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충북 단양지역 문화유산 답사
충북 지구에서 2번째로 선정된 지역이 단양지역이다. 중앙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이제는 접근하기가 쉬워졌다.
삼한시대에는 마한 땅이던 제천은 4세기 무렵 백제에 귀속되었다. 그 후 고구려 땅이 되면서 신라와 고구려의 접경지역이 되어 전쟁터로 되면서 양국의 세력이 서로 대치하면서 서로 군사력을 강화하고 성을 구축하여 요새화하게 되었다.
제천지역의 의림지도 삼국시대에 축조된 수리 시설로 지금까지 관계용 저수지로서 사용되고 있다.
1985년 충주지역 남한강 상류에 다목적댐이 건설됨으로서 드넓은 충주호가 생기면서 제천과 단양지역이 수몰고 문화재가 물에 잠기면서 한벽루, 팔영루 등은 청풍문화재 단지를 조성하여 이전하였으나 선사시대에 유적지인 수양계 지구는 물에 잠기면서 그전에 계획적으로 발굴되어 우리들에게 우리 선사시대의 역사를 앞당겨 주면서 구석기 시대 이래로 이 지역에 사람이 살았다는 역사적 사실을 증명하여 주었다.
단양은 고구려로 영토화하면서 적성이라 불리었고 고려초에 가서야 단산현이 되었다가 충숙왕때에 가서 단양군이 되었다. 그로 인해 이 지역에는 군사적 대결로 인해 여러 차례산성이 축조되어 내려오면서 오늘날 유적지로 남아 있으니, 단성면 하방리 적성산성의 유적이 남아있고 그 근처에서 발굴된 적성비가 신라시대의 가장 오래된 비석으로 우리에게 당시의 이 지역의 실상을 편린으로 잔해주고 있다.
또 영춘면의 온달 산성은 온달장군의 전설이 서려 있는 유서 깊은 산성으로 그 축조연대가 상당히 오래된것으로 이 지역의 대표적 문화재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남한강 물줄기를 따라 단양팔경이라는 비경을 만들고 여기에 이조 개국공신인 삼봉 鄭 道傳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오면서 선비들의 고향이 되었다.
산과 더불어 도담삼봉, 구담봉, 옥순봉,사인암, 석문, 하선암, 중선암, 상선암 등의 명승지가 유명하다. 또 이를 둘러 싸고 호수 주변으로 솟아오른 수려한 명산들이 있다.
소백산(1.439m), 금수산(1.016m), 황정산(959m), 도락산(964m), 수리봉(1.019m), 제비봉(721m) 등 아름답고 수려한 산들이 충주호를 두르고 있다..
또 이 지역에는 옛 부 터 석화암 지역으로 천연동굴이 발견되어 천혜의 관광 명승지로 부상하면서, 온달 동굴,고수 동굴, 노동 동굴, 천동 동굴 등도 이 지역을 더욱 유명하게 만들어 주었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인 소백산 자락에는 우리 나라 불교 천태종의 총본산인 구인사(救仁寺)가 자리잡고 있다. 1945년에 상월 원각조사가 초가를 지은 것이 모태가 되어 그 후 1966년에 구인사사 중심이되 천태종이 재건되었다.
현재는 넓은 대지에 50여동의 건물이 들어찬 대규모 사찰이 되어 전국최대의 사찰로 군림하고 있다. 최근에 입구에 성보 박물관 신축공사를 벌이고 있다.
(사진: 온달 관광지 세트장 전경)
(1)온달 산성: 사적 제 264호
현재 온달 관광지가 있는 영춘면 지역은 삼국시대에는 고구려 영토로서 고구려와 신라간 치열한 영토전쟁이 벌어졌던 곳이다. 지금도 전쟁과 관련된 온달산성을 비롯한 삼국시대의 국경 유적이 남아있다.
최근에 조성된 온달 관광지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고구려의 명장 온달과 평강공주의 전설을 주제로한 테마파크이며, 온달 동굴, 테마공원, 온달산성이 있다. 이곳을 배경으로 이곳 산성밑 테마파크에서는, 사극으로 태왕 사신기, 연개소문, 일지매, 천추태후 등 드라마가 찰영된 현장이다.
이 촬영소를 서쪽으로 지나 산으로 오르는 코스는 고구려의 산성이 자리잡앗던 곳이다.
단양군 영춘면은 남한강 상류로 영월군과의 경계에 있다. 조선 고종 32년(1895년0에 영춘군이 되었고 1914년에 단양군이 되었다.
산아래 온달 관광지에서 올라가면서 계단이 조성되어 이제는 산성이 국민 관광지 와 더불어 역할을 하고 있다. 거의 산 정상 까지 나무계단이 조성되어 누구나 산성을 쉽게 둘러보고 전설에 쌓인 온달 산성을 쉽게 볼 수가 있다.
이 성은 원래 고구려 제 25대 평원왕의 사위 온달의 무용담이 이 지방에 전해 내려오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본디 성은 언제 축성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성안에서 삼국시대의 출토되기도 했으나 조선조 초기에 산성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옛 성으로 남아있다.
신동국여지승람, 대동지지, 조선시대의 단양군지 등에 기록으로 이 성의 여러갈래의 연혁이 남아있다.
산성으로 오르면 남한강의 시원스런 물줄기를 보면서 지금은 정자가 있어 쉬어서 올라가게 되어있다. 사모정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 정자에서 쉬어가면서 다시 계단길을 오르면 소나무 숲이 나오면서 온달 산성의 북쪽 문자리로 오르게 된다.
이 산성은 이렇게 남한강을 굽어보는 요새정상에 길이 683m,정도로 축성되었고, 남서쪽으로 솟은 보우리와 북쪽으로 가파르게 흘러내린 비탈위에 세워진 테뫼식 산성이다. 바깥에서 보면 높이는 북벽과 남벽이 7~8.5m, 동쪽벽이 6m 정도지만 급경사 비탈에 4m의 두께로 성벽이 축성되었으므로 안쪽에서는 낮지만 바깥에서는 7~10m 정도로 보인다. 즉 비탈진 경사가 심한 서벽의 경우는 안쪽으로는 1m 정도지만 밖같으로는 10여m 높이로 축성되어있다.
강줄기를 급경사로 내려다보이는 서쪽 벽은 성벽이 상당량이 무너져 내렸었으나 보수되고 다른 부분은 온전하거나 보수되어 이제는 성벽으로서의 거의 완전하게 보이고 있다. 한바퀴 둘러보는데 30여분이면 가능해 건각이면 성벽위로 경치를 감상하면서 걸어서 답사하기가 가능하다.
특히 남서쪽의 문터의 형식과 동쪽문의 돌출부는 우리나라 고대 성곽에서 드물게 보는 양식이다. 산의 정상을 중심으로 산의 7~8부 능선을 거의 수평으로 한바퀴 둘러 쌓았으니 처음에는 고구려가 축성하고 전쟁을 하면서 신라가 다시 쌓은 산성으로 추정된다.
성벽은 납짝하게 잘라진 점판암을 안팎으로 쌓았고 벽면뿐 아니라 속 까지도 돌로 쌓아 흙을 채우지 않았다. 성벽 돌 사이도 작은 돌로 정교하게 메워 곡선미가 뛰어나게 다듬어놓았다. 동, 남, 북 세군데에 문터가 있으며 북쪽문자리로 지금은 오르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당시의 남진 당시 58개의 성이 있다하였는데 이성도 그 당시에 성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벽 밖에서 올려다보면 거의 같은 높이로 성벽이 쌓여 있어 보기에 균형이 잘 맞아있다. 동문과 남문은 바깥쪽 벽이 10m 나되어 사달리를 놓고 드나들었던 현문이었다고 한다. 성벽 일부에는 밖깥으로 쌓은 치성(雉城)이 북문근처에있고, 남서쪽에도 치성이 있어 세군데가 치성으로 되어 있다. 지금은 성곽을 한눈으로 다 볼 수 있게 잘정비되어 있어 누구나 성위로 한바퀴 돌아보는 여유를 가질수 있다.
옛 기록에는 우물이 있었다고 되어 있으나 그 자리를 찾을 수가 없고 성터 한가운데가 우묵한곳이 샘터로 짐작되고 있다. 성안 터에서는 삼국시대의 후기 토기들이 발굴되어 연대를 측정하고 있다.
성터에서 주위를 내려다보면 한눈에 강변에 휘돌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아래 마을에서 움직이는 군사들의 모습을 눈으로 볼 수가 있어 방어나 공격이 쉬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북문 밖으로 나와 보면 성둘레에서 가장 낮은 쪽 성벽가운데에 하수구가 높이 2m 되는 성벽 한가운데에 사다리꼴로 만들어져 있고 위쪽에 큰돌로 밭치고 쌓아올려 단단한 수구를 만들어 놓아 성안에 물을 뫃아 밖으로 떨어져 내리도록 쌓아 놓았다.
산성에 올라 북문자리에서 부터 동문 서문 자리위로 성벽을 걸어보면 아래로 분지를 휘돌아 나가는 강을 건너가는 영춘교, 평야지대의 집들과 밭들이 내려다 보인다. 그 위로는 먼산 줄기들이 빙둘러 천연의 요새를 이루고 있어 방어하기에 좋은 성의 역할을 하고 있는 곳임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 “온달전” 에는 영양왕 1년(590년)에 온달이 신라에 빼앗긴 땅을 군사들을 주신다면 우리땅을 되찾겠다고 왕에게 말하고, “계립령”(지금의 충주 지릅재 일대)과 서쪽 죽령의 땅을 되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다” 말한 후 군사를 이끌고 출정하여 아단성 아래에서 신라군과 싸우다가 전사 했다는 내용이 써 있다.
고구려때 영춘의 지명이 “을아단” 이었으므로 온달이 전사한 곳이 영춘으로 보인다.
그러나 출정한 온달이 신라군과 싸우기 위해 이곳에 성을 쌓았다고 전해져 오면서 온달산성이 되었다.
남쪽에서 올라오는 신라가 전초기지로 쌓았다는 단성의 적성산성과 대치하기위해 이성이 큰 역활을 하였다고 보여진다.
이 일대에는 온달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근처의 상투나루는 온달을 장사지낸곳이러 하며, 이곳에서 온달의 관이 장사를 지내려 해도 움직이지 않아 평강공주가 와서 관을 매만지며 애도하니 관이 움직여 장사를 치렀다는 전설이 또 전해온다.
온달산성에서 남한겅 하류로 내려간 곳에 군간나루는 온달이 군사를 주둔시켰던 곳이라 붙은 지명으로 알려져 있다.
(2) 향산리 삼층 석탑: 단양군 가곡면 향산리 보물 제 405호
남한강 물이 푸르게 고요히 흘러가는 강가의 가고면 향산리, 골안에서 평지에 신라의 석탑 한기가 자리잡고 있다. 예전에는 탑 주위에서 기와조각이나 자기조각이 많이 나와 절터였지만 지금은 주거시설이 들어서서 옛날 절터를 상상할 수가 없는곳이다.
이곳에는 신라 제 24대 눌지왕 19년(435년) “묵호자” 가 이곳에 향산사를 세우고 불도에 정진하다가 열반 후 제자들이 탑을 건립하고 사리를 봉안 하였으나, 향산사는 임진왜란때 소실되어 그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당시에 남아있던 석탑 한기가 후에 1935년경에 도굴로 무너지고 땅속에 매몰되어 있던 것을 인근주민들이 재건한 것으로 전형적인 통일 신라 시대의 석탑이다.
그로 인해 2층과 3층 지붕 모서리가 깨어져 있으나 나머지는 온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몸돌(석탑의 탑신을 이루는돌)과 지붕돌(탑의 위를 덮는 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다.
여러 개의 장대석으로 지반을 마련하고 지대석을 쌓은 후 기단을 놓았다. 하층 기단은 면석과 갑석을 각각 4매씩 판석으로 조립 되었고, 상층기단은 2매의 층 기단은 면석을 각면 2매씩 모두 8면으로, 갑석은 2매의 판석으로 구성 하였다.
탑신부의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이 모각되었고, 1 층 몸돌에는 남쪽 면으로 문틀과 두개의 문짝이 새겨져 있다.
지붕돌 층급 밭침은 모두 4단이고 지붕돌 윗면에는 굄 두단씩을 넣어 위층 몸돌을 받치게 하였다. 상륜부에는 각각 돌한개로된 노반, 복발과 불꽃 모양의 보주가 얹혀져 있다.
이 탑은 1층 몸돌에 비해 2층 몸돌의 높이가 3분의 1 정도로 줄여 안정된 느낌을 주며 지붕들 네 귀퉁이도 경쾌한 감을 준다. 전체적으로 탑의 형태와 비율이 조화롭고 석재도 알맞게 정제되어 세련감을 주는 9세기 후반의 통일 신라시대의 석탑으로 추정된다. 탑의 높이는 4.05m 로 평지에 세워져 있어 안정감을 주고있다. 주위 산 밑으로 꽤 넓은 장소가 있어 그곳이 향산사의 옛터로 추정되고 있다.
(3) 단양 도담 3봉: 단양군 단양읍 도담리 (명승 제 44호)
경치가 아름다워 단양 8경중 가장 으뜸으로 꼽히는 도담 3봉은 푸른물이 유유히 흐르는 남한강 한가운데 오뚝하게 서있는 석회암 봉우리이다. 예전에는 심하게 가무는 여름철이면 모랫바닥이 들어나 그대로 누구나 쉽게 정자까지 올라 쉬어 가기도 하였던 곳이다. 나도 40여년 전에 이곳에 왔을때는 정자로 걸어 올라간 기억이 새롭다. 그러나 지금은 명승으로 지정되어 있고 충주호가 생기면서 물속에 적당하게 떠있어 아주 품위가 있는 명소로 보인다.
전설에 따르면 “남편이 아들을 얻기위해 첩을 들이자 심통이난 아내가 새침히게 돌아 앉은 모습”라고 한다. 가운데가 남편봉, 북쪽이 처봉, 남쪽이 첩봉인데 첩봉이 남편 봉우리와 등을 지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웃음을 머금게 한다.
조선 개국공신으로 정 도전 이 자신의 호인 삼봉(三峯)을 이곳에서 따 왔으며, 그가 담 삼봉의 경관을 사랑하였으며, 이 황, 김 홍도, 김정희 등 도 이곳에 절경에 매료되어 글과 그림을 남기었다.
정 도전의 시로
<선인교 나린 물이 자하동에 흘러드니
반천년 왕업이 물소리 뿐이로다
아희야 고국흥망을 무러 무삼하리오> (선인교 나린물이)
(사진: 도담삼봉 전경)
(사진: 상- 정 도전의 시, 하- 정 도전의 상)
(4) 수양개 선사 유적 유물 전시관
단양 수양개 유적(丹陽 垂楊介 遺蹟): 사적 제 398호
수양개 유적은 단양군 적성면 애곡리, 수양개 마을의 남한강이 굽이처 흐르는 단구상에 위치한 한데 유적(Open sites)이다. 1983년 충주댐이 축조되어 수몰지역 문화유적의 발굴, 조사의 일환으로 1983~85, 95~96, 2001 년 까지 총 8차에 걸처 3개지구를 충북대학교 박물관의 주관으로 발굴, 조사를 실시한 것이다.
지금까지의 발굴된 구석기 유적중에 가장 넓게 발굴된 유적으로 중기 구석기 시대 부터 원삼국시대 문화층까지 다양한 층위를 이루고 있음이 밝혀 졌다. 수양개 유적지에서 출토된 석기는 제작기법과 종류가 다양하며 출토품이 많아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곳이 되었다.
수양개 유적은 특히 우리 고대 후기 구석기 시대의 석기문화를 보여주는 유적으로 2천만년을 전후한 시기로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나타나는 구석기 시대의 유물들이 복합적으로 발굴되어진 유적이다.
수양개 1지구 유적지에는 50여곳의 석기 제작 장소가 확인되어 이 시기의 구석기 인들의 석기 제작 방법을 추정, 복원하는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이곳에서는 숨베찌르기, 좀돌, 날몸돌 등의 정형화된 석기들이 같은 층에서 발견되고 있어 중국, 일본등 동북 아시아 후기 구석기 문화의 전파를 밝혀 낼수있는 유적지로 평가 된다.
이 유적지에서는 중부내륙지역에서 발견된 원 삼국시대의 생활유적으로 대규모 취락지를 이루고 있었으며, 집터의 구조를 파악 할 수 있는 서까래 구조나 벽체를 이루는 나무판자 등이 불탄채로 확인되어 당대의 건축 양식을 연구하는데에도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였다.
또한 집터 내부에서도 다양한 탄화곡물이 출토되어 원 삼국시대의 농경과 식생활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한반도의 구석기 유적은 남, 북한 전역을 합하면 약 1000여곳이며, 그 중 연천지역을 위시하여 100여곳이 발굴되었다. 북한 두만강 유역에서, 제주 발레못 동굴까지 다양한 지대에 분포된 것으로 보아 한반도 전지역이 구석기 인들의 삶의 터전이 였음이 밝혀지고 있다.
구석기 유적은 강가의 한데유적 (Open sites)과 동굴 유적(Cave sites)으로 구분 되는데 주로 큰 강가나 해안 지역에 형성되었고, 동굴 유적은 석회암 지대에 형성 되었다.
한데유적이 발달된곳은 석기제작을 위한 양질의 돌과 사냥감이 풍부하고 물을 마음대로 사용하기 쉬웠고, 동굴 유적은 비바람을 막고, 맹수의 공격을 피하는데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
현재까지 조사에서 수양개 2지구는 원삼국시대 유적으로 현재까지 조사에서 26개의 집터가 확인되었으며 다양한 기형의 토기, 석기, 철기 등 많은 유물이 발굴되었다.
수양개 2지구 집터에서는 원삼국시대 두드림 무늬 단지와 경질 민무늬 토기가 상당히 많이 발굴되었다. 밑바닥이 평평하고 입구가 밖으로 벌어진 중도식토기(中島式 土器)계통이다. 토기의 종류별로는 높이 40㎝ 이상의 단지가 많이 출토되었으며, 바리, 시루 등 다양한 종류가 출토되어 원 삼국시대의 토기 사용에 대한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그외에 다양한 무늬를 가진 빗살무늬 토기와 덧띠토기, 골아가리 토기, 구멍무늬 토기 등의 민무늬 토기가 상당량 출토되어 신석기 시대에서 원 삼국시대에 이르는 기간동안 선사인의 주거지 였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
3지구에서 출토유물도 총 206점의 석기가 발굴되었다. 자갈돌 석기와 몸돌이 85%나 되었고 손질된 석기는 8.3% 정도 였다. 또 3지구에서 총 2개의 문화층이 확인되었다. 1 문화층에서는 사냥돌, 찌개 등의 자갈돌 석기류가 출토되었고, 2문화층에서 돌날 제작법의 석기와 밀개, 새기재 등이 출토되어 1 지구 후기 구석기 시대에 형성된 층으로 추정되어, 후기 구석기 유적의 범위가 넓게 형성 되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수양개 제 3 발굴 유적지와 출토유물 사진
(5) 단양 적성(赤城)산성: 사적 제 265호. 단양군 단성면 하방리
이 성은 신라 진흥왕 때(545~551년경)에 축조된 산성으로 둘레가 약 900 m 이었으나 대부분 붕괴되었고, 겹으로 쌓은 북동쪽의 안쪽 벽 등 일부만 남아있고 보수가 되지 않았다.
적성산성은 성재산 꼭대기와 남쪽으로 흘라내린 비탈을 빙 둘라쌓은 테뫼식 산성이다.
대부분 무너진 가운데서 북동쪽 끝에 높이 3m 가량의 성벽이 원형대로 남아있다. 성문 자리는 남서쪽, 동쪽, 남동쪽의 세군데로 확인 되었고 남한강 줄기에 면한 북쪽에는 없다. 여기서도 이 성이 남한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는 것으로 북쪽에 대응하기위해 쌓았음을 알수 있다.
성벽은 돌과 진흙으로 기초를 다진 후 자연석을 안팎으로 포개며 쌓은 내외 협축 방식으로 쌓여 있다. 성벽의 안쪽은 비깥쪽에 비해 더 높지 않다. 안쪽으로는 평평한 땅으로 다져져 있으며 건물이 있었던 장소도 있다.
적성 산성이 있는 성재산은 신라땅 이었던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땅에서 오자면 죽령을 넘어 남한강을 건너기 직전에 자리잡고 있다. 북쪽으로는 남한강이 흐르고 동쪽과 서쪽은 남한강으로 흘러드는 죽령천과 단양천으로 감싸여 있어 방어에 유리하며 사방을 살필수 있는 요충지로서 역할을 할 수 있다.
삼국시대의 산성으로는 비교적 큰 규모에 속하며 신라와 고구려의 세력관계의 변동을 연구하는데 크게 중요하다. 성내에는 신라의 북진과 그에 따른 조처등에 관한 중요한 기록이 담겨진 비석이 발견되었으며 그외 삼국시대의 토기와 기와조각이 많이 발견되고 있다. 신라 시대의 축성방법을 연구하는데 주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6) 신라 적성비(赤城碑): 국보 제 198호
신라 적성비는 삼국시대에 신라가 죽령을 넘어 단양일대의 고구려 영토를 차지하여 국경을 넓히고, 이곳의 백성들을 선무하기위한 표적으로 세운것으로 1978년 단국대 학술 조사단의 의해 발견 조사 되었다.
당시에는 땅속에 뭍혀있던 것을 발굴하여 표면위의 부분은 마모되어 알 수 없으나 땅속에 뭍혀있던 이래쪽 부분은 판독이 가능하며 대개 288자에 이르고 있다.
판독한 내용은 당시 국경 개척시 척경을 돕고 충성을 바친 적성사람 “야이치”의 공훈을 표창함과 동시에 장차 이와 같이 충성을 바치는 사람들에게도 똑 같은 포상을 내리겠다는 나라의 정책을 알리는 포고내용이 담겨 있다.
이 비문에는 국왕의 명령을 받은 고관 10명의 이름이 나오며, 그중 진흥왕때 큰공을 세운 인물로 이사부, 비차부, 무력 등의 이름이 나온다. 이러한 인물들이 활동했던 시대로 볼때 이 비의 건립연대를 신라 진흥왕 6~11년(545~550년)경으로 추정된다.
출토된 비문의 판독가능한 부분의 연구에 의하면 비문은 크게 3단으로 구성 되었다.
첫째 문단은 국왕이 대중등(大衆等)이란 직명을 가진 훼부(喙部) 출신의 이사부지(伊史夫智)를 비롯한 9명의 고관들에게 결정된 사항을 집행하도록 교를 내린 부분이다. 교의 내용은 비문에 보이는 전체 내용을 가리키는 듯한데 이 고관들은 고구려의 적성지방을 공격하는데 직접 참여한 군사 지휘관들로 여겨지는 김 유신의 조부로서 문헌상에서 확인되는 “무력”(武力)을 비롯란 인물이 등장한다.
둘째 문단에는 적성지방 출신의 “야이차”(也尔次)란 인물이 행한 어떤 공로를 기려 그의 처가 등 가족들과 그와 관게가 있는 인물들을 포상하는 내용이다. 포상의 대상은 몇 그룹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구체적인 포상내용이 각기 다르다. 이는 주인공인 “야이차”와의 관계뿐 아니라 수행역할에서 차이가 났기 때문일 것이다.
셋째 문단에는 비문의 마무리 부분으로 결정된 사실은 현장에서 관계자들에게 전달하고, 실제 집행한 사람과 비를 쓰고 세운 인명을 열거 하였는데 왕경인과 지방민의 두 그룹으로구성되어 있다.
하여튼 이비는 신라 제 24대 진흥왕 12년경에 세운 것이 확실하게 되었고, 국내에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글씨체는 1.5~3㎝의 예서체로 되어 진흥왕의 순수비 보다는 격이 낮고 세련되지도 않았다. 현재로는 높이 93㎝, 폭 107㎝, 두께 25㎝의 자연석 화강암에 음각되었으며, 비가 발견된 장소는 고구려 땅을 공략하여 영토를 넓힌곳으로 미루어 보아 “창령 순수비”보다 10년 이상 앞선것으로 추정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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