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종 여행기/우리문화유산 답사

2015.04.18. 우리문화유산답사- 남도 유배지를 찾아서-(26)

땡큐 이영옥 2015. 4. 24. 13:51

 

 

2015. 04. 08~10

 

            우리 문화유산 답사

 

     남도 유배지를 찾아서

                 <26>

                    다산 초당-미황사-땅끝마을

                      청산도-장도-보길도-세연정

 

                                        글,사: 김   한 종, 이  영옥 

 

                                          (사진: 보길도 세연정)

 

 

 

봄이 오면서 남도 3백리 길에 나그네의 발길이 바빠진다. 예전 같으면 기나 긴 유배 길에 한양을 떠나면 10여 일이 걸려야 도착하던 유배지를 찾아가기로 한다.

이제는 경부 고속도로로 천안에서 논산으로 지름길로 빠져 서해안 고속도로를 경유하여 달리면 영산강 하구언에서 도도한 물결을 보면서 목포~광양간 고속도로로 나와 조선조 시대의 머나먼  유배지인 전남 강진에 오전에 도착할 수가 있으니 참으로 이제는 전국이 일일 생활권으로 다가왔다.

당시에는 이 머나먼 길을 달구지로 오거나 걸어서 와야 했던 귀양 길이었건만  이제는 누구나 옛유배지를 문화답사로 찾아보는 것이 흔한 일이 되었다. 강진, 해남 일대와 진도는 조선조에 사색당쟁에서 권력을 잃은 자들의 유배지로 한양에서 아주 머나먼 곳이었다.

정조의 총애를 받던 다산(茶山) 정 약용( 若鏞)과 그의 형인 정 약전( 若銓) 등이 정조가 승하하자 벼슬에서 내려와 이곳에 와 은거한 것이다.

 

 

 이러한 유배는 오히려 다산(茶山)에게는 실학 학문에 정진하여 수많은 저서를 남기고, 그의 학문을 따르는 18명의 제지들을 길러내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그보다 먼 바다 건너 섬 지역인 보길도(甫吉島)로는 고산(孤山) 윤 선도(尹 善道)가 유배되면서 그의 학문과 예술을 후대에 남기는 계기가 마련 되었다.

고산은 보길도에서 <어부 사시사>를 비롯한 수많은 시를 남기고 유유자적한 생활을 하며 그의 발자취는 세연정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아울러 강진 만덕산 밑 백련사와 다산 초당에서 다산 정 약용의 삶을 다시 한번 조명하는 기회를 가져보고, 일대의 달마산 아래의 미황사를 탐방하여 불교문화를 조명하고, 땅끝마을 사자봉에서 아름다운 낙조를 보면서 남도의 추억을 간직하여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바다 건너 청산도(靑山島)에서 유채꽃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스로시티 섬을 거닐어보고 섬 주변 정도리 해변에서 추억을 쌓고, 신라 말 해상 왕 장 보고( 甫皐)가 활동하던 청해진을 탑방하여 그의 역사적 위치를 다시 한번 평가해보기로 한다.

마지막으로 노화도를 거처 보길도 연륙교를 넘어 고산 윤 선도의 발자취를 따라가면 그의 예술적 향기를 음미해보는 계기를 마련해 보려 한다.

이렇듯 조선조는 당파 싸움으로 세력에 밀리면 유배를 가거나 사약을 받는 일이 비일 비재 하였으며 나라가 언제나 풍전등화와 같았으나 그래도 500여 년을 이어갔으니 그 밑에는 끈질긴 조선민족의 근성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1.  만덕산(萬德山) 백련사(白蓮社)

조선의 만경 은빛 출렁이는 구강포 앞바다를 배경으로 고려시대의 8명의 국사와 조선시대의 8명의 종사를 배출한 사찰로 남도지방의 중심 사찰이었다. 차와 동백이 아름다운 백련사에서 마음을 쉬고 지친 인생의 무게를 벗어놓고 새로운 정기를 받아가는 사찰로 이름나 있었다.

 백련사의 원명은 만덕사로 신라 문성왕 때 무영국사(801~888)가 창건하였다. 고려 희종 7 (1211) 원묘국사 요세(圓妙國師 了世)(1163~1245)스님이 중창하면서 백련사로 불리게 되었다. 그는 이곳에 보현도장을 개설하고 고려 후기에 와서 몽고와 왜구의 침략으로 어지러운 시대에 백련사에서 정토를 만들자는 <백련결사운동>을 주관하여 120년간 고려시대의 최고의 승 정명국사외 국사 8분을 배출하고, 1430년 세종 12년에 효령대군의 후원으로 크게 확장하면서 삼보사찰로 거듭나며 해운대사를 비롯한 8명의 대사를 배출하였다.

이때 백련사 옆 다산 초당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茶山 정 약용(1762~1836)이 이곳에서 선사들과 교류하며 마음의 평안을 얻어 수 많은 저서를 집필하였다.

a)     대웅보전: 전남 유형 문화재 제 136

백련사는 만덕산 자락에 있어 조선 후기인 19세기 까지 만덕사로 불리었다.

이조 영조 36(1760)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1762년에 현재의 대웅 보전을 중건하였다. 미소가 아름다운 석가와 두 분의 부처님을 모신 대웅 보전에는 묘법 연화경에 나오는 내용을 그린 벽화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대웅 보전에서 아미타불을 염하면 반야용선을 타고 바다를 건너 극락세계로 간다고 하였다.

 

 

대웅전은 팔작 지붕의 단청이 화려한 정면 3, 측면 3칸의 다포식 건물이며 각 추녀마다 활주 를 세워 건물을 바치고 있고 건물의 전면 2개의 주두에 용머리 조각으로 장식되었다.

b)    백련사 사적비: 보물 제 1396

고려 명종대의 문신으로 최 자”(1188~1260)가 지은 <원묘국사비> 등 여러 비가 있었으나 현재로는 백련사 사적비만 남았다.  이 비는 숙종 7 1681 5월에 탄기스님이 세웠고 비문은 홍문관 수찬이었던 조 종저”(1631~1690)가 짓고, 남성군 이 우”(1637~1693)가 썼고 그의 동생 이간이 전서를 썼다. 비문은 모두 19행으로 1행에 45자로 구성 되었다. 비문 앞면에는 백련사를  중수한 원묘국사의 행적, 백련사 결사 등의 내용이 새겨져 있으며, 뒷면에는 비 건립에 기여한 72명의 인명이 음각되어 있다.

비문에 따르면 백련사에 원래 <원묘국사비>가 있었으나 머리 돌과 몸 돌(비신)이 유실되었고 귀부만 남아 전해 졌다고 한다.  이 후 백련사 사적비를 중건하면서, 귀부는 옛 것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즉 백련사 사적비는 고려 시대 귀부에 17세기 후반의 비신을 갔고 있는 것이다.

 

 

다산  정약용이 집필한 만덕사지옛 비는 유실되어 알 수 없고 귀부만 남았는데  탄기스님이 돌로 비를 세우면서 옛날 비석의 귀부를 사용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사적비 전면에는 백련사의 역사를 기록하고 뒷면에는 불사에 참여한 불자들을 이름을 넣고 양 측면에 아름다운 연꽃무늬를 양각하였다.

c)     백련사 동백 숲과 다산 초당 가는 길: 천연기념물 제 151

백련사의 자랑은 천연 기념물 제 151호로 지정된 동백나무 숲이다. 사적비 옆 행호 토성 너머로 아람드리 동백나무들이 숲을 이룬 5 달하는 곳에는 1500여 그루의 동백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다. 동백나무는 차 나무과의 상록교목으로 온대지방의 대표 수종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남쪽 해안과 다도해 섬 일대에 무성하다

동백꽃은 시기에 따라 춘백, 추백, 동백으로 구분되며, 이곳 백련사 동백은 봄에 피니 춘백이다. 이곳의 동백나무 숲은 다산과 초의 선사가 교류하던 사색의 숲이자 구도의 숲이다. 또한 동백나무 숲은 사색의 길이며 붉은 동백꽃 잎이 떨어져 땅 위에 쌓이는 이곳이 바로 철학자의 숲이다.

이 숲 속에는 고려, 조선 시대의 부도 4기가 숨어 있다.

매년 11월 부 터 동백꽃이 피면서 3월에 만개하면 숲이 붉게 물들어 아름답고, 꽃이 떨어져 바닥을 수놓으면 우수의 감동을 안겨주는 곳이 바로 이곳의 동백나무 숲이다.

숲 속의 월인당 스님의 부도는 바로 이런 무상의 이치를 설하는 표상이다.

동백나무 숲을 지나 다산 초당으로 가는 길은 차 밭과 야생 차가 군락을 이루고, 다산이 스님과 유학과 불교를 논하는 곳이었다. 

d)   백련사의 원구형 부도: 전남 유형 문화재 제 223

 부도란 승려가 입적하면 화장하여 사리를 모아 그 속에 보관하는 일종의 무덤이다.

 이곳의 부도는 당호나 명문이 없어 주인공을 알 수가 없다.

 탑신은 원구형이며, 탑신 당산 쪽 사방으로 연꽃무늬의 연주문자를 장식하고 있는 매우 특이한 기법의 부도이다.

 

 옥개석은 팔각으로 낙수면이 경사가 급하고, 우동마루가 뚜렷하나 귀 분이 없어 밋밋하다.

 이 부도는 전통적으로 내려온 팔각형 당형에서 변형된 양식을 보이고 있다. 기단부는 사각형에 가깝고 탑신은 거의 원형에 가까운 원구형이다.  이 부도는 고려대인 14세기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2. 다산(茶山) 정 약용( 若鏞)<1762~1836>

a) 조선시대의 당쟁 개요

조선 중, 후기에 붕당 정치가 생겨나면서 이것이 4색 당파로 나누어 졌다.

16세기 초에 사화가 일어나면서 <훈구 세력><사림 세력>이 정치적 학문적으로 대립하게 되었고 이것이 붕당 정치로 발전하면서 사림 세력간의 학통, 지연을 따라 분열되었다. 그 후 17세기 후에 아주 심해지면서 사림이 중앙정치에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면서 지방토호와 양반도 정치에 참여하게 되었다.

선조 8 1575년 이조 정랑직을 두고 김 효원심 의겸이 맞서면서 동인과 서인으로 나누어 지면서 붕당정치가 시작되었다.

김 효원을 중심으로 동인 허 엽이 영수였고, 서인은 심 의겸을 중심으로 박 순이 영수가 되어 대립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동인이 서인을 공격하였으나 동인이 다시 강, 온 양파로 갈라지면서 강경파를 북인으로 부르고, 온건파를 남인으로 부르면서 이것이 다시 임진 왜란 전에 서인, 남인, 북인의 3개 파로 갈라졌다.

남인은 유 성룡이 중심이 되었고 북인은 이 산해가 중심이 되었다. 임진왜란이 나면서 유 성룡은 일본과의 화의를 모색하였다는 이유로 실각하게 되었고, 북인의 남 이공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남인 세력이 몰락하게 되었다.

 이 후 북인은 선조의 후사 문제로 대북, 소북으로 갈라지면서 대북 파의 옹립으로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주도권을 쥐게 되면서 소북파를 몰아내면서 영조의 아들 영창대군을 죽이고 외척인 김 제남 일파를 처형하였다.

광해군이 폭정을 하자 서인들이 인조반정을 일으켜 능양군(인조)을 왕으로 옹립하였다. 이로 인해 천하가 서인의 무대가 되자. 이 이첨, 정 인홍 등 북인들이 처형되고 수 백 명이 유배되었다.

서인이 집권하면서 남인이 동반세력으로 일어나 숙종 때 까지 100여 년이 서인과 남인의 세상이 되었다.

효종이 즉위하면서 서인 김 자점이 역모로 실각하면서 송 시열 파가 등장하여 현종 때 까지  세력을 누리다가 현종 비 인선왕후가 1674년 승하하면서 다시 복상기간의 문제로 청남, 탁남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이후 서인들도 다시 노론과 소론으로 갈리고 숙종이 물러나면서 송 시열이 사약을 받게 되었다. 이런 당쟁의 와중에서 영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탕평책을 써 그의 재위 52년간은 당쟁이 완화되었다. 

그 후 정조대에 이르면서 남인 정 약용 같은 명상이 등장하게 되었다. 순조시대에 와서 천주교인들의 박해로 수많은 교인이 순교하였다. 이들은 대부분이 남인으로 수많은 유배자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b) 다산 정약용은 누구인가?

다산 정약용은 영조 38 1762년 현재의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진주 목사인 정 재원과 해남 윤씨인 어머니 사이에서 4남으로 태어났다.

 

 

15세에 풍산 홍씨와 결혼을 하였고, 16세에 조선실학 선구자인 성 호 이 익의 저서를 보고 실학에 눈을 뜨게 되었다.

22세 때에 진사에 합격하여 경의 진사가 되어 성균관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의 재능을 알아차린 정조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28세 때에 문과에 급제한 후 경기도 암행어사, 동부승지, 병조참의, 우부승지, 형조참의 등의 벼슬을 지냈다. 이때에 수원화성을 쌓는데 거중기를 제작하여 사용하였고, 경기도의 암행어사로 나가면서 핍박 받는 백성들의 고통을 목격하면서 목민관의 자세를 가지게 되었다.

정조가 서거하면서 순조가 즉위하자 노론 벽파의 공격으로 신유사옥(1801)이라는 천주교 박해사건이 일어났다. 이때 다산의 집안은 천주교인으로 지목되어 그의 가문은 탄압을 받으면서 둘째 형인 정 약전은 흑산도로, 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처음에는 강진의 동문 밖 사의재와 고성사의 보은산방과 제자인 이 학래의 집에서 거처하게 되었다. 1808년에 윤 단의 다산초당으로 이전하였고, 그때부터 유배생활에서 학문연구와 저술활동에 몰두하여 500여권이 넘는 방대한 저서가 이 유배지에서 이루어졌다. 이곳에 다산초당이야 말로 실학의 집대성을 한 장소로서 동암과 서암의 초막을 짓고 제자 18여명을 교육하기도 하였다.

57세가 되던 순조 18(1818) 가을이 되어 18년 동안의 유배에서 풀려 고향으로 돌아가서도 다산은 저술을 계속하였다.  이때에 그 유명한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가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1836년 현종 2 75세로 세상을 떠나자 자택인 여유당 뒷산에 매장되었다.  1910년 순종 4년에 와서야 문도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c) 다산 초당과 다산의 유적: 사적 제 107

정 약용은 1808년 봄 해남 윤씨 집안의 산장에 놀러 갔다. 아늑하고 조용하며 경치가 아름다운 다산서옥(茶山書屋)은 지난 7년간 다산이 전전하던 주막이나 제자의 집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가까운 백련사에 벗 혜장”(惠藏)이 있었고 다산서옥은 그 이름처럼 주위가 차나무로 가득하다.

이에 정 약용은 시를 지어 머물고 싶은 마음을 전했고, 윤씨 집안에서는 이를 흔쾌히 받아 들였다. 이곳에서 정 약용은 안정을 찾았고 저술 활동에 전념하면서 후진 양성에 힘을 썼다.  10여 년간 다산 학단으로 일컬어지는 이 유희 18명의 제자를 길러냈고 500여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집필하였다.

이렇게 강진은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이 유배되어 18년간 머문 곳으로 그 중 11년이나 이곳 초당에 머물며 실학을 집대성 하고 후진을 양성한 곳이다.

 

 

그를 아끼던 정조가 세상을 떠난 후인 1801 (순조 원년) 신유박해에 뒤이은 <황 사영 백서사건>에 연루되어 강진으로 유배된 다산은 <四宜齊>, 고성사 <寶恩山房>을 거처 1808년 외가(해남 윤씨)에서 마련해준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었다.

유배가 풀리던 1818년 까지 그는 이곳에 머물며 제자를 가르치고 집필에 몰두하여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 실로 600여권의 저서를 남기었다.

초당에 오르면서 보물인 다산 4경이 있으니, 고적한 유배생활의 정취가 서린 정석”, “약천”(차를 다리는 돌), ”다조”, “연지석 가산은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다산의 실학이 구상되던 산실이다. 초당에 오르느 길에는 수백 년 된 소나무들이 즐비해 세월의 무상함을 보여주고 있다.

 

초당을 가꾸는 데도 정성을 기울여 채마 밭을 일구고 연못을 넓히고, 석가산을 쌓고, 집도 새 단장을 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윤씨 집안의 산정은 다산 초당으로 거듭났고, 약용은 스스로를 다산초부(茶山樵夫) 라고 칭하였다.

 제자들은 스승을 따라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 정서 작업을 거쳐 다산의 집필을 도왔다.  이로서 다산초당은 유배객의 쓸쓸한 거처가 아니라 선비가 꿈꾸는 이상적인 공간이자 학문과 저술의 현장이 되었다.

1)     동암

송풍구라고 불리는 동암은 다산이 저술에 필요한 2천 여권의 책을 갖추고 기거하며 손님을 맞이하였던 곳이다.  다산이 초당에 있는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이곳에 머물며 집필에 몰두하였으며 목민관이 지녀야 할 정신과 실천방법을 적은 <목민심서>를 이곳에서 완성하였다.

1976년 서암과 함께 다시 세웠는데 현판중 <寶丁山房>은 추사의 친필을 모각한 것이고 <다산 동암>은 다산의 글씨를 집자 한 것이다.

 

2)     서암

초당은 다산이 제자들을 가르치고 책을 썼던 곳이다. 원래는 윤 단”( )의 산정이었으나 서로 교분을 나누면서 그에게 거처로 제공 되었다. 1957년 다산 유적 보존회가 허물어진 초가를 다시 지으면서 기와로 복원하였다.  현판은 추사 김 정희의 친필을 집자해서 모각한 것이다.  이곳 서암은 윤 종기 18인의 제자가 기거하던 곳이다.

차와 벗하며 밤늦도록 학문을 탐구한다는 뜻으로 다성각이라고도 하며, 1808년에 지어져 잡초 속에 무너져 있던 것을 1975년에 강진군에서 다시 세웠다.

 

3)    정석(丁石)

다산이 직접 새겼다고 전해지는 정석은 이곳 다산초당의 제 1경이다. 아무런 수식도 없이 자신의 성인 자만 새겨 넣은 것으로 그의 간결하고 군더더기 없는 성품이 배어 있다.

 

 

               D) 다산 기념관:

다산의 500여 권에 이르는 저술은 유배지에서 그의 열정과 제자들의 조력의 결과였다.

이 기념관에는 그의 가계도를 비롯한 저서의 원본, 친필 간찰, 매화병제도, 거중기 등 그의 출생부 터 성장, 관직 생활, 유배생활, 유배 해제 이 후의 저술 등 다산의 삶을 시기별로 나누어 전시하여 주요한 연구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다산이 천주교의 신앙집회에 참석하다 적발된 사실, 또 그의 외사촌이 천주교에 가담하면서 제사를 폐지하다가 처벌을 당하였으니, 이는 신유박해로 나라에서 천주교 금지령이 내려 졌다.

다산이 정조대왕의 총애를 받아 종 7품의 벼슬로 왕의 명을 받아 <회정당 대학 강의>를 책으로 펴냈고, 그를 규장각 각신으로 키웠다.

 

다산은 1789 10월 정조가 사도세자의 무덤을 갈 때 한강을 건너는 배다리를 설계하였다.  배다리는 서로 다른 크기의 배를 배열하여 묶고 그 위에 널 판지를 깔아 연결하여 왕의 행렬이 한강을 건너게 하였다.

또 수원의 화성을 축조할 때 무거운 돌을 성벽으로 옮겨 쌓는데 사용하는 거중기를 발명하여 수원성을 쌓는데 커다란 공을 세운 기록과 거중기의 실물모습이 전시되어 있다.

이렇듯 이곳 다산 기념관에는 다산의 모든 삶이 후세의 길이 전수되도록 자세히 남아있다.

    3. 달마산 미황사와 그 일대: 명승 제 69

백두 대간에서 갈라져 나온 소백 산맥이 두륜산을 지나 땅끝까지 뻗어 내려가는 등줄기가 달마산(489m)이다. 그 끝자락에 천년 고찰인 미황사가 기암괴석과 어우러 지면서 빼어난 경관을 자랑한다. 

산 능선이 공룡의 등줄기처럼  기암과 괴봉이 7km 나 이어져있어 삼남의 금강산으로 불리어 진다. 달마산은 바위, 미황사 불상, 석양이 조회를 이루어 남도 제일의 명승지가 되었다.

 

미황사는 신라 경덕왕 8(749)에 창건 되었다. 인도에서 경전과 불상을 실은 배가 갈두항 사자포구에 들어오자 의조화상”(義照和尙)이 이것을 소에 싣고 오다가 소가 드러누운 모습의 달마산 기슭을 보고 이곳에 절을 지었다 한다.

 그 후 조선 중기까지 12개의 암자를 거느린 대 사찰이 되었다. 1597년에 정유재란 때 사찰이 불타면서 1601년 중창 불사가 이루어진 후 여러 차례 증축이 이루어 졌다.

현재로는 대웅전이 보물 제 947호로, 응진전이 보물 제 1183호로, 미황사 괘불탱이 보물 제 1342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웅전 내부에 대들보와 천정에 산스크리트 문자와 천불도가 그려져 있어 인도의 아잔타석굴의 벽화와 둔황 막고굴의 천불벽화에 버금가는 것으로 평가된다.

응진전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 뛰어나 16분의 아라한을 모신 전각이다.

      4. 땅끝마을 갈두리

해남군 송지면 갈두산의 사자봉은 한반도의 가장 남단으로 북위 34 17 21초이다.

신 동국여지승람한국 경위도에서는 우리나라 전도의 남쪽 기점을 이곳 땅끝 해남현으로 잡고, 북으로는 함경북도 은성부에 이른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육당 최 남선조선 상식문답에서는 해남 땅끝에서 서울 까지 천리, 서울에서 함경북도 은성까지를 2천리로 잡아 우리나라를 3천리 금수강산이라고 하였다. 오래 전 대륙으로 부 터 뻗어 내려온 우리민족이 이곳에서 발을 멈추고 한 겨래를 이루니 역사이래 이곳은 동아시아 3국 문화의 이동 통로이자 해양 문화의 요충지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5. 삼남길

전남 해남을 시작으로 강진, 나주, 광주, 전북 완주.익산, 충남 논산, 공주, 천안, 경기 평택, 수원, 서울 남태령, 남대문까지 1000여 리에 이르는 국내 최장거리 트레일 워킹 코스로, 조선시대 10대 대로 중 가장 긴 우리나라 대표 도보길이다. 이것은 한반도의 동맥과 같은 길이고 조선시대에는 군사 길이었다.

이 길을 통해 관리들을 임지로 파견하고, 군사도 이동 시켰다고 한다. 당시의 진상 품도 이 길을 따라 이동했고, 과거를 보거나 장사를 위해 한양으로 가는 길이다. 중앙의 관리가 제주도나 기타 유배지로 갈 때도, 임진왜란 때는 왜구의 침략의 길로도 이용되었다.

해남에서 서울 까지 이어진 이 길은 통일이 되면 의주대로를 따라 신의주를 거처 중국과 유럽까지 이어지는 아시안 하이웨이가 된다.

    6. 청산도-슬로시티의 섬

완도항에서 19km 떨어진 바다에 떠있는 섬으로 넓이는 33.27㎢이고 해안선이 85km에 달한다. 청산도에 있는 청산면 사무소는 청산도, 여서도, 대모도, 소모도, 장도 등의 유인도 5개와 무인도 9개를 관장한다. 청산도의 관문은 도청항이다. 청산도 주변에서는 고등어, 삼치 등의 황금어장으로 파시가 형성되기도 하였다. 지금은 청산도 주변 해상에는 전복, , 미역, 다시마, 톳 등 주로 양식어장이 형성되어 전국에 조달하고 있다.

 

청산도는 일명 선원이라 불리었고 옛날에는 강진군에 속해 있다가 사람이 살지 않았으나 1681년 숙종 때 수군의 진지가 설치된 후 군사 요충지로 되었다. 그 후로 당리에 淸山鎭城이 축조되었고 성문으로 동, , 남문이 있었다.

군사로는 420여명이 주둔하였고 성내 호구는 약 460호나 되었고, 인구가 약 2000여명이 살았었고 완도군이 생기면서 편입되었다.

최근에는 청산도가 스로시티가 조성되고 섬 전체가 이름다운 유채꽃을 가꾸고 영화 서편제  드라마 봄의 왈츠를 촬영했던  당리 언덕의 아름다운 꽃 길이 알려지면서 관광지로서 각광을 받고 있다.

현재는 청산도 전역을 개발하여 42.195km의 마라톤과 똑 같은 <슬로 길>을 개발하여 총 11개의 코스로 나누어 전 코스가 개통이 되었다.

 

 

슬로시티는 과거와 현대의 조화를 통한 느리지만 멋진 삶을 추구하는 것이다.

슬로시티로 지정되려면 인구가 5만 명 이하이고, 전통적인 수공업과 조리법 보존, 고유의 문화 유산을 지키고 자연 친화적인 농법을 사용하여야 한다.

현재 영국, 독일, 호주, 이탈리아 등 전세계 25개국 148개 도시가 가입 되었으며, 아시아에서는 유일하게 우리나라의 완도, 청산도와 함께 담양군 장명면, 신안군 중도면, 장흥군 유치-장면면이 선정 되었으며 예산, 하동, 전주, 남양시가 추가로 인증되어 우리나라의 슬로시티는 총 8개이다.

그 중 가장 인기 있는 코스는 도청항을 출발해 서편제  봄의 왈츠를 촬영했던 당리 언덕의 돌담 길을 거처 연애 바위까지 5,7km의 이어지는 코스로 진도 아리랑을 부르며 유채꽃이 만발한 길을 떠돌이 소리 꾼 유봉이가 두 남매와 함께 <진도 아리랑>을 부르며 춤추며 가는 길로 영화에 등장하면서 청산도는 일약 명소로 등장 하였다.

청산도는 하늘, 바다, 산 모두가 푸르다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자연경관이 아름다워 옛날부터 청산여수라 불리었으며, 누렁 소가 밭을 가는 구들장 논과 무공해의 청정 해변이 아름다운 섬이며 또한 문화재로 등록된 상서마을 돌담 길에서는 소담스러운 마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1)    범 바위: 아주 오랜 옛날 청산도에서 살던 호랑이가 권덕리 산 고개에서 바위를 향해

어흥하고 소리를 내어 포효하니 이곳 바위의 울림이 그 소리보다 크게 울리었다. 이곳에 나보다 더 큰 호랑이가 살고 있으리라는 생각에, 놀라 섬 밖으로 도망 처 그 이후 부 터는 청산도에 호랑이가 살지 않게 되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으며 이 전설이 범 바위의 어원이 되었다고 한다.

범 바위 앞 바다에서는 강한 자성으로 나침반이 빙글빙글 돌며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신비의 장소이다. 청산도에서는 그 원인이 범 바위의 영향 때문이라고 전해오고 있으며 실제로 주민들은 범 바위를 신성시 하고 있다.

 

 

2). 범바위 전망대: 보적산 8부 능선의 가파른 곳에 세워진 전망대는 무인도인 상도와 여서도가 보이며 맑은 날씨에는 좌측으로 멀리 여수시의 거문도와 우측으로는 제주도를 볼 수 있는 곳으로 조망의 명소이다. 범 바위는 권덕리에서 보면 어미 범이 뒤따라오는 새끼 범을 돌아보는 형상을 띠며 바람이 불면 바람구멍을 통해 범이 우는듯한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이름과 관련된 숨겨진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3). 느린섬 여행 학교: 청산 동 중학교가 있던 자리에 슬로시티 청산도의 슬로 푸드 체험관이 생기었고, 이곳에서는 청산도 근해에서 잡히는 미네랄이 풍부하고 색다른 향과 식감이 일품인 바다 굴맹이와 삼치는 두뇌건강에 좋은 식품이며, 특히 삼치 회는 촉감이 좋아 입에서 녹는듯하다. 여기에 천연의 봄 나물 등이 더해지며 톳 밥, 물 회 등 청산도 슬로푸드밥상이 인기이며, 학교 2층의 숙소 5곳의 인기도 크다.

 

 

4). 상서리 돌담 마을: 지금의 덜리에 한씨가 터전을 닦고 살았으며 매마등에 묘지가 있다.  그 후 숙종 18년에 언양 김씨, 밀양 박씨, 나주 임씨 등이 정착하면서 마을이 형성 되었다. 뒤로 매봉산(384m)의 정기 어린 산세가 수려하여 이곳에 가장 먼저 돌담마을이 형성 되었다.

정조 13(1800)에 덜리가 사정리로 되었다가 1895년에 상서리로 되었고 1960년대 까지는 97호가 살았으나 지금은 30호가 남아있다.

 

 

이 마을의 돌담은 섬 지방의 전형적인 구조인 흙을 쓰지 않고 돌로만 쌓았으며, 이는 바람이 거센 지방에 적합한 형식이다. 이 마을의 담장은 전체가 돌담으로 모두 비슷한 높이로 작은 자연석으로 견고하게 쌓은 것이다.

   5). 진산리: 섬 북 쪽 해안에 위치. 굵직한 몽 돌이 깔려 있어 해수욕보다는 파도가 부딪치는 소리가 낭만적이고 한적한 해변이다.

 

   6). 지리 해수욕장: 2km에 이르는 고운 은빛 백사장과 병풍처럼 둘러 처진 노송들이 잘 어우러진 지리 해수욕장은 청산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대표 해수욕장이다. 바닷물이 깨끗하고 수심이 완만하여 가족 단위의 해수욕에 적당하며 곱고 보드러운 모래는 찜질하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200년 이상 된 노송 숲, 잔디 밭으로 이루어진 야영장과 천하 일품의 낙조가 큰 감동을 주는 곳이다.

 

 

  7). 서편제 촬영지: 한국 영화사상 1993년에 제작하여 12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임 권택감독의 서편제의 촬영지로 극중 여주인공인 송화(오 정혜 분)가 남도의 정서가 담긴 <진도 아리랑>  애절한 소리로 노래한 민족고유의 향토색 짙은 장소 이다.

이로 인해 영화 서편제는 제 31회 대종상에서 최우수 감독상, 작품상, 신인 여배우 주연상 등 6개 부분을 수상하고 국제 무대에서도 한국의 고유정서를 선양한 우수 영화다.

서편제는 광주, 강진, 보성, 진도 지방을 중심으로 이어지는 애절하고 섬세한 소리로 여성 적인 반면  동편제는 운봉, 구례, 순창 지방에서 내려오는 호탕하고 남성적인 소리를 특징으로 한다.

 

 

그 동안 약 장사를 뒤따라 다니며 소리를 팔던 것을 그만두고 정처 없이 길 따라 떠나는 길에

<송화>(의붓딸)와 유봉이 진도 아리랑을 주고 받으며 노래 가락에 취해 춤추는 모습, 동호도 흥이 나서 메고 있는 북을 친다.

<사람이 살면 몇 백년 사나 깨똥 같은 세상이나마 둥글 둥글 사세. 문경 새재는 왠 고갠가, 구부야 구부야 눈물이 난다>, <아리 아리랑, 쓰리 쓰리랑 아라리가 났네>

 

 

 

 

(사진:송화가 살던 집)

 

 

 

세 사람이 걸어가고 있는 돌 담길 장면은 향토색이 짙게 남아있는 청산 당리마을 길로 우리 민족의 애절한 정서를 그대로 보여준다.

       7. 완도 정도리 구계등 해변: 명승 제 3

진도읍에서 서남 4km 떨어진 곳이다. 구계등이란 이름은 파도에 밀려 표면에 나타난 자갈밭이 아홉 개의 계단을 이룬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정도리를 지나 약 4~5m를 걸으면 상록수 우거진 병풍담이 있고, 이 언덕을 넘으면 구계등 자갈밭이 전개된다.

자갈밭은 750m로 활 모양의 해안선이 그대로 뻗쳐 양쪽에서 감싸는 형태를 이루고 있다. 이 자갈 밭의 너비는 83m로 약간 급경사를 이루고 바다 쪽으로는 약 5m 정도이다. 동쪽의 자갈은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큰 파도가 몰아칠 때마다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 다시 해안으로 올려지기를 반복한다.

방풍림의 종류는 해송을 비롯하여 감랑나무, 가시나무 등의 상록수와 단풍, 느티나무 등 20여종으로 마을의 분위기를 평화롭게 한다.

 

       8. 장도의 청해진 유적: 사적 제 308(1984.8.29 지정)

청해진 유적은 장 보고( 甫皐)(?~841)대사 관련 유적지로 그는 이곳 완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고 당나라로 건너가 무녕군 군중소장이 되었으며, 828년 신라 흥덕왕 3년에 이곳 장도를 중심으로 청해진을 설치하여 해적 소탕과 해상무역을 통한 해양제국을 건설한 국제적인 인물이다.

이곳 유적지의 총면적은 482.284이고, 이곳 장도는 해발 43.5m, 면적 99.136  청해진의 중요시설이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멀리 북쪽은 강진만과 해남의 이진(梨津)의 길목이고 동쪽으로는 고금, 약산도를 경유, 득량만과 고흥반도로, 그리고 남쪽으로는 청산도를 지나 대양으로 중국과 일본으로 이어지는 해상교통의 요충지이다.

 

1991~2000년 까지 국립문화재 연구소의 유물발굴 조사를 통하여 목책열, 판축기법 토성, 우물터, 해무리, 청자편 등 장 보고의 해상 활동 근거지로서 청해진의 실체를 규명하는 많은 유물이 발굴되었으며 2001년 부 터의 정비 복원사업을 추진하여 판축 토성 890m와 내성문, 외성문, 고대 우물, 굴립주, 치 등이 복원 정비 되었으며, 남쪽의 해변에는 방어와 접안시설로 추정되는 원목렬(목책) 300m 정도 남아있다.

a)     외성문: 청해진 성의 입구에 위치, 성의 내외를 연결하는 통로로서 유사시 적의 공격을 저지하고 역습하거나 격퇴시키기 위한 통로이다.

 

b)    판축유구와 우물: 청해진 성 입구에 위치. ㄷ 자형 판축 유구는 해안 구조물로서 국내는 물론 중국이나 일본에도 유례가 없는 것이다. “자형 판축 유구는 우물을 보호하고 외성문을 보완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 우물은 잔존 깊이 5.8m이며, 이곳에서 주름 무늬병과 철제 편 등 유물이 출토되었다.

c)     판축토성: 청해진 성의 성벽은 판축 기법으로 만들어 졌고, 이는 흙으로 기초 및 성벽을 쌓는 방법 중 하나로 돌을 탄탄하게 깔고 그 위에 흙을 고르며 다져가는 공법이다. 이곳 청해진 성은 자연지형을 그대로 이용하여 능선을 따라 축조하였으며, 성의 규모는 둘레가 890m이다. 성벽은 좌, . , 외측에 기단 석렬을 깔고 맞물린 상태에서 그 안 쪽으로 흙을 시루떡처럼 다져 쌓은 토성이다.  

d)    고대(高臺): 동서로 이어지는 청해진 남쪽 성벽의 높은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이 고대는 서의 동, , 3곳에 있던 것으로 추정되며, 일본과 중국 등 외국에서 내륙으로 통하는 길목으로 연안의 상선과 해적을 감시하던 곳이다.

 

e)      서북치: 청해진 섬의 북쪽 중앙지점에 위치하고, 인근 강진, 해남 쪽에서 들어오는 배를 감시하고 주변을 조망한다.

f)      굴립주(屈笠柱): 성 정상부에 평탄지역으로서 사당을 중심으로 북쪽과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기능은 굴립주는 기초를 놓지 않고 땅에 기둥을 박아 세운 건물이며 주변 해역과 완도 본 섬을 조망할 수 있었던 시설이다.

 

 

g)   완도 장좌리 당제 및 당굿: 전남 무형 문화재 제 28호로 마을에서 매년 음력 정월 대보름 아침 동이틀 무렵 이곳에서 당제를 지냈다. 모시는 신격으로는  장 보고, 송 징, 정 년,  해일 대사 등 4분이다.

h)    동남 치(東南 ): 청해진 성의 동남쪽 모서리에 위치하고 있다. 기능은 관측시설로 쓰인다. 동남 치는 완도읍 일원을 조망하고 있으며, 바같 쪽 바다에서 안쪽으로 들어오는 배를 살피는 기능을 하고 있다.

9. 보길도

 완도에서 서남쪽으로 23.3km 떨어져 있고, 노화도 남쪽 1.1km 지점에 있어 지금은 배로 노화도로 건너가 보길도 연륙교를 이용하여 쉽게 갈 수 있다. 전체 면적은 32.99. 해안선 길이는 41.0km, 윤 선도의 유적지로 유명하며 <윤 선도 원림> 2008.1.8 명승 제 34호로 지정 되었다.

지형은 남쪽의 격자봉(425m), 동쪽의 광대봉(311m), 서쪽의 망월봉(364m) 등의 산지의 발달로 섬 중앙의 저지대가 경작지로 이용되며 아늑한 분지를 이루고 있다.

부용리 주변에는 동백나무의 군락이 아름답고, 연안에서는 도미, 삼치가 주로 어획되며, 전복, 김등의 양식업이 발달하고 있다.

 전라남도 기념물 37호로 지정된 <부용동 정원>은 고산 윤 선도가 18년간을 머문 곳이다.

그는 1636년 병자호란 때 제주도로 가던 중 보길도의 자연경관에 심취되어 부용동에 연못을 파고 洗然亭을 세우고 그곳에서 풍류를 즐기면서, 五友歌 漁夫四時詞를 써서 영원한 가사문학의 족적을 남기었다.

 

 

또 보길도의 예송리에는 상록수림이 천연기념물 제 40호로 지정되었고 해수욕장으로도 빼어난 경치를 자랑한다. 300년 전에 태풍을 막기 위해 주민들이 조성한 숲으로 길이가 약 740m, 폭이 30m 되는 반달모양의 매우 아름다운 숲이다.

     10. 고산(孤山) 윤 선도( 善道)의 생애와 발자취

고산 윤 선도는 선조 20 (1587~1671)에 유 심( )의 아들로 태어나서 강원도 관찰사인 유  (唯幾)의 양자로 들어갔다.

18세에 진사 초시에 합격하고, 20세에 승보시에 합격하였다. 광해군 8년인 1616년에 성균관 유생시절에 <이 이첨, 박 승종>등 당시의 집권세력을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이 이첨 일파의 모함으로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풀려나 위금부 도사로 제수되었으나 3개월 후에 사직하고 해남으로 낙향하였다.

1628년에 문과초시에 장원으로 합격되어 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의 사부가 되었고, 공조 좌랑, 한성부서윤 등을 5년이나 지내다 1633년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지평을 지냈다. 이듬 해 모함으로 파직되어 다시 해남으로 내려가 지내다가 보길도에 수려한 경치에 매료되어 그곳에 정착하게 되었다.

 정착한 곳을 부용동이라 이름 짓고 격자봉 아래에 집을 지어 낙서재라 하였고, 그리고 물려받은 재산으로 세연정, 석실 등을 짓고 풍류를 즐기다 1638년 경북 영덕으로 귀양갔다가 이듬 해에

풀려나 다시 보길도로 돌아와 10년이 넘도록 산수와 자연 속에 묻혀 산중신곡등을 지었고, 1651년 효종 2년에 마침내 영원한 가사문학인 <어부사시사>를 지었다.

다시 효종의 부름을 받아 예조참의 가 되었으나 서인의 모략으로 양주땅에 은거하였다가 <몽천요>를 지었고 1657 71세에 동부승지에 올랐으나 서인의 거장 송 시열일파에게 삭탈 관직을 당하고 다시 보길도에 내려와 그가 지은 낙서재에서 85세로 파란 만장의 생을 마감하였다.

20여 년의 유배 생활과 19년의 은거 생활을 하여 불행한 시절을 보내었으나 오히려 이런 생활이 아이로니하게 그의 문학적 역량을 발휘하는 계기가 되었다.

문집으로 <고산 선생 유고>에 한 시문과 35수의 시조와, “어부사시사가 실려있고 친필로 된 가첩에 <산중신곡>,<금쇄동 집고> 등이 전해온다.

고산은 이토록 고난의 세월 속에도 문심을 일으켜 평정심으로 글을 썼으며, <정 철, 박 인노>와 더불어 조선조의 3대 가인으로 추모되나 가사는 없고 단가와 시조만 75수에 이른다.

 

a)    보길도와 고산의 인연: 하늘이 나를 기다린 것이니 이곳에 머무는 것으로 족하다는 그의 5대손 윤 위의 보길도지에 나오는 구절이다.

늘 곧은 뜻을 꺾지 않고 직신의 정신을 지켜 연이은 상소 등으로 생애 중 16년이 넘는 귀양살이의 고초를 겪어야 했던 고산이다.

1637년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했다는 소식을 접하여, <백이.숙제>처럼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나 캐먹고 살려는 뜻으로, 육지에서 사는것이 부끄럽다고 하며, 제주로 항해도중 보길도의 수려한 풍광을 보고, 배에서 내려 격자봉으로 올라 참으로 물외가경(物外佳境) 이라 감탄하고  하늘이 나를 기다린 것이니 이곳에 머무는 것으로 족하다하며 이곳에 거처를 마련하고 드높은 그의 정신세계를 구축하였다.

보길도 부용동 원림은 명승제 34호로 지정되었고 세연정을 비롯하여, 낙서재, 곡수당, 동천석실 등이 대표적 원림 유적이다.

b) 세연정(洗然亭)의 건축의미: 개울의 보를 막아 논에 물을 대는 원리로 계담과 방지(方池) 사이에 판석보로 막아 조성된 세연지는 물과 바위와 송죽과 정자가 조화를 이루는 공간이다.

세연지 중앙에 앉힌  <세연정>은 일반 누각과는 달리 가운데 온돌방을 두고 사방으로 창호와 마루를 둘렀다. 창호는 분합문(分閤門)으로 문을 모두 들어 걸면 사방이 개방된 정자가 되어 주변의 풍경을 병풍처럼 두르게 된다.

 

세연정 앞 동대와 서대, 서쪽 산 중턱에 옥소래 까지 끌어들여 거대하고 입체적인 무대를 만들어내 고산의 섬세하고 기발한 조원기법(造園技法)이 들어난 곳이다. 고산은 이곳에서 예악(禮樂)으로 성정을 다스리고 자연과의 합일이 이루어지게 하였다.

c)낙서재(樂書齋): 낙서재는 고산이 보길도에 인조 15(1637)에 들어와 1671년 서거할 때까지 살았던 집이다.

그의 5대손인 윤 위가 쓴 보길도지에 의히면 처음 이곳에 집을 지을 때는 수목이 울창하여 산막이 보이지 않았으므로, 사람을 시켜 장대에 깃발을 달고 격자봉을 오르내리게 하면서 그 높낮이와 향배를 헤아려 집터를 잡았다고 한다. 이렇게 잡은 낙서재의 입지는 보길도 안에서 가장 좋은 양택지이다. 이곳에서 강학을 하고, 독서를 하고, 소요하면서 은둔의 생활을 하던 선비의 공간이었다.

최근에 낙서재 마당 북쪽에 고산이 달을 구경하였다는 귀암”(龜岩)이 발견되어 남쪽의 소은병과, 낙서재, 귀암의 축선이 확인되었다.

처음에는 모옥으로 지어 살다가 그 뒤에 잡목을 베어 거실을 만들었는데 후손들이 와가로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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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 귀암: <고산유고>귀암시편에 나오는 네곳 중의 하나로 윤 선도가 달맞이 하던 장소로 기록된 이 바위는 화강암을 쪼아 거북 형상을 만든 370x270㎝의 규모의 바위로서 고산이 낙서재 터를 고르는데 중요한 지표였다고 한다.

2011년 이 바위의 발견으로 <보길도지>에 기록된 소은병, 낙서재, 귀암의 축선이 확인되어 낙서재 원형복원에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

   e) 소은병(小隱屛): 주자가 경영한 중국 복건성 승안현 무이산의 대은봉 건너편의 있는 봉우리 이름으로 윤 선도는 산속에 은거하여 학문에 몰두한 주자의 행적을 따른다는 뜻에서 낙서재 뒷 편 바위에 이름을 붙였던 것으로 보인다.

소은병 바위 위에는 3각형의 홈이 크게 패여 있어서 빗물이 고이면 바위를 타고 흘러내려 숲이 우거진 이 부근에 와서 사색에 잠기곤 했었다고 한다. 북쪽에 있는 낙서재와 귀암이 이 바위와 축을 이룬다.

f) 서재(西齋): 곡수 남쪽 두 골짜기 중앙에 입지한 강학을 위한 건물로 건립 당시에는 학유공, 정 유악, 심진사단, 학관 (고산의 5) 등 여러 사람이 모여 고산에게서 배우던 곳이다.

g) 전사청(典祀廳): 학관의 아들 이 관이 제사에 올릴 음식을 장만하고, 제물, 제기 등 제사에 필요한 여러 가지 도구들을 보관하던 곳이다.

h)사당(祠堂): 고산 윤선도가 낙서재에서 돌아가신 뒤에 이곳에서 얼마간 초장을 지낸 곳이다.

i) 상연지: 높이가 한길 정도되는 방대 위에 가산을 만들고, 허리부분에 구멍 하나를 뚫어 돌로 된 통을 끼워 뒤에서 끌어온 물이 구멍을 통해 연못으로 쏟아지게 하고 이를 비래폭이라 하였다.

  J) 곡수당(曲水堂): 고산의 아들 학관이 거주하며 휴식을 취할 목적으로 조성한 공간으로 낙서재 골짜기에서 흐를는 물이 인근에 이르러서 곡수를 이루고 있다.  1칸짜리 집으로 사방에 퇴를 달고 반자를 두었으며, 남쪽 난간에는 취적헌(取適軒), 서쪽은 익청헌(益淸軒) 이라는 편액을 학관의 글씨로 새겼다.

주변에는 일삼교(日三橋)와 유의교(有意橋)가 있다.

 

 

k) 하연지(賀宴池); 하연지의 형태는 정방형에 가깝고 한 변의 길이가 13m정도이다. 호안의 축대의 높이는 약 1m가량 되며, 발굴 당시에는 연못 입수구와 출수구가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었다.  연못 옆에는 석정이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끝으로 고산의 五友歌漁夫四時詞를 소개하여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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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부사시사>는 춘하추동 각 10수씩, 40수로 된 연시조이다. 후렴구를 제외하면 완전한 3 6구의 시조 형식이 되는 이 노래는, 아름다운 우리말을 사용하여 간결하면서도 품격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기교면에서도 대구법 처리나 자연의 변화와 시간의 흐름에 따른 시상의 전개, 그 시상 전개가 펼쳐 보이는 인간과 자연의 조화가 주목할 내용이다.

 

 

<춘사1

앞 갯벌에 안개가 걷히고 뒷산에 해가 비친다.

배를 띄워라 배를 띄워라

썰물은 거의 끝나고 밀물이 밀려온다.

찌그덩 찌그덩 어여차

강촌의 온갖 꽃이 먼 빛으로 바라보니 더욱 좋구나.

<춘사4> : 자연과 마을 풍경을 감상하며 유유자적하는 모습

<춘사7> : 자연과 함께하며 명예와 이익을 초월하는 탈속적 모습

<춘사10> 여유로운 어부의 삶에 대한 만족감

​​<하사2>

연잎에 밥을 싸 두고 반찬은 장만하지 마라.

닻을 들어 올려라 닻을 들어 올려라

대삿갓은 이미 쓰고 있노라, 도롱이는 가져 왔느냐

찌그덩 찌그덩 어여차

욕심 없는 갈매기는 내가 저를 따르는 것일까, 제가 나를 따르는 것일까.

<추사1>

속세에서 벗어난 깨끗한 일이 어부의 생애가 아니더냐.

배를 띄워라 배를 띄워라

고기 낚는 늙은이를 비웃지 마라. 옛 그림마다 그려져 있더라.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사계절 흥이 다 좋기는 하지만 그 중에서 가을 강이 으뜸이라.

<추사2>

수국(보길도)에 가을이 드니 고기마다 살이 쪘구나.

닻을 들어라 닻을 들어라

끝없이 넓고 푸른 바다에서 여유를 실컷 부려보자.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바다에 나와 속세를 돌아보니 멀수록 더욱 좋구나.

<추사3>

흰 구름이 일어나고 나무 끝이 흔들린다.

돛 달아라 돛 달아라

밀물 때는 서쪽 호수로 가고, 썰물 때는 동쪽 호수로 가자.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흰 마름꽃과 붉은 여뀌꽃은 어디에서나 좋은 경치를 이루는구나.

<추사4>

기러기 날아가는 저 멀리 그 동안 무심히 보던 산이 새삼 보이는구나.

노를 저어라 노를 저어라

낚시질도 하려니와 자연에 마음이 쏠리는 것이 이 내 흥이로다.

석양이 눈부시게 빛나니 세상 산들이 수놓은 비단처럼 아름답구나.

<추사7>

흰 이슬 내렸는데 밝은 달이 돋아 온다.

배를 세워라 배를 세워라

봉황루가 넓고 멀어서 아득하니 맑은 달빛 누구에게 보낼 것인가.

찌그덩 찌그덩 어여차

달나라 옥토끼가 찧는 약을 호객에게 먹이고 싶구나.

<추사8>

건곤이 제 각각인가 이것이 어드 메오

배 매어라 배 매어라

서풍진 못 미치니 부채햐야 무엇하리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추사9>

옷 위에 서리 옫 추운 줄을 모랄로다

닻 내려라 닻 내려라 

조선(고깃배)이 좁다 하나 부세(헛된 세상)와 어떠하니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내일도 이리 하고 모레도 이리 하자 

<동사8>

물가의 외로운 소나무는 어이하여 씩씩한가?

배를 매어라 배를 매어라

험한 구름을 한탄하지 마라. 세상을 가려주는구나.

찌그덩 찌그덩 어여차

물결 소리를 싫어하지 마라, 속세의 시끄러운 소리를 막아주는구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