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종 여행기/스리랑카 여행기

스리랑카 여행기

땡큐 이영옥 2014. 1. 21. 17:49

 

    2013.12.18~27

 

       스리랑카  문화 탐방기

 

     콜롬보-네콤보-아누라다푸라-담블라-시기리야-폴론나루와

   -파나왈라-캔디-하푸탈레-히두가와-갈레-마두강가-콜롬보

 

                                        , 사진: 김 한종, 이 영옥

 

                       (사진: 스리랑카 전도)     

 

  프로로그

가장 오래된 종교인 불교는 인도의 탄생지인 Saranath(사라나트)를 찾아가면 큰 파고다가 이곳이 석가가 해탈하여 불교의 탄생지임을 알려준다. 그러나 수세기를 지나면서 인도는 불교가 쇠퇴하고 힌두교가 자리잡으면서 불교는 이웃 나라인 미얀마,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 등으로 전파되어 나갔고, 대승불교는 네팔, 부탄, 티베트를 넘어 중국으로 확산되었다.

정작 발생지인 인도에서는 쇠퇴하고 남쪽의 조그만 섬나라인 실론에서 소승불교로 자리잡고 오랫동안 발전을 거듭하여 왔다.

인도대륙 오른쪽 아래 편에 섬나라로 “Ceylon” 이라고 불렀다. 실론은 서구 해양국가인 포르투갈, 네델란드, 영국의 동방 식민 통치기간에 인도와 더불어 함께 지배를 받아온 나라이다. 1948 2 4일 비로서 독립국가가 되었다.

줄 베르느의 소설 해저 2만리에 등장하는 곳이기도 하며 신밧드의 항해에 등장하던 곳이 바로 이 섬이었고  1972년에 스리랑카로 명명하였고, “찬란한 섬”, “인도양의 진주라는 의미이다.   

면적이라야 65.610 2012년 통계로 인구 약 2 30만 명, GDP 594$, 1인당 3000$ 내외이다. 기후는 아열대로 북부는 건조하고, 중부 고산지대 이하로는 습도가 높은 지역이다.

 

 

 

                         (사진: 현 대통령 Mahinda Rajapaksa 모습)

섬나라 이면서도 고대부터 베다족이 살아왔으며, 싱할라 왕조를 형성하여 불교국가를 이루었으나 BC 6세기경 부 터 인도 남부에서 타밀족이 침입하면서 지배를 당하였고, 11세기경부터 포루투갈에 156(1502~1658), 네델란드에 137 (1659~1796), 영국이 이 섬에 최후의 왕국인 캔디왕조를 멸망시기고 151(1797~1948)을 통치하면서 이 섬나라는 3개의 서유럽 국가에게 도합 445년간의 식민지 통치를 받아왔다. 인도에 독립과 함께 실론도 1948년에 독립국가가 되었고, 실론도 스리랑카 공화국으로 국명을 바꾸었다.

영국이 이 지역에서 식민지 경영으로 노동 집약적인 산업으로 커피재배를 시작하면서 점차로 이 지역에 맞는 차 재배를 하여 본국으로 방출한 후로는 고무재배, 계피재배가 주 산업으로 되었다.

인종은 싱할라인 85%, 타밀인 15%로 구성되었다. 싱할라인들은 불교도, 영국의 식민지 지배 시에 남부 인도에서 북부로 이주해온 타밀인들은 인도에 영향을 받아 힌두교도이다. 타밀인들은 주로  농장 노동자로 일하면서 차별을 견디지 못해 1976년 북부 지방을 중심으로 분리 독립을 주장하며  30년에 걸친 내전에 빠지게 되었다.

지루한 내전에서 싱할라족에게 타밀족은 3천여 명이나 타살되었고 2005년에 “Mahinda Lajapaksa” 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안정을 찾고 내전은 종결되었다.

인도양의 요새로서 스리랑카의 지정학적인 위치로 인해 이 나라는 이제 안정화되고 있다.

스리랑카의 불교는 인도의 아쇼카왕의 아들 마힌다에 의해 전해져 소승불교의 맥을 이어오고 당시만해도 암송으로만 전해오던 석가의 행적을 문자로 옮기어 경전을 만들었다. 스리랑카의 경전은 야자수 나뭇잎에 새겨진 <패엽경(貝葉經)>으로 당시에 전송되어온 모든 가르침을 망라한 것이다.

또한 마힌다의 여동생인 상가미타가 부다가야에서 보리수 가지를 꺾어와 심은 것이 지금의 마하보디 사원의 대 보리수 이며, 불교사원의 보물인 석가의 왼쪽 송곳니(불치)를 보관한 캔디의 “The Temple of the Tooth Relics”<불치사(佛齒寺)>이다. 남방 불교의 종주국으로 자처하면서 11세기에 미얀마, 13 세기에 태국, 14 세기에 캄보디아로 불교를 전파하였다. 그 후 외세의 지배를 받으면서 쇠퇴해 17세기 후반에는 태국에서 고승을 초빙해 법통을 이어 갔다.

수 많은 수난을 받으면서 싱할라 족은 BC 380년 경에 Anuradhapura(아누라다푸라)를 중심으로 불교사원을 짓고 전성기를 이루어 소승불교는 동남아로 펴져나가 그 법통을 이어가고 있다. 타밀족의 침입으로 1017년에 수도를 Polonnaruwa(폴론나루와)로 옮기고 불교 발상지인 인도보다 더 영향력을 발휘하여 이웃나라로 전파시킨 것이다.

그 후 아누라다푸라는 잊혀진 곳으로 있다가 1912년 부 터 발굴이 되어 불교 유적지로 각광받으며 세계문화 유산에 오르게 되었다.

그 후 Dambulla(담블라)에 석굴이 조성되어 중국을 거처 한국의 석굴암에 이르는 석굴로드가 탄생하였다.

그리고 수도를 폴론나루아로 옮겨간 후 불교 중심지로서 이곳에 거대한 사원을 짓고 번영하다가 쇠퇴하여 오랫동안 밀림에 묻혀있었다. 이제  그 옛날 전성기에 불교 유적지를 찾아가는 것이다.

 

 

 

 

 

 

 

 인도양의 진주 스리랑카로 가는 길

KE 473기는 Srilanka 와 작은 섬나라 Maldive 를 향해 활주로로 나가 밤 11:00 시 정각에 힘차게 이륙하니, 하늘에는 인천공항으로 오는 도로의 불빛이 현란하게 빛나고 일직선을 이룬다. 고도를 올리면서 칠흑 같은 어둠을 가르고 남으로 향한다.

8시간 40분을 비행해야 한다. 태안반도 남단으로 군산 상공을 지나 제주도 방향으로 남하한다.  6000km를 날아가야 한다.

4시간 만에 473기는 대만의 동쪽 해안을 따라 내려가면서 해남도 남단을 지나 인도 차이나 반도 상공에 이르니 어느덧 반 이상을 비행하고 있다. 다낭 방향에서 인도 차이나 반도를 가로 질러 방콕 방향으로 나아가니 고도 11.680m 고공에서 보이는 방콕시의 야경은 화려하고 장관이다.

비행기는 인도양 상공으로 나가 안다만 군도 상공으로 나가 인도양에 이르니 이제 1344km남은 거리인 Colombo로 접근해 간다.

콜롬보의 반다라나이케 공항에 접근하니 한국시간 새벽 07:45, 콜롬보 시간 04:15분이다. 시차는 3시간 30분이다. 

05:10분 공항을 나오니 이곳의 안내인 “Daya Edirisinghe”(다야 에디리싱헤) 교수가 반갑게 맞이한다. 그는 1978년 서울대 어학 연구소에서 한국어를 공부하고 귀국해 케라니야”(Kelaniya) 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있는 분이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맨 먼저 Necombo 새벽 어시장에 이른다. 새벽 어시장은 어느 나라에나 하루를 가장 일찍 여는 곳이다.

 

 

 

                     (사진: 밤에 잡아온 참치 등 싱싱한 생선 모습)

 

네콤보는 인도양에 면한 바닷가의 항구로서 일대에서 잡은 참치, 상어, 간재미, 새우 등 모두 갓 잡아온 것으로 싱싱한 것으로 이곳에서 경매가 이루어지며 해외로 수출도하고 국내 시장에 조달하기도 하는 종합 어시장이다.  우리의 눈에띠는 생선은 바로 살아있는 대형 참치다. 이곳에서는 10~15kg 의 대형도 우리 돈으로 단돈 1만원 내외이니, 그저 부러울 뿐이다.

우리는 이곳의 살아있는 어시장을 어둠 속에서 30여분간 둘러보고 스리랑카의 1번 국도를 따라 해안가로 난 길을 타고 Puttalam으로 가다가 도중에 해안가에 있는 “Club Pahm Bay” 로 간다.

우리는 팜베이 클럽에서 07:00~08:20 분 사이에 휴식을 하면서 비로서 아침식사를 하려 한다.

이곳은 대규모 휴양지로 드문 므문 리조트가 들어서 있고 열대지방의 고유한 풍치를 자랑하며 드넓은 수영장이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다. 허나 지금은 제철이 아니어서 투숙객이 드물고 정적마저 감돌아 우리는 이곳에서 밤새도록 야간 비행으로 온, 몸을 추스리고 휴식을 하면서 아침식사를 천천히 한다. 아열대 지역답게 열대 과일 이 풍부하고 생 과일을 직접 썰어주는 코너도 마련되어 있어 우리는 파인애플, 수박, 망고, 바나나 등 비타민이 풍부한 과일을 중심으로 아침 식사를 마치고 오늘의 목적지인 아누라다푸라를 향해 다시 Puttalam 전방 45.2km 를 지나 간다.

 

 

                                        (사진: Club Pahm Bay 전경)

 

도로는 왕복 1 차선으로 길 옆으로는 상가, 주택이 늘어서고, 교외로 나가니 야자수가 무성한 길로, 이곳의 교통수단인 “트리윌"(툭툭이), 오토바이, 승용차, 버스가 뒤엉키어 달린다.

푸타람 가까이 오니 이곳 해안가에서는 소금생산이 활발하며, 바닷가에 조성된 상가에는 사람들로 붐빈다. 상가 로타리 사거리에서 이제는 오른쪽 도로에 들어가니 시간은 10:00 시가 되니 이곳은 Puttalalm-Anuradhapra 도로가 나오며 이곳에서 68km 지점까지 달려가 “Guest House” 에서  휴식을 취하니 이 도로는 A-12 번 도로이다. 주변에는 야자수에 노란 열매가 주렁주렁 달린 모습이 우리가 열대 지방에 왔음을 실감나게 한다. 아누라다푸라로 가는 도로변은 “Wilpattu” 국립공원으로 고라니, 원숭이, 코끼리가 서식하는 지역이란 안내판이 서 있다.

가는 도로변에서 야자 열매를 파는 곳에서 우리는 야쟈 열매의 수액을 맛보기로 한다. 노점의 주인 아줌마는 느닷없이 버스에서 내린 우리에게 열매 하나씩을 위를 칼로 도려내어 구멍을 뚫고 빨대를 하나씩 꽂아 넣어주면서 연신 신이 나 있다. 

우리 부부는 둘이서 하나를 들고 각기 한 모금씩 먹어보니 싱겁고 별맛이 없다. 모두 내려 노란 열매에 스트로크를 넣어 한 모금씩 먹어보고, 또 주홍색으로 익은 망고는 껍질을 벗기고 가운데 뼈를 발라내고 몇 조각을 내어 먹는다. 이것은 맛이 달콤하여 야자액 보다 맛이 좋아 여러 조각을 먹어보고 근처에서 손을 씻고 다시 버스에 타고 우리는 아기를 업은 여인에게 뜻밖에 행운을 안겨주고 다시 떠난다.

 도로변 주변 논에는 밭벼가 파랗게 자라고 아누라다푸라 32.4km 남은 지점이었다. 스리랑카는 상시 푸르고 논농사는 2모작을 하고 널려진 과실 나무에서 열매를 항상 딸 수 있으니, 자연의 혜택을 최대로 누리며 살아가니 사람들의 마음의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사진: Pahm Garden Hotel )

 

 꽃은 일년 내내 피고 지니, 항상 여러 가지 꽃이 눈을 즐겁게 하여준다. 우리는 11:35분 아누라 다푸라 시내에 진입하여 “Palm Garden Village Hotel” 에 들어가 체크인 하니, 넓은 땅 위에 나무들이 가득하고, 마침 정원을 보수 중이라 인부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우리는 방에서 잠시 짐을 정리하고 12:30분에 호텔 레스또랑에 모여 점심 식사를 하며 처음으로 이곳의 맥주인 “Lion Lager Beer” 를 마시면서 느긋하게 마음을 가다듬는다.

 

1.불교문화의 중심지 “Anuradhapura”

 

우리가 새벽에 공항에 내려서 5시간 이상을 달려온 아누라다푸라는 불교의 4대 성지중의 하나로 일컬어 지는 곳이다. 석가모니가 입적 후 200여 년 만에 인도에서는 불교세력이 약화 되었으나 이곳 섬나라인 실론의 아누라다푸라에서는 번성하여지면서 기원전 5세기 때인 2500 여 년 전 부처님의 생전의 가르친 설법이 이곳에서 집대성 되었고, 다시 바다건너 동남아 일대로 전파되고 2차로는 미얀마에서 집대성 되었다.

 

 

                                             (사진: Anuradhapura 시내 지도)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진 곳으로 고증이 된 것이 스리랑카의 불치사(Tooth-Relic Temple)와 미얀마의 쉐지곤(Shwezigon) 사원 두 곳이다. 당시에 아누라다푸라는 스리랑카의 수도이자 이곳에서 경전이 이루어지고 불교가 학문으로 비로서 체계를 갖추게 된 곳이다.

이 수도는 여러 개의 불교 사원군과 4곳의 인공 호수로 이루어졌다. 그 중에 “Maha Viharaya”, ”Jetavana” “Abhayagiri” 사원의 거대한 탑(Stupa)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처럼 웅장한 것이다.

 

1)    스리마하 보리사원(Sri Maha Bodhi Tree Temple)

 

일명 보리수 사원으로 불리며 최고의 불교성지이다. 이곳의 보리수는 석가가 깨달음을 얻은 인도의 부다가야의 보리수 가지를 옮겨 심어 자란 것이다. 즉 기원전 3세기에 아쇼카왕의 딸 싱가밑다가 가져왔다고 전해진다.

 기원전 245년 경 이 나무를 심은 데바남파야팃사왕이 매일 금, 은으로 된 물병에 물을 담아다가 주었다고 하며, 지금도 당시에 임명한 관리인의 후손이 이 성소와 성수(聖樹)를 지키고 있다. 이 성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그 이유는 부다가야의 당시의 보리수는 화재로 불타버렸기 때문이다.

 

 

 

                         (사진: Maha Bodi 사원의 보리수)

2)    Brazen 돌기둥 궁

기원전 2세기 이 지역의 승려들의 다층 주거지 자리로, 말하자면 기숙사가 있던 자리이다. 지금은 지붕은 없어지고 수 백 개의 돌기둥만이 나란히 서있다.

 

 

 

3)    루완웰리세야 다고바<대탑>(Ruwanweli Seya Dagoba)

 

나무 사이에 하얗게 솟아있는 신비스런 대 탑으로 물안개 피어 오를 때 저수지 너머에서 보이는 이 탑은 가히 환상적인 신비함에 쌓여 있다.

기원전 2 세기 전에 지어 졌으니 2200년의 역사를 간직한 것으로 110m 의 높이었으나 지금은 55m 만 남아있다. 기단을 장식한 돌 코끼리 석상이 1900여 개가 둘러싼 모습은 웅장함의 극치이다.

 

 

                          (사진:  루완 웰리세야 대탑 전경

 

오늘은 탑 돌이가 진행되어 우리도 함께 참가하였으며, 대 탑 주위를 순례자들이 스리랑카의 전통의상인 흰 사롱(Sarong)과 사리(Saree)를 입고 맨발로 시계방향으로 돌면서 입으로 염원하면서 기도를 한다. 순례자들이 탑 돌이를 하면서 마련해온 붉은 가사를 탑에 두르는 행사가 진행되니  한 바퀴 돌아 305m의 붉은 가사를 둘러 놓은 탑은 아주 장관이다. 대 탑 입구 오른쪽에는 대 탑을 만든 왕의 석상이, 왼쪽에는 그의 어머니의 석상이 세워져 있고, 입구 정면 대 탑 앞에는 미얀마 수상 <Thein Sein>이 기증한 부처님이 있다.

 

                            (사진: 탑에 붉은 가사를 두르는 의식행사)

   

4)    이수루무니아 사원(Isurumniya Temple)

 

기원전 3세기인 2300여년 전에 스리랑카에 불교가 전파되면서 세워진 최초의 사찰이다. 이곳에 부처님의 치아 사리가 모셔졌으니 최초의 불치사 였다. 바위를 파내서 불상을 만들었으며 그 위 바위 위에다 탑(다고바)을 세웠다. 그로 인해 이 사원은 암벽사원(Rock Temple)으로도 불린다.

바위를 파낸 곳에는 석가모니가 가운데 모셔져 있다. 밖에 바위의 코끼리 조각은 불교예술의 걸작이다. 탑이 세워진 바위 정상에 오르면 부처님의 발톱이 안치되어 있는 바위가 있으며 그 아래로는 사리를 보관한 흰 사리탑이 있다.

 

 

                                         (사진 : 이수루 무니아 석굴사원 전경)

 

바위 정상에서는 아누라다푸라의 저수지가 넓게 내려다보이고 전방위로 멋진 조망을 할 수 있는 곳이다. 아래 석굴 안에는 아쇼카왕의 아들상이 있고 그 앞으로는 14m에 달하는 거대 와불(臥佛)이 있다.

 

  

5. 두파라마 탑(Thuparama Dagoba)

 

높이 19m 의 종모양을 한 하얀 탑으로, 탑의 규모는 작으나 스리랑카 최초의 불탑으로 주위로는 돌기둥이 도열해 있으며 이는 볕을 피하기 위해 천정을 덮었던 기둥으로 남아있다.

탑 주위로는 무너져 내린 옛 기둥이 많이 쌓여 있어 복원될 날을 기다리는 모양이다. 이 탑은 기원전 4 세기 인도의 아쇼카 왕이 불교사절의 파견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졌다. 석가의 오른쪽 쇄골이 안치됐다고 하나 고증이 안된 상태다.

이 두파라마 다고바는 1862년 뒤늦게 복원된 것이다. 그러나 주변의 지붕을 지탱하는 오래된 돌기둥 들은 오랜 세월에 때가 묻어 있다.

 

 

                                 (사진: 두파라마 탑  전경)

 

 하얀 탑 (Stupa=Dagoba) 둘레로는 벽돌을 쌓고 그 안에는 흙으로 다져 채우고 나서 바깥에는 흰 칠을 하여 만드는 것이다.

 

  

5. 아바야기리(Abhayagiri) 사원과 다고바

 

현재 이곳에 남아있는 탑 중에 가장 높은 탑이다. 기원전 1 세기 우타가미니 아바야왕 시기에 소승불교 의해 건립된 것으로 200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다. 12세기 스리랑카에서 소승불교에 의해 밀려 나기 전의 한 축인 대승불교를 상징하는 탑으로 78m에 이르러 이곳에 현존하는 탑 가운데 가장 높은 것이다.

탑 주변으로는 아바야기리 사원의 흔적으로 19m에 이르는 돌 밥그릇으로 미루어 보아 전성기에는 이 사원에 약 5000여 명의 승려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 된다.

이 곳 주위로는 관계수로가 발전한 것으로 미루어 많은 사람들이 농사를 지었던 곳으로 보이며,이 다고바는 대승 불교의 대탑이다.

둘레로는 벽돌을 쌓고 반원형으로 하였고, 위에는 4각형의 구조물이 올려 있고, 그 위로 탑이 솟아 있다.

 

 

 

                                    (사진: 아바야기리 대탑 전경)

           

1930년에 발견될 당시에는 흙더미에 불과 했으나 UNESCO 의 후원으로 벽돌을 쌓은 후 복원하였고, 이 안에 사리가 들어있는 것으로 추측하여, 정 중앙에 흙을 쌓고, 그 안으로는 불화와 보석을 보관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탑 위에 또 하나 솟아있는 뾰족탑은 입구 좌측의 탑과 같은 모양이다.  불교에서는 보통 탑이 둥근데 이는 우주를 상징한다고 한다.

 

6. 쌍둥이 못(쿠담 포쿠나-Kuttam Pokuna)

 

두 개의 못이 앞뒤로 있는데 앞에 것은 크고 뒤에 것은 1/2 정도이고 옛날에는 목욕소로 쓰였다. 바닥에서 물이 솟아났고 밖에 있는 호수에서 옮겨오기도 하였다.

이 못은 4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쿠담이란 쌍둥이를, 포투나는 연못을 의미하니 둘을 합해 쌍둥이 연못이다.  아누라다푸라는 불교사원과 더불어 발전한 도시였기 때문에, 불교의식용으로 연못이 필요하였다.

 

 

                                                (사진: 쿠담 포타나  큰 못 전경)

 

쿠담포쿠나는 연못둘레를 물고기 모양의 수도꼭지와 나가상 등으로 장식 하였으니 이런 화려한 장식은 이 왕국의 부와 번영을 상징한다고 보여진다.

 

  

 

   7. 제타바나 탑(Jetavana Dagoba)

 

이 탑은 AD 3세기에 쌓은 73m 의 대 탑으로 93백 만개의 벽돌로 쌓아 올렸다. 구조물의 기초는 8.5m의 지하로 내려가며 16년에 걸쳐 완성되었다.

 처음 세워졌을 때 제타바나 다고바는 한 변이 175.5m, 높이 8.53m 의 기단 위에 쌓은 121.9m의 탑이었다. 세월이 흘러 무너지면서 지금처럼 되었으며, 복원된 다고바 위의 네모난 구조물과 균형이 맞지 않는다. 이 주변으로는 승려가 3000여명이 머물던 대가람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흔적만이 남아있다.

 

 

 

                             (사진 : 제타바나 탑의 전경)

 

하루동안 아누라다푸라의 왕국의 불교유적을 탐방하고 이제는 11:15분에다음 행선지인 “Dambulla” 로 출발한다. A-9 도로로 “Kandy” 방향으로 93km 지점을 지나니 거리에는 장이서고, 상가는 붐비고, 소나기가 내린다. 학생들은 오후라 하교를 하는데 힌 교복을 입고 다닌다.

A-9 도로상에서 12:15분 우리가 탄 버스는 교통경찰에 스피드건에 단속으로 10여분간 정차되면서 범칙금으러 10$라를 부과 받고 출발. 어느새 소나기는 그치고 12:35 Dambulla 시내로 들어오니 거리가 복잡하고 우리차가 농산물 도매시장 앞으로 나아가니 사람들로 붐빈다.

 

 

    2. 담블라 석굴사원

담블라(Dambulla)는 바위라는 뜻의 “Damba”와 샘이라는 뜻의 “Ulla”가 합쳐서 만들어진 말로 Sigiriya(시기리아)로 가는 곳에서 19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아주 작은 마을이다. 이 작은 마을에는 높이 186m 암반으로 된 홀로 서있는 거대한 바위 산에 석굴을 파고 갖가지 사원과 탑을 만들어 조성된 석굴사원이다.

기원전 1세기부터 조성된 것이니 2천년 이전에 싱할라 왕조의 발라감 바후왕이 조성하기 시작하여 그 후 오랫동안 왕조들이 계속해서 조성하면서 확장된 것이다. 걸어서 바위산 중턱에 올라 가면 거대한 바위가 한 개로 되어 있으며 그 오른쪽 중턱 아래로 부 터 5개의 석굴이 나란히 조성되어 있고 복도를 통해 이어져 있어 5개의 동굴로 들어가 그 안에 조성된 사원을 차례로 볼 수가 있다.

 

 

 

                                  (사진: 5개의 석굴사원  입구)

 

a)     1 석굴: 가장 오래된 석굴 사원으로 데바라자 비하라 즉<신들의 절> 이란 이름이 있으며, 14m 에 이르는 <열반에 드는 와불>이 있다. 이 와불은 이곳의 있는 기존의 화강암에 조각을 하여 그대로 와불을 만든 것이다. 면적이 좁아 와불 하나가 누운 자세로 차지하고 있다.

b)    2 석굴: 담블라의 최대 동굴로 폭이 52m, 깊이 25m 위대한 왕의 절로 불리기도 한다. 동굴 안에는 모두 56개의 불상이 모셔져 있고, 천정에 벽화가 그려져 있어 아주 화려하다. 입구에는 사리탑이 서있고 7명의 석불이 사리탑을 둘러 싸고 있다.

 

 

                                              (사진 : 1 석굴사원의 와불상)

 

 

 

                                          (사진: 2 석굴사원의 와불상)

 

 

 

            (사진: 2 석굴 사원안의 사리탑)

 

c)     3 석굴: 18세기에 만들어진 동굴 사원으로 들어가면 좌측으로 9m나 되는 와불이 있으며 오른쪽으로 57개의 불상이 바위 석굴 밑에 나란히 서 있다. 입구에서 오른쪽 끝으로는 싱할라 왕의 석상이 서있고 이 석굴은 위대한 새로운 사원이라고도 불린다.

 

 

         

                                             (사진: 3 석굴안의 석가상)

 

 

 

                        (사진: 3 석굴안의 입불상들)

 

d)    4 석굴: 가장 최근에 조성된 석굴로 좌불이 밀집해 있다.

e)     5 석굴: 가장 최근인 20세기 초에 조성된 석굴로 그다지 넓지도 않고 천장의 높이도 낮은 편이다.  와불은 이 석굴 안의 화강석으로 다듬어 조성된 것이다.

 

 

 

                                    (사진:  4 석굴안의 사리탑과 좌불상)

 

이 일대의 바위에는 모두 18개의 대소 석굴이 있으나 현재 5개만이 개방되어 있다. 석굴사원을 방문 중 비가 쏟아져 5개의 석굴을 차례로 보고 나오니 신기하게도 비가 멈추어 우리는 다시 걸어서 담블라 박물관 앞으로 내려왔다.

 

이제 담블라를 출발하여 오늘의 숙소인 Amaya Lake 호반에 있는 “Amaya” 호텔로 간다. 가는 도중에 이번에도 길가의 망고를 파는 노점상에서 망고를 맛보고 한동안 쉬어가며, 우리는 출발 전에 망고를 사가지고 가니 노점상의 여인이 오늘은 횡재한 날이라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니 우리도 즐거운 날이다.

 

 

 

                                            (사진: 노점상의 망고 모습)

 

입구가 호수의 뚝 위로 난 길로 들어가는 곳이라 길이 좋지 않으나 숲이 무성한 언덕길을 올라  호텔에 이르니 북을 치는 4명의 여인들이 우리를 맞아주니 함께 북을 치며 마음을 나누어 본다.

호숫가에서 멀리 떨어진 숲 속에 리조트 형태에 숙소로 들어가 오늘에 여장을 풀었다.

호숫가에 산책을 나오니 호수 앞으로는 아주 넓은 잔디 밭이 잘 가꾸어져 있고 하얀 회오라기 때가 날아다녀 아름다운 풍치를 연출하고 있다. 호수는 잔잔하고 멀리 산 위로는 구름이 둘러 있고 호수가로는 산책로가 나있어 오래된 고목들이 이상한 모습과 더불어 고요한 적막감을 준다.

잘 가꾸어진 잔디에 오래된 나무들이 어울려진 숲 속을 조용히 산책하며 명상에 잠기는 사색의 시간이 필요한 곳이다.  

자연친화적이라 모기향도 없고 각종 벌레들이 출현하는 진기한 숙소로 우리는 하루 밤을 견디어야 했다. 다행히 바퀴벌레 한 마리를 퇴치하는 행운을 가지고 밤을 편안하게 보냈다.

 

 

 

3. 시기리아(Sigiriya) 왕궁

 

아누라다푸라와 풀론나루와의 역사적인 도시로 부 터 66 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 시기리아 5세기경의 성벽과 해자로 둘러 쌓인 옛날 왕도이다. 바위 꼭대기에 왕궁 터, 아름다운 정원, 광활한 해자와 성벽, 바위 암벽의 서쪽 면에 그려진 아름다운 벽화로 아시아에서 아주 중요한 고고학적 가치를 지닌 독특한 유적지로 손 꼽힌다.

이곳은 5세기에 카샤파(Kasyapa)” 왕조 때의 수도로 웅장하고 신비로운 요새로 되어있고, 18개의 여인의 벽화가 생생하게 남아있어 유명한 곳이다.

넓은 평야 한복판에 370m의 화강암 정상에 자리잡고 있는 사자바위”(Lion’s Rock)가 사방으로 둘러 쌓인 밀림지대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다.

 

 

                          (사진: 시기리아의 사자바위 전경)

 

서기 459~477 년에 스리랑카를 통치하고 있던 다투세나”(Dhatusena)왕 시기에 왕의 장남인 카샤파”(Kasyapa)와 그의 배다른 이복 동생인 목갈라나”(Moggallana)왕자가 있었는데 왕위 계승이 이복 동생에게 돌아 갈가바 두려워한 나머지 왕자인 카샤파가 부왕인 다투세나왕을 살해하고  왕위에 오르니  이복 동생 목갈라나는 생명의 위협을 느껴  인도로 망명을 하였다.

부왕을 살해하고 패륜을 저지른 카샤파왕은 그의 안위를 위해 이곳 화강암 바위산 정상에 난공불락의 요새와 성채로 왕궁을 건설하고 유폐적인 왕정을 하며 11년간이나 권좌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인도로 망명했던 이복 동생 목갈라나가 군사력을 키워 마침내 이곳 시기리아의 암벽 위의 궁전으로 처들어 오자 카샤파왕은 패하여 자결하였다. 승리한 목갈라나왕은 다시 왕궁을 아누라다푸라로 옮기면서 이곳의 왕궁은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이곳의 바위 꼭대기의 궁전 터는 해발 370m이며 암산의 높이만도 200m가 넘는다. 사자바위 절벽에 판 1200여 개의 계단과 60도가 넘는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야 암산 위에 궁전 터가 있다. 원래는 수도승의 수행 터였으나 궁전이 들어섰었고, 다시 왕궁을 옮긴 후에는 수행 터로 되돌아 갔다. 그 후 이곳은 폐허가 되어 당시에 왕궁을 지었던 궁전 터가 그대로 밀림 속에 방치되었다가 발굴된 것이다.

바위 중턱에 새겨진 프레스코화의 여인상은 계단을 올라 바위 옆으로 난 길에 파여진 바위 벽에 그려진 18명의 여인들의 벽화로 유명하다. 15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너무 생생한 색채감과 아름다운 자태로 눈길을 끈다. 왕이 시녀들의 시중을 받고 있는 압사라(Apsara)요정들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당초에는 500여명 이상이었다고 하나 지금은 18명의 그림만 남아있고 나머지는 훼손 되었다.

 

 

                                    (사진: 압살라 요정들의 미인도)

 

불후의 명작으로 일컬어지는 미인도 18점은 시녀들은 당시 옷을 안 입었고, 왕족은 상의를 벗는습관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6세기부터 13~14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Mirror Wall”(거울의 벽)에 새겨진 시는 그림에 그려져 있는 여인에게 보내는 것으로 보이며, 그 중에  <황금의 궁전…… 모든 것은 흘러가는 구름처럼 갔네>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는 왕위 찬탈에 허망함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암벽은 상단부가 양쪽으로 돌출되었고 해발로는 349m나 되며, 477년에 패륜 왕이 동생의 침입을 막기 위해 정상에 궁전을 세웠고, 연회장, 목욕 장, 물 저장소 등의 터와 천연의 돌 의자 등이 그대로 남아있다.

정상으로 오르려면 사자의 벌어진 입처럼 생긴 입구와 목구멍처럼 생긴 좁은 통로(giriya)를 거처야만 한다. “시기리아라는 이름은 꼭대기로 연결되는 통로모양에서 유래하였다. 

우리는 정상 왕궁 터에 이르니 시기리아 주변이 한눈에 조망된다. 푸른 숲의 도시, 멀리 하얀 부처님 상이 유일하게 보이고, 넓은 터에는 붉은 벽돌로 쌓아 올린 성터가 여러 곳에 산재해 있고, 그 아래로는 넓은 물 저장소가 당시의 빗물을 보관하여 사용하였던 곳으로 지금도 푸른 물이 가득하다.

정상에서 아래로 내려가면 시기리아의 넓은 평야를 화강석의 의자에 앉아 내려다 볼 수 있는 곳도 그대로 남아있다.

 

 

                      (사진: 하늘에서 본 시기리아 왕궁 터 전경)

 

들어오는 입구 넓은 들판에는 발굴 당시에 왕실의 정원이 3개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물의 정원, 작은 돌을 깔아놓은 정원, 완만한 계단으로 된 정원이 있으니 이런 3가지 정원형태가 결합된 것이 바위 정상에 왕궁 정원에서도 찾을 수 있다.

물의 정원은 3구역으로 볼 수 있으니 1구역은 입구에 들어오는 서쪽 구역이며, 2 구역은 서쪽의 길고 좁은 못으로 되어 있고, 3 구역은 테라스와 홀의 넓은 구역으로 되어 있다. 

궁전 터에는 불교적인 색채가 없으니 패륜의 왕은 부처님의 은덕을 감히 기대하지 않은 것이니 이는 부왕을 살해한 원죄의식 때문이리라. 정상을 한 시간 반이 넘도록 탐사 후 12시경이 되어 A-6 도로에 나오니 길에는 티크 나무가 즐비하게 서있다.

우리는 폐허의 왕궁 터에서 착잡한 심정으로 내려와 “Kasyapa” 레스또랑에서 패륜의 왕을 생각하며 뷔폐로 중식을 하며 칼스버그 맥주로 답답함을 달래었다. 중식 후 차는 이제 폴론나루와로 이동한다.

 

 

   4. 폴론나루와(Polonnaruwa)-세계문화유산

 

 

    (사진: 폴론나루와 시내 지도)

 

폴론나루와는 11~12 세기에 스리랑카의 수도였던 곳이다.

아누라다푸라가 기원전의 도시로 우리의 삼국시대 초에 해당하며, 이곳의 담블라 시대는 우리의 고려시대에 해당되는 시기이다.

우리가 탄 차는 이제 국립공원 지역으로 접근하니 거대한 코끼리 한 마리가 오른쪽 초원에서 풀을 뜯고 있으며, 주변은 동물 보호를 위해 철조망으로 막아 놓았다.  차가 폴론나루와 26km지점을 통과하여 가니 소나기가 오고, A-11 5km 전방 부 터는 비가 거세게 내리고 도로변으로는 소떼가 출몰하여 가는 길을 막고 있다. 14:30분 폴론나루와 유적지에 이른다.

이곳 폴론나루와는 화려했던 중세시대인 11~12 세기에 신할라 왕조시대에 스리랑카의 수도였다. 11세기 초 남인도 타밀족의 침입으로 인해 수도를 아누라다푸라에서 이곳 폴론나루와로 옮긴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 옛 도읍지에 남아있는 유적은 주로 비자야 바후 1파라크라마바후 1등 두 왕조 시대의 것으로 사원과 수도원, 그 외 많은 건축물 등은 12 세기의 양식을 보여주는 유적으로 중세시대의 해당하는 찬란한 유산이다. 이곳은 당시에 전성기에 타이나 미얀마에서 승려들이 찾아올 만큼 불교도시로 번영을 한 곳이다.

 

1)   왕궁(Royal Palace)

 

8.6 헥타에 이르는 장방형의 구역은 푸론나루와의 중심지였고, 사방이 높은 성벽으로 둘러 쌓인 곳이다. 왕궁 터와 회의실 등 왕궁의 건물들이 즐비하다. 이곳의 가장 큰 건축물은 A.D 1153~1186년 동안 왕위에 있던 “Parakramabaha” 대왕이 건축한 7층의 왕궁으로 “Vaijayanta Prasada” 라 불리었다. 기록으로는 7층 높이였고 천 여 개의 방이 있었다 한다. 현재는 3층 높이의 잔해만 남아있고 벽돌로 쌓은 건물의 큰방은 13m×13m 의 크기이고 지붕은 나무기둥으로 받쳐지고 기초 돌 초석에 자국이 남아있다. 가운데 방은 두터운 벽으로 쌓았다. 왕궁은 큰 나무기둥으로 바친 지상에 구조물로 되었고, 이 기둥들은 벽돌로 쌓여졌고 벽은 석고로 칠하였다.

중요 왕궁 방은 작은 방으로 된 곳에 왕실 관리, 신하들과 두 왕비의 방으로 쓰였다. 왕궁의 서남쪽 코너 성벽에 감시 탑의 흔적이 남아있다.

 

 

 

                             (사진: 왕궁 건물의 잔해 모습)

 

2)   회의실(Council Chamber)

왕궁 동쪽에 돌기둥이 서있는 축조물은 “Raja Vaihyabhujanga Mandapa”로 이름 부처진 회의실 건물로 사용하던 곳이다. 왕궁과 회의실 사이의 기초건물은 “Vijayabahu” 대왕(1055~1110 AD) 이 지은 지층이다.

 그 옆에 폭 12m, 길이 35.1m 의 주랑(柱廊)으로 북에서 남으로 올라가는 돌계단 입구가 되어있다. 지붕을 덮던 기둥이 4 줄로 12개의 돌기둥이 서 있고 남쪽 끝에는 화강암으로 만든 큰 사자상이 있다.

 

 

 

                           (사진: 당시 회의실 건물터 전경)

 

 이 사자상은 사자표면에 새겨진 문양으로 보아 “Nissankamalla”(AD 1187~1196)의 옥좌로 사용되었었다고 판단되어 1876년에 콜롬보 박물관으로 가져갔던 것을 1965년에 폴론나루와 이곳으로 도로 가져다 놓았다.

왕이 앉았었던 사자의 옥좌는 약 10톤이나 나가며, 안줄에 8개의 돌기둥에는 관리들의 좌석이 새겨져 있는데, 황태자, 장군, 수상, 재무대신, 지사, 의장, 비서, 서기, 기타 참석자의 좌석이 표시되어 있다. 

 

 

3)   쿼드랭글 (Quadrangle) 지역

폴론나루와 지역은 네모난 성벽으로 둘러 쌓인 곳으로 싱할라 왕조 때에 불치를 모신 사원이 있어 불교의 중심지 역할을 한 곳이다.

이름 그대로 이 지역 안에는 불당인 투파라마, 불교의 윤회를 의미하는 문스톤(Moonstone), 이곳의 최대 불탑인 랑곳 비하라, 원형 불탑인 바타다게 등이 밀집해 있다.

a)   바타다게(Vatadage) 사원

 이 사원은 푸론나루와의 사원 중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이다. 폴론나루와 불교의 중심사원으로 불치가 안치된 곳으로 신할라 왕조시대의 “Parakramabahu”(1153~1186)이 건축한 둥근 모양의 사원이다. 돌에 새겨진 것에 의하면 “Nissankamalla 왕이  “Ratnagiri Vatadage” 로 쿼드랭글 경내에 지은 것으로 가운데에 솟아있는 사리탑을 둘러 싸고 지붕은 돌기둥으로 바치고 나무에 타일을 입혔다. 열반에 들어가는 부처의 상징적인 모습의 문스톤과 북쪽과 동쪽의 테라스의 2 개의 석상은 폴론나루와에서 가장 완벽한 것으로 아름다운 보석과 7개의 머리의 코브라가 장식되었다.

왼손에 연꽃이 풍요를 상징하고, 오른손에는 생명을 상징하는 만초새(creeper)가 장식되었다.

 발치에는 난쟁이가 새겨져 있고, 가드스톤(Guardstone)은 입구로 악마가 들어오는 것을 막는다는 의미이다.

4면에 4개의 좌불이 있으나 하나는 상채가 없다. 계단마다 새겨진 돌 조각이 특이하고 전체적으로 천장이 있었으나 지금은 노천이다.

“Vatadage” 는 아주 단순한 탑으로 여러 왕의 의해 보수 개선 되었고 이곳에서는 가장 으뜸가는 사리탑이다.

 

 

 

                          (사진: Vatadage 사원 입구 모습)

 

b)   하타다게(Hatadage) 사원

이 사원은 “Nissankamalla”(1187~1196) 왕이 세운 불치사(The Temple of the Tooth Relics) 이다. 이 사원은 60 시간 (Sixty=Hata) 안에 지었기 때문에 “Hatadage” 로 불리어 진다.  이 사원은 2층이었고 이층의 평석 석판 사이에 사리가 안치되어 있다 한다. 지붕은 나무 빔으로 되었고 진흙으로 발랐다.

신성한 치아 사리가 왕의 개인 경호원이었던 “Velaikkara” 라는 군인이 보관하여 왔다는 것이 타밀어로 새겨져 있다.

 

c)   Galpota- Stonebook

돌에 야자 잎 모양을 상징하는 큰 각석은 “Nissankamalla(1187~1196) 왕 때에 만든 것으로 지금까지 발견된 것 중 가장 큰 각석 돌이다. 이 돌은 폴론나루와에서 수백 키로 떨어진 Mihintale 에서 옮겨다 새긴 것이다.  이 돌은 길이가 8m, 폭이 4.3m 의 크기이다. 돌 표면에는 니상카마라 대왕의 가문과 그의 치적이 새겨져 있으며, 머리 아래로는 ”Gaja Lakshmi”(번영의 여신)를 바라보는 여인과 물을 뿌리는 2마리의 코끼리가 새겨져 있다.  또 멀리 떨어진 파키스탄과 인도네시아와의 관계도 새겨져 있고, 인도의 침입도 새겨져 있다.

 

 

 

                            (사진: 타밀어로 새겨진 각석)

 

4)랑콧 사원 (Rankoth Vihara)

폴론나루와에서 가장 큰 사원으로 이 사원과 “Gal Vihara”파라크라마바후왕에 의해 건축되었다. 이곳에서 고고학적인 발굴이 이루어졌고, 4개의 작은 탑으로 둘러 쌓여있는 높이 55m의 대 탑으로 스리랑카에서 제2의 큰 불탑이다. 이곳에는 야자 잎에 새겨진 불교 경전이 보관되어 있다. 탑은 벽돌과 진흙으로 쌓은 단위에 솟아있고 난간 벽 위 부분은 몰딩으로 처리되었고 탑 주위로는 꽃을 새긴 제단이 둘러져 있다.

 

 

 

                                        (사진: Rankoth Vehera 전경)

 

 

 

 

 

 

 

 

 

 

 

5)랑카틸라카 사원(Lankatilaka Temple- Image House)

 

북쪽으로 오르는 길에 계단위로 거대한 벽돌 기둥의 입구가 나온다. 이 건축물은 파크라마바후 1세가 지은 사원으로 그 안에 서있는 붓다는 13 m 의 높이의 거불이나 목이 훼손된 채로 서있다.

이 곳은 꽃, , 부라마로 장식된 사원으로 작은 탑 (turret), 석굴(Grotto) 등으로 꾸며졌다. 벽체는 17m 나 높이로 쌓았고 지붕의 돔은 붕괴되었다.  이 고대 도시에서 가장 주목되는 유적이다.  외부 벽에는 5층 높이까지 조각이 되어 있다.

 

 

 

 

                                               (사진: 랑카틸라카 사원 전경)

 

 

 

 

 

 

 

 

 

6)갈 석굴사원(Gal Vihara)

 

바위 사원으로 Alahana Parivena 북쪽에 거대한 바위에 조각한 것이다. “Parakramabahu” 1 세가 축조한 사원으로 스리랑카 불교 예술의 걸작이다.  거대한 바위 면에 통째로 조각하여 만든 열반상, 입상, 좌상의 석불은 이승에서 영원의 세계로 들어가는 모습이다. 조각은 벽돌로 쌓은 건물로 둘려져 있고 제 1 조각은 깊은 명상에 잠긴 5m에 이르는 붓다상이고 사자상으로 장식된 좌대 위에 있고 붓다의 머리 뒤로는 큰 광배가 있다. 벽감 안에도 작은 붓다상이 들어 있고 평화로운 명상 분위기가 서려 있다.

 

 

 

                            (사진: 열반에 드는 석가의 와불상)

 

바위에 통째로 조각한 14m의 와불의 열반상은 해탈의 경지에 이르는 붓다의 과정을 보여주는 듯하다. 열반상 옆에 높이 7m의 입상은 석가의 제자인 아난다로 보인다.

그 옆 정면 바위에는 불경이 새겨진 큰 돌이 벽처럼 서있고 전면에는 스리랑카의 고유언어로 벽면 가득히 글자가 새겨져 있다.

폴론나루와의 광대한 불교 유산을 둘러 보고서 이제 어려운 공부는 끝내려 한다.

 

다음날은 5일째로 이제는 실론섬의 불교유적지를 대체로 탐방한 후라 휴식 겸 이 섬의 여러 가지 문화적 탐방을 하려 한다.

열대 우림의 숲이 무성한  “Amaya Lake Hotel” 은 호숫가가 조용하고 아름답다. 새벽 신책을 나가니 아침 해가 산과 호수 사이에 붉은 물을 드리며 떠오르고 주위는 아주 조용하여 정적이 무섭도록 느껴진다.

아침을 마치고 출발하여 나가니 도로에는 소가족이 길섶을 점령하여 자주 서기를 반복한다. 오늘은 “Kandy”로 가는 길에 코끼리 고아원이 있는 피나왈래에 들러 수십 마리의 코끼리가 강으로 목욕하러 가는 장면을 구경하려 한다.

이곳의 코끼리는 대개 수명이 120년 가량이고, 80년 까지는 일을 할 수 있으며, 그들은 대가족을 형성하여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개중에는 어미를 잃커나 다치는 어린 코끼리가 많다.  이런 코끼리를 보호하며 사육하기 위해 1975년에 만든 곳이 “Dinnawala Elephant Orphanage” 라는 소위 코끼리 고아원이다.  이곳에는 약 80마리 내외를 수용하는 시설이다.  이들은 하루에 한번 정도 단체로 근처에 있는 마야오야강에서 목욕을 하러 나간다.  이들이 대열을 지어 이동하는 것도, 강물에서 목욕을 하는 것도 아주 장관이다.

 

 

                                      (사진: 목욕중인 코끼리들)

 

우리는 버스로 ‘Kandy”로 가다 71 km 지점에서 담블라 3거리를 통과하여 가느라 도로가 좁아 교통체증으로 인해 정체되어 목욕하러 고아원을 나서는 코끼리의 행진을 볼 수가 없었다.

강가 언덕에는 목욕장면을 내려다보는 관광객을 위해 시설이 마련되어 있고 휴식처로서 편안하게 구경할 수가 있다. 이곳에는 코끼리 관광이 상품화되어 강가에 전망대 집이 2~3층짜리가 여러 채 있고 강가로 나가는 진입로에는 상가가 조성되어 있고, 코끼리도 입장권을 사서, 강가로 보러 나가야 한다.

목욕을 마치고 강물에서 올라오는 거대한 코끼리의 모습은 가까이서 보니 신비스럽기도 하고 어떻게 조련사의 지시를 저렇게 잘 따르나 하는 생각을 하며, 코끼리의 지능이 사람보다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이곳에는 코끼리 그림, 각종 코끼리 모양의 기념품, 코끼리 똥으로 만든 중이 등이 있으니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우리는 이제 이 섬에 중부 에 있는 “Kandy” 시로 이동하니 A-6 도로는 자전거, 3 륜 택시, 버스 등   다양한 차량이 다녀 복잡하고 위험하다.

 

 6.Kandy호수와 불치사(TheTemple of Tooth Rel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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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리랑카는 6년제 대통령제이며 현재는 대통령인 “Mahinda Rajapaksa” 2011 년 재선되어 국가를 이끌고 그의 사진은 그림으로 그려 교통요지마다 게시되어 있다.

이 나라는 모든 의료기관이 무료이며, 교육도 초등학교부터 다 무료이다. 이 나라의 설날은 4 13일이다. 길가에 지나다가 하얀 깃발이 꽂힌 집은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1971년까지 스리랑카에는 북한 영사관이 있었는데 당시 북부의 타밀 반군과 내통하여 지원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단절되었다.

평균 수명은 남 62, 여자는 75세이다.

 

 

                                             (사진: Kandy 시내지도)

 

Kandy 시는 아누라다푸라, 폴론나루와 와 더불아 고대왕도로 3번째의 도시다. 15세기 이후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불교 유적이 있고 특히 불치사가 있어 도시 전체가 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인구는 60여만이고 호반도시로, 해발 500m의 고원지대에 위치하여 쾌적한 기후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12세기 이후에는 수도를 이곳으로 옮기면서 인도의 촐라왕조의 침략을 피하였고, 그 후에는 포루투칼이, 다음에는 네델란드의 지배를 받다가 마침내는 영국의 통치하에 놓이게 되었다. 15세기로 들어오면서 외세로 인해 불교국가로서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힌두교,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불교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 미얀마에서 고승이 왔다. 불교를 국교로 이어가려고 불치사리를 보전하는 사원을 건립하게 되었다.

 영국이 스리랑카에 들어오면서 수도를 콜롬보로 옮기면서 불치사는 “Kandy”에 그대로 남아있어 불교의 전통을 고수하려 한 것이다.

 A-1도로 Kandy 27km 지점부터 고도가 점차로 높아지면서 도로는 산 중턱을 넘어가고 심하게 곡선으로 되면서 상가가 계속 이어지고, 7.5km 지점부터는 내리막길로 직선으로 간다. 처음으로 4차선 도로가 나오며 Kandy 시내가 나타났다.

 

 

 

                                        (사진: Kandy 호수 전경)

 

우리는 12:20분이 되어 Kandy 시내로 진입하여 캔디 레스토랑에서 Tuna를 메인 요리로 하는 식사를 한 후 출발하여 시내로 들어가 농산물 시장 앞을 지나, 옛날 교도소 건물을 옆으로 돌아 캔디 호수가로 나와 오늘에 숙소인 “Earl’s Regency Kandy Hotel”에 들어가 여장을 풀었다.

한 시간 이상을 휴식 후 15:00시에 나와 갠디시를 전망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 올라가 호수가에 펼쳐진 캔디시내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다시 호수가로 내려와 17:00 시 부 터 Kandy Art Hall 에서 스리랑카의 민속춤을 감상하기로 한다.

홀에는 어느덧 외국인을 비롯한 관객이 들어차서 공연이 시작되었다.

소라 껍질 피리를 불면서 3인조의 북치는 연주단의 시작으로 무대가 열리면서 푸자 춤, 판데루 춤, 코브라 춤, 가면 춤 등을 이어가며 한 시간의 공연이 마감되면서 무대아래에서 석탄 불을 피워놓은 철판 위에서 기름 봉에 불을 부쳐 입으로 물고하는 불춤의 연기를 한동안 2명이 계속하면서 절정에 이른다. 여기서 불춤은 악령을 제압한다는 의미라 한다.

 

 

                                             (사진: 민속 춤 공연 모습)

 

우리는 인근의 호수 가에 있는 불치사로 걸어서 가서 입장하여 2층에 불치를 모신 곳을 보기 위해 수많은 신자들과 참배객들의 사이를 뚫고 들어가 이층에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려 본다.

기원전 543년 석가모니를 화장할 때 나온 불치는 4세기 초에 수도였던 아누라다푸라에 안치되었다가 16세기 이후에는 이곳 캔디에 세운 불치사에 보존되어 오고 있다.

이곳 불치사는 싱할라 건축 양식으로 팔각형 불당으로 되어 있다. 오늘은 수많은 내 외국인들이 공양을 하면서 부처의 공적을 찬양하고 있다. 

중앙의 불치를 안치한 곳의 금으로 장식한 조그만 문이 열리고 줄 서서 기다리는 공양을 하는 사람들은 한 사람씩 다가가 꽃과 공양 물품, 돈을 바치고 자리를 뜨면 또 그 다음 사람이 이어지고 끝없는 공양 행렬을 함께 하다가 나와 벗은 신발을 찾아 신고 나오니 어느덧 해가 기울고 있었다.

 

아침에 캔디 호텔 101호 에서 눈을 뜨니 창 너머로 해가 떠오른다. 호텔 건너편의 산이 반사로 투영된다. 창 앞에 폭포는 밤새도록 물이 떨어지고 수영장 위로 흘러내린다. 수영장 바닥에 잔잔한 물은 하늘과 대조를 이루고 둥글게 반원을 그리고 있다. 숲은 야자수를 비롯한 수목으로 푸른 언덕을 이루고, 그 속의 집들은 지붕만이 살짝이 보인다.

 

  

 

                                                   (사진:  불치사 전경)

 

 

 

                                       (사진: 2층 불치가 안치된 곳)

 

    7. 페라데니아 식물원 방문

“Royal Botanic Garden”- Peradeniya

 오늘은 이곳의 유명한 식물원인 “Peradeniya Royal Botanic Gardens”를 순방하려 한다.

08:30분 강다리를 건너 페잘라 가도를 지나 페라데니아식물원으로 간다. 시내로 들어오면서 캔디 호수는 아침 햇살에 잔잔한 물결이 흔들리는 듯하다. 캔디 호수는 캔디 왕국의 마지막 왕인 라자싱하 1812년에 만든 인공호수이다.

스리랑카는 아열대 지방이라 전국이 늘 푸르러 각종 식물의 보고이다.

 이곳 캔디 근처에 “Peradeniya”1821년 영국인 “Alexander Moon” 18만평 (59)의 넓이의 4천 여종을 보유한 식물원을 개설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진: Palm Avenues 전경)

 

이곳의 나무들 중 특징 있는 것을 추려보면 우선 대나무 숲을 들 수 있으며 여러 가지 종류의 대나무들이 무리를 이루어 자라고 있다. 다음으로는 “Palm Avenues“ 로 아주 잘 가꿔진 가로수로서 높이가 21m 정도로 일정하게 자라나 아름다운 가로 길을  “Main Central Drive”로 부르며 사시사철 꽃으로 장식되는 아름다운 정원과 연결되고 있다.

이곳에는 “Double Coconut Palms” 정원이 있으며 이곳에는 약 200여종의 코코넛 등 여러 가지 나무가 자라고 있다. 이 중에 가장 놀라운 것은 아주 큰 씨를 열매로 가지고, 익는데 5년이 걸린다.  가운데에 큰 잔디 정원이 있는데 여기에는 살아있는 우산모양의 “Java Fig Tree” 로 잔디밭 정 중앙에 자리잡고 있다. 여기에 자라나는 식물 중 우리가 보기에 아주 이상하고 특이한 것을 소개해 본다.

1.     야자나무: 통로에 양쪽에 오래된 곳으로 숫나무, 암나무의 야자수가 열매를 맺었는데 아주 각기 다르다.

2.     하우리(Hauri Gum):  코끼리 나무로 하늘을 찌를 듯이 올라가고 기둥은 돌처럼 단단하다.

3.     박쥐나무:  나무 꼭대기 가지마다 박쥐들이 기생하며 매달려 있고 낮인데도 나무에서 나르고 활동하고 있다.

 

 

                          (사진: 낮에도 활동하는 박쥐들 모습)

 

4.     대포알 나무: 키가 얕은 푸른 나무에 둥글고 길쭉한 푸른 열매가 가득하게 달려 있어 모양이 마치 대포알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5.     티크 나무: 곧게 뻗어 올라간 큰 나무로 아래 둥치가 거의 돌처럼 단단하니 가구를 만드는 재료로 최상의 나무로 보인다.

6.     마호가니 나무: 이 나무도 재질이 단단하여 둥치가 아주 둥글고 크며 이곳에 많이 자라고 있다.

7.     소시지 나무: 열매로 달린 것이 마치 소시지처럼 둥글고 길쭉하여 붙여진 이름의 나무로 아주 기이한 모습이다.

이런 나무들의 대한 설명과 학명이 붙어 있다면 좋았을 덴데 아쉬움이 남는다.

이외에도 야자수가 뻗어나간 거리, 두 나무가 하나를 이룬 거대한 연리지 나무들, 큰 굵기의 대나무 군락, 지상에서 가장 크다는 자바버드나무, 거대한 벵갈 보리수 등 2 시간이 넘게 우리는 자연 속에 자라나는 나무의 신비함을 몸으로 체험하였다.

 

 

                        (사진: 거대한 자바 버드나무 모습)

 

이제 우리는 차로 “Nuwara Eliya”로 향해 출발하여 A-5 도로에 나오니 목적지까지 60km 의 거리다. 시내를 벗어나면서 경치가 달라지니 이제 차는 1000m 이상의 고원지대로 난 길을 구불구불 힘겹게 올라간다. 산자락 마다 차 밭이 질서 정연하게 펼쳐지고, 마치 푸른 융단을 깔아놓은 것처럼 장관을 이룬다.

차 밭 사이로 물이 흐르고 작은 폭포도 나타나니 이곳이 그 유명한 “Ceylon Tea” 가 생산되는 현장으로 “Nuwara Eliya” 지역이다. 해발 1830m의 고산지대로 연중 서늘한 날씨로 차 재배에 알맞은 조건을 갖춘 곳이다. 영국의 식민지 시절에는 귀족들의 휴양지였고 그로 인해 지금도 영국식 건물들이 남아있는 것이 많다.

 

 

                        (사진: 차 밭 위에서 떨어지는 폭포)

 

이곳에서 생산되는 차로는

 a) 하이크론 티: 이 차는 고산지대에서 재배되는 것으로서 영국 등 서구로 수출되는 것이고,

 b) 노크론 티: 이 차는 중간 산지에서 재배되는 종류로 주로 아랍계 지역으로 수출되며,

 c) 녹차 티: 이 차는 동양인들, 우리가 주로 즐기는 차 종류이다.

 여기서 재배하는 차는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며, 영국이 “Kenya”를 통치했을 때도 그랬듯이 이곳 Ceylon 을 지배할 때도 싼 노동력을 이용하여 이곳 산지에서 차를 재배하여 본국과 유럽으로 수출하고, 영국의 철저한 품질관리로 제 1 차로 인정한 이 지역의 농장 제품이 최고였다.

영국인들은 이곳의 원주민보다 싼 노동력으로 남인도의 타밀족을 이곳으로 이주시켜 차 밭에서 고용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훗날 타밀족이 북부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도화선이 되어 오랫동안 내전이 계속된 것이다.

버스가가는 도로주변의 경사지대는 모두 차 밭으로, “Delta” 등 회사명이 구역마다 붙어있고, 이곳의 차나무는 수령 60년이 넘으면 모두 제거하고 새로 심는다. 우리가 가야 할 “Nuwara Eliya”  아직도 3km 남았다. 어느덧 점심시간이 되어 가다가 경치 좋은 2층 테라스 식당에서 12:40~13:20까지 비페로 식사를 하며 이곳 특유의 바나나와 우유를 합한 음료를 맞본다. 테라스에서 내려다보는 계곡에는 폭포가 내려오고 건너 편 경사지는 푸른 차 밭으로 끝없이 자락이 올라가고 있다.

 

 

 

                           (사진: 누와라 에리아 지역의 산간 풍경)

 

다시 출발 하여 “Ramboda” 산 터널을 통과하여 나가니 이 터널은 우리기업인 경남기업이 시공한 것이라고 한다. 터널을 나가니 호텔이 서있고 계곡에는 2줄기의 폭포가 힘차게 떨어져 내리고 그 위로는 차 밭이 끝없이 산으로 이어졌다.

 

 

 

    8. “Blue Field Tea Gardens” 방문

 

“Nuwara Eliya”로 가는 도중에 우리는 “Blue Field Tea “ 공장을 방문한다. 산록 넓은 곳에 5층 규모의 공장건물에 우측으로 들어가서 우리는 직접 차를 가공하는 공정을 견학하기로 한다.

1)     단계: 푸른 차 잎을 따다가 모아놓은 곳으로 차 잎 아래로는 통풍이 되는 철망으로 넓은 길이의 네모난 곳에 차 잎을 수북이 쌓아놓고 밑으로 바람을 불어넣어 12시간 정도의 건조를 하는 곳이다. 바람이 밑에서 올라와 건조된다.

2)     단계:  기계를 이용하여 차 잎을 반으로 압축한다.

3)     단계:  압축한 기계에서 나온 차 잎을 마루에 뚫린 구멍을 통해 아래층으로 내려 보낸다.

4)     단계:  Rolling 지역으로 윗 층에서 내려 보낸 차 잎을 기계에 넣어 돌리면서 간다.

 

 

 

                                    (사진: 차 잎을 말리는 롤러 기계)

 

5)     단계:  Drier 지역으로 차를 찌고 말리어서 기계로 간다.

6)     단계:  Fiber Extractor 과정으로 여기서 고급만 골라내어 등급을 매긴다.

이러한 제조과정을 거처 1) “Ceylon Black Tea-(바삭바삭한 아로마 향의 차) 2) Green Tea(비타민 c함유 영양가 높은 차), 3) White Tea(솔 향과 노란색의 차) 3 가지를 내놓고 나머지를 5가지로 분류하여 차를 포장한다.

나머지는 5가지는 “Op”,  “Pekoe”, “Bop”,  “Bopf”, “Dust No 1” 으로 표시된다..

우리는 공장견학을 마치고 건너편에 있는 센터로 옮기어 이번에는 현장에서 생산된 차를 직접 한잔씩 마시고 한동안 휴식을 취한다.  휴게실 옆에는 직매장이 있어 여러 가지 차를 등급별로 전시, 진열하여 누구나 눈으로 확인하면서 구입할 수 있다.

우리는 다시 출발하여 차 밭으로 올라가다가 14:40분경에 “Mackwood” 차 공장 위에서 차 잎 수집상을 만나게 된다. 그 주변의 마을은 차 잎을 따는 여인들이 사는 곳으로 그녀들은 아침부터 차 잎을 따서 등에 멘 자루에 담아 수집상에게 가져와 자루를 수집 처 천장에 매달린 저울에 부대체 무개를 달아 대개 5~9kg으로 차 잎을 자루 채로 넘기며 카드에 kg 만을 기록하여 가지고 물러난다. 그녀들의 주거지로는 차 밭 밑의 허름한 하꼬방 촌으로 이어졌다.

 

 

 

                                     (사진:  딴 차 잎은 수집상에게 넘기고)

 

우리는 이제는 해발 1893m의 정점을 오르고 있다. 그래도 산 주위로는 차 밭이 계속되고 있다. 마침내 차는 산길을 힘겹게 올라 15:15 분에 “Nuwara Eliya” 시에 접근하니, 사람들로 붐비는 중앙시장 앞을 지나니 식민지 시대의 영국식 우체국 건물이 으젓하게 오른쪽 언덕에 서있고, 주위로는 영국풍의 건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제 차는 A-5 도로로 “Haputale”로 간다.  오늘의 숙소인 이곳의 유일한 호텔로 “Olympus Plaza Hotel”을 찾아간다. 조그만 곳이라 이정표에는 Haputale 가 안나오고 그대신 “Ballulla” 30km  라고 나온다. 차는 다시 언덕으로 오르면서 높은 고지를 향해 오르니 비로소 하푸탈레에 들어오니 이곳에는 이스람 사원도 보인다. 삼거리에서 차와 사람들로 붐비는 거리를 지나 9km의 이정표를 발견하고 다시 산 위로 난길을 힘겹게 오르니 차 밭 마을을 향해 기차길이 놓여있고 우리는 기차 길을 건너간다. 이 산 꼭대기까지 기차길이 부설되어 있다니? 이제는 비탈진 산록에도 차 밭이 가지런히 질서 정연하게 하늘로 뻗어 올라가면서 계속되고 있다.

 

 

9.   푸른 차 밭의 트레킹

영국인 경영자 “Lipton” Seat를 찾아서

 

이 주위에는 이름모를 아람들이 나무들이 줄지어 서있고, 고산 지대라 바람이 불고 있다.

립턴사의 창시자 “Thomas. J. Lipton” (토마스 존스턴 립턴)은 아일랜드 출신의 영국인으로 1850 510일 글래스고에서 태어났다. 립턴은 작은 식료품점을 하면서 새로운 광고 효과로 부자가 되었고 1894년 런던으로 이사를 하면서 백만장자로 성공하였고,백만장자의 재력으로 영국이 지배하던 스리랑카의 싼 땅을 매입하면서 차 재배를 하기 시작하고, 대규모의 차 재배의 성공으로 대영 제국의 국위선양에 기여한 공로로 1902년 기사작위를 하사 받는다.

<립턴>은 홍차의 대표적인 상표로 지금도 세계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곳의 차 밭은 영국인 “Thomas. J. Lipton”이 개발하여 현지인을 고용하여 차를 심고, 수확하여 본국으로 가져 갔다고 한다. 그는 이곳의 차를 개발하고 수송하기 위하여 이렇게 고산지대 까지 철도를 부설하여 콜롬보까지 연결하였다 한다. 말하자면 그는 우리나라에 일제가 들어와 군산일데에 쌀을 가져가기 위해 군산항을 개발하고, 한양을 공략하기 위해 경인 철도를 부설한 일제와 비슷한 일을 하여 소위 당시에는 실론 경제에 기여한 셈이다.

 

 

 

                                      (사진:고원 지대의 차 밭 풍경)

 

 정상에 오르니 조망이 터지면서 이곳의 유일한 호텔인 “Olympic Plaza Hotel” 에 도착하니 17:30분이다. 바람이 거세게 몰아친다. 구름이 몰려오면서 날이 갑자기 어두워진다.  비탈진 산 위에 지은 이상한 구조의 호텔 608호에 들어가니 격이 너무 떨어진다. 그로나 어쩌나? 이곳이 유일한 호텔 식 숙소라니?

그래도 뷔폐식 식사를 저녁에 하면서 Lion Lager Beer 로 속을 달래고 여행 정담을 나누다 내일을 위해 방으로 가니 추위가 엄습하여 문제이다. 어디서 외줄의 조그만 전기 스토브 한대가 들어온다. 휑하니 방은 넓으니 시베리아 같은 느낌이 드나 내일을 위해, 여행을 위해 인내심이 필요한 날이다.

이 튼 날은 한국에서는 크리스마스 이브 날이다. 오늘은 이 고산지대의 차 밭을 Trekking 하는 날인데 바깥으로는 비가 세차게 쏟아지고 있다. 안개가 끼어 지척도 분간하기 어려운 시계니, 눈이 시리도록 푸른 차 밭 사이를 트레킹 하겠다는 것은 한낱 꿈이었던 것이다.

비가 너무 와서 출발을 멈추고 한동안 쉰다.

비가 오는 속에 봉고차를 동원하여 우리는 이곳 “Haputale” 에서 영국인 “Thomas Lipton” 씨가 개발하고 경영하였던 차 밭으로 향한다. 봉고에서 내려 트레킹을 시작하면서 언제든지 비가 오거나 힘이 들면 봉고에 탈수 있게 봉고는 차 밭 사잇길로 우리를 뒤 따르고 우리는 차 밭 사이 언덕길로 서서히 오른다. 경사도가 60도 정도 되는 차 밭을 지나 차 잎을 따는 남인도 출신의<타밀인>들을 만나 사진으로 담고 눈인사를 하면서 차 밭을 지나 흰색의 차 꽃도 보고 잘 가꾸어진  차 나무들을 보면서 오랫동안 차 밭을 관리해온 이들의 힘든 노동의 현장을 가슴으로 느껴본다.

그의 차 밭은 산정상에 능선 자락에 개발된 곳으로 그가 앉았던 높은 자리를 기념하기 위해 “Lipton Seat” 라는 곳을 만들어 놓았다 한다.

 

 

                           (사진: 차 잎은 따는 원주민 남성)

 

우리는 08:10분에 출발하여 그의 농장 입구에 도착하여 입장권을 내고 입장하여 정상까지 2.5km를 걸어서 가면서 차 밭 사잇길을 트레킹 한다.

바람이 불고 오던 비도 멈추어 그런대로 시원하나 짙은 안개가 수시로 밀려오고 내려가기를 반복하니 마치 구름속에 신선인양 생각된다. 비가 온후라 미끄럽고 차 밭 고랑이 패여 있어 상당히 어려우나 잠시면 또 짙은 농무(濃霧)가 몰려와 시야를 가린다. 구름이 몰려오면 길도 차나무도 사람도 구별하기 어려운 곳이니 이곳에서 일하는 노동자의 모습은 어떠하랴? 차나무는 높이가 60센치 정도니 차 잎을 따기에도 허리를 굽혀야 하니 아주 중노동이라고 생각된다.

 이곳 저곳 비탈진 차 밭에는 이른 아침 안개 끼고 바람이 불어도 노동자들은 쉴새 없이 차 잎을 따서 자루에 담는다. 그들의 얼굴이 검기는 하나 안개에 가리어 분간하기도 어렵다. 여자도 무리를 지어 차 밭으로 들어가고, 비탈이지고 어려운 곳에는 남성들이 투입되어 차 잎을 따고 있다. 차 밭을 오르면서 이곳 사람들과 눈인사를 하면서 어느 틈에 홍차의 대표상표 <립턴>사의 <립턴사장>이 높은 곳에 앉아서 차 농장을 관리하고 휴식을 하던 립턴시트로 향한다.

 

 

                         (사진: 정상의 립턴 시트의 모습)

 

스리랑카는 1972년까지는 실론이라 불려진 인도양의 작은 섬 나라로 중국 인도와 함께 세계 3대 홍차 생산지로 실론티의 나라다. 처음 중국에서 수출한 것은 녹차였으나 차가 운반 도중에 변하여 영국인들은 차를 찌고 다시 가공해 붉은빛과 새로운 향의 홍차로 만들어 귀족사회에서 가장 인기있는 기호음료가 되었다.

영국이 스리랑카를 식민지로 지배하던 시절 하프탈레에는 많은 커피농장들이 있었으나 1869년 섬 전역에 퍼진 커피 잎 마름병으로 커피농장은 점차로 사라지고 그 자리에 인도의 아삼티 나무를 심어 캔디지역의 하푸탈레 분지에 차 밭이 생기게 되고, 해발 2000m 내외의 열대 고원지대의 비교적 서늘하고 일정한 기온을 유지하는 이곳 날씨는 사시사철 끊이지 않는 안개를 내뿜는 청정지역으로 고품질의 차 재배를 가능하게 하였다. 그로 인해 남인도<타밀인>들을 이주시켜 차 밭 노동자로 일하게 하였다.

형상도 알아보기 어려운 날씨 속에서 남녀 일꾼들이 차 잎을 부지런히 따서 자루에 넣는다.  오솔길, 구부러진 도로를 걸어 얼굴도 알아보기 어려운 농무속에서 분주한 손놀림으로 차 따는 사람들을 보며 우리는 걸어서 마침내 정상인 “Lipton’s Seat”에 이르니 이곳에는 그의 역사가 기록된 안내판이 안개 속에 알아보기도 어려울 정도로 농무 속에 가려 있다.

우선 이곳을 찾아온 여행자들에게 홍차를 끊여주는 작은 찻집에서 우리도 홍차를 주문하고 기다리면서 배달해온 홍차를 맛있는 캔디와 함께 먹으며 립턴 차 농장에서의 차 밭 트레킹을 즐기는 여유를 부려본다.

이곳에는 “Dambatenne Group History”가 소개되어 있다.

이곳 담바타네 차원은 1800년대 후반부터 1930 년대에 이르는 40년이 넘는 기간 동안 “Thomas.J. Lipton” 경이 소유하여 왔고 그는 이곳을 사랑하였다.

그는 그의 농장 “Lipton Seat” 정상에서 자연과 미래의 전망을 생각하며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큰 즐거움을 선사하였다. 1800 m 가 넘는 가파른 경사진 곳에 자리잡고 전방 위의 모든 아름다운 경치를 보는 것은 맑은 공기와 함께 크나큰 즐거움이었다.

Lipton 경은 동시에 담바타네 공장에서 만들어진 아로마 향의 맛있는 차로 인한 영감을 간직하고, 그는 그의 주변사람들과 많은 사람들에게 자존심을 안겨주었고, 그는 1890년에 ”Messrs Lipton Ceylon Limited” 라는 회사를 설립하였다.

현재로 이 차밭(다원)“Lanken Tea and Rubber Plantations Limited” 라는 회사가 관리하고 있다.

그의 다원으로 올라오는 곳곳에는 이곳의 자연이 선사하는 것을 여러 가지 표현으로 써서 읽게 하고 있으며, 자연이 인간에게 얼마나 고귀한 것인가를 일깨워 준다

공기, , 토양은 인간에게 제공되는 가장 자유로운 선물이다. 누구나 이 선물을 나누어 줄 수는 없다.  사람은 누구나 자유롭게 생각하고 숨쉬고 걸어 다닌다. 그럼으로 누구나 똑같이 자연의 혜택을 누릴 권리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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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양을 파괴하는 나라는 스스로 무너진다. 산림은 우리땅의 허파이고, 공기를 정화시키고, 사람들에게 새로운 힘을 주는 것이다.” 등 교훈적인 구절이 여기저기 써있다.

안개가 바람에 거치면 멀리 아래로는 구불구불 휘어진 차 밭 사이로 그림처럼 나타났다가 사라지고를 반복하는 사이에 집들이 곳곳에서 지붕을 내민다. 안개나 비가 자주 내리고 거치면 푸른 차 밭이 줄지어 계단식으로 나온다.  이곳 “Lipton’s Seat”에서 3.3km를 걸어서 내려가면 골짜기에 마을이 있고, 학교도, 병원도 있다. 이 일대는 천연의 차 생산지로 기후, 물 등의 조건이 가장 잘 가

 

 

 

                        (사진: 차 잎을 따는 맨발의 여인들-막간 휴식)

 

 

 

                          (사진: 산간 마을에서 만난 맨발의 아이들 )

 

추어진 곳이다. 둘레가 산으로 둘러 쌓이고 골짜기는 온통 차 밭으로 경사 60~65도 정도의 가파른 곳으로 안개는 쫓기듯이 흩어져 내려오고, 그 사이에 차 밭 머리에도 야생화는 흐드러지게 피고 있다.

우리는 차로 Haputale hotel 까지 내려와 11:30분에 시내에 들어오니 우리가 어제 투숙했던  “Olympus Hotel” 사장이 버스에 올라 인사하고 카렌다와 차 선물을 나누어 주니 그는 이 하푸탈레 시장이었고, 이 시는 산언덕에 자리잡은 차 생산의 배후도시다.

 우리는 시내로 내려와 “Silver Rest”에서 간단한 중식을 한다.  이곳은 레스또랑과 Bakery 가 같이 있으니 제대로 서비스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차는 A-4  “Ratnapura 27 km 지점을 지나 3거리로 내려오니 이제 “Colombo” 114km 지점으로 우리는, A-8 “Panadura” 34km 지점에서 서쪽 해안가 도시인 “Galle”로 향해 고속도로 나가기 위해 달려가니 처음으로 4차선의 탁 트인 고속도로가 나오고 차가 드물고 물동량이 전혀 없는 도로이다.  승용차만 가끔 지나가고 도로변에는 고무나무가 끝없이 이어지고 있으니 이 고속도로는 남쪽 “Galle”로 부 터 콜롬보 이전에 “Maharangama” 까지 이어지는 도로로 작년 2012. 12.6일 개통된 이 나라의 최초의 고속도로이다. 현재 유일한 고속도로이며, 현재 몇 군데 고속도로공사가 진행 중이다.

E-01 고속도로의 시발점 “Galle” 시는 포루투갈, 네델란드 사람들이 들어와 개발한 도시로 주변에는 야자나무가 무성하다.

우리가탄 버스는 Galle 휴게소에 이르니 휴게소 안에도 레스또랑과 제과점이 함께 있어 아까 점심때의 식당의 의문이 풀리었다.

 

 

 

                                  (사진: Galle 고속도로 준공 기념 판)

 

 대통령 “Mahinda Rajapaksa” 2012. 12. 6일에 이 도로 개통식에 참석하여 제막한 기념석판이 휴게소 안에 설치되어 있다. 화장실은 밖에 따로 떨어져 있는데 소변보다 대변위주로 남성 칸이 되었고, 세척도구가 마련되어 있어 우리네 문화와는 다른 양상이었다. 소변기는 도합 6개니, 공간 활용이 아쉬운 곳이다. 우리가 타고 있는 버스는 최신형이라도 중국산 이라 시속 80km가 고작이다.

우리는 Galle IC 에서 나오니 개 2마리가 출구 앞 도로에 앉아 있다. A-6 Galle 32km, 콜롬보 96km 지점을 통과 하니 기찻길과 구 도로가 만나면서 인도양 해변이 전개된다.  야자 나무가 높게 늘어선 바닷가에는 사람들이 많이 있고 모래톱은 적어 바닷물이 바로 도로까지 밀려든다.

마침내 멀고먼 거리를 달려와 “Hikkaduwa” 에 있는 “Chaaya Hotel” 203호에 들어오니 X-Mas 이브로 어둠이 내리는 가운데 바다가 창 너머로 밀려온다.

 

  10. Galle- 식민지 시대에 건설된 도시

 

Galle 는 성서에 등장하는 도시로 이스라앨의 솔로몬왕이 시바 여왕에게 줄 보석을 구하기 위해 사람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오래된 도시이다. 포루투갈에 이어 16세기에 스리랑카를 식민지로 삼은 네델란드에 의해 요새도시로 건설 되었다. 도심지에는 네델란드인들이 건축한 주택과 교회, 박물관이 남아있다. 이로 인해 Galle는 해변가와 어울려져 옛 유럽을 보는듯하다. 유럽과 남 아세아의 건축이 복합적으로 이루어져 요새도시로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되어 있다.

우리와 10여 일을 함께하고 있는 버스는 “Royal Holidays” 사로 기사는 안토니이고 조수는 쿠살이라는 스리랑카인이다.

 기사는 기독교인으로 매일 아침 버스를 운행하기 전 버스 운전석 앞에 조그만 예수상에 기도하고 일과를 시작한다. 반면 조수 쿠살은 불교도로 매일 아침 조수석 앞에 차려놓은 조그만 불상 앞에 합장으로 시작한다. 조수는 매일 아침 출발 전에 우리에게 꽃을 하나씩 나누어 주고 나머지는 불상 앞에 장식을 한다. 우리 버스 안에는 스리랑카의 기독교와 불교가 공존하는 작은 신앙세계가 형성되어 있어 무척 다행스럽다.

 

 

 

                         (사진: 버스 앞에 X-Mas Tree 장식)

 

오늘은 고국을 떠난지 9일째 되는 날로 크리스마스 이브 날이다. 버스 앞 좌석 앞에 조그만 장식 트리를 세우고 창문에는 풍선, 종 등이 메달린 반짝이 줄로 연결하여 앞에서 뒤로 장식하고 버스 앞뒤는 별도로 장식을 하여 멀리 이국 땅에서 나마 색다른 종교의 융합을 보는듯하여 마음이 편안하다.

오늘은 좀 늦게 출발하여 아라비아인들이 최초로 들어왔던  “Galle” 지구로 간다. 묘지가 있는 바닷가를 지나 간다.  이곳은 계피의 생산지로 계피가루와 계피기름이 비싸다 한다.  “Galle” 기차역과 버스 터미날을 지나 가니 이 근처는 5년 전 스리랑카 해안을 덮친 해일로 수많은 목숨을 앗아간 곳으로 바로 이곳이 심각한 재난을 입은 곳이라 한다.

 당시 스리랑카를 방문 중 이었던 독일의 헬무트 콜수상이 이 참상을 보고 귀국하여 스리랑카의 복구를 적극적으로 도왔다고 한다.

 비가오니 바닷가도 한산하여 우리는 콜롬보로 가는 고속도로를 타고 간다. 먼저 “Gogolla Village”해안가에 들러 이 지역의 전통 낚시를 하는 것을 보기로 한다.  

바닷가에 세워놓은 말뚝 위에 올라앉아 바닷물이 들어오는 순간 낚시를 드리어 2 인중 젊은이가 파란 생선 한 마리를 낚아 올리는 시범을 보여준다.

 어부인 낚시꾼은 연기자와 같이 낚아 올린 물고기 한 마리를 가지고 사진을 함께 찍으며 제대로 포즈를 취하여 준다. 이 낚시를 보여주는 관광은 한번에 30$이니 좀 비싸고 싱거운 행사이다.

 

 

 

                                   (사진: 해안가에서의 전통 낚시 모습)

 

 다시 출발하여 되돌아오는 길에서 새로운 사리탑을 봉안하러 가는 행렬이 지나간다. 맨 앞에 경찰 차가 갠보이하고 그 다음에 사리탑을 실은 차가 가고, 그 뒤로는 뒤따라가는 신자들이 탄 버스가 계속하여 오니 무려 21번째의 버스가 따라간다. 

우리는 이제 “Galle” 시에 이르러 해안가 성벽 요새를 비가 오는 가운데 방문한다.  바닷가에 성벽을 쌓고 요새화하여 대포를 장착했던 곳이 남아있고 성벽도 견고하게 1km 이상이 바닷가 해안으로 연결되어 등대가 있는 곳까지 우리는 답사를 계속한다.

1932년에 세운 등대가 서있고, 그 앞에는 1638년에 지은 오래된 건축물도 남아있다.  이곳은 이포구에 처음 상륙한 포루투갈인이 1300년 부 터 100년간을 지배하면서 인도양을 공략한 거점이었고 그 후 1602년까지 200여 년 간을 네델란드 인이 이곳 Galle 지구를 지배하면서 무역의 전진기지로 삼았던 곳이다.  네델란드인들은 그들의 세력하에 이곳에 성채를 더욱 견고하게 구축하였고 영국의 세력이 들어와 그들이 물러날 때까지 학교와 교회도 세웠다.  우리는 바닷가 성벽 끝까지 걸어가 서구 열강의 옛 발자취를 살펴본 후 구 도시 안으로 들어간다.

옛날 도시 안에는 당시의 건축물에 남부 주 고등법원이 들어있고, 조금 올라간 곳에 박물관이 자리잡고 있다. 오늘이 휴무일이라 박물관에는 입장이 불가하고 밖에 해안가에는 당시에 항구 내에 드나들던 배가 내리던 닷과 실물크기의 배등이 야외에 전시되어있다. 

 

 

 

 

                                       (사진: Galle 시내 성공회 건물)

 

구 시가지를 올라가니 영국식 건축물의 우체국이 나오고, 좌측으로 1871년에 세운 “Anglican Church”(성공회) 건물이 고색창연하게 위용을 자랑하고 있고 지금은 보수를 위해 모금을 한다는 안내 광고가 앞에 붙어 있다. 우체국 옆으로는 네델란드의 개혁교회(Dutch Reform Church)가 당시의 모습대로 서있고 안으로 들어가니 우리가 네델란드 본국에서 본 교회내부와 같았고, 교회 내 입구 바닥에는 초창기에 성현들의 무덤이 즐비하다.

이렇게 우리는 Galle의 중세도시의 모습을 둘러보고 다시 아침에 나갔던 “Hikadura Chooya Hotel”로 돌아와 잠시 휴식을 취한 후 11:55분 경에 이제는 “Madu Ganga” 로 출발하여 간다.

 

 

11.마두강가 에서 Mangrove Cave River Safari를 하며

 

우리는 이제 Mangrove cave Restaurant에서 12:25분 부 터 바다 가재 요리의 4코스를 즐기면서 마지막으로 가는 여행 일정을 정리하려 한다.

 식사 후 우리는 그 앞에 선착장으로 나가 “The Mangrove Cave River Safari” 를 출발하기 위해  배에 나누어 타고 호수로 나간다.  호수는 인도양과 연결이 되어 있어 물이 언제나 그득하다.  열대 망그로브 숲 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오기를 반복하면서 넓은 호수수면을 가르고 달린다. 50여 개의 섬 사이로 통통배는 기름 냄새를 풍기며 나아가니 이구아나가 호숫가 나무 위에서 잠자고 있는 듯이 달라붙어 꿈적도 하지 않는다.  호수에는 물고기를 잡는 어부가 가늘게 생긴 배를 타고 낚시를 하는 모습이 여기저기 보인다.  물고기를 한쪽으로 몰아가기 위해 물속에 나무기둥을 촘촘히 밖아 좁은 수로로 물고기를 몰아가 낚아 올리는 방법으로 수면에 나무울타리를 박아 놓은 곳으로 배를 몰아가면서 어부들의 낚시를 살펴본다.

 

 

                                                 (사진: 호수 Safari 모습)

 

 섬 중앙에 나아가서 외로운 섬으로 올라가니 그곳에는 계피나무가 무성하여 나무를 채취하여 거죽을 까고, 그 안의 속 껍질을 벗기어 말리어 계피가루를 만드는 원주민의 시범을 한동안 주의 깊게 바라본다. 그들은 이 섬에서 이렇게 계피가루를 만들어 관광객이 상륙하면 한동안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고 마지막으로 계피가루와 기름을 판매하는 것이다. 한 봉에 3$ 3개씩 묶어 판다.

계피 가루는 모기향에도 첨가하며 식용으로 쓰는 것은 비싼 편이다.

다시 배를 타고 호수를 누비면서 신선한 숲을 통과하여 한 시간 이상을 유람한 후 바다로 나가는 곳까지 갔다가 돌아와 선착장에 내린다.

 이제 지방에서의 스리랑카를 탐방하는 코스는 모두 마감하고 버스를 타고, 해안도로를 따라 수도인 “Colombo”를 향하여 해안도로를 타고 북상한다. 가면서 스리랑카의 지방 신을 모시는 사원을 지나니 이곳도 학생들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고 또 5년 전 쓰나미로 희생된 사람들의 묘지와 기념비가 세워진 곳을 지나간다,

 버스는 일로 콜롬보를 향하여 옛날 구 도로와 때로는 2차 도로로, 4차 도로로 바꾸어 가며 가니 도로변에는 상가와 주택이 연속으로 이어져 있고 좌측으로는 기차길, 그 너머로는 인도양의 바다가 물결을 일으키고 있다.  도로는 배수로도 없고 보행로도 평면이다.

 16:40분 콜롬보시로 가까이오니 비로서 4차선 도로가 나오며 중앙분리대, 보행도로를 정비 중이다.  우측으로는 국내공항이 보이고 처음으로 신호등이 등장하고, 노변으로는 우리의 삼성,” “LG” 의 전자제품 상점이 보이고 사거리에 이르니 고가도로가 나오고 이제야 시내 500 m 전방에 이르렀다.

이제부터는 도로가 제 모습을 갖추고 보도가 구분되어 있다.

해안가 도로로 나와 시내로 들어오니 Galle행 기차길이 지나가고 이제는 시내의 아파트 등 고층 건물이 보이면서 17:10분 해안가에 이르니 시내 야시장이 스는 곳이다.  바닷가에 “TAJ” 호텔이 가장 높고 현대적 건물이다. 우선 “TAJ – Samudra Hotel” 366호에 여장을 풀었다. 

호텔 로비에는 머리를 깎은 청년이 구형 피아노에 앉아 <에리자를 위하여>를 들려주며 우리를 맞이한다.

 

 

우리는 18:40분 호텔에서 나와  “Ministry Of Crab” 식당에서 X–Mas라 술도 팔지 않는다는 안내에 따라 빵, 닭고기, 복음 밥에 Crab 한 마리를 함께하는 색다른 식사를 하였다.  특이한 곳은 기름에 튀긴 Crab의 맛이 특이하고 좀 짠 편이다. 식사를 마치고 해안가로 나와 야시장을 한동안 산책 후 하루를 마감한다.

 

 

 

12.수도 Colombo 시내를 돌아보며

 

 

오늘은 이 인도양의 조그만 섬나라를 떠나는 날이다.  수도 콜롬보는 교통체증과 정비되지 않은 환경 때문에 혼잡하고 어지럽다. 이 도시는 예부터 포루투갈인, 네델란드인, 영국인의 손을 거처 도시발전보다는 그네들이 식민지에서 획득한 물자를 본국으로 실어 나르기 위한 항구도시로 발전하여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450여 년의 외세의 지배 후에 이제는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자 인구가 백만 명이 넘게 모여 사는 복잡한 도시로 발전하고 있다. 그리고 행정수도는 인근의 도시로 옮겨가고 있다.

 오늘은 천천히 시내에 있는 “Seemamalaka Shrine”(시마말라카 사원)으로 간다.  이 사원은 아주 이색적인 건축물로 물 위에 3개의 건축물을 연결하여 지은 사원으로 스리랑카의 세계적인 건축가 “Geoffrey Bawa”(제프리 바와)의 작품이다.

 

 

 

                        (사진: 호수에 세운 시마말라카 사원 전경)

 

이 사원은 시내의 호수 물위에 지은 것으로 1978년에 지는 현대적인 사원이다. 승려가 거주하지 않으며 출가하는 승려들의 의식행사를 위한 교육용 사원이다.

건축형태는 시내의 베이라 호수 위에 3개의 정자를 세우고 다리로 연결하여 물위에 떠있는 형태이다.

가운데 사원이 중심으로 안에는 석가상이 모셔져 있고 밖에 네변에는 여러 부처상이 둘러쌓고 있다. 왼쪽 다리 건너에는 가운데에 커다란 비석이 서있고 오른쪽 다리건너 사원에는 입장이 불가능하다. 이 사원은 건축양식으로 보면 옛날 사원을 도시에 가져다가 도시 건축에 어울리도록 한 현대적 해석의 사원으로 손꼽히고 있다. 마침 사원 안에서는 결혼식이 거행되고 하객들이 모여 식사 중이다. 신랑, 신부는 스리랑카의 전통의상에 모자를 쓰고 있어 우리들의 관심을 끌었다.  

돌다리를 건너 밖으로 나오니 길가에는 커다란 코브라뱀 한 마리를 갖고 함께 사진을 찍으라고 우리는 유혹하는 뱀 꾼이 나무 밑에 앉아서 손님을 부른다.

 

 이제 마지막으로 강가라마 사원(Gangarama Temple)으로 간다.  이 사원은 수도 콜롬보 도심에 있는 스리랑카를 대표하는 불교사원이다.  마치 우리나라의 종로 복판에 불교 조계종 본산인 조계사와 같은 위치에 있는 사원이다.

1885년 불교재건 운동을 주도한 스리나가야스님이 설립한 곳으로 부처의 사리가 안치되어 있다. 이곳에는 대법당, 역대 불교 고승들의 흉상과, 유물이 보관된 박물관, 각국의 불교 단체나, 나라, 신도들로부터 여러 가지 형태의 불구, 부처님, 불상 등을 기증받아 전시한 곳으로 좁은 공간에 넘쳐난다.  건축 양식도 여러 나라 양식이 섞이어 다양하다. 여기에 모셔진 불상도 너무 다양하고 불화도 다채롭다. 마지막으로 신발을 벗고 차분하게 이렇게 혼합된 불교 유물을 천천히 감상해 보기로 한다.

 

 

                         (사진: 다양한 불상을 모아 전시한 모습)

 

이 사원에는 크고 작은 불상들이 다양하여 갈 비하라에 있는 와불도 있고 폴론나루와의 있는 불상도 있으며 다양한 불상을 볼 수 가 있다. 이를 대충 정리해 보면,

1)등신불 부처님, 2) 여러 가지 금불상-금고 안에 보관되고, 아주 작은 금불상은 렌즈를 통해 볼 수 있고 3) 영국 여왕이 선물한 부처님, 4) 한국이 기증한 부처상 (서울 성북구 성북동 육하사 기증품), 5) 부처님 앞에서 불심에 축원을 내리는 일 등이 이 사원에서 특이한 것이다.

이 사원에서 가장 주목하고 싶은 것은 이승에서 살아가다 죄를 지으면 내세에서 어떻게 되는가를 그림으로 그린 것이 26개나 되어 아주 흥미로운 그림이 연결되어 하나의 이야기를 형성하고 있다.

그중에 하나를 인용해 본다.

1)     분노의 삶: 초조와 분노는 인생의 조화를 깨뜨리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끊임없이 분노에 찬 생활을 한다. 마치 담배연기와 같이 내면에서 나오는 분노는 가정생활과 우정을 파괴한다. 그런 끊임없는 분노는 인생의 실패의 원인이 된다.

 

 

 

                                (사진: 분노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그림)

 

2)     맛있는 음식을 먹는 사람: 맛있는 음식을 즐기는 사람은 향수를 뿌리는 것과 같으며, 좋은 옷을 입는 사람은 죽기 전에 일시적으로 무대에 서는 연기자와 같은 사람이다.

인생의 살아가는 가운데 분노하고 증오하며 남을 미워하며 사는 것은 결국 자신을 파멸로 이끄는 것이다. 불교에서 지향하는 마음의 평정을 위해 끊임없이 수행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2번째의 인용은 지나치게 맛있는 음식을 탐하는 사람과 화려한 옷을 입고 자신을 과시하는 사람은 마치 무대에선 연기자와 같이 일시적인 것이다.   

모든 유적 유물 탐방이 끝나고 이제 건축가 “Geoffery Bawa” 가 설계하여 지은 건물로 생전에 사무실로 쓰다가 지금은 2층에 박물관이 있고 아래층에는 레스또랑으로 쓰이는 곳에서 스리랑카의 마지막 만찬을 즐기고, 스리랑카의 유명한 티를 팔고, 고유한 직물 인형을 피는 상가로 이동하여 한 시간 동안 즐거운 여행”(Serendipity) 의 마지막을 장을 보내고 공항으로 이동하여 다시 춥고 음산하고 시끄러운 나라로 돌아왔다. 

 

에필로그 

스리랑카를 탐방하기 전 2차례 불교의 본산지인 인도를 탐방하였으나 오랫동안 힌두교, 자인교, 이스람교 등 여러 종교가 모두 혼합되어 불교 본연의 모습을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이곳 작은 섬나라에는 인도대륙에서 건너온 불교가 그래도 오랫동안 섬에서 발전하여 아누라다푸라, 폴론나루와, 캔디, 시기리아 에서 원래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어 큰 행운이었다.

스리랑카는 섬나라이기 때문에 외부의 침입세력이 불교를 훼손하는 일은 그렇게 크지는 않았다.

그러나 불교가 인도에서 북방으로 티베트, 네팔, 중국, 한국으로, 남방으로는 미얀마, 타이,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인도네시아 등으로 전파되면서 점차 인도에서는 쇠퇴하여 중세 이후에는 모두 세력을 잃고 아누라다푸라 등 스리랑카의 불교 본산도 세월에 무치고 밀림에 덥힌 채 오랜 세월을 보내었다.

 더구나 섬나라 이면서도 고대부터 베다족이 살아왔으며, 싱할라 왕조를 형성하여 불교국가를 이루었으나 BC 6세기경 부 터 인도 남부에서 타밀족이 침입하면서 지배를 당하였고, 11세기경부터 포루투갈에 156(1502~1658), 네델란드에 137 (1659~1796), 영국이 이 섬에 최후의 왕국인 캔디왕조를 멸망시기고 151(1797~1948)을 통치하면서 이 섬나라는 3개의 서유럽 국가에게 도합 445년간의 식민지 통치를 받아왔다. 인도에 독립과 함께 실론도 1948년에 독립국가가 되었고, 실론도 스리랑카 공화국으로 국명을 바꾸었다.

포루투갈 인들은 인도와 이곳에서 향신료, 비단 등을 가져가서 본국의 부를 축적하면서 이곳의 “Galle”와 같은 항구를 개발하고, 네델란드로 마찬가지로 동방항로를 개발하여 보석과 이곳의 풍부한 농산물 등을 본국으로 가져가기 위해 항구를 발전 시킨 것이다. 그들의 발자취가 아직도 그대로 남아있어 조그만 서구의 나라인 포루투갈, 네델란드의 해양국가로서의 서양문명이 끼친 영향을 우리는 도처에서 볼 수 있었다.

 또한 그들의 침략에 뒤이어 들어온 영국의 세력은 아프리카는 물론 인도, 스리랑카 등 이 지역에서도 수백 년 간을 영향력을 행사하여 해가 지지 않는 해양국가로서의 위상을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영국이 이 지 역에서 식민지 경영으로 노동 집약적인 산업으로 커피재배를 시작하면서 점차로 이 지역에 맞는 홍차를 재배하여 본국으로 방출한 후로는 홍차와 더불어 고무재배, 계피재배가 주 산업으로 되었다.

산지에서는 차 밭에서 노동자로 일하며, 스리랑카인은 독립 후에도 어렵게 생활하고, 평야지대에서는 농업을 주로 하며, 수공업으로 직물공업을 발달시켜 생활을 주로 하며 대부분 소박한 생활을 영위하여 왔다. 근래에 와서 내전이 종식되면서 새로운 국가발전을 주도해가면서 점차 나라의 사정이 호전되고 있다.

영국은 아프리카 동부에서 시작하여 켄야, 탄자니아 등 남부 남아공에 이르기 까지 커피, 농산물, 광산물, 특히 다이아몬드 등을 채취하여 본국으로 가져갔다. 그로 인해 아프리카 종단철도도 놓았듯이 이곳에서도 섬의 중심부인 고원지대에서 노동 집약적인 커피와 차를 재배하고 이를 콜롬보 항구를 통해 본국으로 가져가기 위해 철도를 부설한 것도 같은 이치이다. 

수백 년이 흘러가도 지금도 대영제국의 영향력을 이곳에서도 느낄 수 있다. 말하자면 그들은 식민지를 지배하면서도 그곳의 주민들의 생활의 개선에 중대한 역할을 하였고, 지역발전에 기여한 관계로 아직도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또한 오랫동안 문화발전의 영향을 주어 근대화로 발전하는데 기여한 것도 무시 할 수는 없다.

 우리처럼 일제의 착취당한 기간이 작아도 영향이 지대하나 그들은 450년이라는 장구간 기간을 함께 하면서 그 영향을 받아 들인 것으로 더디나 나라 발전의 초석이 되었다.

 

 

                                 (사진: 공항에 세워진 영연방회의 개최 안내 아치)

 

그 예로 2013 11 15~17일 사이에 이곳 콜롬보에서는 42“Commonwealth Heads of Government Meeting”<영연방회의> 가 개최되었다.

과거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았던 지구상에 53개국이나 되는 많은 나라가 한때는 대영제국의 깃발아래 식민지였다가 이제는 독립하여 하나의 연합체를 형성한 것이다.

1931년에 발족하여 현 영국의 엘리지베스여왕이 이 회의의 상징으로 수장이다.

스리랑카도 지난 30년 가까이 계속된 타밀 반군과의 내전을 겪은 아픔도 바로 식민지배의 오랜 영향 때문이다. 이제 이 나라도 많은 희생을 치르고 나라가 안정되어 발전하기를 빌면서 이 글을 마치려 한다.  –The End-

 PS: 여행기를 쓰는데 참고한 것. 1 .”What’s on, 2. Tourist Map of Sri Lanka, 3. Sigiriya, 4. Royal Botanic Gardens. 5. Guide to Polonnaruwa 등으로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지적하여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