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종 여행기/우리문화유산 답사

우리문화유산답사-한양도성 600년의 발자취를 따라-(24>

땡큐 이영옥 2014. 12. 24. 22:25

 

2014.12.08

 

                           우리 문화유산 답사

   

              한양 도성 600년의

                                          발자취를 따라         

                           (24)  

                     글  :   한 종

     

                              (사진: 서울 성곽 전도)

 

600여 년간 한양의 울타리 역할은 한 도성은 당시 육조전 사거리인 현재의 광화문 원단 옆 보신각에서 새벽에 33번의 바라를 처서 문을 열고, 저녁에 인경을 28번 울려 문을 닫았다.

먼 시골에서 과거를 보려 한양으로 오려면 몇 날을 거처 걸어오기가 쉽지 않아 문경 새재 같은 곳에 선비길이 생기기도 하였다.

당시에도 도성을 한 바퀴 도는 순성 행사가 있었으니 나는 60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선조들의 얼을 따라 한양성곽을 4회에 걸쳐 도는 탐사를 하였고, 그에 이어 북한산성도 산 능선을 따라 돌고, 한양의 외곽 성으로서의 남한산성을 답사하며, 이제는 가까운 거리의 수원의 화성도 역사적인 사실을 공부하면서 탐사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사진: 최근의 보수 후 서울성곽 지도)

한양도성은 당시에는 한양과 지방을 연결하는 관문으로서 성벽은 서쪽인 인왕산에서부터 백악산,낙산, 목멱산의 내 4산의 능선을 따라 성을 쌓았고 그 밖으로 북한산성을 쌓아 북쪽을 이중으로, 또 남동쪽으로 남한산성을 쌓아 연결하고 한 수 건너 남쪽으로 수원 화성을 쌓고 별궁을 지어 왕권을 강화하였다. 이로서 한양 도성을 중심으로 2 3중의 산성을 구축하였으나 우리는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 수많은 외침에 제대로 대응하지도 못하여 백성들만 고초를 겪는 일이 지주 일어났다.

이런 한양도성의 축성에는 삼국시대부터 전해오는 축성기법과 구조를 볼 수 있으며 현재의 개축을 하면서 도성 축조의 역사를 살펴 볼 수 있는 생생한 문화유산이다.

한양 도성은 이 태조 5 1396년 음 1.9~2.28일 까지 49, 다음 8.6~9.24 일 까지 49일간, 98일간 전국적으로 197.400 여명을 동원하여 전구간을 600척씩 모두 97구간으로 나누어 각 군 현 별로 할당하여 구축하였다.

 태조 때 처음 축성당시는 평지는 토성으로 산지는 자연을 이용 석성을 쌓았고, 세종 때 개축하면서 석성으로 바꾸어 갔다.  그 후 숙종 대에 가서야 오늘날에 남아있는 석성으로 구축하였다.  당시에도 구간마다 군 현명을 새겼고 숙종 때에는 감독관, 책임자, 날짜를 명기하였다.

 이런 역사적 도성은 1899년 전차가 개통됨으로서 성곽이 헐리고 성문이 철거되었다. 1907년에는 길을 넓히기 위해 숭례문 좌우의 성벽이 철거되었다. 이어서 1908년에는 성벽 대부분이 헐렸으니, 서쪽의 소의문은 1914년에 헐리었고, 돈의문은 1915년에 헐었고, 동쪽의 남산을 연결하던 광희문은 문루가 1915년에 자연히 붕괴되었다. 이어 1928년에는 혜화문 문루가 헐리었고 그 주변의 성벽을 모두 헐어버렸다.

일제 때인 1925년에 남산에 조선 신궁을 짓고 흥인지문 옆 경성운동장을 지으면서 지금의 낙산에서 연결되어 내려온 광희문 구간을 모두 헐어버렸다. 일제 때와 해방 후에 에는 어려운 사람들이 성북동 주변에는 성벽을 담을 삼아 주거지를 마련하면서 훼손이 심하였고, 돈의문 구간은 전차 길을 확장하면서 모두 헐면서 주택, 학교 등을 지으면서 성벽은 완전히 절단되고 말았다.

이런 한양도성은 그 후 수 십 년이 지나면서 살기가 바빠 전혀 정부에서도 외면하다가 1968  박정희 대통령시절 청와대 뒷 편 숙정문에서 부 터 중건되었고 1974년에 가서야 전구간으로 확장 중건되기 시작하였다.

한양도성은 이렇게 오랫동안 훼손된 곳을 보수하면서 현재는 전구간의 70%를 보수하면서 총 12.8km 구간이 성으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최근에 남산에서부터 숭례문에 이르는 구간이 원형 복구 됨으로서 이제는 한양의 얼굴로서 되살아 낫고, 2012 11 23일 세계문화유산에 잠정목록에 등재되어 한양도성은 현존하는 세계의 도성중 규모가 가장 크고 역사가 오래된 것이다. 

 

 

 

1. 서울은 600년 된 성곽도시

인왕산(338m)-북악산(342m)-낙산-남산(262m)(18,2 km)

태조 李 成桂조선 1392년 개경에서 개국하여 정 도전 등 당시 신하들의 중지를 모아 한양으로 천도를 결정하였다. 그 후 1394년 부 터 시작하여 1396년 까지 2년에 걸 처 약 20만 명을 동원하여 축성하였다. 그 당시 국력으로는 어려운 일이었으나 나라를 세우고 기틀을 바로 잡기 위한 대역사 였다.

서울 성곽은 태조 5년 처음 쌓을 때 전체 59,500(18.2 km)  600척 단위로 나누고, 97구역으로 나누어 천자문 순서로 표시하였다. 또 조선 팔도에서 주로 농한기에 인원을 동원하여 축조하였으며 성벽에 도, 현의 담당지역을  표시하여 그 당시에도 공사 실명제를 적용하였다.

                  (사진: 한양도성 고지도)

당시 도성에 도적들의 출몰을 방지하고 미래의 전쟁에 대비하여 쌓은 성이다. 당시에는 큰 돌을 큰 메주만하게 다듬어 쌓았다. 그로 부 터 26년 후인 세종 4(1422)에 가서 장방형 돌을 기본으로 사이 사이 잔돌을 물려서 보수하는 한편 활과 총을 쏠 수 있는 성곽으로 보수하였다.

태조 5(1396)에 쌓은 성곽은 비교적 잔 석재로 쌓았으나 성곽의 구배(勾配)를 크게 잡았다.

세종 4년부터는 하부는 대형 석재를 다듬지 않고 자연대로 보수하여 쌓았다.

 그 후 숙종 30(1704)에는 돌을 22자의  정방형으로 다듬어 벽돌을 쌓듯이 빈틈없이 견고하게 축조하였다. 이는 당시 장정 4명이 들어올릴 수 있는 무게이다.

성곽으로 기어오르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자연 지세에 맞추어 돌출한 성곽으로 치성(雉城)을 숙정문 사이에 쌓았다. 성곽 위의 담장을 쌓아 이를 여장이라 불렸고 총이나 화포의 공격에서 방어를 위한 거이었다. 한 개 여장에 3개의 총 쏘는 구멍이 있으며, 가까운데 총을 쏘는 근총안(近銃眼), 좌우로 원총안 2개가 설치되었다.

   한양 성곽은 숙종때 까지 약 260여년간 큰 손상은 없었으나 임진 왜란 때 인조가 의주로 몽진을 하는 바람에 피해가 없이 그대로 보존되었다.

한양 성곽은 둘레 약 18.2 km,  높이 12 m 로 한양 주위의 인왕산(338 m), 북악산(342m), 낙산(125m), 남산(262m)(목멱산)의 내 4산 능선을 잇고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성곽에는 동쪽에 흥인문(興仁之門), 서쪽에 돈의문(敦義門), 남쪽에 숭례문(崇禮門), 북쪽에 숙정문(肅靖門)의 四大門을 냈으며, 북동쪽으로 홍화문(弘化門=혜화문), 남동쪽에 광희문(光熙門=수구문), 북서쪽에 창의문(彰義門),  남서쪽의 소의문(昭義門)의 四小門을 내어 도성의 통행을 도모하였다.

 한양의 성곽은 500여 년을 계속 유지되어 오다가 일제가 침략하면서  도시 계획 아래 허물어 지기 시작하였다. 1899년 서대문과 청량리 사이에 전차괘도를 부설하면서 성곽이 철거되었고, 일제강점기에 돈의문과 홍화문이 헐리고 도로가 개설되었고, 또한  숭례문과 경성역 사이에 도로가 나면서 평지의 성곽은 모두 헐리었고  산지 성곽 10.5 km 만 남게 되었다.

 그러나 해방과 6.25 동란을 거치면서 더욱 파괴되었다. 피난민의 급증으로 성곽을 담을 삼아 무허가 주택이 들어서고 성곽위로 건물이 들어서면서 황폐화 되었다.

창의문과 숙정문 사이 약 4 km의 북악산 구간은 청와대가 자리잡고 있어 민간의 출입이 제한되어왔다. 특히 1968년 1월 21 사태 시 김 신조 일당 31명의 북한군 특공대가 청와대를 기습, 침투하여 이 일대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당시의 종로 서장을 비롯한 인명 피해가 생겼었다. 이어서 몇일 간 소탕 작전에서 군인 및 민간이 여러 명이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진 후 완전 폐쇄된 채 40여년이 지나왔다.

최근에 성곽을 보수하고 안쪽으로 계단을 축조하여 새로이 국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성곽보수가 시멘트 계단으로 이루어져 유감이나 쉼터도 마련되고 이 산의 옛이름인 백악산(342 m)을 되찾아 정상에 표지석을 세워 다행이다. 또 성곽 중간에 1.21사태 시 총격전에서  총탄자국이 여러 개가 그대로 남아있는 <1.21 사태 소나무>는 당시를 회고하는 역사적인 현장이다. 또 청운대 가기 전에 성곽 돌에는 당시에 성곽을 축조한 년도, 장수이름, 감독관, 기술자 등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 축조 당시의 역사를 알 수 있다.

특히 남산과 숭례문 사이는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일제가 경성 역을 건설하면서 남산 사이는 또 헐려 나갔다. 홍화문과 흥인문 사이는 도로에 의해 끈기고 삼선동 등 성곽 밑에 높은 동네에는 무분별하게 주택이 들어차 있어 안타까운 일이다. 성곽은 낙산지역을 지나면서 온전히 복원되어 동대문 이화여대 부속병원 앞 도로에서 끈기어 흥인문이 고립되었고, 동대문 운동장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광희문 사이는 또 도로에 의해 단절 되었다.

가장 원형이 많이 보존된 지역은 광희문과 남산사이다. 그러나 이곳도  Tower Hotel 에 의해 단절되고 남산으로 이어지면서 봉수대 앞에서 끊기었다.

 이제 우리는 대한민국 건국이래 눈부신 발전을 이루어 수도 서울이 동북 아세아의 중심도시로 발전하려는 야심찬 계획을 실천할 시대적 대명제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수도의 한곳으로서 600년이 넘는 수도를 가진 국가가 몇이나 되는가?

때가 늦었더라도 고대도시와 역사가 현대 문화도시와 함께하는 수도로 가꾸어 나가는 지혜가 아쉽다. 세계 어디를 둘러보아도 지정학적이나  역사의 숨결로 손색 없는 도시이다.

전통의 나라 영국도 이렇게 큰 성곽은 없고  York 시 안에서 중세를 느낄 수 있으며,  Chester 시는 성곽위로 걸어서 산책할 수 있고 시내는 특이한 건축물이 세계인의 눈길을 끈다. 가장 완벽한 100개가 넘는 성이 모두 소규모로 지역 영주나 귀족의 성이다. 독일의 Rotternburg 의 완벽한 성안에서 중세의 숨결을 느끼며 돌이 깔린 길을 걸으면서 전통을 생각하였다. Praha 의 중세 도시에서 문화의 충격을 받은바 있다. 프랑스, 스페인 어디를 가도 이처럼 완벽하게 구축된 성곽도시는 볼 수 없다. 건축물이 얼마나 큰 문화 인프라 인가를  Spain 의 바르세로나 시의  Familia Sagrada(성 가족 성당)에서 볼 수가 있으니,  천재 건축가 Gaudi 의 숨결이 120년간 계속되어 지금도 첨탑을 건축 중이다. 몇 백년이 되도록 건축하는 그들의 장인정신을 배워야 한다.

  서울 성곽 안에는 중세의 주거 시설보다 큰 궁궐이 있으니,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덕수궁이 바로 그것이며, 이것이 이들 도시와 경쟁할 수 있는 중요한 건축물이다.

동양에선 인도의 무골 제국 시에 쌓은 Agra   Amber 에 비유되는 성이다.

그러나 길이나 크기는 한양성이 최고이다. 남미의 잉카 제국의 도시의 성곽도 이렇게 완벽하게 쌓았거나 크지는 않다.

 서울시가 1975년 부 터 종합적인 복원사업을 시작하여 18,2km 중 현재 10,8 km는 가까스로 연결된 상태이다.  한양 성곽은 선조들이 수많은 땀과 노력을 동원하여 국가사업으로 쌓은 귀중한 문화 유산이다. (현재 서울시 사적 10호로 지정 되어있으나 재고하기 바란다).

 6.25 이 후 80년대 부 터 마구잡이 개발로 수도 서울은 이제 시멘트와 매연, 공해의 도시로서 세계적으로 악명이 높다. 현재 고층 건물은 먼 훗날 세월이 해결해 줄 것이다.

이제 복개되어 지하에 묻혀있던 청계천도 복원되어 북촌부터 흘러 들어 온 개천으로 거듭나 물이 흐르는 천으로 조성 되었으나 너무나 거리가 먼 복원공사 였다.

 좀더 중지를 모으고 유구한 역사의 향취 나는 수도 한양으로 가꾸는 지혜가 아쉽다. 차제에 행정 수도를 건설하는 마당에 이 일은 서울시가 아니라 정부가 나서야 한다.

 한양은 한반도의 중심으로 동경 126 59, 북위 37 34분에 위치 민족의 대동맥인 한강이 동에서 서로 흐르고 한양의 남쪽을 가로 질러 서해로 흐르는 천혜의 요새이다. 한반도의 등줄기인 백두 대간에서 서남쪽으로 뻗어 내린 한북 정맥에 둘러 쌓여 있어 곳곳에 구릉이 발달하고 주변에 인왕산, 북악산, 낙산, 남으로 남산에 둘러 쌓인 분지 형태이다.  그 남쪽으로 한강이  도도히 흐르는  도시이다.  세계 어디를 둘러보아도 손색이 없는 지세를 가진 곳이다.

 나는 졸저 한국 명산 순례 2006에서 북한산성 12 성문을 답사하여 일주산행을 기술한바 있다. 이 산성과 한양성을 연계하면 아주 훌륭한 역사도시가 된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 보수적이고 현실성 없는 제안 이라고 하기 쉽다. 그러나 세계를 둘러보고, 먼 미래를 생각하는 민족이라야 앞으로 살아 남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정치적 명제에 의해 행정 수도를 옮기겠다는 판에 원대한 계획을 세워 남미 브라질의 행정수도 브라질리아  지구 반대편에 호주의 행정 수도 캔버러를 연구해 보아야 한다.

정치와 권력자의 자의가 개입되지 않는 마스터 프랜이 필요한 시점이고 통일에 대비한 원대한 계획을 세우기를 제안한다.

 먼 훗날 독일이나 베트남 처 럼 남북통일이 이루어지고 우리 민족이 발전하여 동북 아세아 중심국가로 거듭나는 비전을 가지고 나라를 경영하여 후대에 이어 나가야 한다.

 우리는 지난해 년 말 부 터 금년 초 까지 서울 성곽을 4번에 나누어서 답사한바 있다

   (사진: 서울 성곽 시대별 축조방법에 대한 안내판)

 

서울 성곽의 사진으로 보기

 

사직동 단군성전

인왕산 성곽

 

 

1.21사태때 순직한 최 규식 경무관(당시 종로서장)

창의문 전경

 

 

 

1.21 사태시 총격 잔상

 

숙정문 전경

 

 

 

혜화문 전경

흥인문 전경 

광희문 전경

 

이병철 동상

 

 

 

 

 

남산 봉화대

안중근 의사 동상

 

김 구 선생 동상

 

새로 복원된 숭례문

 

 

 

 

 

2.오간수문(五間水門)

5칸의 아취형 수문이다. 예전에 수문위로 성벽을 따라 조그만 길이 나 있었다. 그 길은 수문을 관리하는 순라길이다.

오간수문는 한양성곽을 다라 흥인지문과 광희문 사이를 연결하는 수문으로서 지금은 찾을수 없다.

오간수교는 1907년 수문과 성벽을 헐어내고 그 다리에 붙여진 이름으로, 이후로는 청계천 남북을 잇는 교통로 였다. 수문을 쌓고 그 위에 성벽을 쌓아 청계천을 남북으로 연결한 것이 오간수문이다. 오간수문과 연결되었던 흥인지문으로 인해 도성은 철옹성이 되었다.

조선시대의 최대의 토목공사가 청계천이고 그 중심이 바로 오간수문 이었다. 자유롭게 흐르던 물길에 수문을 설치하고 , 쇠창살을 박아놓아 토사가 쌓여 비가오면 청계천이 범람하여 홍수가 나기도 하였다.

 영조 36년 청계천을 준설하느라 인력이 21 5300명이 동원되었고, 당시 삽과 소달구지로 퍼내어 준설하였고, 35000냥의 현금과 2300석의 쌀이 투여 되었다 한다.  당시의 공사에도 실명제가 도입되었고 <준첩도> <준천사실>이 조선왕조 실록에 기록되어 있다.

 

 (사진: 헐리기 전의 5간 수문 전경)

   (사진: 한말에 청계천의 다리 약도)

 

3. 이간수문(二間 水門)

동대문 운동장을 발굴하면서 오간수문과 함께 이간수문이 발굴되어 복원되었다.

흥인지문 옆으로 흐르는 청계천 물줄기에 설치한 오간수문과 반대로 남산~장충동 방향에서 흐르는 물줄기에 이간수문이 설치되었다.

흥인지문에서 오간수문, 이간수문으로 이어지는 성곽이 광희문(光熙門)으로 이어졌다. 그로 인해  광희문은 수구문(水口門)으로 불리었고, 도성 안에서 죽은 사람의 시신이 이곳으로 나왔으며 또한시구문(屍口門)이라고 불리었다.

 

 

이간수문 전경 

                        

 

 

 

 

 

 

 

4. 총무당(總武堂):서울 시 유형 문화재 제 37

총무당은 흥선 대원군이 집권한 뒤인 고종 5(1868)에 세워졌다. 당시에 군무를 총괄하던 본전으로 현 광화문 남쪽 정부청사 자리에 있던 것으로 1930년 이곳으로 옮겨 왔다.

정면 7칸 측면 4칸의 이고주칠량(二高柱七梁), 즉 고주가 중심에 2개가 있고, 일곱 개의 도리를 건 지붕 틀로 되었고, 위의 절반은 박공 지붕, 아래는 네모꼴의 지붕인 합각지붕으로 되었다.

현판의 글씨는 한말의 신 헌( )의 글씨이다.

1880년 고종 재위 17년 삼군부가 없어지고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으로 통합되어 청사로 사용되었다. 일제 강점기 때에는 조선보병 사령부로 사용되었다. 총무당 양쪽 옆으로 덕의당(德義堂)과 청헌당(淸憲堂) 이 있었는데, 총무당만 이곳으로 옮기고, 덕의당은 그 당시에 없어졌고, 삼군부의 청헌당은 1967  공릉동 육군사관학교 교정으로 옮기었다.

 

 

5. 花莊: 사적 제 497 (1934년 지정). 서울 특별시 기념물 제 6 

이화장은 초대 이 승만(1875~1965) 대통령의 사저로 대한민국 수립과 함께 초대 내각이 조직된곳이다. 이 승만 대통령 내외는 1947 10 18일부터 이 집에 살았으며 지금도 고인의 유품이 소장되어 있다.

 해방 후 귀국한 이 승만의 거처는 당시  권 영일 등 33명이 돈을 모아 1947년 에 이 집을 사서 이 승만에게 기증하면서 이화장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는 대통령에 당선되어 경무대 관저로 이전하기 까지 이곳에 거주하였다.

 현재 이곳에는 이 승만 대통령이 살던 본관, 초대 내각을 구성하였던 조각당, 전시관으로 쓰고 있는 안채, 별채, 그리고 새로 지은 살림채가 있다.

가은데에는 이 승만 대통령의 동상이 서있고, 南北 統一, 敬天愛人 의 친필휘호가 오른쪽 건물에 현판으로 걸려 있다.

조각당은 오른쪽 언덕에 높은 지대에 있는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조각당은 ㄱ자 형의 소박하고 작은 건물로서 초대내각이 조직된 곳이다. 지금은 조그만 탁자 위에 태극기가 놓여 있다.

C자형의 안채는 현재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이곳에 남아있는 이 승만 대통령의 서재, 침실 등은 아주 검소한 생활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던 이 박사는 1919 3. 1운동 후 대한 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해방 후 1945 10 16일 귀국하여 조선호텔에 묵다가, 돈암장을 거처 1947.10.18일부터 48. 8.22 일 까지 이화장에 있다가, 1948 5.10 총선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 되었다.  그해 7 17일 헌법이 제정되어 공포되었고 초대 대통령의 당선되어 그 달 24일에 대통령에 취임 하였다.

그 후 그는 1948.8.22~1960. 4.28일 까지 대통령으로서 경무대에 살다가 4.19 혁명으로 하야하여 1960 4 28일 하와이로 망명하기 전까지 이곳에 머물러 었다.

; 일대는 원래 배 밭 이었고 중종 이전부터 <梨花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대지는 5.491, 건평이 230, ㄷ자 형의 한옥과 부속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사진: 이화장내의 조각당)

      (사진:-이 승만 박사 동상 ,  -이 박사가 쓴 친필 휘호)

 

 

   6. 이화동 벽화마을:

4호선 혜화역 2번 출구에서 낙산공원으로 오르는 소위 달동네 구간이다. 이곳에는 6, 25 이후에 피난민들이 낙선 바위자락에 옹기종기 판자촌을 지어 살기 시작한 것에서 비롯 되었다.

최근에 서울이 모두 아파트로 탈바꿈 되면서도 이곳은 옛 정취를 살려 서울 성곽 밑 달동네로 남아있기를 선택하였다.

그로 인해 200 <낙산 프로 젝트>로 예술가 70여 명이 이 마을에 벽화를 그려 이제는 명소가 되었다. 옛날 낙산공원으로 난민들이 모여 살던 곳은 지금은 옛 정취를 살려 보존하면서 서울 성곽으로 오르는 길목으로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집 담벼락에 써놓은 낙서들도 구경거리로 연인들의 사랑의 맹서가 주로 쓰여 있다. 이 골목에 계단으로 오르는 곳에는 아래계단부터 위로 큰 물고기를 그려 놓았고, 아주 옛집들은 새 단장을 하여 커피, 김밥, 오뎅을 파는 곳으로 바뀌어 정겨운 동네가 되었다.

TV 드라마 <옥탑방 왕세자>의 촬영지로서 사랑 받고 있으며 계단을 따라서 올라가면 낙산에서 흥인지문으로 연결되는 낙산성곽이 나오고 성곽에 서면 동부 서울이 환하게 내려다보이고 남산도 지척으로 보인다.

붕어빵, 오뎅, 아이스크림, 커피를 파는 조그만 가게들이 옛날 정경을 떠올리게 하며, 맨 위로 오르면 성벽이 보이면서 조그만 마당 휴식처가 나온다.

이곳 골목마다 특징으로 벽에 여러 가지 그림을 그려 놓았고, 또 해바라기가 계단위로 길게 그려진 것도 아주 특이하며 벽마다 다양한 숨은 그림들이 있어 이 그림들의 의미를 찾아내는 것도 큰 재미를 선사한다.

또 조형물로는 뜀틀 같은 대위에 신사와 강아지가 살아있는 듯이 형성되어 있어 아이디어가 번득이는 재미를 선사하고 있다.

 (사진: 계단에 해바라기 그림)

 

(사진: 신사와 개의 조형물)

 

(사진: 계단에 그린 물고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