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경북 포항일대의 문화유적
경북 포항 일대는 한반도의 호랑이 꼬리부분에 해당하며, 해가 가장먼저 뜨는 해돋이 고장으로 오랫동안 사랑을 받아왔다.
조선 후기의 선비 우담 정 시한이 평생 몇 차례나 이 지역을 탐방하여 그의 평생에 “산중일기”란 기행문을 남기었다.
이번에 그의 여정을 따라 내연산 보경사, 비학산 법광사, 옥산 서원, 독락당, 정혜사, 양동 마을, 오어사 등을 답사하면서 선현의 발걸음을 따라가 보기로 한다.
또 호미곳 해돋이 마을에서 등대와 박물관을 둘러보고 바닷가를 산책해 본다.
영천에서 28번 국도를 타고 경주로 들어오면서 보문단지에서 일박하고 7번 국도를 따라포항 시내로 들어와 동선을 따라 먼저 오어사를 둘러본다.
1) 오어사(吾魚寺)와 동종(銅鐘): 경북 문화재 자료 제 88호, 보물 제 1280호
포항시 남구 오천읍 항사리 34
경주로 가는 7번 국도를 22km 정도 가다 동국대 병원 못 가서 형산강의 형산 대교를 건너가 구룡포 방향으로 간다. 이어 906번 지방도로로 들어가 오천 파출소 지나 929 지방도로 가면 안내판에 따라 오어사에 이른다.
오어사는 삼국유사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원효대사와 혜공 스님이 이곳에 개울에 와서 물고기를 잡아 먹은 후 바위에 용변을 하였는데, 혜공이 “그대의 용변은 내(吾) 고기(魚)를 먹고 눈 거요”라고 말했던 고사에서 “오어사”로 부르게 되었다 한다. 그 후 오어사는 오랫동안 번창하다가 소실되어 사라지고 없었다. 그 후 1961년 정부에서 오어사 계곡을 막아 저수지를 만들어 넓은 인공호수가 생겼고 절이 복구되어 지금의 호반에 새로 자리잡게 되었다.
지금의 대웅전을 제외하고 모든 건물이 최근에 지어진 것이다. 대웅전은 영조 17년(1741년)에 중건한 것이다. 대웅전의 지붕은 연꽃 봉오리로 끝을 마감한 내부의 공포(貢布)가 화려하고 국화와 모란을 새긴 정면의 꽃 창살이 두드려져 보인다. 정면의 가운데 칸에 딸린 세 짝의 문 구조가 아주 특이하다.
뒷산인 운제산(雲梯山)의 혜공, 의상 대사가 머물렀던 옛날 암자는 이제 기록에만 남아있고 지금은 자장, 원효의 두 암자만 남아있다.
오어사에서 호수건너로 보이는 바위 벼랑은 수직으로 되어 있어 봄이면 진달래가 아름답게 피어 수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또한 이 절에 남아있는 오어사 동종은 보물 제 1280호이다. 이는 신라 범종의 전통을 계승하였고, 명문에 고려 고종 3년(1216년)이라는 조성 연대와 대구 동화사(桐華寺)의 고승 순성대사(淳誠大師)와 주조 기술자인 거장 순광(順光)의 이름이 남아있다. 종의 표면에는 보살모양의 천의(天衣) 자락을 휘날리는 비천상(飛天像)을 비롯한 섬세한 문양 등 뛰어난 조형미를 자랑하는 고려 동종의 하나이다.
이 동종은 1995년 11월 절앞 저수지 공사 도중에 발견되었는데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당시에 국립 경주문화재 연구소에서 보존처리 과정을 거친 후 1997년 7월에 다시 오어사로 돌아온 것이다.
호수 위의 원효교는 건너 원효암을 연결하는 길이 118.8 m, 폭 2.0 m, 주 탑 높이 15.05 m, 주 탑 사이 폭 82.4 m로 아주 멋진 사장교 출렁다리로 이 일대를 명승지로 만들어 주었다.
2) 호미곳 등대와 등대 박물관: 경북 기념물 제 39호.(1982)
포항시 대보면 대보리 221
조선시대에는 이곳을 장기곳이라고 불렀다. 이곳은 당시에는 말들을 기르는 목장이었고 바람이 세차게 부는 바닷가라 한양에서는 아주 먼 땅이고 유배지였었다.
고산 윤 선도도 이웃 고을인 영덕과 기장에서 귀양살이를 하였고, 다산 정 약용도 처음에는 이곳으로 유배생활을 왔었다. 다산은 그 후 황 사영(黃嗣永) 백서사건에 다시 서울로 압송 되었다가 또 전남 강진으로 이배되었다. 그 후 대동여지도를 만들기 위해 고산자 김 정호도 장기 곳과 죽변의 지형을 관측하느라 여러 차례 이곳에 들렀다 한다.
예전에 이곳 장기곳은 밤이면 오징어 잡이 배가 불을 밝히고 바다로 나갔다가 만선이 되어 포구로 돌아오는 조그만 포구에 지나지 않았다. 이 한적한 동해바다 튀어나온 끝 뭍에 당시에 등대가 들어섰으니, 이는 이조 말 광무 7년(1903년) 인천 앞바다 팔미도에 처음 등대가 세워진 이 후 2번째로 등대가 건립 되었다.
이 등대는 대한제국 융희(隆熙) 원년 (1907)에 일본 선박이 대보리 앞 바다의 암초에 부딪혀 침몰한 것을 계기로 지어 졌다. 프랑스인이 설계하고 중국인 기술자가 시공을 맡아 1908년 12월에 준공되었다. 높이는 26.4m, 밑 둘레 24m, 윗 둘레 17m의 팔각형으로 서구식 건축양식의 최초의 등대이다. 기초에서 부 터 등탑의 중간 부분까지 곡선을 그리면서 폭이 점점 좁아지는 형태이며, 다른 고층 건물과는 달리 철근을 사용하지 않고 벽돌로만 쌓은 것이 특징이다. 등대 내부는 6층으로 되어 있는데 각층의 천장에는 대한 제국의 상징인 오얏꽃(李花)모양 문양이 조각되어 있다. 작은 철제 계단을 오르면 등명기와 몇가지 기계가 들어찬 4층에 이른다. 여기서 밝힌 불빛은 65리 밖에서도 보이고, 고동소리는 300리 밖에서도 들을 수 있다고 한다.
등대와 더불어 나란히 있는 등대박물관은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등대에관한 사료와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1985년 개관한 박물관에는 국내자료 591점, 국외자료 119점 등 모두 160 가지 710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어 우리나라 등대와 항만의 역사를 한눈으로 볼 수 있다.
2층 팔각 돔형 건물에는 2개의 전시실이 있다.
1층에는 등대에 쓰였던 여러가지 장비들과 실물들이있다. 등명기, 도등, 섬광기, 조난발신기, 음파표지, 전파표지, 기상관측기, 등대 일지 등 600여점이 전시되어 있다.
2층 전시실에는 사진과 문헌자료를 모아놓은 공간으로 우리나라의 등대가 위치힌 곳을 사진으로 볼수있으며, 외국의 등대모습의 사진도 볼수 있다.
밖에는 해상공원이 마련되어있고 신년이 되면 해돋이로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명소가 되었고, 바닷가에 여러가지 시설은 수많은 관광객의 방문장소로도 유명하다.
또 2000년이 되면서 “Millenium 2000” 기념관이 들어서 있어 이곳의 관광자료와 각종 전시물이 볼거리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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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등명기 설명문)
(사진: 초창기 사용했던 등명기)
3. 내연산 보경사(寶鏡寺)
신라본기(삼국사기 권4)에 진평왕 7년(585년)에 지명법사가 창건하였다고 기재되어 있다. 그가 중국에서 공부할 때 가져온 가저온 팔면보경을 묻고 절을세우면 왜구의 침입을 막고 통일을 이룬다는 뜻으로 동해안 내연산 아래 연못에 보배거울을 묻고 그 위에 금당을 세우고 절을 지은뒤 사찰 이름을 보경사라 이르렀다고 한다. 절을 다 지으니 진평왕 25년 (603)이 돠었다.
고려 고종 1년 (1214)에는 원진국사(圓眞國師)가 승방 4동과 정문을 중수하였고, 범종, 법고도 완비하였다. 조선조 1677~95년 사이에 대대적인 중창이 이루어져 대규모 사찰로 변모하였다. 그 뒤 영조 1년 (1725)에 중수후 계속해서 사찰이 확대 건축 되었다.
우선 입구의 천왕문을 거처 들어간다. 이곳 천왕문에는 경내를 수호하는 수문장격인 사천왕상이 봉안되어 있다. 사천왕이란 동서남북의 지국천왕, 증장 천왕, 광목천왕, 다문천왕을 말하며 이 사천왕은 인간들이 착한일을 하면 낙을 주고 악한 일을 하면 고(苦)를 주는 선신으로 불법을 옹호하고 정도를 행하는 사람을 보호한다는 의미로 사찰에 들어가려면 누구나 통과해야만 하는 곳이다.
이 천왕문은 조선 숙종 34년(708)에 중건, 여기에 모셔진 사천왕상은 불기 2324년(1980)에 새로 봉안한 것이다. 이곳을 지나 긴 숲길을 따라가면 대웅전에 이른다.
a) 대웅전: 경북도 문화재 자료 제 231호
대웅전은 조선조 숙종 3년(1677)년에 새로 지었고, 1932년에 와서도 대대적인 중수를 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집으로 앞의 칸은 통칸으로 처리되었고 바닥에는 마루를 깔았다. 기단은 화강석으로된 장대석을 3단으로 쌓고, 가장자리로 덮개돌을 둘렀으며 윗쪽 면은 1978년에 와서 벽돌을 깔고 고친 것이다. 부처를 모신 불단은 고주에 의지하여설치하고 삼존불상을 모시었고 상부에는 낙양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보개(寶蓋)를 설치하였다.
(사진:상-보경사 5층석탑. 하-적광전 전경)
b) 적광전(寂光殿): 경북 유형문화재 제 254호
조선조 숙종 3년(1678년)에 중건한 것으로 주존인 비로자나불과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의 삼존불을 모시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5량 가 다포집으로 조선 중기의 양식을 간직하고 있다. 보경사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주춧돌형이 청옥(靑玉)으로 만들어 졌다.
c) 5층 석탑: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 203호
이 탑은 고려시대의 5층 석탑으로서 높아 약 5m이다. 적광전 앞에 있기 때문에 금당탑으로 불린다. “보경사 금당탑기”에 의하면 도인 각인(覺人) 문원(文遠)이 고려 현종 14년(1023)에 건립하였다 한다.
지대석이 4개, 그 위에 기단 받침이 2개로 모두 새로 보충된것이다. 기단의 면석은 4개로 남쪽과 북쪽의 2개의 면석이 동서 면적 사이에 끼여 있으며, 동서 면석은 새로히 보충된것이다. 1976년에 석탑이 보수되었는데 당시에 기단과 4, 5층 몸돌, 5층 지붕들이 보충되었다.
d) 영산전: 영산전은 석가세존이 생존해 계실 때 인도 영취산에서 제자들에게 설법을 하셨는데 약하여 영산이라고 한다. 이곳 영산전에서는 가운데 석가세존, 좌우에 사자를 탄 문수보살(文殊菩薩)과 코끼리를 탄 보현보살(普賢菩薩)을 모시고 그 좌우에 16 아라한(阿羅漢)을 배열하였다. 그래서 일명 “십육라한전”이라고도 한다. 아라한이란 도를 깨달은 성자를 말한다.
e) 팔상전(八相殿): 석가세존의 일대기를 8가지로 나누어 그것을 팔폭의 화면으로 그려논 전각이다. 이곳 팔상전에는 석가모니불은 가운데 주존으로 모시고, 왼쪽에 미륵보살, 오른쪽에 제화보살(提華菩薩)을 모시고, 양 주변으로 팔상탱화(八相橕畵)를 배열하였다. 이 전각은 조선조 숙종 3년(1678)에 지총(志聰)스님이 화주하여 세웠다.
(사진: 팔상전 안에 석가의 일대기를 그린 팔상도)
f) 원각국사비(圓覺國師碑): 보물 제 252호
이 비는 고려 고종 11년(1224)에 만들어진 원진국사 승형(承逈)(1172~1221)의 탑비이다. 그는 속성이 신씨이며 자는 영희로 희양산 봉암사 동순사에게 나가 승려가 되었고, 금산사 계단(戒壇)으로부터 구족계를 받았으며, 그 후 지눌선사로부터 불법을 배웠고 고종 2년(1215)에 대선사에 임명되어 보경사에 주지로서 부임하였다. 그는 “능엄경”에 능하였고 1221년 7월에 팔공산 동화사 염불암에서 입적한 후 국사로 추증되어 원진이란 시호를 나라에서 내리었다.
탑의 크기는 높이가 183㎝, 너비 104㎝, 두께 17㎝로 용 모양의 비머리가 없고, 비석의 양끝을 귀접이한 것과 둘레의 독특한 당초문의 문양을 장식한 것이 특징이다. 비신에는 상단에 “원진 국사비”라는 제액이 있고 비문은 단정한 해서체로 쓰여져 있다. 비문은 이 공노(李公老)가 지었고 글씨는 김 효인(金 孝印)이 썼다.
g)원진국사 부도: 보물 제 430호
보경사 담장 뒤로 200 m 올라간 숲길로 오르면 만날 수 있다. 평면 8각을 기본으로 한 팔각형 당형부도이며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높이는 4.5m다.
팔각을 기본으로 중심에 장대석을 이용하여 넓은 탑구를 마련하고, 중앙에 사각형으로된 지대석을 놓았다. 하대석은 3단의 팔각 석재로 되어 있다. 밑의 2단은 표면에 아무것도 새겨 넣지 않았고, 상단 1석에만 연꽃무늬 돌로 이어진 32장이 조각되어 있다. 중대석은 팔각으로 표면 중앙에 있는 1단의 받침을 중심으로 33 장의 연꽃무늬를 새겨 위로 향한 연꽃으로 삼았는데 이 부도의 조성 연대로서는 이래적인 형식이다.
상륜부는 8개의 위로 향한 연꽃무늬 위에 사방에 꽃 모양을 새겨넣은 둥근모양의 복발(覆鉢)이 있고, 다시 위로 향한 꽃의 돌을 놓고, 보주(寶珠)를 얹었으며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부도의 조성 연대는 고려 고종 11년(1224)의 원진국사비를 건립한 연대로 추정할 수 있다.
4) 법광사(法光寺)터: 사적지 제493호. 경북 포항시 북구 신광면 상읍리 619
신광면 비학산 자락에 넓은 곳에 법광사터가 자리잡고 있다. 법광사는 신라 진평왕때 원효대사가 왕명에 의해 처음 건립하여다고 전해내려오며 당시 왕실 사찰이었다고 한다.
그 후 흥덕왕 3년(828년)에 향조(香照)와 원적(元寂)이 재산을 회사하여 석가모니 사리탑을 세우고 사리 22과를 봉안하였다고 한다.
조선 영조 22년(1746)에 5층 석탑을 고치는 과정에서 22과의 석가의 진신사리가 발견되어 동함(銅函)을 만들어 탑 2층에 봉안하였다. 고종 24년(1887년)에 3층만 남아있던 석탑을 고치는 과정에서 1750년에 수리한 후 기록한 “舍利塔 重修記”가 발견 되었다.
그 뒤 다시 화재로 사찰과 부속건물이 소실되고 현재 유물로는 석탑과 지름 2.2m, 둘레 7.3m인 연화석불좌대(蓮花石佛座臺) 및 높이 1.4 m, 지름 1.8m, 원경 0.5m인 쌍두귀부 등이 있다.
1968년 밥광사터를 사적으로 지정하여 발굴하면서 탑속에서 탑지석(塔誌石) 2개가 발견되어 법광사의 오랜인 내력을 밝혀주고 있다. 탑지석은 현재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5) 영일 냉수리 신라비:
이 비는 1989년 3월 신광면 냉수 2리에서 발견되어 현재는 냉수리 주민 쎈터 옆에 비각을 마련하여 보존하고 있다. 현재 발견되어 보존하는 비석 가운데 가장 오래된것으로 알려져 있다. 건립 연대가 계미년으로 되어 있으니 이는 신라 눌지왕 27년(443년) 또는 지증왕 4년(503년)으로 보는 두가지 견해가 있다.
진이 마촌의 절거리(節居利)라는 사람이 소유하던 재물을 둘러싸고 분쟁이 발생하자 당시 갈문왕(葛文王)을 비롯한 신라 중앙의 귀족들이 합의하여 분쟁을 해소하였다는 사실이 비문에 주된 내용으로 새겨져 있다. 보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편이라, 10여자 정도가 정밓한 판독이 요망되고 있다.
전체적인 모양은 아래부분이 넓고, 위로 가면서 너비가 줄어드는 사다리꼴 모양의 사각형으로되어 있고, 이 비는 앞면, 뒷면, 윗면 등 3면에 글자가 새겨진 특이한 형태로 앞면에 12행 152자, 뒷면에 7행 59자, 윗면에 5행 20자로 도합 231자가 새겨져 있어 판독이 되고 있다. 글씨는 예서채로 새겨져 있다.
비문의 내용은 크게4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울진 봉평 신라비와 연관된 내용도 담고 있어 5~6세기 신라사 연구에 귀중한 기초자료가 되고 있다.
6) 양동 마을: 1884년 중요 민속자료 지정
아침 일찍 양동마을 초등학교 앞에 이르니 사람은 하나도 없고 아침 안개와 개울건너 아랫마을 초가집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는 아주 옛날로 돌아간 듯한 환상적인 풍경이다. 거기다 가을에 이엉을 새로 이어 지붕마다 이슬에 젓어 노란색을 진하게 띠어 대조적이다. 개울 양쪽으로 마을이 형성 되오 있어 우선 오른쪽 산밑 마을로 가면서 차례대로 한집씩 돌아보기로 한다.
이 마을은 경주 손씨와 여주 이씨를 중심으로 형성된 씨족마을로 500여년이 넘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양민공(襄民公) 손 소(孫 昭)<1433~1484>가 혼인하여 처가가 있는 이곳에 들어온 것을 계기로 경주 손씨가 이것 양동마을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여주 이씨는 찬성공(贊成公) 이 번(李 蕃)<1463~1500>이 손 소위 사위가 되면서 이 마을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혼인한 신랑이 처가를 따라가서 사는 일이 많았다. 그 동안 두집안에서는 우재(愚薺) 손 중돈(孫 仲暾)과 회재(晦齎) 이 언적(李彦迪)<1491~1553>등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다.
마을 앞으로는 안강평야가 넓게 펼쳐져 있으며 산줄기에 마을이 들어선 모양새가 독특하고 아름답다. 설창산에서 뻗어내린 네 줄기의 능선과 골짜기를 따라 150 여채의 옛집들이 굽이굽이 들어서 있는데 이 중에는 임진왜란(선조 25년-1592년) 이전에 지어진 기와집이 4차나 남아있어 특히 가치가 있다.
집들은 대개 “ㅁ”자 모양인데 이는 조선 중기 영남지방의 일반적인 가옥 형태이다. 기와집 주변의 초가집들은 옛날 기와집에 살았던 양반들이 거느린 노비들이나 소작농이 살았던 집이다. 그러면 이제 중요한 자료로 남은 집을 하나하나 방문해 본다.
a)심수정(心水亭): 이 정자는 희재 이 언적의 동생인 이 언괄 (李 彦适)<1494~1553>을 추모하기 위해 1560년에 지은 것으로 당시 이 언괄은 벼슬을 마다하고 형 대신 노모를모시었다. 여주 이씨 집안의 종가인 “무첨당”과 “향단”을 바라보기 위해 건물을 “ㄱ”자로 꺽고 그자리에 누마루를 두었다. 이렇듯 집이 바라보는 방향은 조상들이 집을 지을 때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던 부분이다. 마을 안팎에 있는 10개의 정자중 규모가 제일 크며 “안락정”과 “강학당”이 세워지기 전까지 이 마을의 서당 역할을 하였다. 조선 철종때 화재로 소실된 것을 1917년경 새로 지었다.
b) 두곡 고택(杜谷 古宅): 이 집은 영조 9년인 1733년에 이 식중(李 湜中-1711~1777)이 분가할 때 지은것이다. 후에 이 언괄의 14세 손인 두곡 이 조원(李 祖源)의 소유가 된 후 후손들이 살면서 “두곡고택”이라 불렀다. “ㅁ”자 모양을 하고 있는 살림채를 중심으로 남쪽으로는 대문채가 있고 , 북쪽으로는 곳간채들이 겹으로 둘러서고 있어 마을에서 규모가 매우 큰 주택에 속한다. 안채 바로 뒤의 작은 별채는 딸을 기르기 위한 공간 이었다.한쪽은 곳간이고 한쪽방은 집안의 딸이 사용하던 방으로 출거 후에도 친정에 오면 이방을 내주었다고 한다.
c) 근암고택(謹庵 古宅):
이 집은 정조 4년 1780년 경에 이 정수(李 鼎壽)<1758~1784>가 지은 것으로 그의 증손자인 근암 이 희구(李 熙久)의 호에서 집의 이름을 따왔다.마을의 여느 집들과 달리 안채의 담장밖에 따로 사랑채가 서있는 점이 특이하다. 이 사랑채는 운래 안채와 직각으로 놓여 있다가, 소실된것을 20세기 초에 새로 지었으며 현재 위치로 옮긴것이다. 사랑채 뒤로는 비탈진 지형을 그대로 살려서 만든 후원이 있어 마을 전경과 주위의 자연을 감상할 수 있다.
d) 상춘헌 (賞春軒):
이 집은 희재 이 언적의 5세손인 동고(東皐) 이 덕록(李 德祿)<1677~1743>이 영조6년(1730)경에 지은것으로 후손인 상춘헌 이 석찬(李錫贊)의 호에서 집의 이름을 따왔다.
이 덕록의 증손이며 대사간을 역임한 이 정덕이 동쪽에 있는 사당을 지었다. 사랑채의 마당 한쪽 비탈진 곳에 계단식 정원을 조성하고 꽃나무를 심어 운치가 있다. 작은 규모에 필요한 모든 시설을 배열한 짜임새가 돋보인다.
e) 사호당 고택(沙湖堂 古宅): 이 고택은 사호당 이 능승(李 能升)이 현종6년(1840)에 지어 살던곳으로 그의 호에서 집의 이름을 따왔다. 주로 “ㅁ”자 모양으로 이루어진 이 마을의 다른 집들에 비해 “ㄱ”자의 안채에 “ㄱ”자의 사랑채가 잇대어져 있는 점이 특이하다. 안채와 사랑채가 맞닿아 있는 부분이 곳간방이 있는데 이곳에는 문으로 빠져나올 수 없는 커다란 항아리가 들어 있다. 독을 먼저 넣고 집을 지은 것인데, 곡식이 돈과도 같았던 시기에 안주인의 위세를 짐작할 수 있다.
f) 서백당(書百堂): 중요 민속자료 제 23호
이 집은 경주 손씨의 대종택으로 양민공 손 소(1433~1484)가 만호 류 복하(柳 復河)의 외동딸과 결혼하여 이 마을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자리를 잡은 곳이기에 유서가 깊다. 지관이 이 집터에 세명의 현인이 탄생할 것이라고 예언 했는데, 손 소의 아들인 우재 손 중돈과 외손자인 희재 이 언적이 여기에서 태어 났다. 사랑채에 걸린 “서백당”이라는 현판은 참을인자 백번을 쓰며 인재를 기른다는 뜻이다. 사랑채의 뒤쪽 높은곳에 있는 건물은 사다이며, 마당의 향나무는 500여년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g) 대성헌(對聖軒): 이 집은 영조 8년(1782)에 이 언적의 11세손인 이 능단(李 能亶)이 분가하면서 지은 것이다. 순조때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를 지낸 이 재직(李 在直)이 살던 집이다. 우리의 옛집들은 빼어난 모양의 산 봉우리를 바라보고 자리한 경우가 많은데 그러한 산봉우리를 안대라고 부른다. 이 집은 안대를 성주봉으로 한 것인데 , 집의 이름도 “성주봉과 마주하고 있다”는 뜻으로 “對聖軒”이라 하였다. 사랑채의 두칸 대청 앞쪽에 여덟짝의 문을 달아 4짝씩 접어올리게 돼있는 점이 특이하다.
h) 무첨당(無尖堂): 보물 제 411호
무첨당은 희재 이 언적의 종가 별채로 그의 맏 손자인 무첨당 이 의윤(李 宜潤)의 호에서 집의 이름을 따왔다. 뒤쪽의 높게 서있는 건물이 사다이고, 동쪽에 서 있는 건물은 안채, 사랑채, 행랑채로 이루어진 본채이다. 무첨당은 제사를 지내는 제청의 기능이 강했으며 남성들의 독서와 휴식, 손님 접대를 하는 큰 사랑채로 쓰였다. 대청의 온른쪽 벽에 걸린 “좌해금서”라는 편액은 흥선대원군이 내려준 글씨이다.
i) 향단(香壇): 보물 제411호
이 집은 희재 이 언적이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할 때 병환중인 모친을 돌볼 수 있도록 중종임금이 지어준 것이다. 이 언적이 한양으로 올라가면서 동생 이 언괄에게 물려준 후 여주 이씨 향단파의 종가가 되었다. 이 언괄의 손자인 향단공 이 의주의 호에서 집의이름을 따왔다. 조선 중기의 지어진 살림집의 전형이라기 보다는 집주인의 개성을 반영한 독특함과 화려함이 돋보이는 집이다. 행랑채는 지금의 위치가 아니었는데 1976년 보수할 때 위로 올라 붙어 안채와 근접하게 되었다.
j) 관가정(觀稼亭): 보물 제 442호.
이 집은 조선 중종때 청백리 였던 우재 손 중돈이 분가 하면서 지은 것이다. 관가정은 “곡식이 자라는 모습을 본다”는 뜻으로 누마루에 올라 보면 그 이름에 걸맞게 곡식이 풍성한 들판과 강의 모습이 넓게 펼쳐져 장관을 이룬다. 대청이 매우 낣은 것이 특징인데 살던집이 후대로 오면서 제사에 필요한 공간 확보를 위해 변형된 것이다. 대문과 담은 우너래 없었으나 1981년에 새로 만든 것이다.
6) 옥산서원(玉山書院) 과 독락당(獨樂堂):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a) 옥산서원: 사적 제154호
이 서원은 조선시대의 성리학자인 회재 이 언작(1491~1553)선생을 제향하고 후진을 교육하기위해 조선 선조 5년(1572)에 설립되었으며, 그 이듬해에 임금이 서우너이름을 내렸다.
경내에는 사당인 체인묘, 강당인 구인당, 기숙사인 동재, 민구재와 서재인 암수재, 무변루, 역락문, 어서각, 장서각인 청분각과 회재 선생의 신도비가 있다.
건물 곳곳에 는 아계(鵝溪) 이 산해(李山海), 석봉(石峯) 한 호(韓濩), 추사(秋史) 김 정희(金正喜) 등의 명필이 쓴 현판들이 있다.
이 서원은 조선 후기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서 제외된 47개의 서원중 하나로, 각 건축물들의 건축적 의미는 크지않치만 공간적 배치방법이 돋보인다.
옥산서원에서 북쪽으로 700m떨어진 곳에 회재의 별장이자 서재였던 독락당이 있다.
b) 독락당(獨樂堂): 보물 제413호.
이 건물은 옥산서원 뒤편에 있으며 회재 이언적이 조선 중종 27년(1532)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지은 사라채이다.
조선 중종 11년에지은 안채에 부가하여 지었으며, 일명 옥산정사(玉山精舍)라고도 한다.
낮은단위에 세워진 정면 4칸, 측면 2칸의 이 건물은 옆면에서 벌 때 여닯 팔자 모양을 한 팔작(八作)지붕이다. 대청은 3칸ⅹ2칸이고 나머지는 칸을 막아1칸ⅹ2칸 온돌방으로 하였다.
건물은 둥근기둥을 세우고 대청 천장은 뼈대가 모두 노출된 연등천장이다. 이 건물 옆쪽 담장에는 좁은 나무로 살을 대어 만든 창을 달아서 대청에서 살창을 통해 앞 계곡의 냇물을 바라보게 하였다. 이는 아주 특별한 공간구성이며, 뒤쪽의 계정(溪亭) 또한 자연에 융화시키고자 한 의도를 잘 드러내 주고 있다.
7) 정혜사지 13층 석탑(淨惠寺址十三層 石塔):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이 석탑은 흙으로 쌓은 1단의 기단위에 5.9m의 높이로 13층의 몸돌을 올린 모습이다.통일 신라 시대의 삭탑 중에서는 그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이다.
1층 몸돌이 거대한데 비해 2층부터는 몸돌과 지붕돌 모두가 급격히 작아져서 2층 이상은 마치 1층 탑 위에 덧붙여진 머리 장식처럼 보인다.
탑의 1층 몸체에는 높이 131㎝, 폭 166㎝인 모서리 기둥이 있고, 중앙에는 불상을 모시는 감실(龕室)이 있다. 2층부터 너비와 높이가 갑작스럽게 줄어들었으며 몸체돌과 지붕돌이 같은 돌로 만들어져 있어 그 양식이 특이하다.
지붕은 경사가 느린데 모서리는 볼록하고 처마 층급 받침은 3단이다. 석탑 주변에는 주춧돌과 기왓장들이 흩어져 있고 정혜사지라 전한다.
통일 신라 시대 9세기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되며 13층이라는 보기 드문 층수에, 기단부 역시 일반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당시의 석탑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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