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4.12
우리 문화유산 답사
경북 영주-선비의 고장
(17)
글, 사진: 김 한 종
(사진: 무량수전 현판)
태백산맥 끝자락인 선달산에서 늦은목이로 향해 내려오는 백두대간 자락은 소백산을 향해 완만한 능선을 형성하여 마구령을 향하다가 봉황산(819m)자락 단석리에 불교성지로 화엄세상을 이루어 놓았다.
아울러 소백산 국망봉, 비로봉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줄기 아래로는 선비의 고장으로 이 땅에는 유교문화를 뿌리내린 소수서원을 비롯한 선비촌을 형성하게 되어 수많은 선비를 배출하는 문화의 요람을 형성 하였다.
신라 문무왕대인 서기 676년에 봉황산 자락 단석리 깊은 산자락 아래에 의상대사(義湘大師)가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하여 신라시대에 대가람으로 화엄종의 수 사찰(首 寺刹)이 되어 1500여 년을 이어오면서 수많은 불교문화의 유산을 간직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목조 건축물인 무량수전(無量壽殿) 비롯하여 안양루(安養樓), 조사당(祖師堂)등의 오랜 건축물과 석등, 삼층석탑 등 국보급 문화재의 보고를 이루는 불교문화의 중심지를 이루었다.
(사진: 영주일대의 유적지 지도)
그 후 고려 말에 유학이 들어오면서 회헌(晦軒) 안 향 (安珦)이 이곳에 태어나 유학사상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조는 건국 후 배불 숭유(排佛 崇儒) 정책에 따라 불교를 멀리하고 유교를 숭상하게 되어 중종(中宗) 37년 (1542년) 풍기군수 주 세붕(周 世鵬)이 이 곳으로 부임하면서 “안 향”의 유업을 기리고자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곳인 이곳 영주 순흥리에 최초로 백운동(白雲洞) 서원(書院)을 건립하여 최초의 사립서원으로 자리 매김하게 되었다.
그 후 퇴계(退溪) 이 황(李滉)선생이 풍기 군수로 부임하면서 조정에 건의하여 “紹修書院”이란 사액(賜額)을 받게 되었다. 사액서원이 되면서 나라로 부 터 토지, 노비, 책 등을 하사 받아 서원을 일구어 후대에 전하면서 유학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로 인해 이 서원에서는 많은 유학자들이 탄생하여 유교의 중흥을 이루었으며, 그로 인해 많은 문화재를 간직하게 되었고 최근에는 선비촌으로 이어지면서 우리나라의 유교문화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다.
단석리 신라 시대의 불교문화의 화엄성지 밑에 바로 유교문화가 뿌리내리는 문화의 충돌지로서 영주는 우리나라의 두개의 주류사상을 함께 포용하는 용광로의 고장으로 번영하여 오고 있다. .
영주는 단산면 좌석리에서 나락으로 넘어가는 고치재가 태백산맥, 소백산의 경계이며, 재의 동쪽은 태백산의 끝 봉우리고, 시백봉은 소백산의 첫째 봉이다.
고치재에서 발원한 물이 단산면에서 동서를 관류하는 구계천이 되어 죽계와 남원천을 만나 영주의 서천이 되고, 내성천을 만나 낙동강으로 흐르는데, 동은 태백산, 서는 소백산 지역이니 영주는 두 백산 사이에 동남쪽으로 누워있는 있는 “선비의 고장”이다.
한편 종말봉은 태백산의 백미인 자계봉과 천마, 대마산을 지나 영주와 봉화의 경계를 지나 영주 시가지의 진산인 철탄산이 되어 금풍 곧 서풍을 삼켜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고치령 동쪽 태백산맥 지역이 국립공원 소백산에 편입되어 있다. 이러한 절묘한 지세를 가진 영주는 산자락에 불교의 본산이 될 수 있는 지정학적 위치를 두루 갖추고 있는 땅이다.
아울러 순흥 벌판에는 유교의 발원지로 서원을 짓고 후학을 양성하는 사립 교육기관이 우리 이조 문화의 대개를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런 불교 문화와 유교 문화가 충돌함이 없이 천 년을 이어내려오는 선비의 고장으로 이번에 양대 문화의 유적, 유산을 찾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이 모든 것은 이 고장이 경상북도의 북부 오지에 속하나 일찍부터 서울과 연결되는 기차노선이 발달하고, 영주에서 태백으로 가는 교통의 요충지이기 때문이다. 또 평지에는 농업이 발달하여 양질의 쌀이 생산되고 기후 조건이 좋아 사과나무 재배가 적당하여 품질 좋은 영주 사과의 생산지이기도 하다. 이번 답사에서 우선 부석사를 중심으로 불교 유산을, 소수 서원을 중심으로 유교문화를 섭렵하는 계기를 삼고자 한다.
1.신암리 마애석불(磨崖石佛):보물 제 680호
이 불상은 삼국시대 말기 또는 통일 신라 시대 초기의 마애 삼존석불이다. 바위 네 면에 돋을 새김한 이 4면 석불은 마멸이 심하지만 한 면의 삼존불상만은 뚜렷한 편이다.
결가부좌(結跏趺坐)한 본존불을 협시보살(夾侍菩薩)이 좌우에서 모시고 선 삼존상(三尊像)인데 가운데 본존불은 민머리에 가름한 얼굴, 당당한 어깨, 큼직한 시무의(施無衣), 여원인(與願印)의 손 모양을 하고 있다.
양 어깨의 덮은 옷은 앞가슴이 U 자형으로 터졌으며, 여기에 속옷을 맨 띠 매듬이 표현된 것 등은 옛 양식을 말해준다. 협시보살 역시 불꽃무늬(火炎紋)가 새겨진 보주형(寶珠形) 두광(頭光)을 지니고 머리에 삼면보관(三面寶冠)을 섰는데 체구에 비해 큰 얼굴, 좁은 어깨, 묵직한 천의(天衣)자락 등에서 삼존불이 비슷한 양식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특징은 다른 세 면에서도 마찬가지로 보이고 있으므로 이 불상은 7세기 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사방 불상으로 높이 평가 된다.
본존 불상은 높이가 148㎝, 협시보살상의 높이는 108㎝ 와 112㎝이다.
(사진: 신암리 마애삼존석불 상)
2. 부석사(浮石寺):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신라 문무왕(文武王) 16년 (AD 676) 해동 화엄종의 종조인 의상대사(義湘大師)가 왕명으로 창 건한 화엄종의 수 사찰이다. 대사가 당 나라에 유학하고 있을 때 당 고종의 신라 침략 소식을 듣고 이를 왕에게 알리고, 그가 닦은 화엄의 도리로 국론을 통일 하여 내외의 시련을 극복하게 하고자 귀국하여 이 절을 창건하였으며 우리나라 화엄사상(華嚴思想)의 발원자가 되었다.
부석사라 이름하게 됨은 불전 서쪽에 큰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는 아래의 바위와 위의 바위가 서로 붙지 않고 떠 있어 뜬 돌이라 한데서 연유하였다 한다. 고려 시대에는 선달사(善達寺) 또는 흥교사(興敎寺)라 불리었다.
1916년 해체 보수 시 발견된 묵서명(墨書銘)에 의하면 고려 초기에 무량수전(無量壽殿)등을 중창하였으나, 공민왕(恭愍王) 7년(1358) 왜구의 병화를 당하여 소실된 것을, 우왕(禑王) 2년(1376)에 무량수전이 재건되고 동왕 3년(1377) 에 조사당(祖師堂)이 재건되었다.
부석사의 전체적인 가람 배치는 아주 특이하다. 산록으로 오르면서 시야를 넓혀가면서 큰 새가 날개를 활짝 피며 날아가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다.
일주문으로 오르는 비탈길부터 산경사를 이용하여 한 단계씩 올라가면서 배치한 것이다. 공간을 크게 나누면 일주문 사이, 천왕문 사이, 안양루 사이, 무량수전 앞마당으로 이어지고 그 위로는 조사당과 자인당이 산록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입구에서 은행나무숲길을 따라 오르면 일주문에 ”太白山 浮石寺”라는 현판이 달려있다. 부석사는 민족의 성산인 태백산 줄기의 마지막인 봉황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일주문을 지나면 영주 특산 사과 밭이 양쪽으로 나오고 왼쪽으로는 당간지주가 우리를 맞이한다. 이곳을 지나 오르면 천왕문이 나오고 문안으로는 양쪽에 사천왕상이 무서운 시선으로 압도하고 있다.
사천왕문을 나서 오르면 축대가 거대하게 쌓인 대석단이 나오고 그 중간에 가파른 계단이 나와 이를 오르는 사람이 높은 곳으로 들어가는 마음의 자세를 가다듬게 한다.
계단을 올라 들어가면 단아한 삼층석탑이 통로 양쪽에서 맞이한다. 그 양쪽으로 요사채가 자리잡고 있으나 균형미가 손상된듯하다. 이곳을 지나 오르면 범종루 누각 밑으로 나가게 되며 여기서 눈을 들면 대 석단위에 우아하게 서있는 안양루(安養樓)를 올려다보게 된다.
“안양”이란 극락의 다른 이름이니 이제 부 터는 극락으로 들어가는 입구로 가는 곳에서 숨을 한번 가누어야 한다.
머리를 숙여 극락세계로 오르는 길인 양 누구나 머리를 숙이면서 계단을 오르면 가운데에 석등을 마주하게 된다. 석등 너머로 무량수전이 한눈에 펼쳐지며 이제 마지막 극락에 오른듯한 느낌이 든다.
무량수전은 현판이 압도하듯 중생을 내려다 보는 듯하다. 여기서 우리는 부석사의 전체적인 가람배치를 그제서야 몸으로 느께게 되며 아래를 내려다보는 여유를 갖게 된다.
(사진: 부석사 무량수전 전경)
그러나 무량수전 위로는 더 멀리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조사당과 자인당이 자리잡고 있으니 절의 전채적인 구도가 참으로 놀랄만한 것이다.
특히 천왕문으로 오르는 계단 길 양 옆으로는 대석단이 쌓여 있으니, 높이가 4.5m에 길이가 75m 나 되는 거대한 석축이다. 이러한 석축은 안양루를 오르면서도 높이 4m, 25개의 계단을 올라야 한다. 전체적으로 이러한 오르는 길은 아홉 단을 이루는 것으로 이는 극락세계로 오르는 구름 만다라를 상징한다고 여겨진다. 이렇게 어려운 길을 올라 무량수전에서 비로서 아미타여래를 만나 극락에 이른다는 것이니, 이 높은 곳에 이르면서 기도하고 무량수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겹겹이 펼쳐 진 산자락이 발아래 있으니 이곳이 바로 극락이 아닌가!
(사진: 태백산 부석사로 오르는 계단길)
이 감동을 글로 표현한 “최 순우” 선생의 <부석사 무량수전>에 “무량수전 앞 안양문에 올라 먼산을 바라보면 산 뒤에 산, 산마루가 겹겹이 곱게 펼쳐진 곳에 도량이 있으니…” 그는 배흘림 기둥에 기대서서 아름다운 가을 산사를 바라보며 자연과 건물의 조화를 극찬하였다.
부석사의 가람 배치는 이렇듯 오묘하며 마지막에서 화엄경의 주존불인 “비로자나불”을 만나는 것이 화엄의 세계가 현실화 되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경내에는 신라시대 유물인 무량수전 앞 석등(石燈-국보 제 17호), 석조여래 좌상(보물 제 220호), 삼층 석탑(보물 제 249호), 당간 지주(보물 제 255호), 석조 기단 등이 있고, 고려시대 건축물인 무량수전(국보 제 18호), 조사당 (국보 제 19호), 소조여래 좌상(塑造如來 坐像-국보 제 45호), 조사당 벽화 (국보 제 46호), 고려 각판 (보물 제 735호), 원융 국사비 등 국보 5점, 보물 5점이 있다.
특히 무량수전은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건축물의 하나이며, 조사당 벽화는 목조건물에 그려진 벽화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현재는 유물관 안에 보관되어 있다. 무량수전 안에 봉안된 “소조여래 좌상”은 국내에 전래하는 최고의 조상(彫像)이다. 무량수전의 서쪽에 있는 우물은 의상대사의 호법용(護法龍)이 살았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a) 당간지주(幢竿支柱):보물 제 255호
당간이란 절에서 불교의식이 있을 때, 불, 보살(佛, 菩薩)의 공덕을 기리거나 마귀를 물리칠 목적으로 달았던 “당”(幢)이라는 깃발의 깃대를 말하며, 이 깃대를 고정시켜 주기 위해 세우는 돌 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이 기둥은 통일 신라 시대 당간지주로 부석사 입구에 위치해 있으며 높이는 428㎝ 이다. 양 기둥 꼭대기에는 내면 상단에서 외면으로 내려오면서 호선(弧線)을 그리며, 외부로 깎여 졌는데 일단의 굴곡을 이루었다. 이 굴곡부에서 앞 뒷면의 중앙에 종선문(縱線紋)이 내려오고, 정상부에서 2 단의 아름다운 원호(圓弧)가 경사진 형태로 조각되었고, 측면은 3조의 종선문이 있다.
당간지주 사이에는 연꽃 잎을 장식한 원형의 간대석(杆臺石)이 놓여져 있다.
전체적으로 소박하고 아름다우며 간결하고 단아한 수법으로 보아 부석사 창건과 함께 7세기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된다.
(사진: 부석사 입구의 당간지주)
b) 3층 석탑(石塔): 경북 유형 문화재 제 130호
이 탑은 통일 신라 후기 3층 석탑으로 쌍 탑이다. 동 탑의 높이는 360㎝, 서 탑은 377㎝로 두 탑의 크기와 양식이 비슷하다.
이중 기단 위에 3층의 몸 돌을 올린 것으로 무량수전의 동쪽에 있는 석탑과 같은 형식이다. 전체적으로 짜임새가 있고, 정제된 모습으로 신라 석탑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기단과 탑신부의 몸 돌에는 기둥을 본 떠 새겼는데 기단은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조각을 두었고, 몸 돌은 모서리에만 두었다. 몸 돌을 덮고 있는 각층의 지붕 돌은 밑면의 4단씩의 받침을 두었다. 윗 부분인 상륜부(相輪部)는 없어 졌는데, 지금 놓여져 있는 것은 뒤에 보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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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3층 쌍 석탑 전경)
c) 무량수전 앞 석등: 국보 제 17호
팔각을 기본형으로 삼고 네모난 지대석 측면에는 안상(眼象)<오금곡선으로 안쪽을 파낸 모양>을 2개씩 배치하고 그 위에 아래 받침돌에 큼직한 연꽃 조각을 얹어 가운데 기둥을 받치고 있다.
팔각의 가운데 기둥은 알맞은 높이로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불을 밝혀두는 화사석(火舍石) 사면에 도드라진 보살상과 연꽃무늬 등은 우수한 조각으로 손꼽히고 있다.
연꽃 하대석에 8옆 복판(겹 꽃잎) 연꽃의 첨단부에 귀 꽃의 장식문이 화려하게 조각되었고, 여러 형식으로 보아 9세기 중엽의 것으로 추정 된다.
d) 무량수전(無量壽殿): 국보 제 18호
이 건축물은 부석사의 본전으로 주불의 좌우로 모시는 보살이 없는 즉 보처(補處) 없는 화엄도량으로 서방 극락세계의 주불인 아미타불(阿彌陀佛)을 가운데 모시고 있다.
신라 형식으로 보이는 돌계단 위에 초석을 다듬어 놓았고 그 위에 배흘림 기둥을 세웠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로 주심포(柱心包-기둥머리에 얹는 포)양식의 대표적인 건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의 하나로 유명하다.
고려 현종 7년(1016) 원융국사(圓融國師 964~1053)가 중창 하였다. 국사는 이곳에서 대장경을 만들었었는데 그 경판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사진: 무량수전의 설계 명칭도)
1916년 해체공사 시 발견된 서북쪽 귀공포에 묵서명(墨書銘)에 고려 공민왕 7년(1358) 왜구의 침입으로 건물이 불타서 우 왕(禑王) 2년(1376)에 다시 지었다고 쓰여 있다.
그 후 조선 광해군 3년(1611)에 서까래를 갈고 단청을 다시 하였으며, 현대에 와서는 1969년에 대대적으로 보수 하였다.
건물 천장부의 아름다움과 장엄함은 외관의 세련된 풍모와 아울러 한국건축의 가장 빼어난 사찰 건축물로 평가되고 있다. 무량수전에 대해서는 고 최 순우 선생의 말을 더 인용해 본다.
“무량수전은 고려 중기의 건축물이지만 우리나라가 보존해온 목조 건축물 중 가장 아름답고 오래된 건물이다. 기둥높이와 굵기, 사뿐히 고개를 처든 지붕, 추녀의 곡선과 그 기둥의 조화, 간결하면서도 역학적이며 기능에 충실한 주심포의 아름다움, …. 문 창살 하나 문지방 하나에도 나타난 비례의 오묘함…, 멀직이 바라봐도 너그러운 자태, 어떤 거드름도 없는 평안한 자태…..
무게가 실린 팔작지붕, 앞에서 보아 세칸으로 단정한 격자문이 고즈넉하게 보이고….정면에서 보이는 무량수전은 다섯칸이고, 옆면은 세칸이지만 기둥 앞쪽으로 보와 직각방향으로 양쪽 서까래를 받는 도리를 바깥으로 모두 11개를 붙여 지은 아주 우람한 팔작지붕이다.
기둥의 아래쪽의 1/3쯤이 둥그렇게 배가 불러 보이게 한 배흘림 기둥과 건물 모서리 기둥을 중앙의 기둥보다 조금 높게 한 기법으로 시각적인 안정감을 주고 있다. 이로 인해 위나 옆에서 보아도 처마선이 직선이 아닌 곡선으로 보이게 한 것이다.
나무와 흙으로 지는 건물의 이런 조화로 무량수전의 지붕은 날아가려는 새가 비상하는 느낌을 주고 있다.
창문은 모두 위로 올려 고정하는 열개 형식으로 되어있어 큰 행사를 할 때는 모두 개방할 수 있게 되어있다.
(사진: 본전에 아미타 여래좌상)
전각안에는 왼쪽으로 아미타여래가 높은 좌대 위에 앉아있고, 선의 부드럽고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이 아미타 여래좌상은 흙으로 빚어 만든 소조상으로 높이가 2.78m로 건장한 체격에 우견편단으로 가사를 걸치었다. 옷 주름은 자연스럽게 흘러내려 균형미를 이루고 손 모양은 향마촉지인(마귀를 물리친다는 의미)의 자세이다. 뒤의 3.8m에 이르는 나무 광배의 조각은 한층 섬세하며, 불상과 함께 금색으로 단청하여 돋보이게 하고 있다.
e) 부석(浮石)
신라 문무왕 1년(661)에 의상스님이 화엄학을 공부하기 위해 당나라에 갔을 때 의상스님을 연모한 “선묘”(善妙)라는 낭자가 있었다. 의상스님이 장안 종남산 지상사의 <지엄삼장>문하에서 10년간의 수학을 마치고 심오한 경지에 이른 후 귀국 뱃길에 오르자 뒤늦게 소식을 들은 “선묘”가 선창으로 달려 갔으나 의상 스님이 탄 배는 벌써 수평선 뒤로 사라지고 없자 바다에 몸을 던져 용으로 변신하여 의상스님이 탄 배를 호위 무사하게 귀국하였다 한다.
그 후 의상스님이 화엄학을 피기 위하여 왕명으로 이곳 봉황산 기슭에 절을 지으려고 할 때 이곳에 살고 있던 많은 이교도들이 방해하자 선묘 신룡이 나타나 조화를 부려 이 바위를 공중으로 들어올려 물리쳤다 하여 “浮石”이라 불렸다고 한다.
조선 숙종 때 이 중환(李 重煥)의 “택리지”에 의하면 ”아래 윗 바위 사이에 약간의 틈이 있어 실을 넣어 당기면 걸림없이 드나들어 뜬 돌임을 알 수 있다”라고 적혀 있다. 이리하여 절 이름을 “부석사”라 불렸으며, 그 후 선묘 신룡이 부석사를 지키기 위해 석룡으로 변신하여 무량수전 뜰 아래 묻혔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F ) 부석사 3층 석탑: 보물 제 249호.
무량수전에서 조사당으로 가는 동쪽 언덕에 서있는 탑이다. 이중 기단 위에 3층 몸 돌을 쌓은 전형적인 석탑이다.
높이는 525㎝로 통일 신라 시대에 조성 되었다. 하층 기단의 너비가 지나치게 넓고, 일층 몸 돌의 높이에 비해 그 너비가 넓어 장중해 보인다.
1960년 해체 수리 당시 3층 몸 돌 중앙에 얕은 방형사리공(方形舍利孔)이 발견되었으나 사리구는 없어졌고 기단부에서 철제 탑, 불상 파편, 구슬 등이 발견되었다. 이때 일부 파손된 부분은 새로운 부재로 보충하였다.
탑은 원래 법당 앞에 건립되는 것이 통례인데 이 석 탑은 법당 동쪽에 세워져 있는 것이 특이하다.
g) 조사당(祖師堂): 국보 제 19호
이 건물은 무량수전 우측 위쪽에 위치한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맛배 지붕 건물이다. 1916년 수리 중 발견된 묵서명에 의하면 고려 우왕 3년(1377)이 건립연대로 되어 있다.
조선조 성종 2년 (1490) 중수 하였고, 동왕 24년 (1493) 단청을 하였다. 조사당 건물 내부 입구 좌우에 제석천(帝釋天), 범천(梵天), 사천왕상(四天王象)의 벽화가 그려져 있었는데 1916년 수리하면서 떼어내어 지금은 보장각에 보관하고 있다.
조사당 전면 처마 아래에서 자라고 있는 “선비화”(禪扉花)는 의상대사가 꽃은 지팡이가 자란것이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이 조사당은 부석사의 제 2의 목조건물로 고려시대 건축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다.
h) 자인당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 220호
자인당 안에 모셔진 두 불상은 원래 부석사 동쪽 폐사지에 있었던 것을 이곳 자인당에 옮겨놓은 2좌의 석불상 중 양편에 모셔진 두 불상이다.
동편의 불상은 나선형 머리에 상투모양의 형태가 불분명 한데 얼굴은 둥근편으로 단정한 인상이다. 눈은 뚜렷하지 않지만 약간의 미소 흔적이 남아있다. 어깨가 너무 뒤로 젓혀지고 가슴과 배가 편평하게 표현되었으며 신체의 볼륨은 없는 편이다. 두 손은 없어졌던 것을 보수하여 놓았다.
서쪽의 불상은 동쪽 불상과 비슷하지만 신체가 좀더 풍만하여 부드러운 편이다. 9세기 후반기에 유행하던 비로자나불상(연화세계에 살며 그 몸은 법계에 두루차서 큰 광명을 내 비춰준다는 부처님)으로서 당시 불교사상의 특징과 불상 양식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3. 소수서원(紹修書院): 영주시 순흥면 소백로-사적 제 55호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자 사액서원(賜額書院)이다. 조선 중종 37년(1542) 풍기군수 주 세붕(周 世鵬)이 이 지역 출신 고려시대 유학자 회헌(晦軒) 안 향(安 珦)의 위패를 모신 사묘(祠廟)를 세우고, 이듬해 중국에서 주자가 세운 백록동 서원을 본떠 양반자제 교육기관으로 백운동(白雲洞)서원을 세웠다. 후에 퇴계(退溪) 이 황(李 愰)이 풍기군수로 부임하면서 명종 5년 (1550) 임금에게 건의 하여 “紹修書院”이라는 친필 현판을 하사(사액)받았다.
소수서원은 그 후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 살아남은 47개 서원의 하나였다.
(사진: 백운동 서원- 안쪽으로는 소수서원 현판이 있고)
조선 시대의 사림대학이라 할 수 있는 서원은 이렇게 탄생하여 조선 중기 이후 많은 인재를 배출하면서 학문과 정치의 요람이 되었다. 서원이 생기기전에 교육기관으로는 중앙의 성균관과 4부 학당, 지방에는 향교가 있었다. 관립기관인 향교는 사립교육기관으로서 서원이 생기면서 교육의 기능은 점차로 서원에 내주고, 나중에는 문묘제사를 지내는 곳이 되었다.
조선 중종대 부 터 세워진 서원은 417개로 이중 경상도에 173개가 집중되어 있다. 전국적으로 200여 개의 사액 서원 가운데 56개가 경상도에 있다.
서원은 원래는 교육을 하는 곳 이었으나 서원마다 받드는 분이 있어 제사를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다.
그로 인해 이곳 소수서원에도 강학공간과 제사를 지내는 제향 공간으로 나누어져 있다. 강학공간에는 강학당을 중심으로 자락재(至樂齎), 학구재(學求齎), 일신재(日新齎), 직방재(直方齎) 등의 건물이 있고 제향 공간에는 문성공묘, 전사청, 영정각 등이 있다. 소수서원은 처음에 숙수사라는 절터에 세워졌으므로, 서원 안팎으로 당간지주 등 숙수사 유적이 남아있다.
소수서원 정문으로 들어오면 강당인 명륜당이 나온다. 유생들이 모여서 강의를 듣는 곳으로 마루를 중심으로 온돌방이 달려있다. “白雲洞”이란 현판이 달려 있는 이 강학당은 동향으로 규모가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 기와집이다. 강당안의 대청에는 명종이 내린 “紹修書院”이란 친필 현판이 걸려 있다. 그 뒤로 일신재, 직방재는 선비들의 기거공간으로 동재와 서재이다. 좁은 마루를 두고 방은 칸칸이 나뉘어 공부하기에 알맞게 되어있다. 오른편으로는 학구재와 지락재가 있으며 이 소수서원의 작은 방과 마루에는 모두 4천 여명이라는 유생들이 거처 갔다 한다.
(사진: 학구재와 지락재)
제향 공간으로는 소수서원은 처음에는 안 향(安 珦)을 모시는 사묘로 출발하였고, 뒤에는 안 축(安 軸), 주 세붕을 함께 모시었다. 사당 뒤로는 조그만 장서각이 있고, 그 뒤로는 전사청이 있으니, 제사 때 음식을 준비하는 곳이다.
a) 서원의 도서관 기능
서원은 그 설립의 일차 목적이 교육과 학문연구에 있었으므로 교육문고로서 도서의 수집, 보존의 역할도 함으로서 사립 교육기관의 도서관 기능을 하였다.
서원이 도서관 역할을 하였음은 최초의 서원인 이곳 소수서원에서 입증되고 있다. 주 세붕은 이 서원을 세우면서 구리 그릇 300여 근을 팔아 “경사자집” 등의 성리학서를 구입하였다. 그 뒤에 사액서원으로 발전하면서 국가로부터 때때로 많은 서적을 하사 받았으며, 서원에서도 자비로 서적을 구입하기도 하였고, 각 서원과 문중에서 간행한 서적을 보내오면서 소수서원은 1600년 경에 107종 1678권을 소장하였다.
이렇게 서원은 지방의 도서솬 역할뿐만 아니라 서적을 직접 출판하기도 하여 지방문화의 보급에 큰 역할을 하였다. 서원에는 출판을 담당하는 간소(刊所)가 있었으며 간행된 책은 주로 교육용과 서원에 배향된 인물의 문집과 유고(遺稿)등이 있다. 간행된 서적은 다른 서원과 문중에, 홍문각, 규장각 등에 배부 되었다.
정조 20년(1796)에 편찬된 서 유구(徐 有榘)의 “누판고”(鏤板考)에 의하면 이때까지 78개 서원에서 167종의 책이 출판되었다고 한다.
b) 서원의 사회적 기능
서원은 사립의 강학, 장수처(藏修處)로서 성립되었지만 16세기 이 후 사림이 정치 사회의 주도권을 장악하면서 부 터 그들 활동의 중요한 근거지로 자리 잡았으며, 향악시행의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고 지방민의 교화에도 크게 이바지 하였다.
(사진: 국보 제 111호 “안 향”의 영정)
이 후 서원은 명분과 의리의 성리학적 이념에 크게 좌우되었던 붕당 정치하에서 향촌 사림의 여론을 수렴하는 일차적 거점으로서 그 역할을 더욱 증대하게 되므로서 유림들의 여론인 사론, 공론 조성의 집약장소의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한편으로 서원은 동성 부락의 발달과 함께 동족집단 내부의 상호 결속과 사회적 지휘 유지의 필요성에 따라 그 중심기구로서 사회적 역할을 증대시켜 나갔다. 서원은 문중 내 현조(顯祖)제향을 통한 향중(鄕中)에서의 벌족으로서 사회적 지위 유지, 문중 자체의 교육과 교화를 통한 문중 내 윤리 질서 유지 등을 도모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시대가 흐르면서 서원은 당쟁 및 문중 시비에 휘말리고 또한 대민 작패(對民 作悖)의 온상으로 변모되어 사회문제화 되자 국가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c) 서원의 제향 의식
서원은 후기로 오면서 교육기능이 약화되고 제향기능이 증대되었다.
제향에는 매달 삭망(朔望)에 향알(香謁)과 정월 초에 행하는 세알(歲謁) 및 3월, 9월 초정일(初丁日)에 행하는 춘추향사(春秋享祀)가 있다.
춘추향사는 원장, 유사가 3일 전에 입제하면서 시작되는데 행사 주관은 선출된 헌관(獻官), 집사(執事)가 담당하였으며, 그 절차는 문묘행사에 버금가며 예복을 갖추지 않으면 출입할 수가 없다. 이 행사에는 지방관을 포함하여 원근에서 선비들이 참석하였는데 이러한 향사 의식은 유교적 질서를 그대로 반영함으로서 유교보급에 큰 역할을 한 것이다.
특히 성균관, 향교와는 달리 중국의 성인을 배제하고, 우리나라의 학문과 충절이 뛰어난 사람을 주 인물로 삼았으며, 안 향, 주 세붕 등을 받들어 민족의 자긍심을 키워주었다.
(사진: 주 세붕 영정)
4. 소수 박물관: 영주시 순흥면 소백로
영주의 소수박물관은 유교와 관련된 전통 문화유산을 체계화하고,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으로서 유교의 이상을 간직한 소수서원을 통하여 민족정신의 뿌리를 찾아 가는 공간이다.
또한 영주의 귀중한 유물과 유적을 체계적으로 보존, 전시함으로서 지역 문화의 활성화와 생동감 있는 역사 체험을 위한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박물관내에는 순흥읍 내 비봉산 고분벽화가 아주 중요한 자료이다. 이는 1985년 대구대학교 박물관과 문화재 연구소에 의해 발굴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이 벽화는 남한지역에서는 드물게 발견된고구려 고분 벽화이다.
(사진: 물고기 모양의 기를 든 사람)
이 고분은 비봉산 등성이에서 발견된 것으로 무덤의 길이가 3.53m, 너비 2.02m, 높이 2.05m의 규모가 크지 않은 무덤이다.
돌 방 동쪽으로 널 길과 벽에 연화문과 수문장이 그려진 벽화가 있고, 동쪽 벽에는 봉황이 날개를 펴고 있고, 남쪽에는 2행 9자의 “己未中墓像人名 0 0” 이란 글씨와 물고기 모양의 기를 든 사람이 그려져 있다. 북쪽으로는 산과 새와 구름, 활짝 핀 연꽃 등이 그려져 있고 서쪽에는 부채를 든 여자가 그려져 있다. 널길 양쪽에는 수문장인듯한 역사가 그려져 있다. 동쪽 벽의 역사는 고구려 고분벽화에 등장하는 서역 사람과 같은 모습이다.
기미라는 연대는 서기 539년경으로 추정되어 고구려 고분으로 해석할 수가 있다.
5. 선비촌: 영주시 순흥면 소백로
영주는 예로부터 학문과 예(禮)를 숭상 했던 선비문화의 중심지이며, 선비촌이 조성되어 있는 순흥은 우리나라의 최초의 성리학자였던 안향 선생의 고향이다. 선비촌은 오늘날 우리가 본 받아야할 선비의 사상과 태도를 새롭게 이해하고 교육할 수 있는 장으로 활용하고자 영주시 순흥면에 건립되었다.
선비촌은 영주의 선비들이 실제로 살았던 생활공간을 그대로 복원하였으며 그들의 정신을 담은 수신제가(修身齊家), 입신양명(立身揚名), 거무구안(居無求安), 우도불우빈(憂道不憂貧)의 4가지 구역으로 조성 되었다.
전체적으로 마을 공동체 형태로 구성하여 옛 영주 선비들의 생활모습을 입체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하였다. 또한 각 가옥 별로 거주했던 사람들의 신분에 맞는 가옥 규모에 여러 가지 가구와 생활도구를 전시하였으며, 선비의 일생과 정신을 엿볼 수 있는 직 간접 체험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이렇게 경북 영주 태백산맥 자락에는 삼국시대 부 터 이어져 오면서 1500여 년이 넘는 불교문화의 요람이 형성되어 내려오고, 소백산맥 자락 분지에는 이조 건국 시 부 터 유교문화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니, 두 문화가 조화를 이루어 평화스럽게 공존하는 우리문화의 특징이 가장 잘 이루어져 계승되어 오고 있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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