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03.20
우리 문화 유산 답사
철원일대의 문화유산
철원평야 및 D M Z일대-
(16)
글, 사진: 김 한 종
(사진: 철원 남방한계선 일대지도)
오늘은 해방 후 38선 이북 북한 지역으로 넘어가 김 일성의 통치를 받다가 6. 25의 전쟁 후 휴전선이 북상하면서 지금은 대한민국의 통치를 받는 비무장 지대의 일부인 그 옛날 궁예가 꿈꾸었던 태봉 제국의 영역을 찾아간다.
강원도 서북쪽에 위치한 철원군은 드넓은 평야가 자리잡아 강원도의 농산물 산지로 예전부터 자리잡아 오고 있다. 휴전 후 나는 등산으로 고대산, 금학산을 등산하면서 정상에 올라 드넓은 철원평야를 내려다 보면서 철원이 쌀 산지로서 수복 후 양질의 철원 오대 쌀의 공급지임을 알게 되었다. 역사를 공부 하면서 이 철원평야가 신라말기 부 터 궁예의 태봉국의 도읍지임을 알고 그 후 수 차례 등산을 하면서 백마고지, 철원 노동당사, 도피안사 등을 방물 할 기회를 가졌었다. 그러나 당시는 체계적으로 탐구할 터전을 마련할 수가 없었다.
추가령 지구대 금강산 아래 철령에서 발원한 한탄강은 평강, 철원을 거처 연천군 전곡에 이르는136km 를 흘러 임진강으로 합류한다. 화산이 폭발하여 지각변동으로 생긴 한탄강 협곡을 형성하면서 순담, 직탕폭포를 형성하고 그 아래로 협곡을 만들어 고석정이라는 전설의 명소를 빗어내고 내려오면서 수많은 사연을 담은 남북의 합작다리로 “승일교”를 만날 수 있다. 또 이 협곡은 아래로 내려오면서 삼부연 폭포라는 명승지를 만들고, 신라 경순왕 때 마의태자가 (麻衣 太子)가 울면서 금강산으로 들어갔다는 명성산(鳴聲山)을 솟구처 놓았다. 해방과 더불어 철원의 운명은 김일성 치하에 들어가 이 지역을 관장하던 노동당사라는 악명 높은통치기관을 만들어 냈다.
6. 25 때는 백마고지에서 10일간 24회의 주인이 바뀌는 국군 9사단과 중공군 38 군단의 전투로 미증유의 혈전을 벌여 아군 3.146명 대 중공군 14,395명이 고귀한 생명을 잃은 비극의 격전장이다. 이처럼 철원 평야와 화성산 일대 백마고지는 경원선으로 금강산, 원산과 함경도로 가는 요충지로서 큰 전략적 가치를 갖고 있는 곳이다.
그러나 휴전 후 이렇듯 피의 대가를 치르고 수복한 철원은 원래의 철원군의 4분의 1면적에 불과하다. 그 후로 신철원 읍 사무소가 갈말읍 지포리에 들어섰고, 구 철원으로 향하던 길은 민통선이 생기면서 군사도로가 되었다.
금강산으로 가던 철도도 월정리에서 멈추고 이제는 철마가 녹슬 채 반세기가 넘어갔다. 역사에 찬란하게 등장했던 궁예의 옛 태봉국의 도읍지였던 곳은 전체가 비무장 지대에 들어가 있어 이제는 전망대에서 잡초 우거진 들판과 언덕을 망원경으로 만 확인 할 수밖에 없고 우리가 찾아가는 유적지도 밟을 수 없으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
우리는 역사에 한을 품은 철원 땅을 찾아 민통선 아래 갈수 있는 곳인 고석정, 승일교, 삼부연 폭포, 월정역, 북한땅과 궁예의 옛 도읍지를 내려다보는 전망대, 백마고지 전적지, 뼈대만 남은 노동당사, 도피안사와 국보인 철조 비로자나불, 삼층 석탑, 토성리 고인돌, 태봉국의 토성 등을 찾아 나선다.
철원이 옛날 고구려 영토 였을 때는 모을 동비(毛乙冬非), 신라 때는 철이 많이 난다는 철성군으로 불리었다. 신라말 901년에 헌강왕의 서자로 태어난 “궁예”(弓裔)가 군사를 일으켜 이곳 고구려 터전에 도읍을 정하면서 태봉(泰封)이라는 나라를 세워 917년까지 통치하다가 고려에 나라를 내주게 되었다. 918년 송악에 고려를 건국한 “왕 건”(王 建)은 이곳을 동주(東州)칭하였고, 그 후 1310년 충선왕 때 철원으로 부(府)가 되었고, 1434년 세종 16년에 강원도로 되었고, 1895년에 철원군이 되었다.
(사진: 민통선 일대의 세밀도)
이제 우리는 분단되었으나 통일의 그날이 올 때에 대비하여 미리 이 지역의 역사적인 사실과 동족상잔이라는 비극의 현장을 몸으로 체험하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이곳에 왔으며 분단의 극복은 우리 후대가 모두 함께해야 할 과제이다.
(사진: 한국전사에 길이 빛나는 백마고지 전적 비)
1.철원 지석묘군: 강원도 기념물 제 22호 –철원군 갈말읍 토성리
신철원에서 김화로 가는 43번 도로 길목에서 제 2땅굴 방향으로 가다 보면 갈말읍 토송리가 나오고 토송 초등학교 지나면 의용소방대 건물 앞에 고인돌이 있다. 이곳에 고인돌은 여러 기가 있었는데 6. 25 당시 철원평야의 격전 후에 단 2기만 남아있다.
이 유적은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에 만들어진 무덤 떼(묘군)로, 고인돌, 지석묘, 돌맨(Dolmen) 등으로 불린다. 청동기 시대의 무덤으로 고인돌과 돌널 무덤(石棺墓)등이 알려져 있는데 고인돌은 무덤 방을 만들어 주검(시신)을 그 무덤 방에 놓고 큰 돌로 뚜껑을 만든 것이고, 돌널 무덤은 판판한 돌로 널(관)을 만들어 그 속에 주검을 놓고 평평한 돌로 뚜껑을 만든 것이다.
철원 남대천을 따라 놓여있는 이 고인돌 떼는 길고 넓적한 큰 돌을 양쪽으로 길게 세워 주검을 놓은 무덤 방을 만들고, 그 속에 주검과 석 검, 돌 화살촉 등의 껴물 거리를 넣은 다음 양쪽을 막고, 큰 뚜껑 돌(기석)을 올려서 만든 탁자모양의 북방식 고인돌로 탁자식(卓子式) 이라고도 한다.
이곳을 지나 북으로 1km 가면 넓은 벌판에 양주축산이 나오고 축사 옆에 언덕에 또 하나의 고인돌이 있다. 잡초가 우거진 곳에 진입로도 없이 방치되어 있으나 규모는 아주 크고 뚜껑 돌은 널다랐고 아주 평평하다. 그 앞 도로에 안내판만이 덩그라니 서있다.
(사진: 갈말읍 토성리 마을안의 고인돌)
2.철원 토성 : 강원도 기념물 제 24호-철원군 갈말읍 토성리
토성이란 흙으로 쌓은 성을 말하는데, 토성리라는 마을 명칭도 이 토성에서 유래한다. 이 토성은 언제 쌓았는지 확실하지는 않다.
전해지는 바에 의하면 인조 14년 (1636년)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장수 마푸타(馬夫大)와 룽쿠타(龍骨大)가 수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침입하였을 때 진(陣) 을 치기 위해 며칠 사이에 토성을 쌓았다고 하나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성을 쌓을 시간적 여유나 필요성은 없었을 것이며, 단지 이미 만들어져 있던 이 토성을 청나라 군대가 이용하였을 가능성은 있다고 하겠다.
본래의 성의 모형은 4각형이고 둘레 약 1km, 높이 10m 정도이며 두께는 아래 부분이 10m, 윗부분이 4m 정도 되었다. 그러나 성벽 흙을 파내 농지정리 등 다른 목적에 사용 함으로서 지금은 높이 5~6m, 길이 80m 정도의 토성만 남아있다.
(사진: 갈말읍 토성리에 남아있는 토성모습)
1976년 8월에 이 토성을 발굴하여 보니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 남아 있었으며, 이곳에서 무문토기 조각과 석기 등 여러 유물이 발견 되었다. 그로 인해 이 토성은 삼한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추정 되었다. 이 지역은 남대천 하류 부근으로 동, 서, 남 세 방향의 협곡의 중심부로 이 요충지에 토성을 쌓은 것으로 확인 할 수가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흔치 않은 평지에 쌓은 4각형 토성으로 고대 토성 축조 방식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3.승일교: 등록문화재 제 26호-철원군 갈말읍 내대리-동송읍 장흥리 경계
이 교량은 일제 강점기 철원농업 전문학교 과장이며, 구주공전 출신으로 진남포 제련소의 굴뚝을 설계했다는 “김 명애” 교사가 설계하여 시공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북한 김 일성 정권하인 1948년 8월부터 장흥리 쪽으로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다리의 절반을 추진한 상태에서 6.25 남침으로 중단되었으나 수복 후 우리 정부에서 약간 다른 공법으로 나머지 구간 공사를 마치고 1958. 12. 3일 준공하면서 “승일교”라 명명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한 편 또 다른 면으로는 1952년 미 79 공병대대 중위로 한국에 복무했던 “제임스. N. 패터슨”씨가 당시에 군복무를 하면서 일기 형태로 기록한 자료에 의하면 일본인에 의해 공사가 시작되어 다리의 양쪽 입구 15m의 2 경간과 50m의 1 경간 만을 완료하고 50m 1 경간을 남겨둔 채 중단 되었으며, 미 79 공병대대가 1952 .4. 3일 상부의 지시를 받고 1952. 4.16 일 공사를 시작하여 동년 8.15일 완공하였다고 한다.
승일교라는 이름이 붙은 사연은 좀 특이하다.
해방 이후 철원은 북한지역 땅으로 당시 김일성이 동송읍 쪽의 다리를 절반쯤 놓는 사이 한국전쟁이 터져 공사가 중단된 채 이 지역은 휴전 이후 남한 땅의 수복지구로서 이 승만(李 承晩) 정부 때에 갈말 읍 쪽의 다리 공사를 완결하게 되었다. 그로인해 다리 이름을 김 일성의 가운데자 와 이 승만의 승자를 따서 “승일교”라 하였다 한다.
(사진: 승일교의 아취 모습 전경)
다리를 자세히 살펴보면 높이 35m, 길이 120m의 승일교는 가운데 이어 붙인 흔적이 각기 다름을 알 수 있고 다리아래 아치위의 난간 세멘트의 북쪽의 공법과 남쪽의 공법이 서로 달라 모양이 다르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즉 북쪽은 각이 지고 남쪽은 둥글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무튼 남북의 합작이 있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하지만 다리에 새겨진 명문은 또 다르다. 이 다라는 북괴가 강제동원으로 절반 정도를 건축하고 남침한 후에 휴전 후 우리측에서 완공한 것으로 되어있다.
즉 국군이 북진하던 중 이곳에서 31세의 젊은 나이로 장열하게 전사한 고 “박 승일” 연대장의 애국충정을 기리기 위해 당시에 5군당장인 “이 성가” 장군이 1958년 12월 3일 이 다리를 완공 하여, 당시의 연대장의 이름을 따서 “승일교”란 하였다 한다.
우리 주변에는 동족상잔의 비극인 격동기의 유물들이 많이 잔존하고 있으며, 특히 승일교에는 민족의 비극이 숨어있어 남북이 하나가 되어야 하는 소망을 간직하고 있으며, 그 옆 한탄대교는 새로운 발전의 시대의 중심으로 거듭나고자 하는 역동적인 의미가 있으며, 승일교와 한탄대교는 화합의 상징이다.
승일교는 남북이 절반씩 건설한 교량으로 양쪽으로는 남을 상징하는 청색과 북을 상징하는 적색을 표현하고 중간부에는 백색으로 남북이 하나가 되는 것을 상징하였다. 또한 우리군의 상징이며 평화를 상징하는 두루미의 웅장한 날개로 언제든지 비상 할 수 있는 형상을 교량하부의 큰 아치에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사진: 다리 상판 중간에 남북으로 이어진 부분)
그 후 승일교는 1999. 8.11 일 바로 옆 한탄대교를 개설하면서 차량통행이 금지되고 2002. 5. 27 일 등록문화재 제 26호로 지정 되었다.
불과 70년도 안된 역사의 한을 지닌 다리가 이렇게 여러 이야기를 품고 있으니 우리는 모든 것을 정확히 기록하는 풍토를 갗춰야 함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다.
4. 한탄강과 고석정: 강원도 기념물 제 8호 –철원군 동송읍 장흥리
한탄강은 해발 590m 의 추가령에서 발원하여 추가령지구대 협곡을 흘려오면서 현무암 계곡에 수많은 명소를 연출하였다. 서울과 원산 사이에 골짜기를 형성하면서 136 km를 흘러 임진강으로 합류되고 있다.
연천 군지에 의하면 한탄강은 본래는 한 여울이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고, 이 지역의 화산폭발로 인해 한반도의 원산 아래에서 부 터 깊은 추가령계곡을 형성하였고 지반이 꺼져 내려가 현무암위로 물이 흘러 맑은 물이 계곡을 굽이치면서 물살이 빠르다. 강폭이라야 평균 60m 내외로 좁은 협곡에 수직 기암들이 들어서고 그 기암위로는 수 많은 소나무들이 자라고 있어 절경을 연출한다. 이로 인해 강물이 흐르면서 협곡을 이루고 바위를 패어 순담계곡, 직탕 폭포, 고석정, 삼부연폭포, 재인폭포 등 명승지를 만들어 냈다.
(사진: 고석 바위 전경)
이 강 주변에 용암들은 27만년 전에 화산분출로 이루어진 것이며, 약 650㎢ 에 이르는 넓은 철원평야도 일종의 용암지대이며, 한탄강물은 곡창지대를 흘러 유명한 철원 쌀을 생산해 내는 것이다.
고석(孤石)은 고석정 인근의 한탄강 현무암 협곡에 홀로 서있는 화강암의 기암괴석이다. 약 1억년 전 중생대 백악기에 관입한 화강암은 이 일대의 기반암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27만년~1만년 전에 분출 전 현무암질 용암류이 의해 고석은 매몰되었고, 이후 한탄강의 침식작용을 받아 다시 지표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따라서 고석은 용암지대 형성 이전에 원지형(原地形)을 관찰 할 수 있는 중요한 가치를 지닌 지형, 지질 유산이다.
고석의 아름다운 경관은 각종 영화나 드라마 촬영지의 배경이 되었다. 고석 건너로 후세사람들이 정자를 세우고 고석정(孤石亭)으로 명명하여 명승지로 거듭나고 있다.
이 고석정은 철원평야를 가로 질러 흐르는 한탄강 중류에 위치한 “철원 8경”중의 하나이다. 강 양쪽은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한쪽 강가에 10m 정도의 큰 바위가 우뚝 솟아있고, 절벽의 중간에 3칸 정도의 자연석굴이 있다. 일찍이 신라 진평과 고려 충숙왕이 유람을 왔었다는 명승지로, 조선 명종(1545~1547)때에 의적 임 꺽정(林 巨正) 이 자연석굴에 은거하면서 활동 하였다고 전해오며, 강 건너편에는 그가 쌓았다는 석성(石城)이 남아있다.
후대 사람들이 이를 기리기 위하여 정자를 짓고 고석정(孤石亭) 이라 불렀다고 하는데 정자도 6.25 때 불타 없어져서 1971 년에 2층 누각의 정자를 새로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진:고석정의 모습)
5. 민통선 내에 유적
2차대전이 끝나면서 우리나라는 일본에서 해방되면서 미, 소, 중국에 의해 카이로 회담을 거처 얄타회담에서 독립을 하 면서 38도선으로 미국과 소련에 의해 남북으로 분단되었다.
그 후 남북한에 각기 정부가 수립되어 6.25 전쟁 때 까지는 38도선으로 분할되어 북한은 공산주의 국가를 세우고 남한은 민주정부를 수립하여 대한민국으로 국가를 선포하였었다.
그러나 1950년 소련의 사주로 김 일성 집단은 6.25일 미명에 남침을 감행하여 대한 민국 정부는 누란의 위기를 맞았었다. 그러나 미국을 비롯한 UN의 참전으로 3여 년 만인 53.7.27일 현재의 상태로 휴전을 이루고 이 휴전선이 남북으로 조국을 갈라놓았다.
(사진: 1953.7월 판문점에서 휴전회담 모습-우측이 공산측 대표)
휴전협정에 의해 남북으로 휴전선에서 각기 2km를 설정하여 D.M.Z 비무장지대를 이루었다. 따라서 휴전협정의 장소로 개성 밑 판문점에서 공산측과 유엔측이 휴전회담을 하면서 오늘날과 같은 통한의 분단을 초래하게 되었다. 임진강 하구에서부터 강원도 고성 동해안에 이르는 248km에 길이에 약 3억 평에 이르는 땅이 비무장 지대로 되면서 어느덧 60년의 세월이 흘러 이제는 갈 수 없는 곳이 되어 버렸다.
그 후 1954년 2월 미 제 8군 사령관의 직권으로 휴전선 일대의 군 작전과 군사시설 보호를 목적으로 민간인 통제구역인 “민통선”을 설정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강원도 고성, 인제, 양구, 화천, 철원 군의 30여 개 마을과 경기도 연천, 파주, 강화, 김포의 81개 마을이 민통선 마을로 지정되었다. 그로 인해 강원도의 52개 리와 경기도 51 리가 영농 때에만 출입하여 농사를 할 수 있게 허용되고 있다.
이 민통선 안에 남북 4km 비무장지대에는 사람의 출입이 금지되어 반세기가 넘도록 생태계 보전이 잘되어 있어 희귀 동식물의 낙원이 되었다. 민통선 바로 위로는 옛 궁예의 태봉국의 도읍지가 잡초에 쌓여 있고 천 년의 세월이 잠들어 있다. 그리고 남쪽으로는 북한이 한때 사용하여 악명이 높았던 노동당사가 뼈대만 남아있어 분단의 상징이 되어있으며. 중공군과 국군이 휴전협정 막바지까지 격렬한 전투를 벌였던 백마고지 전적지, 원산과 금강산으로 가던 철마가 마지막으로 멈춰선 월정역 등이 남아있다.
a) 태봉국 도성지 (泰封國 都城址)
태봉국의 건국자인 궁예는신라의 47대 헌강왕의 서자로 전해지면서 그를 죽이려고 버려지는 것을 궁녀가 받는 바람에 눈을 찔려 그는 외눈박이가 되었다. 그로 인해 궁예는 (?~918년) 일찍이 권력투쟁에서 밀려나 세달사(世達寺)에서 성장한 후 북원(北原=지금의 원주)의 양 길(梁 吉)의 밑으로 들어가면서 세력을 키웠다.(892년) 특히 명주(강릉)등 영동지역 일대를 장악한 궁예는 사원의 수도승도 들을 세력화 하여 독자적으로 일어나 미륵사상을 내세우면서 부패와 혼란에 빠진 신라의 진성여왕(877~897년)통치하에 반기를 들었다.
(사진: 비무장 지대 북측 지역에 태봉국 도성지)
영서지방을 거처 철원으로 진출한 궁예는 계속 서진하여 고구려 세력의 중심지요 왕씨 세력의 아성인 송악(개성)을 장악한 후 그곳에 서기 901년에 “후 고구려”를 세웠다.
그러나 반도 전체를 통합하려는 큰 야망을 지녔던 궁예는 국호를 대 동방국을 뜻하는 “마진”(摩震)으로 바꾸고 904년에 도읍지를 한반도의 중심지인 넓은 철원평야의 풍천원으로 옮겼다. 그리고 그는 새 도읍지에 대규모의 도성을 쌓고 911년에 국호를 다시 “태봉”으로 바꾸면서 강력한 중앙집권 통치체제로 수립하여 나아갔다. 그는 불교적 이상세계의 건설을 위해 자신을 미륵불로 자처하면서 신정적 전제정치를 추구하였으나 이러한 신정정치는 왕 건(王 建)을 중심으로 한 고구려 계 호족들과도 불화와 갈등을 일으키며 궁예는 결국 그들과의 대결에서 패자가 되었다.
918년 궁예는 결국 몰락했지만 자주적이고 개혁적인 그의 정치 이념과 대제국 건설의 이상은 “왕 건”(王 建)을 통하여 고려로 계승되었다.
궁예가 풍천원의 새 도읍지 주위에 쌓은 태봉국 도성지는 현재 월정역 북방 비무장지대 안에 자리잡고 잡초만 우거진 채 역사에서 멀어져 갔다. 이 도성은 외성과 내성의 이중성으로 되어 있으며 남북으로 긴 사각형 형태이고, 북쪽이 동쪽으로 9.5도 기울어져 있다. 성의 둘레는 외성이 12.5km, 내성이 7.7km로서 대부분 토성이며 일부는 이 지역에 많은 현무암을 함께 쌓은 토성 혼축성으로 되어 있지만 이제는 잡초에 묻혀 다 허물어져 버렸다.
해방 당시만 해도 외성의 하단 폭은 10.9m, 높이 3.6m였고, 내성의 하단 폭은 3.6m, 높이 2.1m 정도였으나 최근 확인 결과는 해방 당시의 규모의 절반도 못되고 대부분이 붕괴되어 있는 상태이니 남북분단은 이렇게 역사도 세월에 묻어버리고 만 것이다.
해방 당시만 해도 내성 안 북쪽의 궁궐터인 포정전지(布政殿址)와 석등 (해방당시 국보 제 118호), 그리고 외성 남벽에 남문지와 석탑 및 돌 거북 받침돌인 귀부(龜趺)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확인하기가 어렵다.
도성 안 동쪽에는 일제시대에 부설한 경원선 철도가 남북으로 통과하고 있으나 이제 철로는 모두 없어지고 철도 제방만 남아있다. 지금은 이 도성 한가운데로 군사분계선이 가로 질러가면서 양분되어 있어 이 옛 도성의 연구 조사는 남북이 합계 해야만 하니 미래의 통일 후 과제이다.
b) 백마고지
한국 전쟁 당시 최대의 격전지였다. 휴전회담이 판문점에서 막바지에 이르면서 한치의 땅도 수복해야 되며, 남북의 요충지로서 철원읍 효성산 언저리에 야산으로 395 고지라고 불리었고 한국전 당시 중부전선의 광활한 철원평야 일대와 서울로 통하는 한국군의 주요 보급로로 군사 지정학상 요충지였다.
(사진: 백마고지 전투 당시의 진지구축 장면)
이 때문에 휴전 협상이 한창 진행하던 1952. 10.6일 부 터 10일 동안 국군 정예 제 9사단의 김 종오(金 鍾五) 장군의 지휘하에 3개 연대와 중공군 제 38 군단의 7개 연대가 오직 395 고지 하나만을 서로 점령하기 위해 백병전에 이르는 혈투를 벌였다.
폭 2km, 길이 3km 에 불과한 야산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포탄만도 30여 만 발이 떨어져 고지가 초토화 되었다.
고지 주인이 10일만에 24번이나 바뀌는 혈전 끝에 한국군 3.146명이, 중공군 14.389명이 전사하는 혈전장 이었다. 그리고 무수한 포격으로 황폐화된 고지는 마치 하얀 말이 누워있는 것 같이 보인다고 당시 “백마고지” 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우리 군은 사상 유례없는 사상자를 내면서 고지를 사수하여 큰 전과를 올렸으며, 휴전을 앞두고 군사 요충지를 확보하고 UN 군이 휴전 회담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유할 수 있게 되었다.
C) 철원삼각지 평화전망대
동송읍 중강리에 위치한 철원평화 전망대는 지상 3층, 지하 1층 규모로 2007년 11월에 개관하였다. 1층에는 전시관, 2층은 관람관으로 망원경을 통해 DMZ 내의 자연생태, 궁예 도성지와 성곽, 평강고원, 북한의 선전마을을 볼 수 있으며 앞에 지형을 축소한 모형판이 있어 민족분단의 현실을 체험적으로 느낄 수 있다.
(사진: 철원 평화 전망대 전경)
최근에 관광객들과 안보의식 고취를 위한 방문자들 위해 모노레일을 설치하여 운영중이고 전망대 앞에는 교회와 예수상이, 그 아래로는 부처님이 모셔져 있는 사원이 있다.
d) 제 2 땅굴과 승리 전망대
제 2 땅굴과 철원평화 전망대, 월정리 역, 두루미 관, 승리 전망대 등은 고석정 국민 관광지 에서 신청하여야 한다. 매년 3월~10월 09:30~14:30시까지 1시간 간격으로 4회, 11월~2월 09:30~14:00 역시 4회 이다
철의 삼각 전적관은 고석정 국민 관광단지 내에 안보 교육관으로 1989년에 개관하였고 통일관에는 북한의 다양한 물품들이 전시되어 있고, 교육관에서는 홍보 영상물을 상영한다. (033)450-5558
제 2 땅굴은 북한이 휴전이 후 남침용으로 판 것으로 북한지역에서 휴전선 군사분계선 까지 2.400m, 중앙의 군사 분계선에서 남쪽으로 1.100m, 도합 3.500m를 당시에는 남북대화를 하면서도 파내려 온 것이다.
(사진: 제 2 땅굴 내부 전경)
1973년 11.20일 경계 근무 중이던 초병이 땅속에서 나는 폭발음을 포착하면서 75년 3.1~3.24 일 까지 25일간을 현대건설의 시추작업을 거처 마침내 남침용 땅굴이 백일하에 드러난 것이다.
승리 전망대는 견학당일 출발시간 15분전에 신분증 확인을 거처 3~10월은 09:30분부터 16:30분 까지 7회, 11~2월에는 6회로 명단 및 주민등록증을 미리 제시하여야 한다. 철원군 근남면 영서로를 거처 마현리에 소재하며 30분이 소요된다.
6. 월정리 역, 두루미관
서울에서 원산으로 가는 경원선 열차가 잠시 쉬었다 가는 간이역으로 현재 남방 한계선상에 최북단에 위치하고 있다. 5~6평의 작은 역으로 들어가면 표를 팔던 창문이 인상적이고 역으로 나가면 선로 건너 편으로는 “철마는 달리고 싶다”라는 통일 기원 문구가 뇌리를 친다.
한국전쟁 당시에 마지막 운행하단 객차가 60년이 지나 지금은 녹슬고 부식되어 앙상한 골격만이 남아있어 분단의 아픔을 더해주고 있다. 또 당시 UN 군의 폭격으로 부서져 멈춰선 북한의 인민군 보급 화물열차가 이제는 앙상한 골격만 남은 채 분단의 한을 드러내고 있다.
경원선은 1910년 한일 합방 후 일본인들의 강제동원과 당시 러시안의 10월 혁명으로 추방된 러시아인들을 고용하여 1914년 강원도에서 제일 먼저 부설하여 서울~원산간 227km를 연결하였던 산업철도로서 철원지구에서 생산되는 농산물, 광물을 수송하는 중요한 간선철도 역할을 한 것이다.
그 앞으로는 서울 104km, 평강 19km, 원산 123km, 함흥 247m 등의 거리가 표시되어 있어 실향민들의 마음을 울리고 있다.
(사진: 월정리 역 전경)
그 앞에 두루미관은 철원평야의 넓은 들판을 바라보며 이곳에 날아드는 북방 철새들의 생태를 알려주는 철새관으로 철이 지난 지금은 박제 50여종을 비롯한 90여 점이 전시되어 있고 그들의 생태를 설명하는 학술관으로서 높은 가치가 있다.
철원평야에는 멀리 시베리아 등지에서 날아오는 겨울 철새 도래지로 지금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두루미(제 202호) 약 950 여 마리, 재두루미 (제 203호) 880 마리, 독수리 (제 243호) 등이 해마다 겨울철이면 찾아오는 지역으로서 이곳에는 풍부한 먹이와 얼지 않는 온천수가 흐르는 얕은 개울이 있고, 지금은 민간 통제 구역으로 출입이 제한 되어 겨울새의 월동지역으로서 천혜의 조건을 갖춘 곳이다. 이런 곳은 세계적으로 유일 하며 두루미와 재두루미가 함께 서식하는 곳으로 유일한 곳이다.
겨울철에 찾아오는 손님으로 두루미는 번식지인 시베리아에서 서식하나 해마다 겨울철이 되면 이곳에 와서 월동을 하며, 일 부 재 두루미, 흑두루미, 검은 목 두루미 등은 철원을 거처 우리나라 남부지역, 또는 일본의 규슈, 이즈미 지방까지 날아가 겨울을 보내고 이동 시기에 다시 철원으로 찾아온다. 그러나 최근에 환경오염으로 점차 서식지가 파괴되고 있어 천연 기념물 보호를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철정리 역 앞에는 이곳 백마고지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고 “김 교수”(金 敎洙) 대위의 추모비가 우리의 심금을 울려준다.
그는 1923년 6월 함남 함흥시 신포리 출생자로 6.25가 나자 51년 8. 18일 육군 종합학교에 입교, 제 32기로 소위로 임관되어 동년 8.23일 제 6사단 2연대 6 중대 소대장으로 부임하여 수많은 전투에 참가하였고 53. 7월 13일 휴전회담이 막바지로 다가가던 중 7월 13일 공세 시 제 6중대를 이끌고 교암산 전투에 임하면서 참호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막다가 무려 6차례나 백병전, 육박전을 펼치면서 장렬하게 전사한 대한민국의 수호자이다.
(사진: 백마고지 전투에서 산화한 고 김 교수 대위 추모비)
그는 당시에 장교로서 조국을 위해 산화한 영웅으로 정부는 휴전 후인 53년 10월 15일 그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하였으니 그는 대한민국 국군의 진정한 영웅이었다. 그의 가족은 지금 어디에 살고 있을까? 그저 잊어져 가는 6.25의 참상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7. 노동당사: 등록 문화재 제 22호(2002.5.27 지정)
철원 전망대를 나와서 백마고지 전적지로 가다 보면 도로 옆에 뼈대만 남은 건물이 서있다. 이들 건물들은 철원 금융조합, 농산물 검사소, 얼음 창고 등으로 무너지거나 흉물스럽게 남아있다.
백마고지에서 돌아 나와 문혜리로 가다가 동송읍 편편한 평지에 북한 정권 시 권력기관이었던 조선 노동당 철원군 당사가 아직도 을씨년스럽고 흉물스럽게 뼈대만 남아있어 우울하게 한다. 북한의 조선 노동당에서 이 건물을 지을 때 성금으로 리당 쌀 200 가마씩을 거두어 드렸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 건물은 1945. 8. 15일 해방 후 북한 지역에서 공산 독재정권 강화와 주민 통제를 위해 건립하였고, 6.25 전까지 노동당 당사로서 악명을 떨치던 곳이다.
시멘트와 벽돌 조적으로 지은 3층 건물 구조인데 당시의 이 건물 일대가 철원읍 시가지로서 6.25 전란을 거치면서 대부분 파괴되고 무너졌는데 유독 이 건물만이 남아있어 얼마나 견고하게 지었는가를 알 수 있으며 당시의 건축기술을 짐작하게 하여준다.
(사진: 철원군 노동당사 전경)
이 노동 당사는 해방 이후 북한당국이 한국전쟁 전까지 수 년간 중앙당으로 부 터 지령되는 극비 사업과 철원, 김화, 평강, 연천, 포천지역 주민들의 동향 사찰은 물론 대남 공작을 주도한 공산치하에서 중부지역의 주요 업무를 관장했던 당사이다. 그 후로도 반공 인사를 체포, 구금, 고문, 학살했던 악명 높았던 곳으로 이 건물 뒤의 방공호에서 많은 인골과 당시의 고문 흔적을 보여주는 사람 뼈, 실탄, 낫, 철사 줄 등이 발견되었다.
8. 도피안사(到彼岸寺): 철원군 동송읍 관우리 450
도피안사는 구 철원 시가지로 들어가는 463번 도로 따라가다 피안교를 건너가 화개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이 세상 속세를 탈피하여 이상 세계로 나아간다는 의미의 사찰이다.
도피안사는 서기 865년 통일 신라 제 48대 경문왕 5년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향도 천 여명을 거느리고 천하에 산수가 좋은 곳을 찾던 중 영원한 안식처인 피안과 같은 곳에 이르렀다 하여 화개산(華開山) 현 위치에 도피안사를 창건하여 통일 신라 시대의 대표적인 국보인 “철조비로 사나불 좌상”을 봉안하였다.
이 철불은 백성들의 참여로 조성되었으며 운반도중 없어졌는데 저절로 도피안사에 안좌 되었다 하며, 이 자리에 절을 창건하고 이 철불을 모시었으니 전국의 중요 사찰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거기에 더하여 3층 석탑을 조성하여 후에 이 석탑도 보물로 등재 되었다. 그 후 역사 속에 무치어 천년의 세월이 흘러가고 1898년 조선 광무 2년에 화재로 건물이 불타버렸다는 기록이 “유점사 본말사지”에 나오는 것이다. 그 후 월운 스님이 재창건 하였다 한다. 1941년 1월 당시의 주지 “김 의권” 스님이 사찰을 개수하여 전통 사찰로 이어져 오던 중 해방 후에 공산치하에 있다가 도피안사는 또다시 한국전쟁 때 완전 소실 되었다.
(사진: 신축중인 도피안사 대적광전의 모습)
전해오는 기록에 의하면 1957년 11월 육군 제 15사단 에서 복원한 후 군부에서 관리해 오다 1959년 어느날 당시 제 15 사단장 이었던 이 명재(李 明載) 장군에게 꿈에 불상이 나타나 당시에 없어졌던 불상이 화재로 소실과 함께 땅에 묻히게 된 것을 찾아내어 이곳에 다시 봉안하고 관리해 왔다. 1986년에 와서야 사찰 관리권이 민간으로 이관되면서 1988년 부 터 정부의 지원으로 대적광전과 삼성각을 개축하고 범종각, 사천왕문 등을 중건하여 사찰로서 면목을 갖추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a) 철조비로사나불좌상(鐵造 毘盧舍那佛 坐像): 국보 제 63호
이 불좌상은 신체와 대좌가 모두 철로 주조된 신라말기의 보기 드문 불상이다.
뒷면에 새겨진 139자의 명문가운데 “咸通 6年 己酉 正月”(함통 6년 기유 정월)이라는 문자가 새겨져 있어 이 불상의 제작 시기가 신라 경문왕 5년(865년)임을 알 수 있다.
살 상투의 표현이 분명하지 않은 점, 게란 모양의 단정한 얼굴, 이상적이며 생동하는 느낌이 적은 극히 현실적인 체구 등에서 당시에 참선하고 있는 스님을 연상하게 된다. 법의에는 얇게 빗은듯한 평행 옷 주름이 전면적으로 표현되어 있으니, 이런 옷 주름은 9세기 후반의 불상에 특징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불상에 한때 금물을 입혔으나 도로 원형으로 복원한 사연이 서려 있다.
(사진: 임시로 안치된 철조 비로사나불 모습)
특히 명문에 의하면 이 불상은 철원군의 거사, 신도, 1500여 명의 열렬한 신앙심에서 주조된 것으로서 당시에 활발했던 불교 신앙인의 결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와 함께 이 불상은 당시 유행하던 “철조 비로 사나 불상”의 새로운 양식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각광받고 있다.
b)도피안사 3층 석탑:보물 제 223호
법당 앞에 건랍돤 높이 4.1m, 의 3층 석탑으로 방형 지대석 위에 8각의 2 중 기단을 갖추고 있다. 하층기단은 8각의 각면의 안상(眼象)이 조각되고 갑석 위 괴임대에는 단조로운 복판 연화가 있다. 상층 기단 갑석에는 앙련(仰蓮)이 조각되어 있으며, 밑의 복련보다 다소 두툼하다.
탑신부는 일반형 석탑에서와 같이 방형으로 3 층을 중적하였다. 상륜부에는 큼지막한 노반(露盤)만이 남아있다. 이 탑의 건립연대는 법당 안에 안치된 철불상의 각명에 의하여 이것도 신라 경문왕 5년의 것으로 추정 하고 있다.
(사진: 새로 짓는 대적광전 앞에 3층 석탑 전경)
이 땅에 휴전이 된지 60년의 세월이 흘러 이제는 비무장 지대에 남아있던 문화유산은 복원이 불가능하여 모두 유실되어 가니 안타까운 일이다. 전쟁 유산도 이제는 가꾸어야 할 중요한 유산이다.
남북 북단이 극복되어 통일이 이루지는 날 우리는 우리 조상이 남긴 유산을 찾아 자손 만대에 물려주어야 하며 이런 국가사업은 남북이 통일 이전이라도 조상의 얼을 살리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니 우리는 문화국민으로 반만년의 역사를 가진 민족임을 전세계에 알리는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다” 라는 나의 평소의 생각이 결실을 맺는 날이 다가 오기를 기대한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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