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종 여행기/우리문화유산 답사

경북 상주지역 문화유산 답사-(11)

땡큐 이영옥 2013. 7. 2. 13:06

 

2013.06.20~

  

경북

상주지역 문화 유적답사

                                    (11)

                                                , 사진 :   한 종

 

 

                 (사진: 보광전 철불좌상과 목각 탱)

 

 

 

 

 

    (11)  경북 상주지역 문화유산 답사

 

역사적으로 보면 경북 경남은 옛 신라시대의 고토이다. 그로 인해 오래된 삼국시대의 불교문화가 통일 신라시대를 거처 고려시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조로 이어지면서 불교대신 유교문화의 본거지로 안동, 예천의 서원이 들어서면서 유학의 본고장이 되었다.

 상주는 인근의 문경 예천 영주로 이어지는 교통의 중심지로서 옛날 신라 시대 부 터 상주 감영이 유서깊은 곳이다.

백두대간의 우람한 산줄기가 태백산 줄기에서 뻗어내려 오면서 이곳에 와서 서쪽으로 경계인 아름다운 산인 속리산과 화양계곡 쌍곡계곡을 품은 비경으로 자리잡고 있다.

 

 

                                                     (사진: 상주 지역 안내도)

 

 상주시는 보은에서 뻗어온 25번 국도가 지나가고 북쪽으로 문경에서 내려오는 3번 국도가 교차하며, 보은, 문경, 예천, 김천, 안동으로 이어지면서 문화의 고장, 학문의 본거지로 자리잡고 있다.

백두대간 줄기가 북으로 이어지고 남으로는 낙동강이 휘돌아 가면서 예천, 의성으로 비옥한 농경지를 이어준다. 그래서 예부터 상주는 삼백의 고장으로 쌀, 목화, 누예가 유명한 곳이다.

신라시대에는 6 세기경부터 상주현이 설치되면서 신라가 북방으로 영토를 확장해 가는 거점으로 발달하였다. 그로 인해 불교가 발전하여 남장사를 비롯한 사찰이 번성하고 석불과 석탑이 도처에 건립되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유학의 본고장으로 발전하고, 임진왜란을 맞아 이곳에서 의병이 궐기하여 왜적과 싸워 전원 순교하는 애국의 고장으로 수많은 무용담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임란시 최초로 적의 침공을 맞아 정 기룡( 起龍) 장군을 중심으로 한 의병이 궐기하여 왜군으로부터 상주를 탈환하여 기세를 떨치었다. 그로 인해 바다에는 이순신 장군이, 뭍에는 이곳의 정 기룡 장군이 쌍벽을 이루는 장수였다. 

 또 유학의 본고장으로서 영남학파의 거두 우복(遇伏) 정 경세( 經世)의 발자취가 남아있어 이번에 불교문화, 유교문화의 맥을 따라 상주 일대를 답사하기로 한다.

   

 

 

 

 

1.고령가야(古寧伽倻)왕릉: 경상북도 기념물 제 26. 상주시 함창읍 증촌리

 

이 곳은 AD42년 낙동강을 중심으로 일어난 6가여 중 하나로 함창, 문경, 가은 지방을 영역으로한 고령가야 태조의 무덤이다.

조선 선조 25(1592) 당시 경상도 관찰사 김 수( )<1537~1615>와 함창 현감 이 국필( 國弼)등이 무덤 앞에 묻혀있던 <古寧國太祖 伽倻王陵>이라고 새겨진 묘비를 발견하여 고령가야 왕릉임이 확인되었다 한다. 그 후 조선 숙종 38(1712) 왕명으로 묘비와 석양(石羊)등의 석물을 마련 후 후손들의 의해 묘역이 정비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고령가야란 이름은 삼국유사의 가야조와 삼국사기 지리지에 아라가야, 대가야, 성산가야, 금관가야 등과 함께 나온다.  고령가야는 신라 첨해왕 때인 3세기 후반에 신라에 복속되어 고릉현이 되었고, 경덕왕 때 고령군으로 되었다. 왕릉에서 300m쯤 떨어진 곳에 무덤 한기가 있는데 이것이 왕비릉으로 추정되고 있다.

 

 

 

                                               (사진: 고령가야 왕릉 전경)

 

 

 

 

2. 증촌리 용화사 석불 좌상: 보물 제 120 .상주시 함창읍 증촌리

 

이 불상은 현재 용화사(龍華寺) 주존으로 모셔진 통일 신라시대의 석불좌상이다. 크기는 높이가 168, 불상 받침의 대좌 높이는 95㎝ 이다.

팔각 연꽃대좌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 하고 있는데 왼쪽 무릎 위에 오른쪽 발바닥이 유난히 넓적하게 조각되어 있어 주의를 끈다.

이 불상은 신라 중대 불상들의 풍만하고 균형있는 모습과 생동감 넘치는 표현방식을 이어 받으면서 형식화되고 경직되어 가는 시대적인 특색을 잘 나타내고 있다. 즉 위엄있는 얼굴과 양감있는 의도가 엿보이지만 지나친 과장으로 인해 생동감이 결여되고 경직된 점 이라던지 형식화된 수법 등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대좌의 표현 양식도 8세기의 팔각 연꽃대좌 양식에서 장식성이 심화되는 신라말기의 양식으로 이행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 : 용화사 석불 좌상)

 

그 옆에 입상은 보물 제 118호로 지정된 것으로, 높이가 1.98m의 판이 그대로 광배를 이룬 가운데 선 모습이다. 얼굴은 다소 긴 편이고 손은 앞쪽으로 모아 아래위로 놓여있다. 둥근 어깨 아래로는 통견의 옷자락이 “U”자 모양을 이루어 흘러내리고 있다. 퇴화된 인상의 입상은 통일신라 말기에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용화사 석불 입상)

 

 

 

3. 공검지(恭儉池): 시도 기념물 제 121 (97.03.17 지정). 상주시 공검면 양정리 119.710

1400여 년 전인 후 삼국시대에 벼농사를 위해 조성된 저수지로 추정 된다. 제천 의림지, 김제 벽골제와 함께 조선시대 3대 저수지의 하나다. 논 습지로서 보전가치가 매우 높은 지역이며 멸종위기의 야생 생물인 가시면 꽃, 잿빛 개구리매(천연기념물 323-6), 붉은 베시매(천연기념물 323-2) 등이 관찰되고 식물 79, 포유류 11, 조류 63, 양서류 8, 파충류 3 종이 서식하는 등 다양한 생물이 서식하는 습지이다.

 일명 공갈 못이라고도 하는데 공갈이란 아이를 묻고 쌓았기에 공갈 못이라는 설도 있다. 그로 인해 공갈 못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연꽃이 풍성하여 중국의 전당호와 견줄만하며, 규모로는 둑길이 860, 둘레는 16 6 47척이라고 신 동국여지승람에 기재되어 있다.

 

 

 

                                                             (사진: 공검지 전경)

 

19세기가 되기까지 큰 못이었으나 고종 때에 한성 부윤인 이 채연의 의견을 따라 둑을 터 논을 만들면서 크기가 줄어들었다.  1952년에 와서는 서남쪽에 오대 수원지가 완공됨에 따라 공갈못은 줄어들고 2000여 평 규모가 되었다. 그로 인해 저수지로서 역할은 줄어들었다.  그 후 1993년 후에야 이 못의 역사성을 인정하여 다시 4천 평으로 늘리고,  공갈못 노래비를 세우고 시도 기념물로 지정하였다.

 

 

 

 

 

 

4. 충의사(忠義祀):  지방 기념물 제 12

 

정 기룡 장군 유적( 起龍 將軍 遺蹟): 조선 왕조 선조시대의 무신으로 자는 경운(景雲), 호는 매헌(梅軒), 시호는 충의(忠毅) 이다.

선조 19(1586) 무과에 급제 후 왕명에 따라 기 룡으로 개명하였다.

1590년 경상우도 병마 절도사 신 립( )의 휘하에 들어가고 이듬해 훈련원 봉사가 되었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별장(別將)으로 승진하였고, 거창 전투에서 왜군을 격파한 후 금산(錦山) 싸움으로 포로가 된 조 경( )을 구출하고, 왜군의 호남지방 전출을 방어 하였으며, 상주 판관으로 왜군과 격전 끝에 상주성을 탈환하였다.

 

 

                                                    (사진: 충의사 전경)

 

1593년 전공으로 회령부사에 승빈했고 이듬해 상주목사가 되어 통정대부에 올랐다. 1597년 선조 30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토벌대장이 되어 고령에서 적군을 대파하고 적장을 생포하는 큰 전과를 올리고 계속, 상주, 합천, 초계, 의령, 고령 등 여러 성을 탈환하고 경상우도 병마 절도사에 승진하였으며 이어서 경주, 울산을 수복하였다.

 1598년 명나라 군대의 총병직을 대행하여 경상도 방면에 있던 왜군의 잔적을 소탕하였고 경상우도 병마절도사, 경상도 방어사, 김해 부사, 밀양부사, 오위도 총부 도총관, 경상 좌도 병마 절도사 등을 역임하고 1617년 통제사 겸, 경상우도 수군 절도사에 올라 통영진중에서 61세로 사망하였다.

이 유적은 1978년 정부의 호국위인 선별 정화사업으로 확장 정화되었다.

 

 

 

 

 

                       (사진: - 정 기룡 장군의 시호 교지, -사당의 영정)

 

5. 상주 화달리 3층 석탑: 보물 제 117 (1963. 01.21 지정)

 

사벌국(沙伐國)왕릉으로 전해지는 곳에 서쪽에 있는 탑으로 통일 신라 시대의 탑이다. 1단의 기단에 3층의 탑신을 올린 형태. 탑신의 몸돌과 지붕들이 한돌로 되어 있으며, 높이가 6.24m로 균형이 잡힌 전형적인 신라 탑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1 층은 몸돌이 넓고 커서 기단보다 높다. 각층의 몸돌을 덮은 지붕 돌은 처마가 반듯하며, 네 귀퉁이의 위로 올라간 정도가 강하여 탑 전체가 생기가 살아났다. 전반적으로 비례가 불균형하고 기단부가 일부 훼손되어 기이한 모습이다. 기단 위에는 머리가 없는 1 구의 석조여래 좌상이 1 층 몸돌에 기대어 앉아 있는데 이는 탑과는 관련이 없어 보인다.

 

 

 

                                                      (사진: 화달리 삼층 석탑)

 

  

6.  傳 사벌(沙伐) 왕릉: 시도 기념물 제 25 (77.12.29 지정)

 

사벌국은 경북 상주지방에 위치하였던 삼한 소국중의 하나로 일명 사라벌 국 이라고도 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이 나라는 본래 신라에 속해 있었으나 점해왕 때 배반하여 백제에 귀속되었다 한다. 그러나 우노(于老)가 군대를 거느리고 그후 토벌하여 사벌주를 설치하였다. 그 후 신라 54 경명왕의 다섯째 왕자인 언창이 신라 말 917년에 사벌주의 대군으로 책봉되어 사벌국이라 칭하고 11년간 이 지역을 통치하였다. 그 후 후백제의 견훤의 침공으로 929년에 패망하였다.  그 후 이 묘는 황폐된 채 있다가 조선 현종 때 나라에서 보수하였고, 이 후 1825년 상주목사 민 종렬이 크게 보수하였으며 왕릉의 크기는 장축 직경 16m, 단축 14.5m, 높이 4.5m 인 동서향의 타원형 봉토분으로 되었다.

 

 

 

                                                        (사진 사벌 왕릉 전경)

 

  

7. 도남서원(道南書院)

 

1606(선조 39) 지방유림의 고의로 정 몽주, 김 굉필, 정 여창, 이 언적, 이 황, 노 수신, 유 성룡, 정 경새, 이 준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였고 위패를 모시었고 해마다 춘추향사를 지내고 있다. 낙동강가에 자리잡은 서원의 경관은 아주 수려하다.

 그 뒤 1616년 광해군8년에 노 수신, 유 성룡, 1635(인조 13) 정경세 를 추가 배향하였고, 1677(숙종 3)에 도남(道南)이라고 사액되어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어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경내의 건물로 묘우인 도정사, 동재인 손학재, 서재인 민구재, 신문인 입적문, 당상인 일관당, 누각인 정허루, 풍무한, 영귀문 등이 있다.

 

 

 

                                                  (사진: 도남서원 전경)

 

 그 뒤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패령으로 1868년 고종 5년에 훼손된 후 복원되지 못하였다. 사원 경내의 산소를 모아 유림이 매년 3월 그믐날에 향사를 치르고 있다.

재산으로는 전답 3500 , 임야 2정보 반, 대지 1000평이 있다.

도남이란 명칭은 송나라의 정자가 제자 양씨를 고향으로 보낼 때 우리의 도가 장차 남방에서 행해지리라한 말에서 비롯된 것으로 조선의 유학 전통은 바로 영남에 있다는 자부심에서 명명한 것이다.

 

 

 

 

                                        (사진: -동제 손학제, -서제 민구제)

 

8 상주 양진당(養眞堂):보물 제 1568. 2008.07.10 지정) 상주시 낙동면 승곡리

 

이 건물은 조선 중기 문신 점간 조 정( )<1555~1636> 선생의 가옥이다. 그는 서애 유 성룡(西厓 成龍)의 제자이자 김 성일( 誠一)의 조카사위가 되어 퇴계학파를 이어받은 사람이다. 그는 상주 최초의 서원인 도남서원을 세우고 향약을 실시하여 임진왜란 후의 향촌사회를 성리학사상으로 안정하려고 하였다. 조 정은 처가인 의성 김 씨 가문에서 많은 재산을 물려 받고 65세 때에 처가에서 돌아와 1626년에 이곳에 양진당을 짓기 시작했다. 1981년에 해체 보수 중 발견된 상량문에 의하면 1626(인조 4)에 착공하여 3년의 공사 끝에 1628년에 준공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양진당은 평야의 낮은 배산을 이룬 곳에 앞으로는 강이 흘러 가는 터에 자리잡아 집을 지었다. 명당에 터를 잡은 것이다. 이 집은 낮은 돌담을 들어서면 집이 길게 자리잡아 정면에서  9칸이고, 서쪽으로는 4칸을 이루고, 동쪽으로는 6칸으로 이어졌다.

 

 

 

                                                    (사진: 양진당 전경)

 

길면서도 지붕은 맞배 지붕으로 되어있어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1층의 마루는 사람 키 만큼 올라가 있어 높직하게 보인다. 양진당은 낙동강이 지척이라 장마철에 강이 범람하면 집 앞까지 물이 차오른다. 그것을 방지하기 위해 높이 지은 것으로 생각된다.

지을 당시에는 아흔 아홉 칸 이었다는데 지금은 본채만 남아있다. 1626년에 짓고 1890년에 실측조사를 하고 1966년 대홍수로 대문채 등이 유실되었던 것을 2005년 발굴하여 복원하였다. 상습적 침수지역에 정면 9칸 측면 7칸의 자형 평면을 한 고상누각(高床樓閣)식으로 지은 외관과 다소 복잡하면서 치밀한 내부 공간 구성, 그리고 정성 어린 조형시상을 읽게 하는 목조 수법 등이 돋보이는 상류주택이다.

양진당은 내부구조도 특이하다.  정면에는 출입구가 없고, 양 옆으로 좁은 계단이 설치되어 오르내리게 되어있다. 방 앞으로는 좁은 마루가 이어져 있고, 동쪽으로는 6칸의 대청마루가 있고 방의 출입구는 마루로 만 나있다. 이 방들은 한 칸씩 일자로 이어져 있다. 양쪽으로 마루를 통해 이어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안채의 양 날개는 부속시설이고 서쪽으로는 큰 부엌이 있는데 긴 방을 향해 아궁이가 설치되 있다. 기둥은 아래쪽은 네모나게 가주가 져 있고 위쪽으로는 둥근 원주이다.

1985 12.30 일 경북도 유형 문화재(85) 로 지정 관리되어 오던 중 조선시대의 주거 건축의 지역적 특성과 역사적 변천과정을 파악할 수 있는 학술적 가치를 높이 평가 받아 2008.07.10 일자로 국가지정 보물로 승격되었다.

 

 

 

                             (사진: 양진당  입구- 풍양 조씨 연수원)

 

 

9. 상주 오작당(悟昨堂): 경북도 민속자료 제 32. 상주시 낙동면 승곡리

이 건물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고 후에 이조 참판에 추증된 점간 조 정 선생이 지은 것으로 본래 양진당이 있던 근방에 선조 34(1601)에 처음 지었던 종가로 현종 2 (1661)에 현 위치로 옮겨지었다.

당초의 건물은 내사와 외사를 합하여 모두 48여 칸 이었다고 하나 정조 5(1781) 중수 때 부분적으로 훼철되었다. 현재는 안채, 사랑채, 가묘가 남아있다. 집밖에 있는 또 하나의 사당은 조 정의 사당으로 본래 양진당에 속했던 것이나 이쪽으로 옮겨온 것이다.

 

 

 

                                                   (사진: 오작당  현판)

 

연못을 지나 대문으로 들어가면 사랑채와 마주한다. 일곱 칸짜리 일자모습의 사랑채는 동쪽이 마루와 사랑방이고, 문간을 사이에 두고 서쪽은 행랑채가 이어져 있다.

담장으로 둘러 쌓인 집 전체 구조는 ︹ 자 모양이다. 안채는 정면 5칸 옆면 2칸이다.   

안채는 겹집으로 본래는 좌우익사가 있었으나 없어졌다. 기둥에 고식(古式) 모점이가 되어 있고  받침에 파련각(波蓮刻)이 있으며, 부엌의 격자창, 판문 등이 모두 고식을 간직하고 있다. 인근의 양진당과 같은 유형이면서 그보다 오랜 건물로 주목된다.

 

 

 

 

 

                            (사진; -오작당 입구의 소슬 대문, -오작당 본채)

 

 

10. 상주 임란 북천 전적지(壬亂 北天戰蹟地)

경북도 기념물 제 77(88.09.23 지정)

 

상주시 북쪽의 북천면 자산 기슭은 조선조 선조 25 (1592)에 임진왜란 당시 큰 전투가 벌어졌다. 부산에 상륙한 왜군이 서울로 진격하기 위해 상주로 처들어 왔다. 이에 대항하여 우리 관군과 의병들이 격전을 펼친 전적지이다. 이 전투에서 순변사 이 일( )이 인솔한 관군과 상주지방에서 궐기한 의병들이 힘을 합처 북천을 사이에 두고 왜군과 총력전을 펼첬다.

왜군 소서행장이 지휘하는 17천여 명과 조선의 관군 60여명과 의병 800여명이 북천에서 격전을 벌여 조선의 군 관민이 전원이 순직한 곳이다. 그 때가 1592(선조 25) 4 25일로, 종사관 윤 섬( ), 이 경류( 慶流), 박 호( )등과 상주 판관 권 길( ), 사근 도찰방 김 종무( 宗武), 호장 박 걸( ), 의병장 김 준신( 俊臣), 김 일( ) 등 수많은 군사들이 순절하고 패전하였으나 임란 사상 중앙 관군과 의병들이 뜻을 모아 왜군에 대항한 첫 전투라는데 큰 뜻을 지니고 있다.

 

 

                                                     (사진: 임란 전적지 입구)

 

이를 기리기 위해 1988년 지방 기념물 제 77호로 지정하고, 1990년부터 사당, 전시관, 사적비 등을 세우고 임란 북천 전적지를 만들었다 한다. 왜병 17천명에 대항하여 싸우다 순절한 이 일, 이 경류, 박 지의 3 충신, 의병장 김 준신, 김 일의 2의사를 충의단에 모시었고 사적 공원으로 조성하였다. 이곳에는 현재 충렬사, 전적비, 상산관, 비각, 임란 기념관, 침전정, 태평루 등이 새로이 이전하거나 조성되었다.

1)상산관(商山館): 경북도 유형 문화재 제 157. 상주시 경상대로 3123

 이 객사는 지방관아의 중심 건물로서 고을 수령이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고 망궐례(望闕禮)를 행하였으며,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들이 머물렀던 시설이다. 이 건물은 1328년 충숙왕 15년에 목사 김 영후( 永煦)가 중수했다는 상산지기록으로 보아 이보다 앞서 창건된 것으로 여겨지는 객사이다.

 

 

 

 

                                                         (사진: 상산관 전경)

 

1526년 중종 21년에 소실된 것을 목사 윤 탕( )이 중건하였으나 1592년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06년 선조 39년에 재건하고, 1666년 현종 7년에 다시 중건하였다.

근대에 와서 현 상주경찰서 자리에 있었으나 1940년 상주 여자중학교로 옮겨와 교실로 사용하다가 1991년 지금의 위치로 이전 하였다.

2) 유물관: 현재 이곳 유물관에는 임진왜란 당시에 이곳 전적지에서 발굴한 13 4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그 내용은 고지도 1, 곽 재우의 칼 1, 교지 6, 당파(鏜把) 2, 각 궁 1, 화살촉 7, 화살 4, 천자총통(天字銃筒) 1, 승자총통(勝字 銃筒) 1, 일본도 1, 조총 1, 윤 섬 문열공 시장(諡狀) 1 점과 서책 11종 등이 남아있어 아주 귀중한 자료이다.  

 

 

 

11. 상주 남장사:

 

조계종 제 8교구 본사인 직지사의 말사로 경북 8경중의 하나이다. 노음산 (725m)으로 오르는 중턱에 자리잡고 있으며, 신라 흥덕왕 7(832) 진감국사 혜소(慧昭)가 창건하여 처음에는 장백사라 하였다. 고려시대 명종 16(1186) 각원화상(覺圓和尙)이 지금의 터에 옮겨 짓고 남장사라 하였는데 그것은 북장사, 갑장사 등 상주지역의 4 장사의 하나로 자리잡게 되었기 때문이다.

진감국사는 중국 종남산에서 범패(불교 음악으로 부처님의 공덕을 찬양하는 노래)를 배워 830 57세 때에 귀국하여 이곳에 머물면서 무량전(현 보광전)을 짓고, 범패를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보급하였다.

 

 

 

                                               (사진 : 남장사 보광전 전경)

 

1203년 금당을 신축,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35년 정수선사기 중창, 그 뒤 영산전, 진영각, 상로전이 새로 증축할 때, 석가의 진신 사리 4과와 칠보 류가 발견되었다.

 남장사 보광전 목각탱화는 보물 제 922호로 지정, 주불 뒤에 있는 후불탱화는 나무로 조각한 것이 특색이다. 극락보전에는 중앙에 아미타불, 좌우에 관세음, 대세지(大勢地) 두 보살을 모시었다.

극락보전 안에 업경대 2 점이 안치되었고, 부도 골에는 4기의 부도가 있고, 석장승 1 기는 경북도 민속자료 제 33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 보광전의 조선시대의 철조 비로자나불은 보물 제 990호로 불교예술의 걸작품이며, 일주 문은 지방문화재 442호로 지정 되어 있다.

 

a)   남장사 석장승(石長丞):

 

 사찰에서 약 500 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장승은 보통 마을 수호신, 이정표의 기능을 가진 민속신앙 문화재이며 사찰 입구에 세워져 잡귀의 출입을 막고 사찰 성역내의 금지된 규제와 풍수비보를 지켜주는 수문과 호법의 신장상(神將像) 이라 한다.

 그 복부에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아라 하였고 임진 9월립(壬辰九月立)이라는 명문이 있는데 임진은 극락보전의 현판 기록과 대조하니 조선 순조 32(1832), 혹은 고종 29(1892) 중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원초적인 소박함을 지니고 있는 이 장승은 높이가 1.85m로 민간신앙과 불교가 어우러진 신앙 예술품이다.

 

 

 

 

                                              (사진: 남장사 입구의 석장승)

 

 

 b)    보광전의 철조비로자나불: 보물 제 990

 

 불상 뒤의 원광인 광배(光背)가 없고, 불신만 남아있으며 크기는 높이가 133, 머리높이 34, 어깨 폭 58, 무릎 폭 103㎝이다. 나선형 머리 위에는 큼직한 살 상투가 있고, 백호가 표시되어 있다. 얼굴은 눈, , 입의 각 부분이 모두 잘 정제되어 있는데 눈은 반쯤 감은 형태이다. 특히 어깨에 닿을듯한 긴 귀와 목에 돌려진 삼도(三道)와 원만한 상호와 잘 조화되어 위엄 있고 자비스러운 인상을 자아낸다. 이 불상은 고려시대에 조성된 철불의 다양한 양식을 보여주는 뛰어난 작품이다.

 

 

 

                             (사진: 보광전의 철불 좌상과 목각 후불 탱 )

 

철불 뒤를 감싸고 있는 후불 탱은 목각 탱에 금분을 칠하였다. 보광전의 주존불인 비로자나불의후불탱은 나무 7장을 잇대어 불상들을 조각한 것이다. 이 아름다운 목각 탱은 19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며 보물 제 922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같이 불상 뒤에 목각 탱을 세운 곳은  경북 문경의 대승사, 남원의 실상사 약수암 등에 있다.

  

c)     남장사 일주문(一柱門): 경북도 문화재 제 442

 

일주문의 정확한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현판에 의하면 19세기 말 이전이라 추측된다.

이 건물의 양식은 일자형에 정면 1(4m), 측면 1(2.6m) 으로 당초에는 자연석으로 낮게 쌓은 기단 축대였으나 후대에 장대석으로 다듬돌 쌓기를 하였고, 원기둥에 심방목(心枋木)을 받친 주삼포(柱三包)에 삼량가구(3樑架構)를 걸고 겹 처마에 팔작합각(八作合角) 지붕을 한 건물로 금단청을 하였다.

이 건물의 특색은 양쪽 둥근 기둥 앞뒤로 방주(方柱)를 붙여 세우고 다시 활주(活柱)로 고여서 중앙을 받치고 있는데 그 주두(柱頭)가 용모양을 하는 등 표현이 매우 사실적이다. 전체적으로 건축 외형에서 균형감과 볼륨감이 있으며 다포계(多包係) 건축수법도 매우 짜임새를 갖추고 있고, 특히 구조적인 면을 고려한 까치발의 조각기법이 특이하다.

남장사 일주 문은 조선 후기 건축수법과 조각기법이 잘 보존되어 있어 건축 및 조각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다.

 

 

 

 

                                             (사진 : 남장사 일주문 전경)

 

 

12.우복 종가(宗家): 시도 민속 문화재 제 31 (82.02.24). 상주시 외서면 우산리 19.

 

901 지방도 큰길에서 넓은 논 가운데를 지나 개울을 건너 오솔길을 오르면 왼쪽으로 가는 길이 나오고 산등성이 중턱에 자리잡은 우복 종택이 보인다. 진주 정씨 우복(遇伏) 정 경새( 經世)(1563~1633) 38세에 이 고장에 와 여생을 지낸 곳이다.

우복 동천이라고도 하며, 그가 선조와 인조때 성실하게 활동한 것에 대한 은전으로 영조가 남북10, 동서 5리의 우복 동천 구역을 하사 함으로서 5대손인 정 주원 때 부 터 대대로 살게 되었다. 자형으로 부엌, 안방, 윗방, 대청, 상방으로 구성되었고 사랑채는 일자형 구조로 사랑방, 대청, 건너 방이 배열되어 있다. 집 몸체의 바닥이 마당보다 상당히 높아 독특한 모습이다.

 

                                          (사진: 우복 종가 입구)

 

 대문 앞이 시원스레 널다. 솟을 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가 곧바로 나온다. 2단의 축대를 쌓고 지은 ㅡ 자형 건물인데 중앙에 산수헌이라는 현판이 돋보인다.

앞으로 올라보니 아까 지나온 들판이 온통 푸르고 풍요롭게 보이고 그 너머 멀리로는 얕은 산이 바라보인다. 대청으로 오르는 데는 줄이 하나 달려 있어 잡고 오르게 되어있어  산수헌 이란 현판을 가린다.

 사랑채 뒷 쪽으로 돌아가니 안채 건물이 나온다. 전체적으로 보니 자를 이루고 있다. 안채는 좌우로 내달은 방과 부엌이 보이고 대청마루는 두 칸으로 넓어 보이고 이댁 종가 며느리가 우리들을 맞이한다. 최근에도 제사를 년 17회를 지낸다니? 우리는 이제 년 7회 정도 제사를 모시고 있는데도 어려운데 참으로 양반 종가집 제례관습에 어려움을 여실히 느낀다. 이제 5십대 후반의 이댁 안주인의 건투를 빈다.

안채 뒤쪽의 쪽문 너머로는 가묘로 연결되며 그 뒤로는 사당이 있다. 

우복 동천은 한 시대를 대표하는 사대부가의 표상이다. 서양으로 말하면 중세의 장원에 해당한다.앞으로는 멀리 논이 푸르고 뒤로는 완만하게 산자락으로 이어진 우복 동천은  정 경세 집안의 특유한 정서가 풍긴다.

 

 

                                                (사진: 우복 종가의 본채의 산수헌)

 

특히 종가로 오르는 오른쪽에는 우복 선생이 개창한 선비의 독서처이자 강학당으로 활용한 대산루(對山樓)와 계정(溪亭)이 자리잡고 있는데 영남의 강학소로 알려진 건축물이다. 정 경세는 서애 유 성룡의 제자로 퇴계학의 맥을 이었으나 기호학파인 동춘당 송 준길을 사위로 맞이하여 학제간의 화합을 도모하였다.

개울을 건느면서 숲으로 오르는 길목 오른편에 자리잡고 있다. 먼저 보이는 정면 2칸 측면 1 칸의 초가는 당시의 정 경세가 기거 했다는 정자이다.  그때는 청간정(淸澗亭)이라 하였다는데 지금은 계정(溪亭)이라는 조그만 현판이 달려 있다. 계정 바로 옆으로 돌아가면 대산루로 들어가는 문이 나온다. 대산루는 정 경세가 공부하던 곳을 18세기 이후에 그의 6 세손인 정 종로가 크게 지은 것이다. 지금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을씨년스럽게 보이나 안으로 들어가 보면 특이하게 보이고 자세히 보게 된다. 전면으로 4, 측면 2칸의 단층 집인데 오른쪽으로 다시 정면 2칸 측면 5칸의 2층 누각을 돌계단으로 연결하여 놓았다. 2층은 온돌방, 책방, 창고 등으로 쓰였으나 마루에서 보면 제법 운치가 있다. 3 면이 개방된 누마루라 앞쪽으로 멀리 내다 볼 수 있어 아주 시원하다.  건물의 이름 값을 하는 대산루란 말이 딱 맞는 곳이다. 이층 방에도 온돌을 놓아 겨울에도 사용하게 하였으니 돋보인다.

대산루는 이곳을 나와 우복 종가로 올라 가면서 오른쪽으로 바라보면 “T” 자형의 건물로 보이고균형감있게 보여 아주 특이한 모습이다.

 

 

 

                                                        (사진: 대산루 전경)

 

 

13. 상주 동학 교당:

 

a)  동학이란:

 

동학은 조선시대의 봉건적인 신분제도의 반기를 들고 인간의 주체성과 만인의 평등사상을 표방한 우리나라의 자생 민족종교이다. 창시자는 수운(水雲) 최 제우( 濟愚) 선생이며 2 대 교주 해월(海月) 최 시형( 時亨) 에 이르기 까지 주 사상은 인내천(人乃天)이었다.

 교세 확장에 따라 각 지방에 남.북 접소를 두고 조직화하였는데, 교세의 확장에 불안을 느낀 조선의 조정에서 혹세무민(惑世誣民)이라는 죄로 탄압을 하자 이에 대항하여 탐관오리의 숙청과 보국안민을 내세워 전 봉준( 琫準)이 주도하여 1894년 동학 농민혁명의 주체가 되었지만, 일본군의 개입으로 우금치싸움에서  패한 후 지하에 숨어 활동하게 되었다.

 

 

 

                                      (사진:  동학 교당 입구의 표지석)

 

그 후 동학정신은 항일 의병항쟁과 3.1 독립운동으로 계승되면서 3 대 교주 손 병희( 秉熙)로 계승되어 해방 후 천도교로 개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b) 상주 동학 교당의 유래

 

1대 교주 최 재우, 2 대교주 최 시형을 이은 3 대교주 손 병희( 秉熙)가 천도교로 개명 창시하여 순수교단을 표방하고 이념에서 벗어나자, 공주에서 활동하던 김 주희( 周熙)<1860~1944> 선생이 탄압을 피하여 보은으로 숨어들어 처음에는 경천교(敬天敎)라고 하였으나 1915년 이곳 상주에 본거를 정하고 동학의 정신을 계승하여 동학교(東學敎)라고 하였다.

 동학교는 일제의 문화통치에 따라 보수적인 종교로 인정 받아 1922년에는 조선 총독부의 공인을 받아 1918년에 현재의 동학교당을 창건하고 동학 경전, 동학가사 등 대대적인 간행사업을 펴 이념위주의 교세확장을 꾀하였다.

 그 후 1936년 일제에 의하여 공인 취소 되었으며, 탄압에 따른 교주 김 주희 선생의 죽음으로 교세가 위축되었다.

 

 

 

                                        (사진: 동학 창시자 최 제우 전경)

 

 

c)김 주희 선생의 동학 사상:

 

동학은 교주 최 제우 이래 2대 최 시형에 와서 북접으로, 전 봉준은 남접, 김주희도 남접으로 분리되어 북접은 3대에 와서 손 병희가 천도교로 개명하였고 김 주희의 남접은 경천교를 거처 동학교로 분리되어 이곳에 동학교당으로 이어지고 있다.

 김 주희 선생의 동학사상은 최제우 선생의 이념을 계승, 체천사상(體天思想)을 철저히 종교적인 측면에서 파악하여 시대변천을 불문하고 정치 현실을 간섭하지 않는 계천입극(繼天立極)을 목적으로 하였다.

 동학 이념 실천에 있어서 전 봉준 선생이 혁명적인 실천이었다면 최 시형 선생은 현실적 실천을 중시 하면서도 종교적으로 파악하여 소극적이었고, 김 주희 선생은 이념을 중시하여 보수적이었다. 그것은 은척의 동학 본부에서 짧은 기간 동안 많은 동학 경전, 동학가사 등을 편찬한 데서 볼 수 있다. 이곳 동학교당에는 전국유일의 동학관련 문적, 전적 등 1425점의 유물을 17개 동의 전시관에 보관 전시되어 있어 동학교의 산 역사장으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그의 동학은 세속과의 절연, 일체의 무력 배제, 일체의 정치권력에 대한 무저항과 비타협으로 나타났지만 조선의 민족혼을 말살하여 했던 일제에 의하여 탄압 받았다.

 

 

 

                                           (사진: 동학 3 대 교주의 사당)

 

 14. 장각폭포

 

충북  속리산 천왕봉(1058m)에서 발원하여 상오리 까지 흐르는 계곡수로 높이 6m로 여름이면 장관을 이룬다. 폭포아래 검푸른 용소는 깊이를 헤아릴 수 없으며, 낙수로 인해 빙글빙글 돈다. 폭포위로는 금란정과 노송이 어우러져 고색창연하게 서있다. 폭포 밑으로는 함북정이 있어 산, 폭포, 정자가 조화를 이루어 멋진 운치를 자아낸다.

 

 

 

 

                                               (사진: 장각폭포와 금란정 전경)

 

  

15. 상오리 7층 석탑: 보물 제 683 (80.09.16 지정) 상주시 화북면 상오리 699

 

장각폭포에서 속리산 방향으로 500m 올라간 곳에 오른쪽 언덕에 서 있는 탑이다. 탑이 세워진 곳은 장각사라는 절이 있었다 하나 기록이 없다.

탑은 2단의 기단 위에 7층의 탑신을 세운 것으로, 흙을 다져 만든 단 주의에 돌로 테두리를 잡아 구역을 정한 후 그 위에 탑을 세웠다. 기단은 여러장의 판돌로 이루어 졌고 탑신은 위층으로 가면서 일정한 비율로 줄어들어 균형을 이루고 있다. 1 층 몸돌은 3개의 돌로 구성되어 있으며, 네모서리 에는 기둥모양이 새겨져 있고 동쪽 면에는 문짝 모양의 조각이 있다.  2 층 이상은 지붕돌과 몸돌을 하나의 돌로 쌓은 것으로 보인다. 얇아 보이는 지붕돌은 경사가 완만하고, 네귀퉁이는 조금씩 치켜 올려져 있다. 밑변의 받침은 5층까지는 5, 6~7층은 4단을 두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치는 네모난 받침돌만 남아있다.

 

 

 

                                       (사진: 상오리 칠층 석 탑 전경)

 

 탑신의 경쾌함이 돋보이고, 전체적인 균형미가 뛰어나다. 통일 신라 시대의 양식을 이어받은 고려 전기의 탑으로 추정 된다. 한일 합방 후 허물어진 것을 1978년에 복원하였고 높이는 9.2m로 상당히 균형잡힌 모습이다. 그러나 기단 밑의 지반이 불안하여 최근에는 입구를 차단하여 놓았다.

 

 

16. 상주 박물관: 2003. 11. 02 개관

 

고대 사벌국 및 고령가야가 번창했던 상주는 신라시대에는 9, 고려시대에는 8목에 하나, 조선시대에는 경상감영이 위치했던 유서깊은 고장이다.

고도 상주의 역사성을 부각하고 문화유산을 체계적으로 보존. 관리하기 위하여 설립되었다. 지방 박물관으로 주목할 만한 곳으로 선사시대 부 터 근, 현대에 이르기 까지 상주지역에서 출토되고 수집된 토기류, 금속류, 지의류, 회화류 등 5개의 전시실에 46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 밖 야외공간에는 공연장, 분수, 생태연못 등이 조성되어 있으며, 앞뜰에는 석등, 석탑, 비석등의 석조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복룡동 유적(사적 477)에서 확인된 조선시대 연못과 우물도 이전 복원하여 전시되고 있다.

 

 

 

                                             (사진: 상주 박물관 전경)

  

 

  1)     선사시대의 상주관: 영남 내륙 지방에서 가장 오래된 구석기 유적이 낙동면 신상리에서 출토된 것과 신석기시대 유물인 석기류 등이 다양하게 전시되어 있다. 청동기 시대와 초기 철기시대의 각종 민무늬 토기와 돌 화살촉, 점토 대토기, 주머니 호 등과 요녕식 동검도 전시되어 사벌국 이전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다.

 

 

 

 

 

        (사진: 원형 점토 대토기)                         (사진: 두발 달린 바리)

 

  2)     사벌국과 신라관: 원 삼국 시대에 상주지역에는 사벌국이 자리잡고 있었으며, 사벌면 금호리 일대의 토광묘 유적과 인근 이부곡 토성을 통해 유적을 볼 수 있다.  또한 함창읍 신흥리, 사벌면 화달리 등에 광범위한 고분군이 형성된 것으로 보아 이 지역에 당시 강력한 나라세력이 형성되었던 것이다.

 

   

 

 

     

 

 

                                                   (사진: 뚜껑 굽다리 접시)

 

     3)     통일 신라. 고려 시대 관: 통일 신라 시대와 고려시대의 화려했던 불교문화와 도자기 문화를 전시하고 있다. 보물 제 661호인 <석각천인상>을 박물관으로 옮겨 전시하고 있으며, 서곡동에서 출토된<신해명 동종>과 청리지역과 성동에서 출토된 도자기류도 상주박물관의 명품이다.

 

 

 

 

                                                     (사진: 석각 천인상)

 

   4)     국란 극복과 임진왜란 관: 임진왜란은 1592~98년 까지 조선과 일본간의 전쟁으로, 1592 4 25일 최초로 이곳 상주 북천에서 전투가 벌어져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에게 관군이 무너지고 수많은 인명피해가 났다. 그러나 상주 판관 <정 기룡> 장군이 의병을 조직하여 1592. 10 20일 용화동 전투에서 승리하여 상주성이 탈환되었다.

 

 

 

 

 

 

 

                                       정 기룡 장군에 내려진 교지와 장군상

      

 

 

5)     상주의 유교문화 관: 상주에서 유학은 류 성룡, 김 성일 등 동인 세력과 밀접한 관계에서 크게

번성한 것으로 보이는데 임란 후 상주지방의 대표 유학자 정 경세, 조 정, 이 전( ) 등이 류 성룡과 관계를 맺었다. 서원은 임진왜란 후 건립이 되었는데 도남서원, 옥동서원 등이 사액서원으로 되었다.

이곳에 전시된 <尙州牧先生案>(51.5×37.8)은 상주목사로 부임한 역대의 목민관의 명단을 기록한 것으로 선조 37(1604)에 부임한 김 상용( 尙容) 목사부터 최근까지 수많은 목민관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지방통치를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