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종 여행기/우리문화유산 답사

(8) 전북 김제,변산반도 일대 문화유산 답사

땡큐 이영옥 2013. 4. 29. 19:43

 

(8)전북 김제, 변산 반도일대

          문화유적

 

 

 

전국적으로 우선 도마다 한두군데를 선정하여 기초답사를 진행하고 있다. 이번에는 전북으로 김제 일대에 넓은 평야의 농경문화와 더불어 삼국시대의 백제땅에서 삼국통일기의 신라시대를 아우르는 폭넓은 유적을 따라가 보기로 한다.

김제는 북으로 흐르는 만경강과 남쪽에서 흘러내리는 동진강사이에 펼처진 호남평야의 관문이다.

 유사이래 이곳에서 생산되는 쌀이 온나라를 먹여 살린다는 이야기도 전해내려오고 있다. 그처럼 넓은 평야에 하늘과 땅이 맞다는곳으로 끝없는 논이 펼처지고 있다.

벼 농사가 삼한시대부터 시작되었으며, 이곳에는 백제 때의 지명으로 남아있는 볏골이 한자가 들어오면서 벽골(碧骨)로 바뀌면서 이곳 부량면 원평천에는 서기 330년에 백제인들이 축조했다는 제방의 유적이 남아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평야지대인 이곳에도 동쪽 차령산맥이 뻗어내리면서 모악산(793m)줄기를 형성하여 대대로 불교문화가 발달하고 다양한 종교집단이 이곳에 뿌리를 내리니 그 대표적인 것이 증산교이다.

 

 이 곳에 금산사라는 불교 법상종의 거대 사찰이 들어선 것도 이곳이 곡창지대인데 기인한다. 이곳에는 56 7000만년후에 이땅에 와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륵신앙의 진원지인 금산사 일대의 여러 유적과 귀신사, 망해사 등을 우선 찾아가기로 한다.

문화유적에 앞서 먼저 미륵신앙에 대해 고찰해 보기로한다.

미륵이란 미래에 오실 부처님이다. 미륵 신앙은 삼국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신앙이다. 미륵이란 범어  Maitreya 의 음역으로 자비를 갖춘다는 뜻이다.

불교의 전래와 더불어 석가모니가 말씀한 미륵 신앙은 2 가지이다.

첫째는 미륵 상생 신앙으로 아직 보살의 신분으로 도솔천에서 수행 후 56 7천만년 후에 이땅에 와서 용화수 아래서 성불하여 중생을 깨달음의 길로 인도한다는 사상이다. 둘째로 미륵하생 신앙으로 모든 중생들이 자비심을 가지고 10선도(十善道)를 행하며 평화의 불국토를 만들어 대자 대비의 세상이 되었을 때, 미륵이 오셔서 미처 깨닫치 못한 중생을 깨달음의 길로 인도한다는 사상이다.

 미래의 부처, 아직은 오지 않았으나 미래에 올 미륵불을 기구하는 미륵 신앙은 미래사회에 대한 신앙으로 새로운 세상을 갈망하는 사람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다.

이런 미륵 신앙이 신라시대의 화랑도와 결합되어 국선 화랑을 미륵으로 보는 사상이 퍼지면서 삼국유사의 기록으로 보면 신라시대에 미륵신앙이 주류가 되었다.  이후 후 고구려 궁예가 혹세무민에 이용하여 나라를 이끌어 가기도 하였다.  조선말기와 일제시대의 암흑기를 거치면서 민중들에게 이상사회에 희망을 주기도 하였다. 그로인해 전라도 지방에 개벽을 바라는 신흥종교의 뿌리를 내리는 계기가 되기도하여 이 지방에 증산도 가 탄생하는 바탕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면 미륵 신앙의 근본인 10선도에 대해서 한번 알아본다.

(1) 불살생(不殺生): 살아있는 것을 죽이지 않는다.

(2) 불투도(不偸盜): 도둑질 해서는 안된다.

(3) 불사음(不邪淫): 음란해서는 안된다.

(4) 불망어(不忘語): 거친말은 안된다.

(5) 불기어(不綺語): 현란스런 말은 안된다.

(6) 불악구(不惡口): 험담을 하지 안는다.

(7) 불양설(不兩舌): 이간질은 안된다.

(8) 불탐욕(不貪慾): 탐욕스런 짓은 안된다.

(9) 부진(不瞋): 화를 내서는 안된다.

(10)불사견(不邪見): 그릇된 견해는 안된다 등 10가지로 지켜야 할 계율이다.

이러한 미륵신앙의 원천을 주지하고 이곳의 미륵신앙의 도량이자 법상종의 원찰인 금산사 일대를 탐사해 본다.

 

다음은 부안 변산반도 일대로 향해 지금은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내변산 일대와 이곳의 고 사찰인 내소사로 발길을 돌려 천년고찰을 둘러보고 천연 기념물로 지정된 부인 적벽강과 그 일대의 채석강을 둘러보기로 한다.

 

 

 

 

 

(1)금산사(金山寺)

 

중창을 시작하였다. 이때 진표율사는 미륵장륙상을 조성하여 미륵전에 모시었고 남쪽 벽에 미륵보살이 도솔천에서 내려와 계율을 주는 모습을 그려 놓았다고 한다. 그로 인해 금산사는 미륵신앙의 근본 도량으로서 법상종의 요람으로 이 지역의 불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때부터 금산사에는 대웅전이 없고 미륵전의 미륵이 주불이 되었다.

 그리고 진표율사는 중생들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자비를 실천하고 보시의 정신을 미륵사상에 담아 설파했다.

 고려 시대에는 혜덕, 소현 스님이 86동의 전각과 많은 암자를 거느린 대 사찰로 만들었다. 이조 정유재란때 소실,금산사는 서기 599년 백제 법왕 원년에 소규모 사찰로 창건 되었다. 신라가 삼국 통일 후 신라 혜공왕 2(776) 진표율사가  되었으나 그 후 인조 13(1635)에 대적광전과 미륵전을 새로 지어 대승불교의 대표적인 부처와 보살을 모두 수용하고 현재의 미륵신앙의 가람으로 조성 되었다.

금산사는 이 지역의 단일 사찰로는 가장 많은 문화재를 가지고 있다.

즉 미륵전(국보 제 62), 노주(보물 제 22), 석연대(보물 제 23), 혜덕왕사 진응탑비(보물 제 24), 오층 석탑(보물 제 25), 방등 계단(보물 제26), 육각다층 석탑(보물 제27), 당간 지주(보물 제 28), 북강 삼층 석탑 (보물 제 29), 대장전(보물 제 827),석등 (보물 제 828) 등이 있다.

 

 

a)  미륵전(彌勒殿): 국보 제 62

 

이곳 금산사는 미륵전에 화엄의 법신불인 비로 자나불을 주불로 가운데 모시고, 좌우로 노사나불과 석가모니불의 삼신불을 봉안하여 정토사상의 세계를 그리고 있다.

1700년대에는 환성 지안스님에 의해 수천명이 참가한 대법회가 열리기도 하였다.

즉 사회가 안정 되었을 때는 십선을 닦아 도솔천에 오르려는 미륵 상생 신앙이 발전하였고, 사회가 불안하였으면, 미륵보살의 의해 구원을 기대하는 미륵 하생 신앙이 발전하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한 3층 법당으로 여러 차례중수를 하였고 1988년에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거처 요즘에도 남북으로 보수공사를 진행 중이다.

 겉으로는 3층으로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3층까지 트인 통층 팔작지붕의 다포집이다. 1층과 2층은 정면 5칸에 측면 4칸이며, 3층은 전면 3, 측면 2칸으로 조화를 이루었다. 건물 전체의 높이는 18.91m 이며, 측면은 15.45m에 이른다. 아래로 부 터 위로 올라가면서 차차로 가벼워 지면서 매우 균형감을 가진 건축물로 되어있다.

기초는 자연석으로 된 초석위에 굵은 기둥의 원주로 기둥을 세웠다.

 1층에 고주 4개와 둘레로 20여개의 변주를 세우고 건물 안쪽으로는 고주와 변주를 큰 들보로 연결하였다. 2층은 들보 위에 2층 변주를 세우고 들보로 연결하였다.  3층은 고주를 그대로 살려 그위로 팔작지붕을 올렸다.

 1층에는 대자보전(大慈寶殿), 2층에는 용화지회(龍華知會), 3층에는 미륵전(彌勒殿) 이란 편액이 특이하다. 모두 미륵불을 모신곳이란 뜻이다.

안에는 동양에서는 가장큰 미륵 입상이 세워져 있는데 가운데 미륵상은 높이가 11.82m, 양 옆으로는 높이가 8.79m 나 되는 보살상이 모셔져 있다. 이들은 인조 5 (1627)에 수문대사가 조성하였으나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38년에 석고로 복원하였다.

처음에 진표율사가 모셨던 불상은 철불이었으나 정유재란때 일본 왜병들이 뜯어 갔고 지금의 발 밑으로는 당시의 철대좌만 남아있다.

 

                 (사진: 미륵전내의 중앙의 미륵불과 석가모니불)

 

b)       당간지주(幢竿支柱 ): 보물 제 28

 당간지주는 사찰을 상징하는 깃발이나 괘불(掛佛)을 세울 때 버팀목으로 사용하는 석조물이다. 이 지주는 높이가 3.5m, 양 지주가 남북으로 상대하여 서 있다.

기단석과 간대를 완벽하게 구비하고 있는 국내 유일의 당간 지주이다. 양지주의 각면에 장식된 조각기법이 현저하게 두드려 지며, 한국의 남아있는 당간지주 가운데 가장 완벽한 형식을 갖추고 있다.

석련대, 석주, 석탑 등은 통일 신라 시대에서 고려시대에 걸처 만들어진 유물인 반면 당간지주는 통일 신라시대 전성기인 8세기 후반에 건립된것으로 보인다.

 

 

 

 

 

c)적멸보궁(寂滅寶宮)

 

 이 법당은 방등계단(方等戒壇)에 참배하기 위하여 특별히 건립된 예배전이다.

원래는 나한전으로 석가모니불, 제화기과 보살, 미륵보살, 그리고 석가의 제자인 16 나한상을 봉안하고 있었으나 1998년 방등계단을 성역화 할 때 크게 개축한 것이다. 법당 뒤에 있는 방등계단에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가 모셔져 있기 때문에 법당내에는 불상이 없으며 그 기능이 부처님의 진신사리 예배소이기 때문에 적멸보궁으로 바꾸었다.

 

 

 

 

d)  5층석탑: 보물 제 25

 

이런 형식의 탑은 부처님의 사리나 경전을 봉안하며 법당앞 중앙에 세운다. 그러나 이 석탑은 방등계단을 장엄하는 정중탑으로 고려시대에 세워진 것이다.

이중 기단위에 높이 7.2m 5층석탑이 우뚝하게 서 있어 방등계단을 더욱 성스럽게 한다.

탑의 구조는 통일 신라시대의 석탑의 일반형을 따르고 있으나 하층 기단이 협소하고 옥개석 추녀끝이 살짝 들려 있어 고려시대의 특징을 보여준다.

상륜부의 노반이 크게 넓으며 그 위에 특이한 복발(覆鉢)이 있고 그 위에 보륜과 보주가 설치되어 있다. 1971년 해체 복원하였는데 과거 부처님인 정광여래 사리 2과와 석가모니불의 사리 5과가 나와 복원시 다시 봉안하였으며, 금동여래(金銅如來) 8분 등 다른 유물은 금산사 성보 박물관에 보관 전시 중이다.

 

 

 

 

e)   방등계단 사리탑: 보물제 26

 

방등 상하 이중기단을 구비한 2.57m의 석종형의 부처님 진신 사리탑이다.

기단은 대석, 면석, 간석(竿石)으로 되어있고, ,하 기단 면석에는 불상과 신장상이 조각되어 있고 하층기단 이면에는 기이한 인물상이 새겨져 있다. 석난간 네 귀에는 사천왕상을 새겨 놓았다. 그리고 탑신을 받치고 있는 판석 네 귀에는 사자의 머리만을 부각시켜 조상(造像)하였다. 탑신 받침 부분 주위에는 연판(蓮板)을 돌리고 있고, 밑바닥의 평면은 범종 모양으로 되어 있으며, 특히 밑부분에는 범종의 하대와 같이 화문대(花紋帶)를 조각하였다. 정상에는 9용이 전각되어 있으며, 그 위로 보주석을 올려 놓고 있다. 이와 같이 석종형의 사리탑은 통일 신라 말 부 터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인도의 불탑 형식에서 유래된것이다.

 

 

 

 

f) 노주(露柱): 보물 제 22

이 석조 건조물은 용도를 알수 없으나 그 형태가 연화대 처럼 조성된 특이한 석조물로 노주라 부르고 있다.

석조건조물의 구조는 상, , 3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단마다 민상과 화형문, 그리고 귀기와, 앙련(仰蓮), 복련(伏蓮)등이 화려하고 다양하게 조각되었다. 특히 상대석위에는 일반 석탑의 상륜부와 유사한 양식이 조각되어 있는데 상륜부가 원형이며 보주 사이는 간주형식인 것이 매우 특이하다. 연봉형(連峰形)인 보주의 조상 기법으로 보아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하고있다.

 

g) 대장전(大藏殿):보물 제 827

 

대장전은 미륵전과 함께 세워졌다. 즉 미륵전을 더 신성하게 하기 위함이다. 1598년 정유재란때 불에 타버린 후 인조 13 (1635)에 복원되었다. 미륵전 앞에서1922년에 현재의 위치로 재건되었다. 특히 목탑이 일반 불전의 모습으로 변형되었다.

법당 안에는 석가모니 부다의 제자인 가섭존자와 아난존자 불이 봉안되었다.

건물은 비교적 단조롭고 소규모이지만 정중(庭中) 목탑의 변형으로 주목되며, 석가모니불의 후불광배(後佛光背)의 조각이 아름답고, 지붕 용마루 가운데에는 예전 목탑의 흔적인 복발(復鉢)과 보주가 남아있다.

                     (사진:석가모니 불과 광배)

 

 

h) 석등: 보물 제 828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미륵전 앞에 있던 것을 1922년 대장전과 함께 현재의 위치로옮기었다. 높이는 3.9m로 방향판석으로 된 지대석 위에 원형의 하대석을 두고 장식했다. 기둥 돌은 팔각형으로 되었고 모서리 마다 선각이 있으며, 상대석은 앙련으로 장식되었다. 화사석과 지붕돌이 팔각형으로 되었고 상륜부가 있다. 북련 하대, 팔각 기둥, 앙련상대, 팔각 화대석, 4면에 뚤린 사각창으로 신라 석등의 전형이다. 지붕돌 부분이 다른 부분보다 커보여 전체적으로는 균형미가 부족하다.

 

 

 

 

 

i)    육각 다층석탑: 보물 제 27

 

이 탑은 고려초의 석탑으로 봉천원 터에서 옮겨온 것이다.

현재의 높이는 2.18m이며 11층 탑으로 우리나라의 탑이 대부분 화강암으로 만든 방형탑(方形塔)인데 비해 이 탑은 점판암의 육각 다층 석탑임이 특색이다. 이색적인 각층의 체감비례가 아름다우며 섬세한 조각기법을 보여준다. 원래 이 탑에는 층마다 탑신이 있었으며 6각의 모서리마다 풍경이 달려 있어 장엄하였다. 지금은 가장 위의 2개 층의 탑신과 11개층의 옥개석만 남아있다.

 

j) 석련대(石蓮臺): 보물 제 23

 

연화대 형식으로 조각된 불상의 좌대로 높이가 1.52m, 둘레가 10m에 달하는 거대한 연화대이다. 연화대 전체가 한 개의 돌로 되어 있으나 여러 개의 돌로 만들어진 것처럼 상, , 하대의 삼단 양식을 정연히 갖추고 있다.

하대석의 측면은 10각형이며 8개의 면에는 안상(眼象)을 음각하고 그 안에 서화(瑞花)를 조각하였으며 2개의 면에는 사자상을 조각하였다. 그리고 그 위로 복련판(伏蓮板)을 각변에 따라 10판을 돌려 웅려하게 표현하였다.

중대, 상대 등에는 안상과 화문(花紋), 연판문(蓮板紋) 등을 장식적 의장법(儀粧法)으로 조각하였다.

상대석의 윗면 중앙 부분에는 두개의 방형의 구멍이 있는데 이로 미루어 보아 이 좌대가 석불입상을 세우는데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좌대의 조각수법이 통일 신라 시대의 양식과 유사하다. 그러나 안사의 배치와 연판내의 조각등으로 보면 고려시대 초기인 10세기 경의 석조물로 추정된다.

 

 

 

 

 

 (2) 귀신사(歸信寺): 김제군 금산면 청도리

 

금산사에서 나와 712번 지방도로로 전주방향으로 가다보면 길가에 귀신사 표지판이 보인다.

이 절은 신라 문무왕 16(676) 의상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처음에는 국신사(國信寺)로 불리었다. 절의 기록에 의하면 고려때 원명대사가 중창하면서 구순사(狗脣寺)로 되었다. 조선조 고종 10(1873)에 중창하면서 귀신사로 바뀌게 되었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 후 각 지방에 중심에 세웠던 화엄 십찰 가운데 하나였으며 옛날 완산주 일대를 관장하던 대 사찰이었다.

지금은 사세가 기울어 그 위치를 금산사에 내어주고 대적광전, 명부전이 남아있고, 대적광전 윗편으로 축대 위에 삼층석탑과 석수가 남아있다.

 

                                          (사진: 귀신사의 대적광전)

 

 a)   대적광전(大寂光殿) 및 소조 비로자나 삼불좌상(塑造 毘盧遮那 三 佛坐像): (대적광전 보물 제 826,삼불 좌상 보물 제 1516)

 

이 건물은 진리의 법신인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모신 법당으로 대적광전의 <대적>은 이 부처가 발하는 깊은 고요 즉 정적을 뜻한다. 본래는 2 7칸 건물 이었으나 후대에 단층 건물로 고처 지었다.

귀신사는 신라 문무왕 16년 국신사(國信寺)라는 명칭으로 의상대사가 세웠다 한다. 주변으로 7~8개의 암자가 있었으며, 임진왜란시에는 이곳에서 승병을 양성하였다 한다.

대적광전 안에는 비로자나불을 본전으로 하고 좌우에 아미타불(향좌)과 약사불(향우)을 배치한 삼불형식으로 흙으로 빗어만든 소조상(塑造像)이다. 건물 앞면으로는 빗살무늬의 창을 달아 예스런 멋을 내고 있다.

 

              

                           (사진: 대적광전내의  삼불 좌상)

 

 

b)  귀신사 석탑: 전북 유형 문화재 제 62.(김제시 금산면 정도리)

 이 탑은 고려시대에 만든것으로 꼭대기 부위가 크게 손상 되었다. 탑의 높이는 4.5m 이며 층마다 탑 몸체 귀퉁이에 기둥 모양을 새겼다. 각층의 지붕은 넓고 귀퉁이 밑이 거의 수평을 이루고 있다. 받침부와 1층 몸채, 각 층 지붕은 여러 개의 돌판을 짜마추어 만들었다. 고려시대에 세운 탑이지만 전체적인 조각기법으로 보면 백제시대의 양식을 반영하고 있다.

 

 

  

C) 귀신사석수(石獸); 전북 유형문화재 제 64

 

 남서쪽 솔개봉을 향해서 엎드려 있는 이 사자상은 고려시대의 작품이다.

평평한 타원형 받침돌 위에 앉은 사자상은 머리를 처들고 바라보는 모습으로 매우 사실적으로 조각되었다. 석수의 몸 길이는 158, 높이 62㎝로 사자상의 등 위에는 남자의 성기처럼 생긴 마디진 2단 돌 기둥을 세웠으며, 그 위로 또 하나의 작은 돌 기둥을 얹었다. 전하여 지는 말에 의하면 이 사자상은 이곳의 지형의 나쁜 기운을 누르기 위해 세웠다고 한다.

 

 

 

 

(3) 망해사(望海寺)

 

망해사는 만경강이 서해로 흘러드는 지점에 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다. 백제 의자왕 2(642)에 부설거사가 창건하였다. 멀리 고군산 열도의 서해 바다를 바라보고 있어 석양에는 찬한하게 빛난다.

또 바다를 향해 낙서전(樂西殿), 법당, 종루가 자리잡고 있다. 낙서전은 인조 2(1624) 진묵대사가 지었으며 바로 바닷가에 면해 있어 파도소리가 요란하다. 법당옆의 청조헌(聽潮軒)은 요사채로 쓰여지고 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서해바다의 일몰은 아주 아름다운 풍광이다.

 

 

           (사진: -망해사 대웅전과 낙서전, -대웅전 내부 모습)

 

(4) 벽골제(碧骨堤): 사적 제 111

위치: 전북 김제시 부량면 신용리 일원

규모: 제방 2.5km, 지정구역 303.843

벽골제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신라 흘해 이사금 21(330)에 처음 벽골지(碧骨池)를 열었고, 제방의 거리는 일천팔백보이다 라는 기록으로 보아 제방의 길이가 3.24km 로 추정된다.

 

 

이 시기는 김제 지역이 백제의 영토로 추정 되므로, 통일 신라 이후에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고려되어 축조 시기를 백제 제 11대 비류왕 27(330)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통일 신라 원성왕 6 (790)과 고려 현종 및 인종(1420) 21년에 고처 쌓은 후, 조선 태종 15(1415)에 다시 쌓았으나 세종 2(1420)에 폭우로 무너졌다.

그 후 임진왜란 때 관리가 안된이후 농민들이 헐어서 경작지로 변경하였다.

일제 강점기인 1925동진토지 개량조합에 의해 제방이 농업용 간선수로로 개조되면서 크게 훼손되었으며, 용수로의 기능을 유지한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벽골제 제방 및 조선시대에 건립한 벽골제 중수비(重修碑) 1963 1 21일 사적 제 111호로 지정되었고 2011 3월 문화재청 공고 제 2011-81호에 의거 사적의 명칭을 김제 벽골제로 변경 하였다.

벽골제는 제천 의림지, 밀양의 수산제와 함께 삼한시대의 축조한 저수지로 알려져 있다.

벽골이란 김제의 옛지명인 볏골을 한자로 적은 것이다. 둑의 높이는 북단이 4.3m, 남단이 3.3m로 다섯 개의 수문(수여거, 장생거, 중심거, 경장거, 유통거)를 통해 김제 만경 평야에 물을 대었다. 그러나 지금은 남쪽 끝의 수문인 경장거(經藏渠), 북쪽 끝의 수문인 장생거(長生渠)와 중앙 수문인 중심거(中心渠) 자리에 큰 돌기둥 만이 남아있고 수문이 복원되었다.

 

 

지금의 유적은 일직선으로 두개의 수문지 (장생거, 경장거)를 포함한, 2.5km 정도의 제방과 1415년에 중수를 기록한 중수비가 남아있다. 제방의 높이는 약 5.7m, 윗변의 너비 10m, 밑변의 길이 21m의 규모로 축조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수문의 너비는 4.2m이며, 여기에 사용된 돌 기둥의 높이는 5.5m이고, 무게는 약 8 톤에 달한다.

돌 기둥의 안쪽에는 너비 20m, 깊이 12의 홈이 남아있는데 여기 목재판은 넣어 상하로 이동시키면서 방수량을 조절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수문의 외부로는 호안석(護岸石)이 견고하게 구축되어있다. 관개 면적으로는 10,000ha( 3000만평)으로 추정된다.

둑의 북쪽 기점엔 조선 태종때의 벽골제 중수와 관련된 중수비가 서 있다. 당시에 수리공사에 장정 일만여명이 동원된 대규모 공사였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사적 제 111호 벽골제를 중심으로 한 개발사업은 고대 수리유적을 보유한 우리나라 최고의 곡창인 호남 김제 만경들이 가진 농업 생산성과 오천년 농경문화의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 추진되었다.

또한 이런 가치의 계승을 위해서 우리나라의 최대의 농경문화 축제인 지평선 축제가 매년 벽골제 관광지를 무대로 펼쳐져 농경문화 향유의 장으로 기능을 다하고 있다.

a)   쌍용설화:

벽골제에는 단야의 전설과 쌍용전설이 전해내려 오는데, 단야낭자 설화는 신라 원성왕 때 김제 태수의 딸인 단야가 스스로 청룡의 제물이 되어 아버지의 살인을 막고, 벽골제의 보수공사를 할수 있었다는 이야기와 쌍용전설은 고려 몽고 침략때 대장군으로 활약한 조 연벽 장군이 백룡과 흑룡의 싸음에서 백룡을 도와준 것을 계기로 김제 조씨 가문이 대대로 융성하여졌다는 이야기이다.

이곳에는 매년 쌍룡놀이가 행해지며 이는 대대로 전해오는 농경 사회에서 물을 대주던 벽골제와 그 수호신을 숭상하는 놀이로 이 지역 농민들에게는 연례 행사로 자리잡고 있다.

 

b)벽골제 상설 놀이 체험 마당

벽골제에는 민속놀이 체험으로 매년 투호, 굴렁쇠 굴리기, 그네 타기, 널 뛰기 등 민속놀이가 열리고, 명인 학당에서는 전통문화와 예절 교육을 가르치며, 집풀 공예 체험장에서는 짚, 보릿대, 왕골을 이용하여 여러가지 생활 공예품을 만드는 체험을 가르치고 있다.

 

c)전통가옥 숙박

김제시에 현존하는 동헌 내아 (전북유형 문화재 제 61), 망해사 낙서전(전북 문화재 제 128)을 재현하여 지은 기와 2, 초가집 1동의 전통가옥의 숙박 시설에서 옛 조상들의 생활 모습을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다. 숙박 가능 인원은 약 40명 수준이다.

 

d)벽골제 농경문화 박물관

   국가 사적 제 111호로 고대 최대의 수리 시설 벽골제의 역사적 의의 및 발굴 경과와 수리와 치수의 역사 및 전래 농경도구와 농경문화, 오래된 김제를 주제로 하여 전시관을 구성하였다.

급속한 현대화의 과정에서 유실된 전통농경 사회의 기억과 경험, 그리고 사적으로의 김제 벽골제를 만날 수 있는 교육공간이다 

 

 

 

 

(5) 아리랑 문학관

벽골제 건너편에는 소설가 조 정래가 이곳을 중심으로 집필한 소설 아리랑을 기념하기위한 문학관과 창작 스튜디오가 자리잡고 있다.

 조선시대 부 터 이곳에 대대로 뿌리를 내리어 살고 있던 방 성근 가문에 일본이 수탈해간 쌀과 이지역의 농민의 애환을 그리고, 동진 수리조합을 앞세운 민초들의 대한 수탈, 이어지는 독립운동의 물결속에 만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투쟁하는 등 이어 해방의 소용돌이 속에 민족분단의 이념투쟁이 조국을 남북으로 갈라놓아 통일된 나라로 승화하지 못하는 민초들의 한을 그린 대하소설로 시대의 한 획을 그은 작품으로 평가된다.

대하소설 아리랑는 1990 12 11일 부 터 한국일보에 연재되어 왔고, 1995 8월 달에 해방 50주년에 전 12권을 출간하였다.

3개의 전시실에는 아리랑 4부에 관한 내용과 시각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사진으로 보는 현존작가의 인간적인 면모를 살펴 볼 수 있다.

또한 전남 순천시 벌교읍 지리산 자락에도 조 정래 문학관이 김제 보다는 큰 규모로 세워졌고 이곳에는 태백산맥에 관한 모든 것이 전시되어있다. 현존하는 작가로서 지역에 두 군데나 문학관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여야 한다.

 

                                         (사진: 조 정래 문학관 전경)

(6) 내소사 지역:  사적지 제 78(86.9.8)<면적 16.725>

 

a)내소사(來蘇寺)

 

내소사는 백제 무왕 34(633)에 혜구두타(惠丘頭陀)선사가 창건하였다. 처음에는 소래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고 당시에는 대,소 내소사가 있었으나  소실되고 지금의 내소사는 소 소래사였다고 전해진다.

조선조 이조 11(1633)에 청민선사가 중건하여 예전에는 일대의 선계사, 청림사, 실상사와 더불어 변산의 4대 사찰로 유명하였으나 지금은 내소사만 남아있다.

성종 17년에 간행된 동국여지 승람에 소래사로 올라 있음으로 그후에 바뀐것이다.

지금의 대웅 보전은 보물 제 291호로 청민대사가 건립한 것으로 단청과 문살의 조각한 문 격자의 아름다움이 뛰어나며, 섬세한 조각과 기둥을 제외하고 모두가 나무 목침으로 쌓아올린 건물이다.

경내에 있는 고려 동종은 보물 제 277호로 높이가 1m, 직경 67, 무개가 일백근이나 나가는 것으로 표면의 문양과 제작기법이 뛰어난 것이다.

그 밖에 이곳에 보관 되었다가 지금은 전주 국립박물관으로 이전 보관하고 있는 보물 제 278호인 법화경 절본 사본 7권은 묘법연화경을 필사한 것으로 총 72편이며 감지로 금니를 사용하였고 이조 태종 15(1415)에 이곳에 있던 어떤 부인이 남편의 명복을 빌기위해 만들었다고 한다.

부속암자로 청련암과 지장암이 남아있다.

 

b)3층 석탑: 전북 유형 문화재 제 124

대웅전 앞에 있는 것으로 2층의 기단위에 3층으로 탑신을 세우고 머리 장식을 얹은 모습이다.

위 아래 층 기단과 탑신부의 각 몸돌에는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다. 지붕돌 밑면에 4단의 밭침을 두었다. 그 위로는 네모난 밭침돌위로 등근형태의 작은 석재가 머리 장식을 하였다. 높이는 3.46m 1 층의 탑신에 비해 2층 부터는 높이가 작아 잔체적으로는 규모가 작게 보인다.

 

 

 

 

 

(7) 변산반도 적벽강, 채석강:전북 기념물 제29

 

변산반도의 적벽강은 중국 송나라 시인 소 동파가 놀았다는 적벽강과 흡사하며, 그 이름을 본따서 붙여진 것이다. 적벽강은 채석강 바로 옆에 있는 죽막마을을 경계로 펼처진 해안 절벽 일대를 가르킨다.

 붉은색 암반과 절벽으로 이루어진 해안이 절경을 이룬다. 중국의 적벽강 만큼이나 경치가 뛰어나다는 바닷가 경치는 기기묘묘한 암벽과 절벽이 조화를 이루어 경관을 자랑한다.  지금은 채석강 앞으로 관람 계단을 만들어 접근하기가 어렵고, 적벽강은 채석강 을 돌아 반도의 앞쪽으로 있어 더 보기가 어려워 졌다.

 송나라 시선인 <이 태백>이 뱃놀이 하던 중 강물에 떠있는 달을 잡으려고 하다가 생을 마감했다는 채석강은 절벽과 해식굴이 마치 바다의 수석 전시장같다.

                                          (사진: 채석강의 해식굴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