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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적인 지구 온난화 현상과 이상 기온으로 금년여름은 유난히도 더웠다. 20일경 부터 비가 내려 갑자기 무더위가 물러나고 처서(22일)를 지나면서 열대야 현상이 사라 졌다. 24, 25일 비가 오면서 갑자기 하늘이 높아지고 가을을 재촉한다. 유럽도 지중해 연안, Spain, Italy 지역은 가뭄과 더위가 극심하다. 스위스 동쪽, 오스트리아, 불가리아 쪽은 때아닌 홍수로 도시가 침수 되는 기상 이변이 속출하였다. 그 동안 쉬었던 여행을 금년 들어 4번째로 출발하면서 잦은 비행기 사고 소식에 마음이 무겁다. 8월 26일(금): 어제까지 내리던 비가 개이면서 시원해진 8월 26일 10시경 출발. 10:25분 인천공항 도착. KE 925 편으로 Amsteldam으로 14:45분 이륙 (시차는 7시간 늦다). 현지까지는 약 8590 km 로 11시간 반 정도 걸린다. 기내에서 “The five people you meet in heaven” by “Mitch Albom” (공 경희 역)을 뜻 깁게 읽었다. 내용은 “에디”라는 노인이 평생을 바닷가 놀이공원에서 정비사로 일하다 83세 되는 생일날 놀이기구의 사고로 추락한 소녀를 구하려고 뛰어 들었다가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는 죽음의 세계를 여행하면서 다섯 사람을 만나 사후 세계를 경험한다. 착한 사람이 간다는 천국, 그러나 이곳에서 보여주는 천국은 다르다. 유년시절에 죽었던 아버지, 먼저 간 사랑하던 아내 “마가렛”을 만나 모든 세상 사와 화해를 한다. 그것이 바로 천국에 이르는 과정이다. 삶과 죽음이 이어져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안하게 된다. 다음에 읽은 책은 “한국의 궁궐 이야기” ( 송 내관 저)로 우리 나라의 5 대궁인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경운궁의 건축에 얽힌 이야기와 그 수난의 역사를 주의 깊게 읽었다. 이조 500년의 왕조사가 외침에 시달리고, 임진,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궁궐이 파괴되고, 재건되는 과정이 우리의 고난의 역사와 더불어 우리 문화재에 대한 소중함을 일깨워준 책으로 깊이 각인 되었다. 제대로 보존하지 못한 민족의 유산을 후세에나 복원하여 민족의 자존심을 세웠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두 권의 책을 읽고도 남은 시간을 명상 하면서 현지시간 18:45분 암스텔담 Schiphol 국제공항에 안착하였다. 기내에서 내려다본 네델란드는 넓은 북해만이 들어온 곳에는 이름다운 초원지대가 바둑판처럼 내려다 보이고 네모 반듯한 4곳 중심에는 주택이 숲속에 질서 정연하게 자리잡은 계획된 농촌 풍경이었다. 네델란드는 한반도의 5 분의 일 정도, 41.548㎢로 내해가 육지로 깊숙이 들어오고 해면보다 얕은 풍차의 나라로 알려져 있다. 인구 1600 만 명의 화려했던 해양국가 였으나 지금은 본국만 남아 있는 왕정 국가이다. 공항에서 내려서 버스로 시내 외곽으로 해서 40분간을 가면서 목초지에 한가로이 소떼, 양 떼가 풀을 뜯고 있는 전형적인 낙농국가의 모습이 보이고 명물 풍차도 두개 정도를 보면서 지나오는 것으로 만족하였다. 차는 Utrecht 소도시에 있는 Carton President Hotel 에 우리를 안내 하였다. 8월27일: 시차로 인해 잠간 잔 후 그대로 새벽이 찾아왔다. 간단한 아침 식사를 마친 후 Internet Room 에서 잠간 동안 신문기사 등 을 점검한 후 08:50 분 출발. 우리는 Amsteldam 시내로 들어갔다. 시내는 부채꼴로 이루어져 있고 번화가인 중앙역앞 Victoria Hotel 앞에서 부터 시작이다. 인구 72만의 이 도시는 13세기에 저지대인 이곳에 어민이 강 뚝을 설치하고 살기 시작한데서 유래된다. “Amstel” 이란 “강의 뚝”을 의미 하며 운하로 연결된 도시와 500여 개의 다리가 장관이다. 무역, 관광, 상업의 도시이며 유럽의 관문으로 5-6개의 국제 열차가 중앙역에서 운행되어 유럽의 다른 나라로 갈 수 있다. 또 항공, 조선, 기계 등의 산업이 발달하여온 도시이다. 남쪽으로는 “Dam Square(담 광장)”이 있고 그 정면에 왕궁과 2차 대전 기념비, 신교회 등이 들어서 있고 도시 서쪽으로 “Anne Frank” 가 살던 집이 명소이다. 동남쪽으로는 유명한 천재화가 “Rambrant” 의 집이 있으며, 미술관이 도처에 자리잡고 있다. 70여 개의 섬이 운하로 연결되어 물의 도시라 수상가옥이 수로 양안에 자리잡고 있다. 운하 주변에는 17-18세기의 오래된 주택들이 즐비하며, 외부에 조각장식이 아름다운 건물이 많다. 모두 유람선을 타고 관람이 가능하며 중앙 역 앞에는 “Cruise Tour Ticket”을 팔고 역 앞 선착장에서 시작된다. 담 광장에 자리잡은 왕궁은 원래는 시청으로 사용하기 위해 1665년 지은 건물이며, 현재는 영빈관으로 사용된다. 건물외벽의 조각은 중세 풍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어 화려하다. 중앙 역을 중심으로 걸어서 관광을 하느라 각국에서 온 관광객으로 마치 인종 전시장을 방불케 한다. 이곳을 돌아 다시 중앙 역으로 다리를 건너 남쪽으로 “ㄷ” 자 형태로 걸어 담광장에 이르면 한시간 내외로 시내의 중요한 곳을 두루 살펴볼 수 있다. 11:20분 도보 관광을 마치고 다시 버스에 올라 Schiphol 공항으로 향하였다. 14:50 분 “British Airway”를 타고 영국으로 가기 위해서다. 15:00시에 B.A 635 기는 이륙. 약 40분만에 London Heathrow 공항에 도착. 유난히도 까다로운 검색 대를 통과하여 버스에 오른다. 먼저 찾은 곳이 “Hyde Park”. 80만평에 이르는 광대한 공원으로 Victora 여왕이 건설하였다. 여왕은 “Albert” 공과 결혼 하였으나 1861년에 Albert 공이 병사 하자 그 건너편에 “Royal Albert Hall”을 1871년에 건축하여 공원과 더불어 유명한 공연장으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공원 전면에는 Albert 공의 순금으로 제작된 동상이 높이 솟아 있고 그 밑 바침에는 과학자, 영국의 국위 선양자들이 조각되어 있으며 네 곳 모서리에는 전 세계를 지배한 대영제국의 상징이 조각되어 있다. 공원 안에는 각종 꽃이 사철 피어나고 아름다워 우리는 좌측 화원으로 들어가 우측으로 돌아 산책을 하면서 중앙으로 나왔다. 오래된 공원으로 수목이 잘 가꾸어져 있고 각종 놀이를 즐기는 사람,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 등 영국인이 다양한 주말을 즐기는 것을 볼 수 있다. 영국은 북위 50-60 도 사이에 위치하나 따듯하고 년 중 비가 200일 정도로 오고, 맑은 날은 60일 정도라고 한다. 국토는 남 북한의 1.1배로 약 6천만이 살고 London 은 700만명이 거주하는 타원형 도시다. 물가가 최고로 비싼 것이 외국인에게 어려운 일이다. 한국인이 5만 명 정도이며, 학생, 금융관계자가 주류를 이룬다.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land” 가 정식 국가 명칭이다. 시내는 중세식 석조 건물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고, 노아의 방주를 연상시키는 “Seagram”주류회사 건물이 현대식 건물로, 유리로 찬란하게 건축된 것이 오히려 이색적이다. 다음에 찾은 곳이 “Buckingham Palace” 로 “Tralfalgar” 광장 남쪽에 위치한 왕궁으로 1702년 지어져 1762년 “George 3세”가 사서 왕의 저택 중 하나로 삼았다. 1837년 Victoria 여왕에 의해 왕족의 거주지로 지정되었다. 육중한 대리석의 4층 건물로 붉은 복장의 근위병 교대식으로 유명하다. 방이 600개나 되며 5 만 평이다. 매년 7월30일-9월30일 까지 개방되며 오른쪽으로는 각국 대사의 신임장 제정시 입장하는 문이 따로 있다. 그 정면에는 “George 3세”의 동상이 높이 서있어 그 주위로 사람들이 붐빈 다. 다음에 찾은 곳이 “Westminster Abbey”로 고딕 건축 사원으로 "Edware the Confessor" 에 의해 1065년 사원으로 건축되었다. 1066년 William왕의 즉위식이 거행된 곳으로 이 후 600년간 왕의 즉위식이 거행되었고, 그 주변의 부속 건물과 더불어 영국의 영원한 상징물이다. 그 주변에는 빨간색 2층 버스, 관광객이 뒤엉켜 최대로 복잡하다. 이곳을 거처 “Tralfalgar” 광장으로 이동하니, 그 유명한 “Nelson” 제독의 동상이 하늘 높이 솟아 있다. 대영제국의 영광과 역사의 현장이다. 그 맞은편으로 난 길을 따라가니 삼성전자의 광고판과 Sony의 광고판이 나란히 서있다. 여기서 좌회전하여 거리를 따라가다가 “burbery” 의 본고장 매장을 둘러 보았다. 오후 7시경 이태리식 식당에서 가장 짠 Soup 와 Steak를 맛보며 고기를 안주 삼아 42년 만에 만난 <박 세돈> 동문과 소주 한잔씩 나누고 교외에 있는 Best Western 계열의 Master Robert Hotel 408호에서 고단한 일정을 마감. 8월28일: 시차로 인해 12:40분에 깨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아직 적응이 안되어 문제다. 호텔이 Heathrow 공항에서 멀지 않아 비행기 소음이 상당하고 아침 일찍 산책을 하니 주택지는 지저분하고 정돈이 안되어 있어 유감이다. 아침식사는 빵과 음료수 위주로 되어 있어 아침을 튼튼히 먹어야 하는 한국인에겐 부실한 것이다. 08:00시에 출발하여 시내로 들어와 Tralfalgar 광장을 거처 Thames 강가에 이르니 일요일이라 한산하고 상가가 철시 되어 거리가 텅 비어 있다. 도심을 흐르는 강가에 발달한 옛 도시에 육중한 석조건물의 위용이 다가온다. City Hall 근방에서 부터 시작 Thames 강변을 걸어서 “Tower Bridge” 까지 강변을 아침 공기를 마시며 산책. 국회의사당은 700년이 넘는 의회전통에 고색 창연하게 강가에 도열하듯 이 서있어 이곳이 유럽, 아니 세계 민주정치의 전당임을 자랑한다. 원래는 Westminster Palace 가 있던 곳이다. 1834년 대화재 이 후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되어 1860년에 완공 되었다. 가운데에 서있는 “Big Ben” 은 높이 95m의 시계탑으로 이것 또한 대영제국의 상징 물이다. 아직도 손으로 태엽을 감아 시계를 움직이며 시간지기가 상주 한다. 오른쪽의 조그만 방에 불이 켜져 있으면 “회의 중”을 나타낸다. 우리는 강변을 걸어서 몇 키로를 올라가면서 런던 시내를 두루 살펴볼 수 있었고 아침 조깅을 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런던의 상징인 “Tower Bridge” 방향으로 강 연안을 따라 걸으면서 강에 정박중인 “Belfast” 전함을 구경 할 수 있었다. “Tower Bridge” 가 열리면서 그 사이로 해군함정이 통과하면서 군악이 울려 퍼지고 해군 수병들의 행사가 거행되는 모습을 직접 구경 할 수가 있었다. 우리는 Tower Bridge에 올라가 다리가 갈라져 들어 올라가는 곳을 관찰 하였다. 이 다리는 Victoria Style의 교각을 자랑하고, “Horace Jones” 경의 디자인으로 1887년에 착공 8년 만에 1894년에 완공되어 100년이 넘는 기간을 자랑하며 크고 작은 고틱풍의 조각과 첨탑이 마치 동화에 나오는 중세의 성을 연상시킨다. 배가 통과할 때는 90초에 걸 처 1000톤의 다리가 좌우로 갈라져 들어 올려지고 강의 수로가 열리며 수압을 이용한다고 한다. 타워 내부에는 브리지와 관련된 흥미로운 전시관과 빅토리아 시대 부터의 증기 엔진실이 그대로 있어 볼만하며 다리가 개폐되는 원리를 설명해 준다. 다시 다리를 건너 “London Tower”(런던탑)으로 간다. 그 옛날 “George 3 세”가 건축하여, 죄수를 수감하거나 처형하였다는 음울한 역사가 깃든 옛날 석조건물의 탑이 을씨년스럽게 강가에 버티고 서 있다. 그 곳을 지나 지금은 Marriot Hotel로 쓰이는 구 시청 건물을 만나고 강가를 따라 “London Eye”( 회전하는 높은 타원형 기구)를 만난다. 이것은 Millenium 2000년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런던의 새로운 명물이다. 타고 올라가 돌아가는 곳마다 사람이 관광할 수 있어 전시가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것이다. Thames 강 연안을 따라 유람선이 다니고 오리 등 수상 동물이 새끼를 거느리고 한가롭게 유영을 한다. 마침내 대영박물관에 도착.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박물관을 관람 하였다. 박물관은 1660년에 태어난 “Sloan”경에게서 유래되었다. 1753년 그가 사망하였을 때 소장품 수는 79.575 점에 이르렀다. 대영박물관은 2003년에 창립 250주년을 맞이하였다. 국제 학술활동의 중심지로서 전세계에 걸친 유물이 체계적으로 보관 정리되어 있다. 해외에 나가있던 영국의 대사들과 고고학자들은 해외 유적 유물을 체계적으로 발굴하여 구매하거나 기증을 받아 이를 본국으로 보내어 오늘날과 같이 방대한 세계 문화유산의 보고를 이루었다. 1840년에 새 박물관 건물이 완성되어 인류문화 연구에 큰 공헌을 하고 있다. 찬란한 고대 Greece, Egypt 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고, 아시아의 바비론 문명이나 수메르 문명도 여기서 접할 수 있다. 가장 고귀한 것은 제 25호인 “Rozettastone”로서 유리관속에 있는 옛 돌에 새겨진 상형문자 앞에서 전 관람객이 경이로운 눈길을 보낸다. 이집트 관이나 그리스 관에 거대한 유물은 그 옛날 해가 지지 않는다는 국력을 자랑 할 때 모두 해당국에서 발굴해 왔거나 사온 것으로 되어 있다. 제 60호의 미라, 제8호의 엘진 대리석, 람세스 2세상, 라마스 상, 파르테논 신전 등 하루 종일 관람을 하여도 다 볼 수 없는 방대한 고대의 유물은 세계 인류의 유산이다. 입장료가 무료라 연구자에겐 큰 도움이 된다. 주목할 곳은 92-94 관에 마련된 한국관이다. 이곳에는 베링거 제약 지사장이던 “한 광호”씨가 200만 $를 기증 하여 이곳에 전시관을 마련 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는 나라에서도 할 수 없는 고귀한 일을 한 사람으로 그의 안목에 경의를 표한다. 전시관 내에는 한국의 역사를 살펴 볼 수 있는 체계적인 전시물이 마련되어 있어 긍지를 느낀다. 자주 전시물을 바꾸어 우리 역사의 진면목을 세계인에게 보여주는 계기를 마련하였으면 좋겠다. 오전 내에 박물관 관광을 마치고 Waterloo 역으로 이동하여 “E Euro Star” 고속 열차를 타고 이동을 해야 한다. 점심때가 걸 처 있어 우리는 도시락을 준비하여 가지고 강가에 있는 역으로 향하였다. Waterloo 역은 연인들, 가족들의 만남과 이별의 장소로 유난히 뜨거운 장면을 연출하는 사람들이 많다. 13:36 분에 출발 예정인 유로스타 고속열차는 40 분이나 지연되어 우리는 점심을 여유있게 들고 쉬면서 각종 인종 전시장 같은 대기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14:15분 경 출발, London 과 프랑스 Gallen, Paris Nord 를 연결하는 고속열차는 1994년 개통. 먼저 영국의 평야지대를 달리었다. 넓고 푸른 평원에 아름다운 햇살이 풍요로움을 연상시켜 주었다. 한시간 20분 정도의 해져 Tunnel을 지나면서 유리창은 거울 역할을 하여 주었고 우리부부는 테이블 까지 달린 편안한 좌석에서 여행을 즐기었다. 행운의 날인 양 즐거웠다. 프랑스 쪽으로 건너오면서 더욱더 넓은 녹색의 들판이 전개되고, 드문 드문 농촌 주택이 나타난다. 프랑스 화가들의 그림소재에 나오는 듯한 아름다운 평원은 높은 곳도 없이 끝 모르게 이어진다. 건초 수확한 것이 많이 눈에 띠고, 젓 소와 양 떼 목장이 한가롭게 나타난다. 18:10분 경 마침내 “Paris Gare du Nord” 정거장에 이르면서 4시간에 걸친 열차여행이 끝났다. 복잡한 역 구내를 빠져 나와 “가람” 이라는 漢국식당에서 김치 찌개를 겸한 저녁식사를 가졌다. 프랑스는 551,602㎢ 로 약 6천 만 명 의 인구를 가진 자존심과 문화의 나라 답다. 파리시는 가로 12km, 세로 9km, 순환 35km 의 둥근 방사성 도시이며 “Seine” 강이 동에서 서로 흘러 간다. 1-20구로 정해져 있고 중심부는 200만, 수도권은 천만 명이다. 우선 “Eiffel” 탑으로 간다.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만국 박람회를 개최하는 상징물로서 “Gustaff Eiffel” 이 1899년 세운 320.75 m의 기념물이다. 처음에는 그대로 두었다가 1950년에 가서야 새로 보수하여 개방하여 지금은 세계인이 즐겨 찾는 파리의 명소가 되었다. 그날 그날의 티?으로 관람할 수가 있다. 해가 지기 전에 에리베이터를 타고 1단계, 2단계, 3단계를 거처 맨 꼭대기에 이른다. 사람들로 발 디딜 틈 조차 없다. 전망대위에서는 파리의 전시내가 한눈으로 보이고, 상 마르뜨 공원, 그 오른쪽으로 나폴레옹의 유해가 있다는 앨 바라드 성당, 로뎅 미술관, 서쪽으로 숲 공원지대와 굽이처 도심을 흐르는 쎄느강 등 오랜만에 쾌청한 날씨에 아주 행복한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파리 시내를 전방위로 사진에 담고, 내려오니 어느덧 태양이 지고 있다. 이제는 세느강의 유람선을 타고 야경을 감사하러 나섰다. 1000여명이나 타는 유람선은 저녁 9시가 되어 서야 서서히 움직이며 그때 “Eiffel” 탑의 반짝이는 불빛이 강변을 누빈다. 선상에 앉아서 보는 탑의 불로 장식된 모습은 너무나 환상적이다. 정말로 평생 처음 갖어보는 기회이자 선물 같았다. 멀어져 가는 탑을 뒤로하고 자유의 여신상 까지의 거의 한시간을 강 양안의 야경을 감상하며, 강 위의 다리를 지날 때 마다 젊은이들의 환호성은 건강한 미래를 상징하는 듯 하였다. 다시 돌아와 또 에펠탑을 멀리 강을 따라 전방위로 감상을 한 다음 다시 돌아가서 탑 근처 선착장에 이르니 벌 써 11:00 시 경. 버스로 호텔로 향하면서 이렇게 만족한 날은 드문 하루였다. 교외에 “Express by Holiday Inn” Hotel 231 호에 짐을 풀고 피곤한 하루를 마감 하였다. 8월 29일: 어제 파리의 야경을 감상 후 늦게 들어와 고단하게 수면을 취하였다. 오늘은 09:00에 출발하여 도로에 나오니 출근차량으로 붐 빈다. 어제 지나갔던 도로의 지하차도(다이아나 왕비가 사고로 죽은)를 지나 파리의 중심부로 들어가 개선문 앞에 이르렀다. 가로수의 일부는 벌써 단풍이 드는 것 같이 잎의 색갈이 변하고 있다. 따갑고 찬란한 햇빛이 퍼지는 가운데 원형 광장에 이르렀다. 개선문 광장의 넓이는 지름 240 m 정도의 원형으로 가운데 50 m 높이의 개선문( La Arc de Triomph)은 우리 앞에 다가왔다. 프랑스 역사의 영광을 상징하는 위용으로 “상제리제”와 “오베리스크” 간 1.9 km 거리에 끝에 세워져 있다. 이곳은 매년 7월 14일 프랑스 혁명 기념일 행사를 하며 1806년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나폴레옹 1세의 명에 의해 건축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 개선문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전쟁 개선 승리의 문으로 독수리 휘장이 조각되어 있으며, 전쟁터의 지명이 문기 둥 밖같 쪽으로 새겨져 있고, 장군들의 이름이 안쪽으로 새겨져 있다. 개선문 에서 직선으로 반대편 끝에는 신도시 “La Defense”가 웅장하게 보인다. 다음에 찾아간 곳은 파라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꽁코드 광장(La Place de la Concorde)이다. 원래는 “루이 15세”광장 이었다가 1830년에 지금의 이름을 얻었다. “테뢰르” 통치 하에서는 이곳이 교수형 장소로서 “루이 16세”와 1000여 명의 사람이 처형된 곳이었다. 이곳 광장에 세워진 “오벨리스크”는 이집트의 것을 옮겨와 세운 것이다. 이것은 제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으로 그 당시의 상형문자가 탑에 그대로 새겨져 있다. 개선문이 직선거리로 1.9 km 거리에 잘 보인다. 그사이가 상제리제( Avenue des Champs-Elysee) 거리로 가장 대표적인 유행의 거리로 누구나 걸어 보고 싶다는 거리이다. 개선문을 중심으로 12개의 방사형 길 중 가장 큰 거리로 식당, 영화관, 상점 등 화려한 거리로서 노상 Caf? 가 즐비하다. 다음에는 여기서 북쪽으로 “드골가”를 지나 직선으로 보이는 신도시 “La Defense” 로 향하였다. 새로운 개선문 모양에 건축물이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있다. 양 옆 기둥과 가운데 문 위에도 모두 수십 층의 공간이 있는 새로운 타입의 오피스 빌딩 이었다. 새로운 건축술의 전시장으로 모든 건축가들이 방문하여 보고싶다는 곳이다. 광장을 중심으로 새로운 타입의 빌딩들은 은행, 호텔, 기업의 본사 등이 자리 잡은 신도시이다. 오늘이 월요일이라 베르사이유 궁전은 휴무일이다. 아쉬움이 남는다. 점심식사로 이태리아계 식당에서 이곳 음식으로 달팽이 요리와 고기요리가 나왔다. 좁고 옛날 식당 이었으나 써빙하는 젊은이의 한국말은 재치가 있어 듣는 이로 하여금 즐겁게 하여 주었다. 너무 짠 것이 흠이 였으나 맛있게 먹는 것도 미덕이다. 식사 후 2시반 부터 “Louvre(루브르) 박물관”( 관람료 8 Eu 50c)을 관람 하였다. 중점적으로 중요한 그림과 그리스 조각상 등을 2시간 정도로 둘러 보았다. Louvre 의 역사는 12세기 말에 “Philippe Auguste” 가 루브르라고 부르는 곳에 요세의 성을 축조 하였다. 2세기가 지난 후에 이 요세는 왕족의 저택으로 되었다가 경기장과 감옥으로도 사용되었다. 18세기 말에 루브르의 건축은 박물관으로 변경되었다. 왕과 교황의 소장품을 전시하기도 하였다. 1793년 8월 10일 “Museum Central des Arts” 로 개관하였다. 그 후 Napoleon 1세의 승리로 수많은 예술품이 유럽 전역으로 부터 들어왔다. 1981년에 “Mitterand” 대통령이 루브르를 예술 작품을 위한 곳으로 만들었다. 그 후로 세계에서 가장 큰 예술 박물관으로 거듭나서 매년 500만 명 이상의 방문객들로 성황을 이룬다. 그러나 Room 1, 2, 4, 6, 12의 Oriental Antiquities 의 조각품과 고대 Greece, Egypt 의 유물과 이스람 예술품은 아주 고귀한 것으로 다른 박물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러나 가장 핵심은 프랑스 화가들의 작품이다. 가장 고귀한 미술품으로는 다음에 열거해 본다. 1) Venus de Milo 100 B.C Mable , Height 202㎝ 2) Leonardo da Vinci -“ Mona Lisa” (1503-1506) 77*53 ㎝. 3) Jacques-Louis David- “The Coronation of Napoleon I” (1806-1807) 621*979㎝ 이상의 3점은 인류문화의 가장 위대한 유산으로 생각 되며, 그냥 감상하면 되며 어떠한 군더더기 설명이 필요 없다. 박물관 순례를 마치고 우리는 몽마르뜨 언덕과 성당을 찾아갔다. 몽마르뜨 언덕으로 오르는 정면에는 오후에 찬란한 태양과 더불어 “성심 성당”이 거대하게 자리잡고있다. 성당 내부에 들어가보니 너무 엄숙하고 분위기가 무겁다. 중앙 천장에는 예수의 일대기가 그려져 있어 무게를 더해준다. 누구나 조그만 양초에 2 Euro를 내고 불을 밝힌다. 그 옆 언덕으로 오르면 가난한 화가들이 모여들어 그림을 그리던 몽마르드 언덕이 나온다. 우리는 그곳으로 발길을 돌려 거리의 화가들이 지금은 일정한 장소에 모여 관광객의 초상화를 그려주는 곳으로 가 한동안 그들과 호흡을 같이하는 시간을 가졌었다. 지금도 길에 앉아 데상과 유화를 그리는 화가들의 모습은 진지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고단한 인생살이의 단면을 보여 주는 것 같기도 하다. 월요일은 휴무일이라 문화유산을 다시 볼 수 없어 유감이다. Le Chateau de Versaille( 베르사이유 궁전) 은 파리 서남쪽 23 km 지점에 있는 프랑스를 상징하는 대궁전이다. “루이 14세”가 “짐이 국가다” 라는 절대왕정 국가를 세우면서 20년에 걸처 축조한 궁이다. 그 후 “루이 16세”와 그의 왕비 “마리 앙트완느”가 영화를 누리다가 대혁명으로 비극을 맞이한 곳이기도 하다. 왕궁의 규모나 예술품 등이 100 에이커의 대정원과 더불어 문화 유산이다. 또 파리의 대표적 상징물로 Cathedral Notre-Dame( 노틀담 사원)을 들 수가 있다. 이 대사원은 성모 마리아를 위해 건축된 성당이다. 성당 내부 천정과 벽에는 성경을 조각과 그림으로 표현한 작품이 우리를 놀라게 한다. 스테인 글라스 장미 창이 너무 아름답다. 나폴레옹을 비롯한 많은 왕들이 대관식을 올린 곳으로 기록되어 있다. “빅토르 유고”의 소설과 영화 “노틀담의 꼽추” 로 세상 사람들에게 영원히 기억될 곳이다. 오후에는 “Paris Look” 라는 shopping 점에서 한시간 이상을 보내다가 호텔로 돌아왔다. 좀더 뜻 있게 보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으나 어쩔 수 없었다. 8월 30일: 오늘로서 5일째를 마지 한다. 이제부터는 장거리 버스 Tour가 시작되는 날이다. 아침 일찍 나와 호텔이 있는 마을을 산책하니 공기가 시원하고 로타리에는 아름다운 꽃이 만발하여 상쾌한 기분이었다. 아침 식사 후 08:00시에 출발. 파리에서 Brussel 로 향하는 고속도로로 나간다. 프랑스의 끝없는 평원지대를 달려간다. 산도 없고 무한대로 펼처 지는 평야에는 옥수수 밭과 건초 재배지 만이 눈에 들어온다. 버스는 최고 속도로 달려 Brussel 근교 “Waterloo”에 이르렀다. Waterloo 란 곳은 1815년 6월 18일 나폴레옹 휘하 프랑스 군이 “Wellington” 공작이 이끄는 Anglo-Dutch 군과 Prussian의 연합군과 치열한 전투 끝에 대패한 곳이다. 당시 프랑스 군대는 피비린내 나는 전투 끝에 4만9000명의 전,사상자를 남기고 패전하였다. 이곳에는 흙은 운반하여 45 m 높이로 다진 후 28 ton 이 나가는 사자상 기념비를 세웠다. 버스는 11:30분 경 벨기에의 수도이자 E.U 연합과 N.A.T.O 본부 등 유럽의 중요한 기구들이 자리잡은 국제도시인 Brussel에 진입하여 시청 앞 광장에 이르렀다. Belgium 은 면적 30.518㎢, 인구 1.015 만 명의 작은 국가이지만 강대국이다. 고풍스런 중세식 건축물과 현대적 건물이 조화를 이룬 곳으로, 시 청사는 중앙광장에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다. 브뤼쎌은 12 세기부터 상업의 중심지로 번영을 누려 왔다. 1695년 “Louis 14 세”에 의해 파괴된 후 5년에 걸처 Grand-Place(광장)가 재건되고 1402년 부터 건축한 “Town Hall” 의 전면의 고딕식 장식과 조각들은 96개의 첨탑 과 더불어 건축의 경이로움을 보여주며 관광객을 매료시킨다. 광장 주변의 꽃 시장, 그림시장, 식당, 기념품 점에는 외국인의 발길이 끊이지않고, 시장도 늘 만원이다. 광장 아래 골목 길 모퉁이에 Manneken Pis (오줌 싸개 동상)은 거리를 좀 더 좁게 하여 준다. 60㎝ 정도의 청동으로 된 소년의 오줌 싸는 모습은 모든 관광객의 사랑을 받고 있고 웃음을 자아낸다. 시내관광을 마치고 중국식당에서 5코스 요리로 식사. 12:20분 출발. 다시 고속도로를 달리어 이번에는 독일 국경을 넘어 Koeln 으로 향하였다. 도로 연변은 프랑스와 벨기에와는 다른 모습의 전원풍경이 전개된다. 검은 지붕의 독일식 주택이 언덕아래 자리잡은 도로를 따라 Rheine 강 연안으로 들어와 Meins 로 향한다. 강은 최근의 홍수로 강폭이 넓어졌고 물이 세차게 흐른다. 양안 언덕에는 봉건 영주의 중세 저택이 오후에 햇살에 빛나고 있다. 강변을 따라 “Lorelei” 언덕을 바라보며, 오늘의 숙박지인 Hoehn Hotel 에 이르니 벌써 오후 7시 였다. 좁은 구내식당에서 리즐링 와인을 맛보며 식사. 식후 산책에 나섰다가 박 동문과 시원한 맥주로 피로를 풀면서 10:30분 까지 대화를 즐기면서 하루를 마감 하였다. 8월31일: 오늘이 8월의 마지막 날이다. 아침 일찍이 산책을 나오니 공기가 시원하다. 근처 교회와 광장을 돌아보고 강가로 나오니 한산하다. 식사 후 포도밭으로 올라가니 Rhine 강이 훤히 내려다 보이고 비탈진 포도밭에는 와인용 포도가 주렁주렁 달려 있다. 08:20분에 출발 Koeln- Duesseldorf 간 유람선 선착장 3 번에 도착. 아직 이른 시간이라 소 공원을 산책하며 시인 “Heinrich Heine” 의 조그만 흉상 앞에서 휴식. 10:10분 경 유람선에 승선하여 Kaub 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코스다. 최근 홍수로 강물이 불어나 물살이 제법 세다. 큰 유람선 3층 갑판 위에 의자를 놓고 앉아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Lorelei” 언덕에 이르니 좌측 험한 바위 꼭대기 위에 깃발이 날리고, 정자가 우뚝 서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 언덕에서 아름다운 처녀의 노래 소리가 울려, 강을 내려가던 어부가 정신이 팔려 변을 당했다는 슬픈 사연을 담은 전설이 깃들여 있다. 유람선상에는 ”Lorelei” 의 노래가 울려 퍼지고 모두 합창을 하고 있었다. 아래로 내려가면서 강 중간에 섬처럼 생긴곳에 요정의 동상이 서 있었다. 강 양쪽 언덕 위에 오래된 중세 영주들의 고성을 두루 감상하며, 그 주변의 아름다운 마을을 바라보면서 한시간 넘게 유람선상에서 즐기다가 “Kaub” 에서 내려서 다시 버스를 타고 어제 투숙하였던 “Ruedesheim” 마을을 지나 이제는 중세의 도시 “Heidelberg” 로 달리었다. “Rheine”강 연안을 따라 한시간 반을 달려 하이델베르그 시내에 진입하였다. 한국식당에서 점심식사를 마치고 시청 광장으로 향하였다. 유럽의 모든 문화는 광장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언제나 먼저 광장을 찾아온다. 시청 광장도 예상대로 관광객으로 붐비고, 노점상이 가득하다. 광장 좌측으로 벗어나니 “하이델베르그 고성”이 광장을 내려다 보듯이 서있다. 이 고성은 13세기 초에 건축으로, 고딕, 바로크, 르네쌍스 양식 등 다양한 양식이 혼합되어 명소로 여긴다. 지하에는 22만 liter의 용량을 자랑하는 Wine통이 자랑 거리며, 여기서 포도주를 마시면 기념 잔을 준다고 한다. 성의 내부는 약 2시간 정도면 관람할 수 있으며, 약사의 탑, 시계탑, 제약 박물관 등이 볼만하다. 광장에서 오른쪽으로 번화가를 따라가면 유서 깊은 “Heidelberg”대학 을 만난다. 1386년에 “루프네히트 1세”에 의해 설립. 1803년에 최초로 국립대학으로 지정되어 수 많은 석학을 배출, 노벨상 각 분야에서 수상하는 학자가 많아 세계적 학문의 전당이다. 220만 권의 장서를 자랑하는 도서관이 있다. 유니버시티 광장 앞에는 대학 박물관이 자리잡고 노천 카페도 늘 만원이다. 이 도시는 인구 14만에 학생이 3만 명이 넘고 한국유학생도 많다. 거리를 활보 하면서 번화가를 지나 “네카 강”가로 나와 Alte Brueke(옛 다리)로 불리는 옛날 다리에 이른다. 다리를 건너면 “철학자의 길”로 가게 되어 이 길을 걸으면서 수 많은 독일의 철학자를 회상하여 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다리 입구의 쌍둥이 탑은 외적으로 부터 마을을 지키는 방어용이다. 대강의 시내 관광을 마치고 3시경 머나먼 스위스 Interlaken 으로 향하여 고속도로로 나와 “Freiberg” 를 지나 스위스 “Basel” 을 향하니 300 km 의 장거리 이다. 날씨가 너무 좋아 버스 밖에 지나가는 풍경도 아름답다. 독일 남부 삼림지대를 달려 스위스 국경 검문소에 이르니 여권을 심사하자고 한다. 쉽사리 통과하여 “Bern” 방향으로 달려가다 Interlaken 으로 향하니 어느덧 호수가 나타나고 “Alps” 의 눈 덮인 봉우리가 스카이 라인을 형성한다. 최근에 홍수가 나서 철도가 유실되고 다리가 끈긴 곳이 눈에 띤다. 좁은 도로를 우회하여 마침내 “Grindelwald”마을(해발 1034 m) 까지 올라와 “Eiger Bricker Village” 207 호에 여장을 풀었다. 시간이 오후 8시가 되니 선선하며 스파게티로 간단한 식사를 한 후 내일을 위해 일찍 휴식에 들어갔다. Interlaken 은 아름다운 호반의 도시로서 “Thuner See” 와 “Brienzer See” 양대호수사이 596 m 고원지대에 자리잡은 휴양 도시 이다. Oest 역에서 출발하는 기차는 최근의 홍수로 도로와 기차선로가 유실되어 운행이 정지되었다. 9월1일(목): 수준미달의 호텔에서 아침 일찍 기상. 06:40분에 출발. 서둘러서 “Grindelwald” 역으로 향하니, 역 주변의 호텔은 화려한 꽃을 밖으로 장식하여 산뜻하고 아름다웠다. 07:15분에 떠나는 산악열차를 기다리는 동안 Alps 지역의 분위기에 흠씬 젓을 수 있었다. 예전에는 Jungfrau 산악 철도와 Tunnel 이 완성되지 않아 프랑스 쪽 샤모니 알프스를 오르는 것이다. 그러나 1996년 철도와 Tunnel 이 개통되면서 이제는 대부분 이쪽으로 Alps를 찾는 사람이 대다수다. 07:20분 산악열차를 타고 Kleine Sheidegg(2061m)에서 환승하여 Eigerwand(2865 m) 역에 이르니 “Eigergletscher”(2320m) 빙하가 거대하게 형성되어 아래로 흘러 내리고, 그 아래 부분은 먼지로 검게 변하였다. 그 위로 “Jungfraujoch” 의 흰 눈 덮인 봉우리의 웅자는 태양빛에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여기서 부터 산악열차는 Tunnel 로 들어간다. 어떻게 이 높은 산의 암벽을 뚫고 공사를 하였을까? 스위스는 14년에 걸처 터널 공사를 완성하여 오늘날 유럽의 지붕을 이루는 걸작을 만들었다. Eisermeer(3160 m)를 지나 마침내 정상에 이르러 Spingks 전망대에 먼저 오른다. Elevator를 타고 수직으로 올라 밖으로 나가니 바람 한점 없고 태양이 따듯하게 비치는 설원은 천년의 신비를 간직하고 빛난다. 멀리 빙하 고원으로 흐르는 곳에는 큰 평원이 형성되고 주위의 봉우리는 흰 눈을 이고 태고의 신비를 더해준다. 아래로는 아이스 폴이 많이 형성되었다. 남쪽으로는 스위스의 산간마을이 아주 멀리 내려다 보였다. 밖으로 나아가니 “Moench” 山장으로 오르는 길이 하얗게 돋보이고 트레킹하는 사람들이 점점이 멀어진다. 우리는 산장으로 가는 길에서 돌아와 다시 얼음궁전으로 찾아가서 좁은 골목을 돌아본다. 갖가지 동물 모양, 꽃 모양의 얼음 예술품이 통로 양쪽에 이름답게 장식되고, 적당한 조명을 받아 더욱 신비스럽게 느껴진다. 좁은 통로지나 밖으로 나오니 저 멀리 정점에 스위스의 십자국기가 펄럭이고 있다. 그 앞에 서니 마치 Alps 의 모든 봉우리를 정복한양 기분이 하늘로 솟아오르는 듯하다. 스위스 국기가 꽃 친 정점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바삐 서둘러 돌아 나오니 다시 山악열차를 타기위해 기다리다 내려가는 열차를 타고 다시 Kleine Scheidegg 에 내려오니 이곳은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다. 여기서 가차를 타고 “Grindelwald” 와 “Lauterbrunnen” 두 방향으로 내려갈 수가 있다. 이번에는 올라온 방향과 반대로 Lauterbrunnen 방향으로 내려간다. 이 방향은 빙하가 녹아내려 폭포를 이루며 절벽으로 떨어져 내려오는 폭포가 수 없이 많아 환상적인 경치를 볼 수 있다. Grindelwald 쪽에서는 리프트를 타면 “First”(2168 m) 로 가고, “Lauterbrunnen” 에서 “Muorren” 으로 가면 거기서도 리프트를 타고 “Schilthorn” (2971 m) 에 올라 주변의 아름다운 자연을 볼 수 있다. 우리 부부는 “Kleine Scheidegg” 에서 열차를 간발의 차이로 노처 10분 후에 떠나는 열차를 타니 단 3명 뿐이다. 아마 다른 사람들은 놀랐을 것이다. 우리는 단둘이 큰 열차 한칸에서 좌우로 옮겨 앉으면서 창 밖으로 펼처 지는 아름다운 경치에 도취되어 근심도 걱정도 다 잃어버리고 경치를 즐기었다. 기차는 “Wengen” 에서 잠시 쉬고 사람을 태우고 내려간다. 창 밖 왼쪽으로는 수백 m 절벽으로 떨어지는 물줄기가 계속 나타나고 오른쪽으로는 언덕위로 푸른 나무가 끝없이 전개된다. 정말 환상적으로 아름다운 곳이다. Lauterbrunnen 가까이 내려 오면서 아름다운 스위스의 산간 마을이 나타나고 언덕에는 야생화의 물결이 바람에 하늘하늘 흔들리고 있다. 아름다운 Jungfrau 를 머리에 담아두고 무성한 숲을 아래로 내려다 보면서 12:10분 다른 사람들이 기다리는 역에 이르니 미안하기 그지 없다. Lauterbrunnen 역 밖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12:40분 Interlaken 시내로 나와 중식을 한 후 13:20-14:10분 까지 시계 전문점에서 쇼핑. Jungfrau에서 보낸 시간보다 쇼핑시간이 더 길다니, 주객이 전도되어 문제다. 언제나 소수의 사람이라도 명품에 몰두하는 현상이 사라지는 국민이 될 것인가? Jungfrau 는 자유여행을 하는 편이 좋다. 이번에 일주일을 연장하여 스위스를 차분하게 여행하려 하였으나 비행기 편 사정으로 접어야 했다. 국내에서도 동신 항운에서 열차표를 예약제로 살수가 있다. 우선 현지에서는 6일간 자유여행을 위해 산악열차 사용권을 190 스위스 프랑(한화로 약 850대 1)과 126.40 Euro( 한화 약 130대1)로 사서 자유롭게 열차도 타고 트레킹 코스를 따라 걸어서 산행을 할 수가 있다. Jungfrau 와 Moench 까지 걸어서 올라오는 코스도 사전에 마련하였는데 허탈하다. 우리는 오후 내내 버스로 인스브르그로 향하여 달리었다. 도로연변에는 Alps 산맥의 석회암 연봉이 병풍을 두르듯이 이어지고 2개의 호수가 좌측도로변으로 연결되어 있어 여유롭게 산밑 호수 가를 따라 아름다운 주택이 그림처럼 이어진다. Luchern 을 향하다가 오스트리아 국경 도시 St. Gallen을 향해 달린다. 국경 검문소에 이르러서야 인스브르그로 향하는 길이 폐쇄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 우리는 Muonchen 방향으로 우회하여 가다 Fuessen 방향으로 들어가서 밤 10시가 넘어 Natters 에 자리한 Sportklause Hotel 17 호에 휴식. 9월2일: 여행이 어느덧 중반을 넘어서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 밖으로 나오니 도로 가에 면한 곳이라 차량왕래가 심하다. Hotel 양쪽에 Tennis Court 가 있고 Health Center 가 언덕 위에 올라가는 곳에 자리잡았다. 08:00시에 출발. 오늘은 오전에 인스브르그를 보고 오스트리아에서 이태리로 넘어가야 한다. 인스브르그 시내로 들어갔다. 예전에 한번 왔던 곳이라 낮설 지가 않다. 인스브르그는 합스브르그왕가가 이곳에 있었던 15,16세기에 황금시대를 거처 “막시미리안1세”(1493-1516)때에 최 전성기를 이루었다. 이시기에 무역과 건축술이 발달하여 수 많은 유적이 이때에 건설된 것이다. 타원형 모양의 구 시가지는 14-15세기의 중세건축물이 “Inn”강, 마르크트그라빈, 부르크 그라빈, 헨리 거리로 둘러 쌓여 있다. 시내 어디서나 “이천산”의 석회암으로 된 정상을 볼 수 있다. 도심의 좁은 골목은 보행자 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프리드리히 거리를 따라 구시가지 중심으로 올라가면 “황금지붕”이 나온다. 1500년경 후기 고딕 양식의 이 건물은 막시밀리안 1세와 밀란 공작의 딸 “마리아 비앙카”의 약혼을 기념하기 위해 신궁전에 추기로 지은 것이다. 3450장의 금을 입힌 동판으로 지붕을 이어 금빛으로 빛난다. 이거리 양쪽에는 중세의 가옥들이 지금까지 건재하고 있다. 발코니에 특이한 부조가 장식되어 있는 “카충하우스”가 가장 인상적이다. 또 1360년에 세운 시의 탑은 56m 높이로 시내를 조망하고 있다. 황금 지붕 옆 오른쪽 골목으로 따라가면 대성당이 나타나고 화려한 바로크 양식으로 “St. Jakob” 사원이 웅장한 모습을 드러낸다. 마리아 테레지아 거리는 인스브르그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로 옛 건물이 즐비하다. 1964년과 1976년 동계올림픽이 이곳에서 개최되어 6만 명의 관객을 수용하는 경기장이 특징이다. 이 도시를 대강 둘러보고 9시경 “Venezia”(베니스)로 향하는 고속도로로 나가 Trento 를 향해 차를 달린다. 좌우 도로변에는 석회암반으로 솟아오른 Alps 연봉이 마치 눈이 쌓인 것처럼 보인고, 그 아래로는 푸른 초원이 전개되고 옥수수 밭이 끝이 없다. Venezia로 가까이 오면서 사과 밭과 포도밭이 끝없이 이어진다. 13:00시가 되어 Venezia 의 도심을 관통하는 S 자형 수로 선착장에 도착하여 유람선에 승선하였다. 폭이 3 km 정도 되는 바다 같은 수로에는 양안에 중세의 건물이 각각 특징 있게 들어차있다. 30여분을 유람선을 타고 가서 우리는 중국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였다. 340만 평의 베니스 도시는 물고기 모양으로 600년 전에는 118개의 섬으로 만들어 졌고,인구 19만 명 이다. 그들은 전쟁을 피하기 위하여 물의 도시를 건설한 것이다. 나무로 바다 물을 막아 물을 퍼내고 개펄에 백향 나무를 촘촘히 박아 다시 물을 퍼내고 십자 모양으로 나무를 박아 그 위에 대리석을 쌓아 올려 지은 건축물로 도시가 꽉 차있고, 교통수단은 모두 배를 이용한다. 그 동안 490여 개의 섬이 있었으나 30개가 사라졌다. 이 도시는 해상무역의 중심지로 411개의 아치형 다리가 소로에 건설되었고 배가 그 밑으로 다닌다. 소금, 가면, 자수가 3대 특산품으로 중세부터 무역의 중심지다. 다음에는 콘돌라 6인 승을 타본다. 콘도라는 검은색으로 칠해졌고 옛날 페스트가 창궐할 때 죽은 사람의 시체 운반도구로 사용되었으나 지금은 관광용으로 360대가 성업중이다. “산,마르코” 광장 앞에서 탑승하여 좁은 수로로 골목으로 들어가서 사람들의 주거지, 호텔, 공장지대의 좁은 골목을 ㄷ자로 돌아 30분만에 제자리에 온다. 모든 출입은 수로로 하게 되어 있어 좁은 수로에 출입구가 나있다. 물은 더러운 편이나 냄새는 별로 없다. 노를 젓는 사공의 안내로 주거지의 수로를 한바퀴 도는 관광이다. 수로 관광을 끝내고 “두칼래 왕궁” 앞 광장에 이르니 비둘기와 사람이 넓은 광장에 가득하다. 1층은 둥근 고딕식 장식의 둥근 기둥이 늘어서있고, 2층은 크로바식 장식으로, 3층 이상은 이스람식 건축양식으로 되어있다. 왕궁은 옛날에는 죄수를 심판하는 곳으로 사용되었다. 건물 뒤로는 재판을 받은 죄수가 지하감옥으로 가기 위하여 수로 위에 있는 다리를 건너가게 되어있다. 이 다리를 건너 지하감옥으로 가면 세상과 하직하기 때문에 “통곡의 다리”라고 불러졌다. 이 지하 감옥에서 “카사노바”가 탈출한 것은 유명한 일화가 되어있다. 왕궁 앞에는 이집트 “아렉산드리아”에서 가져온 탑 기둥 2개가 서 있다. 하나는 “성 테오도로스” 상이고 다른 것은 날개가 달린 “베니스 사자상”이다. 옆에는 “산 마르코 대 종탑”이 96.5 m로 솟아있어 그 위에서 전 베네치아 시내를 조망할 수 있다. 탑 건너에 있는 “산 마르코 대성당”은 비잔틴 양식과 중세의 여러 양식이 혼합된 웅장한 장식 건축물로 대단히 아름답다. 안으로 들어가면 천장에는 예수의 일대기가 모자이크 형태로 그려저 있고, 아주 엄숙한 분위기이다. 그 앞에 시계탑은 에펠탑을 본 따서 건축 되었으나 지금은 수리 중이다. 비둘기와 관광객이 넘처 흐르는 광장 주위는 13세기의 고 건축물로 둘러 쌓였고 아래층은 각종 선물상가가 성업중이다. 광장에는 음악이 울려 퍼지고 야외 카페가 성업 중이다. 광장 2층 건물에 있는 유리공예품 공장을 견학. 900도나 되는 고열을 가해 유리를 자유자재로 주물러 각종 유리제품을 만드는 “장인”의 시범을 보았다. 그들이 생산해내는 각종 제품은 너무 아름다운 색갈이 나서 정말 사고 십은 예술품이다. 붉은 색 갈의 투명한 와인잔이 가장 탐나나 한쌍에 120-240 유로로 비싼 편이다. 오후 6시에 수상 택시를 타는 관광에 나섰다. 베니스의 S자의 대수로 4km에 저택과 중요건물이 즐비한 100 m 내외의 대운하 수로를 관광. 1200-1500년에 지어진 3-5층 건물이 양쪽에 계속된다. 유명한 “티알토” 다리를 지나면서 처칠, 바이런, 괴테, 헤밍웨이, 등이 머물거나 살았던 건물과 “마르코 폴로”가 태어난 집 등 건물로 꽉 찬 수로를 따라가며 “산타루치아” 중앙 역을 지나면서 안내자의 선창에 따라 “산타루치아” 노래를 부르면서 해가 지는 오후를 물의 도시에 정취에 빠져 마음마저 풍성해 졌다. 바다로 나가면서 지는 해를 바라보며 선착장에 이르니 버스기 기다린다. 이렇게 물의 도시를 감상하면서, 이태리의 무한한 관광자원에 그져 놀라울 뿐이다. 어떻게 이렇게 물위에다 도시를 건설할 기술이 그 당시에 있었을까?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무한한 관광자원이 국력이 되고 소득원이 되니 부럽다. 이런 관광은 대개 선택으로 별도로 1인 30 유로를 내야 한다. 기분 좋은 관광을 끝내고 Locanda Da Vito Hotel 112 호에 들어오니 너무 기분이 좋고 평생 잊을 수 없는 날로 기억되리라. 9월3일: 오늘은 다시 Firenze(Florence)로 가기 위해 08:00시에 출발. Bologna 를 거처 A1 Highway 를 줄기차게 달린다. Tunnel 도 많고 도로 양쪽에는 처음에는 산맥이 나타나더니 이내 옥수수 밭 등 끝없는 구릉지대가 나타난다. 도로가 직선으로 너무나 양호하다. 떠난지 한시간이 지나자 갑자기 천둥이 치면서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버스 canopy 에서 비가 새기 시작한다. 그러나 잠시 후 비는 멎고 언제 그랬더냐 싶게 날씨가 맑아졌다. 버스는 계속 달려 “아페니노”산맥을 넘으면서 구릉지에는 오리브 나무, 포도밭이 수없이 나타났다. 12:30분이 되어 Firenze 시내에 들어와 현지 안내자를 만난다. Firenze 는 르네상스의 발상지이다. 예술과 여러 분야의 천재들을 배출해 중세의 문화를 꽃피게 한 곳이다. “레오날도 다 빈치”, “미켈란제로”, 시인 “단테”, “브레넬레스치”, “마키아벨리”, “안제리코” 수사 등 수많은 천재들을 배출하였다. 사상과 예술의 본질을 키워 순수한 예술작품과 건축물들을 이곳 한군데에다 집중하여 만들게 하였다. 이들은 “르네상스 시대”를 이끌었고, “그리스” 문화를 능가하는 세계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우리는 먼저 두오모 (대주교가 있는곳을 두오모라 부른다) 광장으로 향하였다. 이곳은 종교 중심지이자 정치 중심지로 “Vecchio” 궁 (현재는 시청)과는 100 m 이웃에 있다. 두오모 광장에는 “부루넬리스치”가 설계하고 160년에 걸 처 지은 “Santa Maria 聖堂” 과 둥근 지붕의 “쿠폴라”, 오래된 세례당( Battistero) 의 3개의 문과 우아함을 자랑하는 “Giotto” 종탑은 세공 기술을 이용한 건축으로 축조되었다. 이들 건축물은 7세기 전후에 세워졌다. 천연 대리석으로 쌓아올린 전면은 놀라울 정도로 정교한 예술품이다. 대성당은 길이 153 m, 넓이 38 m로 가장 아름다운 조각품들은 “Arnolfo Cambio”의 솜씨이다. 현대에 이르면서 전면을 고딕 양식으로 보수하여 더욱 위풍 당당하고 웅장함을 보여준다. 두오모 위 옆의 종탑은 “조또”에 의해 건축되어 30년에 걸 처 완성되었으며 이탈리아 건축물가운데 가장 고전적이고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양식이 융화된 걸작이다. 시노리아 광장은 정치적 중심지로 8세기 동안 도시를 형성해 왔으며, 이 광장은 피렌체의 역사적 사건을 겪어 온 곳으로, “마키아 벨리”가 집정관으로 이 건물에서 집무하였고 교황 ”레오 10세”가 거처 갔고 개혁파가 사형에 처해진 곳이다. 이 광장에는 메디치가의 대공인 “코시모 1세”의 기마 상이 있으며, “냅튠신의 분수”(암만나띠의 작품)는 아름다운 모습의 여인들이 청동상으로 조각되어 있다. 이어 “미케란제로”의 “다비드상” 모조품(원본은 아카데미아 박물관 소장)과 거대한 모습의 “헤라크레스” 조각을 볼 수 있다. 이곳에는 그 외에도 뛰어난 걸작품이 주위에 산재해 있는 조각의 거리이다. 시내를 관광하고 “미케란제로의 언덕”에 올라 다시 한번 시내의 웅장한 건축물들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고, 이 언덕에도 사람들로 붐 빈다. “성 십자가 성당”은 “라르놀프”가 건축한 고딕양식으로 “갈릴레오”, “단테”, “미케란제로”의 무덤이 있다. 중요한 것만을 보기에도 시간이 부족하여 책과 사진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점심식사를 마친 후 이곳에 유명한 가죽제품 전문점을 둘러보고 다시 Roma 를 향해 떠났다. 4시간이 더 걸려 로마시내에 들어와 “소나무”식당에서 한식식사를 한 후 “Centrale Hotel” 120 호에서 휴식을 취하였다. 9월4일: 오늘은 05:30분 기상하여 서둘러 준비하여 07:30분에 “폼베이”로 향하는 날이다. 서기 79년 8월 24일 3만 여명이 생활하며 전성기를 누리던 도시이다. 이 도시는 여기서 8 km 나 떨어진 곳에 있는 “베스비우스” 화산의 폭발로 도시 전체와 2만 여명의 주민이 화산재와 화산자갈과 독가스에 뒤덮여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였다. 옛 전성기에 화려한 건물과 개인 주택과 상가 등이 번영한 도시였다. 그 후 1700년에 첫 발굴이 있었고, 1800년대 들어와서 과학적인 발굴을 하기 시작하여 현재도 발굴이 계속되고 있다. “바다의 문”을 들어가면 “아폴로 신전”과 광장이 나타난다. 그 앞에 넓은 광장은 풀만이 무성하다. 길은 중잉로가 넓게 직선으로 나있고 신전 쪽으로도 직선도로가 나있다. 신전쪽으로 난 길을 따라간다. 이쪽에는 목욕탕이 나오고, 당시에 사용하던 욕조가 그대로 발굴되었고 그 안 욕실에는 벽에 아름다운 조각상이 둘레 사면 벽에 걸려있고, 찬물이 나오는 대리석 욕조도 원형대로 발굴되어 있다. 천장에는 태양이 들어오고 수증기가 빠져나갈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방에는 그림들이 붉은 색으로 그려져 있는 벽이 그대로 남아있다. 화산재에 뭍 친 채 2000여년 간 화석이 되어 발굴된 사람의 시신 2구가 유리관에 보관 전시되고 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저택과 옛 상점, 빵을 굽던 화덕, 맷돌, 취사를 위한 시설도 그대로 발굴되었다. 군데 군데 우물이 길가에 있는 것도 보이고 납으로 된 수도관이 노출된 곳도 있어 그 당시도 수도 물을 사용 하였다는 사실이 입증된다. 이 도시에는 놀랍게도 홍등가 골목도 있고 그 앞에는 고급 상점들이 있던 모양도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 고대도시의 화산재 위에 또 하나의 도시가 형성되었다는 사실이 입증 되었고 그 건물 한채가 중앙로 끝 언덕에 남아있다. 옛날 영화로웠던 도시가 순식간에 죽음의 도시로 변하면서 아비규환의 울부짖음이 드려오는 듯하다. 우리는 이 폐허의 도시를 뒤로 하고 “Fantasia” 식당에서 스파게티, 새우, 오징어 튀김, 과일의 이태리식 점심을 한 후 기차역으로 이동하여 13:15분 “소렌토” 역으로 향하여 30분을 달리었다. “나폴리”만과 “산타 아가타”사이에 위치한 아름다운 “Sorrento” 는 2000년 전부터 알려진 작은 도시이다. 아름다운 풍경과 맑은 바다, 온화한 기온은 “돌아오라 솔렌토”라는 노래가 나올만한 낭만적인 도시이다. 바다로 향한 언덕에는 소나무와 더불어 고급주택이 바다쪽으로 즐비하게 늘어서있다. 앞에는 바다 뒤에는 과일나무, 오리브 나무가 하늘과 땅, 바다와 어울러져 한폭의 그림 같다. 광장에는 프란체스코 성당이 있고 정원에는 두개의 기둥이 받치는 창문과 테라스는 나폴리만의 파노라마처럼 보인다. 선착장에서 우리는 “Capri” 섬으로 향하는 유람선에 승선 하였다. 이섬은 길이 6km,폭2km, 1만2천명이 사는 꿈의 섬이다. 30분간을 바다로 나가면서 아름다운 항구 “Sorrento” 를 멀리서 바라볼 수 있었다. 배는 카프리섬에 접안하여 그림 같은 해안선을 따라 접근하였다. 선착장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Anacapri” 정상으로 향하였다. 바위산을 빙빙돌아 절벽위로 난 좁은 길을 굽이굽이 돌아 우리는 리프트 타는 곳으로 올라왔다. 한사람씩 리프트에 올라 앉아 바위정상으로 향하는 것은 천상으로 올라가는 기분이다. 바다 위에 떠있는 섬에는 그림 같은 별장 저택이 발아래 펼처지고 정상쪽에는 이름다운 수목이 가득하다. 아래는 아름다운 꽃 위를 지나가는 곳도 있어 기분 좋은 고공비행을 하는 것 같았다. 정상에 올라 바다쪽으로 한바퀴 도는 코스는 환상적인 경관이다. 멀리 바다에 떠있는 바위섬은 마치 오륙도 인양 바라보면 숫자가 더해지는 듯하다. 바위섬을 한바퀴 돌면서 바다에 점점이 떠있는 유람선과 푸른 바다와 Anacapri 는 하나의 자연의 조화를 이루었다. 다시 되돌아 내려와 이번에는 Napoli 로 향하는 유람선을 타고 아름다운 3대 미항의 하나로 50분간을 달리었다. 오후 5시가 넘어 Napoli 항구에 들어와 유람선에서 관광객을 쏟아낸다. 기원전 470년에 건설된 도시다. 그 후 여러 왕조의 지배를 거치면서 1860년 나폴리가 이타리아 왕국에 편입될 때 까지 전성기를 마지한다. 1799년 나폴레옹이 나폴리를 정복하고 나폴리 공화국을 선포한다. 그 이전부터 “예수 누오보 성당”, 왕궁, “산 마르티노” 수도원 등이 세워졌다. 그 중에 해안가에 있는 “가스텔 누오보” 성은 장중하고 무겁다. 다섯개의 탑이 둘레에 서 있어 위엄을 더해 주나 우중 충 하였다. 산타루치아 항구 앞에 선 “가스텔 누오보”는 노르만디의 요세로서 “페데리코 2세”가 파수대를 설치하고, 그 뒤 “카르로 디안조 1세”가 왕궁으로 삼았다. 이곳에는 노르만의 파수대, 소성당, 수도사들의 독방이 그대로 있으며 지금은 토속박물관으로 사용된다. 이런 것을 보고 머나먼 Roma로 귀환 길에 오르니 어느덧 해가 지고 소나기가 내린다. 9월 5일: 오늘은 바티칸시를 방문하는 날이다. 날씨가 너무 좋아 마치 축복 받은 듯하다. 09:00시가 못되어 박물관 앞에 이르니 줄이 장사진을 이루었다. 1 km 이상 줄이 이어나가있으니 줄을 서서 기다리는 수밖에.10:00 시경이 되어 입장이 된다. 바티칸은 0.44㎢로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이다. “미리오”산과 “자니꼴로” 언덕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Roma와 바티칸은 1500년 이상을 공존해 왔다. 로마에서는 많은 순교자들이 교회를 위해 희생했고, “콘스틴틴” 황제는 A.D 337년 기독교를 공식 인정 하였고 이에 바티칸은 로마의 권력을 인정하였다. “네로”황제는 바티칸 언덕에 원형 경기장을 완공 했고, 이집트에서 가져온 “오벨리스크”를 세웠다. (현재 이 오벨리스크는 성 베드로 광장에 서있다). 초기 기독교 인들은 이곳에서 고문을 당했고 “성 베드로”는 A.D 64 년에 “네로” 황제가 기독교를 박해할 당시 순교하였다. 그 후 “콘스탄틴” 황제는 성 베드로 무덤 위에 교회를 세우도록 땅을 제공 하였다. 그 순교 장소가 기독교인들의 성지로 발전해서 광대한 성역을 형성 하였다. 이로서 바티칸시는 7억 카도릭 교도들의 영원한 성지가 되었다. 성 베드로 성당에 들어가면 오른쪽에 “미케란 제로” 조각 작품 “피에라”가 유리보호관 속에 있으며 그가 25세에 완성하였으나 1972년에 훼손 되었다. 본당 오른쪽 위에는 베드로의 동상이 있는데 순례자들이 발가락을 만져 닳아 버렸다. “베르니니”가 설계한 바로크 양식의 천개(天蓋)가 교황이 집전하는 제단위에 있어서 성당 전체를 압도한다. 앞에는 베드로의 무덤이 지하에 있다. 바티칸 박물관은 바티칸 궁의 우측에 있는 것으로 유명한 그리스 로마의 고대 조각 작품들이 전시돼있다. 박물관내에는 1500년대 “율리우스2세”때 작품인 “라오콘”,고대 로마 조각품중에서 가장 뛰어나다. “벨베데레”의 “토르소” 도 기원전 1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나 불명확하다. 고대 로마 시대나 그리스 시대의 조각상은 머리모습, 상체의 근육, 몸과 하체의 근육의 표현은 생동감을 더해준다. 조각품을 감상하고 벽거리 작품들이 걸려있는 회랑을 지나며 창문을 통해 바티칸의 정원을 볼 수 있었다. 이곳을 통하여 “시스타나” 성당으로 들어갔다. 이 성당은 천장 40.5 m, 높이 20.7 m, 폭 13.20 m 로 1400년경 “죠반니 돌치”에 의해 건축되며 그 후 벽을 12 부분으로 나누어 왼쪽은 “모세”의 생애, 오른쪽은 “예수”의 생애를 “페르지오”, “핀투라끼오” “보티첼리”, “시뇨델리”, “기르란다이오” 등의 화가들이 각각 그들의 작품을 그렸다. “보티첼리”의 그림”그리스도의 유혹”, “반역자의 처단”, “기르란다이오”의”성 베두로와 앤드류”, “페르지오”의 “천국의 열쇄를 넘겨받는 성 베드로”의 그림이 프레스코화로 장식된 벽면은 너무 화려하여 어떠한 말로도 표현하기가 어렵다. 더구나 “미케란 제로”가 교황”율리우스2세”를 위해 1508-1512년간 4년 8개월에 걸처 천정에 그린 “천지창조”의 천정 벽화와 1540년 “바오로 3세”를 위해 전면에 그린 대형 프레스코화인 “최후의 심판”은 391명의 사람이 그려져 있고 지옥에 떨어지는 사람들이 미노스에게 인도되고 있다. 이 그림들은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바라보고 있노라면 ?을 잃을 지경이다. 어떻게 그 높은 천정에 아름답고 화려한 그림을 그릴수가 있을까? 그는 이 그림들을 완성하는데 너무 정력을 기울여 37세라는 나이에 요절하였다 하니 그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천정 벽화를 그릴 때 특별하게 마련된 비계에 몸을 의지하고 혼자 작업을 하였으며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고 한다. “시스티나”성당의 천정과 벽면의 그림은 밖에서 미리 예비지식을 설명듣고 들어오게 되어 감상에 많은 도움을 주었으나 천장을 보려면 목이 불편하고 무척 힘이 든다. 천정의 그림은 성서의 창세기가 주제로 1) 신비한 빛과 어둠의 분리, 2) 해와 달의 창조, 3) 물을 가르다, 4) 아담의 창조, 5) 여인의 창조, 6) 실락원, 7) 카인과 아벨, 8) 대홍수, 9) 술취한 노아 등이다. 베드로 대성당 앞으로 나오니 수 많은 관광객이 운집해 있다. 이 광장은 폭이 240 m 의 타원형으로 베르니니( Bernini)가 세운 웅장한 원주로 둘러 쌓여있다. 가운데 중앙에는 1586년에 이집트에서 옮겨온 “오베리스크”가 세워져 있다. 4줄로 도열된 244개의 도리아식 원주 위에는 140분의 성인들과 순교자들이 조각되어 있으며, “마데르노”와 “베르니니”의 작품이다. 성당에 정면에서 오른쪽 위로 보이는 곳에는 삼각형 지붕 위에 교황이 선출되었음을 알리는 흰 연기가 나오는 굴뚝이 있고, 그 아래 4층 건물에는 교황의 집무실이 있다 로마시대에 공회당으로 가는 중간에 공회당 터에서 하수구 뚜껑으로 발굴된 사자모양의 돌 조각 입에 손을 집어 넣어 보기위해 모두들 즐거운 표정으로 줄을 서서 기다린다. 다음에는 “트레비 분수”로 갔다. 대리석 사이로 솟아나는 물은 도시를 우아하고 경쾌하게 하여주는 율동이며 많은 유적들 앞에 있는 분수들은 한층 의미를 더해준다. “트레비 분수”는 “트립톤(넵튠의 아들)”이 이끈 조개모양의 마차 위에 “대양의 신”이 중심에 서있고 177년 중엽 고대 로마의 수로인 “처녀샘”이 끝나는 곳에 “니콜라 살비”에 의해 제작된 것이다. 영화 “라 돌체비타”에서 여주인공 “아비타 에그버그”의 연기로 유명해 졌다. 돌아서서 어깨너머로 동전을 던지면 로마에 다시 돌아 온다는 전설이 서려 있다. 주의에는 관광객이 넘치고 이이스크림이 맛 있어서 2-3.8 유로를 내고 색색의 아이스크림을 맛보며 즐거워한다. 이곳을 벗어나 골목을 따라가면 시청 광장이 나타나고 언덕에 조각작품과 더불어 세워진 시청 건물이 이타리아 국기와 더불어 자랑거리이다. 관광의 나라답게 너무나 과거와 현대가 함께하는 영원한 도시에 어울리는 건물이다. 길을 따라 걸으면서 공회당 유적지로 이동한다. 팔라티노와 캄피돌리오 사이에 건설한 공회장은 세계정복을 하려는 로마인들의 정치, 경제, 종교의 중심지가 된다. 이 폐허의 터전에서 그 당시에 역사를 유추해 본다. 현란한 조각품으로 만든 “세베리우스의 개선문”(승리의 문)을 들어오면 왼쪽으로는 “원로원”이 있다. 승리의 문을 지나 내려가면 “신성한 길”이 나오고 옛날 승리자 “씨이져”와 “크레오파트라”가 개선하던 길이다. 오른쪽 길 옆에는 기원전 29년 그가 시해되어 화장되었던 장소가 보존되어 있다. 신전 가운데 “시투르누스 신전”은 기둥만 남아있으며, 안토니우스와 파우스티나 신전은 그대로 보존되어 원형에 가깝게 남아있다. 공회당을 뒤로 하고 우리는 “코로세움” 경기장에 이른다. 본래는 “플라비오의 원형극장”으로 72년 “베스파시아누스” 시대에 건축 되었다. 완공 축제 때에는 5000마리의 맹수가 희생되었고 523년 “데오도시우스” 황제 때 까지 맹수나 검투사들의 시합장 이었다. 9월6일: 3일이나 머물던 Roma 를 떠나 Pisa 로 가는 날이다. 아주 시원치 않은 호텔식사와 잠자리에 마음이 상해 불편하다. 그 동안 Paris 에서 부터 10일간이나 함께한 Antonio 기사가 어제 저녁 작별을 고하고 오늘 아침 다른 곳으로 떠났다. 정말 유럽의 골목을 야간에도 너무 잘 찾아가는 베테랑이다. 일주일전 홍수로 인해 인스브르그로 가는 길이 막혀 뮨헨 방면으로 해서 Fuessen 으로 돌아가는 코스에서 밤이 어둔데도 산길을 찾아 밤 10시가 넘어 호텔로 찾아가는 놀라운 사람이다. 쭈리히 공항까지 담당하기로 되었는데 갑짜이 회사지시로 Branco 로 바뀌는 바람에 불편하다. 오늘은 로마를 떠나 피렌체로 가는 도로를 달려간다. 도로 우측으로는 대리석 채취광산이 보이고 석회석 암봉으로 이루어진 산이 하얗게 보인다. 4시간 30분이나 걸려 13:30분에 Pisa 에 입성. 샤틀버스를 갈아타고 피사 입구에 이르러 중국 식당에서 점식 식사를 40분간 가지니 비교적 양호한 중국식이다. 식사 후 걸어서 Pisa 로 간다. 노점상들이 들어찬 거리를 걸어간다. 사탑이 있는 도시는 토스카나 지방 피사주의 수도이다. 중세에는 해양도시 국가로 강한 나라였으나 1905년 피렌체에 정복 되면서 소도시로 변하였다. 과학자 갈리레오, 조각가 조반니의 탄생지이다. 두오모 성당과 세례당 등 유명한 중세 풍의 건축물아 웅장하게 자리잡고 있다. 피사의 탑은 1173년에 세워질 당시부터 쓰러질 정도로 기울어져 있었다. 충적토로 이루어진 토양이 탑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것이다. 1989년에는 거의 5.5 m나 기울어져 접근이 금지됐다. 10년 이상 과학적인 보수공사를 한끝에 최근에 다시 공개되고 지금은 3층까지 세척공사가 진행중이다. 50 m의 둥근 탑에는 창문과 주변에 조각장식이 다채롭게 되어있고 너무나 기하학적으로 탑이 기울어져 놀라울 따름이다. 매일 100명 만아 내부를 관람할 수 있다. 그 앞에 두오모 성당은 이스람 양식이 가미되었고 세례당은 건너편에 세워져 있어 나란히 쌍벽을 이룬다. 이 건물들은 피사의 상인들이 지은 것이다. Pisa 관광을 마치고 다시 제노아로 향하였다. 아페니노 산맥을 넘으면서 오리브 밭이 보이고, 다음 부터는 터널의 연속으로 제노아 시에 이르니 좁은 협곡지형의 산기슭에 아파트가 즐비하고, 척박한 땅으로 보이나 오른쪽으로 항구가 보인다. 부연 안개로 바다 시야가 막히고 볼 것이 없다. 제노아는 중세의 도시로 상업, 무역, 공업의 도시로서 소득이 높다 하나 주거 환경은 좋은 편이 아닌 것 같다. 지중해 해안 도로를 수십 개의 터널의 연속으로 Nice 로 가는 길로 이어진다. 오른쪽 산록엔 각종 온실이 계단식으로 되어 있다. 이곳이 각종 꽃의 향기를 추출하여 향수를 만드는 곳이다. 마침내 이타리아 국경을 넘어 Nice 시내로 들어갔다. 좁은 도로를 가까스로 빠져 나와 좁은 계곡사이로 난 길을 끊임없이 달리어 오후 8시가 되어 시골 같은 산골로 계속 들어가니 Terme 라는 호텔이 나타나고 버스가 들어갈 수 없는 곳에 이르니 산골의 밤은 깊어 가고 3호실에서 밤을 보냈다. 9월7일: 새벽 4시경 천둥 번개소리에 잠이 깨었다. 전기마저 나가니 칠 흙 같은 어둠이 엄습했다. 천둥 번개는 산골의 호텔을 삼킬 듯이 치면서 비가 쏟아 졌다. 한동안 내리던 비가 뜸하더니 전기가 다시 들어왔다. 6시가 넘어도 밝을 기미가 없다. 아침 식사가 만족하니 부드러운 분위기로 돌아갔다. 여행객의 마을을 조금만 읽어도 괜찮다. 07:45분 출발. 어제 깊이 들어갔던 도로를 다시 나와 Nice 시내로 나와 Monaco 방향으로 향하였다. 지중해 해변을 끼고 돌면서 바다에 면한 해안가로 Monaco 시가 모습을 나타내면서 빡 빡한 고층 건물과 옛 건물이 조화를 이루어 지중해의 푸른 바다와 하모니를 이루었다. 세계에서 바티칸 왕국 다음으로 작은 나라이다. 모나코 땅은 12세기 Genoa에 지배 밑에서 많은 투쟁 끝에 “Charles 1세” 가 모나코를 세우고 1524년 Burgos 조약에 의거 모나코는 스페인의 보호령이 되고 1633년에 “Honore 2 세” 를 모나코 왕으로 승인, 1641년 Peronne 조약에 의해 프랑스의 보호를 받게 된다. 1911년 1월 5일 “Albert I 세”가 모나코 헌법을 통과시켜 “Rainier 3 세” 가 1949년 5월 9일 왕위에 올라 비로소 국가 체제가 가추어 졌다. 산과 바다 사이에 위치한 이 나라는 1.5㎢ 땅에 인구 3만 명으로 그 중 왕족이 4500명에 이른다. 국가수입으로는 카지노 山업과 관광 산업이 주력이다. 오랜지 색과 노란색을 띤 구 시가지의 건물, 도박의 천국인 이 나라는 1989년 Rainier 3세 의 통치 40년을 맞이 하였고 지난 봄 그의 서거로 Albert 왕자가 승계하였다.. 그 유명한 “Grace Cary”명 배우와 국왕의 결혼은 세기의 로맨스로 풍자 되었으나 왕비는 2명의 공주와 왕자를 낳고 의문의 사고로 사망 하였다. 국왕부부의 묘는 “St. Nicolas” 성당 안에 왕비와 나란히 대리석 밑에 이 세상에서의 영화를 뒤로한 채 영민하고 있다. 우리는 이 왕국으로 들어오는 길목에서 비싼 주차료를 물고 바닷가 성곽 밑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에스카레이터를 타고 “Nicolas” 성당 광장으로 나와 먼저 성당을 참관한다. 이 성당은 1875년 1월에 건축을 시작하여 1884년에 완성하였다. 네오-로마네스크식의 화려한 양식으로 되었고 내부는 제단, 주교 석, 성모 마리아의 모자익 상, 세례 소 등이 화려한 장식으로 되어있다. 성당 옆 좌측 길을 따라 오르면 왕궁이 나온다. 좌측 광장에는 요새를 지키던 대포 등 무기들이 전시되어있고 왕궁 정문에는 흰 제복을 입은 근위병이 근무중이다. 이 왕궁 “Throne Room” 에서 “Rainier 공과 Grace Cary”가 세기적인 결혼식을 거행한 곳이다. 외부로는 화려하지 않으나 우측은 지중해 바다가 깊숙이 들어와 있고 완전히 요새화 된 곳이다. 왕궁 건너에는 국립 박물관이 자리잡고 있다. 박물관 앞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모나코 도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언덕과 바닷가 고층 빌딩은 바닷가에 정박한 요트와 더불어 부를 상징한다. 길을 따라 내려가면 성곽 초소가 군데 군데 나오고 요새 밑으로 내려온다. 다시 아름다운 공원을 돌아가면 니콜라 성당 앞에 이른다. 여기서 City Tour를 하면 30분 만에 이 나라 전체를 한바퀴 돌아 제자리에 온다. 참으로 아담하고 아름답고 누구나 한번 찾아와 풍요로운 마음을 느껴보기에 충분하다. 오전 11:30분에 모나코 전체를 두루 돌아 보고 차를 타고 Nice 휴양지로 향하였다. 이곳은 모나코와 더불어 북 유럽 특히 영국의 부호들이 멀리 1300 km를 날아와 겨울을 보내는 세계적인 리조트 휴양지이다. 이곳 광장에서 한시간 반의 자유로운 시간을 갖고 여유 있게 해변을 산책해 본다. 자갈 밭 해변은 파도가 거세지더니 이내 비가 내린다. Macdonald 집으로 가 해변을 바라보며 여유롭게 점심을 하고 다시 해변가로 나온다. 오후에는 다시 이태리 Milano로 향하여 또다시 장거리 투어에 나선다. Jenoa 까지 어제 오던 길을 되돌아 간다. 제노아 근방에서 휴식을 취하고 Milano 시에 들어오니 체증이 심하다. 전차가 다니고 도로는 혼잡하나 두오모 성당 광장에 이른다. 성당은 전면을 수리 중이라 가려놓아 유감이다. 영국의 St. Paul, 바티칸의 Bedro, 스페인의 Servia. 여기 Milano 성당이 세계의 4대 성당으로 일컬어 진다. 탑이 모두 50여 개로 탑마다 꼭대기에 성인들이 조각되어 있고, 전면 모두가 천연 대리석으로 섬세한 장식으로 되어 있어 더욱 놀랍다. 시청 앞 광장으로 이동하여 “스카라” 극장에 이르니 이 도시를 설계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동상이 자리잡고 있다. 어디를 가나 광장이 모든 문화의 중심지이다. 건너편 “Galleria Arcade”로 들어가 밀라노 최고의 명품상가를 둘러 보았다. 다시 두오모 광장으로 오니 밀라노를 평정한 “가리발디” 장군의 동상이 위풍 당당하게 지키고 있다. 19:00시경 중국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마치고 Mercure Hotel 201 호에 투숙 하였다. 9월8일: 오늘이 마지막 날이다. 비교적 편안한 밤을 보낸 후 07:50분에 이태리에서 알프스를 관통하는 고속 도로를 달려 “Como Lake” 가 보이는 호수를 지나면서 맑은 호수와 Alps 산록의 조화를 창 밖으로 감상 하면서 국경선을 통과한다. 세관 신고로 10분 간 지체. 스위스는 E.U 가입국가가 아니라 국경 통과 시 세관검사를 거치고 화폐도 “Swiss Franc”을 쓴다. 유로 화가 안 통해 불편하다. 09:00시 국경을 넘어 175 km 의 세계에서 가장 길다는 “코타드 터널”을 지나면서 14분이나 소요 되었다. 알프스의 암 봉이 주위에 나타나면서 칼날처럼 보인다. 얕은 도로변 언덕에는 그림 같은 녹지대에 목조 주택이 점점이 나타났다. 주변 언덕에는 푸른 비단처럼 잔디가 푹신하게 깔려 있는 듯이 보인다. 11:30분에 “Luchern” 시내에 들어오니 붐 빈다. 알프스와 “비에르 발트스태더” 호수를 안고있어 매력적인 도시이다. 16세기의 스타일로 그려진 벽화와 조각품이 광장과 주변 건물 외관을 장식하여 고풍스럽게 보인다. 시내는 상점과, 각종 의류, 화장품, 기념품 점으로 가득하다. 호수에는 유람선이 한가롭게 떠다니고 호수 주변으로 전통의 스위스 풍 건축물과 지중해 양식의 경관이 어울려져 아름다운 도시 미관을 자랑한다. 우리는 걸어서 스위스 용병들의 기념물인 “빈사의 사자상”을 찾아갔다. 대성당을 따라 뢰벤거리를 300m 올라가면 작은 공원에 암벽에 조각되어 있다. 자연석에 조각되어 있는 이 사자상은 1792년 프랑스 혁명시 “루이16” 가 있던 궁전을 지키다 전사한 800명의 스위스 용병을 기리는 뜻이 담겨져 있다. 이 근처에 대사원, 빙하공원, 교통 박물관이 산재해 있다. 중식은 한국식당에서 가졌으며 이 주인이 인터라겐과 루체른에서 한국식당을 운영하며 이곳을 방문하는 한국인에게 편의를 제공한다. 식사 후 4시까지 자유로운 시간을 가진다. “Busherer” 스위스 시계 전문점을 방문하여 이곳 특산품을 볼 수 있었다. 각종 스위스 시계, 등산용 칼, 이곳 특산품의 명가였다. 우리는 이곳을 나와 근처 기념품 상가와 각종 부틱크 상가를 한시간 넘게 돌아보고 “Kapelle Bruedke” 에 이르렀다. “카펠 다리”는 1333년에 만든 다리로 기와 지붕이 이어진 목조로 된 루체른의 상징물이다. 길이 200 m, “The Chapel Birdge and Water Tower”를 14세기에 건설하였다. 이곳은 시 요새의 일부분이고 285 m 의 다리 지붕 밑에는 111장의 삼각형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당시의 중요 사건과 루체른의 수호 성인의 생애가 그려져 있다. 17세기의 “하인리히 베크만”의 작품인 팔각형의 수탑이 중간에 서 있다. 종각과 고문처로 사용된 흔적이 있다. 1993년 8월17일 화재로 111개 “Bridge Painting” 중 81개가 타버렸다. 2002년 루체른 시 당국에서 복원공사를 하였다. 시내를 관광하면서 중앙 역으로 가니 이곳에서 국내 12곳과 연결되는 기차가 출발하는 교통의 요지로서, 밖에는 각 지역으로 출발하는 버스가 역 Terminal 숫자와 일치하여 운행되고 있어 아주 편리한 것 같았다. 호수 가에 앉아서 14일 간의 바쁜 유럽의 일정을 되돌아 보았다. 호수에는 아주 큰 백조 가 물가에서 조그만 물고기를 잡아먹고 있다. 이렇게 큰 놈은 처음본다. 멀리 알프스의 연봉이 호수 건너로 보이고 하얗게 눈을 이고 있다. 16시에 다시 중앙광장에 모여 “Zurich”로 출발. 루체른에서 50 km 떨어진 스위스의 가장 큰 도시로 금융, 경제의 중심지. 아름다운 “Zurich” 호수와 리마트강 주변의 중세의 건물, 길드하우스 들이 현대식 쇼핑거리와 조화를 이루는 곳이다. 스위스 맛 요리의 고장, 미술품 경매장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시내를 관통하여 철도 역으로 가는 길은 교통 체증이 심하다. 베란다에서 오후를 즐기는 노부부의 모습도 한가하다. 공항에 17:40분에 도착. 로마부터 2박3일을 동행한 기사와의 작별을 고한다. 18:40분 세관 통과. 21:30분에 겨우 이륙. KE 918 기로 6000여 마일을 비행, 11시간 만에 인천공항에 안착 귀국. 그 동안 KRT 여행사의 좋은 기획과 우리를 안내한 노련한 장 경진 양의 노고에 감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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