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종 여행기/산동성여행기

2013 산동성 여행기

땡큐 이영옥 2013. 11. 18. 10:08

      2013. 10.28~11.02

 

 

 

  산동성 여행기

 

                (장 보고와  공자의 길을 따라)

 

        위해-석도-연태-봉래-유방-임치-태안-태산-추현-곡부-제남

 

                                                                                              .사진:   한 종

 

 

 

 

 

 

 

                                (사진: 상-장 보고, 하-공자상)

 

 

 프로로그

 

중국을 여행하면서 느끼는 것은 너무 넓은 땅이라 나누어서 여행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 동안 백두산 지역을 위시하여,베이징, 황산, 상해, 소주, 항주, 계림, 천자산, 남경,실크로드,시안,나평,원양 지구,홍콩,사천성,곤명, 티베트 전 지역 등 모두 아홉 번에 걸친 여행을 하였어도 늘 부족한 심정이었다.

 이번에 박물관 팀과 함께 아주 새로운 시도로 신라의 명장 장보고의 발자취와 성현 공자와 맹자의 탄생지를 위시하여 오악산(五嶽山)의 하나인 태산을 등산하는 프로그램을 마련하였다.

중국 동부 연안으로 황하가 흘러나오고 발해만을 끼고 우리나라의 황해도 건너편인 산동성은 총면적 15.6만 ㎢이고 인구는 9.500여 만 명이다. 산지와 구릉이 47%이고 평야가 53%이다.

옛날 기원전 722년 춘추전국시대부터 노() 나라가 자리잡은 땅이기도 하다. 고대 부 터 역사적 문화적으로 번성하였으며 1636년 부 터 청나라 때 산동성으로 불리어진 후에 현재는 17개시 지구, 94개의 현, 905개의 향으로 구성되었으며 주요도시로는 성도인 제남 시를 위시해서 청도,치박, 조장, 동영, 연태, 위해 등의 큰 도시들이 있다.

산동은 중국 고대문명의 발상지로서 7천 년 전에 원시공동사회인 대문구(大汶口)문화, 용산 문화의 발상지였다. 옛 부터 비옥한 땅이라 농업이 발달하고, 청동기 문화가 발달하였고, 춘추전국시대부터 기원전 221년 진한 시대까지는 제철산업이, 당나라 대에는 방직업이, 960~1127년 대인 북송시대에는 수리사업 등이 발달하여 번영의 중심지였다.

 

 

                                                                      (사진: 산동성 전도)

 

근대에 이르러 역사적으로 19세기에는 해안 지방에 서구열강의 침략으로 청도는 1897년에 독일로, 또 위해는 영국으로 할양되어 독일과 영국의 중국공략의 거점으로 활용되다가 1911년 신해혁명으로 중화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1922~30년 사이에 중국에 반환되기도 한 도시이다.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의 신라 시대에 장 보고”(張 寶高)가 산동지방에 건너가 신라촌을 개척하여 신라방이라 하고 많은 신라인들이 당나라에 유학을 가서 거점이 되었다. 나중에는 장수가 되어 신라 흥덕왕 때는 청해진을 개척하여 당, , 신라, 백제와의 무역을 활발하게 하였고 그 후 장수로 활약하면서 무녕군 소장이 되면서 우리 유민을 보호하고, 당시에 석도 진적산 기슭에 법화원(法華院)이라는 사찰을 세워 신라인들의 정신적 구심점을 이루었다. 그는 이곳에 많은 스님들을 모셔와 법화경을 공부하였다 한다.

귀국하여 지금의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적을 소탕하여 무역로를 보호하였다. 그러나 그의 세력이 커지자 846년에 문성왕이 보낸 그의 부하인 자객 염장(閻長)에게 살해 되었으니 당시에도 세력이 커지면 제거하는 시대였다.  

산동성은 북경, 천진, 상해, 중경을 제외한 중국 내 최대 인구 밀집지역으로 농업 생산이 전국 1위이고, 석유, 천연가스,희귀 금속을 비롯한 풍부한 광물자원의 보고이다. 지리적으로 우리나라 황해도 장산곳에서 새벽 닭이 울면 청도에서 들린다는 속설이 전해오는 가장 가까운 지역이다.

우리나라는 이곳에 가장 많이 산업시설이 진출하여 경제교류가 큰 규모로 확장되어 가고 있다.

 산동 지역의 주요 여행지로는 샘물의 도시 제남, 태산이 솟아있는 태안, 공자의 고향 곡부, 맹자의 고향 추성, 동양의 아름다운 항구로 이름난 청도, 국제적인 연날리기 대회의 유방 시, 고대 순마갱 등 볼거리와 역사적인 유적과 문화유산이 가득한 곳이다. 또 우리나라 사람이 즐겨먹는 산동요리의 본고장이다.

 

 

 

 

 

 

1.          산동성 웨이하이(威海)

 

인천공항에 이르니 산동성 위해(웨이하이) KE 839 창구는 사람들로 붐비었다.

오전에 날씨가 화창하고 맑았으며, 공항고속도는 단풍의 물결이었다. 웨이하이는 233miles 14:09분 이륙하니 산동은 서울보다 -1시간이니, 13:09분 이었다.

흐린 날씨에 위해 시 공항을 향해 이륙하여 우선 기내에서 청따이 맥주를 한 캔 맛보면서 50분 만에 착륙하니 현지시간 14:50분이다. 위해는 우리나라 교민들이 많이 살고 기업들이 진출해 있는 곳이다. 14세기에 왜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위()를 설치하고 성을 구축한 곳이다.

1885년 청나라가 북양해군을 설치하면서 산동반도에 위해에, 북으로는 요동반도의 여순에 진을 형성하고 발해만을 방어하였다. 그로 인해 위해 위해는 청일 전쟁(1894~95)의 격전장 이었다.

우리는 이곳에서 신라인 해상왕 장보고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곳인 황해에 근접한 석도 진적산 기슭에 자리잡은 적산 법화원으로 간다.

 

a)   예닌동상과 선원

적산 법화원으로 가면 높은 산 정상에 거대한 동상이 가장먼저 눈에 띤다. 이는 장보고의 동상이 아니라 이곳에 838년에 입당하여 법화원에서 3년을 머물 던 일본인 승려인 예닌(圓仁)”의 동상이다. 그는 당나라에 들어와 구법 기간 중 문등현에서 신라인들과 당시의 법화원 스님들의 도움을 받아 오대산과 장안에서 구법 순례를 마칠 수 있었다. 

입당하여 정치, 문화 등 여러 방면의 수련을 하면서 입당구법순례기를 썼다. 그는 이 글에서 당시의 법화원의 여러면을 상세히 기록하였고, 당시에 장 보고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사진:  일본인 예닌의 동상)

 

 일본으로 귀국한 후에 적산 법화원을 모델로 삼아 일본 교토에 소야산에 당나라의 적산 법화원을 본 따 적산선원을 세웠으며 그로 인해 그는 일본 불교의 중종 3세로 추앙받게 되었다.

 그가 귀국한 후에 산동의 적산 법화원은 소실되었다가 1988년에 와서야 중국에서 영성시의 의해서 현재의 위치에 재건하였다.

적산 법화원은 적산그룹 유한회사에서 현재는 운영하고 있다. 예닌상 아래에 선원은 2005 4 28일 이곳의 신도들의 염원을 위해 개광하였으며 매일 적산 명신전의 법사가 경을 읽어 신앙자들을 축복하고 있다. 누구나 적산 명신전에서 공양할 수 있으며 집으로도 신을 모실 수 있다. 전내의 신당에서 380위안의 공양비가 요구된다. 600위안의 공양비로는 한평생 공양한 것으로, 공양자는 개광증서를 받는다.

 

 b)  적산 법화원

 

나라에 건너온 장보고는 적산포가 당시에 중요한 무역항이라 적산을 중심으로 무역에 종사하면서 부를 쌓아 적산에 법화원”(法華院)을 세우고 불교를 통한 민심의 안정을 도모하고, 이곳을 해양 무역 기지로 삼고, 당시에 신라인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당시에 법화원은 본전과 요사채,종각, 강경당으로 이루어 졌다. 이 때의 구당신라소”(勾唐新羅所)는 신라인들을 관리하는 관청으로 신라촌, 신라방, 신라관을 관리하였다.

 당나라 무종 때에 와서 조정은 도교를 숭상하기 시작하면서 불교를 억압하면서 842~46 년간  전국의 사원을 폐쇄시키고  사원의 소유 토지와 재산은 나라에 귀속시킴으로 인해 당시에 장보고가 세운 적산 법화원은 패쇠되었다.

현재의 적산 법화원은 1988년에 영성시에서 현재의 위치에 재건하였다. 적산 법화원의 대웅전 앞에는 장보고 장군상이 서있으며 대웅보전에는 석가모니상이 모셔져 있고, 관음전에는 관음상이 모셔져 있다. 그리고 북쪽 벽에는 우리나라 장 우성화백이 그린 장보고 대사의 화상이 모셔져 있다.

 

b)    장 보고(張寶高) (790~841), 그는 누구인가?

 

장 보고는 섬 출신으로 미천하였고 어려서부터 성격이 호방, 활달하였다. 평소 바다에서 수영을 익히고 무예를 연마한 그는 활과 창을 잘 다루고, 포용력과 의협심이 강하고 고향에서는 소년 영웅이었다.

당시 8세기말에 신라는 귀족 사이에 정쟁이 일어나 나라가 혼란하였고, 그로 인해 세금이 가중되었고, 자연재해가 발생하여 백성의 생활이 피폐하여 졌다. 이로 인해 그는 당으로 건너가고, 신라 내에서는 통일 후 당문화를 수용하여 8세기 중엽에는 행정 조직을 개편하고 율령제를 받아들이면서 강력한 중앙 집권제를 구축하였다.  848년 에는 신라로 귀국하는 유학생이 백여 명에 이를 정도로 당시에 당나라로 많은 사람이 유학을 갔다.

 

 

                                            (사진: 법화원의  장보고 장군상)

 

장 보고도 신라인으로 당 현종 원화 2(807) 무녕군(武寧軍) 에 입대하며 뛰어난 무예와 용맹으로 원화 14년 무녕권 소장이 되었고, 당 목종 장경 4(824)에 적산 법화원을 건립하였다.

당나라 후기에는 각지의 토호들이 조세 납부를 거부하고 중앙에 반기를 들었다. 서주는 남쪽에 변하와 인접하고 용교를 장악하고 있어 장강과 회수 일대의 요충지를 지키도록 군사를 파견하였다.

 무녕군은 원래 서사호 절도사(徐泗壕 節度使)로 불렸으나 805년 무녕군으로 개명하고, (), (),(),() 4 주를 관할 하였다. 815년 당시 산동성을 장악하고 있던 이 사도”(李師道)가 수 차례 서주를 침범하였으나 모두 무녕군에 의해 격퇴되었다. 이 사도는 원래 고구려 사람으로 안사의 난평정에 공으로 절도사에 오른 이 정기”(李 正己)의 후손이다. 이들은 산동 지역을 장악하고 3대에 걸쳐 그 세력을 확장하여 그의 영역이 서주에 미처 당나라와 반목하였다. 장보고는 819이 사도의 반란을 평정하자 무녕군 소장에 임명되었다.  이에 장보고는 적산을 중심으로 무역에 종사하여 부를 쌓아 적산에 법화원을 세우게 되었다.

당나라 무종 때에 와서 조정은 도교를 숭상하기 시작하면서 불교를 억압하면서 842~46년간 전국의 사원을 폐쇄시키고 사원의 소유의 토지와 재산은 나라에 귀속시킴으로 인해 당시에 장보고가 세운 적산 법화원도 폐쇄되었다.

 

 

                                                            (사진:사당 내 장 보고 장군 상)

 

그 후 당 문종 태화 2(신라 흥덕왕 3 828)에 신라로 돌아왔으며, 흥덕왕을 알현하는 자리에서 해상 요충지인 그의 고향에 청해진을 설치할 것을 건의 하여 병사 1만 명을 주면서 그를 청해진 대사로 임명하여 완도에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하여 해적을 소탕하고 노비매매를 근절시켜 당시에 한, , 일의 해상 무역로를 열었다. 그로 인해 영웅대접을 받고 해상 무역왕으로 추앙되었다.

 그 후 신문왕이 즉위한지 6개월 만에 병사하자 그이 아들 문성왕과 귀족들은 반란을 도모했다는 죄목으로 그의 부하였던 염장(閻長)을 보내 장 보고를 살해하고 부하들도 죽였다. 그 후 851년에 가서는 청해진을 패쇠하였다.

현재 영성시에서 지은 법화원에는 장 보고 동상이 높이 서있고, 그 안에 사당이 마련되어 있고 주위로는 기념관을 건립되어 있다. 1,2 기념관 안에는 장보고의 업적을 기리는 각종 유품과 무기류가 전시되어 있고 3번째의 방에는 신라방 개척시의모습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기념관 뒤로 언덕으로 오르면 김 영삼대통령이 방문하여 1994년 건립한 기념비가 서있다. 기념비의 글씨는 김 대통령이 직접쓴 글씨가 새겨져 있다.

 

              (사진: 장보고 기념탑 전경-글씨는 당시 김 영삼 대통령이 쓴것)

 

 

 

   2. 연태시

인간의 극락으로 불리는 산동반도의 연태(煙台-Yantai)시는 산을 뒤로하고 바다를 앞으로 하고 있어 물안개로 신비스런 풍경을 연출하여 이름다운 도시로 이름이 높다.

 기원전 진시황제가 불로초를 구하러 이곳을 세번이나 왔었고, 이곳에서 바다건너 우리나라에 까지도 불로초를 구하려 사람을 보내기도 하였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연태는 1398년 명나라 홍무제의 통치기간에 왜구의 침입을 알려주는 봉화대를 건립하였기에  연태라는 이름을 얻었다. 봉화 불을 연결시켜 보내주는 연태산은 지금의 연태시의 이름을 탄생시킨 것이다.

1861년 연태시는 산동성 최초의 개항시로서 서구와 통상관문의 역할을 가지게 되어 영국, 프랑스, 미국, 독일 등 서구열강들이 이곳에 최초로 영사관을 건립하고 극동으로의 진출 교두보가 되었다.

그 뒤 연태는 영국 극동함대의 침공으로는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던 곳으로 바닷가에 등대가 서있고 봉래각이 해발 60 m 위에 바위산에 세워져 있다.

 

1)   봉래각(蓬萊閣)  

 1061년 에 세워진 봉래각은 연태시 북쪽 70km 떨어진 곳 언덕에 위치한 고대 건축물 군으로 황학루, 악양루, 등왕각 과 함께 중국의 4대 명루 중의 하나이다.

송나라 가우 6년에 건립되어 미타사,용왕궁,천후궁,삼청전,여조전 등으로 이루어 졌고 총 32.800㎡에 이르는 고대 건축물이다.

 

 

     

                                                      (사진 봉래각의 건축물들)

 

 절벽 위에 언덕에 세워진 봉래각은 파도와 더불어 비경을 연출한다. 이후 오랜 세월동안 바다물의 침식과 전란으로 청나라 때에는 폐허가 되었었다. 1829년에 다시 재건되었으나 일본과의 전쟁으로 파괴되어 봉래각이라는 현판만 남아있었다. 1984년에 와서야 대규모로 재건되어 옛 모습으로 되살아 나게 되었다. 현재 누각은 산동반도 북부, 발해만 남쪽인 바닷가 단애산 꼭대기에 서있다.

중국의 산과 바다의 풍경이 하나로 어우러진 명승고적이며 예로부터 진한 황제가 신선과 같은 삶을 찾기 위해 이곳을 찾아왔던 곳으로 인간 선경으로 불리어 왔다. 경내의 면적은 5.8㎢ 이며 총 11개의 명소가 있다. 바다 위의 신기루 현상과 여덟 명의 신선이 바다를 건넜다는 전설이 서려 있는 곳이다. 여 동빈을 비롯한 8명의 신선이 이곳에서 술을 마시고 바다 위를 날아갔다는 팔선과해의 신화가 전해내려 온다.

a)    미타사:  조사전에는 불교에서 갈라져 나온 정토종의 창시자 혜원법사가 모셔져 있고 좌측으로는 도연명과 혜연이 있고, 우측에는 유유민과 항이가 있다.  그 옆에 관공전에는 후한 말년의 서촉의 관우 장군이 모셔져 있고, 좌측으로는 그이 부하 관평과 조루, 우측에는 주창, 왕보가 모셔져 있다.

 

 

                                                                      (사진: 천후궁에 아미타불상)

 

b)    용왕궁: 단대산의 산허리 서쪽에 있으며, 전전, 용왕, 후전의 3개의 정원이 있다. 면적이 2.117㎡으로 당나라 정관 년간에 건축하였다. 명나라 홍우 18년에 사관의 지휘와 감독하에 서 응원이 다시 건축하였고 정전 가운데에는 동해 용왕님을 모시고 있다.

c)    천후궁: 봉래각 서쪽에 자리잡고, 산문, 중루, 고루, 호주, 수화문, 정전, 사랑채 등이 있다.  송나라 선화 4년에 창립. 그중 정전은 중앙에 금불상이 모셔져 있으며 해신 할머니가 있다. 봉래각에서 가장 많이 향촉을 올리는 곳이다.

d)    당괴(): 처음 절을 세우고 누각을 건설할 때 심은 나무로 천년이나 된 것. 나무줄기가 굵고 가지 잎이 무성하고 열매가 많이 열린다.  

e)    봉래각 팔선의 전설 벽화: 바다를 건넜다는 전설의 기원으로 70㎡의 달하는 벽화로 97명이나 등장한다.

f)     와비정: 누운비석이 잇는곳으로<해시시>가 있으며, 이곳에 소 식”(소 동파)의 사당도 있다.

 

2)   봉래수성

옛 부 터 등주 항구로 불리어 왔으며 수, 당나라 시기에 중국의 4대 통상 항구로 당시로서는 최고의 군항이다. 1982년 봉래각과 더불어 국가로부터 문화유적지로 선정되었다.

본래 송나라시대에는 전투용 선박을 정박하던 곳 이었으나 명나라 초기에 와서 수성을 축조하였다. 명나라 말기에는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하여 척 계광”(戚 繼光) 장군이 수성을 정비하고, 수문, 방파제, 성벽, 포대,등대, 부두 등을 구축하였고 일부는 지금도 남아있다.  

 

 

3)   봉래 보트 박물관

이 근처에서 출토된 4척의 고대선박과 더불어 등주의 역사를 전시, 수장, 연구, 관광교육을 하는 전문 박물관이다.

4)   전힁산

등주갑으로 불리며 전설에는 제나라 황제 전힁의 병영기지로 이곳에 주둔하여 전힁산이라 부불렀으며 현재는 문화공원, 행복원, 리엔고우각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5)   , 발해의 분계좌표

황해와 발해 분계선의 남쪽 시작점이며, 표시점으로는 2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마주 물고 있는 중간 지점이다.

6)   삼관사당

명나라 때 지었고 왜구를 방어했던 관군을 제사 지내는 장소로 사당에는 도교, 옥황상제, 삼관, 재물신, 원창황제를 봉안하고 있다.

 

이외에 전힁잔도, 전주 영화관, 등주 박물관이 있다, 박물관은 6개의 전시실이 있으며 여기에는 고대 등주 시대의 문화유물 296점이 전시되어 있다. 또 교동지역의 바다를 건너는 리프트로 동쪽은 봉래각, 서쪽은 전힁산으로 길이 480m로 연결되어 황해 발해와 전힁잔도의 풍경을 바라볼 수 있다. 또 동쪽에는 관란정과 명나라 장군 척 계광(戚繼光)이 해군을 훈련시겼던 수성이 있고 서쪽으로는 피풍정이 있다.

 

7)   팔선과해(八仙 過海)

 

 

팔선과해 관광지는 팔선도, 팔선 과해구 관광지구라고 한다. 황해바닷가에 위치하고 독특한 특색을 가지고 있는 해상 조경 관광지이다. 봉래각과는 장산 열도와 바다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다. 총 면적은 5.5만㎡로 건축은 팔선중의 하나인 철괴리손의 보물을 우화하하여 설계한 것이고, 바다에 가로누운 요술 호리병인 것 같다. 경내에는 경관이 모두 40여 개 있고, 세로 축선에 있는 경관은 순서대로 하면 팔선 과해구 및 운외선도방, 팔선다리, 선원루, 팔석벽, 망영루, 팔선사, 회선각, 이심정, 배선단 등 10개의 경관이다.

 

 

                                                                  (사진: 팔선과해 관광지 입구)

 

 가로축 양측에는 환해복도, 유향선, 청풍사, 종루, 북루, 재신전, 기복전, 팔선정, 기석림, 전후 조롱박물체, 용왕공, 마조전 등 경관과 요술호리병, 신나귀 등 소품이 따로 설치되어 있다.

관광지는 도교문화와 신선문화를 배경으로 하고, 팔선전설을 주제로 하여, 고전 건축과 조경이 어울려진 곳이다.

팔선사는 철괴리, 한종리, 장과로, 여동빈, 하선교, 남채화, 한상자, 조국구 의 팔선을 모시는 사당이다. 가운데에서 북쪽으로 자리잡고, 남쪽을 향한 정전이 팔선사이다. 양 옆으로 각결채가 있으며, 왼쪽이 기복전이고, 오른쪽에 재신전이 있다. 팔선은 노동자를 동정하고 악을 처벌하고 선을 칭찬하며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다. 그들은 각자의 신통이 있고, 각자의 능력을 발휘한다. 그래서 여덟 선인이 각자의 방법으로 바다를 건넜다는 전설이 전해왔다.  

 

  

 

 

8)   망영루(望瀛樓)

 망영루는 두공 비첨식 건축에 속하고 그림과 조각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망영루란 글씨는 유명한 계공선생이 쓴 것이다. 여기서 망영루에 올라 바다를 바라보면, 삼선도를 볼 수 있다는 뜻이다. 망영루는 영주 제일루 라고도 한다.

지금은 망영루는 팔선 문화박물관으로 1층에는 옥 조각도와 고전가구가 전시되어 있고, 2층에는 옥조각, 사기그릇, 칠그릇, 사벼루 등 예술품이 전시 되었고, 여기의 예술품은 고예대사가 제작한 것으로 매우 수준 높은 것이다. 3 층은 팔선 장수차, 차예 공연관이고, 여기서 차의 맛을 보며 바다를 바라볼 수 있고, 경치를 감상하고 파도소리도 들을 수 있는 명소이다. 4층은 예술관으로 많은 유명인사의 글과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사진: 망영루 전경)

  

 

 

9)   남산 대불(南山 大佛)

 

남산대불은 2004 4 18일에 낙성하였고, 좌불의 높이가 38.66m, 무게는 330 톤이다.

부처님 좌데 밑에는 대불을 만들고 남은 쇳물로 9999개의 작은 부처님을 만들어 봉안하니 대불과 더불어 만개로 일명 만불상이라고 한다. 9999개의 진신불상은 고승 대덕 2002 1 20( 128)에 개안하였다.

360개의 계단 위의 만불전에는 대불은 구리로 석가모니 좌상을 세계에서 제일 크게 만들었고, 아래 받침대 연꽃에는 시주자들의 이름이 새겨졌고, 올라가는 계단에도 시주자들의 명단이 새겨져 있다. 대불이 손바닥을 아래로 보여주는 것은 중생에게 복을 비는 것이고 고통을 해제하는 것이라 한다. 

 

 

                                                                          (사진: 남산대불 전경)

진신불상은 만불전에 모시고 불상 앞에 각 연꽃 등이 하나 있고, 매월 남산 철의 법사가 법문을 올리고 증여자에게 복을 기원해 준다.

모시는 액수로는 대불에는 년 2.800위안, 평생공양은  30.000위안이다.

남산 종교문화원은 불교를 위주로 하고 도교, 유교문화의 정수를 진, , , , , 원 등 중국의 역대 왕조의 유적과 함께 볼 수 있는 관광지이다.

불교의 화엄세계는 정면에 들어서면 넓은 광장 중앙에 연꽃상과 그 위에 부처님이 올라있고, 5개의 불전이 있으며, 좌측로에 원통의 불경이 14, 앞으로 40, 우측으로 14개 앞으로 40개를 합하면 108개이니 이는 백팔번뇌를 상징하는 것이다.

 

(사진:연꽃 분수대-부처상) 

 

부처님 계신 곳으로부터 크게 6계단에 나무아미타불 한자씩과 불경을 새기었고 나무아미타는 오르는 계단이 58개이고, 아래 불은 70개의 계단이다. 큰 계단 하나씩 올라와 한글자 마다 참배하고 오르는 곳이다.

남산대불은 남산 종교문화원에서 건곤청랑(乾坤淸朗), 국태민안, 성세행사 등 세상의 불교신자들을 위해 주조하였다 한다. 신자들이 불상을 모시는 것과 남산부처와 인연을 맺는 것을 환영하고 신자들과 같이 전통문화를 발양하기 위한 것이다.

a)    만불전: 남산대불을 주조하고 남은 재료로 만든 9999개의 진신 소불상과 대불을 합해 만개가 되어 만불전이라고 부르며, 이 부처님에게 공양시 이름을 부처서 모시는 것이 가능하다

b)    공덕전: 공덕전이란 불상에 돈을 헌납하는 사람을 올리는 전당이다. 천원이상을 기부한 사람은 전에다 이름을 올릴 수 있다. 그러면 남산 대법사가 증여자에게 복을 기원해 주며, 전내에는 별도로 항주 금성사가 제조한 124개의 불타를 포함한 31개의 금동공예 벽화가 있다.

c)    박물관: 남산대불 좌상 기반 아래 있으며 면적이 1800㎡이다. 인도 불교시기에, 중국불교 도입기, 성장기, 성숙기 와 생산기로 문자소개, 문물그림, 멀티미디어 등의 전시방식으로 불교의 역사. 기원, 전파, 변천 등을 전시하고 있다. 관내는 독특한 불교문화공간으로 고귀한 목조, 석각, 동불상이 전시되어 있다.

d)    사리전: 사리전에는 중국불교 3대 어계의 진귀한 문물 천여개를 전시하고 있다. 그 중에서 세계 각지에서 가져온 30여 개의 고승의 글씨 등이 희귀한 것으로 높이 3,5m, 넓이 1.6m 의 관음불상과 <양지 관음상>이 아주 정교한 것이다.  대금 사리탑과 6개의 금, , 사리탑 안에 있는 3대 어계, 고승들의 사리는 아주 희귀한 보물이다.

 

 

                                                           (사진:옥으로 만든 약사여래상)

 

가장 위에 있는 약사여래 옥불 상전은 미얀마산 옥으로 만든 조각으로 높이가 3.66m,중량은 66 톤으로 주위의 작은 일천개의 약사여래불도 모두 옥으로 만들었다.

 

 

 

 

10)    등주 고선 박물관(登州 古船 博物館)

 

봉래각 넘어 해자 건너 에 있으며 1990년에 건립되었다. 박물관밖에는 거대한 목선이 제작되어 박물관 오른쪽 언덕 위에 전시되어 있다. 이 박물관 안에는 1984년 봉래 해안가에서 발굴된 원나라시대의 목선이 원형대로 발굴되어 전시되고 있다. 이 배는 고려의 목선으로 14세기 고려 말 교역으로 고려 물품 등을 싣고 오다 해안가에서 파선 침몰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추정된 크기는 길이가 17.1m, 최대 폭 6.2m 의 선박으로 당시의 고려시대의 생활용품과 자기 등이 발굴 인양 됨으로서 고려시대의 중국과 교역자료로가 다양하다는 사실이 입증되고 있다. 

목선이 커서 목선 바닥, 앞부분, 꼬리부분으로 나누어 전시되고 바닥이 나무로 되어 정교하게 이어져있어 당시의 목선 제조술을 알 수 있다.

 

                                                       (사진: 고선박물관의 발굴 모형선)

 

 고선 1,2,3의 발굴과정과 제작시의 단면도가 나무로 만들어져 전시되었고 발굴 당시에 도자기에는 소라껍데기가 덕지덕지 붙어 있는 그대로 전시되어 침몰 후 많은 세월이 흘러 소라들이 도자기에 붙어 기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고선 박물관에는 당시의 등주 항의 역사가 시대별로 잘 정리되어 송, , 청 원나라시대를 거치는 동안 근대 항구로서의 역할이 시대별로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3.  유방시(坊市)- ()의 도시

 유방시는 이름도 삼국시대를 연상하는 도시다. 이 도시는 중국의 연의 제작으로 오래된 역사를 가진 곳으로 수많은 종류의 연으로 동양사회에 많은 영향을 미친 도시이다. 이 근처의 청주시는 고려시대의 유민인 이 정기”(李 正己)가 당나라에 들어가 안록산 의 난”(安祿山의 亂)  토벌군으로 크게 무공을 세워 평로치청 절도사가 되어 산동일대를 관할하여 10만 대군을 거느린 장수가 되었다. 이는 신당서에 그의 기록이 있어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그는 781 49세 때에 병으로 세상을 등지고 만다. 이 정기, “이 사도로 이어지는 그의 4대의 걸친 60여 년은 우리 역사에 알려지지 않은 묻혀진 사실이다.

 

a)   () 박물관

유방 시에는 연 박물관이 1987년 개관되어 외관도 연이 비상하는 형상을 하고 있다. 박물관에는 연의 제작이 오래 전부터 전래되어 내려온 역사를 고스란히 시대별로 전시하여 놓았다.

2500여 년 전 춘추전국시대의 나뭇잎으로 만든 연 부 터 종이 연을 거처 천으로 된 연까지 이르는 전 과정을 연의 종류별로 구분하여 전시하고 있다.

 

 

 

                                                           (사진: 나비연의 모습)

 

 

 

 

 

 

 

   b)      양가부 민속촌(楊家埠 民俗村)

 

양가부 민속촌은 웨이팡시에 1986년에 16 헥터에 이르는 대지에 건설되어 지금은 산동성 10대 관광지에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이 마을은 역사적으로 볼 때는 이미 600여 년 전에 생성 된 마을로 당시부터 연을 제작하는 기술이 발달하여 지금은 산동성 웨이팡 양가부 민속촌으로 부른다. 지금은 국가 4 A급 관광지구로 지정되었다. 우리 모두 어릴 때의 시절에 연이 하늘로 날아 올라가는 비상의 꿈을 실현하는 곳으로 중국 연의 원조 마을이다. 또한 적국적인 농업관광 시범마을로, 56개 민족의 특성을 가진 곳으로 이름나 있다.

 

 

                                                                   (사진: 양가부 민속촌 입구)

 

여기는 웨이팡 <> 양가부 세화의 고향이고 민속문화의 발상지이다.  이곳의 연 제작술은 뛰어나서 국가 비물질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양가부 연의 특징은 밝은 색 갈, 생생한 이미지, 우아한 모양, 섬세한 기술로 대표된다.

관광지구는 연과 세화유산 전시구역, 고촌 문화예술 전시 구역, 옛 거리, 민속 문화구역으로 나누어져 38개의 민속 명소가 있다.

양가부 민속 예술촌은 연 그림, , 민속화를 주제로 수공업이 발달하고, 연 박물관, 공장, 민속관, 고상점, 삼정거리, 고대마을 등 10여 개의 코스로 연에 얽힌 공예품, 민속품이 전시되어 있다.

입구에는 재물, 장수, 벼슬을 상징하는 3인상이 서있고 320호 마을의 민속촌으로 운영되는 곳이다. 연 그림, 목판에 그림을 찍어 전시, 판매하며, 특히 명대에 지은 400년 된 초가집이 있다.

 

 볼거리로는

1) 양가주방(楊家 酒坊): 양가부촌의 술도가로 큰 술통이 인상적이다

2) 항태서점(恒泰書店): 목판으로 옛날 책을 찍어내는 곳으로 당시에 만든 여러 책이 전시되어 있다.

3) 혼속관(婚俗館): 가마 등 당시에 사용했던 혼인식 도구와 혼수복등을 그대로 전시

4) 장공옥(匠工屋): 당시에 사용했던 농사 시에 사용했던 기구가 전시 보관되어 있다.

5) 약포(藥浦): 당시의 약국 안에 한약 장, 약 분쇄기, 약 설합, “날마다 황금이 한말씩 들어온다 <日金斗進>의 재미있는 한자표현이 그려있는 깃발이 있다.

기타 옛 세화 작방, 600년의 전승의 제작공예를 볼 수 있고 양가부 세화 박물관의 십팔여자연을 불 수 있다. 독특한 연 제작술의 전 과정을 참관할 수 있고, 현장 연날리기 공연도 개최되고 명나라, 청나라 시기의 양씨 사당, 청 나라 시대의 우체국, 명나라 시대의 옛 우물 등을 볼 수 있다.

 여기는 불교, 도교, 유교의 세 종교가 합해서 복을 비는 곳으로 관용원을 볼 수도 있다.

명나라 시대인 1619년에 지은 고택으로 지붕을 집 풀로 이은 것이 지금도 전해지며, 이 고택 안에는 도자기, 엮은 소쿠리, 술 항아리, 목판 인쇄기, 농기구, 혼인가마, 혼인 예복, 혼속 관, 쌀 풍구, , 되 등 당시에 사용하던 기구들이 보존 전시되어 있다.

 

 

                                            (사진: 약포 안에 <일금두진> 한자 모형)

 

 나오면서 보는 양가부 연화박물관”(New year painting Museum)에는 동, , 남으로 3개의전시구역에 세화(연화) 기원, 역사, 예술 특성, 제작공예, 중국과 외국의 영향을 소개 하였다. 박물관 구조는 고대 건축식으로 이중문 사합원이며 구내는 1200㎡이다.

 

 

 

 

 

 

 

 

 

4.       치박()인구 30만의 2500년전 제나라 수도

  ()나라의 80년간의 수도로서 산동성 중부, 제남의 동쪽에 위치하여 고대 유물이 대량 발굴되어 세상 을 놀라게 하였다.

 서안의 병마용 갱보다 100여 년 이나 오래되었다는  <동주 순마갱> <고차 박물관>과 제니라 국왕이었    던  <강태공>의 발자취가 남아있고, 또 중국의 4대 도자기 제조 도시로서 명성이 높다.

 

a)   말 순장관(殉葬館)

 

1982년 고속도로 공사 시 지하에서 발굴된 말들의 화석과 당시에 타던 마차들이 함께 출토되어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2600여년 전 제나라 25대왕 제경공이 애마와 생전에 키우던 말을 마차와 함께 묻어 버린 곳을 발굴한 곳으로 처음에 1982년 에 순장된 말 106마리가 마차와 함께 발견 되었다. 추정에 의하면 말은 대개 7년 정도 된 숫 말들로 마차와 함께 순장된 것으로 보인다. 이 근방의 지형과 순마갱의 규모로 보아 600필 이상의 말이 순장된 것으로 보이나 발굴은 현재 여기서 멈추어 있다. 현재의 고분은 길이가 46.5m자의 구도로 되어있다.

 

 

                                                       (사진:발굴된 마차와 말의 화석)

 

 여기서 발굴된 순마갱은 서안의 병마용보다 100년이나 앞선 것으로 보이며 제나라 왕족에 무덤에 600여 필이나 되는 숫 말이 안장된 것으로 보아 당시의 제왕의 권력이 어느 정도 였는 가를 짐작할 수 있다. 이 순마갱은 현재 앞뒤로 84m, 228 마리에 이르는 부분만 발굴하여 전시하고 있다.

마차 바퀴와 차축, 말머리, 말 가슴뼈, 다리 등이 화석화 된것으로 출토, 특히 말머리 장식, 말 재갈 쇠붙이가 달린 말머리 등이 출토되어 있다. 당시에 이렇게 큰 재물을 땅속에 묻는다는 것은 부유함을 의미한다는 시대였다.

 제나라는 이곳에서 소금이 생산되고 곡식이 많이 생산되어 당시에 강국으로 군림한 나라이다.

 

 

 

      b)  고차 박물관(古車 博物館)

1990 5월 제남(濟南)에서 청도로 이어지는 고속도로 건설 공사 중 발견된 것을 정리하여 박물관으로 탄생시켰다. 이는 중국에서 10대 고고학 발견 중 하나로 간주되며 당시의 마차가 운송수단으로 말과 더불어 중요시한 것으로 당시에 발견장소인 고소도로 지하에 지하 박물관으로 만들었다.

 기원전 400년경인 춘추 전국시대에 사용된 전차와 수레, 그리고 순장된 말이 함께 묻혀있는 차마갱과 순마갱을 함께 볼 수 있게 만들었다.

마차와 말이 발견된 제 1 갱은 길이가 32m, 폭이 5m 10개의 마차와 32필의 말이 발굴되었고, 2 갱은 길이 8m, 3m 3개의 마차와 6필의 말이 매장되어 있었다.

 그 후 발견된 마차들의 전시도 함께하고 있다. 1 순마갱에는 말의 머리가 모두 한 방향인 서쪽으로 향하고 있다.

 

 

                                                                 (사진:  진나라 시대의 황제 마차)

 

 고차 전시관에는 체계적으로 서주, 춘추전국시대, 한나라시대, 진나라 시대, , 송 시대의 임금의 행차 시 마차를 위시한 신하들의 행렬이 그림으로 그려 전시되어 있어 우리나라 조선조 정조시대의 <반차도 행열>과 흡사한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당시에는 말과 소가 끄는 마차 등이 호화롭게 장식되었고, 황제는 옥마차, 금마차, 등을 타고 그 외에 상아마차, 가죽마차, 나무마차가 전시되어 있다. 밖으로 나오니 돌 비석에는 도연명 <장진주사> 한시가 5편이 새겨져 있다.

 

 

 

 

 

   C) 제나라 역사박물관

제나라 고성의 궁성 유역지와 문화를 체계적으로 전시하여 주고 있다. 고대 만리장성보다 먼저 건립된 제나라 장성을 본뜬 모양의 성보식으로 지은 건축물로 제나라 800년의 전모를 보여주고 있다. 서주, 춘추전국시대, 진한시대 등 5개의 진열관과 특별전시실에는 제나라의 유물 300여 졈이 전시되어 있다. 그 중 에서 전국시대의 <금은상감동제 술잔>은 고대 제나라의 공에술의 높은 수준을 보여 주고 있다.

 

                                                     (사진: 상감 동제 술잔)

  

 

 

 

 

 

                           

                                           (사진: 제나라 때 축구의 시초가 된 공 모습)

 

 

 

 

c)  강 태공(姜太公)묘와 사당

 

 치박 시내에 잇는 강 태공 묘는 중국의 아주 전통적인 묘 건축물이다. 강 태공은 주나라 초기의 공신으로 무왕을 도와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평정하여서 제나라의 시조가 되었다.  강태공이 죽은 후 주나라 무왕의 능 옆에 묻었다.  강태공 사당은 치박시의 유일한 도교 사원으로 내부에는 6개의 정원이 있다.

 강 태공 시대에는 그의 후손들은 장남만 강씨 성을 따르고, 둘째 아들 부 터는 다른 성을 가질수 있어, 丘씨, 盧씨, 崔 씨 등이 그의 후예로 한국의 성씨가 강태공의 후예들에게서 유래된 것으로 이곳에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세운 기념비가 서 있다. 구씨 종친회, 특히 노 태우 대통령이 세운 비석이 있다.

 

 

 

 

                                              (사진: 강 태공 사당안의 태공모습)

 

 

 

5.  태안(泰安)-명산 태산을 품고 있는 도시

태안은 산동의 성도인 제남, 공자의 고향인 곡부, 도자기의 도시인 치박과 인접한 도시이다. 태안은 중국의 5 악 중 하나인 태산(泰山)이 자리잡아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명승지이다.

또 역대 중국의 황제들이 태산에 와서 국가의 안녕을 기리기 위해 천신을 만나기 전에 하늘에 제시를 지내던 대묘()와 신석기 유적 등 수 많은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a)   대묘()

 대묘는 태산 남쪽 기슭인 태안시에 자리잡고 있다.  이는 고대 황제들이 천신을 만나러 태산에 오르기 전에 봉선의식으로 신에게 참배하기 위해 오는 장소였다. 대묘의 건축은 진나라, 한나라에서 시작되어 당, , , 청의 황제 72명이 의식을 거행한 장소 이다. 대묘은 여덟 개의 문과, , 큰 방을 갖춘 사원이다.

 사원 내에는 수 백 년 된 옛날 나무인 비자림이 300여수가 있다. 이는 한나라, 당나라 시대에 심은 것으로 추정된다.

입구에 있는 천황전(天皇殿) 1008년 북송 대에 지었으며 자금성의 태화전, 곡부의 대성전과 더불어 중국의 3대 건축물의 하나이다. 천황전은 이곳에 있는 여러 건축물이 더불어 1987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사진: 대묘 전경)

 

1)     건융제 황궁: 워나라때에 건축되어 영빈당(迎賓堂) 이라 불리었고, 청대 건융 년간에 재건하여  주필정(蹕亭)이라 불렸다. 태산이 현재 유일하게 보존된 건융 황제의 행궁이다.

2)     진태산 각석(秦泰山 刻石): 기원전 219년에 전각하여 진시황이 봉선시 행사를 할 때 세웠다. 승상 이 사”(李 斯)가 글을 지었다. 지금 까지 남긴 글 중 10자만 남았는데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각석이다.

3)     한백연리(漢栢連理): 연리백 이라고도 불린다. 한무제가 심었다는 것으로 수경주”(水經注)에 기록되어 있다. 지금까지 2100 여 년의 세월이 흘러온 터라 한백은 대묘의 상징적인 나무다.

4)     선화중수 태악비(宣和重修 泰岳碑): 송나라대인 휘종(徽宗) 선화 6 (1124)에 세운 비로 비문에는 송 휘종이 재위 20여 년간에 대묘를 증축한 기록이 써 있다.

5)     인안문(仁安門): 인안은 仁者安人이라는 <논어>에서 나온 말로, 원 나라 대에 창건하여 명, 청 시대에 재건. 전각안에는 천용(天龍)과 지아(地啞)의 두신을 모시었다. 양쪽에는 동서신문(東西神門)이 있다.

  

 

 

                                                                 (사진: 한백 연리의 모습)

 

 b)  태산(泰山)-1545m 

 중국의 5대 명산중의 하나로 도교에서 신선이 산다고 하는 성산이다. 중국인이나 중국을 방문하는 사람은 누구나 태산을 오르고 싶어한다. 7412개의 돌계단을 올라가면 정상의 신비로은 풍경은 누구나 감탄을 자아낸다.

예로부터 진시황 이후 72명에 이르는 황제들이 이곳에 오르기 전에 대묘에서 제사 지내고 이곳에 오르는 봉선의식을 한 후 태산 옥황산 정상에 오른다. 이곳에 올라 천하가 태평하다는 제전의식을 거행하였고, 또한 당대의 거인인 두보(杜甫), 이 백(李 白) 등이 이곳에 글씨를 남기어 후대에 전해오고 있다.

생전에 공자도  태산에 오르니 천하가 작아 보인다고 시를 남기었다. 도교 성지인 벽하사를 비롯해 공자사당 등 57개의 사찰이 있으며 산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 자연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태산에는 정상에 옥황정(玉皇亭)이 있고 동쪽으로 일출명당인 일관봉(日觀峯)이 있다. 태산에는 곳곳에 22개나 되는 고전 건축물이 산재해 있으며, 12개의 석방, 7개의 돌로지은 정자 등이 있다. 

 

 

               (사진: 태산 정상 비석-주위에는 행운의 자물통이 매달려 있고)

 

태산에는 2200개의 돌에 조각을 한 경전이 있어 마애석각 박물관이라 불린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태산의 진각석, 한나라 장천비, 형방비, 당 현종의 태산시 등 셀 수 없이 많다. 이름있는 봉우리만도 112개이고 계곡이 102곳이나 되는 아주 깊은 산이다.

1500m대의 옥황정, 일관봉, 월관봉, 자인봉, 상비봉 등이 있으며, 벽하사, 옥황묘, 첨노대, 선인교 등의 명승지도 있으며, 운무속에 일출을 보는 것은 평생의 소원을 이루는 일이다.

태산의 명소를 몇 군데 안내해 본다.

1)     천가(天街): 천문관위에 위치하여 서쪽으로 남천문이 있고, 동쪽에 벽하사가 있어 전체는 600m이며 천상의 세계로 비상하는 느낌을 준다.

2)     벽하사(碧霞寺): 벽하영궁이라고도 하며 송나라 때 지었다. 벽하운군의 불상사이 모셔져 있으니 중국 도교의 창시자이다. 기세가 당당하여 중국의 산악 건축물의 걸작으로 평가 된다.

3)     청제궁(靑帝宮): 조성연대가 불명하나 경내에는 청제의 불상이 모셔져 있다. 청제는 중국동방의 신으로 사람의 생존을 주재한다. 송나라 진중황제가 태산을 등산 했을 때 청제를 광생제군으로 동봉하였다.

4)     일관봉(日觀蜂): 일관봉은 정상에서 전망이 제일 좋은 곳이다. 이곳 정상에서의 전망은 탁트이고 아름답다. 하늘과 바다가 맛다아 보이고 아침 해가 뜨는 광경은 천하 제일의 명품이다.

5)     무자비(無字碑):무자비 비각은 문자 그대로 글자가 하나도 없다. 비신은 사각형 기둥이며 높이는 5.2m이다. 한나라 한무제 때에 세운 것으로 태산에 올라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상징되고 있다.

6)     옥황묘(玉皇): 옥황묘는 예전 부 터 태청궁 옥제관이라고 불리어 왔으나 만들어진 연대는 알 수 없다. 옥황대제의 불상이 모셔져 있어 한 복기사망유품이라는 시가를 썼다. 고대 제왕들이 여기서 나무를 불태우며 하늘에 제사를 지냈었다.

7)     태산 정상:  태산 정상에는 사당이 있으며 사당안에는 옥황대제가 모셔져 있고, 그 앞으로는 마당에 정상비가 세워져 있고 비석주위로는 울타리에 행운의 자물쇠가 빼꼭차게 매달려 있다. 

8)     공자묘(孔子廟): 공자묘는 공자의 불상이 모셔져 있으며, 명나라 가경 년간에 만들어 졌으며 입구의 현판은 한 복기의 친필로 써져 있다.  남쪽에 만오성석이라는 곳이 있으며, 공자님이 태산 정상에 올라 오()나라를 보았던 곳이다.

 

 

 

                                           (사진; 태상 정상으로 오르는 좌측에 공자묘)

 

 

  

                                        (사진: -태산의 천하대관 석각--공자 석각)

 

 

 

 

6.          산동성 제녕(濟寧)시 곡부(曲阜)

공자와 맹자의 탄생지

 

산동성 서남부의 제녕시는 공자(BC 551~479)가 탄생한 곡부와 맹자가 탄생한 추성(鄒城)이 자리집고 있는 곳이다. 동으로는 도교의 성지 태산이 솟아있고, 서로는 문명의 발상지인 황하(黃河)가 흐르고 있다.

명나라, 청나라시대에는 산동성에서 가장 큰 도시로 발전하였다.  특히 곡부는 춘추전국시대 노나라의 도성이었고, 2200년 동안 중심지였다. 추성은 공자와 함께 성현으로 추앙되는 맹자의 탄생지로 무려 3000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공자와 맹자와 그를 따르는 수 많은 제자뿐 아니라 역대 왕인 진시황을 비롯한 두보, 이 백 등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글과 비석, 석각을 남기었다.

 

a)맹묘() –공자를 계승한 맹자사당

 

맹묘는 곡부에서 25km 떨어진 추성현에 있는 맹자의 사당이다. 공자와 더불어 유교의 대사상가, 교육자, 정치가로 불리면서 공자학을 계승한 성현이다.

맹자(BC 385~304)는 주나라 안왕 17년에 태어나서 사왕 11년에 세상을 떠났다. 맹자는 노나라 귀족인 맹 손씨의 후손으로 孟母三遷之敎라는 고사에서 보듯이 어머니의 철저한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맹자는 공자를 숭배하고 공자의 손자인 자사에 의해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사람이 태어난 이래 공자보다 성현은 없다라는 말을 하였다.

 

 

 

 

                                                                   (사진: 맹묘 입구 전경)

 

맹묘는 1988년 중국정부로부터 국가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맹묘에는 진나라 대 부 터 청나라에 이르는 기간에 새겨진 비석이 280여 개나 보존되어 오고 있다. 비석의 내용은 역대의 제왕들이 맹자를 칭송하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맹자는 나라와 백성의 근본에 인,,,(,, ,) 4 단론에 근거를 두고 후세의 제왕들을 일깨우고 있다.

맹묘에는 모교일인(母敎一人)을 비롯한 비석과 강희비정(康熙碑亭),맹부비각(孟府碑刻),맹자의 아버지를 모신 계성전(啓聖)이 남아있다. 맹자의 사당 몇 곳을 안내해 본다.

 

     1)     아성묘(亞聖廟) :

주변에 회랑이 들러져 있으며, 전체가 푸른색의 기와로 덥힌 건축물로 높이가 17m이다. 이 건물은 송나라 때인 1037년에 처음 지어 졌다. 현재의 건축물은 1715년 청나라 때에 재건축되었다.

아성묘는 남,북 중심축으로 5개의 영역으로 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큰 건축물과 많은 비석, 오래된 나무들이 들어서 있다. 이곳에는 370 여수의 오래된 각종 나무들이 들어서 있다. AD 1121년 북송 년간에 심은 것으로 보아 대체로 900년 이상의 수령을 자랑하는 목향나무,삼나무가 주종을 이룬고 있다.

2)     아성부(亞聖府)

맹자와 그의 자손들이 살던 곳이다. 명나라 때에 크게 건축되었다. 그 면적은 2100㎡나 되고 3 개의 축으로 된 200여 개의 방이 있다. 중요 건축물은 중앙 축에 있으며, 대당(大堂), 세은당(世恩堂), 후상방(后上房) 등이고, 내택문을 지나면 2개로 나누어 졌다. 전면에는 접견실이고 후면에는 내실이 있다. 세은당에는 맹부의 74세손까지 사용했던 가구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3)     중국인민대학 국학원(中國人民大學 國學院)

맹묘에 있는 교육기관으로 산동지역의 유학연구 중심지이다. 철저한 도제 중심의 교육이 행해지고 있다.

 

 

 

                                                         (사진: 아성전 전경)

 

b)공자사당-공묘(孔廟),공부(孔府),공림(孔林)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1994년 지정)

 

공자사당은 원래는 지성보라 불리었다. 공자에게 제사 지내고 유학자들을 표창했던 사당이다. 공자는(BC 551~479)는 중국고대의 사상가이자, 정치가, 교육자였다. 공자가 창시한 유교학설은 봉건사회의 지표이다. 그리고 조선, 일본, 베트남 등 당시에 주변 동남아 국가에 큰 영향을 미쳤다. 공자의 위업을 추앙하기 위해 역대 12명의 황제가 곡부에 직접 와서 제사를 지냈다. 그로 인해 공자의 제자와 역대 유학자 172명을 사당에 배향하였다.

곡부는 중국정부의 24개 역사도시 중 가장 큰 곳이다. 공자사당은 공묘, 공부, 공림의 명칭으로 나누어져 국가 5A급 유적지로 지정 후 1994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곡부에는 209곳의 기념물과 유적을 가지고 있고, 그 중 6개는 국가 급, 21개 곳은 지역 유적이고, 40곳은 시급이고, 142곳은 군 급의 유적지이다.

또 곡부에는 1300여 고 건축물, 만여 개의 각석, 10만개의 묘, 박물관에 전시된 11만 점의 유물들이 있다.

곡부의 공자 사당은 중국에서 가장 오랜 사당이다. 기원전 478년에 공자가 살던 집을 사당으로 만들었다. 면적은 약 14만㎡이고 남북 길이 1300m, 너비가 650m이다. 남북으로 이어지는 문이 연결되고 정원이 9개이고, , , , 청 시대에 지은 건축물이 100여 개이고 방은 460 여 개 이 이른다. 세계 도처에도 공자사당이 2000여 개가 있다.

 

                                                 (사진:공자사당-양 옆에 용문양의 돌기둥)

 

 현재 이곳 사당 안에는 역대를 거치면서 세운 석각(Stone Inscription) 1000 개나 보존되고 있다.  그 중 한나라, 위나라, 육조 시대의 비석이 있고 특히 한나라 때의 화상 비석과 청나라때의 용문양 돌기둥은 가장 유명한 유산이다.

유네스코 유산으로 지정되면서 과거의 공자 사당은 공묘(사당-제사를 지내는 곳), 공부(자손들이 살아온 장원, 공림(공자를 비롯한 가문의 묘군)으로 구분되어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가는 곳이다.

  1) 공묘(The Temple of Confucius)  “The First Temple under Heaven”으로 불리고 중국에서 제2 의 고 건축물의 지역이고 2000년 이상을 지속하여 오고 있다.

    2) 공부(The Kong Family Mansion) “The First Family under Heaven” 으로 불리고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가족의 저택이다.

    3) 공묘(The Cemecery of Confucius)는 공자와 그의 후손들의 묘역으로 가장 오래되고 큰 가족 묘원이다. 그리고 수많은 전설과 황제들과 유명시인의 시가 각석으로 남아있다.

 3부분으로 나누어 중요한 곳을 아래에 간단히 다루어 본다.

 

1)공묘(The Temple of Confucius)

1)     금성 옥진방(金聲 玉振坊)<Golden Sound and Jade Vibration Gateway>

이곳의 문은 명나라(1538)떼에 건립되었다. “위대한 사상과 음성은 금이고 옥처럼 소리가 난다공자는 그의 가르침을 종합하고 결론으로 유도한다. 이는 공자의 사상은 모든 성현들의 종합적인 표현을 의미한다.  문 위의 연꽃새김은 악령을 물리치는 의미이고 문 뒤의 아취형 돌다리가 있고 이것은 1677년 청대에 강희제 때에 만들어 졌다.

2)     경성문(星門)<Ling Star Gate>

이 문은 1415년 명대의 세워졌고 1754년 청 나라 때에 재건축 되었다. 고대 중국인 들은 공자의 대한 존경심이 하늘과 같다고 믿었기에 이곳에 제물을 바치었다.

 

 

 

                                                              (사진: 경성문 전경)

 

3) 태화원기방(太和元氣坊)< The Gate od Great Harmonyand Vitality)

명시대인 1544년에 건축되었고 비문은 산동성장이 섰다. 그것은 공자사당의 영원함을 상징하고 모든 것은 우주와 같이 윤회한다는 의미이다.

4)성시문(聖時門)<The Gate of Adaption to Times>

명나라  때인 1415년에 건립. 1730년 청나라 때에 개축되고 황제가 성시문으로 명명. 그 이름은 맹자로부터 나왔으나 공자가 시대를 초월하는 성현(Sage)이라는 의미이다.

5)대중문(大中門)<The Great Middle Gate>

공묘의 네번 째 문으로 진나라 때 처음 건축. 이 문은 송나라 이전에는 공묘로 가는 첫번 째 문 이었다. 후에 명나라 때 재건축되고 현재의 문은 청나라 때의 것이다. 문은 5칸에 3개의 문이 나 있고 처음에는 중화문(中和門)으로 명명되었다가 그 후 청나라 건융제 때에 대중문으로 바뀌었다.

6)     규문각(奎文각)< The Kuiwen Pavilion>

송대인 천희 2 1018년에 처음 건축되었고 당시에는 서교루로 사용되었다.그리고 1191년 청 건융제때에 재건축하여 황금색 지붕을 언지면서 규문각으로 명명, 황제들이 글씨를 쓴것을 전시 보관하였던 곳이며 목조로 된 중국 최상의 건축물이다.

7)     대성문(大成門)<The Gate of Intergration-Da Cheng Men>

송나라 시대인 1104년 숭정 3년에 최초로 건축. 5개의 문이 있고 가운데 문은 대성문(통합의 문)으로 공묘에서 7번째의 문이다. 지붕은 금색 기와로 되었고 대성(Da Cheng)이란 맹자가 공자를 보는 시각이다. 즉 공자가 모든 훌륭한 사람들을 아우른다는 의미이다.

8)     선사수식회(先師手植檜)<The Juniper planted by Master>

대성문 안쪽 돌계단 동쪽의 나무로 공자가 직접 심은 나무로 전해 온다. 화재가 여러 번 있었으나 오늘날의 노간주 나무(Juniper)는 청나라 옹정 10(1732)부터 전해져 오고, 나무 오른쪽에 명대에 새긴 비석이 남아있다.

9)     대성전(大成殿)<The Hall of Intergration>

대성전은 공묘에서 가장 중요한 건축물이다. 규모는 동서길이가 45.78m, 남북 24.89m 이고 높이가 24.8m이다. 이곳에서는 당나라 시대부터 5개의 방이 있고 文宣王殿이라 불리었다. 1021년 송대에 재건하면서 현재처럼 7개의 방으로 확장되었다. 1104년에 송나라 휘종때 <대성전>으로 명명되었다. 그 후 대성전은 1724년에 청나라 오종황제 때 황금색 기와로 덮고, 가장 큰 성전으로 가운데에는 황제의 친필이 있고, 공묘 건축물 중에 가장 높은 것이다.

 

 

                                                                    (사진: 대성전  전경)

 

10)   침전(寢殿)<Hall of Bedroom>

대성전 뒤에 자리잡고 공묘에서 2번째의 큰 건물이다.  공자의 부인의 제전이다. 1018년 송나라 천희 2년에 건립되었고 1500년 명나라 홍치 13년에 중건 되었다.

 

2)공부(孔府)<Resident of the Confucious>

공부는 1038년 에 지어진 곳으로 공자의 자손들이 대를 이어 살라온 곳이다. 공묘의 동쪽에 위치하고 영어로 <The First Family in the World>로 표현 되었다.  공부의 저택은 중국의 정통주택과 중국 봉건사회의 사저를 결합시킨 건축물이다. 즉 공부의 서로에는 객실,동로에는 가문의 묘지가, 중로에는 관공서가 있으며 그 뒤로는 주택과 정원으로 나누어져 있다. 공자 사후 그의 후손들이 살면서 보호하였다. 북송 말기에 그의 후손들은 사저를 크게 확장하고 진시대에는 그의 후손들이 사당 동쪽에 살았었다.

그 후 저택은 송, , 청대에 내려오면서 여러 차례 개조 되었다. 오늘날 공부는 크게 늘어났고 동서 통로 양쪽으로 9개 구역에 480개의 방으로 확대되었다.

1)     성부대문(聖府 大門)<Gate of the Residence of the Saint>

3칸과 다섯개의 도리가 달린 형태다. 문의 한가운데에는 명대의 임금 “Yan Sing”가 쓴 聖府라는 현판이 달려있다. 문의 양쪽에는 성현을 표현하는 싯귀를 쓴 현판이 달려있다,

2)     삼당(三堂): 공부의 관아는 삼당으로 나누어 졌고 정원이 달려있다.

a)    대당: 저택의 메인 홀로 공무를 보던 관서로 의식을 행할 때나 관리들을 맞이하던 곳으로 연성공이 자리를 비울때는 대당을 닫는다.

b)    이당: 차를 마시던 방으로, 동쪽의 방은 공문서룰 주고 받는, 서쪽의 방은 집무실로 쓰였다. 벽에는 詩書禮樂이라는 현판과 비각이 있다.

c)    삼당: 연성공이 가족내부의 가정사를 보던 곳으로, 동쪽에는  손님을 맞이하던 방이 있고 서쪽에는 글씨를 쓰던 방이다.

 

 

 

                                                           (사진: 공자상과 각종 글씨)

 

 

3)     규루(奎樓)<The Kui Tower>

명대에 4층 벽돌로 쌓은 탑으로 저택에서 가장 높은 곳이다. 아래층에는 뚜껑이 덥힌 3m 깊이의 우물이 있으며, 탑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다.  이 탑은 예기치 않은 일에 대비한 피난처였고 실제로는 공부의 창고였다.

 

4)     후당루(后堂樓)<The Back Hall Tower>

후당루는 연성공의 여성 가족들이 살던 곳으로 7개의 방의 2층 건물은 실제로는 공자의 77대 공덕성(孔德成)의 저택이었고 주 건물 동서로 5개의 부속방이 있다. 공덕성의 어머니 침실과 혼방(婚房)도 있다.

 

 

                                                         (사진: 후당루 전경)

 

또 옆의 후동루는 여자 노비가 자는 곳이며, 후서루는 연성공 부인의 친정사람들이 오면 기거하던 곳이다.

기타 홍악헌()은 연성군이 손님을 맞이하고 공부하고 시를 짓는 곳이었고 모두 70여 개의 방이 있다. 후화원(后花園)은 명대에 만든 정원으로 여러 가지 아름다운 꽃과 허브식물,거대하게 다섯 개의 가지로 자란 삼나무가 눈길을 끈다.

 

 3) 공림(孔林)<The Cemetery of the Sage>

곡부시 북쪽에 자리잡은 공자가문의 묘역으로 길이 5.6km, 1~3m 폭의 담으로 둘러 쌓여 있는 묘원으로 4000 기가 넘는 묘와 비석이 있다. 그리고 10여 만 그루의 나무들이 기득하다. 공림이야 말로 세계에서 가장 큰 가족 묘역이다. 1961년에 국가문화유적으로, 1994년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되었다.

1)   만고장춘(萬古長春)<The Everlasting Green Archway>

1594년에 지은 문으로 곡부에 현존하는 가장 큰 석조 아치식 문으로 양쪽에 공림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이문을 들어서면 공림으로 가는 삼나무길이 이어지고 있다.

 

 

                                                  (사진: 공림으로 들어가는 문)

2)   지성임문(至聖林門) < The Gate to the Saint>

. 이곳으로 들어가면 공자묘로 가는 삼나무 길로 묘도이다. 공림은 이 문 양쪽부터 담으로 둘러 쌓여 있다.이 문은 주문과 양 옆에 아치식 문이 붙어 있다. 사자상이 양쪽에 있고 주문은 연나라 시대, 아치식은 1494년인 명나라 시대에 건축되었다

3)  공자묘(孔子廟)<Mausoleum of Confucious>

공자가 73세에 죽었을 때 그의 제자들이 그를 묻었다.  그의 영묘는 진, , 대 까지는 평범한 묘지였다. 묘비의 글은 1448<Huang Yangzheng>가 썼고 뒤 비석의 글자는 1244년 몽골의 황제가 쓴 것이다.

4)  개정()<Jie Pavilion>

 누각으로 공자의 제자 자공(子貢)이 처음에는 나무로 지었으나 1712년 강희제 때 돌을 나무형태로 세우고 누각을 지었다.

5)   공리묘(孔鯉墓)<Mausoleum of Kongli>

공자의 아들 공리(BC 532~483)묘로 공자의 영묘 동쪽에 있다.

 

 

 

                                                      (사진:- 공자의 영묘, -아들 공리의 묘)

 

 

7.무씨사당 석실(武氏祠堂石室)

 

무씨 사당 석실은 산동성 가상현 남쪽 자운산 아래에 있다. 지금의 무씨사당은 청 나라 건률제 51(1786) 황역(黃易)이 하수의 범람으로 땅속에 묻혔던 것을 발굴하여 복원한 것이다.

 무씨사당의 석실이 만들어진 연대는 건화 원년(147)으로 추정되며 3개의 석실이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사당내의 화상석(畵像石)에는 중국의 삼황오제(三皇五帝)를 비롯하여 충신, 효자, 의사, 절부 등의 사적을 새기고 고대어로 설명이 새겨져 있다.

 당초에는 3개의 석실이 있었던 것이지만 복원 과정에서 한 개로 만들어 졌다. 사당내부의 벽에는 총 26개의 화상석이 복원되어 있다. 화상석에는 내용설명이 있으나 산해경(山海經) 등의 문헌을 통해 그 의미를 해석해 볼 수 있다.

 

 

                                                       (사진: 무씨사 연구 연표 와 후석실 화상석 3 )

 

 우리나라의 김 재원 박사는 그의 저서 <단군신화의 신연구>에서 무씨사당 석실의 후석실 화상석 2~3석이 <삼국유사>에 나오는 단군의 고사를 재현하고 있다고 연구논문에 기술하고 있다.

 

 8.제남시의 명소-표돌천

 제남시 중심에 있는 샘터로 72개의 광천수가 솟아나온다. 춘추 전국시대부 터 녹수라고 불러 왔다.

 이 곳의 샘은 18도 정도의 온도를 유지하며 땅속에서 솟아오르고 있다.

 청대의 건륭제가 이곳에서 물을 즐겼다고 하며, 물속에는 여러 종의 물고기와 물개가 서식하고 있다. 

 

                                                                   (사진:표돌천 전경)

 산동성의 성도 중심에 자리잡아 한 개의 강, 호수, 3개의 샘(표돌샘, 검은 호랑이 샘, 다섯마리의 용샘) 4개의 공원을 포용하고 있으며 넓이는 3.1㎢이다. 천연의 샘과 오래된 역사를 지닌 경치는 샘의 도시로서 제남의 자랑거리이며,, 청 대의 고 건축물, 회랑 등이 조성되어 있다. 가을이라 지금은 국화 전시회가 함께 열리고 있어 수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에필로그

  산동성 위해에 상륙하여 일주일간을 버스로 이동하면서 우리 신라 시대의 명장인 장 보고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삼국시대에도 신라인이 외국에서 무인으로 용맹을 떨첬다는 역사적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일찍이 당나라에 건너가 군문에 들어가 안사의 난을 평정하여 무녕군 소장이 되어 당시에 당나라로 건너간 신라인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고, 법화원을 설립하고, 불교를 전파하고, 신라인들을 위해 신라방을 설치하여 신라인을 보호하였다.

 그 후 그는 신라에서 잡혀간 노비의 비참한 처우에 사직하고 귀국하였다. 해적들의 인신매매를 근절시키기 위해 왕의 허가를 받아 1만 여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청해진, 즉 지금의 완도에 진을 설치하고 청해진 대사가 되어 해적을 소탕하였다.

 

                                                               (사진 : 법화원에 장 보고 장군상)

 

그러나 서기 837년 신라 희강왕 3년에 왕위 계승에서 밀려난 우징 (후에 神武王) 청해진으로 오자 다음 해에 우징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서 839년 민애왕을 죽이고 우징을 왕으로 옹립하니 그로 인해 신라 조정에서 감의군사(感義軍使)가 되었다. 신무왕이 죽고 다음에 문성왕(文聖王)이 즉위하자 그는 진해(鎭海) 장군이 되었다. 그는 그의 딸을 왕의 차비로 삼으려 하였으나 군신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로 인해 문성왕 8년 장 보고 세력의 불안을 느낀 왕은 조정에서 자객 염장을 보내 그를 살해하였다.

그로 인해 그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막을 내리고 천년 전에도 역시 권력이란 무상하고, 세력 다툼에서 패하면 죽음이라는 우리 역사의 교훈을 생생히 후세에 전해주고 잇다.

그 외에도 이 정기 장군, 고구려 시대의 실크로드의 고선지 장군 등 우리나라 역사의 인물들을 재조명해 보는 기회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울러 가까운 바다 건너지만 신라인들의 얼을 다시 한번 조명하는 계기가 되었다. 

 다음 공자에 대한 연구를 보면 그의 문하(門下)에서는 걸출한 대학자가 무수히 배출되었는데, 육경(六經)에 통달한 이만 해도 무려 7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들을 가리켜 '칠십자(七十子)'라고 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학식이나 덕망, 재능이 출중하여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남긴 열 사람의 제자를 가리켜 '공문십철(孔門十哲)'이라고 한다. 이들은 안회(顔回), 민자건(閔子騫), 염백우(冉伯牛), 중궁(仲弓), 재아(宰我), 자공(子貢), 염유(冉有), 자로(子路), 자유(子有), 자하(子夏) 등이었다.

특히 제자들 중 안회(顔回)의 학문과 덕이 가장 뛰어났다. 이는 스승인 공자와 동문 선후배 등이 모두 인정하는 바였다. 그러나 안회는 스승인 공자보다도 먼저 세상을 떠나 그를 크게 상심시켰다. 그의 학통을 후대에 전한 인물은 증자와 자궁(子弓)이었다.

덕행(德行)으로는 안회(顔回), 민손(閔損), 재백우(再伯牛), 중궁(仲弓)이며, 언행은 재예(宰豫), 자공(子貢)이며, 정사(政事)에는 자유(子有), 자로(子路)이고, 문학(文學)에는 자유(子游)· 자하(子夏)이다. 그 외에도 증자(曾子), 자장(子張), 자궁(子弓), 유자(有子) 등이 있다.

이들 중에서 증자는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를 가르쳤고, 훗날 맹자(孟子)가 자사에게서 배웠으니, 맹자학파는 증자가 배출한 셈이다. 자궁의 제자들 중에 한 분파는 순자한비자로 이어졌고 이는 법가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만년에 공자는 아들과 아끼던 제자들을 잇따라 잃고 상심에 빠져 공자는 고향인 곡부로 돌아와 후학 양성으로 만년을 보냈다.

공자는 만년 들어 자신의 삶을 반추하며 말하기를, "나이 열다섯에 학문의 길로 가기를 마음 먹었고, 서른에 이르러 세상에 나의 존재를 알렸으며, 마흔에는 어떤 일에도 미혹됨이 없었고, 쉰에 이르러서는 하늘의 뜻을 모두 알았으며, 예순에는 모든 일에 대해 순리를 알 수 있었고, 일흔에는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

(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

 

                                                      ( 사진:  공자 책속의 공자상)

 

공자는 72세가 된 해인 기원전 479에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승하하였다. 공자가 세상을 떠난 후 제자들은 스승이 남긴 말씀들을 모아서 《논어》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그리하여 공자의 가르침은 그의 사후에도 수 천년 동안이나 이어지며 중국을 비롯하여 이른바 중화사상”(中華思想)의 국제 질서에 속한 동아시아 대부분 국가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규범이 되었다. 또 공자는 세계 4대 성인 중 한 사람으로서 오늘날까지도 동,서양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 인류의 영원한 스승으로 추앙받고 있다.

 

우리가 머무는 산동성에서 일기는 하루를 제외하고는 매일 흐리거나 가는 비가 오고, 주말이라  인파에 쫓기고 이번 여행의 하일라이트인 산동성 박물관을 볼 수 없어 허전한 마음이었다.

 

떠나오는 날이 되어서야 제남시 비행장은 햇빛이 비치고 이륙후의 기상은 너무나 화창하였다. 

가까운 이웃나라에도 이렇게 공부할 것이 많은 것에 마음은 바쁜 나날 이었다. –()-

 

Ps:  참고서적 -1)산동성(박물관), 2)임치-국가문화명성, 3)제나라 치박, 4)꿈속의 땅, 5)태산, 6) 공자 전람 등을 참고 하였음. 잘못된곳을 지적하여 주시면 시정하곘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