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종 여행기/우리문화유산 답사

우라문화유산답사-조선유학의 거장-송 시열가를 찾아-대전,옥천일대-<23>

땡큐 이영옥 2014. 12. 2. 13:03

  2014. 11. 

 

 

                                             <우리문화유산 답사>

 

                                                조선 유학의 거장

 

          송 시열가의발자취를 찾아

                                          (23)

                   -대전 옥천 일대-

                                          

                                글, 사진:  한 종

 

 

        (사진: 우암 송시열)

 

 

       어느덧 금년도 벌써 저물어 간다. 금년에 여행과 답사는 저조한 편이라 아쉬운 점을 남기면서    한해는 그저 뒤안길로 사라져 간다.

이번 답사지역은 충남 대전 일대와 충북 옥천지역을 아우르는 유교, 불교문화벨트를 찾아가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대전이 도시가 확장되면서 예전에 옥천, 영동 일대는 지금은 충북 생활권에서 이제는 대전생활권으로 편성되어 가고 있다.

경부 고속도로가 생기면서 부산으로 가는 열차와 더불어 대전 일대는 우리나라 중부권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정부에서도 대전 엑스포를 계기로 주변을 과학단지로 조성하고 정부 대전청사와 더불어 신 행정수도가 인근으로 옮겨 옴으로서 대전지역은 한국의 중심지역으로 거듭나고 있다.

또 대전 지역은 이제는 교통의 요지로서 점점 그 중요성이 더해가고 있다.

대전과 옥천, 영동 사이에는 추풍령을 기점으로 우리나라의 영남과 호남의 분기점이 되면서 철도와, 고속도로가 나란히 가다가 서쪽으로는 호남 고속도로로 연결되고 동쪽으로는 추풍령을 지나면서 경북 상주로 이어지면서 분수령을 이룬다.

 

                                                             (사진:대전광역시와 옥천일대)

대전의 도시지역이 확장되면서 예전에는 옥천, 영동이 산골이었으나 이제는 아주 가까운 도시 주변지역이 되어 과거에 문화유산이 이제는 도시주변으로 다가오고 있다.

또 옥천 영동 지역은 멀리 삼국시대 는 백제와 신라의 격전지였다. 소백산맥의 기슭인 속리산 북쪽의 제천 단양 지역은 신라와 고구려의 각축장이었고, 반면에 이 지역은 백제와 신라의 접경 지대가 되어 옛날 격전지인 구진벼루와 계족 산성이 남아있다.

아울러 대전 회덕 일대에는 조선시대의 유학자인 동춘당 송 준길(宋 浚吉)의 옛 고택이 자리잡고 그와 인척 관계였던 우암 송 시열(宋時烈)이 화양동을 떠나 만년에 이곳에 은거하면서 후학을 가르첫던 발자취가 곳곳에 남아 있다.  아울러 송 준길의 고택과 더불어 송 시열의 발자취가 이곳에 많이 남아있어 이번에 함께 돌아보며 여기에 더해 신라 시대에 창건하였다는 옥천의 용암사와 쌍 삼층석탑, 마애여래불도 함께 돌아보는 기회로 삼기로 한다.

 

1. 우암사적 공원(尤庵史蹟公園):대전시 동구 가양동 65

 

조선시대의 유학의 거두이자 남인의 정점으로 우암 송 시렬(宋 時烈)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곳이다. 당시대로 흥농서당(興農書堂)과 남간정사(南澗精舍)를 세워 제자들과 학문을 연구하며,북벌책(北伐策)을 연구하였던 곳으로 우암을 추모하기 위한 곳이다.

 우암은 본관은 은진이고, 자는 영보(英甫)이며, 우암은 그의 호이다.

 이조 인조 때의 생원시험에 합격 후 이조판서를 거처 우의정, 좌의 정을 지냈으며, 시호는 문정(文正)이고 문묘에 배향되었다.

 현재 이곳에는 남간정사와 소제동에서 옮겨온 기국정(杞菊亭)등이 남아있고, 선생의 문집인 <宋子大全>의 목판본이 보관되어 있다.

그의 숭고한 뜻을 기리기 위해 이곳에 <남간사>를 세우고 주변을 정비하여 우암 사적 공원을 조성하였다. 1 6천 평으로, 1995~97.12.31 사이에 남간사, 이직당, 심결재, 견뢰재, 명숙각, 인함각, 내삼문, 외삼문 등의 8 개 동을 세우고 유물 전시관과 장판각 등을 건립하였다.

 

a)   기국정(杞菊亭)

 

우암이 소제동 소제방죽 옆에 세웠던 건물이다. 우암은 소제에 연꽃을 심고, 건물주변에는 국화와 구기자를 심었는데, 연꽃은 군자를, 국화는 세상을 피하여 사는 것을, 구기자는 가족의 단란함을 의미한다. 우암은 이곳을 찾아오는 손님들과 학문을 논하며 지냈으며, 구기자와 국화가 무성함에 건물 이름을 기국정이라 불렀다. 본래 이 건물은 초가지붕이었으나 우암의 큰 손자가 기와지붕으로 수리하였고 그 후 소제가 메워지면서 1927년에 이곳으로 옮기었다.

 기국정사 앞 못 가엔 우암이 심었다는 오래된 배롱나무 한 그루가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삭은 줄기를 기둥에 의존하고 있으니 모든 살아있는 것은 무엇이나 세월은 무상한 것이다.

 

 

                                             (사진: 기국정 전경)

 

 

b)  남간정사(南澗精舍): 시 유형문화재 제 4

 

낫으막한 야산 기슭에 남향으로 자리잡은 남간정사는 우암선생이 학문을 가르첬던 곳이다. 우암은 소제동에 살면서 흥농촌(興農村)에 서재를 세워 능인암(能人庵)이라 하였고 그 아래로 남간정사를 지었다.

그는 이곳에서 많은 제자를 길러내고 그의 학문을 발전시키었다.

남간정사는 계곡에 있는 샘으로 부 터 내려오는 물이 건물의 대청 밑으로 통해 아래 연못으로 흘러 들어가게 하였는데 이는 우리나라의 정원조경에서 아주 특이한 사례이다.

남간정사 위로는 위패를 모신 사당이 오랜 세월을 이기고 서있고 문 앞에는 고양이가 지키고 있다.

 

 

                                                             (사진: 남간정사 전경)

 

 밖으로 나와 언덕으로 오르면서 정면 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마음을 곧게 쓰는 집이라는 뜻을 지닌 강당으로 정면 5칸의 이직당(以直堂)이 자리잡고, 좌측엔 모든일을 명확하게 하고 마음을 맑게하라는 뜻의 선비들의 공부방인 명숙각(明淑閣)이 있고, 우축으로는 모든 괴로움을 참고 또 참아야 한다는 뜻을 지닌 인함각(忍含閣)인 선비들의 공부방이 좌우에 있다.

또 그 위로는 심결재(審決齋) 매사를 심사 숙고하여 결정하라는 뜻의 선비들의 공부방과 우암 선생의 마지막 교훈을 받들고 선현들의 가르침을 굳게 지키라는 뜻의 선비들의 공부방인 견뢰재(堅牢齋)가 있어 우리들을 숙연하게 한다.

2칸 계단 위로는 현도문이 서있고  그 안으로는 남소사() 라는 사당이 세워 졌다.

유물전시관에는 그의 영정이 있고  가계도와 연보가 그려져 있다.

그의 필서인 <海東乾坤 噂固大義>라는 崇禎 甲辰 5月에 쓴 글씨가 보이니, 이는 청나라를 배척하고, 북벌을 추진하라는 주나라의 대의를 실현하자는 뜻을 지닌 것으로 보인다.

 

 

 

    2.동춘당 송 준길(同春堂宋 浚吉)

 

동춘당 송 준길(宋 浚吉)은 우암 송 시렬과 더불어 당대의 대유학자였다. 자는 명보(明甫), 호는 동춘당(同春堂), 시호는 문정(文正), 본관은 은진이다. 1606년에 출생하여 어려서 부 터 글의 재주를 보였고, 회덕 향교에서 배우다, 사계 김 장생(金 長生)의 문하로 들어가 우암, 이 유태 등과 함께 학문을 하였다.

효종 때 이조판서, 대사헌, ,우 참판 등 직을 거치면서 북벌을 계획하였으며 현종과 숙종의 스승이었다. 벼슬보다 학문과 예를 통한 나라 질서를 바로잡으려고 헌신하였다.

향리인 회덕 송촌에서 후학 양성에 힘쓰다가 1672년에 타계하였다. 현종에 의해 영의정으로 추서되었다. 1759년에 영조 32년에 문묘에 배향하였다.

그는 율곡 이 이(李珥)의 기호 학파를 이어받은 대학자였다.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나 돈암서원 묘정비, 승현 서원비, 박 팽년 유허비 등을 남기었고 저서로 동춘당 집어록해등이 있다.

    

a)   동춘당(同春堂): 보물 제 209

 

이 건물은 송 준길의 아버지인   이창이 세웠던 것을 옮겨온 것이다.

동춘이란 살아 움직이는 봄과 같아라는 뜻으로 이곳에서 독서와 교육을 하면서 인재를 양성하고, 우암과 함께 회덕 향교를 복원하였다.

조선 시대의 별장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단아하고 간소한 건물로 작은 규모와 낮은 굴뚝 등에서 검소한 생활을 통해 유학적 덕목을 지키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송 준길은 우암과 함께 학문에 정진하여 兩 宋으로 불리었으며, 우암이 화양동 주인으로서 이곳의 현판을 직접 쓴 것이다.

 

                                                             (사진: 동춘당 전경)

 

b)   동춘당 선생 고택: 대전시 유형 문화재 제 3

 

동춘당 뒤편으로 일자의 사랑채와 ㄷ자로 이루어진 고택이다.

나지막한 기단 위에 사각의 주춧돌을 놓고 정면 3, 측면 2칸의 팔작 기와 지붕을 갖추고 있다. 동쪽의 2칸이 대청이고, 서쪽의 한 칸이 온돌방이다. 대청의 앞문은 여름에 들어 올릴 수 있게 하였다. 나온 기단과 좁은 툇마루는 조선 후기 선비들의 간소함으로 인해 별당건축의 표본이 되었다.

 

 

                                                 (사진: 동춘당 송준길 선생 고택)

인조 20(1642)에 건축된 이 고택은 당시의 모습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사랑채 뒷 편 안마당 사이에 얕은 담을 두어 공간이 독립되어 있다. 따로 떨어진 두 사당 중에서 별묘에 송 준길, 가묘에 다른 조상을 모시고 있다. 조선 시대의 양반 가옥의 전형이나 현재는 보수중이다.

 

 

 

c)  송 용억 고택: 시 민속자료 제 2

 

동춘당 송 준길의 둘째 손자 송 병하가 분가해 살면서 현재 11대손까지 이어오고 있다.

이 가옥은 안 채, 큰 사랑채, 작은 사랑채, 가묘로 구성 되었다. 대문을 들어가면 왼쪽에 큰 사랑채 대소헌이 있고, 오른쪽에는 작은 사랑채가 있다.

큰 사랑채에는 넓은 대청과 온돌방이 있고, 방 사이에는 미닫이 문을 두고 있다.

작은 사랑채는 오른쪽에 툇마루를 높게 두었다.

 안채는 중문을 지나 들어가나 최근 유리문을 달아 보수하면서 옛모습이 사라졌다.

 

                                                  (사진: 송 용억 고택)

 또 이 집은 17~18 세기간에 여류시인으로 활약한 호연재(浩然齋) 김씨 (1681~1722)가 살았던 곳이다. 그녀는 안동 김씨로 고성 군수 김 성달의 4녀로 19세 때 송 준길의 증손인 송 요화(1682~1764)와 결혼한 후 42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는 이 집에 살면서 한시 194수를 남겨, 3책으로 필사되어 가전되었다. 그녀의 <호연재 유고>는 조선 후기 여류문학의 중요한 유산이다.

3.  옥천 원정리 구진 벼루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의 접경지로서 두 나라간의 격전지였다.

이곳 구진벼루는 신라와 백제의 싸움터였던 관산성으로 알려졌고 백제 성왕이 전사한 곳으로 전해온다.

구진벼루의 구진은 삼국사기 백제 본기에 나오는 성왕이 전사했다는 구천에서 나온 말이며 벼루린 병풍처럼 둘러 쌓인 벼랑으로 해석되고 있다.

금산 월전리의 서화천 위에 능선을 따라가면 높이가 30m에 이르는 바위벼랑이 바로 구진벼루이다. 이곳이 옛날 구천벌로 알려져 있다.

관산성 싸움과 구진벼루, 구천벌에 얽힌 백제의 역사는 1400 여 년 전의 역사이다. 5세기 중엽에 백제는 남으로 내려오는 고구려의 세력에 한성을 함락당하고 당시 왕인 개로왕(455~475)도 목숨을 잃었다. 

 

                                                          (사진: 구진벼루의 모습)

 

이로 인해 백제는 웅진으로 도읍을 옮기고 동성왕(470~501)과 무녕왕(501~523)의 통치를 거치면서 안정되면서 성왕(523~554)대에 이르러 중흥을 이루었다.

성왕은 나라가 안정되면서 신라와 가야국과 힘을 합해 551년에 고구려에 빼앗겼던 한강유역의 6군을 되찾았고, 신라는 충주와 청주일원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553년에 신라 진흥왕이 군사를 이르켜 한강 하류지역을 차지하면서 라제(羅濟) 동맹이 무너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백제 성왕은 다음해에 대가야와 힘을 합쳐 신라를 공격하게 되었다. 이 싸움은 신라의 북쪽인 관산성에서 격전을 치러 백제는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아들의 전장을 도우려 기병 50 여 를 이끌고 밤에 구천을 지나다가 성왕의 군대는 신라군에 매복에 걸려 성왕이 사로 잡혀 죽음을 맞이하였다.

성왕은 554 7월 신라의 김 유신의 할아버지 <김 무력> 장군이 이끄는 신라군과 전투 중이었던 아들 여창(뒷날 위덕왕)을 지원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가 매복중인 신라군에 잡혀 이곳 구진벼루에서 참수를 당하였다. 이곳은 이렇듯 백제 성왕의 원혼이 서린 곳이다. (삼국사기 백제편, 일본서기 열전편)

신라군은 성왕의 목을 베고, 몸둥이는 백제로 보내고, 머리만은 신라 궁성 북쪽의 계단 밑에 묻었다.

성왕이 이렇게 죽음으로서 백제는 3만 명에 이르는 군사를 모두 잃고 완전하게 패배하였다. 이 싸움에서 패배함으로서 백제는 국운이 기울어지고, 신라는 한강 하류지역을 석권하면서 삼국통일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4.  용암사(龍岩寺)

 

옥천읍 삼청리 장령산 서쪽 산록에 자리잡은 법주사의 말사이다.

신라 진흥왕 13 (552) 의신조사(義信祖師)가 천축국에서 돌아와 이곳에 절을 지었다고 전해온다. <속리산 대 법주사> 본말 사기에 의하면 이 용암사가 법주사보다 1년 먼저 창건된 것으로 보인다.

절 부근에 용모양의 바위가 있어서 용암사라 했다 하나 현재로선 찾아보기 어렵다.

험악한 산세에 산중턱으로 한참이나 올라가야 비탈진 곳에 산새를 이용하여 지은 대웅전과 요사채가 나온다.

산기슭을 깎아서 세운절이라 밑에서부터 요사채가 있고 그 위로 대웅전 마당이 있고 돌로 쌓은 축대 위에 대웅전이 자리잡고 있다.

 

                                           (사진: 용암사 대웅전 전경)

 

 대웅전 뒤쪽으로는 조그만 돌로 보살을 만들어 논 것이 바위 밑에서 풍상에 오래 견디어 풍화되어 가고 있다. 그 위로 산신각과 그 뒤로 높이 솟은 바위 면에 거대한 마애불이 있고, 요사채 마당에서 오른쪽 언덕위로 편편한 곳에 아담하게 보이는 쌍 석탑이 자리잡고 있으며 현재는 보수 중이다.

  

 

 

a)  용암사 쌍 3층 석탑: 보물 제 1388

 

이 탑은 고려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용암사 동쪽 탑봉의 자연 암반 위에 2층 기단을 쌓고 3층 탑신을 올려 세워져 있어 쌍 3층 석탑이라 부른다.

두 탑의 모양은 유사하나 동 탑은 높이가 430, 서 탑은 413㎝로 규모면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1층의 몸 돌은 탑 전체에 비해 높은 편이고 지붕 돌은 위로 올라가면서도 크게 줄어들지 않아 탑이 날씬한 모양을 하고 있다.

기단의 면 석은 좌우로 돌로 짜서 맞추었고 1층에 4, 2층 기단에는 1장 또는 2장의 판석으로 갑석을 얹었다. 2층 갑석위로는 1층 몸 돌을 바치는 굄돌이 두드러져 있다.  1층이 높게 되었으며 몸 돌 모서리에는 기둥이 새겨져 있고 지붕 돌 아래로는 층의 받침이 새겨져 있다. 지붕 돌 모서리에는 풍경을 달았던 구멍이 있으며, 상륜부에는 노반, 복발, 보주가 한 개의 돌로 이루어 졌다.

각 층 몸 돌과 지붕 돌의 조성 수법으로 보면 고려 중엽에 쌓은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용암사 쌍 3층 석탑 전경) 

 

 

 

b) 마애여래 입상:충북 유형 문화재 제 17

 

대웅전 뒤쪽에 수직으로 솟아있는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이다.

이 불상은 천연 바위에 새겨진 높이 3m의 거대 마애불 입상으로 붉은 바위 색이 매우 인상적이다. 발을 좌우로 벌리고 연꽃 대좌 위에 서있는 이 불상에는 신라 말 고려초기에 유행하던 기법이 잘 표현되어 있다.

가늘고 긴 눈, 작은 입, 도드라진 코 등이 묘사된 얼굴은 미소를 띠었음에도 매우 형식적이다. 연꽃 대좌 위에 두발을 버리고 선 모습이고, 머리는 소발이고 육계가 있으며 귓바퀴가 길게 어깨에 닿아 있다. 또한 넓은 어깨, 늘씬한 하체, 붙인 듯한 팔과 유자형의 규칙적인 옷의 주름, 좌우로 힘없이 표현된 옷자락 등 갖가지 세부표현에서도 신라 말과 고려 초 불상 조성의 기법이 풍기고 있다. 불상 둘레에는 정으로 쪼아 광배를 표현하였고, 이런 것으로 보아 세련된 신라시대의 조각이 점차 형식적으로 변해가던 시기의 마애불로 추정된다.

이 마애불은 신라의 마지막 태자인 마의 태자가 이곳을 지나 가면서 조성했다는 전설이 서려있다.

 

                                        (사진: 마애여래 입상 전경)

 

 

5.  청마리 제신 탑(靑馬里 祭神塔):충북민속문화재 제 1.

 

옥천군 동이면에 금강이 흘러 들어, 깊은 산골짜기를 빚어 놓은 곳에 산아래 마을에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민속 신앙을 간직한 청마리 마티 마을이 하늘아래 마을로 자리잡고 있다. 

한때는 50여 가구 이상이 수 십대를 이어오며 살았으나 지금은 26가구 33명만이 노인세대를 이어가고 있으며 마을 입구의 동이 초등학교 청마 분교도 오래 전에 폐교되어 이제는 명맥만 이어가고 있다. 그 자리에는 이승복 군의 석상이 비바람에 풍화되어 알아보기가 어려울 정도다.

 

 

                                          (사진:청마리 제신탑 전경)

 

이곳의 제신당은 마한시대부터 마을 경계표시의 수문신으로서 풍수사의 액막이 구실을 하였다.  이 마을 사람들은 이 탑을 풍년과 마을의 평안을 비는 신앙성표로 믿고 잇다.

제신당 또는 탑신제당이라고 불리는 이곳의 신의 유적은 운탑(조신 탑), 짐대(솟대), 장승, 산신당 등 4가지의 복합적인 토속신앙 형태를 취하고 있다.

운탑은 지름이 5m, 높이가 약 5m 크기로 잡석을 원추형으로 쌓아 올렸고, 그 옆의 짐대는 높이가 약 5m, 긴 장대 끝에 새 모양을 깎아 만들어 올려 놓아 하늘과 땅 사이를 연결하는 신간(神竿)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장승은 통나무에 사람의 모습을 먹으로 그려 놓은 마을을 지키는 수문장이고, 산신당은 뒷산 소나무를 신목으로 모신 자연 형태를 띠고 있다.  이 마을 에서는 매년 음력 정초에 날을 잡아 생기복덕(生氣福德)에 맞은 제주를 뽑아 산신제를 올린다.

짐대와 장승은 4년마다 윤달이 드는 해에 세우는데 이때 신을 보내고 맞아들이는 굿으로 농악을 울린다.

(생기복덕=생기법으로 본 길일의 하나인 생기일과 생년월일의 간지를 팔래로 나누어 가린 길일의 하나인 복덕일을 아울러 이르는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