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종 여행기/ 중동문화 유적답사기

2) Lebanon-Beirut

땡큐 이영옥 2010. 4. 27. 00:11

      2.     Lebanon-Beirut

 

                                          (사진: Lebanon 지도)

중동에서 가장 작은 나라다. 면적이라야 10.452, 인구 370. 기독교 국가로서 아랍어, 영어, 불어가 다 통용된다.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로 연중 300일 이상 맑은 날씨다. 겨울에도 해안 지역은 따듯하다.

기원 전 2500년 경부터 페니키아 인들이 이곳에 정착. 아랍 조상인 가나안 민족의 일파로서 지중해 연안국가와 일찍부터 무역에 종사. 페니키아 인들은 화폐, 문자, 새로운 물품을 전달하는 사람들 이었다. 그들은 북 아프리카 카르다고와 남불 마르세이유 같은 도시 국가를 건설하였다. 레바논은 1516년 부 터 1918년 까지 오스만 터키 제국의 통치를 받았다. 1920년에 와서야 현재의 국경으로 경계가 지어 지고, 1926 5 23 민주 공화국이 되었다. 1945년 아랍 연맹과 UN에 가입하였고 1946년 말에 외국군대가 철수 하였다.

이 후 30년간 민주적인 전통과 높은 교육으로 중동의 학문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스라엘과 아랍국 사이에 끼어 1975년 내전이 일어났고 정정이 불안 하였다. 1978, 82년 두 차례의 이스라엘의 침공으로 경제 기반이 흔들리고, 국민들이 대거 외국으로 나갔다. 그 후 협정에 의해 2000 5 25 레바논에 진주한 이스라엘 군이 철수 하였으나 국경은 언제나 불안하고 최근에도 UN 평화 유지군이 국경 완충지대에 주둔하고 우리나라의 동명부대가 UN 군의 일원으로 파견되어 있다.

공항에서 곧바로 시돈 항으로 이동한다. 이 도시는 수도인 베이루트 남부로 48 km 떨어진 곳에 있는 제 3의 도시다. 오렌지, 레몬, 바나나 등 아름다운 나무로 둘러 쌓여 있다. 항구로서 입구에 작은 섬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여 먼저 바닷가 성이 내려다 보이는 아주 오래된 집에서 늦은 점심을 레바논 식 식사로 즐긴다. 오후에 휴식 후 이제 문화 유적 답사에 나선다

 

.                                      (사진: 십자군의 성 전경)

1)  십자군의 성 (Crusader Sea Castle) : 1228년에 이곳에 침공하여 들어온 십자군들이 페니키아 사원 터에 쌓은 성이다. 원래 본성은 건너 언덕 위에 있었고, 바닷가에 남아있는 이 성은 초소였다. 성벽 중간에 박힌 둥근 돌은 의술의 신전에서 가져다 보수 할 때 쓴 것이다. 십자군 시대에는 교회당이 있었으나 그 후 십자군이 퇴각하고 난 후 모스크를 지어 현재 남아있는 것은 모스크이다. 전망대의 구실을 하였다. 성곽 맨 위로 오르니 시야가 트이면서 지중해변의 요새로서 손색이 없다. 앞으로는 등대섬이 있고 뒤로는 옛 도시가 그대로 있어 우중충하다.

2) 성 니코라스 교회(St Nicholas Cathedral): 8세기 전 교회다. 걸어서 재래시장을 구경하고, 야채 가게, 정육점 등 시장골목을 두루 살펴보고 오른쪽의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 나오니 왼쪽 모서리에 조그만 교회 표지판이 붙어있다. 문이 잠겨있고 출입문이 아주 좁은 것으로 보아 규모가 작은 교회다. 이 교회는 사도 바울이 로마 군에 잡혀 끌려 갈 때 첫 번째로 도착한 곳이 시돈항으로 이곳에서 신자들과 하루를 머물렀다는 유서 깊은 교회다.

3) 대상들의 숙소(Khan El Franj): 17세기에 지은 대상들의 숙소로서 마당에 들어가니 2 층이 네모나게 둘러있다. 윗 층은 대상들의 숙소로 사용하였고 아래층은 상점이었다. 아래층 둘레는 회랑으로 조약돌을 박아 통로를 만들어 모스크 식으로 되었고, 왼쪽에는 예전에 마구간으로 사용된 곳으로 가운데에는 말먹이가 내려오면 말이 머리를 디밀어 받아먹던 시설이 있다. 기둥에는 말들을 매어 놓았던 돌 고리가 달려 있다. 지금은 이 방이 이 지역 문화원으로 사용되어 각종 역사적 사건, 인물 등의 사진이 전시되어 있다. 정면 벽면에는 하라리 전 총리의 사진이 걸려있다.

 

                           (사진: 17 세기 대상들의 숙소였던 석조 건물 전경)

이제 우리는 시돈항을 떠나 남부 티레 항으로 간다. 도로변에는 바나나, 망고, 오렌지 농장이 이어져 있고 조금 더 내려가니 디파니 강이 온다. 그 너머에는 우리나라가 UN에 파병하여 이곳에 파견되어 완충지대를 관리하는 동명부대 장병들이 초소에 경계를 서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대한 민국의 자랑스러운 군인의 모습, 이제 우리 나라도 세계평화를 위해 먼 나 먼 곳에서도 파수 군으로 역할을 한다. 기쁜 나머지 손을 흔들어 답례를 한다.

왼쪽 능선 위로는4~5층의 아파트 형 주택이 불규칙 하게 늘어서 있고 도로가 정비되어 있지 않고 중앙 분리대도 없다. 짓다 만 건물이 많아 어수선하다. 아직 전쟁의 상흔이 남아서 인가?

4) 티레 유적지(Tire ruins): 1984 UNESCO 문화유산 지정

옛날 페니키아의 최대 항구로서 주로 자주색 물감을 만들어 수출하였던 도시이다. 10세기에는 카르다고를 식민지로 둘 정도의 강력한 해상 왕국 이었다. 사도 바울이 3차로 전도 여행 때 머물던 곳이다. 이곳에서는 당시 유리도 만들어 수출하여 상거래로 돈을 축적하여 바닷가에 성을 쌓고 살았었다.  그 후 각종 침략으로 쇠락을 거듭해 폐허로 남아 있었다.

 로마가 들어와 건축한 건물들이 지금은 열주 길로 남아있다. 기둥만이 두 줄로 남아있고 아래 길은 잡초만이 우거 졌다. 윗길은 대리석 열주가 무너진 채로 딩구나 바닥은 모자이크로 깐 것이 그대로 남아있어 당시의 건축상을 보여준다. 그 앞으로는 물 저장소도 깊은 구덩이 형태로 남아있다.

 

                                      (사진: Tire 유적지 전경)

대리석 열주가 드문드문 서있고 무너진 것은 그대로 딩군다. 기둥머리에는 섬세한 조각이 그대로 옛 영화를 말해준다. 바닷가 쪽으로는 목욕탕 자리가 남아있다. 목욕탕 안에 둥근 돌은 당시에 구들장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폐허에는 노란 구절초와 붉은 양귀비가 피어 있어 지중해의 푸른 바다와 대비되어 한층 폐허의 쓸쓸함을 더해 준다.

5) 무덤 군(Tomb ruins): 비잔틴 시대의 공동묘지다. 대형 석관이 수 백 개나 무질서하게 딩굴고 있다. 당시에도 부유한 자가 쓰는 석관 묘로 이 석관 안에서 식기와 부장품이 다량으로 출토 되었다 한다. 내 무덤을 건드리는 자는 저주 받으리라 라는 글씨가 써 있는 석관도 있다. 여기에 흩어져 있는 석관들은 옛날 로마시대에 사용하였던 것을 그 후대인 비잔틴시대에 다시 사용하였던 것으로 석관 뚜껑에 새겨진 글씨로 판단하고 있다. 석관에 새겨진 글씨를 판독 하면 옛날 그리스 인이 사용하였던 석관을 다시 비잔틴시대에도 사용하였던 흔적이 뚜렸하다

 

 

                         (사진: 비잔틴 시대의 석관 모습)

 

석관을 쓰고 그 앞에다 동쪽으로 조그만 사당 같은 것을 지은 것은 당시에 교회이고, 서쪽으로 지은 것은 이스람의 흔적이다. 그들은 남쪽 메카 방향으로는 신전을 지었다 한다.

무덤 군이 끝나는 곳에는 AD 129년 로마의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이곳을 순방 하였던 기념으로 황제의 개선문이 큰 규모로 남아있다.

6) 마차 경기장(Hippodrome): 티레에 남아있는 경기장은 기원전2세기 경에 건축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로마시대의 경기장으로는 가장 잘 보존되고 큰 것이다. 이 마차경기장은 길이가 480 m, 폭이 160 m이다. 30,000명의 관중을 수용하는 경기장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그 당시에 가장 인기 있었던 경기로 여겨진다. 마차경기는 가운데 오벨리스크가 서있는 네모난 트렉을7 번을 도는 것으로 되어 있다. 

출발점에는 10개의 문이 있으며 가운데에는 높은 단이 있는 것이 당시에 요인들의 좌석으로 보인다. 단 밑으로는 입구에서부터 상가가 조성되어 있던 곳으로 여겨 지며 경기장 끝까지 큰 돌이 깔린 길이 뻗어있다. 당시에 규모로는 엄청난 크기로 지금은 잡초만 무성하고 관중석으로 오르니 경기장 한눈에 다 보인다.

 

                                 (사진: 마차 경기장의 중앙 요인석 전경)

지중해를 따라 시돈 항으로부터 티레 항에 이르는 고대 도시들의 중요한 유적을 찾아보고 다시 베이루트를 향해 돌아온다. 한 시간 이상이 걸려 베이루트 외곽에 이르니 이곳은 피난민들이 와서 정착한 곳이라 어수선하고 도로 가에는 상가가 형성 되었으나 제대로 된 건물이 없다. 외곽을 통과하여 베이루트에 들어오니 시내는 해안을 따라 고층건물이 빽빽하게 들어차있고, 해안가를 내려다보는 언덕에는 현대식 빌딩이 늘어서 있다.

7) 비둘기 동굴 바위(Pigeon grottoes, Pigeon Rocks): 베이루트의 Corniche 가는 지중해안을 내려다보는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한다. 바다를 향해 두 개의 바위가 나란히 서있고 큰 바위는 가운데 대문이 형성되어 비둘기들이 서식하고 있다. 이 바위는 이 지역을 강타한 지진으로 형성 되었다 한다. 이 거리는 레스도랑, 카페로 붐비고 멋진 일몰을 감상하는 장소다.

 건너편에 드골(De Gaulle)가는 베이루트에서 가장 붐비는 거리이고 외국사람들이 산책하기 좋은 거리이다.

 

베이루트 시는 동서로 나누어져 이념분쟁으로 인한 전쟁이 1975년 일어 났던 곳이다. 그 후로는 경계선에 녹색지대가 형성 되어 1991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지루하게 대치되었던 곳이다. 이곳에는 중동에서 명문인 아메리칸 대학이 있다. 지중해 건너 300 km 앞에는 키프로스 섬이 있다. 시내에 들어와 중국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일찍 하고 나왔다.

                                           (사진 :  Beirut  시내의 모습)

식사 후 중심가로 걸어오면서 모하메드 아민 모스크에 이르니 기도 시간을 알리는 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 앞으로는 알르메니아 교회가 있는데 조용하다.

어두워지는 가운데 국회 의사당이 있는 사거리로 내려오니 유럽식 카페거리가 형성된 곳에서 잠시 휴식한다. 오래된 시계탑 로타리에 이른다. 그 옆으로 국회 의사당이 석조건물로 우뚝 서있고 앞에는 초병이 경계를 서고 있다. 그 양 옆으로는 정부 청사가 늘어서 있다. 청사거리를 올라가니 은행거리(Rue des Banques) 가 나오고 레바논의 중앙은행이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은행거리를 건너가니 레바논 총리 집무실이 언덕에 있고 레바논 기가 휘날린다. 그 앞쪽으로는 유적지가 깊은 구덩이로 다가왔다.

 

                                         (사진: 레바논 국회 의사당의 야경)

8) 로마 유적지(Roman ruins): 정부 청사 뒤쪽에 유적지는 페니키아 시대, 로마 시대, 비잔틴 시대의 유적지가 오랜 세월 동안 지나면서 붕괴되거나 소실되면 다시 그 자리에 짓고 이것들이 다시 551 년도에 지진으로 매몰된 곳에 로마시대의 목욕탕이 발굴되고 있다. 건너 편 깊은 함몰지에도 로마시대 열주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다 지하 10 m이상의 지층이다. 이곳은 모두 지층의 변동으로 깊은 곳에 매몰되어 있다.

베이루트 항구 지역에도 성 조지 성당(St..Georges Cathedral)도 같은 것으로 개발을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이 지층 위로는 수 백 년 동안 사람들이 거주하고 다시 건물이 들어서서 실제로는 베이루트의 고대유적은 발굴하기가 어렵다. 내전으로 파괴된 곳에는 부분적으로 새 건물이 지어져 고고학 적인 발굴은 어렵다. 실제로 베이루트의 역사는 BC 4000년 전에 신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에 시돈, 티레, 비블로스의 고대 해안 도시들은 BC 2100~1200년 사이에 이집트의 파라오왕조 시대와 연결되어 있다. 1926년 베이루트의 시청 빌딩을 건축할 때 놀랍게도 이집트 시대의 화강암 스핑크스가 발굴된 것이다.

네카강을 사이에 두고 좌,우로 동서 베이루트로 갈라져  있다. 레바논 총인구 370만 명이 실제로는 수도인 베이루트에 반 이상이 거주하고 있다. 이번에는 북부에 있는 해안도시 비브로스로 간다.

가는 길 오른쪽은 700~800m의 산들이 늘어서 있고 그 아래로 건물이 들어섰고 시설이 많다. 아랍 지역은 카지노나 술이 없으나 이곳에는 서구화 되어 둘 다 즐길 수 있다. 언덕위로는 고급 주택과 계곡이 나타나고 왼쪽은 지중해 연안으로 현대 자동차 판매장이 2 곳이나 보인다.

9) 비브로스 (Byblos):  UNESCO  문화유산.

 Sidon, Tyre 도시와 함께 Byblos 는 베이루트 북방 35 km에 있는 지중해 연안 도시로서 고대 페니키아 시대의 3대 도시 국가 중 하나이다. 오랫동안 지층에 묻처 있다가 1928년 홍수로 인해 노출되어 발굴이 시작되었다.

이곳은 종이가 있는 곳이라 Byblos 라고 부르거나, 성경 Bible 에서 유래된 도시명 이란다. 이 도시는 신이 건설하였다는 전설의 도시다. BC 2800 년대에 건설된 도시 성벽이 그대로 남아있다. 페니키아 시대의 지층에다 로마시대 건축물이 지어 졌고 오래되어 붕괴되니 후에 다시 십자군 성이 그 위에 축성 되었다.

                                          (사진: Byblos 유적지 전경)

BC 3000년 전에 가나안 비블로스에서 도시가 커지면서 바다를 통한 교역이 이루어지고 동부 지중해로 목재를 수출하고, 배를 만들고, 석재로 관을 만드는 법을 이집트를 통해서 배웠다. 비블로스의 주민들은 BC64~AD 395년 사이에 그리스의 관습과 문화를 배웠다. 로마인들은  큰 사원, 목욕탕, 건축물을 지었고, 그것들이 비잔틴 지배 하에도 그대로 남아있었다.

AD 637년 부 터 아랍이 지배하면서 수세기 동안 쇠락을 가져왔다. 1921~24년 사이에 이집트 고고학자인 프랑스인 Pierre Monet 에 의해 비브로스와 고대 이집트와의 교역관계를 찾아냈다. 고대 비브로스의 발굴은 여러 유적지에 현대 건물이 들어서서 불가능 해졌다. 그러나 로마 극장 터, 고대 왕들의 무덤, 신전 위에다 축조한 성벽 등이 남아 있다.

당시에는 도시가 생기면 사람들간에 공동 작업이 필요하여 수레, 달력, 글 문자가 필요하게 된다. 그래서 문자도 생기고 달력도 생겨나고, 물건을 옮기는 수레도 필요한 것이다. 이곳은 이 모든 것이 바다를 통해서 들어오는 길이 열린 곳이다. 외침을 막기 위해 성벽을 쌓고, 집을 짓고, 우물을 판 것이 지금은 기단을 돌로 쌓은 것만 남아있다. 당시 배의 정박을 위해 밧줄을 묶어 놓았던 닷 등이 있고 페니키아 문자가 새겨진 돌들이 흩어져 있다.

 

              (사진; 박물관에 전시된 페니키아 문자의 알파 벹 진화 과정표)

박물관에서 비블로스 지역에서 발굴한 여러 가지 유물들을 만나본다. 유적지 안에 박물관에는 이곳에서 발굴한 유물이 체계적으로 전시되어 있어 이해가 빠르다. 특히 주목할 것은 페니키아 시대에 문자가 진화하여 알파벹으로 되어가는 과정은 정말 너무 신기한 발견이다. 페니키아 문자가 어떻게 진화되어 갔느냐가 바로 언어발달사로 이어진다. 지하에서 발굴된 석관 뚜껑에 페니키아 문자의 진화의 열쇠가 숨어있었다.

10) 제이타 동굴(Jeita Grotto): 베이루트 동북방향으로 20 km 거리에 있다. 1936년 미국 선교사 톰슨 1836년에 발견하였다. 그는 총소리로 동굴의 크기를 알아냈다. 그 후 7년간 동굴을 개발하여 1958년에 일반에게 개방하였다. 처음에는 아래만 개발하여 배를 타고 들어가게 하였다. 내부에 들어가니 석화암이 녹아내려 종유석이 줄줄이 달려 내려오고, 온갖 형태의 모양이다. 신비감이 넘치고, 적당한 조명이 종유석의 모양을 돋보이게 하는 가운데 배가 그 사이로 지나가는 관람코스는 참으로 비경이다. 지금도 종유석은 계속 자라고 있고 물이 떨어진다. 1 km 이상의 동굴 수로를 배를 타고 다니면서 신비경에 빠진다.

 

                                  (사진: 제이타 윗동굴의 종유석과 석순 모습)

 

윗 굴은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간다. 아래 굴 보다 더 대규모 동굴로 1969년에 개방 되었다. 아주 대형규모의 동굴로 관람코스가 잘 되어 잇다. 들어가는 중간에는 석순이 1 m가 자라나는 과정을 7개의 부분으로 나눈 해설 판이 주목을 끈다. 처음 18㎝로 자라는데 2000, 2~3구간은 23~24㎝ 로 또 2000,  4구간은 2, 5구간 까지 합이 1만년이다. 7구간 까지 12000년이 되어야 비로소 1 m의 길이가 되는 과정을 표시하였다. 동굴의 길이도 크거니와 자라나고 매달린 석순의 자태는 그야말로 천태만상이다. 그 사이로 관람로가 잘 나있어 계속 올라가면서 가지가지의 기기묘묘한 석순의 모습은 자연 조화의 극치를 이룬다. 동굴 안의 온도가 상당이 높다.

이제 동굴 답사를 마치고 차로 레바논 산맥을 넘어간다. 2~5층의 빈집이 많이 보이니 휴가시 사용하는 별장이라고 한다. 차는 고개를 넘어 광활한 베카 계곡을 향해 내려간다.  이 산맥의 최고 높이는 3038 m이며, 나무가 하나도 없는 황량한 돌산을 넘어간다. 해발 1770 m 이상의 산길이다. 그런데도 노란색의 야생화가 바람에 나부낀다. 바위가 부서져 내리는 산을 내려가니 길이 120 km, 12 km 내외의 베카 계곡이 나오고, 그 아래로는 비옥한 땅이 끝없이 펼처지고, 그 너머로는 흰 눈이 덥 힌 헤르몬(Hermon Mt) 산이 구름 속에서 빛난다.

베카 계곡은 포도, 오렌지, 채리 등 농산물 재배가 주를 이룬다. 내려가는 왼쪽 산록에는 염소 떼가 풀을 뜯고 있다. 이 고장에서는 염소고기의 육회가 인기라고 한다.

베카 계곡내 대도시인 자할레로 간다. 도로는 해발 700 m 내외다. 이제는 안티 레바논 산맥을 넘는다. 이 지역에서는 AD 392년 이후로는 신전이 우상이라고 헐어 버렸다 한다.

11) 바알베크(Baalbeck or Heliopolis): 1984 UNESCO 세계 문화유산 지정

 페니키아 인들이 세운 태양의 도시(Heliopolis)로서 이곳에다 대규모의 신전을 지었다. BC 15년 로마 제국의 줄리우스 케에자르에게 정복당했다. 태양의 신 Jupiter는 이곳에서는  바알(Baal) 신으로 부른다.

 

                                         (사진: 바알 베크-주피터 신전 전경)

a) 주피터 신전(Jupiter Temple): 로마의 최고신 주피터 신에게 바치는 신전이다. 8848 m의 장방형 기단 위에 각기 700 ton의 돌로 축조한 거대한 건축물이다. 직경 2m, 높이 22 m의 기둥 열주가 고린도식 머라 장식을 두르고 회랑을 이룬다. 원래는 54개의 열주로 구성된 정방형의 건물 이었다. 열주로 둘러 쌓인 12 m의 방에 거대한 신상이 있었던 곳이다.

지금은 신상이 모셔져 있던 곳에는 양쪽에 기둥이 하나씩 서있고, 중앙에 신전 제단이 있고 그 가운데가 신상이 모셔져 있던 곳이다.
 
지금 이 신전에는 기둥이 6개만 서있고 8개는 로마의 유스티니아 황제가 콘스탄티노풀의
소피아 사원을 건축할 때 가져갔다 한다. 나머지는 지진으로 붕괴되었다. 왼쪽의 6개의 거대한 코린도 식의 열주는 웅장하고 장식이 뛰어나다. 무너져 내린 열주의 조각장식이 지금도 아래 돌 더미 가운데 놓여있다.

당시 이 신전은 150년간 계속하여 건설하였고 로마의 트리야누스 황제가 입구에 정원을 만들었다.  112㎡의 정방형 안뜰에는 회의실이 있었고 순례자들이 머물던 곳이었다. 주피터 신전의 규모는 파르테논 신전에 비유될 것으로 생각된다.

b) 박커스 신전 (Bacchus Temple):  AD 145년 안토니우스 피우스(Antonius Pius) 가 주피터 신전 건너편에 건축하였다. 이 신전은 6835 m의 크기다. 19 m 높이의 기둥과 고린도 식 열주 42개의 보존상태가 양호하며, 로마 건축의 걸작으로 평가된다.

거대한 신전이 지붕만 없는 상태이며 중앙에는 바알벡의 젊은 신 박커스(Bacchus or Dionysus) 의 신상이 있었던 자리만 남았다. 당시 이 신은 숭배자들에게 풍요와 성장을 내렸고 영원한 삶을 주리라고 믿었다 한다.

 

                                           (사진: 박커스 신전 전경)

C) 프로필리아 신전(Prophilea Temple or Venus Temple): 이곳 언덕에 세 번째 신전인 프로필리아 신전은 AD 3 세기에 세베루스 세티미우스 황제가 건축 하였다. 열주에 둘러 쌓인 5각형 건물은 레바논에서 가장 독특한 건축이었다. 바알백의 행운의 여신 비너스에게 봉헌 되었다.

당시 이곳의 3개의 신전은 페니키아 종교의 통합을 의미한다.

이제 신전과 문화유적 답사를 마치고 창고를 개조하여 만든 박물관으로 간다. 이곳에는 신전에서 발굴한 신상이 많이 전시 되었으나 머리, 손발이 잘려 나간 것이어서 실망스럽다.

이 레바논의 바알백 신전들은 아마도 그리스의 아크로포리스의 파르테논 신전보다 더 크고 정교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착잡했다. 그 옛날 신전을 거대하게 건축하였던 사람들의 숭고한 정신을 되살리며 우리는 돌이 깔린 고대의 길로 나와 차 한잔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다시 이번에는 Syria 지역으로 넘어 가기 위해 베카 계곡으로 오던 길을 다시 간다.

 

                                    (사진: 베카 계곡의 전경)

16:30분경 레바논-시리아 국경 완충지대 검문소에 이른다. 30분 이상 걸려 입국비자가 나와 시리아 지역으로 건너오니 버스와 기사가 시리아 버스와 기사로 교체된다. 다시 시리아 입국 심사로 한동안 기다린다. 시리아는 레바논 보다 한 시간 더 늦다.

레바논은 아직 전쟁의 상흔이 남아있고, 작은 나라가 엄청난 문화 유산을 가지고 있어 제대로 관리가 안 되는 것 같다. 티레의 유적지, 비브로스 유적, 바알백의 유적의 관리와 관광 인프라 조성에 좀더 투자할 필요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17:30분경 검문소를 통과하니 Damscus 170 km 지점이다. 어느새 날이 어두워지고 둥근 달이 휘엉 청 떠 올랐다. 이제 어두운 밤길을 달려 시리아의 Al-Wadi 호텔에 들어오니 날씨가 썰렁하다. 아랍식 고유 호텔로 낫 설기만한 가운데 식사도 어설프다.

                        

                (사진: 베이루트시 해안가의 비둘기 바위에서 일몰 전경)

                          (사진: 모하메드 아민 모스크의 야경)

               (사진: 비블로스 유적지의 지하 석관의 모습)

                   (사진: 유적지에서 딩구눈 조각기둥 상단 부분)

                      (사진: 바커스 신전의 전면 모습)

                         (사진: 신전안의 열주 상단의 조각 모습)

                              (사진: 주피터 신전 전경)

                                   (사진: 박커스 신전 전경)

                            (사진: 신전 기둥 머리의 조각 모습)

                     ( 사진: 바알백 신전에서 출토된 석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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