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종 여행기/우리문화유산 답사

(3) 충청북도 보은 일대 문화유적 답사-

땡큐 이영옥 2013. 3. 30. 11:54

 

(3) 충청북도 보은 일대 문화유적 답사

경기도 북부 일원의 문화유적 답사에, 충남 공부 일원에 답사에 이어 이번에는 충북 보은 일대에 산재한 유적 답사에 나서기로 한다. 보은군은 속리산자락에 넓게 자리잡은 곳으로 대부분이 산지이나 금강의 지류가 흐르면서 그 주변에 보은 읍이 자리잡고 있다.

이 지역은 삼국시대의 신라와 백제의 각축장이었고 후에 고구려의 남진으로 삼국의 격전장이 되었다. 이 지역에는 산성도 많으니 보은의 삼년 산성, 청주 일원의 상당산성, 단양근처의 온달성 등 신라, 백제, 고구려와의 각축장이었던 고성이 산재해 있다.

 

                           (사진: 보은읍 일대 전경)

 

 또 보은군과 상주군에 걸쳐 있는 속리산에는 불교문화의 보고인 법주사가 자리잡고 있다.처음에는 법상종(法相宗)이었으나 지금은 조계종의 충북지역 본산으로 국보로, 5호 쌍 사자 석등, 55호 팔상전, 64호 석련지 등 3, 보물이 12, 기타 지방 문화재가 여러 점이  이곳에 보존되어 오고 있다. 

화양계곡은 괴산군에 주로 있지만 속리산 국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 화양서원 등 우암 송시열의 자취가 곳곳에 남아있고, 수많은 고택과 더불어 선()씨 일가의 고택 백여 칸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귀중한 유산으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1) 선 병국(宣 炳國)가옥: 보은군 외 속리면 하개리 (중요민속 자료 제 134)    

상주 방향으로 난 25번 국도를 가다 통일 삼거리에서 4.5 km 정도 가면 장내 사거리가 나오고 속리산 공원 방향으로 난 505 지방도로 들어가 500m 정도 가면 속리 초등학교 지나 삼가천을 건너 오른쪽 솔밭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선병국 가옥에 이른다.

하계 교를 건너가면 오래된 소나무 숲 속에 가옥이 3채가 자리잡고 있다. 왼쪽에 선 병우, 건너편 오른쪽에 선 병국, 두 집 사이로 난 길로 들어가면 선 병묵 등 선 씨 가문의 고택이 자리잡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벼슬과 지위에 따라 크기가 달라지고 있다. 세종 13(1431)에 가사규제에 의하면 서민은 10칸에서부터 대군의 60칸 까지 신분에 따라 규모를 달리하고 있다.

 조선말에 오면서 이런 규제가 무너지고 개화기를 맞이하면서 재산 정도에 따라 다양한 크기로 지어 졌다.

 

 

 선 씨 가문의 집들은 대지주였던 그들이 이 지역에 가문을 이어가기 위해 크게 지은 가옥이다. 1919~21년 사이에 보은 선 씨 선 정훈이 당대의 대목을 동원하여 명당터에 가장 잘 지은 집이다. 이 일대의 갑부였던 그는 인근의 영재를 모아 교육을 시키기도 했다. 지금은 당시의 건축을 했던 조상들의 후손으로 손자인 선 민혁, 선 사혁 두 가구가 살고 있다.

솔밭에는 할아버지의 효자 정각이 다포 집 형태로 세워져 있다. 대문 맞은 편에는 집에 부속된 여러 채가 돌각 담으로 둘러 있었다 하는데 지금은 무너지고 빈터만 남아있다.

 선 씨의 가옥은 크게 사랑채, 안채, 사당의 세 구역으로 이루어 졌다. 각 채마다 안담으로 둘러 처져 있고, 그 전체가 바깥 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남향을 향해 바깥 담 가운데에 솟을 대문이 있고 그 문으로 들어가면 널찍한 바깥마당 건너로 사랑채를 싼 담과 중문이 나온다. 사랑채는 대문과 같은 축 위에 남향으로 자리잡았다. 집채가 H자 모양으로 자라잡고 겹집으로 폭이 넓다. 가운데 커다란 대청이 있고 양쪽에 방이 자리잡고 있으며 앞뒤로 퇴가 달려 있어 집안이 널찍하게 보인다. 양 옆 날개에는 각기 방과 마루방들이 있으며, 정면 퇴에 난간을 둘렀다. 난간의 문양 특이하다. 네모난 돌로 삼단으로 쌓은 석 축 기단 위에 집채가 서있고 팔각으로 다듬은 화강암의 주춧돌 위에 기둥을 세웠다. 처마는 부연이 없으나 서까래가 길어서 깊숙하다. 

안채는 사랑채 동쪽에 서향으로 자리잡았다. 사랑채와 같은 규모로 H자 모양으로 앞뒤로 퇴가 달려있고 기둥, 처마도 사랑채와 같은 구조다. 기단은 두 단으로 쌓은 석 축이다.

가운데로는 4칸짜리 대청을 끼고 왼쪽이 안방, 오른쪽이 건너 방이다. 양 날개에 방이 여러개가 있고 부엌이 아주 크고 부엌 위로는 다락이 설치되어 있다. 앞뒤에 딸린 툇마루를 이용해 모든 방으로 갈 수 있다. 안채 뒤에 장독대도 얕으막하게 담이 쳐 저 있고 우물이 안채와 사랑채에 각각 있다.  

안채 앞 사랑채와의 사이에 중 행랑채가 ㄷ 자 모양으로 크게 둘러서 안마당이 만들어 졌고, 행랑채 남쪽 끝에 안대문이 달렸다. 안대문 밖으로는 담이 있어서 바깥대문에서 안채로 들어 가려면 ㄹ 자로 꺾어 들어가야 한다.

 사당 채는 안마당 북쪽에, 중 행랑채와 같은 축에 자리 잡았다. 사당은 3칸이며 옆으로 3칸짜리 ㄱ 자 재실이 있다. 사당 채 역시 낮은 담으로 둘러 쌓았고 솟을 대문을 통해 출입하게 되어 있다.    

 

 

 

2) 삼년산성(三年 山城): 사적 제235

보은읍 어암리 동쪽 오정산에 쌓은 신라시대의 산성이다. 청주에서 보은으로 가는 25번 국도로 가다 후평 사거리에 이르면서 상주방면 으로 가다 보은상고를 지나 오른쪽으로 난 산길을 따라 오르면 산성 입구가 나온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삼년 산성은 신라 자비왕 13(470)에 처음으로 축성 하였고, 소지왕 8(486) 에 이찬 실죽 장군이 일대의 장정 3000명을 동원하여 개축하였다 한다.

지금의 보은은 지증왕 3(553)에 삼년산군이 되었고 경덕왕 1(742) 에는 삼년군으로 되었다.  삼국사기에는 축성하는데 삼년이 걸렸기 때문에 삼년 산성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후에는 오정산성으로도 불리었다.

 보은은 25번 도로로 대전, 청주, 상주로 이어지는 교통의 요지로 옛날부터 삼국시대에 이르러 백제와 신라가 이 역을 차지하려고 다투던 지역 이었다. 당시 신라는 상주의 사벌성을 점령하면서 보은으로 나와 백제의 남진에 대비하여 이성을 축성 하였다.

 당시에 백제는 한성에 도읍을 하였는데 이후 백제가 도읍을 웅진(공주)으로, 사비(부여)로 천도한 뒤에도 이 산성은 신라가 서쪽의 백제를 견제하며,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하면서 서북지방으로 뻗어나가는데 중요한 요새의 역할을 하였다. 신라는 이곳을 지배 함으로서 삼국통일을 이루는 교두보를 형성 하였다.

진흥왕 15(554)에 백제 성왕이 대 가야군과 연합해 관산성 (지금의 옥천 지방)으로 처들어 오자 신라군은 삼년 산성에서 출동한 군사로 성왕을 죽이고 3만의 군사를 물리첬다.  신라는 관산성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백제로부터 빼앗은 한강 하류지역의 지배를 굳히면서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태종 무열왕 7(660) 신라는 당나라와 나,(,) 연합군을 이루어 백제의 사비성을 점령하여 의자왕을 항복 시켰다.

이 후 통일 신라 시대인 헌덕왕 14(822) 에 웅진성(공주) 도독이던 김 헌창이 반란을 일으키고 무진주(광주), 완산주(전주), 청주(진주), 사벌주(상주)를 점령하고 여러 군현의 수령들을 복속 시켰다. 이때 삼년 산성에서 저항하였으나 신라군에게 패하여 반란이 진압되었다.

또 고려 태조 1(918)에도 후백제 왕 견훤이 처들어 왔었고, 항상 격전장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그 후 성벽은 오랜 세월 동안 지나오면서 무너졌지만 동남쪽 성벽은 당시에 축성이 그대로 남았다. 거의 수직으로 축성된 성벽은 지형에 따라 높이가 13m~20m나 되며 너비는 지형에 따라 8~10m로 쌓았다. 성벽이 높고 크다 보니 기초를 4중으로 계단식으로 쌓아 하중을 버티게 하였다. 서벽은 남동, 북동, 북서의 산봉우리를 이은 능선을 따라 병풍처럼 이어서 쌓았고  안쪽은 골짜기를 이룬 포곡식 산성이다. 성안의 물은 낮은 골짜기를 이루고 보은 읍이 훤하게 내려다 보이는 서쪽으로 빠져 나가게 되었다.  성 둘레는 1.7 km 정도로, 성안에는 논, 밭 민가도 있었으나 지금은 비어 있다.

 성벽은 네모난 점판암의 판 돌로 엇물려 가며 쌓았다. 밑바닥에는 기초 공사를 한 후 한 케씩 전체 두께를 동시에 쌓아 올렸는데 우물 정자 모양으로 한 켜는 가로 쌓고 다음 한 켜는 세로로 쌓아 위쪽의 무게 하중이 아래로 고르게 퍼지도록 하였다.

 동쪽과 서쪽 벽은 바깥쪽을 돌로 쌓고 안으로는 흙을 다져 넣었고, 남쪽과 북쪽 벽은 안과밖을 모두 돌로 쌓았다. 판 돌을 쌓다가 생겨나는 틈은 작은 돌로 메워 벽면 전체를 빈틈없이 채워서 얇은 판 돌이 오래도록 견딜 수 있도록 하였다.

문이 있던 자리는 동, , , 북으로 네 군데가 있고 너비가 4~5m 정도이다. 지형으로 보아서는 동문과 서문이 주로 이용된 것이며, 서문 부근의 성벽은 최근에 복원된 것이다.

 예전에 문이 있던 곳에 네모난 구멍이 뚤 린 기둥 받침돌의 흔적이 남아있다. 한때 이 지방의 집중 호우로 인해 문을 끼웠던 석재들이 드러났다. 이 때 조사 발굴된 것으로 서문은 신라 시대에 두 번이나 설치된 것으로 들어 났다.

처음에 설치된 문은 밖에서 안으로 열도록 된 것이 아니라 안에서 밖으로 열도록 되어 있었다. 이는 성안의 군사가 갑자기 출동할 때 편리하게 하나 공격적인 문의 형태로 보여진다. 그 너비로 보면 바퀴의 축 거리가 1.66 m나 되는 큰 수레가 다녔던 것으로 추정된다.

서문 자리로 들어가면 성벽아래로 길이 나고 가운데 연못이 있고 갈대가 무성하다. 옛 기록에 의하면 삼년 산성 안에 우물이 다섯 군데, 연못이 한 군데 있다고 나와 있는데 성안에 연못이 물 공급지이기도 하였다. 연못 옆 길 바위 암벽에는 아미지(蛾眉池) 라는 글자와, 옥필(玉筆), 유사암(有似巖)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성안의 물은 아미지를 거처 서문 자리 밑으로 흘러나온다. 동문 자리에도 바닥에서 1 m 높이에 수구가 하나 나있고 너비는 45, 높이 65의 수구가 층 단을 이루며 높아지게 뚫려있다. 수구 바닥은 성벽보다 더 밖으로 나와있어 물이 바로 땅으로 떨어지게 되어있다.  북쪽 성벽은 무너진 채로 있어 두꺼운 이끼가 끼어 있다. 이곳에서 성벽을 반달형으로 내쌓은 곡성의 자취를 볼 수가 있다.  삼년 산성은 모두 일곱 군데의 곡성이 설치되어 있다. 곡성이란 성벽에 바싹 붙은 적을 공격하기 위한 것이며 길게 뻗은 성벽을 보강하는 것이다.

 1983년 경에 발굴 조사 시에 성안에서 삼국시대부터 고려, 조선 시대에 이르는 각종 토기와 기와, 유물들이 나와 이 산성의 연대를 입증하는 계기가 되었다. 

 

 

 

 

 

 

3) 정 이품송(正 二品松): (천연 기념물 제103)

정 이품 송은 조선조 세조대왕으로부터 품계를 받은 가장 지체 높은 소나무다.

옛날에는 보은에서 말 티 재를 구비구비 돌라 올라갔다가 법주사를 향해 내려오면서 좌측 평지에 우산모형을 한 낙낙 장송 한 그루가 고고하게 서있다. 이 소나무의 연륜은 대개 600년으로 추정 된다. 그러나 그간 기나긴 풍상 속에 버티어온 소나무가 도로 가에 있는 관계로 각종 공해에 시달리고 태풍 등으로 인해 가지가 부러지고 점차 푸른 기백을 잃어가고 왼쪽 가지는 아주 부러져 나가 전문가들이 많은 예산을 투입하여 살리려고 애쓰고 있으나 워낙 노송이라 쉬운 일이 아니다.

이 소나무에 얽힌 이야기는 세조 10 (1464) 에 왕이 와병하여 명산 대찰을 찾아 기도하기 위해 법주사로 가다가 말 티 고개를 넘어가던 임금님의 행차 일행이 이 소나무를 만나게 되었다. 왕이 보니 밑으로 처진 가지에 가마가 걸릴 것 같아 일행에게 (가마)이 걸린다는 한마디를 하였다. 그 말이 나가자 처져있던 소나무 가지가 위로 들려 올라가면서 임금의 가마가 무사하게 통과하게 되었다. 이를 기이하게 여긴 세조는 이 소나무를 그 자리에서 정 이품으로 제수하였다는 사실에 기인 하고 있다. 

또 세조 일행이 법주사에서 돌아오는 길에서 갑자기 비를 만나 나무아래서 피했다는 전설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정 이품 송 안쪽 마을은 진 터로 부르며 이 유래는 세조를 수행하던 군사가 이곳에 진을 친 것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예전에 말티 고개는 고려 태조가 속리산 법주사에 행차하실 때 닦은 고갯길로, 그 후 세조가 법주사에 행차할 때 박석을 깔았다 하여 일명 박석 티 라는 별칭도 갔고 있다.

 또한 외 속리면 안돌 마을에는 정 이품송의 아내라는 노송이 한 구루 있어 이도 천연기념물 제 352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 이품 송이 가운데 중심 줄기로 쭉 뻗어올라 자란데 비해 서원리 소나무는 0.7m에서 두 줄기로 갈라졌기 때문에  암소나무로 이름 지어 졌다. 이 나무도 대략 600년 정도로 추정된다.

지금의 자리에 서있는 정 이품 송은 병과 노화와 각종 공해에 시달려 시름시름 앓고 있는 반면에 서원리 소나무는 공해와 멀리 떨어져 있어 지금도 싱싱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지금도 서원리 소나무에는 마을에 평안을 비는 제사를 매년 정월 초 이 튼 날에 지내고 있다.

 

 

 

 

 

 

4) 법주사(法住寺): 사적 제503

법주사는 신라 진흥왕 14 (553) 의신조사(義臣祖師)가 창건하였다. 그는 천축국으로 구도여행을 갔다가 돌아오면서 나귀에 불경을 싣고 절 지을 터를 찾다가 지금의 법주사 터에 이르렀다.

그는 이곳에 절을 짓고 부처님이 머문다는 뜻으로 법주사라 하였다. 그 후 성덕왕 19(720)에 절을 중수 하였고, 혜공왕 12(776) 에 이르러 진표율사가 불사를 일으켜 비로서 큰 사찰의 규모를 이루었다.

법주사는 선 병국 가옥에서 나와 속리산 국립공원으로 가는 505번 지방도를 따라가다 보은읍에서 말티재를 넘어 법주사로 가는 37번 지방도를 따라가면 속리산 관광단지 주차장에 이른다.

법주사로 오르는 숲길은 일명 오리 숲이라 하며 약 2 km 거리를 올라가면 호남 제일 가람 일주문 이 나온다.

경내에 들어가면 금강문, 천왕문, 팔상전, 쌍사자 석등, 사천왕 석등, 대웅 보전 등이 일직선으로 속리산 문장대를 향해 일열로 정열되어 있다.  그리고 주변으로 회견 보살상, 석연지, 철 당간 지주, 철확 등이 자리잡고 금강문 서쪽 바위 벽 에는 미륵보살상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팔상전 좌측으로는 거대한 청동미륵 대불 1990년에 건립되었다.  미륵 대불은 기단부터 높이가 33m나 되며 기단 아래로는 지하법당으로 용화전이 자리잡고 있다.

법주사는 이 후 진표율사가 개창한 김제 금산사, 금강산 발연사, 신라 헌덕왕의 왕자인 심지가 개찰한 팔공산 동화사 등이 진표율사의 맥을 이으면서 고려시대를 내려오면서 법상종의 도량이었다.

 

  이 후 법주사에서는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왕이 이 절에서 점찰법회를 열면서 법상종의 중심 사찰로 거듭나고, 현재 법주사 경내에는 고려 충혜왕 3(1362)에 세운 자정국존비가 있는데 이 비문에 법주사라는 명칭이 새겨져 있다. 

고려 공민왕 11(1362)에는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이 안동으로 피난했다가 돌아오던 중 법주사에 들렀다. 그는 양산 통도사에서 가져온 석가모니의 진신사리 한알을 모시게 하였으니  지금의 금강문 서쪽의 사리각에 있는 팔각 사리탑이 당시에 불사리를 봉안한 사리탑이라 한다.

 조선 시대에는 태조가 즉위하기 전 상환암에서 백일 기도를 했다는 설도 있다. 선조 30년 정유재란 때에 충청지방의 의병의 본거지였던 이유로 왜군의 방화로 사찰이 불타버렸다.

 그 후 선조 35(1602)에 와서 사명대사 유정이 법주사를 중건하면서 팔상전이 재건 되었고 인조 4(1626)에 이르러 주요 전각과 요사채가 중창되었고 이후에도 계곡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법주사에는 국보 3, 보물 12, 유형문화재 20여 점을 비롯한 다수의 문화재를 품고 있어 불교문화의 보고이다. 이제 국보를 비롯하여 중요한 문화재를 검토해 본다.

 A) 팔상전(捌相殿) : 국보 제 55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오층 목탑으로 유일하다. 예전에는 황룡사 9층 탑을 비롯해 많은 목탑이 세워졌으나 여러 차례의 몽고를 비롯한 외적의 침입으로 대부분 불타버렸다.

정유재란에 불탄 후 선조 38 (1605) 에 시작하여 인조 4(1626) 까지 장장 22년에 걸친 노력 끝에 복구된 것이다.  당시에 유정대사가 지휘했다고 전해 진다.

 

각 면마다 가운데에 계단을 두고 정사각형의 월대를 2단으로 쌓고 그 위로 목탑을 올렸는데 맨 아래층 월대는 땅속에 묻혀있다.

1층은 사방 5칸으로 한 층씩 올릴 때 마다 양 끝이 반 칸씩 줄어서 맨 위 5층은 사방 한칸이 되었다. 지붕은 사모지붕으로 위에 올려진 상륜부는 조선시대 것이다. 1층의 한 변이 11 m이며, 상륜을 포함한 높이는 22.7 m이며, 위로 올라갈수록 너비가 줄어 전체적으로 균형감이 잡혀있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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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를 보면 바닥 한가운데 초석이 있고 그 위에 맨 위까지 심주를 세웠고, 그 둘레로  4층 까지 닿는 데 4개의 하늘 기둥을 세웠고, 다시 그 둘레로 3층 까지 닿는 기둥을 12개 세웠다. 그 후로 1층의 바깥기둥과 높은 기둥을 잇는 보 위에 2층의 바깥기둥을 세웠고, 3층은 높은 기둥을 그대로 바깥기둥으로 삼았다. 높은 기둥과 하늘 기둥을 잇는 퇴보 위에 4 층의 바깥기둥을 세웠다. 기둥 사이를 사각으로 다듬은 보로 연결하여 힘을 받게 하였다. 이런 방식은 목탑을 올리는 전형적인 방법으로 금산사 미륵전도 같은 방식으로 쌓았다.

처마를 바치는 공포는 1층은 기둥 위에만 공포를 얹은 주심포식이고 2층에서 4층 까지는 공포가 기둥 위에 놓였으나 다포집 양식으로 되었으며 5층은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놓아 다포식이다. 층마다 다른 공포구조는 이 팔상전의 특징이다. 2층 부 터 4층 사이에 기둥 사이에 창을 달아서 빛을 받아들여 내부를 밝게 하였다.

팔상전에는 팔상도가 모셔져 있다. 팔상도는

1) 석가모니가 도솔천에서 내려오는 장면

2) 룸비니 동산에서 마야부인의 몸에서 태어나는 장면

3) 궁궐의 문 밖으로 나가 세상을 관찰하는 장면

4) 성을 넘어 출가하는 장면

5) 광야의 설산에서 고행하는 장면

6) 보리수 아래에서 마귀를 항복시키는 장면

7) 성불한 후 녹야원에서 처음으로 설법하는 장면

8) 사라 쌍수 아래서 열반하는 장면 등

석가의 일생을 여덟 개의 장면으로 나누어 표현한 그림이다. 3층 까지 한 통으로 트인 팔상전 안에는 가운데 네 기둥 사이를 벽을 만들고  한 면에 두 장씩의 팔상도를 그려 넣었다. 팔상도 앞의 불 단에는 각각의 불상을 모시고 앞쪽에는 오백 나한상을 세 줄로 배치하였다.

 그림은 동에서 시작하여 남, , 북 방향으로 배치되었으므로 중심기둥을 돌면서 차례대로 그림을 보게 된다.  이것이 나중에 탑 돌이로 발전 하였으며 법주사의 석가탄일의  탑 돌이는 무형 문화재  103호로 지정되어 있다.

1968~69년 사이에 해체 수리기간에 사리공에서 은제 사림함이 발견 되었다. 또한 사리공의 네 벽과 위쪽의 동판 다섯 장에는 팔상전의 건립 경위를 밝히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이 팔상전 사리 장엄구는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B) 쌍사자 석등: 국보 제 5

삼국 시대부터 우리나라 석조물 가운데 사자를 조각한 것이 많았다. 통일 신라 시대의 쌍사자 석등으로는 법주사의 쌍사자 석등, 합천 영암사 터의 쌍사자 석등, 국립 광주 박물관에 소장중인 중흥사 쌍사자 석등이 남아있다.  그 중에 법주사의 쌍사자 석등은 높이가 3.3 m  규모가 크고 조각 기법이 뛰어난 것이다.

 

법주사 쌍사자 석등은 신라 석등의 전형적인 양식으로 팔각석등에서 팔각기둥이 들어갈 부분을 사자 두마리로 바꾸어 놓은 석등이다. 두툼한 팔각의 지대석 위에 올려진 연화 하대석과 쌍사자 기둥, 연화 상대석이 다 함께 하나의 돌에 조각되었고, 화사석과 지붕 돌은 각각 다듬어져 조합이 되었다. 지대석 옆면에 면마다 테두리가 있고, 윗면에는 두 단으로 된 굄돌이 있어 하대석을 받혀 준다. 하대석 굄돌은 팔각으로 돌려져 있고 하대석은 둥글고 조금 작다. 하대석 옆면에는 연꽃 잎 여덟 장을 새겼고 연꽃 잎 안쪽으로는 꽃 모양이 장식되었다. 윗면에는 큰 팔각 굄돌이 쌍 사자를 받들어 조각되었다.

 팔각 기둥을 대신한 사자 두 마리는 서로 가슴을 대고 머리를 젖힌 채 마주서서 앞 발과 주둥이로 상대석을 받들고 있다. 한 마리는 입을 벌리었고 다른 한 마리는 다물었다. 사자의 갈기 털과 몸의 근육이 표현되었고 하대석을 딛고 선 뒷다리가 굵고 탄탄한 모양이다. 둥그런 상대석 아래 둘레로는 두 단의 팔각받침이 조각되었고 그 위로는 연꽃잎 열여섯장이  두 겹으로 조각되었다. 아래의 연꽃 잎 속으로는 반원이 두 줄로 새겨졌고, 위 연꽃잎 속으로는 구슬무늬가 세 개씩 장식되어 있다. 윗면으로는 둥근 굄이 한단 있다.

화사석도 팔각인데 화창이 앞 뒤로, 양 옆 네 군데에 맞 뚤려 있고, 화창 둘레의 창틀에는 여러 개의 못 구멍이 나 있다. 지붕 돌은 전체 규모로 보아 조금 크게 얹어졌다.

 지붕 돌의 처마는 수평으로 되어 있지만 낙수면이 휘어지면서 위로 올라갔다. 지붕 돌 아래 면에는 화사석 위쪽을 둘러 받침으로 두 단이 있고 처마에서 흘러내리는 빗물이 아랫면으로 들어오지 않게 작은 홈으로 둘러 졌다. 지붕 꼭대기에는 연꽃 문양이 남아있고 그 위로 연꽃 봉우리 모양의 보주가 언쳐져 있다.

 

 C) 석연지(石蓮池) : 국보 제 64

석연지는 팔각 돌 받침과 굵은 기둥 돌, 그 위에 올려진 대형 연지이다. 표면에 새겨진 여러 문양도 솜씨가 뛰어나며 아주 섬세하게 조각되었다. 전체 높이는 1.95 m이다.

 석연지는 화강암을 큰 그릇 모양으로 가운데를 파서 물을 담을 수 있게 하였다. 지금은 능인전 앞에 있으나 예전에는 법주사의 중심 건물이던 용화보전 앞에 회견 보살상, 사천왕석등과 한 줄로 서 있었다. 이 세 석조 물은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 미륵신앙을 숭상했던 사찰은 연못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김제의 금산사, 익산의 미륵사 등 미륵신앙을 숭상하였던 사찰들은 모두 예전에 연못을 메워 절을 지었다는 설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로 인해 연못 모양의 구조물을 만들어 미륵 불전 앞에 안치해 놓았다. 절의 창건 기록으로 전해지는 금산사 석연지, 공주 대룡사터 석연지,이 법주사 석연지등은 모두 미륵불상을모신 용화보전앞에 놓여있다는 공통점이있다.

 

법주사 석연지는 바닥에 사각의 지대석을 기반으로 그 위로 팔각 받침돌을 올려 놓았다. 지대석 바깥에 간격을 조금 두고 길다란 석재를 한 바퀴 돌려 놓았는데, 윗 부분의 커다란 석연지와 시각적인 균형을 이루어 안정감을 주기 위한 것이다. 팔각 밭침 돌 옆면은 아래 위로 넓은 띠를 두고 모서리마다 기둥이 새겨 졌으며 각 면에 안상이 하나씩 조각되었다.  윗면은 점점 졸아들면서 3단의 굄과 엎은 연꽃 잎 한 단이 놓였다. 그 위로 짧은 기둥들이 놓여 석연지를 받쳤는데 기둥 돌 둘레에 피어 오르는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다. 이는 석연지가 천상의 연못임을 표현한 것이다.

석연지 바깥 면으로는 아래쪽에 작은 연꽃 잎을 한 바퀴 두른 후 위쪽에 커다란 연꽃 잎을 둘렀고, 큰 연꽃 잎 안에 다시 보상화 무늬를 넣어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위쪽 가장자리에는 짧은 기둥을 세우고 둥근 난간을 둘러 놓았으며, 아래쪽 난간 벽에는 보상화무늬와 천인상이 섬세하게 조각 되어 있다.

 

 D) 대웅보전(大雄寶殿): 보물 제 915

 

현존하는 2층 대웅전으로 외관상으로는 높이가 19m에 달하는 2층 이지만 안으로는 한 통으로 트여 있다. 이런 양식으로는 구례 화엄사 각황전, 부여 무량사 극락전, 공주 마곡사 대웅전이 같은 양식으로 되어 있다.

아래층이 정면 7, 측면 4칸인 2층 건축물로 공포(<>)가 기둥 사이에 놓인 다포계 팔작 지붕이다.

기단과 계단석을 보면 고려 중기의 양식으로 되었고 현존 건물은 임진왜란 후 중창할 때 지은 것이다. 그 후 고종 30(1893) 중수 되었고, 1976년에 해체 중수 되었다.

3단으로 쌓은 기단 위에 댓 돌을 한단 더 올리고 그 위에 건물을 지었다. 기단 한가운데 넓은 계단은 깔아 놓고 좌우로 계단을 나누어 쌓았다. 이는 부처님을 연에 태워 모시거나 할 때 그 위로 평안하게 모시도록 하기 위한 답도(踏道)이다.

 건물의 구조는 안쪽에 높은 기둥을 두 줄로 세우고 그 앞뒤로 바깥기둥을 세워 서로 연결하고 있다.  또 안쪽으로 네 귀퉁이에 높은 기둥을 세워 이것이 위층에서 보면 네 귀의 기둥이다. 다른 특징은 아래 위층의 공포가 다르다는 것이다. 즉 아래층은 내외 2 출목인데 위층은 내외 3 출목으로 공포가 한단 더 높다. 공포의 모양은 아래층은 직선으로 뻗었고, 위층은 곡선으로 올라갔다. 1976년 해체 중수 하기 이전에는 서까래만 있는 홀 처마였다.  해체하면서 부연이 달려 있음이 밝혀져 겹 처마로 중수 되었다.

 앞면으로는 모두 살문이 달렸고 양 옆면의 앞쪽 한 칸과 뒷벽 가운데 칸에 외짝문이 달렸다. 동쪽 벽은 문을 제외한 전면이 막혀 있지만 서쪽 벽은 문 이외에 모든면에 창살이 달려 있다. 위층은 기둥 사이를 판자로 막고 비천상을 그려 놓았는데 옛날 법주사 그림을 보면 위층에 살창이 다려 있어 자연광이 비쳐 들도록 되어 있다.

 안쪽 불단에는 가운데 비로자나 불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노사나불, 왼쪽에 석가모니불이 모셔져 있다. 흙으로 빗어진 이 불상들은 대웅보전이 중창될 때 조성된 것이다. 높이가 5.5 m 에 이르는 좌불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 이 삼존불은 법신불, 보신불, 화신불이다. 법신불은 진리를 인격화한 진리불이며, 보신불은 오랜 수행의 과보로 얻어지는 부처이며, 화신불은 특정한 시대와 지역과 상대에 따라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부처이다. 이처럼 법,,  삼신불은 화엄경에서 비로자나 삼존불로 나타난다. 이렇게 법당에 삼신불을 모시는 것은 고려중기부터 보편화 된 것이다.

비로자나불은 온 누리에 빛이 두루 비친다는 뜻으로 비로자나불을 모신 불전은 대적광전, 대광명전으로 불린다.

 

  

 

 

 E) 원통보전(圓通寶殿):  보물 제 916

정면 3, 측면 3칸의 사모지붕을 언친 모습의 법당이다. 정면 3칸이 측면 3칸보다 조금 더 길지만 전체로 볼 때는 정사각형에 가깝다.

 기단은 앞과 오른쪽은 3, 뒤와 왼쪽은 2단 인데 마당이 높아지면서 아래가 묻혀서 앞쪽이 2, 양 옆과 뒤쪽이 1단으로 되었다.  앞쪽 가운데로 계단이 나있다. 이 기단은 통일 신라 말 원통보전이 건립될 때 초기와 같다. 법당으로선 특이한 사모지붕 건물로 처마가 깊어서 삿갓을 쓴 것 같다.

 

건축물은 임진왜란 후에 복원되었고 1974년에 와서 해체 복원되었다. 기둥 위에만  공포를 놓은 주심포 건물이면서 공포를 짠 방식은 내외 3 출목으로 다포집의 양식으로 평방까지 갖추고 있다. 기둥 위에 수평으로 가로 놓이는 평방은 기둥 사이의 공포를 받기 위한 곳으로 다포집에만 필요한 부재이다. 이 집에서는 기둥 사이에 공포를 놓는 대신 커다란 화반을 끼웠다.

지붕은 마루가 한 꼭지에 모인 사모지붕이다. 처마가 삿갓을 쓴 듯 깊숙하지만 양끝이 휘어 올라가 무거운 느낌은 없다.  추녀 아래쪽에는 네 귀퉁이에 모두 추녀가 처지지 않도록 활주를 받쳤던 흔적이 있고 앞쪽 기단 좌우 모서리에 활주 초석이 남아있다. 지붕 꼭대기에는 둥근 받침 위에 석탑이나 석등의 상륜부와 비슷한 모양의 돌로 만든 절병통이 놓여 있다. 건물의 동쪽 벽은 모두 막혀 있는데 서쪽 벽에는 출입문과 한 쌍의 창이 달렸고 뒷벽 가운데에도 창이 있다.

건물 안 중심에 높은 기둥 네 개를 세워 넓은 칸을 만들고 그 둘레에 낮은 기둥 열 두 개를 세워 연결했으므로 건물의 중심 칸이 양 옆 칸보다 두 배 이상 넓다. 높은 기둥 위에 대들보를 걸고, 사모 지붕을 위한 구조를 짜기 위해 대들보가 열 십자로 교차하는 부분에 짧은 기둥을 세웠다 

 

 

뒤쪽의 높은 기둥 사이로는 후불벽을 치고 탱화를 걸었으며, 그 아래 불단에는 가운데로 목조 관세음 보살상을 모시고 좌우로 해상 용왕상남순 동자상을 모셨다.

원통전이라는 이름은 관세음보살을 모신곳을 의미한다. 즉 관세음 보살이 중생의 고뇌를 씻어주기 때문이다. 천장은 우물반자인데 관세음 보살의 머리 위에 닫집을 따로 두지 않고 우물 네 개를 터서 반자를 크게하여 특별한 자리임을 나타냈다.

 

 

 

 

 F) 사천왕 석등: 보물 제15

조성 양식과 수법으로 보아 법주사 초창기인 통일 신라 시대의 혜공왕(765~780) 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 된다. 지금은 대웅보전 앞에 있으나 예전에는 용화보전 앞에 있었고 사천왕석등 앞에는 향로를 머리에 인 회견 보살상이, 뒤에는 석연지가 있었다. 최상의 공양인 향과 등, 차를 용화보전 미륵불 앞에 올린다는 의미를 지닌 것이다.

팔각 화사석 둘레에 사천왕상을 조각한 석등이다. 하대석, 기둥 돌, 상대석, 화사석과 지붕들이 모두 팔각을 이룬 통일 신라시대의 팔각석등의 대표작이다. 높이 3.9m의 큰 규모이다. 각부분과 전체의 균형이 조화를 이루었으며, 지금은 화사석에 조금 금이가고 꼭대기의 보주가 없어 졌지만 나머지의 보존상태는 양호하다.

 

 

맨 아래에 넓적한 돌 넉 장을 맞춰서 지대석을 만들고 그 위에 팔각의 기대석을 놓았다. 기대석 옆면은 위쪽에 넓은 띠가 둘려졌고, 각 면마다 안상이 얕게 새겨졌다. 위에 올려진 연화하대석에는 8장의 연꽃 잎이 엎어 새겨졌고, 꽃잎 안에 보상화 무늬가 장식 되었으며, 아래쪽에 두 단, 위쪽에 석단의 받침이 각각 둘레를 줄여가면서 두어졌다.

팔각기둥 돌 위에 놓인 상대석에도 연화 하대석과 같은 모양의 연꽃 잎이 새겨졌고 아래쪽의 석단, 위쪽의 두 단의 받침이 조금씩 둘레를 넓혀가며 두어 졌다.

화사석은 팔면 가운데 앞 뒤 영 옆의 네 면에 화창이 뚫렸고 나머지 네 면에는 사천왕상이 새겨졌다. 각기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든 채 악귀를 밟고 선 사천왕은 매우 사실적이고 생동감있게 표현되어 있다. 화창을 두른 문틀에는 문을 다는데 쓰였던 못 구멍이 뚫려 있다.

 지붕 돌 아랫면에 받침 두 단과 낙수 홈이 파여있으며, 윗면 꼭대기에 보주 받침이 두 단이 있다. 

 

 

  

 

 

 

 

 G) 마애여래상(磨崖如來像): 보물 제 216

법주사 경내에 들어서서 왼쪽으로 미륵대불 위로 수정봉이 솟아있다. 그 아래로 떨어져 내려온 바위로 추래암(墜來岩)이 있다.

추래암은 높이가 7m 정도인데 넓적하고 평평한 바위표면에 고려시대에 불상이 새겨져 있다. 이 불상은 바위표면 거의 전체가 꽉 차게 새겨진 것으로 높이가 6.18 m 나 된다.

 

 

 이 마애불은 머리가 돌돌 말려 올려진 나발이다. 나발이 규칙적으로 배열되었고 가운데에는 반달모양의 구슬장식이 새겨져 있다. 얼굴 모양은 둥그스럼하고 코와 입 둘레가 움푹 들어가서 긴 코가 얼굴에 묻힌 것 같고 입술은 내민 것처럼 보인다. 귀는 정면에서 보면 길게 선 모습으로 조각되었다. 이런 모습이 바로 고려시대의 마애불의 특징이다.

어깨가 수평으로 반듯하고 팔과 어깨가 수평을 이루었다. 오른손은 가슴 앞에 들어 손바닥을 보이며, 엄지와 가운데 손가락으로 동그랗게 만들었고 왼손은 가볍게 들어 오른손을 받치듯이 하였다.

 법의는 왼쪽 어깨에 걸쳐 몸을 감싼 후 다시 왼쪽 어깨로 넘겼다. 부처가 앉은 자리는 연꽃으로 장식하였다. 발 아래로는 둥그런 발 받침이 있고, 그 둘레에도 연꽃 잎이 새겨져 있다. 광배는 없고 불상이 새겨진 바위면 아래에 연꽃이 새겨진 배례석이 놓였다.

마애불이 새겨진 바위 옆으로 잇대어진 바위 면에는 지장 보살상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도 높이가 3.13m 나 된다. 왼손에는 보주를 들었으며 오른쪽 다리를 늘어뜨리고 왼쪽다리는 비스듬히 오려놓은 반가상이다. 두 바위가 만나는 모서리 아래에는 큰 틈이 벌어져 석실을 이루고 있다. 이곳은 수행장소로 쓰였다.

 

   5) 화양구곡(華陽九曲)

충북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에 위치하고 있다. 법주사에서 나와 37번 국도를 따리 32 km정도를 가면 청천 사거리가 나오고 오른쪽으로 32번 지방도로를 가다 송면 으로 들어가면 화양구곡 매표소가 나온다.

 화양동은 자연경관이 매우 아름다운 곳으로 16세기부터 선비들이 즐겨 찾던 곳이다. 17세기에 우암 송 시열(尤庵 宋 時烈)이 만년에 이곳에 머무르면서 명승지로 자리잡게 되었다.

 우암은 중국 주자(朱子)의 무이구곡을 본 따서 화양동의 경관이 빼어난 9곳을 선정하여, 그의 제자인 수암 권상하(1641-1721)가 이름을 짓고 단엄 민 진원(1644-1736)의 글씨로 바위에 이름을 새기면서 화양구곡이 명승지로 자리잡게 되었다.

 수 많은 선비들과 시인 묵객들이 이곳을 찾아와 아름다운 경관을 예찬하며 화양동을 노래하였다. 화양동은 아름다운 자연만이 아니라 문화와 예술이 함께 살아 숨쉬는 풍류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송 시열은 벼슬에서 물러난 후 이 골짜기에 들어와 글을 읽고 제자들을 양성 하였다. 화양천은 맑은 물이 흐르면서 입구에서 5 km 쯤 뻗어 있다.

a) 1: 경천벽(擎天壁) 으로 화양동 초입에서 바로 만날 수 있으며 물가에 가파르게 솟아 있는 바위의 모습이 하늘을 떠바치고 있는 모습이라 경천벽이라 한다. 경천벽은 화양 제 1교에서도 보이지만 다리를 건너 화양동 초입의 매표소를 지나 제 1곡 안내판이 세워진 곳에서 소나무 숲 안으로 들어가 물가에서 보아야 한다. 우암 송 시열의 글씨로 華陽洞門(화양동문)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b) 2: 운영담(雲影潭)으로 화양 제 2교를 들어가면 좌측으로 보이는데 계곡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이 못을 이루고 있어 부쳐진 이름이다. 물이 너무 맑아 기암절벽의 소나무와 하늘이 한데 어우러진 모습, 그리고 하늘의 구름 그림자가 계곡 물속에 맑게 비친다 하여 운영담이라 이름이 붙여졌다. 운영담의 암벽 밑에 한자로 雲影潭 이란 예서채 글씨가 새겨져 있다.

c) 3: 읍궁암으로 하마소를 지나 좌측으로 내려가면 불 수 있는 둥글고 넓적한 바위를 가리킨다. 이곳이 바로 우암 송 시열이 북벌을 꿈꾸었던 효종대왕이 돌아가신 것을 슬퍼하여, 효종의 제삿날인 5 4일과 매일 새벽 바위 위에서 통곡하였다는 사연을 지닌 泣弓岩이다. 읍궁암이라 이름지은 것은 중국의 () 임금이 돌아가신 후 신하가 활()을 잡고 울었다는 고사에서 인용한 것이다.

d) 4: 금사담(金沙潭)으로 이름처럼 빤작이는 금빛모래가 물속에 깔려있는 곳으로 금사담 위쪽으로 작은 다리를 건너면 맞은편 암벽 위에 우암 송 시열이 서재로 사용했던 암서재가 노송과 함께 어우러져 있으며, 곳곳에 새겨져 있는 바위 글씨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우암은 자신이 거처하던 초당과 암서재를 조그만 배로 오가며 풍류를 즐기곤 하였다.

e) 5: 첨성대(瞻星臺)로 화양 제 3교를 건너기 직전 우측으로 나있는 등산로를 오르다 보면 우뚝하게 치솟은 바위가 있는데, 높게 솟은 이 바위 위에서 별을 관측하였다 하여 첨성대란 이름을 얻었다. 이 곳에서 바라보는 경치 또한 장관이며, 마주보는 산아래 채운사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에도 선조임금의 글씨인 萬折必東(만절 필동)이 새겨져 있다. 이 뜻은 중국의 강물이 도중에 만번을 돌더라도 반드시 동쪽으로 흐른다는 뜻이다. 또한 숙종의 어필인 華陽書院이란 글씨가 남아있다. 특히 첨성대에서 계곡으로 내려와 약간 위쪽으로 오르면, 명나라 의종의 글씨인 非禮不動(비례부동)과 우암의 글씨인 大明天地崇禎日月(대명천지 숭정일월)이 새겨져 있다.

 

 

 f) 6: 능운대(凌雲臺)로 큰 바위가 우뚝솟아 능히 구름을 찌를듯하다는 의미로 능운대로 불린다. 지금은 포장되어 변형된 길로 능운대와 계곡을 갈라놓아 그 느낌을 잃어버린 곳이다. 화양구곡 가운데 유일하게 물길을 떠나서 있다. 능운대 뒤쪽으로는 채운사로 올라가는 길이 나있다.

 g) 7: 와룡암(臥龍岩)으로 제 6곡을 지나 탐방로를 오르다 보면 우측 계곡을 따라 길게 드러누워 있는 바위를 만날 수 있는데 이곳이 바로 와룡암이다. 긴 바위의 모습이 꼭 용이 드러누워 있는 형세와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는 와룡암 한쪽 끝부분이 길 아래로 들어가 버린 탓에 웅장함이 많이 훼손 되었다. 이곳에도 민진원의 글씨로 臥龍岩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h) 8: 학소대(鶴巢臺)로 와룡암을 조금 지나면 상류 대각선 쪽에 제 8곡인 학소대가 나온다. 높이 솟아있는 바위 위에는 낙낙 장송이 멋스러운 자태를 드리우고 있는 곳으로 백학과 청학이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에 몸과 마음이 머물러 둥지를 틀고 알을 낳아 새끼를 치고 살았다 하여 학소대라 한다. 이 학소대를 지나 도명산으로 오르면 마애 삼존불이 있다.

 i) 9: 파천(巴芊)으로 계곡 전체가 넓은 바위가 펼쳐져 있으며, 그 위로 흐르는 물결이 마치 용의 비늘을 꿰어 놓은 것 처럼 보여 파천이라 부른다. 200평쯤 되는 널찍한 반석 위에 신선들이 술잔을 나누었다는 전설이 있으며 물과 모래와 반석과 녹음이 어우러져 사람들이 가장 즐겨 찾는 곳이다. 이 곳이야 말로 화양계곡의 백미이며 숨겨진 비경이다.

 

 그러나 이모든 명소가 최근 도로를 확장하고 포장하면서 차가 드나들고 주변에 각종 음식점이 들어서 있어 너무 자연경관을 훼손하니 당국의 어떤 변화가 요구된다.

  

 

  F) 우암 송시열 선생의 유적

 

1) 우암 송 시열: (1607-1689)

 본관은 은진, 호 우암, 화양동주. 시호 문종(文正). 1633년 인조 11년에 장원 급제하여 최 명길 (崔明吉)의 천거로 경릉참봉(敬陵參奉)이 되었으나 사직하고 1635년 봉림대군(鳳林大君-훗날 孝宗)의 사부가 되었다.

 

 1649년 효종이 보위에 오르자 벼슬길에 나아가 효종과 함께 북벌 계획을 추진하였으나   이듬해 효종이 승하하자 그 계획은 중지되었다.

 주자학의 대가로서 율곡 이 이(李 珥)의 학풍을 계승하여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주류를 이루었으며 예론(禮論)에도 밝았다. 그의 문하에서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으며 글씨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문묘(文廟). 효종묘(孝宗廟)를 비롯하여 청주의 화양서원(華陽書院), 여주의 대로사(大老祠), 수원의 매곡서원(梅谷書院)등 전국 각지에 많은 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에 송자대전(宋子大全), 우암집(尤庵集)등이 있다.

화양서원지, 만동묘지 주변에는 송 시열 선생과 관련된 암서재, 하마비, 읍궁암, 묘소, 및 신도비 외에 암서재 주변에 암벽에 많은 애각(崖刻)사적이 산재해 있어 송 시열 선생의 북벌 애국사상과 민족 자존 정신이 깃든 곳일 뿐만 아니라 조선 성리학의 중심지로서 일제에 의하여 철저하게 왜곡 파괴되었던 곳으로 민족정기 회복을 위한 교육장소로서 중요한 곳이다.

2) 화양서원

화양서원은 송 시열 선생 사 후 7년 뒤인 1696 (숙종 22) 권 상하, 정 호 등이 청천면 도원리 침류정 아래 만경대에 건립하였다. 창건되던 해에 바로 사액(賜額)이 내려지고, 1716년에는 어필로 편액(扁額)을 달았다. 1703만동묘 건립 후 왕래 불편과 서원수호의 이유로 1709년 겨울 만동묘 옆으로 이전 하였다. 조선 후기 노론 사림의 본거지이자 중앙정치의 중심이었으며, 18 세기 정치 및 학문의 중심이었다.

 

 

 

 후에 화양묵패(華陽墨牌)의 폐단 등으로 1858 (철종 9)에 폐쇄를 당하고 1870(고종 7)에는 모든 건물이 헐리고 묘정비는 땅에 묻히게 되었다 

 

3) 만동묘(萬東廟)

만동묘는 우암의 유지를 받든 권 상하 등이 1704(숙종 30)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군을 파병한 명나라의 신종과 마지막 황제인 의종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하기 위해 건립하였다.

1747(영조 23)에는 예조에서 90명이 윤번으로 사당을 지키게 하고, 묘정비를 세웠다. 1809(순조 9)에는 기존 사당을 헐고 다시 짓도록 하였다. 이후 1865 (고종 2) 지방과 판액을 대보단으로 옮기고 만동묘를 철폐하였다가 18742월 최 익현 등의 상소로 부활되었다.

 

1908년 일본 통감부에 의해 다시 철폐되고, 1917년 제사를 금지 하였다. 1937년에는 제사를 지내는 유림을 구속하고 위패와 제구를 불사르고 묘정비를 징으로 쪼아 훼손하였다. 1942년에는 건물을 불사르고 묘정비를 땅에 묻어버리고, 1943년에는 완전 철거되었다. 광복 후 매몰되었던 묘정비를 찾아 19781027일 자로 충청북도 기념물 제 25 호로 지정되었다.

4) 암서재

 암서재는 1666 (현종 7) 우암이 화양동에 들어와 <화양계당>이라는 초가집을 짓고 살다가 3년 후인 1669년경 주자의 운곡정사(雲谷精舍) 를 본 따 3칸 정사로 지었다고 한다.

이후 퇴락한 정사를 청주목사 김 진옥(金鎭玉) 1715 (숙종 41)에 중건하고, 1747년에 이어 1900(고종 37)에 중수 되었다.

 지금의 건물은 1970년에 보수한 것인데, 보수하기 전에는 암서재 앞에 협문과 낮은 담장이 있었다. 보수를 하면서 담장 대신에 철책을 둘렀다. 암서재는 1994. 1. 7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 175 호로 지정 되었다가 1999 12 29일 사적 제 417호로 편입되었다.

5) 묘소 및 신도비

청천면 청천리 산 7-1소재. 우암 선생은 83세 되던 1689(숙종 15) 왕세자 책봉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 건으로 제주로 귀양갔다가 서울로 압송 중 6 8일 전라도 정읍에서 사약을 받았다.

 사 후 7 18일에 수원만의 무봉산 (현 경기도 화성군 동탄면 신리만의)에 묻히었다.

그 후 1757 (영조 33) 청천 매봉 현 위치로 이장 하였다. 묘비는 1736 (영조 12)  권 상하가 세운 묘비와 1804 (순조 4) 후손이 세운 작은 묘비가 있다.

 신도비는 1779년 정조가 비문을 지어 세우도록 한 것이다.

 묘소와 신도비는 1976.12.21. 충청북도 기념물 제 10호로 지정 되었다가 1999.12.29일 사적 제 417호에 포함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