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성곽 순례 (5) 강화 산성 -사적 제 132호
고려 중기 이후 몽골의 잦은 침공으로 고종 19년(1232년) 개경에서 당시 권신 최우(崔瑀)에 의해 강화로 천도하게 되었다. 몽고의 제 2차 침입에 대비하여 1234년부터 본격적으로 축성. 성은 흙으로 쌓았고, 왕궁과 성, 관아시설 공사를 시작. 축조시 개경의 궁궐과 비슷하게 하여 송악이라 명하였다. 13년간이나 공사를 하였으며 성은 내성, 중성, 외성으로 이루어 졌다.
내성은 지금의 강화성으로 1174m 이었고, 중성은 1250년에 내성을 지키기 위해 쌓았으며 둘레가 5381 m 였다. 중성은 선원면의 토성 터로 추정 된다. 외성은 1233년 강화 동쪽해안을 따라 쌓았으며 1만1232 m 정도였다. 이 외성은 몽골 군이 바다를 건너 공격해 오지 못하게 하는 방어시설이었다. 당시 고려 조정의 강화천도 기간인 39년간을 육지로부터 물자를 지원 받았던 곳이다.
(사진: 강화 산성 서문–첨화루 전경)
고려 원종 11년(1270년) 몽골과의 강화조약을 맺으면서 그 조건으로 수도를 다시 개성으로 옮기면서 성을 모두 헐게 되었다.
그 후 조선 전기에 규모를 줄여 다시 성을 축조하였으나 1637년 병자호란때 청군에 의해 다시 파괴되었다. 그 후 숙종 3년(1677년) 강화유수 허 질(許秩)이 대대적으로 개축하면서 고려시대의 내성 규모의 석성을 축조하였다. 총 7122 m 로 4개의 대문, 4개의 암문, 2개소의 수문을 쌓았다. 서문인 첨화루(瞻華樓) 는 1711년 강화유수 민 진원(閔 鎭遠)이 세웠고, 남문인 안파루(晏波樓) 는 무너진 것을 1973년에 복원하였다. 북문인 진송루(鎭松樓)는 당초에는 문루가 없었던 것을 1783년 성을 개축할 때 지었다. 동문인 망한루(望漢樓)는 2004년에 와서야 복원되었다. 비밀통로인 암문 4개와 수문 2개는 그대로 남아있다.
망을 보는 장대와 성 위에서 몸을 감추는 여장 등의 시설은 모두 무너졌다. 현재 성의 동쪽부분은 무너졌으나 남 북쪽 산자락에는 잘 보존되어 있다.
강화 고려성은 외세의 침략에 항쟁하는 고려왕조의 상징이었으며, 조선 후기에도 병인 양요(丙寅 洋擾), 신미 양요(辛未洋擾)와 바다건너 일본의 침략의 의한 강화조약(江華條約)을 체결했던 치욕의 현장으로 외세침략의 산 증인으로 우리의 역사를 되돌아 보게 하는 곳이다.
강화 산성의 서쪽 성벽을 가로 지르는 동락천에 설치된 석주문은 숙종 37년(1711년)에 화강석으로 축조하여 강화산성의 내성을 쌓을 때 연결하여 처음에 설치하였으나 광무 4년에 갑곳 나루 터의 통로로 삼기 위하여 개천어귀로 옮겼다. 세개의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형태로 길이 18.2 m, 너비 4.7 m, 높이 2.7 m 이다. 1977년 하수문 자리로 옮긴 것을 다시 1992년 현재의 상수문으로 복원하였다.
서문 앞에 연무장 옛터는 강화군의 군사 훈련 터로 1879년 고종 13년 한일 수호조약의 체결 터이다.
(사진: 연무당 옛터 표지석)
(사진:서문 옆 무너진 성벽)
(사진: 북문 진송루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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