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종 여행기/ 중동문화 유적답사기

5) Israel-Jerusalem

땡큐 이영옥 2010. 4. 28. 12:05

5. Israel-Jerusalem

 

                     (사진:이스라엘 전도)

 

이스라엘은 면적 2770. 인구 700백만. 80%가 유태인이다. 이스라엘로 들어오면서 까다로운 검문을 거처 버스와 안내자도 바뀐다. 입국심사에 많은 시간이 걸렷다.

 오늘부터 이스라엘을 안내하는 사람은 우리나라의 여자 유학생이다. 그녀는 이곳 “Hebrew” 대학의 학생으로 알바이트로 안내를 한다.

입국장을 떠나 곧바로 예루살렘 시내로 들어간다. 산지가 나오고 넓은 광야로 나간다. 가는길 언덕에는 베두인 족의 양철 지붕을 덮은 허술한 집들이 몇 채씩 언덕이나 계곡에 보인다. 그들은 아직도 양, 낙타, 말 등을 사육하며 유목 생활을 한다. 자가 발전기를 사용하여 전기도 사용하고, 물도 직접 지하수를 파서 시용한다고 한다. 그들은 이스람교를 믿고 있다.

터널을 지나면서 예루살렘 시내가 나온다. 헤부류 대학 기숙사를 지나 대학 캠퍼스를 바라보며 차는 오리브 산으로 올라간다. 이 산 곳곳에는 예수의 생전에 발자취가 배어있으며 승천한 곳이 있다. 우리는 예루살렘 고대도시를 보기 위해 전망대에 오른다. 전망대 바로 밑으로는 무덤이 대리석에 쌓인 채 천여 개가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그들은 예수를 따라 언젠가는 부활을 기다리리라. 건너로 예루살렘 구 도시의 성곽이 보이고 그 안으로 황금의 돔 사원이 찬란하게 빛난다.

 

                   (사진: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황금돔 사원)

 

                       (사진: 묘지 전경-부활을 기다리며) 

 

AD 70년에 코나티우스(Konatius)에게 점령당해 성전이 허물어 지고 유대인이 쫒겨난다. 이곳이 그 후로 이스람의 지배하에 들어가면서 이곳이 또한 마호멛이 승천하였다는 자리가 되며, 691년 에 이스람 성전이 건축된다. 솔로몬 시대에 1차 성전 건축, 바비론 시대에 2차 성전, 3 차로 이스람 시대의 건축한 성전이 현재 남아있다. 현재의 황금 돔은 요르단의 훗세인 국왕이 생전에 순금 800 kg을 기증해서 순금으로 장식된 것이다. 

전망대에서 왼쪽에 보이는 회색의 돔, 황금 돔을 중심으로 뒤에 화색의 돔이 있는 곳이 바로 골고다 언덕이다. 전망대 앞의 눈물교회, 황금의 양파처럼 보이는 교회는 러시아 정교회다. 그 앞으로 게쎄마네 동산이 있다. 전망대에서 유적지를 확인해 보고 오후에 현장으로 갈 것이다.

 예루살렘은 3천 년 된 구 도시다. 11 km 성곽 내에는 지금도 3만 명이 살고 있다. 고대성곽은 1534슐레이만 2가 축성. 전망대 한 쪽에선 팔레스타인 청년들이 깃발을 앞세우고 단결을 외치며 기세를 올리고 있다. (예루살렘 구도시는 유네스코지정 세계문화 유산이다.) 

 

              (사진: 팔레스타인 청년들이 깃발을 앞세우고 기세를 올린다) 

 

현재 서 에루살렘은 유대인이 살고 동 에루살렘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거주한다. 팔레스타인은 라마라를 현재 임시 수도로 삼고 있다. 지난달 이스라엘 정부가 동 예루살렘이 2000여 세대의 정착촌을 건설하면서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그들은 정착촌 건설을 밀고 나가려고 미국의 바이든 부통령이 이스라엘을 방문하는 시기를 통해 이를 강행하고 있다.

 이제 구 도시를 자세히 살펴보려 한다. 버스로 구 도시 성벽을 따라서 동 에루살렘을 지나고 있다. 성벽에는 8개의 문이 있다. 다마스커스 문을 지나 왼쪽은 유대인, 오른쪽은 아랍인이 이 길을 사이에 두고 살고 있다. 이 도로를 기점으로 동,서 예루살렘이 뚜렷하게 갈라져 있다. 그러니 서로 반목이 심할 수밖에?

버스가 시청 건물 앞에 이르니 트램 공사가 한창이라 길이 막히는데, 부활절 휴가와 겹 처 온통 차량과 사람이 뒤엉켜 어지럽다. 여성 경찰관이 교통정리를 하고 있다.

이곳에서는 대학에 들어가기도 어렵지만 졸업하기가 훨씬 더 어렵다 한다. 일단 입학을 하면 일자리를 찾아 일을 하면서 다니는 경우가 많아 졸업은 자연히 늦어 지기 일 수다. 여성도 의무 병제라 군에 입대해야 한다. 그러니 좀 성격이 거칠고 억세다 한다.

놀이터 앞에서 검은 옷, 검은 모자를 쓴 정통 유태인 청년을 만나 인사를 나누고 함께 사진을 찍어본다.

 

                              (사진: 유대인 청년과 함께)

 

우리는 공원에서 돌로 된 식탁에 둘러 앉아 한국식 도시락으로 식사를 한다. 오럣 만에 한국식 음식에 소주 한잔도 겸해진다.

식사 후 한동안 휴식 후 Scopus 산으로 오른다. 거리에는 부활절 휴일 기간이라 정통복장을 한 유태인이 어린이 2~3명을 앞세우고 바쁘게 다닌다. 챙이 넓은 중절모, 수염을 기르고, 검은 양복에, 검은 넥타이로 정장을 하고 부인도 검은 옷을 입고 아이들을 데리고 분주하게 움직인다. 간혹 검은 털로 된 둥근 모자에 머리를 앞으로 따 아 내리고 상의에는 흰 솔을 단 옷을 입은 순 정통파 남자들도 보인다. 유대인은 성경의 계율대로 생활하는 모습이 뚜렷하게 보인다.

이제 부 터는 차를 버리고 구 도시로 걸어서 간다. 이스람 지구로 들어가는 문을 통과한다.이제 예수의 고난의 길을 추적하여 간다.

먼저 채찍교회(Church of Condemnation)를 찾아간다. 빌라도가 예수를 단죄하여 골고다의 형장으로, 끌고 가는 모습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교회 중앙에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로 향하는 예수상이 그려져 있다.  

 

                   (사진: 채찍교회에 십자가를 진 예수상) 

 

                  (사진: 교회의 연혁과 성경에 나온 심판 경위)

 예수가 골고다로 가면서 수난을 당하는 지점을 추적해 가기로 한다.

그가 처형장으로 가면서 고난을 겪던 장소는 지금은 구 도시의 여러 건물이 들어 차고 사람들이 거주하여 찾아가기가 어렵다. 골목의 벽에 당시의 장소를 숫자로 표시한 곳을 추적해 따라가 본다.

   (1) 예수의 고난의 길을 따라가며

 먼저 채찍교회를 나가니 위에 골목길로 연결되면서 벽에 이라는 숫자가 나타난다. 이곳이 일차로 예수가 잡혀서 매를 맞던 곳이다. 이곳을 지나 골목을 따라가니 2 , 3 차에서 넘어지고, 4차까지 예수가 매를 맞던 지점이 숫자로 표시되어 있다. 5차 지점에 이르니 예수에게 사형이 선고된 지점이다. 옆에는 예수가 손을 집어 자국이 남았다는 손자국 바위가 벽에 붙어 있다.

 6차 지점은 베로니카라는 여인이 예수가 흘리는 피를 닦아준 지점이다. 7 번째의 장소가 예수가 두 번째로 넘어진 곳이다. 8 차 장소를 지나 9 차 장소에서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쓰러진 곳이라 한다. 그 자리에는 교회가 세워졌다. 그리고 벽에 < 9 Station  St. Helen Coptic Church> 라고 영문으로 쓰여 있다. 골목을 따라가니 그가 짊어지고 가던 십자가가 담에 기대어 있다. 10 번째는 불분명하며 11 번째의 장소에서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힌 곳이다. 이곳에 교회를 지었고 그 당시에 바닥에 추후에 증축하였다 한다. 그리고 십자가에 못박힌 골고다 지점으로 알려진 곳에 돔을 건축하였다 한다.

 

                   (사진: 에수가 잡혀 매를 맞던 곳)

 

 

                    (사진: 베로나카 여인이 피를 닦아 주었다는 곳)

 

                      (사진: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쓰러졌다는 는 곳)

                        (사진: 예수가 십자에 못밖힌 지점으로 추정 된곳)

 

마침내 골고다 언덕(지금은 교회가 들어선 곳이다.)에 이르니 예수는 황금색으로 빛나는 예수상으로 모셔져 있고 그 옆으로는 커다란 그림이 벽에 그려져 있다. 그림의 우측은 그의 주검을 확인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모습의 그림, 좌측은 예수를 앉고 있는 제자들의 모습, 중앙에는 죽은 후 편하게 눕혀 논 그림이다. 그 앞에는 당시의 사망한 예수를 염하였다는 자리에 흰 대리석이 놓여있다. 모두가 대리석을 만지며 합장하고 기도한다.

 예수의 무덤이 교회 앞에 돔으로 자리잡고 있다. 당시에는 예수가 숨을 거두자 바위가 갈라지고, 지진이 일어났던 곳에 Holy Sepulcher Church(성 무덤 교회)를 지었다.

 

                           (사진: 교회안에  예수상)

  

                 (사진: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의 그림)

                                   (사진: 예수의 염습대)

                        (사진: 예수의 무덤으로 추정)

 

우리는 이곳에서 예수와 관련된 몇 군데를 더 방문한다.

1) Cardo View: 재 건축지. Level of the Jewish Quarter, RD 당시에 길로서 발굴되어 지하층에 기단 위에 열주가 남아있다.

2) 옛날 시장길: 열주가 있는 중심거리에서 교회 쪽으로 직선으로 뻗어있는 길로 지금도 상가가 형성 되어 있다.

3) 최후의 만찬장소: 이곳은 십자군 시대에 지어진 곳이다. 이 자리에서 예수를 모시고 최후의 만찬이 있었던 곳이라 한다.  그 후 이곳에는 이스람식 건축이 들어섰다.

4) David 의 가묘장소: 이스라엘의 2대 왕의 묘지가 있던 곳이다. 그 안에서 울면서 기도하는 소리가 흘러 나와 분위기를 무겁게 한다.

5) 시온 산: 밖으로 나와 시온 산으로 간다. 그 앞 광장은 사람으로 차있고 건물벽에는 총탄자국이 무수히 많다.

6) 시나고그 교회: 옛날 교회자리에는 현재는 이스람의 모스크가 세워져 있다.

 

(2) 통곡의 벽: 유대교인들의 영원한 성지

 

오늘의 구 도시의 도보 순례의 마지막 코스이다. 계단을 내려오니 광장에는 이스라엘 기가 바람에 나부끼고, 수 많은 순례 방문객이 넘 처 나며 검은색의 물결이다. 이곳에서 로마군이 유대인을 쫓아내고, 당시에 교회와 성벽을 헐어 버렸다. 그 후 유대인들이 다시 이곳을 점령하여 증축하였고 헤롯왕 대에 와서 대규모로 증축하였다. 성전이 없어지고 성벽만 남아 벽 틈에다 기도문을 적은 것을 끼워 넣고, 통곡을 한다. 역사적인 장소에서 숙연한 자세가 된다.

통곡의 벽으로 다가가니 부활절 휴일을 맞아 가족 단위로 모두 와서 성경책에 손을 언고 기도 하는 사람들, 유대인의 특유한 복장, 챙이 달린 모자, 둥근 털모자, 머리를 양 옆으로 따아내린 사람들이 엄숙한 자세로 기도 한다. 이곳에 오면 누구나 신앙적, 정신적으로 카타스시스(정화)되는 듯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좌측 안의 교회에도 검은 복장의 유대인들로 발 디딜 틈도 없다. 누구의 간섭도 없이 자기의 방식대로 기도하고, 또 벽 틈에 기도문을 끼워 넣고 외우는 사람들, 벽 앞에는 기도하는 사람이 빈틈 없이 들어차 있어 설 자리가 없다. 나도 통곡에 벽에 손을 대고 생각에 잠겨 본다. 이렇게 부활절에 예루살렘을 순례한다는 자부심에 마음이 충만하다.

 

           (사진: 통곡의 벽에서 부활절을 맞이하여 기도 하는 유대인들) 

 

 

                          (사진: 통곡의 벽 앞에서 기도하는 유대인들)

                (사진: 통국의 벽 안에 교회에서 기도하는 유대인들)

 

                   (사진 통곡의 벽 앞에서 기도하는 사람들)

                             (사진; 정통파 유대인의 모습)

                       (사진: 통곡의 벽앞에 비치된 희브리어 성경)

                            (사진: 통곡의 벽에 손을 대보는 필자)

 

우리도 이제 통곡의 벽을 나와 타고 갈 버스를 기다린다. 기도를 마친 유대인들이 귀가 시간이 되어 버스를 타기 위해 계속 나온다. 그들은 바쁘게 움직여 행선지 별로 다가오는 저상 버스를 타고 간다, 우리는 기다리면서 그들의 기도 후 돌아가는 모습을 찬찬히 살펴본다. 휠체어, 어린이를 태운 유모차 등 저상버스에 잘 태운다. 우리도 한참을 기다린 끝에 버스를 타고 (17:10) 이번에는 Jericho (여리고)로 간다.

 여리고는 팔레스타인 자치 지역이다. 예루살렘을 지나 광야를 지나서 농토가 나오고 마을이 크게 형성되어 있다. 이곳은 생활이 나은 편이다. 시내는 시골 풍경처럼 한산하다. 가는 곳 좌측으로는 여리고의 성터가 있던 곳이다. 이 곳은 옛날부터 상인들이 오가는 곳이라 숙박업소가 발달했던 곳이라 한다.

 

 

                                (사진: 여리고 주변 풍경) 

 

우리는 Jericho village Resort 18:20분 도착. 오늘 하루 예루살렘의 순례를 마감한다.

이 튼 날 베들레헴을 방문할 예정이었으니 팔레스타인 청년들이 전날 돌을 투척한 사건이 있어 포기한다. 오늘은 맛사다로 향한다.

 

예루살렘 방향으로 가다 사해(Dead Sea) 쪽으로 나가니 팜 농장 등 수목이 무성하고 길에는 이스라엘군인이 무장 초소에서 여군과 함께 합동 검문한다. 유대인들은 이곳에 정착하기 위해 땅을 사들여 터전을 마련하고 마침내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한 곳이다. 이들을 당시 시온니스트(Sionist) 라고 불리며 19676일 전쟁 시 1억대 250만 명이 싸운 끝에 승리하여 국가터전을 닦았다. 그 당시 레바논 남부, 골란 고원의 일부, 시나이 반도 전체를 석권하였으나 그 후 이집트와의 협정으로 시나이 반도를 돌려주고, 현재도 골란 고원은 그대로 지배하고 있다. 현재 레바논 남부는 유엔군이 주둔하여 완충지대를 형성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동명부대가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가하고 있다.

버스는 사해를 끼고 끝없는 회색의 산지대를 지나  Masada 로 간다. 아라바 지역을 지나니 비닐하우스가 많아지고 스프링 쿨러로 물을 공급하여 파프리카를 집중 재배한다. 지금은 북에서 남으로 내려가는 유다 광야, 왼쪽은 사해가 계속되고 오른쪽은 가파른 회색의 산이라 비가 오면 도로로 물이 넘 처 차단되는 곳이다. 바다와 같은 사해가 계속되고 그 사이로 난 도로를 달린다.

 사해(Dead Sea) 는 남북 78 km, 폭은 10~21 km 이다. 수목이 무성한 앤개비 기브츠가 나타나고 이곳은 오아시스 지역으로 비옥한 농토가 조성되어 있다. 이제 마사다가 멀리 보이고 입구에 다가간다.

 

(3) 맛사다-2001년 유네스코 문화유산 지정 

 

                (사진:맛사다 유적지 지도)

 

맛사다는 기원전 70년 전부터 유대인이 거주하였던 천연의 요새다.  AD 73 년에 로마인이 침공하였을 때 유태인의 독립 단체원들이 살았던 곳이다. 유대인이 이곳에서 저항하다 굴욕을 당하느니 스스로 자결을 하였다는 슬픈 사연이 깃든 곳이다. 그들은 모임에서 10명중 1명이 9 명을 죽이고 가정에 가서 가족을 자결케 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는 방식을 택하였다.

 

                               (사진 : 맛사다 유적지 전경) 

 로마군이 이곳에 침공해오자 이곳에선 960구의 집단 시신이 발견되었다.

이곳은 유대왕 헤롯 BC 37~ AD 4년 사이에 군사기지를 건설한 곳이다. 수로와 저수조를 만들어 빗물을 저장 하였다. 언덕 북쪽에다 행정 기관으로 4180 ㎡ 에 이르는 면적에 3 단의 테라스 지형에다 왕궁을 세우고 계단으로 연결하였다. 식량창고, 예배당, 목욕탕 등이 있다.   1963년 발굴시작. 이곳은 4000년 전의 주거지로 판명되었다. 사해의 왼쪽 제방과 엔게디 오아시스에서 가까운 사막가운데 솟아있는 정상은 297594 m로 평평한 산정이다. 발굴 당시 수 많은 유해가 나왔으며 동전을 비롯한 여러 가지 유물이 출토되었다.

우리는 케이블카를 타고 400 m나 되는 정상으로 오른다.  둘레가 4 km, 440 m 높이에 있어 걸어서 올라가는 길이 나있고 30~40분이 걸린다. 우리는 우선 안내센터에 들어가 “Masada” 에 관한 영화를 보고 현장으로 이동한다.

1) Synagogue 회당: 10명 이상을 모아 가르치고 토론 하던 곳. 이곳에서 성경을 암기하고 공부하던 방이며 재판정으로 쓰였다.

 

                  (사진: 공회당 터- 예배도 하도 모임도 여는곳)

  2) Western Palace:  터전만이 넓게 남아있고 기단의 돌만이 딩군다. 기초 칸막이 만이 남아있다.

  3) Water Gate: 밑에서 물을 올려 저장하여 공급 하던 곳. 옆에 큰 물 저장소(Cistern) 가 있고 그 옆에 적은 곳도 있다. 수도 꼭지를 틀어보니 신기하게 물이 꽐꽐 쏟아진다.

 

                                     (사진: 물 저장소) 

  4) Northern Palace:  기단과 본 궁터 기둥2 개만 남아있고,  Upper Terrace, Middle Terrace가 있다. 사해 쪽 전망과 산악지대 전망이 뛰어나다. Herodia 시대의 건축물로 바닥에는 모자익 타일이 남아있다.

  5) Roman Style Bath House :  왕과 손님들이 목욕하던 곳. 안에는 대, 소 탕이 있고 벽에는 프레스코화의 원형이 남아있다. 바닥에 둥근 구들장, 주변에는 증기 열이 나오는 통이 담 쪽으로 서있다. 그 옛날에도 증기 목욕탕이 있었으니 요즘의 찜질 방의 원조인가?

 

                  (사진: 증기 탕- 벽뒤에 있는것이증기가 나오는 관) 

  6) The Store Houses(창고):  그 옛날 곡물 등 각종 생활 필수품을 보관하여 두고 쓰던 곳으로 돌무더기의 구분만 남아있다. 로마 군이 이곳에 침공하였을 때 다량의 식량이 보관되어 있었다 한다.

  7) Headquarter(사령부) : 두 개의 돌기둥 뒤에 집무실 터가 있다. 앞에는 사해 방면을 내려다보는 요새로서 통제가 용이한 곳이었다.

 

                          (사진: 사해가 내려다 보이는 사령부 터) 

 

  이렇게 마사다 유적지를 2시간 에 걸 처 돌아보고 나온다. 마사다를 떠나 앤개비 다리를 통과한다. 사해의 잔잔한 물결은 전혀 분쟁의 역사와는 무관한 풍경이다.  당시에도 사해에서 나오는 소금과 Mud를 팔아 부를 축적하였다 한다. 북으로 올라 오면서 사해주변은 비옥한 땅으로 변한다.

  (4) 사해(Dead Sea)-소금과 Mud 체험 

 

사해는 내륙에 있는 호수로서 염분 햠유량이 25% 이상이어서 20~30분 정도로 입수가 가능하다. 우리는 사해의 입수하여 소금물의 부력과 Mud 체험을 하기로 한다.

우선 탈의 실로가 갈아입고 물로 들어간다. 가만히 주저 앉아 히프를 내리고 앉으면 몸이 약간 뜨고 뒤로 젖히면서 두 손을 넣으면 몸이 두둥실 뜨게 된다. 일어날 때는 몸을 앞으로 구부리면 일어나 진다. 바닥에 있는 머드를 손으로 긁어 올려 전신에 바르고 햇빛에 말려야 한다. 소금물이 눈으로 뛰기거나 하면 즉시 씻어내야 한다. 20분 정도 지난 후 물에 씻는다. 그리고는 올라오는 길목에 샤워장에서 줄을 잡아 당기면 위에서 폭포 처람 쏟아지는 물을 맞으면 압력으로 머드가 다 씻겨 나간다. 물론 입수 전에 반지나 목걸이 등 장신구를 다 빼야 한다.

 

                            (사진: 사해 해안가 풍경) 

소금물이 입안이나 눈으로 들어가면 너무 짜고 포타시움(Potasium) 성분으로 인해 크게 손상 된다. 머드를 하고 나면 피부가 촉촉하여 지고 좀 부드러워 진다.

 이곳은 팔리아 기브츠에서 운영하는 Mud Pack 체험장이다. 물론 기념품 상점, 식당이 다 함께 있고 외국인 관광객에게는 신선한 체험으로 다가와 대부분 이용하게 된다.

 

                       (사진: 사해에서  Mud 체험) 

오전에 머드 체험을 끝내고 도시락으로 점심식사를 마치고 이곳을 떠나  En gedi

간다. 도중에 대추야자 나무 밭이 끝없이 나타나더니 쇼핑 센터에 이른다.  Mud 계통 화장품을 다양하게 전시하여 판매한다. 머드 액체, 머드 팩, 손 크림, 발 크림 등 다양한 제품이 사람들을 사로 잡는다. 이곳은 Tiberia 라는 도시인데 기브츠에서 농장과 해수욕장, 머드 제품 공장 등 을 운영하며 이익을 공동 분배한다고 한다.

 

14:40. 이제는  En-gedi Kibutz로 간다.

사해가 줄어들어 사막화 되어가는 곳이 보이는 데서 윗 측으로 돌아 갈릴리 지역으로 이동한다. 이스라엘은 베이안, 알렌비, 아라바 등 3 곳에 요르단으로 넘어가는 검문소를 운영한다.

 우리는 어제 머물렸던 Jericho 지역을 지나 갈릴리로 이동 한다. 남북도로 90 . 계속 올라가면 Hermon 산이다. 어제의 West Bank 지역을 지나 가나안 땅으로 간다. 쉐펠라 구릉지대를 지나니 이스라엘, 요르단을 가르는 국경선 철조망이 양쪽에 처져있다. 밖의 온도는 31°С. 아랍지역을 지나 다시 이스라엘 관리지역으로 들어가 갈릴리로 간다. 가나안 땅으로 오니 오이, 옥수수, 밀밭이 끝이 없다. 왼쪽으로는 사마리아 산지가 보이고, 올리브 나무가 가득찬 정착촌이 나오면서 댓시안 쪽으로 이동.  스가이아 키브츠가 나온다. 현재 이런 키브츠가 250개 정도 있다 한다. 요즘은 사유 재산을 인정하는 키브츠가 생겨 이를 모사브라 하며, 전국에 약 400개가 있다 한다. 유대인 마을인 벳산에 들어오니 저층 아파트가 나오고 Tiberia 도시로 통한다. 가로에는 이스라엘기가 날린다.

이제는 갈랄리 지역으로 들어가니 미 개발 지역이 들판으로 남아있다. 망고 밭, 오른쪽 아래로는 요단강 줄기(도랑 정도)가 내려가고 요르단 산지가 끝나고 이제 요르단 지역은 골란 고원으로 이어진다. 

이제 55 km 둘레의 민물호수인 갈랄리 호수가 나온다. 도로 옆은 요단강 줄기가 흐른다. 갈릴리 호수 물이 이스라엘 식수의 30% 공급. 호수 위에는 요트가 많이 있다. 갈릴리 호수는 건너편이 골란 고원, 호수 가에는 부활절 마지막 휴가를 보내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Spa도 있다.  Teberia 는 유대교 4 대 성지의 하나이며, 탈무드가 완성된 곳. 호수 선착장에 내려가 베를 타고 관광을 하면  En Gedi Kibutz 로 간다.

 

                           (사진 : 갈릴리 호수 전경) 

 16:35분 배에 오르니 승무원이 안녕하세요 하며 배 앞에다 태극기를 달아올리고 애국가를 틀어준다. 모두 17:00시경 애국 가를 소리높이 부른다. 흐믓한 정경, 갈릴리의 푸른 물살을 가르며 배는 골란 고원 쪽을 향하여 가다가 건너 En Gedi Kibutz 로 간다. 45분만에 기브츠에 도착.  한동안 휴식을 취한다.

 

                (사진: 배에 계양된 태극기-모두 애국가 제창) 

(5) En Gedi Kibutz

1945년 최초로 설치. 둘레에 감시 탑이 있고 이곳은 호수로만 출입이 가능하다. !8:00시가 되어 코끼리 차를 타고 Kibutz를 견학한다. 가면서 기사가 녹음된 우리말을 틀어 놓는다. 왼쪽이 저장 창고로 냉장으로 처리한다. 기브츠에는 고기 떼를 음파 탐지기로 찾아 잉어, 메기 등을 이 호수에서 년간 600 Ton 이상을 잡는다고 한다. 감시 탑이 3개가 요새다. 보트 보관시설이 있고, 수상스키도 할 수 있다. 이 농장 내에는 고고학 발굴장소도 있어 철기시대의 유적이 발굴되었다. 이곳 구성 원들이 사는 곳은 24 평형 아파트가 제공 된다.

 

 

이제 코끼리 열차는 젓소 사육장으로 간다. 이 농장은 1948 Syria가 공격을 하였으나 격퇴 하였다 한다. 검은 암소가 300 마리가 사육되어 년간 300만 리터의 우유를 생산 한다니? 사료는 골란 고원 농장에서 공급받고 소마다 각기의 몸을 고려하여 컴퓨터 통계를 활용해 사료를 공급한다. 중앙에 물 탑이 있는데 이것은 처음에는 감시 탑 이었다.

타조 농장으로 가니 타조 알 샘플을 내민다. 참으로 크다.

이곳의 기브츠 창설자들은 러시아, 폴란드, 발틱 3 국에서 왔으며 재산의 공동소유, 동등하게 물자공급을 하고, 주로 인력노동으로 생활하였다. 호수에서 물고기 낚기, 그물 등 그동안 어업이 변화한 과정도 아 곳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들은 이곳에서 새로운 유대문화를 창조하고, 교회도 짓고, 학교, 유치원, 의료시설도 다 갖추어 놓았다. 군인들의 아파트가 있고, 이들은 이 기브츠의 경비병이다. 농작물로는 야채, 바나나, 대추야자, 아카보드 등을 생산하고, 염소,양도 기르고 있다. 어린이 농장하교, 체육관도 있다.

해수면 아래에 위치한 바나나 농장은 1 헥타 당 65 Ton을 년간 생산한다.

 

                         (사진 : 바나나 농장에서)

2002년부터 이곳의 시스템이 다소 고 처 져, 식사제공을 현금주의로 바꾸고, 근속연수에 따라 돈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전환했다. 기브츠에 살기를 원치 않는 젊은이는 남쪽의 새로운 형태의 기브츠로 옮기었다. 어린이를 공동으로 기르다가 이제는 오후 4 이후에는 가정으로 돌아간다. 방공호가 비상시에 대비 지어 졌다.

요르단과 14 km 떨어진 곳으로 이곳은 대추야자 나무가 가로수로 심어져 있다. 은퇴 후의 노인들의 작업장도 마련 되었다.

양호실, 의무실에서 병이 나면 입원하여 치료가 가능하다. 공중 샤워장은 폐쇄 되었으나 공동 식당은 400여 명이 식사하며 식사대는 돈으로 청구한다.

콘써트 홀로 있고, 2400여 좌석을 갖추었다 한다.

40분의 걸친 기브츠 견학을 마치니 18:35분이다. 기브츠 식당에서 맛 있는 뷔폐식 식사를 하며 하루를 마감한다.

 

 이제 여행의 마지막 날이 다가오고 있다. 갈릴리 호수의 맑은 공기와 아침이 주는 상쾌함을 즐기면서 유도화가 만발한 도로를 따라 호숫가를 산책한다. 이번 여행에서 한번도 흐리거나 비가 오거나 이상기후도 없어 정말 행운이었다. 이제 기브츠를 출발하면서 말머리 산을 지나 갈릴리 호수를 끼고 북상하면 헤르몬 산(2817 m) 이 나온다. 갈릴리에서 숭어, 향어가 많이 잡히고 이것들은 통조림으로 되어 식탁에 오른다. 87번 도로 분기점에서 Tiberia 로 간다. 주변은 아주 비옥한 농토다.

오늘은 몇 곳의 주변에 흩어져 있는 성서와 관련이 있는 곳으로 간다.

 

(6)   드로 수위권 교회( St. Peter,s Primacy Church)

 베드로가 이곳에 와 3년 동안 활동하며 예루살렘으로 돌라가려 하나 그의 제자 12명은 로마 군인들이 이곳에 오자 다 달아났다. 베드로는 여기에 있을 때 교회 앞 호수에서 그물을 던저 고기를 낚아 올리니 153마리가 한번에 잡혔다. 그는 이 물고기들을 여기 있을 때 제자들과 함께 구워 먹었다는 일화가 서린 곳이다. 교회 안에는 가운데 돌로 된 넙적한 바위가 교회 제단 앞에 있고 이 돌 위에서 물고기를 구웠다 한다.

 

 

 

 

 다시 출발하여 레바논국경 지중해 쪽으로 방향을 잡아  Shemona 로 가다 Akko 삼거리에서 좌회전한다. 버스는 85번 도로를 타고 Akko로 간다. 4차선 도로 가에는 농산물이 가득하게 들어차있고, 3 거리에서 직진. 4차선을 따라 Rosh Nahariya 로 가는 거리이며 이곳은 기차 길의 최북단이다. 도시 규모가 큰 유대인 마을이 형성 되어 있다. 유대인 들은 주로 지중해 연안이나, 평지에 살고, 아랍 사람들은 산지에 거주한다. 6월 절은 모세가 유대인들을 데리고 홍해를 건너왔다는 뜻으로 Pass-over 라 한다. 이제 지중해의 푸른 물이 왼쪽으로 보인다. 가로수는 유카리투스 나무가 높게 뻗어 올라 푸르고 싱싱하다.

 이제 로쉬 하니크라에 도착한다.

 

(7)  Rosh Hanikra(A Love Story between the Sea and The     Mountain)

최북단 절벽 바위 위에 위치한 도로 끝에는 이스라엘의 국경 군사기지가 있고, 군인 2명이 집총하고 경계를 서고 있다. 우리는 이곳에 바다 절벽이 있는 석회암 동굴을 보려고 한다.

 

                   (사진:이스라엘 최북단 로쉬 하니클라 앞에서 경계병의 모습)

먼저 홍보관에서 영화를 본다. 이곳에는 바다와 바위 사이에 슬픈 여인의 사랑 이야기가 전설로 전해온다. 이루지 못한 사랑을 바다에 몸을 던져 스러졌다는 로맨스 이야기?

 전설보다 더한 곳은 이곳의 동굴이다.

수 천년 동안 바닷물이 들어와 석회석을 침식시켜 녹이어 터널을 형성하고, 동굴이 되어 명승지가 되었다. 동굴의 길이는 약 200 m. 동굴로 들어가면 바다로 뚤 린 곳으로 파도가 처 들어와 흰 포말을 일으키고 암석을 부순다. 오랫동안 침식을 하여 멋진 풍경이 된 것이다. 절벽바위는 연질의 석회석이라 침식이 가속화 되었다.

 

 

                            (사진:  해변가에 코끼리 바위)

 동굴 속에는 박쥐를 비롯하여 여러 바다 동물이 서식하고 있다. 동굴을 한 바퀴 돌아 밖으로 나오니 코끼리 형상의 바위가 나타난다. 바다로 향해 뚫린 곳은 동물 서식지로 거북이가 와서 알을 낳고 다시 바다로 돌아가는 곳이다. 이 동굴은 인위적으로 뚫어 통로를 만들어 바깥쪽의 코끼리 바위와 연결하여 놓았다.

 

(8) Bahi Garden(바하이 성지)

차는 다시 하이파로 내려가는 4번 도로로 나간다.  Haifa 시는 나무가 무성하고 농장과 각종 산업시설과, 철강단지가 있는 공업 중심 도시이다. 언덕 위로는 5~10 층의 아파트가 늘어서 있고, 이 도시는 종교와 문화가 잘 녹아있는 도시이다.

 

                              (사진 하이파 시내 모습) 

 왼쪽으로 Carmel 산이 보이고, 두바이에서 본 건물 형태의 무역회관 빌딩이 보인다. 이곳은 유대교라는 종교의 벽이 완화된 곳으로 신흥 종교인 바하이(Bahi)의 최대 성전이 있는 곳이다.

 바하이 신앙은 이스람의 수니파의 한 갈래로 바압(Siyyid Ali-Muhammad 1819~ ~1850) 이 창시한 종교이다.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면을 엄격하게 강조한 바압은 기존 세력의 반발로 1850년 순교하였다.  그의 유해는 60 년 동안 그의 추종자들이 숨겨오다가 1909년 이곳 칼멜산 언덕 영묘에 안장 되었다.

 

                        (사진: 갈멜산에서 본 바하이 성지) 

그는 바하욜라로 불리며 인간의 일체성을 정립시켜, 평등과 조화를 원칙으로 한 신앙생활을 주장하였다.

이곳의 영묘는 18계단으로 된 테라스로 되어 경사진 언덕위로 1 km에 이르게 조성 되었다. 테라스의 중심축을 따라 조성된 정원은 자연과 어울리는 친 환경적으로 이루어져 있다.

바하이 본부의 모든 경비는 자발적인 헌금으로 이루어 진다 한다. 산과 바다가 만나는 아름다운 항구 도시 절벽에 걸려 있는 성지이다.

(9)Caesarea National Park(줄리어스 씨져의 유적지)

 

                   (사진: 카이자르 유적지 전경) 

 

로마 제국의 Julius Ceasar 의 아랍 식 이름으로 그에게 바 처 진 도시라는 의미이다.

이제는 Tel Aviv 방향으로 간다. 해안을 따라 2 번 도로로 간다. 이 도시는 선진공업, 산업위주로 도시가 형성 되어 있다.

이 곳의 시이져의 유적은 남쪽의 로마시대의 극장에서부터 북쪽의 십자군 도시의 유적이 국립공원으로 지정 되어 있다. 이곳에는 광활한 땅에 비잔틴 시대의 광장, 헤롯 왕 시대의 극장, 왕궁, 목욕탕 등의 유적이 남아있다.

 a) Roman Wall: 십자군 성채로 도시의 북서쪽에서 발굴되었다. 성벽과 네모진 탑, 둥근 문등 이 남아있다. 아래로 오수를 내보내는 관이 있다. 지금은 식당이 들어서 있어 유적이 훼손되고 있다.

b) The Roman Theater: 이스라엘 지역에서 발굴된 가장 오래된 극장이다. Herod 왕 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돌계단 의자에 좌석번호가 매겨져 있고 4000여 명을 수용하는 곳이었다. 비잔틴 시대에 와서는 성으로 바뀌었고 아랍이 정복 후 파괴되었다.

 

                           (사진: 원형 극장 전경) 

 

c) Herod Palace : AD 1세기에 헤롯 왕이 건설한 것으로 두 줄의 열주가 늘어서 있다. 구조는 궁전 터 였으나 로마시대에는 마차 경기장, 운동경기장 등으로 쓰였다. 250 m의 길이로 폭 50 m12줄 좌석이 되어있고 만여 명의 관중석이 있었다.

d) Hippodrome: 2세기에 마차경기장으로 건축된 것으로 길이가 450 m, 폭이 90 m이다. 3만 명의 관중석이 마련되어 있다. 반환점에 27 m 높이의 오벨리스크가 서 있다. 경기장 서쪽으로는 마차가 나오던 문이 남아있다. 요인들이 앉는 좌석은 반환점 위에 마련되어 있다.

 

                              (사진 : 마차 경기장 전경) 

 

e) Public Bath House: 남쪽지역과 북쪽지역 두 군데에 목욕 탕이 마주하고 있다. 대리석 열주가 남아있고 바닥은 모자이크로 되었다. 비잔틴 시대의 유적으로 현재 복원 공사 중이다.

f) 십자군의 항구:  AD 11~12 세기에 시이져가 이스람과 십자군 사이에 해로를 열어 교역을 하던 항구다.

g) 케에자르시대의 수로: 갈멜산에서 부터 12 km, High Level, Low Level 의 두 수로가 있다. 이곳에는 로마 시대와 비잔틴 시대에 물이 없어 Shuni 샘터에서 끌어오는 수로였다. 이것은 음용수로 쓰던 것으로 8 m 높이로 되었다. 낮은 수로는 이곳까지 5 km 거리인 강에서 물을 끌어오는 수로였다.

 

                    (사진: 수로가 이 성벽위로 연결되어 있다.) 

  (10) Tel Aviv-Yafo

 이제 가이사르 유적지를 떠나 2 번 도로를 따라 Tel Aviv로 간다.  Tel은 언덕, Aviv는 봄이라는 말의 합성어이다. 야르곤 강이 흐르는 항구도시로 100년이 되었으며, 이전에는 이곳은 황무지 였다.  Yafo (욥바) 지역도 아랍인이 거주하나 Tel Aviv 지역은 유대인이 거주하며 주상 복합 아파트가 주로 있다. 임대료가 월 250$ 이상이다.  이곳은 기후가 온화한 곳으로 남서향 집은 싸고 동향집은 비싸다. 초대 수상인 Bengurion 이 텔 이비브에서 독립을 선언한 곳이다.

우리는 북에서 남으로 가며 이제 차는 야르곤 강을 넘어간다. 텔 아비브 서쪽 중심가를 간다. 왼쪽으로는 호텔 등 고층 건물이 늘어서있고 오른쪽은 지중해이다.

시내를 통하여 욥바로 간다. 길에 서있는 오래된 시계탑은 오스만 터키 시대의 것이다.

좁은 도로를 가면서 오스만 터키 시대의 구 건물 사이로 지난다. 오른쪽의 Old City 항구로 내려가니 옛날 돌로 깐 길이 나타나며 좁은 골목을 따라 내려가니 고대 항구가 나온다.

 

 

구 도시에 중간 언덕에 그리스 정교회가 서있고 그리스의 국기가 날린다.

욥바 지역의 골목을 올라 Tel Aviv 시내를 내려다 보는 언덕에서 이스라엘 여행의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19:00)

 

                  (사진: 구 시가에서본 텔 아비브 전경)

이스라엘은 아랍의 틈바구니에서 생존을 위한 힘겨운 투쟁을 하며 살아간다. 모든 유적지의 인프라는 미국식으로 되어있어 편리하다. 그러나 지나친 검문 검색, 특히 우방 국가에도 예외없이 적용되는 방식은 개선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중국식당 해신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까다로운 검색에 대비해 일찍 Bengurion 공항으로 이동한다.

 

                       (사진:  Tel Aviv 에서 해는 지고)

 Tel Aviv-인천 5007 miles, 10시간의 여정을 마감하고 16:30분 인천공항에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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