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5.17
우리 문화유산 답사
전북 정읍 일대
-동학 농민 혁명의 고장-
(18)
글,사진: 김 한 종
(사진: 전 봉준 장군상)
전북 정읍은 내장산 단풍으로 국내에서 가장 유명한 곳으로 가을철이면 전국에서 수 많은 행락객이 모여드는 곳이다.
이런 아름다운 고장이 이조 말엽에 우리역사상 최초로 농민 운동의 발상지가 되기도 하였다. 이번에 찾아가는 답사는 동학농민운동의 유적지와 일대의 문화유산을 더듬어보는 계기로 마련되었다.
정읍은 호남평야로 들어가면서 곡창지대인 김제를 지나 산지와 평야지대의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고장으로 동진강과 고부천이 흐르면서 들판의 풍요로움을 더해주는 고장이다.
백제시대에는 정촌(井村)으로 불리다가 신라 경덕왕 16년(AD757)부터 정읍으로 불리었다. 이러한 이름은 이 고장이 물이 풍부한 곳이라서 우물정자가 들어간 지명을 얻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사진: 정읍일대의 답사 약도)
정읍은 내장산에 이어 동학혁명의 고장으로, 또 우리나라 향가문학의 유일한 백제가요인 “정읍사”가 태동한 고장이다. 내장산 국립공원입구에 장삿길에 나선 남편을 기다리는 여인상과 더불어 “정읍사” 시비가 세워져 있어 ‘달아 높이 곰 돋으사, 멀리 곰 비추오리다…’ 라는 여인의 애간장 타는 가사가 우리의 심금을 울려주고 있다.
이곳 정읍에는 우리의 정신을 일깨워주는 동학 농민항쟁의 발원지로서 탐관오리의 부정을 눈감지 않고 분연히 저항의 물결을 일으킨 전 봉준의 발자취가 곳곳에 있으며 당시 농민군을 어떻게 일으켜 관군에 저항하였으며 그들이 일본군과 조정의 군대에 맞서 열악한 무기로 저항하였는가를 그 발자취를 따라가며 조명하려 한다.
아울러 신라 말기에 이곳 태산 군수를 지냈던 고운 최 치원의 발자취도 더듬어보고, 호남지역의 대표적인 광산 김씨의 고택인 김 동수 고가를 찾아보고, 이울러 이 지역의 고려시대에 세워진 백제탑을 찾아가는 여정을 함께하려 한다.
1. 은선리 3층 석탑: 보물 제 167호-정읍시 영원면 은선리
은선리 3층 석탑은 백제탑의 양식을 이어받아 고려시대에 만든 석탑으로 높이는 6m이다.
단층의 기단 위에 3층으로 쌓았는데 1층 탑신의 높이는 2m로 높은 반면 2~3층은 급격히 낮아졌다. 2층 탑 체 남쪽 면에 두 짝의 문을 단 감실이 있는데 문짝을 하나만 만드는 다른 탑과 비교하면 특이한 것이다.
4개의 판석을 세우듯이 맞춘 1층 몸 돌은 유난히 높은데 비해 2~3층은 높이와 폭이 급격하게 줄어들어 균형이 맞지 않는다. 1~2층의 몸 돌과 3층은 한 개의 덩어리의 몸 돌로 되어 있다.
1층과 2층의 지붕 돌은 각기 4장의 판석으로 쌓았는데 먼저 1장의 판석으로 지붕받침을 삼고 그 위에 다시 넓은 개석(蓋石)을 얹은 후 다시 2단의 판석을 층층이 올려 위의 몸돌(탑신)을 받치게 하였다.
옥개석 (지붕 돌)은 평면으로 처리하여 간결하고 맛이 있다. 소박한 멋의 이 탑은 백제 정림사 지의 5층 석탑과 모양이 같다. 목탑에서 석탑으로 변화되어가는 탑 건축 양식의 변화과정을 잘 나타내 주는 석탑이다.
이 탑은 옮겨진 흔적이나 기록이 없고 이 근방에 절이 있었다는 사실은 아직 규명되지 않았으나 주변에서 기와 조각 등을 발견할 수가 있다.
(사진: 은선리 3층 석탑 전경)
2. 천곡사 터 7층 석탑: 보물 제 309호- 정읍시 망제동
천곡사지(泉谷寺址) 7층 석탑은 백제양식을 따르고 있는 고려시대의 석탑이다.
높이는 7.5m, 꼭대기의 장식부분은 사라졌다. 1층은 4개, 2~3층은 2개의 판석으로 짜여 있고 4층 이상은 하나의 돌로 만들었다.
기단부는 간결하며 옥개석(지붕 돌)은 좁고 두껍지만 둥글게 처리하여 부드러운 감을 느끼게 한다. 지붕아래 부분에는 꽃 부리를 위로한 연꽃무늬가 조각되어 있는데, 이러한 예는 남원 실상사 백장암 3층 석탑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특이한 양식이다.
이 탑은 전남 화순 운주사에 7층 석탑과 아주 비슷한 모습이다. 면석이나 갑석을 갖춘 건축기단 형식을 벗어난 몇 개의 장대석을 잘 맞추어 간결하게 세워진 기단 위에 탑은 고려시대인 13세기경으로 추정된다. 가늘고 긴 모습의 1층 탑신은 4개의 돌로 되었고, 2~3층 탑신은 2개의 돌로, 그 위 7층까지 모두 탑신이 한 개의 돌로 구성되어 있다. 탑신의 각 면에는 우주가 조각되어 있고 상륜부는 없어지고 노반만이 남아있다.
지붕 돌은 1~7층까지 모두 같은 모양으로 경사가 완만하고 처마가 직선으로 처리되어 있다. 각 지붕 돌의 윗부분에는 각기 1단씩의 괴임 돌이 그 위층의 탑신을 받치고 있다.
지붕 돌 아래에는 한쪽 변에 4판씩 모두 16판의 앙련(仰蓮)이 조각되어있다.
(사진: 천곡사지 7층 석탑 전경)
3. 황토현 전적지(皇土岘 戰績地): 사적 제 295호–정읍시 덕천면 하학리
이곳은 우리 민족 역사상 가장 위대한 민중항쟁인 <東學農民革命>의 발상지다.
1984년 갑오년에 동학농민군이 궐기하여 관군과의 첫 싸움에서 크게 승리한 싸움터이다. 조선조 고종 31년 정월(양 2.17) 전 봉준(全琫準) 장군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이 고부관아(高阜官衙)를 점령하여 학정을 일삼던 탐관오리인 고부군수 조 병갑(趙 秉甲)을 몰아냈다.
그리고 그 해 3월 백산에서 다시 봉기한 농민군은 이를 토벌하기 위해 이곳 황토현에 진을 치고 있던 전라감영(全羅監營)관군을 4월7일(양 5월11일) 새벽에 기습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이들은 무기고를 장악하여 무장을 하고, 옥에 갇힌 사람을 풀어주고, 착취양곡을 나누어주고, 당시에 새로 쌓고 수세(水稅)를 거두었던 보(湺)를 헐어 버리었다.
1894년 4.28~5,3일 까지 완산전투에서 농민군은 관군에게 패해 전 봉준 장군이 부상을 입고, 그 결과 황토현 전투, 황룡촌 전투, 전주성 점령 등으로 높아 졌던 사기가 꺾이고, 한편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침략이 본격화되자 농민군은 9월에 삼례(三禮)를 기점으로 다시 일어나 전국각지에서 용감하게 싸웠지만 공주의 우금치(牛禁峙) 전투에서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크게 패하였다.
이후 전주에서 전주화약(全州和約)을 맺고 말았다. 이 당시 “폐정개혁안(廢井改革案)”을 조정에 올리었다.
당시에 조선 침략을 노리던 청나라와 일본의 군대가 조선에 들어와 국정에 개입하자 농민군은 이를 물리치기 위해 정부와 화친을 맺고 전라도 53개의 지역에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여 스스로 나라와 백성을 위한 개혁정치를 추진하였다.
이 후 농민군의 세력이 크게 위축되고 전 봉준을 비롯한 손 화중(孫華仲), 김 개남(金 開南), 최 경선(崔 京善) 등 농민군 지도자들이 체포되어 순국하게 되자 외세로 부 터 나라를 지키고 부패한 정치를 바로 잡아 정의롭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봉기한 <동학 농민혁명>은 30여 만의 이르는 엄청난 희생자를 내고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초기의 이곳에서의 승리는 농민군의 사기를 크게 높여 주었고, 당시 농민군의 외침인“제폭구민”(除暴救民),”보국안민”(輔國安民), “척양척왜”(斥洋斥倭)의 혁명정신이 크게 확대되어가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 농민군이 부르짓은 民主, 自主, 平等 의 숭고한 애국 애족의 정신은 그 후로 일어난 우리 민족의 3.1 독립운동과 민주화의 이념적 토대를 이루었다.
(사진: 황토현 전적지 정화기념비)
4.동학농민 혁명 기념관: 정읍시 덕천면 동학로 742
현재의 황토현 전적지 건너편에 토지 150.597㎡위에 건축물로 4동의 전시관, 교육관 지하 1, 지상 2층의 건물에 2014년 현재 총 5.400여 점의 각종 전시물이 마련되어 있다.
개관이래 전북도 관리사업소에서 운영하다가 2011년부터 동학 농민 혁명 기념재단이 운영하고 있다. 동학 농민 운동에 관련된 무기, 생활용품, 전적류 등을 전시 보존하고 있으며, 당시의 동학 농민운동의 전개 상항을 전반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상설 전시실”등 이 있다.
이 전시관의 전시된 내용을 추려 동학 농민운동의 역사성을 간단히 정리해 보려한다.
1) 말목 장터
동학농민 혁명의 첫 시발점으로 1894년 1.10일 밤 동학 농민군이 예동 마을에 최초로 집결하여 고부관아로 진격한 곳으로 점령 후 농민군지가 되었다.
이 말목 장터의 감나무는 2003년 태풍 “매미”로 인해 쓰러져 있던 것을 보존처리를 하여 지금은 기념관 입구에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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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전 봉 준 장군 고택)
2) 전봉군 장군 고택: 사적 제 293호 –이평면 장내리 조소마을
갑오동학 혁명 당시 전 봉준 장군이 살았던 오두막집으로 흙담으로 둘러 쌓인 4칸 초가 집이다. 이곳에는 사진으로 전시되어 있다.
3) 갑오 동학 농민혁명 개관: 전시물에 나타난 이념과 사상
과거의 전 봉준 장군이 이끌던 순수농민 운동이 부정적인 면에서 혁명으로 승화시키기 위한 긍정적인 면으로 정리되어가는 과정을 이곳의 전시물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곳에는 당시에 발행되었던 각종 신문, 잡지, 초 중 등 역사 교과서, 일반대중의 역사서 등을 전시하여 당시에 사회에 투영된 반사회적인 부패와 탐관오리의 작태, 반 외세의 대한 투쟁전신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이 운동은 1910년 일제의 탄압 속에서 독립운동으로 이어지고, 이는 백범(白凡) 김 구(金 九1876~1949)선생의 독립운동으로 이어졌다.
동학 농민군이 꿈꾸던 세상은 이 나라의 모든 백성이 평등하게 살수 있고, 외세에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바랐다. 사진 속에서도 전 봉준 장군이 일본군에 붙잡혀 여러 차례 심문 과정에서 그의 그런 의지를 나타냈다 한다.
동학 농민군이 이 곳 황토현에서 전라 감영군에 맞서 승리를 거두고 정성, 황룡 전투에서도 중앙군과 맞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농민군은 집강소에서 각자의 직책과 그의 따른 역할을 정하고 잘못된 정치를 바로 잡기 위해 노력하였고 이를”페정개혁안”아러 불리었다.
그리 하여 1894.1.10 마침내 탐관오리의 황포를 참지 못해 고부관아를 습격하고 군수인 조병 갑을 쫓아내려 하였으나 농민군이 당도하자 그는 이미 도망 처 버렸다.
이 고부지역은 땅이 기름지고 농산물이 매우 풍부하였으나 탐관오리가 이곳에 부임하여 자기야욕을 채우기 위해 세금을 추가로 걷어 백성의 고혈을 착취하였다.
1890년 초 충청, 전라, 경상의 삼남 지방의 동학교단의 전 봉준, 손 화중, 김 개남 등이 동학 농민군을 이끌면서 사회변화와 개혁의 욕구가 늘어 마침내 종교를 뛰어넘는 농민혁명으로 이끌어간 것이다.
4) 동학교와 농민운동의 관계.
1860년 경주 출신 수운(水雲) 최 제우(崔 齊愚)가 유.불.선(儒.佛.禪)의 장점을 취해” 동학”을 창도하고 자기 안에 거룩한 “한울님”을 모신다는 “시천주(侍天主)” 평등사상, “새 세상이”열린다는 “후천개벽(後天開闢)” 사상 등을 체계화하여 농민에게 전파시켰다. 그러나 당시 조정은 동학사상을 불온한 것으로 치부하고 1863년 12월 최 제우를 체포해 처형하였다. 그 후 해월(海月) 최 시형 (崔時亨)이 지하에서 동경대전(東經大全),용담유사(龍潭遺詞)등의 경전을 편찬하고 손 병희(孫 秉熙)를 위시한 지도자를 양성하면서 교단의 기틀을 다졌다.
1892년 10월 공주에 모인 동학교도들이 지방관들의 학정을 중단하라고 요구하였다. 그 해11.1.일에 삼례 인근 지역에서 수 천명이 모여 수탈 중지를 요구하였고 이런 집회는 그 후 보은, 금구 등지로 퍼져 나갔다.
조 병갑이 고부군에 “만석보”를 새로 만들면서 수세의 명목으로 조(租) 700 여 석을 거두어 드리면서 이 지역에 가렴주구가 심해졌다. 이로 인해 1893.1.10.일 마침내 참지 못하던 농민들이 말목장터에서 봉기하여 전 봉준, 김 도삼의 지휘아래 고부관아를 점령하면서 혁명의 불길이 점화 되었다.
(사진: 역사학자 장 도빈 교수의 동학란과 전 봉준)
5.김 동수(金東洙)고가옥:중요민속 자료 제 26호-정읍시 산외면 오공리
조선 중기 상류층 주택의 면모를 잘 갖추고 있는 집이다. 이 집은 김 동수의 6대조인 김 명관이 정조 8년(1784년)에 건립하였다.
이 집은 창하산을 등지고 앞으로는 동진강 상류의 맑은 물이 흐르는 전형적인 터전에 동남쪽을 향하여 자리잡고 있다.
바깥 행랑채의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아담하게 조화를 이룬 사랑채가 보인다. 안쪽 행랑채의 대문을 들어서면 집의 구조가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좌우 전면에 돌출된 부분에 부엌을 배치한 특이한 형태의 안채를 볼 수 있다. 주변과 조화를 이루어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온 이 집은 균형미가 잡혀 있으며, 처마의 흐름이나 기둥의 배열등이 소박하면서 세련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 바깥 사랑채: 솟을 대문을 중심으로 문간방, 마구간, 곳간, 부엌 등으로 구성. 문간방은 청지기에 달린 하인이, 문간 사랑방은 청지기가 기거 하였다.
2) 사랑채: 남자주인이 거주하며 찾아온 손님을 맞이하는 곳이다. 때로는 집안일도 이곳에서 관장하였다. 소박하면서도 단아하게 균형을 이룬 건물로 평가되고 있다.
3) 안 채: 안주인이 기거한 곳으로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 양쪽이 대칭을 이루고 있다. 좌우에는 큰 방과 작은방, 양측에 부엌을 배치하여, 큰 방은 시어머니, 작은방은 며
느리가 기거 하였다.
(사진: 김 동수 고가 안채 전경)
6. 무성서원(武城書院): 시적 제 166호-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이 서원은 신라말 유학자인 고운 최 치원(孤雲 崔 致遠)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 지내는 곳이다. 태인 군수를 지낸 최 치원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조선 성종 15년(1484)에 세워 태산사라 불렸는데 숙종 22년(1696)에 나라에서 “무성서원” 이란 이름을 내렸다.
지금의 건물은 현종 10년(1844)에 다시 지은 것으로 최 치원 외에도 중종 때 태인 현감 이었던 신 잠(申 潛)과 유학자인 정 극인(丁 克仁), 송 세림(宋 世林), 정 언충(鄭彦忠), 김 약묵(金 若默) 등의 제사를 함께 모시고 있다.
이 서원은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이 내려진 가운데도 존속되었고, 2층 문루인 현가루와 강당, 강수재 등의 옛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다. 또 참배객의 명단이 적힌 “봉심안”, 서원의 규약집인 원규(院規) 등 귀중한 서원의 자료가 보관되어 있다.
(사진: 강 수재 전경)
1) 강수재(講修齎):
유생들의 기숙공간으로 동재 강수재와 서재 흥학재(興學齎)가 있었으나 현재는 강수재만 남아있다. 강수재는 1696년 사액 후에 고사(庫舍)를 강수재로 변경하면서 강수재라는 명칭이 등장하는데 현 건물은 1887년 (고종 24년)에 세워진 것이고 그 후 수 차례 중수를 거친 것이다.
2) 강당:
서원은 크게 강학 영역과 제향 영역으로 나눌 수 있다. 강학영역은 학문을 닦고 배우는 공간이다. 앞 건물이 강당이고 그 뒤에 내삼문(內三門)과 사당이 있다. 왼쪽에는 비각으로 가는 통로가 있고 오른쪽으로는 강수재로 가는 협문이 있다.
3) 태산사(泰山祠):
태산사는 신라 말 태산 군수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푼 고운 최 치원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고려 말에 훼손된 것을 1483년 (성종 14년) 현재의 자리로 옮겨 세운 후 여러 번 중수되었고, 현 건물은 헌종 10년(1844)에 세운 것이다.
7.피향정(披香亭):보물 제 289호-정읍시 태인면 태창리
피향정은 호남 제 1의 정자이다. 원래 이 정자의 앞뒤로 상, 하 연지(蓮池)가 있어 아름다운 경승을 이루고 있었으나 현재는 하연지만 남아있다.
신라시대의 최 치원 선생이 태산 군수로 재임 중에 이곳 연지가를 소요하며 풍월을 읊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나 정자의 연대는 전해지지 않는다.
현재의 정자는 조선 중기의 건물로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 지붕을 가진 건물이다. 4면이 모두 개방되어 있고 주위에는 난간이 둘러져 있다.
공포는 간결한 초익공(初翼工) 건물로, 천장은 연등 천장인데 합각(合角)밑에는 작은 우물 천정이 특이하게 설치되어 있다.
(사진: 피향정-영남 제일관 전경)
8. 백제가요. 정읍사
이 답사의 마지막으로 삼국시대의 향가 중 유일한 백제가요인 “井邑詞”를 한번 여기에 실어보려 한다. 현재까지 전해오고 있는 백제의 노래로서 고려와 조선시대까지 속악(俗樂)의 가사로 <고려사〉악지(樂志) 속악조(俗樂條)와〈동국여지승람〉권 34정읍현 고약조(井邑縣古躍條)에 노래의 제작 경위가기록되어 있고, 〈악학궤범〉권5 시용향악정재도의조(時用鄕樂呈才圖儀條)에 가사와 연행절차가 기록되어 있다.
달하 노피곰 도다샤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져재 녀러신고요
어긔야 즌데를 드디욜세라
어긔야 어강됴리
어긔야 내 가논 데 졈그랄셰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사진: 정읍사가 실린 악아궤범 )
〈고려사〉에 의하면 정읍의 한 행상인이 행상하러 나갔다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으므로 그의 아내가 망부석에 올라가 남편이 돌아올 길을 바라보며 혹시 밤길을 가다가 해를 입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여 지어 부른 노래라고 한다.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나 '어긔야' 등의 여음을 사용하고 있어 고려가요의 일반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여음을 뺀 본 사설은 6행으로 2줄씩 합해보면 4토막 3줄 형식이어서 시조와 상통하기도 한다. 1·2행의 '달이여 높이 돋으시어 멀리멀리 비추어주소서'는 님에 대한 그리움과 염려 때문에 달님을 향하여 보다 높이 뜨고 멀리 비추어 님의 발길을 보호해달라는 기원이다. 3·4행의 '온 저자를 다니고 계신가요. 진[泥] 데를 디딜까봐 두렵습니다'는 온 시장을 두루 돌아다니며 행상을 하고 있을 남편을 생각하며 진 곳을 디딜까봐 염려하는 마음이 역력하다. '온 시장'[全져재]을 큰 시장인 전주시장으로, '진 데를 디딘다'는 대목은 이 노래가 후에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로 금지된 것으로 보아 '다른 여성에게 정을 준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5행은 '어느이다 노코시라'라고 읊었는데 해독상의 이견으로 말미암아 해석도 여러 가지이다. '어느 누구와 놀고 계신가요'라고 하여 남편에 대한 의심으로, '어느 곳에든지 놓고 계시라'라고 하여 피곤한 남편에 대한 염려로, '어느 것이나 다 놓고 오시라'라고 하여 속히 귀가할 것을 희망하는 것으로, 혹은 '어느 것이든지 놓여지게 하사이다'라고 하여 고뇌에서의 해방을 기원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6행은 '내가 가는 곳에 날이 저물까 두렵습니다'라고 했는데, 남편이 해를 입거나 다른 여자에게 정을 두어 자기의 인생이 어두운 생활로 접어 들까봐 두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노래는 백제의 민요로 구전되어오다가 속악의 가사로 편입되었고 고려시대에 와서는 궁중악인 무고정재(舞鼓呈才)의 가사로 창(唱)되었다.조선시대에 와서는 확연화대처용무합설(鶴蓮花臺處容舞合設)에서 〈처용무 處容舞〉·〈봉황음 鳳凰吟〉·〈삼진작 三眞勺〉과 함께 가창되었다. 〈악학궤범〉의 연행절차에 따르면 여러 기생이 〈정읍사〉를 부르는 가운데 8명의 여기(女妓)가 나와 절차에 맞춰 춤을 추고 북을 치는데 마지막에 악사(樂師)가 박을 치면 북을 멈추고 물러 나가고 음악이 그친다고 했다. 이 노래는 중종대(中宗代)에 이르러 음란한 노래라고 하여 궁중 가악에서 제외되고 〈오관산 五冠山〉으로 대치되었다. 그러나 〈성소복부고 惺所覆瓿藁〉·〈대악후보 大樂後譜〉·〈동국문헌비고 東國文獻備考〉 등의 문헌에 간단히 기록된 것을 통해 볼 때 이후에도 계속 연주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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