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종 여행기/우리문화유산 답사

2014.09.20 우리문화유산 답사-불교문화의 성지<경북 선산~구미 일대>-(21)

땡큐 이영옥 2014. 9. 28. 14:17

2014.09.20.

 

 

                                                 <우리 문화 유산 답사>

 

           신라불교의 성지를  찾아

                                        <21>

   

                           -경북 구미-선산 일대-

 

                                                          ,사진:   한종

 

                                        (사진:죽장리 5층 석탑 전경)

 

우리나라 불교는 삼국시대 고구려 소수림 왕 1년인 372년 동진의 승 마라난타가 고구려에 전파한 것이 원년이고 이 불교가 고구려에 널리 퍼진 후 155년이 지난 후 신라는 법흥왕 14년 서기 527년에 와서야 공인되었다.

 그러나 그 이전에 100년쯤 앞서서 고구려로 부터 몰래 들어온 <묵호자>(墨胡子)(일명 阿度)라는 승이 지금의 경북 선산(善山)인 일선현에 들어와 모례장자”(毛禮長子)에 집에 숨어서 전파를 시작하였다.

선산읍 죽장동, 금오산(金烏山)이 바라다 보이는 곳이 오늘날 신라 불교의 발상지로 여겨지고 있다. 이 일대에 아직도 천 년이 지났으나 당시의 불교흔적이 남아있고, 낙동강을 건너 남으로 가면서 신라 시대와 가야 시대에 고분이 즐비하고,  이 근처에서 신라 해동 불교의 터전이 이루어진 도리사(桃李寺)를 만나게 된다.

천 년이 넘어 지나오면서 이 지역에서 조선의 인재들이 탄생하였다.

<정 몽주( 夢周)>의 사상을 이어받은 길 재”, 길재로부터 학문을 이어받은 김 숙자”, 그의 아들인 조선 유학의 거두 김 종직”, 세조 때의 단종 복위 운동을 하던 하 위지”,  또 후대의 김 구”, “양 사언등의 선비를 배출한 고장이다.

그 후로 선산은 영남 사림의 본거지가 되어 선산 읍 원동 금오서원에서  길 재와  김 종직의 발자취를 만나 볼 수 있다.

 

                                                         (사진: 선산-구미 일대의 지도)

1961 5.16 군사 혁명으로 인해 선산의 한 귀퉁이 었던 구미가 그 후 1969년 이후에 구미 공단으로 조성 되면서 선산, 구미 지역은 우리나라 산업 발전에 뿌리를 내리고 내륙공단의 중심지가 되었다.

1978년에는 구미가 선산 군에서 분리 되면서 시로 되고 박 정희대통령의 향리로 각광을 받으면서 발전을 거듭해 오고 있다. 그러나 이곳이 바로 신라 불교의 터전이었고, 조선 시대의 사림문화의 본거지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아 이번에 선산 구미 지역을 답사하면서 불교 문화의 원류를 밝혀 보고자 한다.

이곳의 중앙에 자리잡은 금오산은 불교 전래 이후 수많은 절과 암자를 거느리게 되었고, 산성을 구축하여 요새지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사진: 신라 불교 초전지에 세워진 초석)

 

 

 

1.   죽장리 5층 석탑: 국보 제 130(1968.12.19 지정)

선산 읍에서 약 2km 떨어진 죽장사(竹杖寺) 터에 있다. 통일 신라 시대의 석탑으로 주변에 석재, 주춧돌 기타 파편 등으로 보아 절터로 추정 된다.

바닥 돌에서 머리 장식까지 100여 개가 넘는 석재로 되었으며, 5층 석탑으로 국내 최고의 높이로 10m정도이다.

탑의 기단 부분은 18개의 다듬은 돌을 지면 위에 쌓고, 그 위에 상, 2중의 기단을 마련하였으며  2층의 기단위로 5층의 탑신을 올리고 그 위로는 머리장식을 얹었다.

탑신부 1층 몸돌 남쪽 면에는 불상을 모셨던 감실이 있고, 가로 66, 세로 107㎝의 크기이다. 그 주위로는 문을 달았던 흔적이 남아있다. 현재 그 안에 불상은 최근 것으로 보인다.

 

                                               (사진: 선산 죽장리 오측석탑과 대웅전 전경)

 

지붕 돌의 아래 윗면은 벽돌로 쌓아 올린 전탑(塼塔)으로 계단모양으로 되어있다.

맨 위에는 머리장식의 받침돌인 노반이 남아있다. 통일 신라시대의 양식으로 2단의 기단을 형성, 기둥에 조각을 새기지 않은 탑신의 몸통이나 지붕 돌의 모습은 전탑의 양식이다. 이 지역 인근 안동지역에서 사용한 모전 석탑계열로 우수한 조형미를 자랑하고 있다.

이 탑에는 오빠와 여동생이 한 마을에 살면서 누가 먼저 탑을 세우는가를 경쟁을 하여, 누이동생은 죽장사에서, 오빠는 다른 곳에서 석탑을 세우려고 하였으나 누이가 먼저 이 석탑을 쌓았고 오빠는 터만 남았다 한다.

 

 

2.모례정(毛禮井):문화재 자료 제 296 (구미시 도개면 도개리)

 

이 우물은 구미 선산의 도개 고을 도개리 마을 중앙에 있다.

신라 불교 신자인 모례(毛禮)의 집에서 사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모례는 고구려 승려 묵호자(墨胡子)<일명 아도화상(阿度和尙)>가 신라에 불교를 전파하러 왔으나 탄압이 심해지자, 자기집에 굴을 파고 숨겨 주었고, 그 후에도 3년간 머슴살이로 포교에 임하게 하였다. 그러다가 그의 포교에 힘 입어 신라에 불교가 공인된 것은 법흥왕 14(527) 이후였다.

선산군 도개리에 신라 최초의 절이었던 <도리사>(桃李寺)와 관련이 있는 모례장자”(毛禮長子)의 집터와 샘터가 남아있는데, 이곳은 최초의 불교 신자였던 모례의 집에서 사용하던 우물이다.

                                                              (사진: 모래정 샘터 전경)

 

깊이는 3m, 4각형 석재로 쌓았다. 긴 화강암을 우물 정()자 모양으로 맞추어 놓았다. 위에는 두꺼운 나무 판자를 얹었으나 썩지 않았다 한다.

이는 최초의 불교 신자였던 모례의 집에서 사용하던 우물이고, 아도화상이 머물렀던 모례장자의 집터는 모례장자 터”, 그리고 우물은 모례장자 샘이러고 불리었다.

이 우물과 신라 최초의 절인 도라사는 신라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파된 성지로 되어있다.   

 

l 아도화상(阿度 和尙)

중국 위나라 아굴마와 고려 여인 고도령”(高道寧) 사이에서 태어 났다.

고구려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19세 때에 신라에 불교를 전하기 위해 선산지역으로 내려와 스스로 묵호라 칭하며 모례의 집에 숨어 살면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불법을 강론 하였다. 

어느 해 겨울 눈 속에도 칡넝쿨이 뻗어나가는 이상한 일이 나타났다. 모례가 이를 기이하게 여겨 그 뿌리를 따라 올라가니 냉산 기슭에서 아도 화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모례는 그곳에 암자를 지어 아도화상에게 받첬는데 한겨울에도 북숭아 꽃이 만발하여 암자 이름을 도리사(桃李寺)라 하였다.

 

                                                            (사진: 아도화상 진영)

 

소지왕(479~500)때에 아도 화상이 다시 세상에 내려와 향을 피우는 법과 부처를 모시는 법을 가르치고 성국공주”(成國公主)의 병을 고치는 기적을 행하자 왕은 흥륜사(興輪寺)를 짓고 그를 찬양하였다. 그로나 왕이 승하하고 불교에 대한 박해가 점점 심해지자 아도 화상은 금수굴에 들어가 다시는 나오지 않았다 한다.

그 굴은 사람이 들어갈 수 없는 굴이었는데 아도 화상이 들어간 후 불경을 드리는 날이면 언제니 등불이 밝혀졌다 한다.

 

 

3.         낙산리 고분군:사적 제33.(90.10.31 지정).구미시 해평면 낙산리

 

3~7세기 중반기의 가야(伽倻)와 신라의 무덤 군으로 낙동강 동쪽에 인접한 해발 75m 내외의 구릉지에 약 250기가 산재해 있다.

분포지역에 따라 오목야 고분 군, 중리 고분 군, 불로산 고분 군, 월파정산 고분 군, 정문산 고분 군 등의 지역으로 나눈다.  현재는 도로의 개설로 양분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보아 고분의 규모는 큰 것이 지름 15~18m, 높이 4~5m, 작은 것은 7m, 1m 짜리도 있다.

 

                                                     (사진: 낙산리 고분 군 전경)

 

무덤을 덮은 봉분은 원형과 표주박 형으로 되어있고 내부는 널 무덤(토광묘), 독 무덤(옹관 묘), 돌 덧널 무덤(석관 묘) 등으로 되어 있다. 이곳에서 가야시대 및 신라시대의 토기 류, 장신구, 환두대도 등의 철기 류, 등잔 등 400여 점이 발굴되었다.

무덤의 출토품으로 보아 이 무덤들은 선산 지역과 그 주변의 지배층들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4.   낙산리 3층 석탑: 보물 제 469 (1968.12.19 지정)

 

높이가 7.2m의 통일 신라시대의 석탑이다. 이곳 주위에는 신라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파된 곳으로 큰 석탑이 남아있다. 이 주변 경작지에서 연꽃무늬가 새겨진 막새기와와 토기 등이 발견되어 이 부근이 큰 절터가 있었다고 추정 된다.

현재 남아있는 탑으로는 손상된 것이 있으나 비교적 안전하게 남아있다.

3층 석탑은 전형적인 신라 양식으로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것이다. 모두 8개의 돌로 이루어진 아래층 기단에 2개의 모서리 기둥과 3개의 탱주(버팀기둥)를 새겨 한편에 5개의 기둥이 새겨져 있다.

 

                                                      (사진: 낙산리 3층 석탑 전경)

 

위층 기단 가운데에는 모서리 기둥 2개와 가운데 기둥 2개가 새겨져 있다.

탑신 1층 몸 돌에는 남쪽에 불상을 모시었던 감실이 있고 입구에는 문을 달았던 구멍이 나 있다.

지붕 돌은 아래 받침과 지붕 추녀, 윗면 중단 모두 전탑의 양식으로 되어 있다.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사라지고 노반만 남았다. 이런 양식은 죽장리 5층 석탑에서도 볼 수 있는 것으로 모전 석탑계열의 유형이다.

기단부의 구조와 각 부의 탑신으로 보아 8세기 통일 신라 전기의 것으로 추정 된다.

 

 

 

5.   태조산 도리사(太祖山 桃李寺)

 

한국 불교는 한민족의 역사와 함께 흥망 성쇄를 거듭하여 왔다. 한국불교의 기틀은 해동불교의 초전지가 경북 선산의 도리사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묵호자(墨胡子)로 알려진 아도화상(阿道和尙)은 신라불교가 공인된 법흥왕 15(528)에 앞서 눌지왕(訥祗王)(417~458)에 불교 포교를 위해 선산의 모래장자(毛禮長子)의 집에 머물러 있으면서 포교를 하였다. 그는 선산의 도개에서 5색의 복사꽃이 눈 속에서 피어남을 보고, 그 자리에 절을 창건하였으니, 이 절이 해동최초의 가람으로 <도리사>(桃李寺)로 이어져 왔다. 현재도 도리사와 이웃한 도개에는 아도화상이 머물렀던 모례장자의 유적지가 있고 집터에는 모례정이라는 우물이 있다.

 

 

                                                          (사진: 도리사 태조전)

 

그러나 신라불교를 연 도리사는 임진왜란 이후 화재로 폐허가 되었고, 산내 암자였던 금당(金堂)만이 화재를 면해 점차 발전하여 오늘의 도리사로 이어 졌다.

현재 건물로는 극락전, 적멸보궁, 조사전, 삼성각 등과 태조선원과 수선당, 설선당 등 요사채가 있고 아도화상의 동상이 조성되어 있다.

 

 

 

a)    극락전(極樂殿):경북 문화재 자료 제 318 (1996.1.20 지정)

 

도리사를 세운 시기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으나 신라 최초의 절로 알려져 있다. 극락전은 도리사의 부속 암자인 금당암의 법당으로 19세기 초에 세워졌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 지붕으로 15평의 크기이다.

17세기에 건립되어 고종 12(1875) 용해화상이 중수하여 단청한 중심 건물이다. 안에는 17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목조아미타 여래좌상과 고종 13(1876)에 조성된 아미타 후불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사진: 도리사 극락전 전경)

 

 

 

 

 

 

 

 

 

 

 

b)   화엄석탑(華嚴石塔):보물 제 470(1968. 12.19 지정)

이 탑은 도리사 극락전 앞뜰에 세워져 있는 고려시대의 석탑으로 높이는 3.3m이다.

일반 석탑과는 전혀 그 형태를 달리하는 특이한 모습이다. 지면 위에 100여 개의 길게 다듬은 돌을 놓고, 그 위에 탑의 기단 부분을 세웠다. 기단은 4면에 네모난 기둥을 세우고 그 사이에 각 면에 직 사각형 판석 6~7개를 병풍처럼 둘러 세웠고, 남면 중앙부에는 문짝이 새겨져 있다.

 

 

                                                           (사진: 도리사 화엄석탑 전경)

 

탑신 부분은 3층으로 각층마다 작은 석재를 중첩하여 짜서 탑신부를 형성하고 있어 벽돌 탑을 모방한 모전석탑(模塼石塔) 계열이다.

윗부분은 노반 위의 연꽃이 조각된 보주를 얹어 놓았고, 조각양식과 돌 다듬은 수법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것으로 보인다.

 

 

 

 

 

 

 

c)    석가세존 사리탑과 금동 사리함: 국보 제 208

 

1977년 절에 동쪽에 있던 석종형 부도를 경내로 옮겨 모시던 중<금동육각 사리함>(金銅 6角 舍利函)과 함께 수정 같은 사리 1과가 발견되었다. 이에 주지 법등화상(法燈和尙) 적멸보궁을 창건하고 사리탑을 세워 사리를 영구히 안치하였다. 그 후 도리사 중건 10개년 계획에 따라 극락전을 비롯한 전각을 짓고 사역을 넓혔다.

 

 

                                                       (사진: 적멸보궁에 세로 조성된 사리탑 전경)

 

적멸보궁의 사리탑은 약 8m 높이로 팔각원형 부도 형태로 정방형 지대 위에 팔각탑신을 세웠고, 기단에는 용을 조각, 탑신에는 사천왕상을, 상륜부에는 여래상을 조각하여 화려한 모습이다.

사리탑 안 금동 육각 사리함에는 수정 같은 사리 1과가 안치되었는데 직경 8, 모양은 타원형이다. 후에 본사인 김천 직지사(直指寺)로 이관 소장되어 있다.

 

 

 

 

 

 

 

d)   목조 아미타 여래상: 문화재자료 제 314(1995.12.1 지정) 

이 여래상은 높이 128로 조선 시대의 불상 양식이다. 도리사 극락전에 모셔졌고 1968년에 개금 불사를 하였다.  이때 불상 밑에서 1731(영조 7)에 도리사를 중수한 기록이 나왔다.

몸에 비해 불두(佛頭)가 크고, 네모진 얼굴이 당시의 불상 조각과 흡사, 머리에는 낮은 나발과 작은 육계를 갖추었고 양미간에는 작은 백호가 있다.

 

 

                                                                 (사진: 목조 아미타 여래상)

 

 

e)    아도화상 사적비: 경북 유형 문화재 제 291

아도화상 사적비는 1655(효종 6)에 세웠고 신라에 불교가 전래한 사적을 각인해 배면에는 자운비가 음각되어 있다.

 자연석으로 전면에는 쌍용이, 후면에는 네마리 용을 조각하고 그 사이에 운용을 조각한 모양을 하고 있다. 아도화상 사적비 앞에는 특이한 모양의 바위가 있다.

네개의 받침돌 위에 큰 바윗돌을 올려놓은 모습으로, 아도화상이 낙동강과 해평면을 바라보고 와불의 모습을 한 금오산을 보고 도를 깨우쳤다는 바위로 좌선대라 부른다.

 

 

 

6.   보천사(寶泉寺)석조여래(石造如來)좌상:보물 제 492

 

이 불상은 해평리 보천사 약사전 주존불로 높이 132, 불상 뒤 원광인 광배의 높이는 167, 좌대 높이 109㎝이다.

불상의 머리에는 작은 살 상투를 표현하였으나, 머리와 경계가 불분명하다. 긴 목에는 삼도(三道)가 선명하게 표현되었다. 얼굴은 둥글고 갸름하며, , 코 입이 훼손되었으나 최근에 복원되었다.

신체의 표현은 전체적으로 움츠린듯 왜소한 체구에 어깨가 좁고, 가슴은 양감이 결여되어 다소 평평한 느낌을 준다.

 

                                                (사진: 약사전에 모셔진 석조여래 좌상 )

 

법의는 두 어깨에 걸첬으며 복부에는 띠 매듭이 묘사되어 있다. 손 모양은 손바닥이 위로 향하도록 복부에 대고, 오른손은 무릅 위에 얹고  손가락은 밑으로 내린 모습을 하고 있다.

 전반적으로 다소 위축되고 힘이 빠진 신체의 표현과 복잡하고 화려해진 불상 받침 그리고 장식성이 강한 광배 양식 등으로 보아 9세기 중엽의 불상으로 추정된다.

 

 

 

 

7.   황상동 마애여래(磨崖如來)입상:보물제1122(92.1.15 지정)

석현 고갯길 좌측에 솟아있는 거대한 암벽 위 동남쪽 평평한 면을 이용하여 조각한 거구의 마애여래 입상이다.

마애불상 옆에는 마애사라는 작은 암자가 있다.

암벽 전면에 약 7.3m 높이로 조각, 암벽위로는 별도의 판석을 얹어 머리부분을 덮었고 머리에는 소발과 큼직한 육계, 목에는 삼도가 표현되어 있다.

바위에 굴곡을 따라 자연스럽게 조각되어 전체적으로 율동감이 느껴진다. 통일 신라 시대인 10세기 경이나 고려초기의 작품으로 추정 된다.

수인은 부자연 스런 모양이나 양손을 모으고, 오른손으로 왼쪽 끝을 잡을 듯한 손 모양으로 설법인(說法印)으로 보인다.

 

                                                            (사진: 황상동 마애여래 입상 )

 

전설에 의하면 백제군에게 쫓기던 당나라 장수가 어느 여인의 도움으로 이 바위 뒤에 숨어 목숨을 구하였는데, 후에 이곳의 여인은 홀연히 사라졌다 한다. 그 여인이 부처님 이라고 생각한 장수가 이 바위에 불상을 조각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