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0. 12
우리 문화 유산 답사
경기 고양 지역
(13)
글, 사진:김 한 종
(사진: 덕양산 행주 대첩비)
경기도 고양군은 한북정맥의 뻗어내린 울대리에서 북한산 백운대와 도봉산 인수봉을 일으켜 세우고 경성 외곽의 성벽을 이루고 벽제관을 지나 홍제원 고개를 넘어야 오늘의 한성에 입성하게 되었다. 그래서 옛날 조선조에 명나라 사신이 벽제관에 머물다가 홍제원을 넘어오게 되어 당시 홍제원 아래에 독립문을 세우게 되었다.
그러던 고양은 지금은 시가 되어 서울과 구파발에서 연결되고, 파주, 문산을 가는 통일로가 뚫리면서 일산 신도시가 들어서고 또 전철이 연결되면서 서울로 진입이 편리해 지면서 지금은 화정리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일산 일대에는 신도시가 들어서서 서울의 베드타운 역할을 하고 있다. 6.25 전 후 구파발 너머 삼송리 일대는 북한산에서 발원하는 창릉천과 곡릉천이 한강으로 흘러 들면서 넓은 평야를 이루니 삼송리와 일산 일대는 곡창지대로 되면서 일산 일대의 쌀은 아주 질이 좋아 진상미로 사용하였다 한다. 그러던 곳이 노태우 정부 때 대규모 서울 주변 개발 계획에 따라 일산신도시가 개발 되면서 고양 삼송리는 한때는 6.25때 북괴의 침략으로 인해 완충지, 방어벽의 구실로 개발이 되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지하철의 연장으로 삼송리역이 생기면서 차량기지가 들어서고 통일로 일대에는 개발붐이 일어났다.
원래 “고양(高陽)”이란지명은 따듯한 고을 이란 뜻으로 이조 태종 13년 1413년에 처음으로 탄생한 마을 이었다. 이후로는 삼국시대엔 한강유역을 차지하기 위한 각축장이었으며, 그로 인한 사연인지 이 지역에는 조선조부터 수많은 묘지가 생겨나서 조선 중기 이후에 홍제원과 벽제에는 화장장이 들어서고 사람이 죽으면 홍제원 너머 화장장에서 화장을 하다가 서울이 팽창하고 홍제원이 서대문에 편입되어 홍제동이 되면서 화장장의 기능은 벽제로 이전 되었다. 그로 인해 의정부로 향하는 39번 도로에는 서민들의 안식처가 되면서 수많은 공동묘역이 조성 되었다.
이는 아마 이 지역이 경성에 가까워 옛날 고려시대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릉이 능골에 들어선 이유일 것이다. 그 후 월산 대군묘가 능골에 또 들어서고 조선조 초기에 왕릉으로 지금의 구리시의 동구릉이 만들어 졌으나 그 후로는 조선시대의 왕릉들이 이 지역에 자리잡게 되었다. 고양 용두리에 서오릉이 들어서 창릉, 익릉, 명릉, 경릉, 홍릉 등 5개의 조선조 왕릉이 들어섰고, 그보다 조금 북으로 떨어진 원당리에 희릉, 효릉, 예릉의 서 3삼릉이 자리잡아 이 고장이 명실 공히 조선 왕릉의 음택이 서린곳이 되었다. 또 이 고장에는 고려 말 충신인 최 영 장군의 묘와 고려의 마지막 임금인 공양왕의 묘역도 자리잡아 명실공히 왕족의 유택이 되었던 곳이다.
여기에 더하여 한강유역인 김포로 가는 길목에 덕양산이 있어 이 산은 127m의 얕은산으로 평야에 솟아있으나 서해의 한강 입구에서 한양으로 들어오는 뱃길을 경유하는 한강의 길목을 내려다보는 요충지였다. 그로 인해 일본이 임진왜란 때 한양으로 들어오면서 뱃길을 이용하는 길목을 장악하기 위해 이곳에 진지가 생겨 한양의 수호성이 된 행주산성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었다. 덕양산에 올라보면 얕으막한 산으로서 북한산이 멀리 보이고 고양일대의 평야와 한강건너 김포일대의 농경지가 광활하게 보이고 이곳이 수비기지의 역할을 수행하기에 알맞은 곳으로 조선조 1492년에 일본에 침략에 맞서서 이곳에서 일본군을 물리친 행주대첩이 풍신 수길의 침략을 막아낸 역사의 고장이기도 하다.
해방을 맞이하면서 나는 지금의 강남 한복판에 봉은사, 정릉 등은 초등학교시절, 중등학교시절에는 행주 산성, 고양의 서오릉, 서삼릉은 연신 내에 모여 걸어서 가는 소풍지 였다. 일년에 2번 봄,가을에 소풍을 가는 지역으로 기억 속에 남아있다, 고학년이 되면서, 망우리 고개를 걸어 넘어 동구릉으로 소풍가던 시절, 또 더 멀리 금곡릉 까지의 소풍가던 청소년시절을 상기한다. 이제 이런 왕릉은 우리문화유산으로 전해와서 마침내 세계문화유산으로 UNESCO에 등록되면서 다시 한번 고유 문화 유산으로 각광 받게 되어 이제 70대 중반을 넘어 새로운 감각으로 탐구 여행지가 된 것이다.
,1. 행주산성(幸州山城): 국가지정 사적 제 56호.
임진왜란은 이조 선조 26년(1593년) 일본의 풍신수길이 조선을 침략하면서 대륙을 공략하는 전진기지로 활용하려는 의도에서 일어난 전쟁이다.
일본군을 한양을 함락하고 의주로 향해서 파죽지세로 북으로 가다가 행주에서 복병을 만나고 경향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 후방이 교란되면서 동력을 상실하였다.
이곳 행주는 한강변에 덕양산으로 127m 높이에 불과하나 서해 뱃길로 한양의 길목을 수호 하고 서쪽으로는 북한산 자락 서쪽의 넓은 평야를 내려다 볼 수 있고 김포 방향에서 들어오는 왜적을 감시할 수 있는 천혜의 요새였다.
조선에서는 이곳에 일찍이 토성을 쌓아 왜적의 침입을 막으며, 한양을 방어하려는 요새로 삼아왔다. 토축 산성은 돌출된 봉우리를 에워싸고 강변과 김포방향, 고양의 벌판을 굽어보는 곳으로 이중구조로 쌓은 흔적이 남아있다. 이곳에서도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의 유물이 발견된 점으로 미루어보면 아주 오래된 축성이라고 생각된다.
현존하는 토성은 둘레가 1천 m 정도이고 사적 제 56호로 지정되었고 규모는 10만 8천 평이다.
이곳이 임진왜란 시 행주대첩의 현장으로 역사에 길이 빛나고 있다.
당시 전라도 순찰사 권 율(權 律)이 이곳에 진지를 구축하고 휘하의 김 천익은 강화해안을 지키게 하고 일본 왜적에 대비하였다.
(사진: 권 율 장군 동상)
권 율은 그의 휘하부대에서 2300여명을 뽑아 행주산성으로 와서 진지를 구축하고 당시에 “변 이 중”이 만든 화차를 배치하고, 화약으로 총탄을 만들어 왜적과 일전을 준비하였다.
일본군을 파죽지세로 의주방향으로 밀고 올라가면서 고양의 벽제관에서 명나라 군대를 물리쳤다. 그러다가 후방에 복병을 처리하기 위해 “우키다” (우히다수가) 대장이 지휘하는 3만여 병력을 행 주산 산성으로 진군시켜 후방을 평정하려 하였다. 그 무렵 조선 각지에서 의병이 궐기하여 일본군이 사기가 저하 되었다.
그때가 1593년 2월 12일 이었다. 일본군이 다수의 병력과 우수한 무기를 동원하여 행주에 접근하자 조선군 진영에서는 북소리가 울리고 방어가 시작되었다.
당시 권 율 장군은 변 이중의 화차와 수차석포(水車石砲), 총통, 활, 창, 칼 등의 모든 무기를 동원하여 물밀 처럼 밀려드는 왜군을 막아냈다. 하루가 지나고 일본군의 병력이 공격해오자 무기가 바닥나는 바람에 육박전과 나중에는 투석전까지 벌어졌다. 이때 덕양마을 부녀자들이 나서서 치마에 돌을 담아 나르는 일이 벌어졌다. 군사들은 큰 돌을 성밖으로 굴리고 작은 돌은 수차석포에 넣어 마치 오늘날의 대포처럼 발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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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임진왜란 때 사용되었던 화차)
이처럼 부녀자들까지 나서자 조선군들의 사기가 충천하여 일본군에 큰 피해를 입히니 그들은 마침내 이곳에서 철수하여 행주에서 패배한 후 다시는 한양 북으로는 군대를 출동하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조정에서는 권 율 장군을 공신으로 추대하고 이곳에 “행주 대첩비”를 세워 그의 큰 공을 기렸으며, 당시의 치마에 돌을 날랐던 부녀자들을 기려 ”행주치마”가 유행하였다.
이곳도 인근 초등, 중등학교의 소풍지로 권 율 장군의 충절을 기리고 애국심을 고취하려는 뜻에서 많은 사람이 찾아오고 있다.
우선 산성으로 들어가면 오른쪽에 충장공(忠莊公) 권 율 장군이 장검을 짚고 서 있는 동상이 있다. 오르는 길 오른쪽에 홍살문을 지나 들어가면 장군의 제사를 모시는 사당인 충장사가 행주대교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 마당으로는 행주대첩비가 서 있다. 큰 비 옆으로는 비각에 옮겨 놓은 옛날 대첩비가 있고, 그 위로는 산정 정상부에 큰 대첩비가 한강을 굽어보고 서 있다.
비각안에 있는 예전의 비에는 선조 35년(1602년)에 최 립(崔 岦)이 당시에 전투상항을 자세히 기재한 비문이 있다. 뒷면에는 권 율의 사위 이 항복이 짓고 김 현성이 쓴 비문이 새겨져 있다. 높이 178㎝, 너비 82㎝, 두께 18㎝의 비로 경기 유형 문화재 제 74호로 지정되었다. .
그 후 사당이 한국 6.25 전쟁 때 파괴되어 비석만 지금의 충장사 앞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 후 1963년 정상에 호국의 영웅으로 큰 비를 세워 한강과 고양들판을 굽어보고 있다.
대첩 기념관에는 당시에 왜적을 맞아 싸웠던 행주 대첩도와 여러 가지 무기들이 전시되어 있다.
(사진: 행주 대첩도)
여기에 전시된 화차는 지금으로서는 다연장 로켓포였고, 소질려 포통은 오늘날에는 지뢰와 흡사하며 당시로서는 최상의 병기들이었다.
오늘날 행주산성은 쾌적한 자연 환경 속에서 역사를 배우고 체함 할 수 있는 고양시의 대표적 명소이다.
1) 충장공 권 율 도원수 동상
권 율 장군상은 1986년 역사적인 고증을 거쳐 세워졌으며 동상 뒤쪽에 행주 대첩 당시 관군, 승병, 의병, 부녀자들의 항전 모습을 묘사한 부조가 새겨져 있다.
2) 충장사
충장공 권 율 장군의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1970년 행주산성 정화사업때 현재의 모습으로 재건 하였다.
3) 충의정
행주산성 제일 위에 있으며 영상교육관으로 교육용으로 쓰이며 이곳을 방문하는 학생 및 일반인에게 권 율 장군에 관한 영상물을 상영한다.
4) 토성
퇴뫼식 토성으로 총 길이 1KM 로 1992년 415M를 복원하였다. 삼국시대 기와 및 토기와 파편이 출토되어 이곳이 삼국시대부터 군사요새지 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사진: 행주 토성 모습)
5) 행주 대첩비
행주 대첩비는 권 율 장군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현재 3개의 비가 이곳에 있다. 조선조 선조 35년에 세워진 옛날 비는 비의 기단부가 땅에 묻히고, 균열과 마모가 심해 비각에 보존하고 있다. 현종 11년에 세워진 중건비는 구비의 내용을 그대로 옮기었고, 비의 뒷면에 일 부 내용을 추가하여 중건한 비이다.
지금 덕양산 정상에 우뚝 솟아있는 현재의 비는 1970년 행주산성 정화사업 때 재건한 비로 앞면에 새겨진 ”행주대첩” 이란 큰 글씨는 당시 박 정희 대통령이 직접 쓴 것이다.
6) 대첩 기념관
임진왜란 때 옛 무기고와 군량 창고가 있던 자리에 1980년에 건립한 유물 전시관이다. 행주 대첩 당시 사용했던 화차, 신기전, 총통기 등 무기류와 대첩 기록화, 대첩비 탁본, 권 율 장군의 친필, 행주 산성 토성에서 출토된 유물 등이 전시되어 있다.
a) 행주 대첩도: 1593년 2월 12일(양력 3.14)의 행주산성에서 2.300명의 민, 관, 군이 혼연 일체가 되어 왜군 3만 여명을 물리친 승전기록화이다. 당시 부녀자들이 돌을 앞치마에 날라 석전의 공을 세워 ”행주치마”라는 말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b) 이치대첩도: 1592년 7월 영남에서 호남으로 처들어 오는 왜군 1만 여명을 전라, 충청의 경계인 이치(대둔산)에서 물리친 승전 기록화이다. 임진왜란 육지전의 3대첩으로 불린다.
c) 독산성 싸움도: 1592년 12월 임지왜란 당시 왜군 수만 명이 독산성(경기도 오산)을 포위하고 먹을 물이 떨어지면서 투항하기를 기다렸으나, 권 율 장군이 묘안으로 산 정상 부근에 말을 세워두고 쌀을 뿌려 말을 목욕시키는 장면을 연출하자 왜군이 식수가 충분하여 말을 씻기는 것으로 알고 퇴각하여 승전하였다고 한다.
d) 화차, 산화신기전, 소중신기전: 행주대첩과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조선조 최고의 비밀병기로 “화차”와 “신기전”은 선조들의 우수한 과학기술을 엿볼 수 있는 소중한 유산이다. 고양 600년, 제 420주년 행주대첩 기념재에서 세계 최초의 2 단 로켓 신화기전과 다연발 로켓인 소중신기전 화차를 복원하여 발사시연 행사를 가진바 있다. 이는 세종 시에 최 무선의 화약 발명, 변 이중의 화차 제작에서 연유된 것이다.
(사진: 신병기로 제작된 화차)
e) 충장공 권 율(1537~1599) 도원수: 장군은 조선 중종 31년(1537) 영의정 권 철의 아들로 출생. 선조 15년(1582)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임진왜란(1592~98)중 충남 금산군 이치싸움에서 전주로 진격하는 왜군을 대파하였고, 경기 수원 독산성 전투에서 승리하여 왜군의 서쪽 진격을 막았다. 1593년 2월 한성을 회복하려고 행주산성으로 진을 옮겨 민, 관군이 힘을 합하여 2.300명의 군사로 3만 명의 왜군을 물리치는 행주대첩의 위업을 달성해 나라에 큰 공을 세웠다. 그의 말 “男兒感意氣니 功名誰復論이라”(남자는 오직 의와 기만을 생각할 뿐이지, 어찌 부귀와 명예를 따지겠느냐)는 명구가 남아있다. 현재 그의 묘는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권 율로 223(석현리)에 있다.
2. 조선 왕릉
조선 왕족의 무덤은 모두 122기에 이르며, 이 가운데 능이 42기이고, 원이 14기이며, 묘가 66기이다. 조선 왕족의 무덤은 무덤 주인의 신분에 따라 그 명칭을 달리하는데, 능(陵) 은 왕과 왕비의 무덤을 말하며,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의 빈, 또는 왕의 사친(私親)의 무덤을 말하고, 그 외 왕족의 무덤은 일반인의 무덤처럼 묘라고 한다.
42기의 능 가운데 북한 지역인 개성에 있는 제릉(태조 원비 신의 왕후의 능), 후릉(정종과 정인 왕후의 능)을 제외한 40기의 능이 남한에 있다. 500년이 넘는 한 왕조의 무덤이 이처럼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것은 세계에 그 유례를 찾기 힘들며 문화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그로 인해 조산 왕릉은 인류의 문화유산으로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2009년 6월 30일 UNESCO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519년의 역사를 지닌 조선왕조는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았다. 조상에 대한 존경과 숭모를 매우 중요한 가치로 여긴 조선은 역대 왕과 왕비의 능을 엄격히 관리했다. 그리하여 42기의 능 어느 하나도 훼손되거나 인멸되지 않고 모두 제자리에 완전하게 보존되었다.
조선 왕릉은 우리의 전통문화를 담은 독특한 건축양식과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진 공간으로 600여 년 전의 제례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다.
a)조선 왕릉의 구성: 조선 왕릉은 죽은자가 머무는 성(聖)의 공간과 산자가 있는 속(俗)의 공간이 만나는 곳으로 그 공간적 성격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가 능참 공간으로 왕과 왕비의 봉분이 있는 성역 공간이고, 둘째는 제향 공간으로 죽은자와 산자가 함께하는 영역으로 제사를 지내는 공간이고, 셋째는 진입공간으로 왕릉의 관리와 제례 준비를 위한 공간이다.
b) 조선왕릉의 제향: 조선 왕릉의 가치는 형태적 보존에만 있지 않고, 조선 왕릉을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은 600년 넘게 이어져 내려온 조선 왕릉의 제례의식이다. 조선은 건국이래 산릉 제례를 엄격하게 지켜 왔으며, 1945년 해방 후에는 “전주 이씨 대동 종약원”이 능기신제(陵忌辰祭) 즉 기일에 올리는 제사의 전통을 이어 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매년 왕과 왕비의 제향일에 산릉 제례가 엄숙하게 행해진다.
c)조선 왕릉의 주요 상설(象設): 조선 왕릉에는 각 공간적 성격에 부합하는 건축물과 조형물이 왕릉의 전체적인 조경과 조화를 이루며 조성되어 있다.
d)제실(齋室): 능 제사와 관련한 전반적인 준비를 하는 곳으로 왕릉을 관리하던 능참봉이 상주 하였다.
e) 금천교(禁川橋): 왕릉의 금천을 건너는 다리로서 속세와 성역의 경계역할을 한다.
f) 紅살문: 신성한 지역임을 알리는 문. 붉은 칠을 한 둥근 기둥 2개를 세우고 위에는 살을 박아 놓았다. 홍문 또는 홍전문이라고도 한다.
g) 참도(參道):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진 길, 박석을 깔아 놓았으며 왼쪽의 약간 높은 길은 신이 다니는 길이라 하여 신도(神道)라고 하며, 오른쪽 약간 낮은 길은 임금이 다니는 길이라 하여 어도(御道) 라고 한다.
(사진: 홍살문과 참도 전경)
h) 비각: 비석이나 신도비를 세워둔 곳. 신도비는 능 주인의 업적을 기록한 비석을 가르친다.
i) 정자각(丁字閣): 능 제향을 올리는 정자모양으로 지은 집. 제향을 올릴 때 왕의 신주를 이곳에 모신다.
j) 무석인(武石人): 문석인 아래에서 왕을 호위하고 있으며, 두 손으로 장검을 짚고 위엄있는 자세로 서있다.
k) 문석인(文石人): 장명등 좌우에 있으며, 두 손으로 홀을 쥐고 서있다.
l) 능침(陵寢): 능 주인이 잠들어 있는 곳, 능상이라고 도 한다.
m) 곡장(曲墻): 봉분을 보호하기 위하여 봉분의 동, 서, 북 삼면에 둘러 놓은 담장.
이런 조선왕릉의 여러 가지 구조와 복잡한 용어를 정리하여 이제 서오릉을 순례해 본다.
3.서오릉: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로 334
서울이 확장되면서 삼송리에 전철 차량기지가 들었섰고, 고양군에 화정과 일산에 베드타운으로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일산 신도시가 형성 되었다. 그로 인해 예전에 고양군 이었던 곳이 이제는 고양시, 일산시로 확장되면서 각종 시설이 들어섰다.
그 가운데 서울 서쪽과 경계를 이루는 덕양구 용두동에 이조 세조 때 부 터 자리잡아 총 55만3.616 평의 광활한 땅에 조선 왕조의 5개 능이 들어서 있어 이를 서오릉이라 부른다.
서오릉은 연신 내에서 걸어서 갈 정도로 6.25 이후 초, 중등학교의 봄, 가을 소풍지로 각광 받았었다. 또 숲이 잘 보존되어 있어 인근주민들의 산책코스로서 즐겨 찾는 곳이었다.
1457년 세조의 원자인 장(璋)이 죽자, 덕종(德宗)으로 추존되면서 이곳에 왕릉 터가 조성되기 시작하여 처음으로 경릉(敬陵)이 조성되었고, 그 후 덕종의 동생 예종(睿宗)과 계비 인순왕후 한씨의 창릉(昌陵),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 김씨의 익릉(翼陵), 또 숙종과 계비 인현왕후 민씨의 쌍릉과 제 2 계비 인원왕후 김씨의 능을 합친 명릉(明陵), 영조의 비 정성왕후 서씨의 홍릉(弘陵)이 들어선 후 서오릉(西五陵)이라 불리었다.
서오릉엔 그밖에 명조의 아들 순회세자 공빈 윤 씨의 묘인 순창원(順昌園)이 있고, 영조의 후궁이며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빈 이씨의 묘인 수경원(綏慶園), 숙종의 후궁인 희빈 장씨의 대빈묘(大賓墓가) 있으며 이로 인해 서오릉은 1970년 사적 제 198호로 지정되었다.
1)경릉(敬陵): 추존 덕종과 소혜왕후의 능.
덕종(德宗)(1438~1457)은 이조 제 7대 세조의 맏아들로 1455(세조 1년)에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즉위하기 전 20세에 요절하였다. 의경세자(덕종)는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었으나 이후 그의 둘째 아들 성종이 임금이 되면서 덕종으로 추존되었다.
소혜왕후(昭惠王后 1437~1504)는 좌의정 서원 부원군 “한 확”의 딸로 1455년에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그 후 의경세자 와의 사이에서 월산대군과 성종을 낳았다. 1471년 성종 2년에 의경세자가 죽은 후 덕종으로 추존되자 인수대비가 되었다. 성품이 총명하고 학식이 깊어 부녀자들의 예의 범절을 가르치는 “내훈(內訓)”을 책으로 펴내고 한문 불경을 한글로 풀어쓰기도 하였다. 덕종이 죽은 후 47년을 살다가 1504년 창경궁 경춘전에서 68세로 세상을 떠났다.
(사진 : 서오릉 경릉 전경)
2) 창릉(昌陵): 조선조 제 8대 예종과 계비 안순 왕후의 능.
서오릉에서 가장 외진 곳에 자리잡아 아직은 공개되지 않고 있다.
예종(睿宗1450~1469)은 제 7대 세조의 둘째 아들이다. 세자였던 형(의경세자,덕종)이 갑자기 죽자 19세에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병약했던 예종은 재위 1년 2개월 만에 20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짧은 재위 기간 동안 각도의 병영에 속한 전답인 둔전을 일반 농민이 경작하게 하여 백성들을 경제적 곤궁에서 벗어나게 하는 등 업적을 세웠다. 경국대전을 편찬 하였다.
안순왕후(安順王侯. ?~1498)는 청천 부원군 “한 백륜”의 딸로, 예종의 원비 장순왕후가 인성대군을 낳고 산후병으로 숨을 거두자 세자빈이 되었다. 1468년 예종이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오륙교라 새겨졌던 금천교를 지나면 소나무 숲 사이로 홍살문이 보인다. 두 봉분이 상당히 떨어져 있고, 왼쪽이 예종능이고 오른쪽이 계비 안순왕후 능이다.
양 옆에 서있는 무인상은 갑옷에 조각이 두드러지고, 각이 깊고 석물이 실물보다 크게 조각되었다. 안순왕후 능은 꽃 담으로 곡장을 두르고 난간석을 세웠으나 마모가 심하다. 망주석 아랫부분에 새긴 꽃 문양도 화려하고 배가 내민 무인상은 긴 장검을 들고 능을 지키고 있다.
3) 명릉(明陵):조선 19대 숙종과 제 1계비 인현왕후, 제 2계비 인원왕후의 능
숙종(肅宗 1661~1720, 재위 1674~1720)은 제 18대 현종의 아들로 1674년에 현종이 승하하자 왕위에 올랐다. 숙종 대의 조선 정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정쟁이 심했지만, 숙종은 각 붕당의 정쟁 위에서 왕권을 강화하고 사회체제 전반을 정비하는 큰 공적을 남겼다.
인현왕후(仁顯王后 1667~1701)는 여양 부원군 “민 유중”의 딸로, 숙종의 원비인 인경왕후가 일찍 승하하자 1681년(숙종 7)가례를 올리고 숙종의 첫째 계비가 되었다. 인현왕후는 희빈 장씨의 모함으로 폐위되었다가 갑술 환국 때 복위되었다.
인원왕후(1687~1757)는 경은 부원군 김 주신의 딸로 인현왕후가 승하함에 따라 1702년(숙종 28)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소생이 없이 살다가 71세로 세상을 떠났다.
숙종은 경희궁 회상전에서 태어나 일곱 살에 왕세자로 책봉되고 열네살에 창덕궁 인정전에서 즉위했으며 45년간 집권하다 60세에 경희궁 융복전에서 승하하였다.
(사진: 명릉의 전경)
숙종때는 당쟁이 가장심해 나라가 파탄지경에 이르렀다. 그럼에도 숙종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혼란했던 나라를 수습하고 민생을 안정시키는 치적을 남기었다. 대동법을 전국적으로 확대 실시했으며, 병자호란 이후 양전사업을 마무리하고, 상평통보를 주조 통용하여 상업활동을 안정시켰다. 북벌정책을 펴 압록강 변에 2 진을 설치하고, 5 군영제를 확립, 군제를 개편하였으며, “신증 동국여지승람” 을 간행하고 “선원계보” 등을 편찬했다.
이곳에 자리한 인현왕후는 숙종의 두 번째 부인이다. 여흥 민씨로 35세 나이로 후사도 없이 세상을 떠났다. 인현왕후 폐비사건과 장 희빈의 생을 기록해 놓은 “인현왕후 전”이 유명하다.
4) 익릉(翼陵): 조선 제 19대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의 능
인경왕후(仁敬王后 1661~1680)는 광성 부원군 “김 민기”의 딸로 1671년(현종 12년)11세 때 세자빈이 되었다가 1674년 숙종이 즉위하면서 왕비가 되었다. 20세 때 천연두를 앓다가 발병 8일 만에 경희궁 회상전에서 죽었다. 슬하에 공주만 둘을 두었으나 모두 오래 살지 못했다.
서오릉에는 궁중여인들의 처연한 삶이 배어있는 곳이다. 매봉 정상으로 오르면 영조의 넷째 부인이며 사도세자의 어머니인 영빈 이씨의 능인 수경원을 만난다. 수경원을 지나 높은 자리에 오르면 익릉이 나온다. 홍살문에서 시작되는 참도가 큰 계단식으로 되어있다. 그 정면에 큰 정자각이 자리잡고, 오른쪽으로 비각이 있다.
장대한 석물과 팔각 장명등이 크게 마련되어 있다. 양 옆으로 무인, 문인석이 서 있는데 문인석은 키가 245㎝나 되는 거대상이다. 장명등과 망주석에도 아름다운 꽃 문양을 새겨 넣었다. .
아담한 봉분에는 병풍석 없는 난간석을 두르고 12 간지를 글자로 돌아가며 새겼다. 호석 뒤로는 멋진 곡장을 둘렀고 주변으로는 소나무들이 멋지게 자라났다.
5) 홍릉(弘陵): 조선 제 21대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의 능
홍릉으로 가는 길 왼편에서 숙종의 4번째 부인인 조선조 20대 경조의 어머니인 유명한 희빈 장씨(禧嬪 張氏, 1659~1701)의 대빈묘를 만난다. 43세를 일기로 많은 일화를 남긴 채 죽은 희빈 장씨의 묘는 봉분도, 곡장도 옹색하게 되어있다. 홍릉 아래쪽으로는 군부대가 있어 들어가기가 어렵다.
그래서 홍릉은 비각 옆으로 길이 나 있어 금천교를 지나야 홍살문이 보이고 그 안으로 참도가 나있다. 정자각은 맞배 지붕으로 3면에 방풍판이 달려있고, 공포가 단청되어있다.
정성왕후(貞聖王后 1692~1757)는 달성 부원군 “서 종제”의 딸로, 1704년(숙종 30)에 13세로 숙종의 둘째 아들인 연양군(영조)과 가례를 올렸다. 1724년(경종 4년) 경종이 승하함에 따라 1824년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다. 평생 숙종과 경종의 부인을 극진히 모시며 내명부를 지겼다. 1757년(영조 33년)에 소생이 없이 66세로 승하하였다.
생전에 영조가 여기에 오려 하였으나 손자 정조가 동구에 자리를 잡아 장릉(張陵)으로 모시었다. 그리고 이 자리엔 정성왕후가 모셔진 것이다.
붕분에는 난간석을 다듬어 세우고 기둥에는 문자로 방위표시를 하였다. 망주석의 세호는 양쪽에서 내려가고 올라가는 모습으로 새겼으며 꼬리가 선명하다. 사각 장명등엔 화려한 꽃 무늬를 새겼다. 양 옆에 무인석, 문인석은 얼굴에 웃음을 띠고 있다.
(사진: 칼을들고 미소를 띤 무인석)
4. 서삼릉: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길 233
길 양쪽에 포플러나무가 크게 자라나 곧게 올라가 아름다운 숲길을 약 1km를 들어가면 희릉, 효릉, 예릉이 있는 서삼릉에 이른다. 서삼릉은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윤씨의 희릉을 조성하면서 자리잡게 되었다. 그 후 중종의 아들 인종과 그의 비 인성왕후 박씨의 효릉, 그 후 철종과 그의 비 인철왕후 김씨의 예릉으로 서삼릉이라 부르게 되었다. 서삼릉 지역엔 그 밖에 소경원, 의령원, 효창원 등 세자의 원(園) 3기와 폐비 윤씨의 회묘(懐墓)와 조선 말기에 고종의 2남인 의친왕의 묘 외에도, 조선 역대의 후궁, 대군, 군, 공주, 옹주의 묘 등 무려 45기가 있는 왕실의 묘원이다.
그리고 200여 평에 이르는 공간에 담으로 두른 곳에 조선왕조의 태실이 있다. 이는 일제 때 태조의 태묘와 전국에 흩어져 있던 왕들의 태묘 21위, 대군, 세자, 공주 등의 태묘 32위 등 총 53위의 태묘가 태실에 안치되어 있다. 서삼릉은 현재로는 태실과 효릉을 공개하지 않고 있으며, 총 6.만 5970평으로 1970년 사적 제 200호로 지정되었다.
1) 예릉(睿陵): 조선 제 25대 철종과 철인왕후의 능
철종(哲宗, 1831~1863. 재위 1849~1863)은 사도세자 (정조)의 증손으로 강화도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다. 제 24대 헌종이 세상을 떠나자 왕위를 이을 후사가 없자 억지로 모셔다 왕위에 오르게 했다. 즉 정조의 이복 동생의 아들 은언 군의 손자로 아명은 원범이었다. 반역을 꾀했다는 누명으로 일가족이 강화에 유배되어 일명 “강화도령”으로 널리 알려진 비운의 왕이었다.
19세에 왕위에 오른 철종은 3년 안에는 순조의 비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았고 그 후 부 터 직접 정치를 하였다.
당시에 안동 김씨의 세도가 극에 달해 국가재정을 비롯해 삼정이 문란하여 졌으나 철종은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 이라는 기구를 설립하여 삼정의 문란을 수습하며 민생을 위해 노력하였다.
철인 왕후 (1837~1878)는 영원 부원군 “김 문근”의 딸로 1851년 철종 2년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2) 희릉(禧陵):조선 제 11대 중종의 제 1계비 장경왕후의 능
장경 왕후는(1491~1515)는 영돈녕부사 파원 부원군 “윤 여필”의 딸로 태어나 8세 때에 어머니를 잃고 월산대군 부인에 손에 의해 자란 후 열 다섯 살에 궁에 들어가 중종의 원비 단경왕후가 아버지 신 수근의 문제로 폐위되자 1507년 중종 2년에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1515년 인종을 낳은 후 산후 병으로 7일만에 경복궁 별전에서 2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진: 장경 왕후의 릉)
지금 희릉은 참도 가까이 들어온 종마장 때문에 수난을 겪고 있다. 남서쪽으로 향해 누워있는 희릉은 봉분에 난간 석을 두르고 곡장 안으로 호석이 지키고 있다. 석물은 상석과 세호가 조각된 망주석 한 쌍, 옷 주름이 유려하고 크기가 지나친 문인석, 무인석 각기 한 쌍, 석마 2 쌍과 팔각장명등이 배치되어 있다.
3) 효릉(孝陵): 조선 제 12대 인종과 인성왕후의 능
인종(仁宗, 1515~1545, 재위 1544-1545)은 제 11대 중종의 아들로 여섯 살 때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여덟 살에 성균관에 들어갔고 천성이 효성스러웠다. 태어난지 6일만에 어머니 장경왕후를 잃었다. 중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역대 조선 왕중 재위기간이 가장 짧으나 지극한 효심으로 아버지 중종이 병이 나자 밤낮으로 옆을 지켰고 중종이 승하하자 너무나 비통해 하였다. 국상 후에도 비통해 하면서 건강을 해쳐 재위 9개월 만에 승하하니 31세 였다.
(사진: 인종의 릉)
인종의 비 인성 왕후(1514~1577)는 금성부원군 “박 용”의 딸로 1524년 중종 19년 11세에 세자빈으로 책봉되었고 1544년에 인종이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으나 후사가 없이 64세로 승하하였다.
현재 효릉은 남서 방향의 언덕에 자리잡고 있으나 공개되지 않고 있으며, 왕과 왕비의 쌍릉이다. 인종 능의 병풍석면에는 12 지신상이 새겨져 있고 그 아래위 받침돌에는 복련과 양련을 새기고, 상석은 각각 놓여 있고 팔각장명등이 가운데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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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공양왕릉: 고양시 왕를골
고려 34대 마지막 왕인 공양왕(1389~1392 재위)은 21대 희종(1204~1211)의 6대손으로 정원부원군의 아들이다. 창왕을 폐위시킨 이 성계 일파의 강압으로 쇠잔해가는 고려 왕조의 마지막으로 그들이 옹립한 왕이었다.
얼마 후 공양왕은 이 성계 일파의 기세에 그의 선대인 우왕과 창왕을 죽음으로 내몰고 말았다.
조선 건국 후 공양왕은 추방당해 강원도 간성으로 갔다가 1394년 후환을 생각하고 죽인다. 그리고 공양군으로 강등되었다. 공양왕이 다시 왕으로 봉해진 것은 22년 뒤인 태종 8년에 이루어 졌다.
(사진: 공양왕의 사연을 기록한 안내판)
왕과 왕비가 나란히 누워 있지만 쌍릉은 작고도 옹색한 묘지이다. 봉분 앞으로는 비석과 석상이 각각 하나씩, 장명등, 석인 2 쌍, 석수 1 마리가 서있으나 모두 작다.
공양왕의 죽음에는 이상한 점이 있는데 강원도 삼척에도 공양왕릉이 있다. 그러나 세종실록에 “안성군 청룡에 봉안했던 공양왕의 진영을 고양군 무덤 곁에 있는 암자로 옮기라” 는 기록에 근거해서 1970년에 사적 제 191호로 지정되었다.
6. 최 영장군 묘(崔 瑩將軍 墓): 덕양구 대자리 산 70-2
고려 말기에 충신으로 이 성계 일파에 의해 쇠락하는 왕실을 끝까지 옹위하려다 끝내 처형 된 최 영(1316~1388)장군의 묘소이다. 부인 문화 유씨와 합장되어 있다.
그는 공 민왕 원년(1352) “조 일신”의 난과 공 민왕 3년(1354) “장사성”의 난을 평정하고 고려말의 침입해 오는 홍건적의 침입을 격퇴하는 큰 공을 세웠다. 또 고려의 쇠약으로 인해 수 차례나 침입해온 왜구도 막아내었고, 기울어져 가는 고려에 끝까지 충성하였다.
(사진: 최 영 장군묘)
명나라가 철령 이북의 땅을 빼았으려 하자 오히려 요동정벌을 하려고 우 왕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압록강까지 진군하였으나 이 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우 왕 14년(1388)에 이 성계 일당에게 죽임을 당하여 고려 멸망을 재촉하게 되었다.
이 성계가 왕위에 즉위 한 6년 후에 그의 충정에 무민(武愍)이라는 시호를 내렸는데, 그 후로 그의 무덤에는 원한으로 풀이 돋지 않았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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