이스람이 12%이다.
우리는 시내 네프스키 교회 앞으로 간다. 시간이 늦어 우선 중국 식당 ”동방”에서 중식시간을 갖는다. 이제 중식 후 걸어서 소피아 시내를 답사한다. 소피아는 평균 550m의 분지 위의 위치한 도시로 인구 120만 명으로 EU국가 중 15번째의 규모이다. 도로바닥이 돌길로 되어서 반들반들하며 승용차가 넘쳐나며 우리의 현대 차도 드문드문 보인다.
소피아 시내 관광으로 1) Alexsander Nebsky 정교회, 2) 19세기 초에 건축한 성 네델라 정교회, 3) 성 패트카 지하교회, 4) 고대 동로마 유적 발굴지, 5) 성 소피아 상, 6) 구 공산당 본부, 7) 정부 청사-대통령 궁, 8) 금요 모스크, 9) 로마 시대의 온천지, 10) 터키탕 건물, 11) 광천수 샘물 터, 12) 지하도 아래 로마 유적 발굴지, 13) 옛날 왕궁 건물, 14) St. Nikolaj Church 등이다.
a) 알렉산더 네프스키 교회(Alexsander Nebsky Church): 세계문화 유산
네오 비잔틴 양식의 동방정교회 최대규모의 교회로 러시아 터키 전쟁(1877~78)에서 불가리아를 위해 싸우다 죽은 20만 명의 러시아 인들을 기리기 위해 1882~1912 년 사이에 건축을 하였고, 러시아 황제 “아렉산더 2 세”의 이름에서 유래 되었고 5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다.
네프스키 교회의 황금 돔은 1960년 러시아가 20kg의 금을 기증해서 장식하였다. 내부에는 정교한 대리석 조각물과 화려한 프레스코화, 웅장한 상들리에 등이 볼거리이다.
(사진: 네프스키 성당 돔밑의 프레스코화)
밖에서 보면 큰 돔이 중앙에 있고 그 주위로 3개의 돔이 있고 돔 아래로는 돔을 받치고 있는 기둥에도 성현들의 프레스코화가 가득하게 그려져 있고, 3위 일체의 하나님을 신봉하는 교회로돔 기둥에 모두 셩현들의 그림이 4층 높이로 그려져 있다.
b) 성 페트카 지하 교회(St. Petka Underground Church)
네델리아 광장이 보이는 곳에 지붕만 보이는 반지하의 교회로 투르크 제국의 지배를 받던 1390년에 지하에 지었으며, 현재 소피아에 남아있는 중세교회의 하나이나 지금은 뒷편으로 크게 지었다. 내부에는 예수의 탄생과 기적,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부활하는 장면의 프레스코화로 유명하다.
c) 소피어의 중심지-네델리아 광장(구 레닌 광장)
소피아의 중심지로 대통령 집무실과, 구 공산당 본부가 있던 의원회관, 호텔, 백화점 등이 자리잡고 있다.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구 공산당 건물에는 1시간 30분 마다 근위병이 교대식을 갖는다. 광장에는 지헤의 여신으로 소피아 여신상이 있는데 이는 과거 이 자리에 레닌상을 대신하여 세운 것이다. 당시 레닌 광장으로 불리었으나 지금은 네델리아 광장으로 불린다.
소피아 여신상은 오른손에 월계관을 들고, 왼손 위에는 부엉이가 앉아 있다.
(사진: Sofia 여신상)
이어서 소피아 시내의 여러 곳을 둘러보면서 대통령 궁 앞으로 나가기 위해 지하도로 들어가니 지하 굴착 시 옛날 로마시대에 유적, 유구가 발견된 곳을 보존하는 현장을 주의깊게 관찰하였다. 시내로 나가서 로마시대의 온천 지, 광천수 샘물 터 등을 둘러보면서 이런 곳이 잘 보존되어 시민들이 가까이 접하게 만들어 논 것에 주목하였다.
시내 관광을 마치고 교외로 나가 “Radisson Park Inn Hotel”에 여장을 풀었다.
아침 일찍이 일어나 밖으로 나와보니 멀리 기토산 정상에 눈이 쌓여 있다. 발칸산맥의 눈 녹은 물로 상수원에서 공급하니 이곳의 물은 양호한 편이다.
불가리아는 옛날에 슬라브족이 이주해와 정교회가 발전하였고 외침이 많은 나라였고, 발칸산맥 600 여 km가 뻗어내려 높은 산이 많고 무랄라 산(2900m)이 최고봉이다. 국토의 60%가 산지이다. 오늘은 소피아 외곽순환 6차선 도로로 나와 벨리코트노보로 가니, 산이 높고 겨울이 길어 스키장이 많이 보인다. 기후는 건조한 대륙성 기후다. 원래는 불가르족이 뿌리이나 슬라브족에 동화되어 미남, 미인이 많다. 집시 족도 5%나 된다. 2007년 EU에 가입한 후 인구가 100만 명이나 감소되었고 지금도 젊은이 들이 취업을 위해 다른 나라로 나가고 있다.
(사진: 눈 덮인 발칸산맥의 모습)
버스는 이제 산간도로로 간다. 우리나라의 현대 중공업이 이곳에 변압기 공장을 가동하여 불가리아인 600여명이 일하며 현대는 임원과 그 가족이 이곳에 살고 있다 한다.
가을이 어느새 다가온 산간도로를 넘어가니 전원풍경이 전개되고 넓은 땅에 2층 주택이 대부분이다. 농촌에서 집집마다 양, 염소, 닭, 칠면조 등을 가정에서 길러 자급자족하며 포도로 만드는 꼬냑도 직접 만들며, 벌써 집집마다 참나무 벽난로에서 흰 연기가 피어 오른다.
“Kalota” IC 로 나가니 중고 자동차 시장이 나오고 어느덧 휴식시간이 되어 09:10분 휴게소에 이르니 비라칸사스 열매 송이가 주홍색으로 변해있어 주변의 단풍과 조화를 이루니 한국의 가을 풍경과 흡사하다.
불가리아는 요거트의 본고장으로 한국에서는 불가리스로 불리며, 이는 “불가리쿠스” 유산균이 러시아 학자 “매치니커프”에 의해 인간의 수명연장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연구로 노벨상을 수상하여 이미 학설로 굳어져 있다. “불가리쿠스”의 미생물 균이 인간의 대, 소장을 청소 해주는 역할을 한다. 인간은 대장과 심장이 건강하면 수명이 150년 까지 간다는 가설이 성립되었고, 그 때문인지 불가리아는 어디를 가도 장수촌이다. 요거트는 발효된 우유로 우리나라에서는 매일 유업이 독점적으로 유산균을 수입해 간다.
차는 어느덧 릴라 수도원 입구로 나가니 이 근처가 바로 릴라 장수촌이라 한다. 여기서 릴라 수도원은 1150m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D) 릴라 수도원(Rila Monastery): 유네스코 문화유산 지정(1983년)
불가리아 남서쪽 소피아로 부 터 117km 떨어진 Rila 산맥 깊은 곳에 해발 1147m나 되는 산록에 자리잡고 있다. 14세기부터 불가리아 정교회 총본산이다. 불가리아가 500년간 오스만 터키의 지배를 받았을 때 이 수도원은 국민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였다.
불가리아의 “Tsar Peter”(927~968)의 통치시기에 은둔의 수도사 “John Rila”가 지금의 수도원 경내에서 멀지 않은 동굴에서 살았던 것이 근거가 되어 이곳에 작은 수도원을 세우게 되었다.
그 후 1378년에 “Tsar Ivan Shishman”이 재산을 기부하여 12~14 세기 사이에 수도원이 확장 증축되었다. 그로 인해 이 수도원은 중세의 종교와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고 15 세기 부 터는 불가리아 종교회의 총본산이 되었다. 그 후 교회 안팎에 여러 가지 나무 조각품, 교회의 성화(Icon Painting) 등이 이루어 졌다.
우선 본당 앞에 좌측 성화는 예수가 야곱과 함께 그려지고, 그 옆으로는 베드로, 그 아래로는 지옥에서 고통받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내부로 들어가면 화려한 프레스코 기법으로 그린 성화가 금색 장식 테두리에 쌓여 전면과 측면을 장식하고 있다.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이 수도원의 성현들의 모습이 프레스코화로 그려져 아주 화려하다. 이곳에서도 성현 수도사들의 뼈 조각을 모아 놓은 유리상자도 볼 수 있다. 뒤에 있는 종탑은 22m의 높이로 피라미드 모형으로 지었다. 앞에 있는 4층 높이의 건물에는 300개의 수도사의 방과 4개의 기도실, 하나의 큰 수도사실, 도서관, 휴게실 등이 마련되어 있다.
(사진: Lila 수도원 전경)
또 이 수도원에는 회랑 및 천장에 1.200여 개의 성화가 프레스코화로 그려져 있고, 박물관에는 4.100점의 서류, 포고문, 기도문이 보관되어 있다. 본당 안에는 오른쪽으로 불가리아의 마지막 황제의 석묘가 안치되어 있다.
너무나 찬란한 정교회의 본산을 보고 나서 다시 나오니 릴라 마을은 한산하고 도로 가의 주택들은 낙후한 상태였다.
버스는 소피아 방향으로 가기 위해 “Verik”IC 로 나오니 소피아 60km 지점부터는 4차선 도로가 나오고 중고자 판매 단지가 이어지고 다시 소피아 시내로 진입한다. 시내의 트램카 출발점 근처 보야나 교회를 지나 우리는 이곳의 유일한 한국식당으로 간다. 러시아 대사관 앞을 지나 골목으로 들어가 100m 걸어가니 “한국 식당” 이란 표지판이 건물에 달려있어 신기하고 반가웠다.
이곳 한국식당은 “Yun Ok hee” Tel (359)2 9630365 (34. Elemag str. 12 grev Sofia. Bulgaria.) 이다.
지금은 아직 초보 걸음마 수준이지만 한식 세계화의 바람을 탈것이다. 식당 안에는 “Koeran Food”라는 책이 칼라로 인쇄되어 천 여권이나 준비되어 있다. 부디 건투를 빈다
우리는 이제 서둘러 베리코 투르노보(Veliko Turnovo)로 가야 한다. 시내의 6차선 도로는 차량으로 가득 차고 정체된다. 우리가 탄 버스는 ‘Varna”로 향하니 4차선 도로이고 이제는 한산하고 주위로는 단풍이 곱게 물들어 간다. 시속 70km로 가니 또 날씨가 변덕을 부려 비를 뿌리고 있다. 오후 17:00 시가 다되어 이 나라의 중세왕국의 도읍지였던 베리코 투르노보에 이른다.
이 도시는 현재 7만 이 거주하고 그 중 2만 여명이 대학생이라 한다. 이곳은 중부지방에 위치하여 산간 도시로서 고성터가 유적으로 전해오고 있다. 입구 뒤로는 절벽으로 Yantra 강이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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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Lila 수도원 출입구에 그려진 프레스코화-상-예수상,하-예수가 베드로, 곱과 함께)
E) 베리코 투르노보(Veliko Turnovo) 성터와 성모 승천 교회
불가리아의 중세 도시로 수도 소피아에서 240 km 떨어진 얀트라 강 상류의 능선 위에 세운도시다. 이 시는 제 2차 불가리아 왕국(1185~1393)의 수도로 오스만 투르크의 침략을 받아 쇠퇴한 도시다. 불가리아 제 2 왕국은 슬라브족이 세운 나라다.
“아센 2세”(1218~1241) 시대에는 스라브 문화의 중심지로 당시에는 “불가리아의 아데네”로 불리었다. 1393년 오스만 터키 제국의 침략으로 멸망하였다. 전성기에는 비잔틴 제국을 물리치면서 불가리아 전역을 지배하였다. 얀트라 강이 도시 중심의 협곡을 통과하여 휘돌아 흐르고, 협곡의 절벽 위와 언덕에는 붉은 지붕의 하얀 집들이 들어차 있어 마치 동화 속의 마을 같다.
이곳의 유적은 성곽이 1100m 나 되며, 1971년에 복원하였다. 성안으로 들어가면 맨 위에는 황제가 살던 터가 나오고, 주위로는 물 저장고 등이 발굴되어 있고 주변에는 당시에 건물터가 정비되어 있다. 성안 곳곳에는 발굴된 건물 터가 있고 당시에 사용하였던 무기도 전시되어 있다. 이 성안에는 2 차 왕국의 4명의 왕의 동상이 그 옛날의 영화를 지키고 있다
(사진: 베리코투루노보 구 왕궁 터 전경)
이곳의 유적은 성곽이 1100m 나 되며, 1971년에 복원하였다. 성안으로 들어가면 맨 위에는 황제가 살던 터가 나오고, 주위로는 물 저장고 등이 발굴되어 있고 주변에는 당시에 건물터가 정비되어 있다. 성안 곳곳에는 발굴된 건물 터가 있고 당시에 사용하였던 무기도 전시되어 있다. 이 성안에는 2 차 왕국의 4명의 왕의 동상이 그 옛날의 영화를 지키고 있다.
정상의 수도원은 “성모 승천교회”로 천혜의 요새인 베리코 투르누보 중세의 성벽이 둘러처저 있고 차르베츠 언덕 위에 자리를 차지한 교회다. 완벽한 중세유적으로 성당내부에 천장과 벽에는 1393년 부 터 500년간이나 지속된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 당시에 과거를 “테오판 소케로브”가 그린 그림으로 가득 차 있으며, 불가리아의 현대적인 종교화로 유명한 그림이다. 테오판은 그의 제자와 2년에 걸쳐 교회내부에 그림을 그렸는데, 불가리아의 역대 왕과 귀족 등 역사작인 인물을 주로 그리었다. 성터를 나오니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이 너무 늦어 입장을 못하고 있다.
(사진: 베리코투루노보 성 위에 성모 승천교회)
우리는 이제 걸어서 구 시가지를 답사한다. 언덕으로 난 좁은 길에는 예술품, 공예품 들이 즐비한 가계들이 있으며 도시 끝에는 1849년 지은 3층 건물이 깨끗하게 보수되어 사람이 살고 있으니 아래층은 기념품 점이다. 여기서 걸어서 오늘의 숙소로 이동하니 “Premier Hotel” 이다.
다음날은 이번 탐사여행의 마지막 나라인 루마니아로 가는 날이다. 베리코 투르누보를 출발하여 국도로 나오니 그제서야 흑해방향에서 붉은 태양이 솟아오른다. “Pyce” 52km 전방 4차선 도로를 달려 불가리아 국경선으로 향한다. “Pyce, Ruse” 34km 부 터 도로는 다시 2차선으로 포장이 열악하고 루마니아 국경에 이르러 부크레슈티 방향으로 가서 검문소에 이르러 세관 심사를 마치고 철교를 건너가니 코린트 양식의 러시아식 탑 2개가 나란히 서서 아침햇살에 빛나고, 이번에는 루마니아 쪽 세관요원이 여권을 걷어 간다.
E-70. 85 고속도로로 4차선. 부크레슈티 55km 지점을 지나 아주 넓은 평야로 직선으로 뚫린 고속도로가 나오니 루마니아는 대국 같은 느낌이다. 비옥한 평야가 한없이 계속되고 아주 화창한 날씨다. 흑해를 동으로 끼고 중부 유럽의 젖줄인 다뉴브 강이 흐르고 교통, 물류, 관광의 3 박자가 어우러진 땅이다. 고속도로에는 주말이라 대형 물류차량이 없어 쉽게 E-70 도로로 부크레슈티 IC로 진입한다.
9. 루마니아(Rumania)
루마니아는 이번 여행 국가 중 가장크고 인구가 많은 나라이다. 면적 23만8천㎢, 인구 2225만의 대국이다. 종족으로는 루마니아 인 89.5%, 헝가리 인 6.6%, 로마 인 2.5%로 구성 되어 있다.
종교로는 동방 정교 87%, 개산교 7.5%, 언어는 루마니아어다.
루마니아는 농업이 주 산업이고, 옛날 로마 사람들이 들어와 터전을 잡은 곳이다. 수도 부크레슈티 시내로 들어오니 아파트 숲이 계속되고, 도로 가운데로는 트램카가 왕복선으로 다닌다. Alexsandria 거리로 들어가니 정교회 건물이 나오고 그 앞으로는 혁명당시의 희생자들의 묘역이 한동안 계속된다. 시내에는 아파틑 모서리를 연두색으로 칠을 해서 도시가 산뜻하게 보인다. 중심가로 들어가니 아침 10:20분 경이다.
도로 정면으로 1970년대에 지은 고층의 “Inter-continental Hotel”을 지나 버스는 혁명광장에 우리를 쏟아 놓았다.
루마니아는 1989년 12월 22일 유혈혁명을 통해 민주화된 나라이다.
(사진: 혁명 기념탑 전경)
처음에는 헝가리 근처 국경도시 티미슈라에서 개신교의 한 목사가 개방을 요구하면서 시작 되었다. 그러자 당시 독재자 “차우세스쿠”는 목사들을 해외로 추방하자 점차로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그래도 20년이 넘게 권좌를 누려온 독재자는 안심하고 이란 방문에 나섰다가 반정부 운동이 거세지면서 급거 귀국하였다. 이번에는 자기 지지 세력을 모아 광장에서 연설을 시작하자 갑자기 관중가운데 한 사람이 “독재자는 물러나라”를 외치자 관중이 호응하자 주변 건물 옥상에서 경계를 서던 군인들이 소요세력을 향해 총격을 가함으로서 사상자가 발생하자 순식간에 폭동으로 변하면서 대규모 유혈사태로 이어지면서 연설하던 차우세스쿠도 피신하게 된다.
(사진: 인민 궁전 전경)
그는 공산당 본부 옥상에서 부부와 비서 보좌관 등 4명이 전용헬기로 스나고보로로 가서, 다시 현금 1억$를 챙겨가지고, 독재자의 고향인 남부로 향하다가 국방부의 지시로 헬기를 착륙시키려고 하였으나 불응하자 격추시키겠다고 통고하자 조종사와 보좌관과 같이 국도에 불시착하였다. 그러자 보좌관과 조종사가 도주하자 차우세스크 부인인 엘레나가 헬기에서 내려 말이 끄는 마차를 구해 부부가 타고 고향으로 가다, 근처 군부대에 이르러 마침내 감금상태에 이르렀다.
그 순간 부크레슈티 인민광장과 국영방송과 TV 등에서 사태가 보도되면서 그를 따르던 충성군부와 시민의 유혈사태가 커지면서 혁명으로 치달아갔다. 마침내 당일 혁명광장에서 1000여명, 기타 지역에서 2천 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면서 마침내 혁명으로 승화되었다.
독재자 차우세스쿠 부부는 3일 후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즉결처분이 선고되어 총살형으로 집행되었다. 마침내 12월 25일 자신이 지은 궁 앞에서 부부가 총살을 당하니, 122발의 총탄을 맞고 숨을 거두었다.
그의 부부의 시신은 27일 일반 시립묘지에 안장하니 묘지 사이 통로에 묻고, 부인 엘레나는 멀리 떨어진 곳에 반대 방향으로 묻어 죽어서도 영원히 만나지 못하게 하였다.
지금 광장에는 혁명 기념탑이 높이 솟아있고 탑 주위로는 검은 돌 표면에 당시에 이곳에서 희생한 사람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광장은 추모비 중심으로 보면 3색 국기가 휘날리는 좌측건물은 당시에 공산당 본부였으나 지금은 노동부, 복지부가 들어서 있고, 추모비 뒤쪽 오른편으로는 당시의 비밀 경찰 본부였고, 그 오른쪽으로는 대학 건물이었으나 지금은 카롤 1세의 기념 도서관이 되었다. 추모비 오른쪽 광장 건너로는 왕궁이었는데 지금은 박물관이 되었다.
광장에서 한동안 걸어서 주변을 돌아보고 나서 당시의 루마니아 국민들의 혁명의 열기를 몸으로 체험하였다.
이제 버스에 올라 광장에서 오른쪽 길로 들어가 차우세스쿠 궁전으로 향한다. 그는 생전에 전 세계에서 가장 큰 건물을 지어 그의 독재정권을 영속하려 하였다.
이 궁전을 짓기 위해 주변의 7천 세대의 아파트, 교회 등을 철거하였고, 그 자리에 5년에 걸쳐 지상 12층(84m) 자하로도 핵 벙커시설로 같은 12 층의 건물을 지으며 무려 20만 명을 동원하였다. 백만 톤의 대리석을 사용하여 1000여 개의 방, 방 넓이는 700평으로 만들고 초 호화판 건물을 지었다. 카페트, 커튼 등이 초 호화판이며 문고리와 창틀도 금으로 도금하였으니 말하자면 독재자가 인민의 고혈을 빨아내는 흡혈귀인 드라큐라인 샘이다.
그는 당시 북한을 방문하여 평양의 금수산 궁전을 보고 돌아가 지은 것이다. 당시의 공정은 70%로 지상과 지하가 맞닷는 부분이 미완성인 채였다. 루마니아의 민주화 이후 이 궁전에서 미국의 “마이클 잭슨”이 “헬로 부카레스트”를 공연하였고, 또 이태리의 유명한 성악가 “바바로티”도 이곳에서 공연하였으나, 그 후 3 인이 모두 세상을 떠났다. 얄궂은 일이다.
궁전 답사를 마치고 오전에 부크레쉬티를 떠난다.
(사진: 카롤 1 세 기마상)
지금의 부쿠레슈티는 인구 200만, 차량 홍수의 도시로 변모하고 숲이 무성하고 도시 이름 “부크레슈티” 란 “기쁨이 샘솟는 곳” 이란 의미다. 14세기에 도시가 세워지면서 “카롤 1세” 국왕이 수도로 지정하여 발전하면서 리틀 “파리”로 불리던 아름다운 도시이다. 시내에는 “Samgsung” 이란 전면 광고판이 부착된 곳이 있으니 지금의 국립 도서관 정면 건물이다.
이곳에는 의학이 발달하여 신장 결석을 최초로 추출 수술한 병원으로 “컬처럴” 병원이 있으니 이곳에서 북한 김 일성도 그의 목뒤의 혹을 2번이나 수술한 병원으로 유명하다. 또 부크레슈티 대학이 유명하며 본관 건물 앞에 프라타나스, 너도밤나무 가로수가 아름다운 숲을 조성하고 있다. 다시 총리 공관 앞을 지나 공군 조종사 위령탑을 지나니 드골 광장이 나오고 제 1차 세계 대전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파리의 개선문을 모방하여 지은 부크레슈티 개선문이 나오니, 이제 우리는 이곳에서 한국식당을 찾아간다.
(사진: 부크레슈티의 한국식당 전경)
새로이 단장한 한국식당에서 우리는 육개장에 5가지 반찬을 겯드린 점심을 함께한다.
오후에는 E-60 4차선 도로로 나와 “Brasov -126km” 로 가기 위해 달리니 끝없이 넓은 농경지 가 나오며, 푸른 유채 밭도 있고 멀리 공장시설도 보이며, 길가에도 유전이 있어 원유를 채굴하는 기계가 가동 중이다.
“Brasov” 72km 지점을 지나니 가끔 유정이 나오고 원유 시추기가 돌아간다. 도로 옆으로는 복선의 기차길이 놓여있고 주택이 드문드문 보인다. 휴게소에서 잠시 쉬면서 루마니아의 민속공연을 감상한다. 다시 출발하여 루마니아를 가로지르는 카르파티아 산맥으로 난 2차선 도로로 올라가니 단풍이 은근하게 물들어 가면서 가을이 깊어지고 있다.
루마니아는 EU 28개국 가운데 불가리아와 더불어 경제적으로 보면 27, 28위다. 그러나 물가는 비싸고 1 차 산업이 발달하고 주로 밭농사가 위주다. 원유나, Gas 산업은 모두 외국자본에게 넘어갔다. 학제는 4,4,4,3 제로 대학을 정시에 들어가면 모두 무료다. 즉 공부를 잘하면 무료고, 세금은 개인이 30%, 법인이 30%로, 모두 장수하는 나라로 직장에서 확인서만 내면 의료는 무료다.
시나이아 지역으로 가니 이곳은 “카파르티아의 진주”로 불리며 루마니아의 최고 휴양지이다. 이곳 산자락은 사계절 휴양지로 정면에 “부케이산” 정상에는 벌써 눈이 하얗게 쌓였고, 2700m 되는 고산지대라 겨울이 길고 스키장이 많이 개설되어 있다.
루마니아는 북위 42~48도에 위치하고 있어 여름에는 온도가 높으나 습도가 없어 그다지 덥지 않으나 겨울은 혹독하게 추우며 눈이 5m나 온적도 있으며 -43도 까지 내려간 적도 있다.
이곳 시나이아에는 어제 눈이 내려 지붕마다, 언덕 위로는 눈이 수북하다. 도로가 산으로 올라 갈수록 눈이 두껍게 쌓였고 해발 1000m 지점에 이르러 다시 내려가니 오른쪽은 먼산에 눈이 쌓였고, 도로 가에는 가을이 깊어졌다. 내려오면서 이제 16 km 남았다.
a) 브란성(Blan Castle)
아일랜드의 작가 “브람 스토커”(Bram Stoker) 의 소설, 흡혈귀 ”Dracula”의 무대가 된 성이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무시무시한 흡혈귀가 살았던 곳을 즐겨 방문한다. 드라큘라 “Vlad” 공은 실제로 1456~62, 76년 사이에 발라키아(Wallachia) 공화국을 통치하던 루마니아의 실존인물로 영웅이다.
(사진: 브란성 전경)
14세기 말에 드러큘라 백작은 발라키아를 침입한 오스만 투르크 군을 2 차례나 격퇴하였고, 그 당시 포로로 잡은 적군 2만 명을 나무를 뾰족하게 깎아서 만든 꼬챙이를 포로들의 항문에 꽂아 세워놓았다. 그러면 상체의 몸무게로 인해 서서히 나무 꼬챙이가 위로 올라가면서 고통 속에 죽음으로 가는 것이다. 이를 본 오스만 투르크의 군대가 겁을 먹고 후퇴하였다. 이렇게 발라키아 공화국을 지킨 드라큘라 공은 아일랜드의 작가 “Stoker”에 의해 흡혈귀 악마로 묘사되어 그의 생가와 더불어 관광 상품화 되었다.
그가 살았다는 “브란 성”은 언덕 위에 서있어 소설 속의 괴기스런 성과 유사하여 묘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성 내부로 들어가면 침실, 주방, 회의실이 있고 벽난로가 설치되었고 방마다 다 독특한 역할이 있었다. 그러나 방이 좁고, 좁은 방에는 당시에 사용하던 가구, 침대, 탁자, 주방 시설, 생활용품, 백작들이 입었던 갑옷과 투구, 당시 사용하던 칼과 무기류, 의상과 가제도구가 소박하게 전시되어 있다. 바닥이 나무로 되어있고 계단도 좁은 미로 같은 통로를 따라 나무로 설치 되어있어 걸어서 다니기에 편하다. 전시물에는 모두 설명 안내판이 있어 편리하다. 실제로 이 성에 살았던 인물은 드러큘라공의 할아버지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제는 실제로 이 성에 드라큘라가 살았다고 믿고 있다.
(사진: 당시의 브란성 실내 모습)
다른 기록에 따르면 이 성은 수세기 동안 중요한 역활을 하였는데 실제로 “Barsa County” 를 방어하는 요새이고 브란 근처의 도로를 통제하는 곳이라고도 한다. 또 20세기 초반에는 루마니아의 “Queen Maria” 의 여름 별장이었다고도 한다. 사실 이 성은 요새로 1382년에 “Brasov”의 “Ludovic the Great”에 의해 그들의 마을을 지키기 위해 석회암 바위 위에 좁은 언덕에 세워졌다.
그 후 1377~1494년 사이에는 이 요새는 “Magyar Royal Crown”의 소유로 되었다. 그 후 “Ludovic 1” 세가 이 요새 안에 수비대를 두었었다. 또 14세기 말부터는 발레키아에 지배에 들어갔고, 1498~1920년 사이에는 “Brasov”의 통제를 받았다. 이 성은 우여곡절 끝에 1920년까지는 “Brasov”의 소유로 되었고 산림행정처가 되었다. 1920년 12. 1일 브란 성은 루마니아의 “Queen Maria”에게 기증되어 1947년까지 왕실의 거처가 되었다. 이렇게 복잡한 과정을 거처 현재 브란성은 마리아 왕의 딸의 조카인 “도미니크”의 소유로 되어 있고 10여 년 전에 600만(약 900억) 유로에 매물로 나왔었으나 팔리지 않았다.
브란 성의 꼬불 꼬불한 통로를 따라 30분 이상을 오르고 내리다 나오니 어느덧 해는 기울고 있었다. 입구에 상가에는 브란 성의 드라큘라 백작을 상품화한 기념품이 다채로웠으나 막상 방문 후에는 괴물에 대한 생각이 사라져 버렸다. 괴물의 흡혈귀를 형상화하여 그린 모자와 드라큘라 전설에 관한 책, 브란 성의 역사를 담은 책을 12 유로를 주고 구입하였다.
(사진: 드라큘라 흡혈귀의 가면 모습)
드라귤라의 생가: 사실 브란성과 드러큘라의 생가는 다르다. 블라드 3세가 태어난 집은 시
계탑 근처 성당 광장 3층 건물로 현재는 드라큘라를 주제로 한 테마 레스또랑으로 되어 있다.
불라드 3세는 1431년에 이곳에서 태어나 1435년 5세 때에 아버지와 함께 이 곳을 떠났다. 오스만 투르크로 부 터 나라를 구한 영웅인 블라드 드라큘라 3세는 아일랜드 작가에 소설에 의해 흡혈귀로 변모하고 말았다. 이 생가도 “영웅 드라큘라”의 생가가 아니라 “흡혈귀 드라큐라”의 생가라는 테마를 더 부각시키고 있으니 그것은 오로지 관광 상품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곳에는중세의 마녀를 잡아서 고문하던 방이 있고, 끔찍한 고문도구가 전시되어 있다.
우리는 다시 이번에는 브란 성 근처의 중세도시 “Brasov” 로 간다.
B) 브라쇼브(Brasov) 중세도시 탐방
성을 나와 버스로 이동하여 브라쇼의 중세도시는 입구에서부터 걸어서 탐방한다. 이곳은 독일 풍의 건축물이 가득히 들어섰고, 1211년에 중세의 기사단이 들어와 건립한 도시이다. 천연의 방어적인 요새로, 건축물마다 중세의 조각이나 문양이 새겨져 있어 도시전체가 아름답다. 길 양쪽이 모두 상가이며, 광장에 이르니 1420년 당시의 주 정부 청사가 있고, 지금은 보수 중이며 역사박물관으로 되어 있다.
검은 교회(Black Church): 루마니아 특유의 고딕 양식의 교회로 1385년에 세운 성모 마리아 교회로 지붕이 검게 칠해있어 검은 교회로 불린다.
(사진: Black Church의 전면)
1700 년대에 재건된 것으로 지금은 높이가 60m이고 안에는 중세 시대 부 터의 프레스코화가 있고 가운데에는 성모상이 화려하게 서있다. 종탑에는 5,5 ton의 청동종이 자랑거리이다.
우리는 중세도시의 “Gustari Restaurant” 에서 저녁식사를 마치고 어두워지는 중세의 거리를 걸어 내려와 골든 타임 호텔에서 하루를 마감한다.
이 튼 날이 이번 답사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새벽 05:00시 경 호텔 근방에는 5.5도의 지진이 발생하여 약 5초간 침대가 우직우직하고 문이 흔들리는 소리가 나면서 건물이 흔들리는 현상이 일어났다. 여행 중 처음 맞이하는 현상이다.
아침 일찍 마지막 행선지인 Sinaia 의 “팰래쉬 성“(Peles castle)으로 간다. 부쿠레슈티로 향하는 도로에 나와 어제 왔던 역방향으로 간다. 어제 왔던 산간도로에는 눈이 그대로 쌓여 있다. 우리 버스는 시나이아 호텔 앞으로 비탈도로를 올라 오솔길로 간다.
b) 펠레쉬 성(Peles Castle)
오늘 가는 펠레쉬 성은 루마니아의 국보 1 호로 입장권도 비싸다. 카메라 촬영권도 10 유로, 내부로는 덧신을 신고 들어간다. 카롤 1세 국왕 시대에 건축한 것이다. 국왕의 명으로 프랑스의 건축가가 설계하여 1875년에 짓기 시작하여 8년 동안 지은 여름 별궁으로 1883년에 완성 하였다. 네오 르네상스 양식으로 왕가의 여름 휴양지로서 부속 건물로는 경비실, 마구간, 사냥용 별장이 갖춰져 있고 아주 화려하다.
(사진 : Peles Castle 의 전경)
내부의 170개의 방은 멋진 조각품들과, 화려한 스테인드 그라스, 크리스탈 샹들리에로 장식하고 금은, 접시와 진귀한 도자기로 가득하다. 또 유럽의 유명한 화가들의 작품이 2000여 점이나 소장 되어 있고 당시의 무기를 전시한 방 도 있다.
건물 안쪽으로 자체 발전소가 있어 전력을 사용해 성을 밝힌 유럽 최초의 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펠레쉬 성은 건물 내부뿐 아니라 주변 환경과 어울려 외관도 아주 뛰어나다. 카르파티아 산맥의 우뚝 솟은 봉우리와 울창한 숲으로 둘러 쌓인 전경은 한 폭의 그림으로, 가을의 단풍은 감탄 그 자체이다. 또 정교한 장식을 새긴 나무와 아름답게 색채를 입힌 건물 외벽과 후원의 조각공원도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황제는 독일계 인으로 외세 침략(주로 오스만 터키)을 막기 위해 국가의 초석을 다지면서 이곳 산속에 성을 지었다. 그가 국왕으로서 사용했던 방은 1875~82년 사이에 건축하였고, 당시에 중앙 집중 난방, 전기 시설, 냉방기를 설치한 아주 현대적 시설이었다.
이제 안으로 들어가 하나하나 살펴본다.
1) 중앙 홀: 중앙 홀에는 국왕 부부가 석고상으로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고, 주로 수작업으로 호두나무를 사용하여 문 위 벽에도 나무 장식을 하였고, 이 성안에는 대체로 200여 개의 대리석 및 나무 조각품이 있으며 당시에 400여명의 조각가가 동원되었다 한다.
2) 무기실: 말을 탄 기마상, 청동으로 만든 갑옷과 당시 사용했던 무기가 전부 전시되어 있고. 큰 칼은 400여전 전의 것이다. 이것은 당시의 정치범을 처형하는데 사용되었다 한다. 전시관에는 각종 칼, 손잡이 장식, 창, 화약 장전 총 등이 전시되어 있다.
3) 왕의 의전실: 의전실 앞에는 면회 신청실이 있다. 의전실 안으로는 집기, 책상, 의자가 있고 책상 위로는 그 당시에 사용했던 달력이 케이스에 꽂쳐 있고, 날짜를 보여주고 있다. 창문 손잡이도 금속으로 되었고 문 주변은 호도나무 조각장식으로 치장하였다. 이 방에는 왕의 사진, 왕비가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이 사진으로 걸려 있는데 공주로 어려서 사망하였다 한다.
4) 서고: 서고는 책장이 3면으로 있고, 고급 양장본으로 금박의 문장이 들아 간 책이 질서 정연하게 정돈 되어 있다. 가운데로는 독서 테이블이 놓여있고, 2 층에도 책을 읽을 수 있는 테이블이 있다.
5) 음악실: 음악실은 비교적 넓고 가운데에는 대형 하프가 전시되어 있다. 검은 색의 피아노도 놓여있고 아취 형 2 개의 문 뒤로는 음악 박스가 있으며 정면 벽 위로는 봄, 여름, 가을의 계절의 변화를 그린 그림이 벽에 걸려 있다.
(사진: 당시에 사용했던 하프의 모습)
6) 목재 캐비닛: 이태리산의 화려한 장으로 양쪽으로 여는 문이 달려 있고, 가운데에는 벽난로가 있다. 벽난로 위에는 “미케란 제로”의 조그만 동상 작품이 있다. 벽 천정은 아주 화려하며 그 반대편으로는 소형 거울이 달려 있어 동상을 비춰주고 있다.
7) 거울의 방: 큰 거울이 벽에 세워져 있어 사람들이 이 방에서 연회를 할 수 있으며 실내 공간이 넓어 보인다.
8) 식당: 식당에는 가운데로 아주 화려하게 테이블이 세팅되어 있고 컵, 잔, 도자기 그릇, 접시 등이 다채롭게 전시되어 있다. 주방은 식당 아래에 있고, 작은 엘리베이터로 식사를 올렸다고 한다.
9) 아랍 스터일의 방: 이 방은 조명 장치가 아랍식으로 특이하며, 당시의 등이 그대로 달려 있고 벽에도 아랍식 무기로 칼, 창 등이 걸려 있다.
10) 터키방: 흡연실로 터키식 물 담배를 태우는 방이다.
11) 엘리베이터 실: 집견실로 옆에 엘리베이터가 안에 있고, 바깥으로는 철문이 있고, 왕살만의 용도이고, 방 앞에는 가장 큰 거울이 벽에 서있다.
12) 극장: 프랑스식 소형 극장으로 의자가 계단식으로 되어 있고, 당시에 무성 영화가 이곳에서 최초로 상영되었다 한다. 무대에도 장식이 되어 있고 커튼이 화려하다. 무대 옆으로는 사회용 조그만 탁자가 놓여 있다. 벽에는 “크림트”가 그린 옆으로 누워있는 여인이 길게 걸려 있고, 무대는 작다.
(사진: 왕비가 공주를 업고있는 모습)
한 시간에 걸쳐 방마다 순방을 마치고 나오니 햇살이 따갑다. 이곳 주변은 귀족들의 거처가 밀집되어 있고 성 앞으로 흐르는 계곡의 이름이 “Peles”라 이를 따서 성 이름을 부친 것이다.
이제 모든 일정을 마감하고 10:30분 시나이아를 떠나 오솔길 지방도로로 다시 부크레슈티로 귀환한다. OMV 휴게소 들어오니 그 앞 들판에는 유전에서 천연 오일을 퍼 올리는 기계가 돌아가고
퍼올린 오일은 관을 타고 한군데로 모아 진다.
(사진: 원유를 채굴하는 모습)
이제 남부 시나이아의 드넓은 평야를 달려 나가니 부크레슈티 74km 지점이다. 어제 왔던 한식당에서 된장찌개 백반에 5가지 반찬으로 점심을 마감하고 공항으로 이동한다.
부크레슈티 공항에 와서 오랫동안 기다리다 15:10분 SU(Aerofkot) 2035 로 쾌청한 날씨의 부크레슈티 공항을 이륙하여 몰도바 상공을 거처, 우크라이나의 광활한 평원을 날아 키에프 상공을 지나 모스크바공항에 17:30분에 접근을 한다.
모스크바 교외 상공으로 날으니 산이 보이고 그 앞에 큰 호수가 나타나고 모스크바 공항으로 진입하니 가을이 완연하다. 공항에서 트랜짓 대기하면서 남아공산 ”아마룰라” 와인 한 병을 17 유로에 구입한다. 모스크바는 또 한 시간 늦은 현지시긴 21:45분에 출발하여 밤새도록 오던 항로를 따라 6610 km 를 날아 바이칼 상공에 오니 새벽이 밝아오고 호수가 내려다 보이고 부근 산에는눈이 하얗게 덮이었다. 고비사막 남단으로 황량한 산지를 날아 서울 시간으로 08:37분 고도 11.277km, 시속 950Km/h 로 날아 다이렌 앞 상공을 통과하여 서해상공으로 들어와 약 8시간 만에 인천공항에 무사히 돌아왔다. (끝)
이 글을 작성하는데 현지에서 구입한 아래의 책을 참고하였습니다. 혹시 잘못된 것을 발견하여 지적하여 주시면 수정 하겠읍니다. 감사합니다.
1) Bled, 2) Postojna Cave, 3) Croatia (Tourist Monograph), 4) Dubrobunik, 5) Montenegro,
6) Herzegovina, 7) Sarjevo, 8) Serbia, 9) Rila Monastery , 10) Veliko Turnovo, 11) Sofia
12) Drucula, 13) Bran Castle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