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01.12~15
일본규슈구중산등산기
<1786m>
글, 사진:김 한종
(사진 :구중산 등산로 개념도)
프로로그
최근 해외여행을 국내외 사정으로 가지 못하면서 우리는 국내 등산을 열심히 다녀 지난해에는 102회나 다니게 되었다.
이번에는 못처럼 해외 등산의 기회가 마련되어 일본 규슈의 오이타현의 구중산(九重山)<1786m>과 아소산(阿蘇山)<1592m>을 동시에 등산을 하기로 하였다.
우리 분당의 산수정 산악회는 매년 52주를 거의 빠짐없이 산행을 거듭하여 작년에도 40여 회나 함께하면서 매년 초에 해외산행을 거듭하여 이번에도 우수회원들에게 함께 산행하는 기회를 제공하게 되었다.
인천공항에서 이번에는 저가 항공사인 T-Way 항공을 이용하기로 하였다. 국내에는 5개사의 저가항공사가 이제는 동남아 노선을 거의 다 카버하면서 승객의 51%나 이용하니 우리도 이를 이용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14:45분에 출발하기로 된 T-298기는 15:03분이 되어서 활주로로 이동 이륙을 준비하였다.
쾌청한 날씨에 해가 쏟아지는 활주로로 나가서 이륙준비를 하니 기내는 좌석이 반정도 공석으로 비어진 160석의 상당히 큰 비행기이다.
인천 앞바다 섬들이 점점이 떠있는 듯이 보이면서 오후에 햇살에 섬 해안가의 물살이 하얗게 일고 있다. 어느새 아파트 단지위로 날아 기수는 남으로 향하여 서산반도로 남하하면서 고도 11000m, 시속 1000km 로 한반도를 가로질러 남하하면서 흰 구름 위로 나르니 밑은 바다처럼 보이고 15:55분경이 되니 규슈 상공에 진입하여 일본의 소도시가 내려다보이고 해인가로 흐르는 강이 굽이쳐 보인다.
아래로는 나즈막한 농촌주택이 보이고 널널한 평야지대가 나오면서 16:13분이 되면서 앞의 유류저장 탱크가 내려다보이고 화력발전소 굴뚝에서 흰 연기가 피어 오른다. 착륙준비로 기내가 요란하고 바다 위를 얕게 나르면서 어느새 오이따 비행장으로 내려간다.
공항은 시골풍경의 단층 건물로 계류장에 비행기도 보이지 않고, 아주 한산하다.
일본 여행을 10여 차례 하였으나 본격적인 일본과 한반도의 관계를 연구한 일은 없었으나 이번에는 최근에 한일 관계가 “아베” 수상이 집권하면서 일본의 과거사 부정으로, 또 독도의 영유권 주장으로 상당히 선린 관계가 소원해지는 원인을 한번 조명하는 차원에서 다루어 보고자 한다.
1) 우선 백제와 일본 과의 관계를 검토해 보자.
AD 663년 백제가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의 의해 멸망하자 망국의 슬픔을 안고 부흥을 꿈꾸며 일본으로 백제의 유민이 집단으로 망명하였다.
일본 서기에 의하면 664년에 백제 마지막 의자왕의 왕자인 “선광”이 “나이와”에 와서 살았다는 기록이 있으며, 당시 665년에 백제인 400여명, 666년에는 2000여명이 이주하였고, 그 가운데는 왕족, 귀족, 기술자, 장인 등이 많아 일본에서 관직을 주었다는 기록이 나와있다.
그로 인해 일본에서 한문학이 성하고 또한 불교문화가 전달되어 당시 일본에 법륭사 건축과 동대사 불상 등이 만들어 졌다는 기록도 남아있다.
더욱이 일본 천황인 제 30대 “비티쓰”(敏達)왕은 백제 왕족이라고 “속 일본기”에 기록되어 있다.
당시 일본에 영향을 준 백제인으로 다음과 같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담징(曇徵): 그는 610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불교를 전파하고 역경, 서경, 시경 등을 전수하고 법륭사에 금당벽화를 그렸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2)아직기(阿直岐): 그는 근초고왕 때 사람으로 일본에 한문을 전수하고, 도검, 대경을 전달하였고,
3)왕인(王仁): 천자문과 논어를 전달하였으니 당시에 논어 10권 등,
4)아좌태자(阿佐太子): 백제 27대 위덕왕의 아들로 일본의 “민달천황”의 초상화를 그렸다 하며,
5)행기(行基): 일본에 토목기술을 전수라며 일본에 제방, 저수지 축조 방법을 지도하였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사진: 법융사 금당 벽화)
이러한 여러 기록으로 볼 때 당시에 백제와 일본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고 백제가 나,당 연합군의 공격을 받을 때도 군대를 보내 도와주었고, 백제가 멸망한 후에도 유민 들이 건너왔다는 일본의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또 중요한 것은 1874년 연구결과가 공개되었으니, 나라현 천리시 “석상” 신궁에 소장된 7개의 칼날을 가진 길이 74.9㎝의 이르는<七指刀>가 “백제가 일본에 하사한 것”이라는 기록이 칼의 몸체에 61자의 금상감(金象崁)으로 새겨졌다는 사실이 일본서기에 있다는 사실이 공개 되었다.
상기에서 우리는 일본측의 기록에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이조 시대에 와서는 조선통신사라는 사절을 파견하였다는 기록은 우리나라 문헌에 그림과 더불어 자세히 기록되어있다.
2) 조선 통신사- 당시의 외교사절단
고려시대부터 있어왔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조 시대에 와서 세종 10년부터 선조 29년까지 일본에 5차례 파견하였다는 기록이 세종 실록에 나와 있다.
1510년 중종 5년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요청으로 정식 파견되었다는 기록과 1590년 3월 6일 교토에 파견된 통신사는 조선 침공의 탐지를 목적으로 하였고, 이후 조선조 순조 11년까지 대마도에서 국서 교환 때 까지 총 20회나 이어진 외교 사절이었다.
당시에는 정사로 대신을 두고 부사 등 450 명 내외의 사절로 구성 되었다.
조,일 국교 수립 후 1636~1811 년까지 9회는 “에도 막부”의 쇼군이 취임할 때 막부요청으로 파견되었고, 1607년 선조 40년 임진왜란 후 국교회복을 위해, 그 후 ‘‘도쿠가와” 왕조의 취임 축하 사절로 우리측이 400~500 명의 일행을 파견하면 당시 부산포에 1.400여 척의 배와 1만 여명의 인원이 일본측에서 동원되어 성대하게 맞이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처음에는 양국의 평화 유지를 위해 파견하였고 그 후로는 선진문물의 전달이 강화 되었다. 당시에는 한양에서 “에도 막부”까지 약 6개월에서 일년이 소요되었다.
조선 통신사가 일본에 남긴 것은 조선 도자기 가마, 시문 등 문화적인 측면이 강하였고 우리는 당시 일본의 고구마, 고추 등 농산물과 양산, 벼루 등을 가져왔다.
국왕의 외교 문서인 서개(書啓)를 지참, 인삼, 모피, 붓, 먹 은장도 등도 예물로 가져갔다.
마지막 통신사 파견은 1811년 이다. 당시로는 재정이 궁핍하여 대마도에서 “역지통신”으로 거행. 그 후 19세기중엽 메이지 유신으로 일본이 개화되면서 중지되고 1876년 운양호 사건으로 중단 되었다.
이러한 일본과의 역사적 사살을 생각하면 지금은 우리가 일본에게 과거에 중국대륙에서 전래한 문화를 일본에 전수한 것으로 역사가 증명하지만 일본이 개화기 이후에는 우리나라가 일본문화를 역수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말의 쇄국정책이 나라발전에 얼마나 큰 후퇴를 가져왔는가를 깊이 관찰하여야한다.
우리는 해방이 되면서 일제의 침략에서 벗어나 나라를 근대화하기도 전에 6.25라는 미증유의 동란으로 국토가 초토화되면서 어려운 고난의 시기를 지나 국민의 눈물겨운 피와 땀으로 폐허에서 나라를 일으켜 년 74$의 국민소득을 3만 $에 이르는 선진국으로 이끌어간 국민들의 피땀 어린 노력을 이제는 다시 한번 되돌아보고 미래를 새롭게 창조해가는 역량을 제고해 가야란다.
3.) 일본의 규수섬과 한반도의 관계
일본의 가장 서쪽 섬인 규슈는 우리 남한 면적과 같으며 인구는 1.350만 명 정도이다. 규슈의 중심도시는 후쿠오카이며, 이섬은 전체가 7개의 현으로 구성되었다.
대마도와 함께 7세기 이후부터 백제시대의 영향을 많이 받아 우리나라의 문화를 간직하고 있다.
일본의 종교는 대부분 불교를 믿으며 집집마다 불당이나 신당이 있고 그들이 믿는 신들도 다양하다. 이미 신이 수백 가지나 되니 부엌칼 신도 있고 우스갯소리로 치면 남근신사도 있으니?
특히 규슈 지역은 한반도와 가까워 백제 시대부터 우리의 영향을 받아 불교를 도입하였고, 본토에도 당시에 교토 지역에 법융사를 지었고 불상을 가져다가 안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가 가는 벳부 일대에도 4세기 부 터 백제인들이 건너와 불교문화와 도자기 기술을 전수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곳 벳부는 현재 인구는 15만 명으로 당시 부 터 한반도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4) 히타 아마가세(Amagase) 온천지역
우리가 탄 버스는 어둠이 짙게 내린 가운데 하늘의 여울이라 불리는 “아마가새” 온천 지역에 이르러 성천각 호텔 다리 앞에 도착하여 모두들 배낭을 메고 요즘은 보기 드문 나무로 된 다리인 출렁 다리를 건너 산밑에 길다랗게 5층으로 이어진 오래된 호텔 로비로 들어갔다.
시골마을인 이 지역에는 AD 678년 부 터 온천수가 솟아나와 강변을 따라 마을이 형성되고 숙박시설이 지어지고 일본에서 아주 오래된 마을로 강변으로 내려가면 강가에도 노천온천이 솟아나 누구나 사용할 수 있게 개방되고 있다.
(사진: 성천각 호텔 전경)
나는 3층 303호에 독방으로 배정을 받아 들어가니 역시 옛날 식 6조 다다미 방으로 가운데 상이 놓여있고 강 쪽으로 창호지를 바른 4쪽짜리 창문이 있는 방이다. 조그만 TV 한대에 창문 쪽으로 조그만 테이블 한 개에 의자 두 개가 자리잡고 있다. 그 옆으로 세멘대가 있고 바닥에는 보온병에 뜨거운 물이 담겨있고 언제나 차를 먹게 되어 있다.
나는 우선 캐리와 배낭을 정리하고 객실 수건을 한장가지고 4층에 있는 사우나로 가니, 너무 오래된 곳이라 옛날 우리동네 목욕탕만도 못한 시설이었다. 물은 온천수라 탁하며 함께 온 일행 몇 명이 함께 탕에 들어가 우선 온천수란 기분으로 가볍게 샤워를 하였다.
저녁 7시에 산악회원들이 4층 연회장에 모여 을미년 새로운 집행부를 탄생시키는 행사를 모두 함께하며 작년 일년 동안 집행부의 노고에 치하의 박수를 보내며 새로운 집행부를 맞이하는 순서로 진행하고 신구 이 취임식을 끝냈다.
일본식 저녁을 다 함께하며, 가져온 소주, 이곳에서 나오는 맥주로 가볍게 하루를 마감하며 내일의 산행 준비를 위해 모두 휴식에 들어갔다.
나는 해외에 나오면 늘 하듯이 이날도 아침 일찍 나와 주변을 산책하니 아주 조그만 마을이라 다니는 사람도 없고 호텔 앞 강가로 내려와 야외 온천탕을 순방하기도 하였다. 강가에 돌로 막아 솟아오르는 온천수를 고이게 하는 야외 탕을 만들고 갈대로 둘러막아 탕을 보호하니 이른 아침 추운데도 탕 물은 김이 나고 따듯하였다. 둘레에는 물바가지가 몇 개가 있었으나 이용하는 사람은 한나도 없었다. 그만치 이곳은 한적한 시골 마을 이었다.
5) 지은폭포에서 아침정기를
이 튼 날 우리는 4명이 일행과 달리 산행에 불참하면서 08:50분이 되어서 겨우 산행에 나선다. 아침에는 가다가 어제 오후에 들르기로 되었던 삼단폭포를 가는 길에 구경하기로 한다.
폭포 앞에서 차를 멈추고 도로 가에서 삼단폭포가 높은 곳에서 떨어져 내리는 것을 쉽게 볼 수이었다. 이 폭포는 “지은폭포”로 약 30M의 높이에서 떨어져 내려오면서 상단이 20m, 하단이 10m의 2단 폭포로 폭포 밑으로해서 떨어지는 물살 뒤로 돌아 나올 수 있어 일명 폭포를 “우라미노 타키”라고 부른다. 밤에도 야간 조명을 하였기 때문에 아주 놀라운 풍경을 볼 수가 있다.
돌아 나오는 곳에 커다란 이무기 동상이 세워져 있어 이 폭포의 전설에 재미를 더해준다.
폭포에서 사진을 여러 장 담고, 다시 출발하여 도시락 집에서 등산 시 중식용 도시락을 찾아 싣고, 식수와 기타 필요한 물품을 사느라고 시간이 상당히 흘러갔다.
6) 구중산(1786m) 등산-정상에 서다
11:00시가 넘어 겨우 구중산 등산 입구로 서둘러 차를 몰아간다.
구중산(九重山)은 일본 규슈의 최고봉으로 1786m로 일본 전체 20대 명산의 하나이다. 주변에는 1700m 급의 봉우리들이 연결되어 있고, 맑은 날에는 아소산(阿蘇山-1592m) 능선이 한눈에 보인다. 지도상으로 표기되어 있는 구주산과 구중산은 일본어로 함께 구주로 발음하기 때문에 혼선을 이룬다.
구중산과 아소산은 오이타 현과 구마모도 현에 함께 걸쳐져 있어 아소~구중 국립공원으로 불리어 지고 있다. 아홉 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산 군이 구중산, 구주산은 구중산의 한 봉우리이고 가장 높은 봉우리는 나카다케(中岳)로 1791m이다.
우리가 머문 히타 “아마가세” 마을에서 2시간 반 만에 버스는 산행 입구인 “마키노트 도우케”(1.330m)에 오른다. 눈이 상당히 깔려 빙판을 이루니, 우리는 모드 아이젠을 하고 등산 입구에 집결하여 단체 사진을 함께 찍고 서서히 등산로에 오르기 시작하였다.
산 중턱에서 시작함으로 400m 정도 수직으로 생각하면 되는 산이다. 입구를 출발하여 화창한 날씨를 고맙게 여기며 약 30여분간 계단으로 올라가니 주변이 화산으로 아주 이상한 분위기를 연출하며 주위에는 하얀 연기가 도처에서 뿜어 나오는 봉우리가 보인다.
1503m에 있는 “쿠츠카케산” 봉우리에 오르니 주위의 산 봉우리가 한눈에 보이고 멀리 마을이 한가롭게 보이고 나무 한 포기 풀 한 포기도 없이 그냥 화산석으로 덮여 있는 색다른 분위기를 연출한다. 얕은 곳에는 억새풀이 누렇게 변해있어 어주 가지런하게 보이고 둘레에는 다양한 모양의 화산석이 이상한 모습으로 바위 군을 형성 하고 있다.
전망대에서 모두 함께 휴식하며 멀리 보이는 정상을 조망하였다.
이 훗쇼산 (1762,m)정상까지 가는 코스가 산행코스 중에서 가장 험준하고 힘든 코스지만 정상에 이르면서 일본 화산에서만 볼 수 있는 유황 가스를 내뿜는 기이한 모습을 볼 수 있어 장관을 이룬다.
구중산 트레킹의 가장 대표적인 코스는 마키노토 도우케 입구(1.330m)→구츠가케산(1503m)→히난고야 (대피소)→구쥬산 (1787m)→스가모리고에→쵸자바루 코스로 6시간 정도 소요되는 코스이다.
(사진 : 구중산 정상 표지목)
그러나 체력이 허락하면 나카다세(중악-1791m)봉을 거처 “기타센리하마”(北千里) 방면으로 하산을 하면 시간이 걸리면서 대피소를 지나면서 골짜기에 유황 개스가 차 있으면 위험하다.
대피소에서 한 시간 정도 지나면 스가모리 분기점이 나타나며 또 한시간 정도면 이곳에서 쵸자바루로 한산하면 안전하다. 다시 내려가면 산 중턱에 훗케인 온천(法華院 溫泉)이 나온다. 이온천은 등산객의 산장으로 5월 중순경이면 철쭉이 만발하여 장관을 이룬다. 여기서 쵸자바루 까지는 한 시간 정도 소요되며 억새 숲이 노란 색으로 이어져 있어 장관을 이룬다.
우리는 이렇게 시간이 지체되어 마카노트도우케 입구에 이르니 산장 입구에는 눈이 얼어 빙판이 깔려 있어 모두 아이젠을 착용하고 나서 화장실로 가니 아쁠사 화장실 변기가 고장이 난 것이 많고 너무 썰렁하였다. 일본의 경제 상태를 상징한는가 의심이 들 정도였다.
10:50분 준비를 마치고 등산로 입구에서 대열을 정비하고 41명이 모두 기념촬영을 마치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오르면서 주변은 큰 나무가 없고 모두 화산암이라 척박하여 작은 나무들이 추위를 견디느라 움추리 듯이 눈을 바닥에 깔고 있다. 올라갈수록 주변 경치는 화산의 특이함으로 인해 얕으막하게 보이고 주변 마을이 평화롭게 내려다 보이고 주변의 얕은 봉우리에서는 하얀 증기가 솟아오르는 곳이 군 데 군 데 눈에 띠어 이곳이 지금도 활동중인 화산 지역임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우리 일행은 오르지만 벌써 내려오는 일본 사림도 여럿 우리 곁을 지나간다. 그들은 일본 말로 미소 지으며 우리에게 인사하며 지나간다.
우리들은 대오를 이루어 편안하게 오르면서 전망대를 지나 어느덧 구츠가케산(1503m)으로 오른다. 왼쪽으로는 커다란 분화구가 억새풀로 가득하고 그 너머로는 규슈의 농촌이 내려다 보이고 오른쪽으론 멀리 아소산의 분화구에서 솟아오르는 검은 연기가 상층권까지 마치 큰 버섯처럼 보인다.
12:00 시경에 왼쪽으로 솟아있는 훗쇼오산(1762m)으로 오르는 대신 정상을 보면서 아래 둘레로 등산로를 잡아가니 위로는 훗쇼오산 정상으로 바위 들이 날카롭게 솟아있어 그 밑에서 모두 사진에 담아본다. 정상으로 올라갔다가 구주산 대피소로 내려가는 코스가 좋으나 너무 늦어셔 평탄한 등산로를 택하여 우리는 모두 구주산 대피소 넓은 마당에 이른다.
대피소는 단층 건물로 오래되어 낡았으나 입구에는 중국어, 한국어, 일본어로 대피소의 사용을 알려주고 있다.
12:40분이 되어 우리들은 이곳에서 일부는 대피소 앞에서, 대부분은 건너 널널한 바위 틈에서 삼삼오오 가져온 도시락을 펼치고 바람이 잦은 바위틈에서 멀리 아소산 정상의 버섯구름을 보면서
중식을 함께한다. 가져온 소주도 한잔씩 나누면서 머나먼 이국 땅에서 우리는 한 등산동지임을 다짐해 본다.
13:00시경 대부분 중식을 마치고 도로 도시락 폐기물을 비닐에 싸서 배낭에 넣고 다시 눈 덮힌 등산로를 따라 이번에는 중악 삼거리를 향해서 힘겹게 오른다. 오르면서 정상 정복 후 하산하여 오른쪽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목을 확인하며 우리는 함께 대오를 이루어 중악 삼거리에 이른다.
13:30분경 선발대는 오른쪽으로 빤하게 보이는 정상을 향하여 왼쪽 능선으로 올라 돌아서 정상으로 향하였다. 후미 대원들은 중악 삼거리 표지판 아래에 배낭을 함께 모아 놓고 빈 몸으로 정상으로 오른다. 앞으로 멀지 않게 보이나 우린 식사 후 한 시간 넘어 걸려 마침내 14:00 시경 구주산 정상(1787m) 표지목에 이르러 환하게 웃으며 성취감에 모두 기분이 업그레이드 되어 사진에 모습을 담는다.
멀리 건너편으로 아소산 정상에서 피어 오르는 검은 버섯 구름을 가까이 보면서 오늘의 승리감을 모두 마음속에 간직하고 아쉬움을 남기고 하산을 하여 다시 중악 삼거리에 이른다. 중악에서 다시 배낭을 메고 올라오면서 보아둔 하산지점으로 내려간다.
(사진: 정상으로 향하는 중악 3 거리)
이곳에는 표지목도 없어 그냥 잘록한 계곡으로 내려가니 북향이라 눈이 많아 발목까지지 빠진다. 한참을 내려가니 그제야 산길이 넓어지며 눈이 녹아 땅이 들어나고 물이 흐르는 넓은 개활지로 나아가니 멀리 앞산이 보이고 좌측 산에는 눈이 쌓이고 바위가 험준하여 언제 부서져 내릴지 알수 없을 정도로 바위가 위험하게 걸려있다.
개활지를 지나니 법화원 온천 쪽에서 오는 길과 만나는 곳에서 아이젠을 풀고 다시 햇빛이 비추는 바위 길로 오르니 불규칙한 바위들이 널려있고 그사이로 노란 화살표를 해놓아 등산로를 찾아 오르니 언덕 좌측에 화산석 돌로 지은 대피소가 나오고 “평화의 종”이 줄을 늘어뜨려 한번 당기어 본다.
이곳이 중악에서 내려오는 만남의 지점이라고 안내판에 쓰여 있다. 이제 햇살이 내려 쬐는 돌길을 조심스레 내려가니 왼쪽 능선 바위 너덜 지대에서는 하얀 연기가 도처에서 솟아오르고 유황냄새가 매케하게 퍼진다. 산행로는 내려가면서 계곡으로 이어지고 계곡을 건너니 도로가 나오며 이제는 좀 편안한 길이다.
다시 숲 속으로 난 길을 따라가니 눈이 녹아 땅이 죽상을 이루어 미끄럽기 짝이 없다. 색갈이 까맣게 곤죽을 이루어 미끄러워 나는 마침내 오른발이 미끄러져 바지 오른쪽 가랭이가 검은 흙이 묻으면서 여성 회원의 도움으로 간신히 일어나 대충 물 티슈로 닦고 다시 아이젠을 차고 눈이 얼은 숲길을 조심스레 내려가니 멀리 쵸자바루(1035m) 마을의 집들이 눈앞에 보인다.
마을에 내려오니 쵸자바루 등산로 입구에 우리가 내려온 등산로가 그려져 있고 이곳이 쵸자바루에서 오르는 시발점이다. 마을로 나가니 버스가 광장에 보이고 모두 장비를 손질한다.
11:00시경 부터 16:00 시 까지 약 5시간에 걸 처 우리는 약 10km 의 거리를 거의 전 회원이 무사히 산행을 맞추고 다시 히타시 아미가새 마을로 돌아간다.
우리는 모두 무사히 산행을 마치고 다시 성천각으로 돌아와 2일차로 배정받은 방에서 쉬다가 저녁에 온천탕에서 모두 등산의 풍진을 씻어낸 후 저녁 19:00시에 대 연회실에 모여 자축연에 들어갔다.
새 집행부의 회장 총무의 주관으로 테이블마다 소주, 맥주, 사카 등 음료수와 오늘은 특별하게 돼지고기 삼겹살 3점과 된장국을 끊이며 오늘의 산행의 무사를 기원하고 또 하나의 이정표를 이룩한 것을 소리높이 자축하였다. 45명이 마치 인생의 정점을 이루는 분위기를 이루며, 역시 등산은 인생의 활력을 이루고 건강의 바로 미터가 되는 날이니! 산수정 이여… 영원하라!
7) 유휴다케산(1584m) 등산~유후인 꽃 마을 관광
3일차 일정은 아소산은 현재 폭발 중이므로 입산 금지가 되어 규수지방의 3대 명산 중의 하나인 유휴다케산(由布岳-1584m) 으로 약 5시간 정도 소요되는 등산로가 개설되어 있는 산이다.
유후인 을 지나 오른쪽으로 높이 솟아오른 산으로 제법 웅장한 산이다.
사계절 모두 계절마다 아름답다는 유후다케산….
유후인의 북동부에 자리한 산으로 쌍이봉이 있는 아름답고 장엄한 모습으로 <분고후지>(豊後富士) 라고 불리는 산으로 표교 1.584m로 유후인 지역의 상징적인 산이다. 매년 5월에 등산이 허용되며, 수많은 애호가가 즐기는 산이다. 현재는 휴화산으로 산정상에 오르면 벳부만과 구주연산, 아름다운 유후인 분지를 조망할 수 있다.
유후다케산은 기린코(金鱗湖) 호수의 경치와 더불어 유후인 지역의 자랑거리다. 유후다케산은 유후인 앞에 버티고 위는 병풍 같은 모습으로 중턱까지는 겨울 억새풀의 노란 모습이 곱게 보이고 산으로 오를수록 험준한 경치를 자랑한다.
이산은 벳부 온천과 가까워 많은 사람들이 등산을 하고 벳부 온천에서 휴식을 한다. 바닷가에 위치하여 정상에 오르면 일마무제의 조망으르 사방을 볼 수 있다. 산정을 이어가는 능선은 아기자기한 바위능선으로 우리나라의 도봉산을 연상하게 한다.
산허리는 부드러운 억새 밭이 연이어 펼쳐져 푸근한 느낌을 주고 있다. 유후다케는 우리나라의 제주도의 오름 같은 부드럽고 이국적인 느낌을 준다.
산행은 등산구 출발→(약 110분 소요)합야곡→(50분 소요)미타야→서봉→마다에(1470m)→동봉→
마타에→합야곡 으로 아주 경쾌한 등산로를 택하였으나 일기예보에 비가 온다는 방송이 나와 아침 08:30분 경에 차네에서 여러 의견을 종합하여 하루를 주변의 명승지를 방문하는 것으로 대치하기로 하였다.
아침에 어제처럼 “Hotto-Motto”에서 주문해온 도시락을 차에 싣고 우리는 벳부로 향하면서 오늘 등산하기로 한 유휴다케로 올라 등산로 입구에서 산을 바라보며 도시락으로 등산대신에 허전한 마음을 달래며 식사를 한 후, 산 입구로가 등산로를 바라보며 산 정상을 한눈에 담고 아쉬워하면서, 우리는 산간도로를 타고 이제 뱃부로 이동하였다. 이동하면서 뱃부의 명소들을 탐방하기로 한다.
(사진: 유후인 꽃마을 입구와 기린코 호수)
일정이 바뀜에 따라 우리는 버스로 여유를 갖고 오이타 지역에서 먼저 일본 여성 들이 좋아하는 온천마을인 유후인(由布院)으로 이동하여 아기자기한 매력의 상점가를 산책하며 골목마다 기웃거리는 아이쇼핑을 즐기는 시간으로 가지면서 인근의 온천호수인 긴린코로 걸어가면서 주변의 아름다운 호수전망대와 호숫가의 아름다운 호텔등 주변지역을 산책하며 여유로운 시간을 가진다.
오늘 등산하기로 한 유휴다케로 올라 등산로 입구에서 산을 바라보며 도시락으로 등산대신에 허전한 마음을 달래며 식사를 한 후, 산 입구로 가 등산로를 바라보며 산정상을 한눈에 담고 아쉬워 하면서, 우리는 산간도로를 타고 이제 벳부로 이동하였다.
이동하면서 뱃부의 명소들을 탐방하기로 한다.
8) 벳부의 명소 탐방
1. 유노하나 팩 의약부외품(명반온천): 오이타현 벳부시 지정 무형 문화재
유노하나는 명반 온천에서 독특한 제조 방법으로 생산되는 온천 성분을 결정체로 해서 만드는 100% 순수 자연 제품으로 약용효과가 큰 천연 입욕제로 유명한 약용제품이다.
이 약용품은 전반적으로 혈액의 순환을 좋게 하며 무좀, 땀띠, 신경통, 요통, 류마티스, 습진, 동상, 옴, 관절염 등에 효능이 큰 의약 부외품이다.
사용방법은 욕조에 팩 하나를 그대로 넣어 흔들어 녹여주며, 손,발에 사용할 때는 세면대, 대야에 따듯한 물을 받아 한 팩을 4~5회에 걸쳐 사용한다.
여름에는 무좀, 땀띠, 피로회복에, 겨울에는 혈액순환을 원활히 하여 준다. 입욕제로도 사용하며 습기 없는 곳에 보관하여야 한다.
2. 히가시시이야 (東椎屋)폭포
히가시시이야 폭포는 일본의 100대 명 폭포의 하나이다. 낙차가 85m 의 수직폭포로 웅장한 모습을 자랑한다. 절벽 위쪽의 산야바 용암, 아래쪽은 집괴암으로 되어 있고 절벽은 세로로 바위가 갈라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국가 명승지 신야 바케이 안에 있고 규슈의 화엄(華嚴)폭포라고도 한다.
소에서 흘러내리는 소리가 요란하고 여름철에는 피서지로 유명하다. 가을에는 단풍의 명소로 아름다운 계곡으로서 늘 관광객으로 붐빈다.
3. 가마도 지고꾸 (지옥온천)
이 온천에는 크고 작은 2개의 못이 있다. 열탕의 온도가 못의 넓이에 따라 다르며, 85
못의 크기에 따라 성분결정상태가 다르기 때문에 온천수의 색갈도 다르게 보인다. 온도가 낮을수록 결정도(結晶度)가 높고 푸른색을 띠게 된다.
하얀 눈덩이 같은 것은 “실리가”라는 불리는 온천 침전물로 70년 이상의 세월을 거쳐야 형성되는 것이다. 이 온천에서 코로 호흡을 하면서 수증기를 들여 마시면 인푸루엔자의 예방이 되며, 마시어도 몸에 좋다고 한다.
4. 기후내성
구마모도성과 비슷한 축성방법으로 건축한 현대의 성이다. 이 성에서는 뱀을 신앙신으로 모시고 있다. 굉장히 큰 뱀으로 하얀색으로 뱀을 다루는 사람이 우리에게 시범을 보여주었다.
2015년이 평성 27년으로 길흉 년표에 따라 운세 대통을 위해 기도를 하는 곳으로 유명하다. 12 간지에 금,목,수,화,토 등에 좋은 길일을 택해 보통기도는 천원, 특별기도는 3천원, 대기도는 일본화로 1만원이다. 새해 초에는 수많은 명사들이 찾아와 기도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가벼운 비가 오는 가운데 일정을 맞추고 뱃부의 국제 호텔인 “카메노이” 호텔에 여장을 풀고 1024호에 들어가니 방이 아담하고 새로운 느낌을 준다. 저녁을 비폐로 2층 식당에서 함께하면서 이제 마지막 날을 편안한 마음으로 쉬면서 벳부의 마지막 온천탕에 몸을 담가 보며 2번째 뱃부여행을 마감하려 한다.
마지막날에는 멀리 후쿠오카에 있는 “Nanjoin”(남장원)으로 아침 일찍 버스로 달려 간다.
5. 후쿠오카 남장원(Nanjoin)<南藏院>
원래는 다카노하마에 있던 절로 170년전 “에도시데” 말기에 불교사찰 폐지령 후에 30 여 년 간에 걸쳐 이곳에 조상한 민간사원이다.
입구에 오르면 7복신의 한 분인 “에비스상”으로 부처님의 배를 만지면 복이 온다는 전설에 동상 부처의 배가 반들반들하게 빛나고 있다.
신의 문을 지나 오르면 2층에 본당이 엄숙하게 차려져 있고 가운데 금불상이 정좌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신의 가호를 비는 값비싼 불당이다. 이곳을 지나 오르면 신목뇌신(神木 雷神) 이라는 나무에 수호신이 조각되어있다. 가는 길목마다 수많은 수호신이 모셔져 있으며, 청동불로 오르는 길로 오르다가 터널을 들어가면 수많은 기부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터널 내부에도 사업의 성공, 풍작이 들개 해 달라는 기원을 새기고, 7복신이 새겨져 있다.
이곳을 벗어나면 기도를 하기 위해 500원을 헌납하고 등을 구입하여 걸어두면 복을 받는다고 한다. 명단을 내는 접수처가 나오고 그 앞으로는 거대한 청동 와불상(瓦佛相)이 자리잡고 있다.
이 청동 와불상은 전장 41m에, 높이 11m, 무게 300 Ton 이 이르는 초대형 와불상이 우리를 맞이하고 있다. 년 백 만명 이상이 참배하는 곳이다.
남장원은 강한 신들이 모셔져 있다 하여 많은 사람이 기도에 참여하고 동상 뒤로는 큰 납골당이 자리잡고 있어 유명인사들의 안식처로 유골항아리가 보관되어 있다.
와불은 너무 거대하여 사진에 담기도 부담스럽다. 와불에 발에는 여러 가지 족상이 들어있어 족상에 동전을 붙이면 좋은 일이 생긴다는 속설에 많은 동전이 붙어 있다.
작년 평성 26년에 길 흉표에 힌 동그라미는 대길, 반길, 검은 동그라미는 고뇌를 표현 한다고 계시가 되어 있고 많은 헌금을 낸 사람들의 명단이 쓰여 있다. 믿음에도 자본이 투자 되어야 하는 세상, 돈의 크기가 믿음의 크기와 비례하는 사바세계가 있을가?
우리는 이곳을 벗어나 이제는 면세점으로 가서 한 시간을 사용한 후 베이사이드 해변공원에 서있는 하카다타워에 올라가 후쿠오카 시내를 조망하고 멀리 바다를 향해 큰 마음을 품고 내려와
이곳의 유명한 우동 집에서 맛있는 우동과 뛰 김을 맞보고 다시 오이타 공항으로 향해 온 길을 돌아가 출국장에 이르러 일본 여행의 대미를 장식한다.
에피로그
오이띠공항에 국제선 터미날에 도착하여 한국인들만의 수속에 시간을 들이며 한동안 휴식을 하 며 세관 심사를 마치고 모두 기념품과 선물 을 준비하느라 저마다 바쁘게 시간을 활용하니 한국인들 다운 모습이다.
17:15분 이륙하니 오늘 아침에 후쿠오카로 올 때 비가 온후라 무지개가 뜬 마을을 지나면서 우리의 장도의 평안함을 기원한다고 생각 되어 마음이 편안하다.
공항으로 오면서 이곳에 면세점에도 들러 아이쇼핑을 즐기기도 하였으니?
오이타 공항에 오면서 해가 지기 시작 하였다. 태양이 지면서 구름위로 모습을 드러내니 찬란한 빛을 발산한다. 어는 덧 바다에는 어둠이 내리고 규슈 앞 바다에 떠있는 섬에선 불빛이 찬란하게 비추며 바다 위를 수놓은 듯이 반짝인다.
어느덧 인천상공에 이르러 방송이 나오며 18:45 우리는 무사히 다시 돌아와 분당으로 향한다.
분당에 돌아와 우리는 먹보칼국수에서 마지막 향연을 장식하고 다음을 기약하고 총총히 또 활기찬 생활전선으로 돌아갔다. –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