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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순례

땡큐 이영옥 2007. 4. 30. 16:25

            남한산성 순례

남한산성(南韓山城)순례

남한 산성은 전체가 사적 제 57호로 지정된 도립 공원이다. 이곳은 현재의 성남시, 하남시, 송파구 일대를 포함한 경기도 광주군 이었다. 이 성은 1300여년 전에 토성으로 축성되었다. 역사상으로 백제와 관련된 성으로 보였으나 최근에 행궁 터에서 기와 등이 출토되면서 신라 문무왕 12년( AD 672년) 에 축조된 성으로 간주된다.

고려 시대에도 몽고 군에 침입과 임진 왜란 시에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곳은 조선시대 북한 산성과 함께 한성을 지키던 남쪽의 방어 산성이다. 그 당시 북방 대비책으로 광해군 13년(1621) 석성으로 다시 축성하였다. 이 괄(李 刮)의 란이 평정되고, 인조반정 후 2년 (1624)에 금나라의 침입에 대비하여 수어사 이 서(李 曙)에 명해 대대적으로 축성하여 2 년 뒤 1626년에 완공하였다.

성곽은 내성과 외성으로 되어있고 총 11.76 km 이며 높이는 지형에 따라 3~7 m  내외로 쌓았다. 이 후 150년간 순조 때 까지 여러 차례 개축과 보수를 거처 각종 시설을 더하면서 현재처럼 완전한 성으로 태어났다.

성안에는 우물 80개와 45개의 연못이 있으며 성벽에는 30여 개의 水口가 있다.

산성에는  동문-좌익문(左翼門), 서문-우익문(右翼門), 남문-지화문(至和門), 북문-전승문(全勝門) 의 4 대문과 암문이 16개가 있었다. 병사들이 사용하는 군막이 125개 있었다.  성 내에는 왕의 거처인 행궁이 있으며, 당시 광주 읍의 관아도 산성 안에 있었다. 성 둘레에는 방어시설로 4 장대를 설치하였고 승군이 주둔하는 사찰도 9 군데나 있었다.

인조 14년 병자년(1636년) 12월 9일 나라 태종은 청군 7만 명, 몽고군 3만 명, 한군 2만 명 등 총 12만의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침입해 왔다.

당시 조선은 군대 양성이 별로 없었고 평화로운 시대 였고, 한성은 인구도 많고 도성이 넓어 수비 하기가 어려웠다. 조정에서는 고려 때 원나라가 침입해 왔을 때 강화도로 피난 가서 다시 한양으로 되돌아온 역사를 상기하여 방어가 쉬운 강화도로 피난하려 하였다. 그러나 겨울이라 눈보라가 심하고 추위로 길이 얼어 당시로는 가깝고 새로 보수한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그 해 12월 15일 부터 이듬해 1월 30일까지 47일간 항전하였으나 청군에게 포위된 상태에서

더 이상 저항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항전을 주장하는 김 상헌 등 척화파를 물리치고 최 명길 등 주화파의 의견을 받아들여  소현세자와 백관을 거느리고 삼전도(三田渡) (지금의 송파구 삼전동)에 나가서 황옥(黃屋)을 펼치고, 청 태종에게 3 번 절하고 9 번이나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이에 청나라의 요구대로 대청황제 공덕비(大淸皇帝 功德碑)의 내용을 담은 <삼전도비>를 세우게 되었다.

이 비는 숭명 반청 (崇明 反淸-청나라를 배척하고 명나라를 숭상한다)이라는 당시의 사대주의 이념으로 기울어져가는 명 나라를 따르다 치욕을 초래한 한시대의 외교적인 실패의 교훈을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

이곳 남한산성은 그때까지도 한번도 외적에게 침입을 당하지 않은 전적지로 남아있고 조선시대의 최고의 성곽기술을 볼 수 있는 중요한 사적이다.

성곽은 남한산의 몇 개의 봉우리를 연결하여 축조 하였으며 서쪽의 주봉인 청량산(482m) 위에 장수의 지휘소로 수어장대를 지었다.

수어장대는 경기 유형문화재 제 1호이다.  이 장대는 지휘와 관측을 위한 군사목적으로 지은 누각이다. 성안에 건축물 중 제일 웅장하다. 뒤쪽에는 2 개의 우물이 있어 당시에 물을 공급하였다. 인조 2년에 단층으로 지었으나 영조 27년 (1751) 이 기진(李 箕鎭) 이 2 층 누각으로 짓고 수어장대(守御將臺)라 편 액(扁 額)을 달았다. 병자 호란 때 인조 가 이곳에서 군사들을 지휘하여 항전 하였다.

 아래층은  정면 5 칸, 측면 3 칸, 위층은 정면 3 칸, 측면 2 칸의 팔작 지붕 양식의 누각이다. 건물 기둥은 60 센치의 장주 초석 위에 올려져 있다.

2 층 내면의 문루에는 無忘樓(무망루)라는 편 액이 있었는데 이것은 8년간이나 청나라 심양에 볼모로 간 왕자로서 (훗날 효종) 귀국 후 북벌을 꾀하다 승하한 원한을 잊지 말자는 뜻으로 영조 대왕이 지은 것이다.

당시 왕자와, 척화파의 거두 김 상헌삼학사 (홍 익한, 윤 제, 오 달제) 등 여러 신하를 심양으로 압송하였고 일부는 이국에서 목숨을 잃기도 하였다.

충절의 표상인 김 상헌은 유명한 시조를 남기었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고국 산천을 떠나려  하건마는

시절이 하 수상하여 올동 말동 하여라ㅡ 라고 전해 내려오는 유명한 시 한수다.

수어장대 아래쪽에는 청량� 이라는 경기도 유형 문화재 제 3 호가 있다.

이것은 인조 2년 성을 쌓을 때  동남쪽 부분을 책임지고 공사를 했다가 공사경비를 횡령했다는  모함으로 죽은 이 회(李 晦)와 그로 인해 한강에 투신한 그의 부인 송씨를 기리기 위한 사당이다. 그가 죽은 후 다시 공사비를 조사한 결과 누명이 벗겨져 수어장대 옆 제일 높은 곳에 사당을 지어 충절의 넋을 기리기 위한 곳이다. 그 외 공사 유공자들의 넋을 기라는 사당이다.

 

이제 남한산성을 직접 순례할 차례다. 남한산성으로 가는 길은 여러 갈래다. 송파구 거여동 종점에서 서문과 연주봉 방향이 있다. 다음에는 산성 서쪽 하남시 광지원 방면으로 등산로가 나있다. 여기서는 가장 많이 이용하는 성남시 남한산성 입구 전철역을 기점으로 삼는다. 우선 서울 시내에서 지하철을 이용하여 쉽게 8 호선 산성입구 역에서 내리면  2 번 출구로 나온다. 이곳 의 남한산성 유원지로 오른 길은 언제나 붐빈다.

2 번 출구에서 유원지방향으로 100 m 정도 오르면 산성 안 로터리로 가는 9 번 버스를 만날수 있고, 그것을 이용하면 쉽게 산성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대로 도보로 유원지 관리 사무소 앞으로 오른다. 길 좌측엔 을지대학교 가 산뜻하게 건물을 자랑하고 교정에 심어진 벗 꽃과 개나리가  만발하여 그대로 지나치기가 아깝다.

성남시 외곽 순환 고속도로 밑으로 해서 유원지로 들어간다. 먼저 오른쪽으로 성남시 민속 공예 전시장을 만난다.  거기서 시작되는 산길은 시멘트 포장이 되고 종종 계단도 나온다. 잠시 후 자잔한 돌로 수십 개를 쌓은 돌탑공원이 나온다. 이 길은 남문으로 오르는 중심길이다.

가는 도중에 심신 수련장, 약사사, 덕운사 입구를 지나며 물이 적은 계곡이라 아쉬움이 남는다. 산이 크고 높아야 계곡이 깊고 물이 많을 텐데?

20분이 지나면 백련사 입구에 오른다. 오른쪽 계단으로 올라 조그만 사찰인 백련사를 둘러보고 약수를 한모금 마시고 다시 오르면 갈림길에 닿는다. 여기서 안내 판을 따라 오른편으로 오르면 남문(지화문)으로 올라간다.

그러나 왼쪽으로 오르면 나무계단이 상당히 높게 설치되어 힘겹게 오른다. 성 일주를 제대로 하기위해 308번 도로로 올라오면 예전 남문 방면 매표소가 도로복판에 덩그라니 서있다. 전에는 이곳에서 주차비와 입장료를 내고 안으로 들어가 남문으로 통과하여 성안으로 들어갔다. 입장료가 없어진 후 차는 새로 난 터널을 통해 성안으로 진입한다.

여기서 성곽을 둘러보기 위해 남문 서쪽 성곽 위로 오르는 능선 길로 숲으로 들어간다. 432 m 봉으로 오르는 길은 제법 험하다. 도중에 진달래가 핀 곳이 많으나 위로가 되지 않는다. 아직은 나뭇잎이 돋아나지 않아 산속이 훤하다. 성곽 밑에 오르니 숨이 턱에 닿는다. 이제부터 성곽을 밖으로 순례하는 것이다.

성곽 안 밖으로 소나무가 무성하여 제법 큰 산 같은 모습이다.  성밖으로 난 길은 상당히 험해 사람이 없다. 밖으로 도는 길은 의외로 오르내리는 곳이 많고 흙 길이라 미끄럽다. 안으로는 성이 얕으나 밖으로는 4~7 m 정도로 높낮이가 지형지물에 따라 다양하게 연결되었다. 예전에 쌓았던 이끼낀 돌, 꺼먹게 변색된 돌이 세월의 무게를 느끼게 한다. 성곽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내려가면 성곽 안으로 산책객이 보이고 대화소리도 들린다. 오래된 성곽에는 다람쥐가 틈새로 드나들며 빠르게 움직인다. 담장이 덩굴이 새싹이 나기를 기다린다. 성곽이 얕은 데에는 넘어가지 말라는 경고판이 서있다. 영춘정 (팔각정)이 보이느 곳에서 후미진 곳으로 내려가니 누군가 밭을 일군 곳도 나온다.  성곽 밖으로 도는 사람은 한시간 남짓해도 2~3인 정도로 마주친다. 암문 근방에 이르니 여러 사람이 둘러 않아 중식을 나눈다. 그 앞으로 돌아가니 암문이 나타난다.

처음 만나는 암문으로 견고하고 문 윗 돌이 다듬어져 크고 간신히 사람이 통과할 정도이고 안으로는  성안 길에서 내려오고 그 앞에 나무가 심어져 가린다.

 이제는 성안으로 들어가 편안한 트레킹을 할 차례다. 성곽 밖으로는 하남시와 고속도로가 멀리 보인다. 남서쪽으로 청계산이 보이고 그 너머로 관악산도 멋지게 보인다.

잠시 오르니 청량산(483 m) 정상이다. 남한산성은 이 청량산을 중심으로 수어장대가 근처에 있어 이곳이 중심으로 생각되나 가장 높은 봉우리는 동쪽 외성에 있는 521 m 봉이 가장 높은 곳이다.

 금새 청량당을 만나고 300년 이상 된 향나무의 휘어진 등걸을 보면서 문을 나가니 수어장대로 오른다. 청량당은 공사 책임자였던 당시 이 서가 모략으로 죽고 그의 아내가 한강에 투신한 것을 위로하는 사당이다. 또 그 외 공사 참가자들을 위한 사당이다. 장대 옆에는 탁지부 측량소 삼각점 (度支部 測量 小 三角占)이라는 표지석이 서있다. 이는 우리나라 측량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대한 제국 말기에 탁지부에서 설치한 구 삼각점 표석이다.

수어장대 옆 담장 안에 초대 이 승만 대통령이 기념 식수한 나무와 기념비가 서있다. 둘레에는 제법 큰 나무가 많아 이곳이 오래된 곳임을 말해준다.

장대를 나와서 다시 성곽 안 길로 걸으면 하남시가 내려다 보이고 성곽 밖 길이 안에서도 잘보인다. 아직 �직한 들판너머로 하남시가 내려다 보이고 아파트가 점점이 서있다. 가벼운 마음으로 내려가면 오른쪽 언덕에 병암(屛岩) 이 보인다. 이 비석은 정조대왕시 백성들이 서문근처의 무너진 성을 스스로 보수 하였다는 내용이 담긴 것으로 당시 이곳 부윤(府尹)이 세운 기념 돌이다.

솔 냄새를 맏으며 5 분만에 서문에 이른다. 서문 밖으로 나가면 거여동 방면에서 올라오는 길이 여러 갈래 보인다.  다시 성안으로 들어와 포장도로를 버리고 성곽 옆으로 바싹 난 길을 따라 가면 암문을 통해 연주봉(465 m) 옹성으로 나가게 된다.

연주봉 옹성은 원성과 연주봉을 연결하고 있는데 둘레는 274 m, 73개의 여장(女墻)이 있다. 여장이란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으로 뭄을 숨겨 적을 향해 효과적으로 총이나 활을 쏠 수 있게 한 곳이다. 이 옹성은 암문을 통해서 성 내로 출입할 수 있으며 봉수대나 망루로도 사용된 곳이다.  옹성이란 능선으로 튀어나간 곳에서  적을 감시하고자 돌출해서 쌓은 성이다. 연주봉 옹성에 끝부분에 이르니, 먼 곳까지 보이니 군사 요충지임을 알 수 있다. 옹성 안에서 휴식하기도 좋다.

다시 옹성에서 나와 성곽 길로 나아가니 성곽 밖으로도 사람들이 많이 간다. 오른쪽으로 국청사를 바라보며 내려간다.  다시 언덕길로 올라가면 북장대지(406 m) 터가 나온다. 빈터에 안내판만 서있다. 북문이 보수중이라 이곳에서 패쇄되었다. 성 밑으로 계단 길을 바쁘게 내려가니 북문이 나온다. 북문은 보수중이라 가려져 있다. 여기서 일차로 성곽순례를 마치고 산성 로타리로 내려오면 옛 부터 있던 백제장, 반월정 등 2~3대에 걸처하는 음식점에 이른다. 한옥에서 그대로 영업을 하며 산나물 정식이 유명하다.  11.76 km 의 산성 중 4 km 정도로 끝내고 식사하고 근처 역사관, 연무관, 숭령전등 볼 곳이 많다. 식후 행궁 복원지를 둘로 보아도 좋다.

계속하여 북문부터 시작, 다시 오른쪽으로 오른다. 북문 옆에 안내판이 아주 크게 그려있어 앞으로 갈 길을 뚜렷하게 볼 수 있다. 패어나간 언덕 길로  오르면 제법 가파르게 올라 군포지에 이른다. 이런 군포란 성을 지키기 위한 초소, 건물을 세웠던 곳이지만 터만 남았다.

중정 남한지(重訂 南韓志,1848년)에 의하면 산성에는 125개소의 군포지(軍舖址) 있으나  현재는 터만 남았다. 또 성 내에서 물을 밖으로 흘러보내는 수구가 산성 내에 26개소가 있었다 한다. 급경사를 내려가서 동장대로 향한다.

 남한산성이 준공된 후 수어청 (守禦廳)을 두었는데  수어청에는, 전, 후, 중, 좌, 우 의 5 영이 소속되어 있었다. 이곳은 전영장(前塋將)과 좌영장이 배치되어 휘하 장졸을 지휘하던  동장대가 있던 곳이다. 지금은 빈터로 돌이 쌓여진 좀 높은 곳에 표지석만 설치되었다. 여기서 다시 돌아간다. 암문으로 나가 직진하면 외성으로 간다. 오른쪽으로 꺽어 또 하나의 군포지를  지나 장경사 신지옹성(長慶寺 信地甕城)으로 간다.  이 옹성은 둘레가 150 m, 여장이 40개가 있다.

옹성 끝에는 대포혈 2 개소가 있다. 이 옹성도 암문을 통해 안 밖으로 연결 하며 5 개의 옹성중 제일 작다. 좌측에 무기고가 있었다. 성문을 보호하는 일차적 방어 시설이다.  성안에는 노랑민들레, 양지 꽃이 봄을 장식하고 있다. 다시 나와서 성곽 길로 간다.

오른쪽으로 장경사가 보이고 탑이 하늘높이 솟아보인다. 이 사찰은 산성 내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이었으나 6.25 때 불타버렸다. 대웅전이 웅장하고 탑과 어울리고, 옆의 범종각도 새로 지었고 샘물도 나온다. 돌아 나오니 일주문이 아주 웅장하다. 금박으로 장경사 일주문이라 쓴 것이 빛난다. 다시 돌아와 널은 공터가 주차장으로 쓰이는 곳을 지나 성벽을 따라가니 수구와 암문이 보이고 밖으로 나가보니 야생화가 가지가지 피어난다.

다시 성과 길을 찾아 오르니 편편한 곳을 지나 좁은 길로 올라가니 송암정(松岩亭) 이 나온다. 이곳은 황진이가 금강산에서 수도하다 하산하여 이곳을 지나가는데 기생과 더불어 술에 취한 남자가 희롱하자 불도로 설법하자 기생이 자괴로 투신했다 한다. 우측 위로 수직으로 선 험한 바위가 바로 송암이다.

그후로 부 터 달 밝은 밤에 노래 소리와 통곡소리가 들렸다는 전설이 서린 곳이다.

송암정을 지나가니 내려가는 길이 나오고 동문(東門) 보인다. 포장도로가 숲속으로 보이니 차 소음이 요란하다.

 동문은 누각이 얕게 지어져 있고 누각을 통해 계단을 내려가니 도로로 끈 겼다. 돌계단 앞으로 포장도로가  생겨 동문 밖에서 산성 종로 네거리로 들어오는 지름길이다. 종로 1.7 km, 남문1,2 km 지점에 있다. 도로를 건너 다시 성으로 오르기 전에 시구문이 있다.

이 시구문은 북한산성의 시구문을 연상 시킨다. 이곳은 신유년(1801), 기해년(1839), 병인년(1866) 천주교 박해 시 순교자 한 덕운, 김 덕심, 정은 등 300여명의 시신 을 내다버린 곳이다.

그래서 산성 안 종로네거리 근방의 카도릭 교회 앞에는 순교비가 서있어 숙연해 진다.

시구문을 지나 성곽 길을 따라 오르면 이제 부터는 무너진 성곽으로 옛날을 회상하면서 걸을 수 있다. 무너진 성곽위로는 잡초만 무성히 돋아난다. 500~600 m 정도의 성곽을 따라 걸으면서 밖의 먼 경치가 아주 시원하다. 군데 군 데 벗 꽃이 만발하여 점점이 하얗게 보인다. 얼마를 올라가니 무너진 성곽에다 당시의 기초 석을 다지어 쌓아올린 곳에서 성곽 밖으로  나간다.  이곳은 아주 높이 쌓아 7 m 이상으로 보인다. 기초로 쌓은 오래된 돌 틈엔 이름 모를 나무가 뿌리를 내리고 새잎이 돋아난다. 마지막으로 이제 남문을 향해서 내려간다. 터널이 생기기전 주  통로 였는데 이제는 차가 드나들 수 없다. 남문 밖에는 거대한 나무들이 수령을 견디지 못하고 버팀에 의존하여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사람의 물결이 영산홍의 붉은 색과 어울러져 다채롭다. 남문에서 수어장대로 이르는 길은 관광 산책 길이다. 이제는 성안 길로 해서 종로 네거리를 향해간다. 이 길은 터널에서 나오는 삼거리 까지 이제는 주차장으로 쓴다.

 가는 길 아래로 비석 군이  설치되어 있다. 이곳은 성안의 39개의  비석 중 30개를 이곳에 모아 설치했다. 이중 행궁 복원공사로 이전한 11기도 이곳에 포함되어 있다. 탐방 객이 옛 조선의 비석문화의 변천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

광주유수, 수어사, 부윤 등 벼슬이 높은 사람들의 비석이 있다. 흥선대원군 영세 불망비(興宣 大院君 永世 不忘 碑)도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영의정 심 상규의 비석도 남아있다.

 성곽순례를 마친 후  종로 네거리를 중심으로  동문 방향으로 가다가 산성 역사 박물관, 연무대를 방문 하면 산성의 역사를 더 공부할 수 있다. 연도별로 자세히 산성과 성내 건축물의 역사가 상세하게 기록된 각종 전시 물을 볼 수 있다.  이곳이 전체가 국가 사적 57호로 지정된 곳이라지만 음식점이 너무 많아 고기 굽는 냄새가  진동하는 그런 곳이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 1 호인 수어장대, 2 호인 숭렬전, 3 호 청량당, 6 호 연무관  등 두루 역사의 현장 을 순례할 수 있는 곳이다. 마지막으로 행궁 지로 올라가면 보수공사로 문이 잠겨 있다. 옆으로 돌아 오르면  침괘정이 나오고  안내 판에 영조 27년 (1751) 광주 유수 이 기진이 중수 했다는 기록이 있다. 집무실로 쓰이던 곳이라 한다. 그 너머로 가면 행궁 지 복원 현장이다.

일제 침략기, 6.25 전란을 거치면서 소실되었던 곳을 발굴하여  복원공사 중이다.

성곽에 내부에는 왕이 피신하여 머물던 행궁, 종묘, 사직, 관아, 옥사, 객사, 종각 등이 있던 자리를 발굴하여  대부분 복원하였다. 중심 행궁은 복원했으나 그 아래는 아직도 발굴 중이다. 이 행궁은 인조가 병자 호란 시 47일간 머물며 항전 했던 곳이다.

내행전(內行殿)은 왕, 왕비가 거처하던 중심건물로 침전으로 사용하던 곳이다. 2 개의 온돌방과 내, 외곽  담장을 쌓아 복원하였다. 우측 밖으로는 영녕전이 있으니 이는 조상의 신위를 모신 던 곳으로 당시의 문헌과 발굴 터를 참고하여 복원공사 중이다.

행궁 우측으로 복원된 좌승당은 순조 17년 (1817) 광주유수 심 상규 가 건립한대로 복원되었다.

 끝으로  본성은 외적의 침입을 막고 일차적으로 방어를 위해 제 1, 2, 3 남 옹성과 장경사지 옹성, 연주봉 옹성    5개의 옹성으로 보완하였다. 그리고 외성으로 2.7 km 에 이르는 봉암에서 한봉에 이르는 성을 쌓았고, 본성과는 3, 4 호 암문을 통해 출입 하였다. 외성에도 5개의 암문과 2 개소의 포혈, 1 개소의 배수구가 설치되어 있다.

산성 내에는 원래 망월사옥정사 2개의 사찰이 있었다. 그러나 조선 팔도에서 소집한 승군의 훈련과 숙식을 위해 장경사, 국청사, 개원사, 한흥사, 천주사, 동림사, 남단사 등 7개의 사찰을 더 지어 승군 500~600명을 거처하게 하였다. 이것이 200년간 계속되다가 국운이 쇠퇴하면서, 일제, 6.25 등으로 모두 불타버리고 현재는 장경사, 개원사, 국청사, 망월사 만 복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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