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종 여행기/우리문화유산 답사

우리문화유산 답사- 충남 홍성 지역-(12)

땡큐 이영옥 2013. 9. 13. 09:26

2013.09.07

  

    우리 문화 유산 답사

 

          충남 홍성 지역

                                  (12)

                                         , 사진 :   한 종

 

                  (사진: 신경리 마애여래 입상)

 

우리문화유산 답사도 벌써 12번째로 이번에는 충남 홍성일대를 답사하기로 한다.

충남 서남쪽에 자리잡아 당진을 지나 서산 아래로 내려가면서 나는 가끔 용봉산 (381m)을 등산하면서 그 기슭에 마애불과 서산 마애 삼존불, 용봉사에 얽힌 사연을 등산 시에는 느끼지 못하다가 이번에 홍성일대를 답사하기로 하면서 홍성이 근대화에 얽힌 숱한 사연을 간직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역사적으로 삼한시대에 마한의 사로국이 있었고, 백제시대를 거처 지금의 홍성읍이 홍주로 칭하고 토성이 있었고 조선 초기에 돌로 축성하여 지금의 홍주성(洪州城)으로 전해 내려온다.

 홍주성과 함께 조양문(朝陽門)과 홍주목의 동헌인 안회당(安懐當), 그 대문으로서 홍주아문(洪州 衙門)은 서해안 방어의 거점이라는 사실이다.

 홍성은 고려 시대 공민왕 때 왕사인 보우의 고향으로 불교유적도 상당하고 당시의 광경사의 당간지주, 석불좌상 등이 내려오고 있다.

 

 

 

                                            (사진: 홍성읍 중심부의 유적지 지도)

 

북쪽의 얕으막한 산인 바위산으로 소금강이라 불리었던 용봉산(龍鳳山)근처에는 석조와 부도, 미륵불, 신경리 산중턱에는 거대한 마애불이 있고, 산자락 반대편 상하리에는 거대한 마애여래 입상(磨崖如來立像) 이 고장을 지키고 있다.

홍성읍 일대에는 결성면 성곡리에 만해 한 용운(韓 龍雲)이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 있고, 갈산면 행산리에는 일제와 맞서 청산리 싸움과 조국광복을 위해 몸을 바친 백야(白冶) 김 좌진(金 佐鎭) 장군이 태어난 곳이 있어 애국충절의 고장으로, 또 고려 말 홍북면 노은리에서 태어난 최 영(崔 㶈) 장군의 사당과 같은 고장 출신인 조선 세종 때의 성 삼문(成 三文) 사육신의 유허지에는 사육신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조선 말기에는 병오년(1906)에 의병이 봉기하여 일제가 점령한 홍주성을 함락시키었다. 그 후 일본군이 홍주성의 의병을 공격하여 의병 수백 명이 전사하여 유골이 임시로 매장된 사실이 알려졌다. 그것이 1992년 구백의총(九伯義塚)으로 전해지면서 지금은 홍주 의사총(義士塚)으로 지정되면서 성역화되었다.

또한 일제 말기에 이 지역에 천주교가 전파되면서 많은 순교자들이 발생하니 홍주 일대는 충절의 고장이라 불리어지기도 한다. 이번에 이 지역 일대의 오랜 역사와 근대의 수난사를 한번 둘러보아 문화유산으로 값진 자리매김을 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1.  白冶 金 佐鎭(1889~1930) 장군

대한 제국 말기의 독립운동가였던 김 좌진 장군이  홍성군 갈산면 맹산리 330-1에서 태어나고 성장하였다. 그는 고종 26, 이곳에서 김 형규의 2 남으로 태어났다. 일찌기 그는1907년 민족교육의 뜻을 두고 호명(湖明)학교를 세워 신학문을 교육하였다. 1916년에 광복군에 가담하여 항일독립 투쟁을 시작하였다. 그 후 만주로 건너가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조직하여 총사령관이 되었다. 1920 10월 청산리(靑山里)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하였다.

그의 청산리 전투는 10 21일 백운평에서 시작, 24일 까지 계속되면서 일본군에게 전사자 1200, 부상자 2100여명을 기록했고, 우리측 독립군 전사자는 130여명, 부상자 220 여명이라는 대승을 거두어 청사에 길이 빛나고 있다.

                          (사진: 기념관 안에 김 좌진 장군 흉상)

 

 1925<김 혁>과 함께 신민부(新民部)를 결성하여 중앙 집행위원이 되었으며, 만주에서 한족 총 연합회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조국 광복을  맞기도 전인 1930 1월 달에 공산당원에게 피살되었다.

1934년 자경촌에 안장되었던 유해는 부인 <오 숙근> 여사에 의해 향리인 홍성으로 옮겨져 안동 김씨 종산에 밀장 되었다. 그 후 해방과 더불어 봉분이 조성되었고 1962년에 가서야 대한민국 장이 수여되었다.

 

a)   생가지(生家址):

그가 탄생하였던 홍성군 갈산면 맹산리 330-1 일대에는 1991년 부 터 비로서 성역화가 추진되어 지금은 안채와 사랑채, 밖에는 마구간이 복원되어 있다. 안채는 앞면 8, 측면 3칸 기와집으로 서향으로 되어있다. 마당한쪽에는 우물이 있으며 왼쪽으로는 2칸의 부엌이 있고 아랫방과 윗방이 각각 한 칸씩 있으며, 통칸의 대청이 있다. 그 위로 방이 한 칸있고  끝으로 툇마루가 있다.

 

                                                (사진: 복원된 생가 전경)

b)  기념관:

1989 12 20일에 장군 탄신 100주년 기념사업으로 추진되어 1998 1 23일 개관되었다. 기념관에는 청산리 전투후의 당시의 독립 신문과 그 보도내용, 그의 관한 문헌, 그가 사용했던 무기, , 권총 등과 청산리 전투장면의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그가 결성한 신민부 등의 자료가 전시되었고, 삼일운동 선언서 등 귀중한 자료가 망라되어 있다. 기념관 뒤로는 사당이 건립되어 매년 10월에 추모제를 거행하며, 지금은 생가 터 일대에 공원이 조성되었고 김 좌진 장군 추념비가 건립되어 있다. 그러나 그의 동상은 1983 5. 31 홍성읍 고담리에 건립되어 있으며 높이는 11.8m 이며, 긴 칼로 무장하고 독립군을 지휘하던 생전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2.  용봉사(龍鳳寺)

조계종 제 7교구본사인 수덕사의 말사로  홍성의 소금강이라 부르는 용봉산 (381m)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용봉산은 규모는 크지 않으나 바위산으로 골이 깊다. 고려시대에는 북산, 조선시대에는 팔봉산으로 불리었다. 지금의 이름은 조선 시대부터 있었던 용봉사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지금의 절은 1906년 새로 지은 것으로 대웅전, 지장전, 삼성각, 일주문 등 이 있고 주변에는 거대한 마애불과 용봉사지 석조, 맷돌, 부도가 남아있다. 또 절 입구에는 통일 신라 시대의 마애불이 있어 이 절이 고려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보이며 절 경내에는 영산회괘불탱이 보물 제 1262호로 지정 보관되어오고 있다. 또 산 중턱에 신경리 마애여래입상(磨崖如來立像)이 보물 제 355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진: 용봉사 대웅전)

                                       

 

 

 

 

 

a)   정원명 마애불:

 충남 유형 문화재로 제 118호이다.

이 마애불은 바위 면에 일정한 구획을 한 후 돋을 새김으로 한 높이가  2.1m 로 조각한

입상이다. 육계는 민 머리 위에 팽이를 엎어 놓은 것처럼 솟아있고, 얼굴은 타원형이다. 눈과 입은 미소를 머금고 있고, 가늘고 긴 눈은 일자형이나 끝이 치켜 올라가 있다. 코는 오뚝하고 좌우 광대뼈가 약간 도드라지다. 입은 얼굴 크기에 비해 작고 턱은 이중으로 되었고, 귀는 목 부분까지 길게 조각되었다. 어깨는 둥글고 U 자형의 옷 주름은 무릎까지 내려오고 있다. 수인(手印)은 오른손은 아래로 내려 다리에 붙이고, 왼손은 가슴높이로 오렸으나 훼손이 심하다. 불상 오른쪽의 명문이 정원 15으로 새겨 있으니 799년 신라 소성왕 1년에 장진대사가 발원하여 원오법사가 새겼음이 표시되어 있다.  이렇게 조성연대가 확실한 마애불은 드물며 사료가치가 높다.

 

 

                                 (사진: 용봉사 마애불 전경)

<貞元 15年 己卯 4月日仁符, O 佛願大伯士元烏法師  O香徒官人 長珍大舍>라는 글씨가마애불 왼쪽 바위 면에 3 31자로 조성시기와 조성자가 새겨져 있다.

 

 

b)   신경리 마애여래입싱(磨崖如來立像): 보물 제 355.

 

고려초기의 입상으로 높이가 4m의 돌출된 자연암석의 바위 앞면을 파서 불상이 들어앉을 감실형(龕室型)의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 돋을 새김을 한 거대한 불상을 조각하였다.

민머리 위에는 상투모양의 머리묶음을 표현하였다. 얼굴은 몸에 비해 크며 잔잔한 미소가 흐르고 있다. 눈썹은 반원형이고 눈은 가늘고, 눈꼬리 부분은 처져있어 인자한 모습이다. 코와 입은 얼굴에 비해 작고, 코는 오뚝하고 인중은 깊게 파였다. 입은 살짝 미소를 띠고 있다. 턱은 통통하게 귀는 어깨부분까지 내려와 있다. 신체는 얼굴에 비해 다소 왜소한 느낌을 주지만 균형이 잘 잡혔다.

 

 

                                         (사진: 마애여래 입상 전경)

 

옷 주름은 U자형으로 양 어깨를 감싸고, 목 밑에서 굵은 선으로 표현되었고, 아래로는 음각선으로 되었다. 수인은 “시무외여원인(施無畏與願印)을 하고 있으나 오른손은 내려 다리에 붙이고, 왼손은 가슴위로 올리고 있다. 광배는 거신광(擧身光)으로 파낸 바위 면을 이용해 음각선으로 두광과 신광을 나타내고 있다. 머리 위에는 후대에 올려놓은 것으로 보이는 사각형의 개석(蓋石)이 있고, 팔작 지붕 형태로 앞면의 밑부분에 연화문이 음각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인상이 입체감이 있고, 신체의 비례도 맞는다. 아래로 갈수록 양감이 약해간다. 전체적인 양식으로 볼 때 고려 초기의 마애불이다. 예전에 이 근처에 절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3.상하리 미륵불: 1979.7.3 유형문화재 제 87(홍성군 홍북면 상하리 산 1-2)

미륵불이란 먼 훗날 이 땅에 출현하여 중생을 제도하는 미래의 부처이다. 이 미륵불은 용봉산 서쪽 기슭에 있는 절벽 밑에 우뚝 솟은 자연암석을 활용하여 조각한 입상이다. 상하리의 용봉 초등학교 뒷산으로 올라가면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산자락에 단청을 하지 않은 대웅전이 한 채있고 그 옆에 높이가 7m에 이르는 거대한 천연바위에 새겨진 미륵불이다. 그 뒤로도 높다란 암벽이 병풍처럼 둘러쌓고 있고 오래된 소나무들이 둘러쌓고 있다.

머리는 정수리 부분이 평평하며, 귀는 직선으로 턱 밑까지 내려왔다. 가늘고 긴 눈, 넓적하고 낮은 코, 입은 비교적 작으나, 얕게 평면적으로 돋을 새김한 은은한 미소는 자비로움이 잘 표현되어 있다.

신체는 얼굴에 비해 더욱 평면적이어서 가슴 부분에 두 손을 아래위로 나란히 대고 있는데, 오른손은 가슴에 대고 왼손은 아래로 떨구었다. 이외에 광배나 신광, 대좌 등의 다른 부분은 생략되었다.

충남도에는 이런 대형 미륵불이  제일 큰 것이 논산 관촉사에 우뚝서 있고,  또 하나는 부여군 임천면의 대조사 미륵불도 이와 유사한 것이다.

고려 중기에 조성된 충청도 지방의 불상양식이 잘 표현되어 있다.

 

 

 

                             (사진: 상하리 미륵불)

 

4.홍주성: 홍주 8. 사적 제 231

지금의 홍성군청 앞에서 홍주 아문 왼편으로 난 길로 올라가면 성을 만날 수 있다.  홍주성은 축성 당시에는 1772m의 길이로 쌓았으며, 충남의 해미 읍성과 전남의 낙안 읍성과 더불어 3대 읍성 중의 하나였다. 그 외로 동래 읍성과 고창의 모양성 등도 읍성으로서 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홍주성은 백제가 멸망했을 때 <부흥군>의 거점인 주류성으로 추정되었으나 축성연대는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조선조 문종 1(1451)에 읍성을 축조한 것으로 남아있다. 조선 초기의 축성방법이 보이고 당시의 성벽 축조 돌이 남아있어 역사적으로 귀중한 성이다.

 축성 당시에 적대(敵臺) 24, 문이 4, 성내 우물이 2곳이 있었으나 해자는 없는 것으로 되어있다. 1870년에 홍주목사 한 응필(韓 應弼)이 동문으로 조양문(朝陽門), 서문으로 경의문(景義門), 북문으로 망화문(望華門)과 관영을 지었다 한다.

당시에는 성내 관아가 35동이나 되었으나 현재는 조양문, 안희당(동헌), 여하정, 홍주아문 만이 남아있다. 여하정은 홍주 목사 <이 승우>가 신축한 이래 역대 홍주 목사가 정사를 구상하며 휴식을 취하였던 곳으로 목조기와 6각형의 수상정이고 앞에는 연못이 있어 연꽃이 피어나고 있다.

또 북문 근처에서 사형수를 처형하였다고 하며, 1894년 갑오 농민전쟁 때 농민군 수백 명이 이곳에서 처형되었다 한다. 또 조선 선조 때에는 <이 몽학>이 반란을 일으키기도 한 곳 이었다.

 역사에 기록으로 보면 고려 때 부 터 왜구가 16차례나 침입한 기록이 있고, 1905년 을사 보호조약 체결 시 반대 의병을 일으킨 <민 세영>, <이 종식>이 화포 6문에 병사 1100명을 지휘하여 홍주성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을 몰아낸 기록도 있다. 그러나 성벽은 일본이 점령 시 헐어버렸고, 1978년 홍성 근처의 지진으로 붕괴되었다. 그 후 3년에 걸쳐 복원하였다. 지금은 홍성읍의 남산공원의 일부이며, 도심공원으로 역할을 하고 있다.

 

 

                                            (사진:  홍주 읍성 전경)

 

a)    조양문(朝陽門): 사적 제 201

 

홍주성의 문 가운데 유일하게 복원된 문으로 서해로부터 침공해 들어오는 왜구를 물리치던 거점으로 되었었다. 지금은 읍내 한복판 번화가에 서있어 자동차 공해에 시달리고 있다.

조양문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2 칸으로 팔작 지붕에 다포계 건축물로 남아있다. 홍예를 두르고 석 축을 정연하게 쌓았고 규모는 작아도 그 모습은 당당하다.

1870년 홍주 목사 한 응필(韓 應弼)이 중수할 때 북문, 서문과 함께 지었으나 한일 합방 후 1906년 의병이 봉기 하였을 때 치열한 싸움으로 문이 훼손 되었다. 또 기록에 의하면 옹성도 있었으나 일제 때에 훼손되었다 한다.

현재의 조양문은 1975년에 과거의 문을 해체하여 복원한 것으로 당시에 석 축을 쌓을 때 옛 돌 석 축을 함께 쌓아 새로운 석축 돌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사진: 읍내  중심부에 우뚝 선 조양문 전경)

 

b)    홍주아문(洪州衙門): 사적 제 231 (1972.10.14 지정) 홍성읍 오관리

 이 문은 조선조때 홍주목의 동헌인 안회당(安懐當)의 외문으로 1870년 당시 홍주 목사 한 응필이 홍주성을 대대적으로 보수하고, 이 성의 동문인 조양루의 문루를 설치할 때 같이 세운 것이다. 현재 이 건물에 걸려있는 洪州衙門 이란 현판은 대원군이 친필로 사액한 것이라 하나 6.25 전란 때 망실 되었다 한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아문 중에서 가장 크고 특이한 형태를 지니고 있다.

정면 3칸으로 가운데에 솟을 대문이 우뚝 솟아 있어 권위를 나타낸다. 주변에는 느티나무가 큰 것이 여러 수 자라고 있으니 하나는 600여 년 된 거목으로 이곳이 오래된 행정 중심지임을 나타내고 있다.

 

 

                                             (사진: 홍주 아문 정경)

 

  

 

c)    안회당()과 여하정(餘何亭): 사적 제 231

 

안회당은 1870년 홍주 목사 한 응필에 의해 세워진 홍주목의 동헌으로 22칸의 목조기와집이다. 신 청사가 건립되기 전에는 목사와 군수가 행정을 집행하던 관아 건물로 노인을 편안히 모시고 젊은이를 품는다는 뜻으로 안회라고 지었다 한다.

정면 7칸이고 앞, , 옆 전체로는 22칸의 건물로 오른쪽에는 누마루가 연결되어 자연스럽게 보인다. 1977년에 개수되어, 가운데에 대청이 있고, 방이 있어 지금은 여러 가지 사진이나 <홍성읍지>등을 전시하고 있다.

 안회당 뒤로는 홍주 목사의 후원으로 수련과 붉은 수련이 피어나는 연못이 있고 못 가운데에는 “여하정”이라는 아담한 정자가 있다. 이 정자는 1986년 고종 33년에 목사 <이 승우>가 연못가에 세운 육모지붕의 정자다. 정자 안쪽으로는 정자 건립에 대한 현판이 걸려있다.

 

 

                             (사진 :안회당 전경- 새로 도색을 준비)

 

  5. 홍주 의사총(義士塚): 사적 제 431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 이듬해 병오년에 <민 종식>이 중심이 되어 <이 세영>, <안 병찬> 등 조약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싸우다 전사한 분들의 유해를 모신 곳이다.

즉 이조 참판 <민 종식><채 광묵>, <박 인기>와 농민등과 합세하여 홍주성으로 처 들어가 그 해 5 19일 홍주성을 함락시켰다.

그 후 일본군이 5 25일 부 터 지원군이 와서 의병을 공격하여 격전이 벌어져 조양문이 부서지고 열세에 몰린 의병 수백 명이 전사하는 참사가 일어나 이 일대에 가매장 되었었다.

1949년 4월 홍주 군수 <박 주철>이 이 근처에서 수많은 유골을 발견하면서 이것이 바로 항일 의병들의 유골로 판명되어 유골을 수습하여 합장분묘를 조성하였다.

이 분묘가 그 후 <九百義塚>(구백 의총)이라고 불리었던 것을 1992 <홍주 의사총>으로 명명하고, 매년 5 30일 추모제를 지내며, 이 후 충청남도 기념물 4호로 지정되었고, 2001 8 17일 국가지정 문화제로 다시 지정되었다.

 

 

 

                                              (사진: 홍주 의사총 전경)

 

 

 

6. 홍주성 역사관:

홍주성 역사관은 홍성군, 내포 지역에 최초로 지역사를 종합적으로 정리, 전시한 공간이다.

천년 고도인 홍주 지역의 역사를 연표와 고서의 기록을 통해 제시하고, 홍주 읍성 수축과 증축사실을 체계적으로 정리 하여 놓았다.

또 이 고장이 충절의 고장으로 <김 좌진> 장군의 탄생지와 장군의 일제시대의 항거와 청산리 대첩의 역사성을 부각시키었다.

고려 공민왕 때인 1316년에 <최 영> 장군이 홍북면 노은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려 말에 남다른 용맹과 지모를 발휘하여 기울어져 가는 고려를 위해 헌신하였다. 그의 그런 애국충정을 추모하기 위해 1995년 삼봉산에 사당을 짓고  <최 영 장군 영산제>를 해마다 개최하고 있다.

홍주군 결성면 성곡리는 만해 <韓 龍雲> (1879~1944)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그는 불교 개혁자로 “조선 불교 유신론”을 쓰고, 설악산 백담사에서 대장경을 우리말로 옮기는 일을 하였고, 지금도 백담사에는 만해 기념관이 자리잡고 있다. 그는 불교계를 대표하여 기미 독립선언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가하였다. 3년간 옥사리를 한 후 민족 자주 독립운동으로 물산 장려 운동 이끌며 1927 <신간회>를 조직하였다.  만해는 또 시인으로 “님의 침묵”,  “알 수 없어요” 등 유명한 시를 남겨 애송되고 있다. 말년에는 서울 성북동에 심우장(尋牛莊)을 지어 비밀결사를 조직하고 독립운동을 하다 1944년 광복을 못보고 69세로 눈을 감았다.

또한 이 지역에는 고암 이 응로(李 應魯) 화백이 홍북면에서 태어나 20 세기를 가장 치열하게 살다간 예술가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그의 태어났던 곳에 생가 기념관이 들어서 그의 평생의 발자취로 소장 그림 446, 기타 유물 420점이 전시되어 이 고장이 충절의 고장, 예술의 고장임을 알리고 있다.

 

 

 

 

 

님의 침묵      한 용운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 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어 갔습니다
.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指針)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되고 놀란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 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