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종 여행기/우리문화유산 답사

2015.07.18.우리문화유산답사-강화도<저항의 섬>-교동도 일대-(29)

땡큐 이영옥 2015. 8. 1. 17:33

 

 

2015.07.18

                                                         우리 문화유산 답사

     

             강화도-저항의    

                                    <교동도-유배의 고장>                    

                                                                 (29)

                                  <강화도~교동도 일대>  

                                             , 사진:   한 종  

     

                             (사진:강화산성 섬화루)

 

 

 

 

          강화도와 교동도, 석모도 전도

  

 

 

 

 

 

서울에서 가까운 강화도는 민족의 성지로 산에는 단군에게 제사를 지내는 참성단(塹聖壇)이 있다. 이런 곳은 태백산에도 있으니 정상 천제단에서도 고조선을 개국한 단군왕검께 매년 103일 제사를 지내고 있다.

마니산에서는 올림픽 때나 전국 체전 시에도 성화를 채취하고 있으니, 강화도는 우리민족의 성산을 포용하고 있다.

강화도는 우리나라 섬 중 5섯 번째 큰 섬으로 중앙에는 고려산, 혈구산, 길상산, 남쪽으로 마니산 등이 있고 평야지대에는 논밭이 발달하여 벼농사의 고장으로도 유명하다. 섬이나 그 규모로 보아 섬으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이다. 참성단에 제사에 이어 강화도 곳곳에는 선사시대의 고인돌 돌무덤이 여러 지역에 산재해 있어 그 또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강화도는 삼국시대에도 고구려와 백제의 격전지로 강화도 건너 교동도로 추정되는 관미성을 들 수가 있다. 고구려와 백제의 싸움에서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모두 차지하면서 강화도 일대는 모두 고구려 땅이 되었다. 당시에 이곳의 이름이 혈구(穴口)로 지금은 혈구산으로 남아있다.

그 후 백제와 신라가 나제동맹(羅濟同盟)을 맺어 한강유역을 회복하면서 다시 강화도는 해구군 또는 혈구군으로 불리었다.

고려시대 중기 최 충헌~최 우( ) 무신정권 시절에 몽골 테무친이 칭기스칸으로 추대되어 통일을 이룬 후 몽골 군이 침입하여 이후 100년간 몽골에 조공을 바치면서 왕의 이름도 충자를 넣어 충렬왕, 충숙왕 등 100여 년에 걸 처 몽골의 부마국으로 전락하고 말았던 치욕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당시에 무신정군을 장악하던 <최 우> 1232년 강화도로 천도를 하면서 이후 39년간 저항의 역사를 이어간 현장이었다.

이 기간에 고려는 강화섬에 궁궐과 성곽을 쌓고 몽골군대의 침략에 대비하였다. 그리고 불교의 불심을 빌려 몽골 오랑케를 격퇴하겠다는 신념으로 금속활자를 만들고, 고려 대장경을 만들고, 왕궁과 사원의 건립 등을 이루었다.

이 규보가 쓴 <동국이상국집>에 고려 고종 21년 부 터 (1234~41) 최 우가 금속활자를 사용하여 <상정고금예문>을 찍어냈다는 기록이 있어 당시로서는 세계최초로 활자를 사용한 기록이나 현존하지 않고 있다.

고려 충렬왕 때 인주(인천)에 합병되었다가 1377년 우왕 3년에 강화부로 승격되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1627년 후금국의 침입으로 당시 인조가 강화로 피신하여 100여 일을 머물렀던 것이 정묘호란이었다. 그 후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당시에 인조는 급한 나머지 강화도로 가지 못하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항쟁하다가 삼전도에 굴복으로 청나라에 항복하였다. 이때 세자인 봉림대군과 신하 등 200여명이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다.

 그 후 청나라에서 돌아온 봉림대군이 효종(孝宗)으로 등극하여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으려고 북벌을 계획하면서 강화 해안에 울곳진, 제물진, 용진진, 광성보, 승천보 등의 방어시설을 쌓았고, 숙종 때에 와서는 강화 해안에 모두 53개의 돈대를 설치하여 섬 전체를 요새화 하였다.  

조선 후기에 들어와 서양세력이 강화도에 들어와 개항을 요구하였으니, 1866 프랑스함대가 침입하여 강화에 상륙하여 당시에 전등사에 보관하였던 외 규장각 도서를 약탈해 간 것이 145년 만에 돌아왔고, 1871년도에 미국의 함대가 침입하니 운양호 사건으로 신미양요인 것이다. 또 일본이 1875년 통상교섭권을 요구하며 운요호를 파견하면서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어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열강에 의해 개방되면서 우리나라는 일본을 비롯한 청나라, 러시아 등의 세력이 들어와 마침내 나라가 1910년에 일본에 합방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다.

이렇게 강화도는 한강의 입구요 관문으로 열강의 세력 다툼으로 희생되었다.

한양에서 가까운 곳이라 전란 때마다 왕이 피신하여 간 곳이 바로 강화도로 우리 역사의 한이 서린 곳이다. 이번에 강화도의 고려 시대 전후의 역사적인 치욕의 장소와 쇄국정책의 여파로 열강이 강화도를 중심으로 침략하고, 격전을 벌인 곳을 중심으로 또 약탈하여간 문화재를 둘러보는 기회를 마련하게 되었다.

  

 

 

1.  선원사지: 사적 제 259

선원사는 고려 고종 32(1245) 당시의 무신정권의 <최 우>가 몽골의 침입을 피하여 도읍을 강화도로 옮긴 후 창건한 사찰이다. 당시에 2000여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불심(佛心)으로 대몽 항쟁을 위해 지은 사찰로, 멀리 순천의 송광사와 더불어 창건 하였다. 몽골 군의 침입으로 부처님의 불심을 따라 이곳에서 팔만대장경 판각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 왕조 실록> 태조 7(1395) 대장경판을 한양으로 옮겼다는 기록이 있던 선원사는 그 후 폐사가 되었다. 이로 미루어 보면 당시에 규모로 보아 대장경을 보관할 만한 곳이 선원사로 추정 되어지고 있다. 당시에 대장도감의 본거지가 강화도에 있었고 선원사의 고승들이 이를 주관하였다 한다.

당시 대몽 항쟁으로 불력을 통해 정신적 지주로 삼고, 국찰로서 역할을 하였고, 이곳에 대장도감을 두어 팔만대장경의 목판을 조각하였다. 이때의 8만 대장경은 조선 태조 7(1398) 한양으로  옮겼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세조 2(1456)에 합천 해인사로 옮겨 현재는 해인사에 봉안되고 있다.

 그 후 이 사찰은 소실되어 폐허가 되었던 것을 1976년 들어와 동국대학교 학술 발굴단이 선원사지를 발굴하면서 보상화문이 새겨진 전돌, 막새기와, 치미 등이 출토되었고, 절터 중심은 남북 250m, 동서로 170m 의 큰 절터로 20여 동의 건물터가 확인되었다.

지금은 입구에 박 정희 대통령의 재임 시 사진이 전시되었고, 해마다 8 1일에 대통령 추모제가 열리며, 사찰 건너 논에는 연꽃이 피어 선원사지 연꽃 축제가 이어 열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가까운 곳에서 아름다운 연꽃 축제를 볼 수가 있다.

 

 

 

2. 고려 궁지: (사적 제 133)

몽고가 침입하여 나라가 어수선한 때에 고종 19 1232년에 당시의 무신인 최 우의 의해 강화로 천도하여 대몽 항쟁을 위해 이곳 2.279 평에 이르는 터전에 1234년부터 궁궐과 각종 관아를 지어 이곳으로 천도하여 39년을 버티었다. 이곳이 고려궁지로 원종 11(1270) 까지 이곳에서 고려조정이 버티었다..

고려 궁지는 개경 송도와 비슷하게 지어졌고, <고려사 절요>에 의하면 최 우가 이령군을 동원하여 이곳에 개경 송도와 비슷한 규모로 지으면서 산 이름도 송악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 후 고려가 몽골의 부마국이 되면서 화친하여 1270년 개경으로 환도하면서 몽골의 요구로 궁전과 성곽 등을 모두 철거하였다.

조선조 1631년에 옛 고려궁터에 왕이 행차하여 머무는 행궁을 건립하고, 전각과 강화 유수부, 동헌, 이방청, 창녕전, 만녕전 등을 세워 조선 궁전의 모습을 갖추었다.

                                                 (사진: 고려 궁터 전경)

 

1782년 정조 6년에 황실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외규장각을 건립히여 왕이 열람하던 어람용 의궤를 보관하였었다.

당시에도 어람용 의궤의 표지는 비단을 사용하였고, 종이는 고급 초주지(草注紙) 사용하였고, 해서체로 정성 들여 글씨를 쓴 다음 붉은 선을 둘러 왕실의 위엄을 더하였다.

그러나 1637년 병자호란 때 청나라가 침입하여 당시의 강화성이 청군에게 함락되어 불타버리었다. 그 이후 고려궁터에 조선시대에 건물인 승평문, 강화유수부 동헌, 이방청, 종각 등이 복원되었다.

1783년 강화유수 김 노진이 편찬한 <강화부지>에 궁전배치도가 실려있다. 북문아래 왼쪽부터 행궁, 외 규장각, 장령전, 만령전, 그 앞으로 천추문, 이아(貳衙-유수 보좌관의 집무소), 객사, 상아 등이 들어서 있었다.

a)    강화동종: (보물 제 11-8)

조선시대에 강화유수 윤 지환이 주조한 것으로 강화 성문을 여닫는 시간을 알리는데 사용하였다 한다. 그 후 1711년 숙종 37년에 유수 민 진원이 정족산성에서 현재의 것을 주조하였고, 종은 높이가 198, 지름이 138이다.

종각은 당시의 강화산성 남문 김 상용순절 비 자리에 있던 것을 1977년 고려궁지로 이전하였으나 현재의 것은 1999 10월 복제한 것이다. 원래의 강화동종은 지금은 <강화역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종의 머리는 용머리로 조각되었고, 종 가운데에는 두 줄의 횡선을 그려 상하로 나누었으며, 어깨부위에는 꽃무늬가 있으며 9개의 연꽃이 새겨져 있다. 횡선아래로 조선조 숙종 37년에 주조했다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b)   외 규장각

조선 정조 때 왕실관련 서적을 보관하였던 곳이다. 당시의 중앙의 규장각을 따라 왕실이나 국가의 중요행사내용을 기록한 의궤(儀軌)를 비롯한 왕실 관계 문헌을 보관하였다.

1782년 정조 6년에 황실관련 서적을 보관할 목적으로 외 규장각을 건립하여 왕이 열람하던 어람용 의궤를 보관하였었다.

                                                       (사진: 외 규장각 전경)

 

당시에도 어람용 의궤의 표지는 비단을 사용하였고, 종이는 고급 초주지(草注紙) 사용하였고, 해서체로 정성들여 글씨를 쓴 다음 붉은 선을 둘러 왕실의 위엄을 더하였다.

1866년 고종 3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강화도를 점령하면서 당시 이곳에 보관하였던 은괴 19상자와 함께 어람용 의궤 302책 등을 약탈하여갔으며, 나머지는 불에 타 버렸다.

현재 남아있는 의궤는 조선 후기의 것으로 당시는 5~9부가 만들어 졌고, 임금의 의궤 1부는 고급으로 제작하였다. 정조 때부터 왕실의 행사나 잔치를 표현한 의궤가 활자본으로 만들어 지면서 많이 제작되었다.

 

                                   (사진: 외규장각에 전시된 대례의궤 )

 

이 의궤는 1975년 당시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근무중이던 박 병선박사가 발견하여 우리정부는 1991년에 외무부가 반환을 요청하였다. 당시 약탈된 것은 1) 의궤 큰 책 300권과 가철 된 작은 책 9. 2) 흰 나무상자에 든 작은 책 13. 3) 소책자 18. 4) 조선, 중국 일본의 지도 각 1점씩, 평면 전체도 1 , 5) 기록족자 7점 기타 갑옷과 투구 3, 가면 1점 등이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프랑스정부에 반환을 요청하였으나, 협상이 지지부진하다가 그 후 1993 <김 영삼> 정부 시 떼제베협상 때에 미테랑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면서 단 한 권을 가져왔으며 그 후 <이 명박> 대통령이 2010 11 12 G 20, 정상회담 시 양국 대통령이 만나 우리나라의 약탈도서 일지라도 임대형식으로 반환을 받아 실로 145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현재 남아있는 의궤는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 중앙 연구원 장서각, 파리 국립도서관, 일본 궁내성 등에 남아있으며 그 숫자는 약 630여종에 이른다.

c)     강화 유수부 이방청: 인천 유형문화재 제 26

강화 유수부 안에 있는 6(이방, 호방, 예방, 병방, 형방, 공방)의 건물 중 이방청으로 조선조 효종 5(1654)에 유수 정 세규가 세웠고, 정조 7(1783)에 유수 김 노진이 보수하였다. 이방청에선 당시 법전과 군무를 제외한 사무를 보던 곳이다.

현재 이방청의 안에는 강화의 국난극복 현장도와 전적지 등 그림과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1층의 목조 기와 건물로 디긋자 형태로 지붕 옆면이 팔자로 팔작 지붕의 형태이다. 온돌방이 8, 대청이 12, 부엌이 1칸으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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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강화 유수부 동헌: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 25)

조선시대 관아 건물로 당시 강화지방의 군청이다. 강화부는 인조 4(1626)에 강화 유수부로 승격되었다. 그 후 1977년에 개수하였다.

영조 45(1769) 에 유수 황 경원<현윤관>이라 하였으나, 지금은 명위헌(明威軒) 이란 현판이 걸려있고, 글씨는 백하 윤 순”( )이 썼다.  건물은 정면 8, 측면 3, 겹 처마 단층 팔작 지붕으로, 2중의 장대석 기단 위에 네모난 주초석으로 기둥을 세웠다.

e)    강화 용흥궁(龍興宮): 인천시 유형 문화재 제 20

조선조 25대 철종(1831~1863)이 왕위에 오르기 전 19세 까지 살았던 곳이다.

그의 원명은 이 원범으로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언군>의 아들 이 광 3남으로 모반에 휘말려 가족이 모두 강화와 교동도에 유배되었다. 그는 훗날 순조의 양자가 되었다가 24대 헌종이 후사가 없이 승하하자, 강화도의 농사꾼으로 일명 강화도령으로 불리었던 그가 임금으로 추대되어 철종으로 등극하여(1849~1863) 14년간 6개월 간 왕위에 있다가 33세의 나이로 병사 하였다.

그가 왕으로 있던 철종 4 (1853)에 당시 강화유수 정 기세가 지금의 건물을 짓고 용흥궁이라 하였다. 

                                                      (사진: 용흥궁 전경)

 

 좁은 골목에 대문을 세우고 행랑채를 두고 있어 창덕궁 낙선재와 같이 소박한 분위기를 풍긴다. 궁 안에는 철종의 잠저(潛邸)임을 기록한 비석과 비각이 있다.  지금 남아있는 건물은 내전 1, 외전 1, 별전 1동 등이다.

내전은 정면 7, 측면 5칸으로 90의 팔자지붕에 주심포 구조로 되어 있다.

 

f)     강화 문학관.

파란만장의 고장인 강화의 역사문화를 집대성 하여 놓았다.  강화 고려시대의 대몽항쟁의 터전인 고려궁지, 철종의 잠저인 용흥궁, 성공회 성당 등과 인접해 있어 함께 찾아 보아야 할 곳이다. 강화의 저항 정신과 자존심을 집대성하여 놓은 곳이다.  1층에는 자랑스러운 강화 문화가 체계적으로 펼처져 있다.   이 규보의 문학과 풍류, “송강 정철”,  이 광사”, “정 인보로 이어지는 강화학파의 문인들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2층에는 현대 여류 수필가 조 경희씨의 작품과 유품이 전시되어 있다.

 

                                             (사진 : 강화문학관 전경)

 

 

 

 

 

 

 

 

 

3. 강화산성: 사적 제 132 (1964.6.10 지정)

강화산성은 1232년 고려 고종 19 6월 부 터 몽골의 침입에 대비하여 당시에 실력자인 최 우가 그의 군사 2천 여명을 동원하여 축성하였다. 당시에 강화 읍 내가면, 하점 면 일대에 걸쳐 쌓았고, 당초에 성은 내성, 중성, 외성의 3중으로 쌓았으나 현재는 돌로 쌓은 내성만 남아있고 둘레가 약 1.2km정도이다. 도성 축조와 함께 당시의 개경 송도와 비슷한 궁궐과 관아를 건립하였다.

중성은 둘레가 약 9km의 토성이었고, 8개의 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남아있지 않다. 외성은 강화의 동쪽 해협을 따라 쌓은 3 77척에 달하는 토성이었으며, 개경에서 옮겨온 왕실이 육지로 부터 각종 물자를 공급받는 기지였으며 몽골이 바다건너 강화를 침입할 수 없게 만들었다.

돌로 쌓은 내성은 성문이 4곳으로 첨화루, 안파루, 진송루가 있고 암문이 2, 수문, 장대 등의 방어시설을 갖추었다. 현재 강화동쪽의 성벽은 헐리었지만 남쪽과 북쪽의 성곽은 보존되어 있다.

                                 (사진: 강화산성 성벽과 남문-첨화루 전경) 

 

 당시는 산성이 내성, 중성, 외성으로 되었고, 내성은 둘레가 약 1,2km로 지금의 강화성이다. 중성은 내성을 지키기 위해 1250년 에 약 9km로 쌓은 토성이다.  중성에는 8곳의 성문이 있었고, 모두 송도의 이름을 따서 동쪽은 선인문(宣仁門), 서쪽은 선기문(宣祺門), 남쪽은 태안문(泰安門), 북쪽은 창희문(彰熙門)으로 불렀다.  외성은 다시 중성을 수비하려고 1233년부터 쌓았고, 1235 12월 에 가서는 대대적인 축성공사를 벌려 강화의 동쪽 해안을 따라 3 7.070 척의 길이로 쌓았다.

토성인 외성은 몽골군이 바다를 건너 공격하지 못하게 한 시설로 이곳을 통해 고려는 39년 동안 육지로 부 터 물자를 조달 받아 버티어 갔다.

1259년 몽골과 강화를 하자 몽골은 주자도고를 보내어 내.외성을 모두 헐었다. 그 후 강화산성은 조선 초에 다시 축조하면서 내성인 강화성으로 축소되었다.

1637년에 인조 15년 병자호란 시에 청군에 의해 파괴되고, 1677년 숙종 3년에 강화유수 허 질( ) 이 내성규모를 크게 쌓았다. 1709년 유수 박 권이 중수 하면서 견고하게 쌓았고, 여장(女牆)도 쌓았지만 대부분이 무너졌고, 당시 성안에 남장대, 북장대, 서장대 등을 축조하고, 수문을 2곳에 두었다.

현재 서문에는 옛 연무당 터에 기념비가 서있고, 이곳 남문에 있던 김 상용순절비는 관청리의 고려 궁 터 앞으로 옮기었다.

연무당 터는 강화진을 방어하던 군사들이 훈련하던 곳으로, 1876년에 이곳에서 일본의 강압으로 소위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는 비극의 현장이었다. 이 조약으로 조선은 쇄국정책을 버리고 인천, 부산, 원산의 3 항구를 열고, 일본인에게 치외법권이 적용된 불평등 조약이 체결되어  김 상용열사가 순절한 것이다.

이 강화도 조약이 일본에게 나라를 잃어가는 단초가 되었고, 연무당 옛터 비 뒷면에는 당시의 사연이 새겨져 있다.

강화 내성을 쌓을 때 강화 읍을 흐르는 동락천 위로 남문 옆의 성곽과 연결해 설치한 것이 3개의 홍예문으로 된 수문이다.

                                             (사진: 동락천 홍예문 전경)

 

서문인 첨화루는 1711년 강화유수인 민 진원이 세웠고, 현판도 스스로 썼다. 겹 처마 팔작 지붕에 정면 3, 측면 2칸 크기의 누각이다. 양 옆으로 야산으로 이어지는 성곽이 복원되어 있으나 주택이 너무 가까이 들어서 있다. 남문인 안파루는 1973년에 복원하였다. 북문인 진송루는 문루가 없던 것을 1783년에 성 개축 시 새로 세웠으며, 동문인 망한루는 2004년에 복원하였다.

1966년에 서문을 해체 복원하였고, 1975년에 성곽을 전반적으로 보수하였고, 1977년에 와서 북문을 복원하였다.

성곽은 남문남산(223m)→서문북문북산(140m)→동문견자산남문으로 이어졌다.

 

4.청련사 목조 아미타여래 좌상: (보물 제 1787)

 

청련사는 고려산 자락에 위치한 사찰로 고구려 장수왕 4(416)천축조사가 이곳에 와서 연꽃이 아름답게 피는 것을 보고 그 꽃잎을 따서 고려산 정상에 올라 오색연꽃을 날렸는데 청색연꽃이 떨어진 곳이 지금의 청련사 터라 이곳에 사찰을 건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조 순조 21(1821)에 중수하였고, 1979년에 현재의 법당을 새로 지었다.

이 사찰 법당의 <목조 아미타 여래좌상> 13세기 고려 불상의 조형적, 양식적 특징을 띠고 있어 개성에서 강화로 천도한 1232~1270년 사이에 주불로 모셔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체에 비해 큰 얼굴, 근엄한 모습 등으로 보아 고려 후기의 불상으로 추정된다.  이 불상은 서울 개운사의 아미타 여래 좌상이나, 서산 개심사의 아미타 여래 좌상등과 양식과 기법이 흡사하다.

이 불상은 고려 불교 미술의 정수로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좌불상으로 2012년 보물 제 1787호로 지정되었다.

 

                                          (사진: 목조 아미타 여래 좌상)

 

 

 

 

5.   하점면 장정리 5층석탑: 보물 제 10

 

 봉은사지(奉恩寺址) 5층 석탑으로도 불린다. 원래 봉은사는 개성에 있던 고려시대의 국가 사찰로 고종 19년에 강화로 천도할 때 함께 옮겨왔다. 발견 당시 주변에 흩어져 있던 석재를 모아 1960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3층 이상의 몸 돌과 5층의 지붕 돌, 상륜부가 유실되었고 현재 남아있는 부분의 높이는 3.5m이다. 고려후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의 절터는 봉은사로 고려 광종 2(951)에 창건되어 태조 <왕 건>의 진영을 봉안한 국가 사찰로 고종 19년에 이곳으로 옮겨온 것이다. 그로 인해 고종 36~46년 사이에 이곳에서 매년 연등회가 개최 되었고, 지금 절터에는 이 5층 석탑과 왼쪽으로 방형의 우물 터가 남아있다.

 

                                                 (사진: 하점면 5 층 석탑 전경)

 

몽골의 침입으로 고려의 왕실과 조정이 강화도로 천도했고, 이에 고려 조정은 강화도에 제2의 봉은사를 창건했다는 기록이 <고려사> 고종 21 4월에 기록되어 있으니, 이 자리가 바로 그곳이다.

 또 고려사에는 왕이 매년 2 14일에 봉은사에 행차하여 연등회를 개최하고 참배하였다로 쓰여 있다. 이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봉씨의 시조의 석상으로 모시는 석조여래 입상이 전각안에 모셔져 있다. 

 

6.   하점면 석조여래 입상: 보물 제 615

강화 하점면 5층 석탑과 함께 고려시대 사찰인 봉은사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며 높이가 2.82m의 마애불(磨崖佛)이다.

머리 위에 큼직한 육계가 솟아 있고 얼굴은 둥근편으로 입가부터 양쪽 볼과 눈매에 이르기 까지 미소를 가득하게 머금고 있다. 목에는 삼도가 표현되어 있고, 통견 법위(法衣)가 원호를 그리면서 몸 전면을 감싸고 있다.

광배는 두광과 신광으로 구분되며, 두광에는 화염문 등이 장식되어 있으며 전체적으로 입상의 하반부는 간략하게 조각되어 있다.

얼굴 표현, 법의의 단층식 처리, 광배, 화염문 등의 표현수법으로 미루어 제작 연대가 11세기로 추정된다. 5층 석탑과 300 m 떨어진 곳에 있다.

 그러나 이 석조여래 입상 <전등본말사지>에 기록에 의하면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봉 천우”( 天禑) 가 그의 5대 선조로 봉씨의 시조인 봉 우”( )를 기념하기 위해 사찰을 지었고,

그 이름을 <봉은사>라 하였고 제를 올리는 대를 마련하여 봉천대라 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그 기록을 토대로 여기에는 봉씨 종친회에서 마련한 석상각(石像閣)에 이 마애여래불을 모시고 봉씨 일가의 시조로 모시고 있다는 기록이 적혀있어 혼란을 주고 있는 문화재이다.

 

7.   연미정(燕尾亭)-월곳돈대: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재 24

 

이곳은 장무공 황 형”( )장군이 오위도 도총관에 이르는 30여 년간, 남 서북 국경을 침략하는 왜군과 여진족들을 북벌한 후 공조판서를 역임하고 낙향하여 기거하던 곳이다.

공은 1459~1520 62세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중종은 시호를 <장무>로 내리고, 연미정 지역 3만여 평을 하사 하였고, 그 이후 4만여 명의 후손이 매년 음력 10 1일에 제례를 거행하고 있다.

1480 21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혜산진 병마절도사에 제수되었고, 그 후 회령부사, 경상 좌도 병마절도사로, 1510년에 삼포 왜란 시에는 경상좌도 방어사로 왜란을 평정 하였다.

1514년 평안도, 함경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되어 여진족을 격퇴하였고, 만년에 이곳 연미정에 낙향, 이곳에 소나무를 심어 병선용재로 쓰게 하였고, 선조 때도 유비무환의 대비하여 이곳에 대나무도 심었다. 조선조 때는 이곳에서 중국사신을 영접하여 국정을 논의하고 협약을 체결하던 곳이다.

                                                   (사진: 연미정 전경)

 

이곳 월곳리는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하는 곳으로 제비꼬리와 같다 하여 연미정이라 명명하였다. 강화 10경의 하나로 옛날에 서해로 부 터 한양으로 가는 배가 이곳에 멈춰 조류를 타고, 한양으로 갔다고 한다. 고려 때인 1244년경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정묘호란 때 선조가 이곳에서 청나라와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맺었던 곳이다.  이 후 영조 20년에 중수하였고, 그 후 여러 차례 보수하였다.

연미정은 고려시대의 정자로서 정면 3,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서남쪽으로 흐르는 물줄기에 중심에 위치하고 한강으로 들어오는 적을 미리 막아내기에 좋은 요새이다.  지금도 북한 간첩의 침투로로 사용되기에 군인들이 연미정 아래 한강 위에 초소에서 주야로 경계를 선다.

정자는 높은 주초석 위에 세워졌고, 정자 양쪽으로는 40년 이상 수령을 자랑하는 느티나무가 정취를 더하고 있다.

조선 시대에 삼포왜란 때 전라도 방어사로 큰 무공을 세운 황 형장군에게 이 정자를 하사하였으며, 현재 황씨 문중의 소유로 되어 있다.

       교동도-왕실의 유배지

강화도는 섬으로 교동도, 석모도, 불음도, 주문도, 서검도 등 10개의 유인도와 남섬, 대섬 등 15개의 무인도를 거느리고 있다. 그리고 북으로 임진강, 예성강과 그 앞으로 한강이 흘러나와, 교동도는 예전에는 3개의 강에서 흘러온 기름진 토사가 쌓여 하나의 섬으로 되었다는 것이다.

교동도는 동서로 약 12km, 남북이 약 8km, 둘레가 37.5kim, 면적이 47.2이 에 이르는 삼각주에 있다

그렇게 하여 교동도는 옥토로 되어 농업이 발달하였고, 이조 시대에는 한양에서 멀지 않아 주로 왕실의 유배지였다. 그 예로 고려 21대왕 희종, 조선시대에 안평대군, 임해군, 능양대군, 왕이었던  연산군, 후에 사도세자의 손자로 철종으로 등극한 원범”(일명 강화도령)도 이 섬에 유배되었다.

전남에 해남, 강진 지역이 선비들의, 유배지라면 교동도는 왕족의 유배지였다. 한양에서 이틀 거리인 교동도는 해안과 가깝지만 조류가 세어 왕족의 유배지로서는 알맞은 곳이었다.

 

 

                                       (사진: 새로 건설된 교동 대교 전경)

 

고려 시대엔 중국으로 오가는 국제무역선의 기착지였고, 개경의 벽란도의 관문으로 물물교환이 성해하였던 곳이다. 조선시대에는 해상전략 요충지로 경기수영이 있었고, 충청도와 황해도에 이르는 방어 역할을 하였다.

 섬 건너로는 개성의 송악산이 보이고 모두 민둥산으로 다가온다. 읍내에는 교동향교가 자리잡고,  옛 읍성 터와 남문이 남아있다. 그리고 연산군의 유배지가 쓸쓸하게 주변에 황량하게 남아있다.

조산시대에는 한강으로 드나들던 각종 화물선이 이곳으로 오가며 물동량을 싣고 한양으로 강을 통해 거슬러 올라가곤 하였다.

2014 7월에 강화도와 교동도를 잊는 3.44km의 최신식 교량이 건설되었다.

 

 1. 연산군의 적거지(謫居址):

 

연산군은 성종의 아들로 성종이 죽자 제 10대 왕으로 1494년 즉위하였다. 그는 실정을 거듭하다가 <중종반정>으로 12년 만에 쫓겨나 1506년 폐위되어 강화 교동으로 추방되었다.  교동에 온지 두달 만에 세상을 떠났으니, 그의 나이 31세였다.

그의 적거지(귀양지)로 신곡동 산골은 옛 선착장으로 사용되던 호두포구에서 교동도 안쪽으로 들어간 봉황산 자락이다. 연산군이 이 산 기슭에서 강화도 인진나루를 바라보며 읊은 시가 있어 이곳을 그의 적거지로 여기고 있다.

               

                                            (사진: 연산군의 적거지 )

 

옛날 연산군이 유배될 당시에는 인화리의 인진나루에서 교동도 호두포구로 뱃길이 이어졌다고 한다. 고구리 연산골은 연산군이 유배될 당시 현청이 있어 이곳의 관리들이 그를 감시하기가 쉬었다 한다.

읍내리 성내마을 부근당(扶芹堂) 연산군이 왕의 직위에서 쫓겨나 이곳으로 유배되어 2달 만에 사망하였으니, 그 후 주민들이 이곳에 연산의 화상을 모시고 굿을 올리고 하였다 한다. 이장이 쌀을 거두고 행사는 여인들이 주도하고 외로이 죽어간 왕의 원한을 달래었다고 한다. 폐주가 죽은 달에 섬 처녀를 한 명 처녀 봉공하였다는 말도 전해오니….  이곳은 이렇게 왕이나 왕족이 유배되어 감시 속에 비참한 여생을 마친 곳이었다.

그러나 그의 능은 지금 도봉구 방학동에 있으며 1506년 중종 1년에 조성되었고, 그의 부인 신씨와 그의 가족 등 모두 8기가 이곳에 있다.

 

  

 

2. 교동향교(喬桐鄕校):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 23

강화군 교동면 읍내리에 있는 향교이다. 1127현 유의 위패를 봉안하여 배향하면서, 지방의 중등교육과 교화를 위해 창건한 조선 최초의 향교이다.

창건 당시에는 화개산 북쪽에 있던 것을 조선 중기에 부사 <조 호신>이 지금의 위치로 이전 하였고, 1966년에 중수 하였다.

현존하는 건물은 대성전, 동무(東廡), 서무, 명륜당, 제기고 등으로 되어 있다.

대성전 안에는 5성과 송조 2현 및 우리나라 18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조선 시대에는 나라에서 전답과 노비, 전적 등을 받아 교관이 교생을 훈육하였다.  현재는 교육의 기능은 없어지고, ,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하고, 초하루와 보름에 분향을 올리고 있으며, 전교(典校) 한 분이 운영을 담당하고 있다. 

 

 

                                             (사진: 교동 향교내의 명륜당 전경)

 

   4. 읍내리 비석군

 

조선시대 선정을 펼친 교동지역의 목민관인 수군절도사 겸 삼도통어사, 도호 부사, 방어사 등의 영세 불망비 등 총 40기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이 비석들은 교동면 관내에 흩어져 있던 것을 1991년 부 터 강화군 및 교동도 유림에서 이곳으로 이전하여 관리하고 있다.

 

                                             (사진: 교동섬의 비석군 전경)

 

 

 

 4. 교동 읍성: 인천 광여시 기념물 제 23

 

조선 인조 7 (1629) 교동에 경기 수영(京畿 水營)을 설치할 때 돌로 쌓은 읍성이다.

둘레 430m, 높이 6m 규모로 3개의 문을 내고 문루를 세웠는데, 동문은 동삼루, 남문은 유량루, 북문은 공북루라 하였다. 영조 29 (1753) 여장을 고쳐 쌓았고, 고종 21(1884)에는 남문을 다시 보수하였다.  동문과 북문이 그 후 없어졌으며, 남문은 1921년 폭풍우로 무너지고 홍예문만 남아있다.

 

 

                                            (사진: 교동 읍성의 홍예문 전경)

 

 

  

 

         강화도의 역사와 근대화의 격전장

 

1.  마니산 참성단(摩尼山 塹聖壇):사적 제 136

 

강화도 마니산은 우두머리 뫼라는 뜻의 두악”(頭嶽)으로 고려사 태종실록에 기재되어 있고 <마리>는 머리를 뜻하며 민족의 머리로 상징되어 민족의 영산으로 불리고 있다.

마니산은 높이가 475m 로 강화섬에서 가장 높은 산이며 사방이 급경사의 화강암으로 분포되어있다.

정상에는 단군이 쌓고 제사를 지냈다는 6m 높이의 참성단이 있으며 이곳에서 해마다 열리는 전국체전의 성화가 채취되며 개천절에는 대제가 거행된다.

             

           (사진: 마니산 참성단 전경)

 

(사진: 성화 채화 광경)

 

참성단의 소나무는 수령이 150년이 넘고 2.8m의 높이나 된다. 이것도 국가 지정 문화재 제 502호이며, 등산로도 계단로, 단군로, 함허 동천 능선로, 정수사 방향로 등이 있다.

동쪽 산 기슭으로 함허 동천 야영장과 신라 선덕여왕 때 창건된 <정수사>가 있다.

마니산은 1977년에 국민 관광지로 지정되었고, 기가 가장 센곳이라고 알려졌다.

 

 

 

 

 

2. 강화도의 전적지로서 역사

강화도는 한강의 어귀에 놓인 섬으로 옛 부 터 바다로부터 들어오는 왜구와 한강으로 유입되는 모든 물자의 경유지로서 우리나라 고조선 시대의 단군설화가 깃들여 있고, 청동기 시대에 돌무덤이 150 여기나 산재해 있어 고대인들의 생활터전으로 여겨지며, 고려시대의 몽골의 대항하여 수도를 옮기면서 항쟁하던 항몽 유적지도 있으며, 근대화의 물결을 따라 해외세력이 당시의 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대하야 개방하라고 외국의 세력이 군함을 앞세워 침입하였으며, 그로 인해 조선의 개방을 앞당기게 된 역사가 서린 곳이다. 또 외국의 새로운 종교의 물결이 들어와 천주교를 앞세운 세력들이 둥지를 틀고, 이들이 수구세력에 밀려 순교하던 역사의 고장이기도 하다.

 

                                                    (사진: 강화읍의 고지도)

 

이 섬에는 이렇듯 외침세력에 대항하여 우리의 선조들이 고려 시대부터 주로 방어를 목적으로 성을 쌓았고, 조선 조 말에 와서는 왜구에 침입에 대항하여 방어진지를 구축하였으니, 그 흔적이 5-(초지진, 덕진진, 용진진, 월곳진, 제물진) 7-(광성보, 선두보, 장곶보, 정포보, 인화보, 철곶보, 승천보),  53 돈대( 갑곳돈대, 덕지돈대, 광성돈대 등) 구축되고 왜적에 침입에 대비한 역사가 깃들인 곳이다. 진과 보는 군사상 중요한 해안 변방에 설치하여 왜적의 침입을 방어하던 군사 요충지이다. 돈대는 조금 높은 곳에 설치한 초소였다.

 

 

 

 

A)  초지진: 사적 제 225

초지진은 해상으로부터 침입하는 외적을 막기 위하여 조선 효종 7(1656)에 구축한 요새이다.  그 뒤 고종 3(1866) 10월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침입한 프랑스 로즈의 극동함대와 고종 8 (1871) 4월에 통상을 강요하며 침입한 미국 로저스의 아세아 함대, 및 고종 12(1875) 8월에 침입한 일본 군함 운양호와 격전을 벌였던 곳이다.

당시 프랑스, 미국, 일본의 함대는 우수한 무기를 갖추고 있었고, 조선군은 열악한 무기로 대항하여 싸운 곳이다.

 

                               (사진: 초지진의 전경)

 

일본의 운양호의 침공으로 조선은 마침내 고종 13(1876)에 굴욕적인 <강화도 수호조약>을 맺음으로서 일본 침략의 계기가 된 것이다.

당시 이 초지진에는 병마절도사 1, 군관 11, 군사 320명과 전선 3척이 주둔하였었다.

이곳은 강화도에서 가장 시련을 많이 당한 곳으로 1973년 에 성곽을 보수하고 당시에 사용하던 대포를 진열하여 호국정신의 교육장으로 되었다.

             B) 덕진진: 사적 제 226

덕진진은 조선시대 강화해협을 지키던 요충지로서 효종 7(1656)에 축조된 곳으로 원래는 수영(水營)에 속한 진이었다. 덕진돈, 남장포대, 덕진포대가 이진에 소속되어 있다. 돈대와 포대는 숙종 5(1679)에 설치되었다. 병인 양요 때인 1856년에  <양 현수> 장군 부대가 야음을 이용하여 이 진을 통해 정족산성으로 들어가 프랑스 군대를 몰아냈다. 또 이 진에서는 1871년 신미양요 때 가장 치열한 포격전이 벌어졌었다. 그 후 방치되었다가 성문인 공조루가 1977년에 복원되었다.

                

             C) 광성보(廣城堡): 사적 제 227

광성보는 몽골에 침략에 대항하여 고려 고종 때 해협을 따라 길게 축성한 곳으로, 조선군 광해군때 다시 쌓았고, 효죵 9(1658)에 이곳에 강화유수 <서 원>이 광성보를 설치하였다. 그 후 숙종때인 1679년에 석성으로 축조하였다. 1871년에 미국함대의 <로저스>가 통상을 요구하며, 1.230명의 병력으로 침공한 신미양요 때 가장 격렬했던 전투격전지 이다. 미군은 수륙 양면 작전으로 침투하자 육박전이 벌어졌고, 당시 이곳을 방어하던 어 재연장군 등 수많은 병사가 순절하였다. 현재 이곳에는 장군의 순절비가 서있다.

 

           D) 갑곳 돈대: 사적 제 306

고려 시대에 강화의 외성으로 강화해협을 지키는 요새였으며, 조선 인조 22(1644) 여러 진이 설치될 때 제물진에 소속된 돈대로서 숙종 5(1679)에 축조 되었다.

고종 3 (1866) 9 7일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처들어 온 곳으로 당시 강화도의 가장 중요한 관문이었다.

이 돈대는 미국이 1866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일으켜 1871년 군함을 앞세워 침입한 신미양요로서 이 후 대원군이 천주교를 더 박해하게 되어  박 상손”, “우 윤집”, “최 순복이 이곳 갑곶 나루터에서 효수되었다.  이후 2000년 천주교 순교 성지로 성역화 되었다.

 

             

                                                 (사진 : 갑곳돈대 전경)

 

 

 

 

 

3.  강화 지석묘 : 사적 제 137,  세계 문화유산 지정(2000.12)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 유적으로 탁자식 고인돌이다. 덮개 돌의 길이가 약 6.4m, 폭이 5.2m로 그 밑에 2개의 굄돌과, 2개의 막음 돌이 받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 된다. 그러나 2개의 막음 돌은 오랜 세월이 흘러 없어진 것으로 추정 되었다. 덮개 돌의 무게는 약 75 ton이며, 이 돌들을 어디서 어떻게 옮겨 왔는지 의문이고, 인력으로 옮기려면 오늘 날에도 500여 명의 장정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곳의 9기가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 되었다. 

 

 

 

 

                  (사진: 강화 고인돌 전경)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고대 시대부터 권력을 가진자의 무덤으로 추정되며 이곳에 것은 북방 형식으로 되어 있다. 지금은 고인돌 공원으로 조성되고 박물관에서 모든 조성방식과 역사를 공부할 수가 있다.

이런 고인돌은 고려산을 중심으로 90기가 분포되어 있고, 북쪽에 벌림산과 봉천산 일대에도 32기가 분포되어 있다.  이 외에 전북 고창지역에도 47 기가 분포되어 이곳도 국가 사적 제 391호로, 역시 세계 문화유산으로 함께 지정 되어 있다.

 

 

 

 

 

 

4.  삼랑성 (정족산성)과 전등사: 사적 제 130 (1964.6.10)

 

강화남쪽 정족산에 위치한 산성으로서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이 산성은 병인양요 때 동문과 남문으로 침입하려던 160명의 프랑스 군을 물리친 곳이다. 현재 성안에는 병인양요 때 승리한  양 헌수장군의 승전비가 있다.

1976년에 와서 남문이 복원되어 문루를 세웠고, 종해루라는 현판을 달았다.

 

                                           (사진: 복원된 남문 종해루 전경)

 

정족산은 5개의 봉우리로 이어져 있는데 산성은 계곡을 이어 포곡식으로 축조하여 졌고, 둘레 2.3km, 성곽은 산 정상에서 남문 쪽 해발 75m까지 쌓아내려 갔다.  4곳에 문이 있고, 성안에는 고려 때 창건된 전등사(傳燈寺)가 있다. 고구려 소수림왕 때 진종사라 했던 것을 고려 충령왕 때 정화공주가 옥등을 이 절에 받친 후 전등사라 불리어졌다 한다.

전등사는 나라의 외침이 있을 때 사고(史庫)를 지키는 사찰로, 1660년에 현종 1년에 실록을 보관하였던 마니산 사고가 정족산성으로 옮겨 졌다.

현재 전등사에는 대웅전, 약사전, 범종 등 지정 문화재가 17점이 있다.

 

 

 

 

 

 

5.  보문사:

신라 선덕여왕 때인 635년에 희정대사가 창건했다. 보문사는 강화도의 외섬인 석모도 석가산 자락에 위치하여 본섬인 외포리에서 배를 타고 건너야 한다.

조선 시대의 3대 관음성지(남해 보리암, 여수 향일암)의 한곳으로, <관세움 보살이 상주하는 성스러운 곳>이다.  불상을 모신 석실과 마에 석불이 있으며, 석실은 천연동굴로 23개의 감실에 석불이 안치되어 있다.  

 

                                     (사진: 보문사 마애석불 전경)

 

                                        (사진: 천연동굴 석실 입구 전경

 

서울에서 가깝고도 먼 거리에 있었던 강화도가 한강입구에서 옛날 철도, 도로가 없던 시절 부 터 한양의 물류수송으로 한강나루 터 까지 중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의 배들이 드나들었던 곳이다.

근대에 들어와 교통 수단의 발달로 철도, 도로 항공수단이 발달하면서 한강 나룻배나 운반선을 이제 옛 이야기의 시대로 밀려났다.

그리고 남북 분단으로 한강 입구가 휴전선과 가까워 통행이 제한 되면서 강화도는 한때 잊혀진 섬으로 오랫동안 남아 있었고, 그 너머의 교동도는 휴전선 북방의 개성을 바라보는 곳이라 민간인이 출입 할 수가 없었고, 이조 말 부터 정체된 고장으로 남아있었다. 이제 교동도로 가는 현대적 연육교가 놓여 짐으로서 강화를 비롯한 교동도 일대가 우리에게 가깝게 다가온 것이다.

태초에 단군신화가 깃든 곳으로 삼랑성을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전설과, 마니산 첨성단이 단군에게 제사 들이는 곳으로 우리민족의 영원한 성지로 내려오다가 고려 시대에 몽골을 통일한 징기스칸이 원나라와 여진을 경략하고, 한반도 까지 말발굽으로 침입하여 무신정권의 발흥으로 취약한 왕권이 마침내 강화도로 천도하는 사태가 벌어져 39년간을 강화도에 도읍을 이전하여, 몽골과 강화 후 부마국으로 전락하면서 다시 개경으로 돌아왔으나, 공민왕 이후 나라의 기운이 쇠하여 마침내 공양왕 때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새로 건국하는 계기가 되었다.

 

조선은 세종대에 이르러 국운이 융성하고 한글이 창제되고 나라가 발전하였으나 중기 이후로 왕권다툼이 일어나 연산왕이 실정으로 군으로 강등되어 강화 외섬인 교동도로 유배되면서 이 섬은  세조 때에 안평 대군을 필두로 왕족의 유배지로 되었고, 대신 남도의 해남, 강진은 당파싸움에서 밀려난 신하들의 유배지가 되었다.

이번에 가깝고도 먼 강화도와 교동도, 석모도를 우리에게 다가오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강화도는 조선 말기에 26대 고종을 왕으로 등극시키고 그 아버지인 흥선 대원군이 섭정을 하면서 쇄국정책을 쓰고, 서양의 신흥종교인 천주교를 탄압하면서 우리는 일본보다 늦게 나라가 서양에 개방되는 역사의 시련기를 맞이하였다. 당시 19세기 초반부터 외세의 개항에 저항하여 강화주변의 성을 쌓고 초지진, 광성보, 월곳 돈대 등 5 7 53 돈대로 방어진지를 구축하면서도, 프랑스 군대의 병인양요를 맞이하여 강화도가 점령되는 비운을 맞고 수많은 문화재가 불타고, 약탈되었다. 그 후 또 미군이 함대를 앞세워 대동강에 들어가고 강화도에 상륙하는 신미 양요가 일어나 조선의 왕조는 많은 시련을 안게 되었다.

 마침내 일본과 굴욕적인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면서 인천, 부산, 원산 등 항구가 개방되면서 외세가 물밀 듯이 들어오고 왕권은 약화되어 마침내 열강세력의 세력 다툼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일본에 합방되는 비운을 맞이하였다.

조선 왕조는 36년 이란 긴 세월을 몽고의 39년에 이어 다시 외세의 지배 밑에 신음하다가, 1945년 연합군의 승리로 해방을 맞이하면서 군정을 거처 혼란기를 지나며 1948. 8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으나. 소련 공산주의 사주를 받은 김 일성 집단의 기습 남침으로 다시 이 땅은 전쟁에 소용돌이에 말려 이념전쟁에 희생되면서 우리는 폐허에서 U.N을 비롯한 서방세력, 특히 미국의 도움으로 새로운 나라를 세우게 되었다

5.16 군사 혁명으로 군정이 들어서면서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아 우리는 비로서 경제 건설과 중화학 공업으로 연 소득 82$의 가난한 빈국에서 이제는 세계 10위권에 경재 대국으로 성장하였으나, 발전이 정체되어 다시 우울한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역사는 언제나 반복되면서 우리에게 거울이 되니 이제 우리 국민들은 분파, 계파를 떠나 진정한 나라의 발전을 위해 모두 함께 힘을 모아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지난날의 역사에서 반성을 하며 발전의 새로운 모멘텀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신념하에 이번 강화도와 교동도에서 역사에 얽힌 사연을 재조명 함으로서 발전의 디딤돌을 마련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