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04.28
우리 문화유산 답사 (2)
(알려지지 않은 문화재를 중심으로 )
글, 사진: 김 한종
(5) 경북 영천 일대의 문화유적
신라초기 신라에 병합되어 경주의 외곽 방어지역으로 되었고 후 삼국기에는 경순왕과 견훤, 왕건과 견훤이 이곳을 무대로 하여 세력을 다투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천성은 왜군에게 함락되었지만 이내 의병의 봉기로 곧 탈환되기도 하였다. 가까이는 한국전쟁 때에도 북한군과 이곳에서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고 금호강 주변이 그 전쟁터였다.
이곳에는 고려말기에 정 몽주, 화약의 발명자 최 무선, 세종 때의 대마도 정벌공신 이 순몽, 임진왜란 당시에 의병장 정 세아, 정 대권, 가사문학의 대가 박 인로, 실학자 안 정 복, 근대의 여류작가 백 신애 등이 영천출신 이었다.
영천지역에서 우리는 지리상의 동선을 따라 먼저 오천 정씨 문중의 매산 종택과 산수정, 조선시대의 이 지역 인재를 길러내던 영천향교, 이 순몽 장군의 자취가 남아있는 숭렬당, 고려말 충신의 탄생지인 임고 서원, 예부터 이곳이 주요한 농업지역임을 알리는 청못과 청제비, 아울러 이곳에 신라시대 부 터의 불교정신이 스며있는 신월동 삼층 석탑 등을 통해 경북 동남부 지역의 문화유산을 살펴보기로 한다.
1)매산(梅山)고택 및 산수정(山水亭):중요 민속자료 제 24호(70.12.29지정)
경북 영천시 임고면 매곡길 356-6
이 건물은 조선 영조 3년(1725년) 문과 급제 후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을 거처 형조참의에 이른 매산 정 중기(鄭重器-1685~1757)선생이 짓기 시작하여 그의 둘째 아들인 일찬(一鑽)이 완성한 살림집이다.
본래는 정침 및 사랑채, 대문간, 아랫사랑, 고방, 방앗간 채, 측간 채, 사당, 별묘(別廟)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정침, 사랑채, 대문간, 사당, 측간 채만 남아 있다.
풍수설에 의하면 이 집터는 보현산(普賢山)을 정맥으로 한 기룡산(騎龍山) 주령이 매화나무 가지처럼 뻗어 내린 매화꽃술에 해당하고, 안산은 매화꽃술을 향하여 날아드는 나비의 모습이라고 한다.
건물구조는 조선시에 사대부가의 전형적인 형태이고 “ㅁ”자 형이며, 경사진 산 기슭에 자연의 지형을 그대로 살려 3단 높이의 지층을 이루고, 뒤로 갈수록 높아져 웅장함을 느끼게 한다. 안채는 두리 기둥을 쓰고 초익공(初翼工)의 공포를 짜는 등의 장식을 하여 고급스러운 멋을 부린 것과 사랑채 전면에 난간을 둘러 수평성을 느끼게 하였다.
이 집의 서남쪽 바위 벽에 있는 산수정은 매산이 만년에 지은 정자이다. 이 정자는 전면3칸, 맞배 집으로 가운데는 마루, 양쪽이 온돌방인데 자연석 주춧 돌로 하여 기둥 높이가 각각 다르고 허공에 떠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마루에 올라가 정면에 문을 열면 시야가 아래 개울을 넘어 숲으로 연결되어 운치를 더해주며 지붕 밑으로는 “梅谷精舍”(매곡정사) 라는 현판이 달려있다.
2) 임고서원(臨臯 書院):기념물 제62호(1985.10.15지정)영천시 임고면 포은로
임고서원은 고려 말 충신인 포은 정 몽주(圃隱鄭 夢周) 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조선조 명종 8년(1553년)에 부래산에 창건하여 사액 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선조 36년(1603년) 현 위치에 중건 재 사액 되었다. 인조 21년(1643년)에 여헌 장 현광 선생을 배향하고, 정조 11년(1787년)에는 지봉 황보 인(皇甫 仁) 선생을 추향하였고, 고종 8년(1871년)에 서원 철폐령으로 방치되었다가 1965년 복원되었다.
포은 정 몽주는 고려 충숙왕 복위 원년(1337년) 현 임고면 우항리에서 일성군 운관의 아들로 태어나 공민왕 9년(1360년) 문과에 자원, 예문검열 등을 거처 성균관 대사성, 문하시중 등을 역임하였고, 조전 원수가 되어 왜구토벌에 공을 세웠으며 대명 외교에도 큰 공을 세웠다. 지방관의 비행을 근절 시키고 의창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였으며, 성리학에 뛰어나 동방 이학 지조로 추앙되었고, 시와 서화에도 뛰어났다.
고려 삼은의 한 사람으로 기울어져 가는 고려의 국운을 바로 잡고자 노력하였으나 공양왕 4년(1392년) 선죽교에서 피살되었다. 조선 태종 원년(1401년)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익양 부원군에 추봉 되었으며 문충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3). 선죽교(善竹橋)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159 호로 개성 남대문에서 동쪽 약 1 km 거리의 자남산 남쪽 개울에 있는 다리로 고려 태조 왕건이 919년 송도의 시가지를 정비할 때 축조한 것으로 길이 8.35 m, 너비 3.36 m의 화강석으로 축조된 전형적인 널 다리로 정 몽주 선생이 후에 태종이 된 이 방원(李 芳遠)일파에게 피살된 장소이다.
원래는 선지교(善地橋)라 불렀는데 선생이 피살되던 날 밤 다리 옆에서 참대가 솟아나왔다고 하여 선죽교로 고처 불렀다고 전한다.
고려시대에는 돌난간이 없었으나 1780년(정조 4년) 정 몽주의 후손 정 호인(鄭 好仁)이 개성유수로 부임하여 선조의 유적에 우마차가 다님을 안타깝게 여겨 난간을 설치하여 통행을 제한하는 대신 행인을 위하여 바로 옆에 좁은 돌다리를 가설하였으며, 이번 성역화 사업의 일환으로 개성의 선죽교를 실측하여 그 규모로 이곳에 가설하고, 한 석봉(韓 石峯)이 쓴 선죽교 돌 비석 또한 탁본하여 세우게 되었다.
4) 영천향교 대성전(永川鄕校 大成殿): 보물 제616호 (1978.4.11 지정)
경북 영천시 교촌동 46-1
이 향교는 조선 세종 17년(1435년)에 건립 되었고, 그 후 중종 8년(1513년)경 군수 김 흠조(金欽祖)와 광해군 14년(1622년)경 군수 황 효의(黃 孝儀)에 의해 여러 차례 보수를 거처 오늘에 이르렀다.
이 건물은 영천향교의 문묘로서 공자를 비롯한 성현 25분의 위패를 모시고 봄, 가을로 제향을 올리고 있다.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 맞배집으로 전퇴(前退)를 두지 않고, 정면 평주칸에 바로 문과 창을 내었다. 기둥을 높게 하여 건물을 훤출하게 보이게 했으며, 상부의 가구(架構)를 간경하게 처리하여 내부를 경쾌하게 구성한 것이 특징이다.
5) 숭렬당(崇烈堂): 보물 제 521호. 경북 영천시 성내동
숭렬당은 조선조 세종 15년(1433)에 건립한 중국식 건물로서 그 구조와 형태가 아름답고 특이하다. 이 건물은 세종 원년(1419) 쓰시마(대마도) 정벌과 야인 토벌 등에 혁혁한 공을 남겨 일명 복장군(福將軍)이라 불리었던 명장 위양공 이 순몽(李 順蒙) 장군이 평소 기거했던 집이다.
현재는 위패를 받들고 봄, 가을로 제사를 드리고 있다.
출입문 입구에는 영천의 향사당의 향규(郷規)를 적어놓은 비가 있다. 광해군 6년(1614년) 복제 정담(1552~1634)이 지었으며 크기가 가로 126㎝, 세로 32.5㎝로 총 1091자가 음각되어 있다.
향규는 전문과 규약 10조 및 후기로 구성. 내용은 17세기 초 영천 사림이 전란 후 사회기강을 확립시키려는 의도를 집약하고 있으며 당시의 사회적 상황과 조선시대의 향촌사회의 변화하는 과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6) 신월동 3층 석탑: 보물 제 465호. 경북 영천시 금호읍 신월리 205-1
이 석탑은 9세기 통일 신라시대의 것으로 높이가 4.75m이다. 신라 진평왕(眞平王)때 신흥사가 위치했던 곳이라는 전설에 따라 근년에 신흥사라는 절이 새로 건립되었다.
2중 기단 위에 3층의 몸 돌과 지붕 돌을 쌓아 올린 것으로, 전형적인 신라석탑 양식을 따르고 있다. 윗 기단부의 면석에는 팔부중상(八部衆像)이 돋을 새김으로 되어있고 탑신부는 몸 돌과 지붕 돌이 각각 한돌로 조성되었다. 기둥 돌 밑변 받침은 4단이고 추녀 밑은 수평을 이루고 있다.
또한 보통 석탑의 몸 돌인 경우 문짝모양과 자물쇠를 조각하는 경우는 볼 수 있지만 이 탑처럼 면마다 이런 무늬를 새기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비록 기단과 탑신부의 여러 곳이 손상을 입었으나 신라 석탑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고 있다.
7) 영천 청제비(永川 菁堤碑):보물 제 517호 (1969.11.21지정)경북 영천시 도남동
이 비는 신라시대에 청못이라는 저수지 수축과 관련이 있는 양면비(兩面碑)이다. 비는 화강암의 자연 판석으로 장방형의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크기는 높이 114㎝, 폭 94㎝, 두께 16㎝이다. 이면에는 행간이나 윤곽선은 없고 양면을 가공하여 글자를 새겼는데, 그 양면의 비문은 각기 다른 연대와 내용을 담고 있다.
비의 한 면은 병진년(법흥왕 23년,536년)의 간지(干支) 가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청못을 처음 축조한 기념으로 새긴 것이다. 다른 면은 정원(貞元) 14년 (원성왕 14년, 798년)의 절대 연대가 적혀있는 것으로 청못의 일부 무너진 둑을 다시 수리한 사실이 적혀있다. 이러한 비문 내용은 신라시대의 벼농사 및 수리시설과 관련이 있는 점에서 그 가치를 높이 평가 할 수 있다.
청제비 서쪽으로는 숙종(肅宗) 14년(1688년)에 세워진 청제 중립비가 있다.
비문에 의하면 효종 4년(1653년)에 비가 두 동강이 나서 땅속에 매몰되어 그 고적(古蹟)이 전하지 못하게 된 것을 안타깝게 여긴 세 사람이 다시 세웠다는 내용을 적고 있다.
위의 비문들은 1960년 12월 신라 “삼산 학술 조사단”에 의해 처음 발견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진: 상-우측의 청제비. 하- 좌측의 청제 중립비)
8) 영천 청제(永川 菁堤): 경북 기념물 제 152호. 경북 영천시 금호읍 구암리 437
이 저수지는 보물 제 517호로 “영천 청제비”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신라 법흥왕 23년 (536)이전에 축조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각종 지지류(地誌類), 청제문부(菁堤文簿) 등의 자료를 통해 수 차례의 수리가 이루어 졌음을 알 수 있으며, 신라시대에 축조된 수리시설 중 현존하는 최고의 제언(堤堰)중의 하나이다. 현재 제방의 길이는 243.5m, 높이는 12.5m로 흙으로 쌓은 저수지이다.
저수 면적은 약 11만㎥이고, 저수량은 59만 톤이며 현재도 이 지역 일대의 중요한 농업 용수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한국 농업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문화재로 지정 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의 경부고속도로 공사로 인해 현재는 남북으로 저수지가 갈라져 있어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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