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6.21
우리 문화유산 답사
충북 제천 일대
(19)
-청풍명월의 고장-
글, 사진: 김 한 종
(사진:청풍명월의 비석)
남한강 물줄기는 강원도 영월에서 발원하여 제천과 단양을 지나 충주로 흘러간다. 강변 유역을 따라 제천, 단양 일대는 선사 시대부터 사람들이 주거지로 좋은 곳이었다..
석회암층이 발달한 제천과 단양일대는 그로 인해 시멘트 생산지가 되어 우리나라의 건축사를 새로 쓰게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로 인해 석회암층이 제천, 단양일대의 침식동굴을 형성하여 천동 동굴, 고수 동굴, 노동 동굴, 고씨 굴 등 여러 동굴을 이루어 관광의 명소를 이루었다.
충주호가 생기면서 제천 단양은 물길로 이어지고 충주댐에서 단양으로 유람선이 다니고 원주에서 5번 국도가 제천과 단양을 거처 영주로 연결되어 내륙을 관통하여 이제는 교통의 요지가 되었다.
삼한시대에는 마한 땅이었던 제천은 4세기 부 터는 백제 땅이 되었다. 그 후 고구려의 남진정책으로 고구려 땅이 되어 내토군이라 불리어 졌고, 청풍지역은 “사열이현” 이라 불리었다. 5세기 말에 와서는 이 지역이 다시 신라에 복속되었으며, 구 후 고려를 거처 조선 태종 때에 와서 비로서 제천현이 되었다.
이곳의 의림지는 김제의 벽골제, 밀양의 수산제와 더불어 멀리 삼국시대에 축조되어 대대로 농사 관개용 저수지로 역할을 하여 이 일대의 농사를 풍요롭게 하였다.
1985년 충주 다목적 댐이 완공되면서 내륙의 넓은 충주호가 생기고 제천과 단양지역의 많은 마을이 물에 잠기고 그곳에 있던 수많은 문화재가 물에 잠기게 되었다.
(사진: 제천~단양일대의 지역도)
이 지역의 중심인 청풍면 읍내리가 물에 잠기게 되면서 옛 부 터 전해오던 수많은 문화재가 충주호가에 높직한 물태리로 옮겨 “청풍 문화재 단지”가 조성되면서 당시에 수몰지역에 산재해 있던 한벽루(보물 제 528호), 팔영루, 금병헌, 석조여래 입상(보물 제 546호), 금남루 등이 문화재 단지로 이전 복원하여 놓았고 수몰지역에 있던 옛 고가인 지곡리, 황석리, 도화리, 후산리의 150~200년 전에 지어진 독특한 살림집들과 농기구, 여러 가지 생활도구, 살림 살이 등이 이곳에 옮겨 복원하여 단지를 이루었다. 그 밖에 고인돌, 문인석, 군수나 부사의 선정비와 공덕비 들도 이곳에 옮겨와 한군데 모아 놓아 오히려 보존하기가 쉬어졌다.
이곳에 또 수몰지역의 문화재를 한데 모아 박물관을 지었고, 단양 지역의 수양개 고대 유적지도 수몰로 인해 새로이 발굴하면서 우리나라의 고대 선사시대의 유물이 발굴되면서 역사연대를 올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제는 제천, 단양을 찾아가는 교통은 편리해져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제천으로 나가면 단양을 거처 영주로 이어져 문화재 탐방코스로서 편리하다.
충주 땜이 생긴 이후 유람선이 취항하여 수려한 주변경관을 찾아 많은 사람이 이곳을 방문하여 등산, 여행, 문화재 답사를 하며 우리 문화의 향기를 누릴 수 있는 고장이 되었다.
(사진: 충주호 전경)
이제 제천 일대에 문화유산과 충주호로 인해 수몰지에서 옮겨온 문화재를 함께 볼 수 있고 보존도 편리해진 청풍 문화재 단지를 둘러보는 시간을 함께하고자 한다.
1. 장락동 7층 모전 석탑(模塼 石塔):보물 제 459호(제천시 장락동 65-2)
모전 석탑이란 돌을 벽돌 모양으로 깎아 쌓은 탑으로 흙벽 돌을 쌓아 올린 전탑을 모방하였다 하여 “모전 탑”이라고 한다.
이 탑은 회흑색의 점판암으로 만든 모전탑으로 현재 높이가 9.1m이며, 건립 연대는 탑의 형식이나 돌, 가공 수법으로 보아 통일 신라 말기로 추정된다.
기단은 단층기단으로서 자연석으로 쌓았으며 1층 몸돌 네 귀에는 높이 137㎝, 폭 21㎝의 화강암으로 된 돌기둥을 세웠다. 2층 이상의 몸돌이나 지붕돌은 전부 점판암을 잘라서 쌓아 올렸으며, 특히 지붕 돌은 전탑에서 보이는 형식과 같이 상하에서 층단을 이루었다.
전체가 7층에 이르는 높은 탑인데 각층의 줄임 비율이 위로 올라가면서 조화를 이루어져 장중한 기품을 보여주고 있다.
6.25 한국 전쟁 때에 심한 피해를 입어 1967년에 와서 해체 복원 공사를 진행 하였다. 이 때 7층 지붕 돌 위에서 꽃 모양이 새겨진 “청동편”이 발견되어 탑의 꼭대기인 상륜부는 청동으로 만들어 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 모전탑 전 경)
뒤로는 요즘에 와서 사찰이 세워지고 대웅전이 건축중이다. 탑 뒤로는 그 옛날 장락사지가 발굴되어 당시에는 이곳에 거대한 사찰이 있었고 그 앞에 이 탑이 세워진 것으로 추측되고 있으며 사찰터에서 발굴된 여러 유물을 살펴보려 한다.
l 장락사지(長樂寺址) 발굴 현장
장락사지는 제천시 장락동 일원에 위치한 옛 절터로 발굴규모로 보아 대규모 사찰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 된다.
2003~8년 까지 한차례 시굴조사와 3차례의 걸처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34동의 건물터, 담장지, 보도시설, 우물을 확인 하였다.
기와 류, 토기 류, 자기 류, 흙 거푸집, 글씨 없는 비석, 쇠솥, 쇠못, 쇠 자물쇠, 청동 숟가락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그로 미루어 보아 장락사는 삼국시대에 창건된 사찰로 그 이래 조선 중기까지 존속하다가 17세기경에 폐사된 것으로 확인 되었다. 창건 이후 다섯 차례의 중창 불사가 이루어졌고, 고려시대에 번창했던 때에 유구가 확인되었고 유물도 많이 출토되었다.
(사진: 장락사지 발굴 터 배치 세밀도)
이곳의 발굴조사로 제천 지역에서 최초로 확인된 삼국 시대의 불교 유적으로 연화문 수막새와 새끼줄 무늬, 및 직선문이 새겨진 기와는 6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어, 이 지역 고대 역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특히 7 건물터는 장락사의 최초 건물터로 삼국시대에 만들어 졌고, 복원한 8 건물터는 장락사의 1차 중창기 유구로 통일 신라 시대에 만들어 졌다.
건물터의 기단 열은 서쪽, 북쪽의 일부가 확인되었고, 서쪽 기단의 남은 길이가 9.1m, 북쪽 기단의 남은 길이는 4.4m이다. 기단은 다듬지 않은 돌을 사용하였고, 기초의 내부 흙속에서 삼국시대의 직선문, 사선문, 무문기와 등이 출토 확인 되었다.
13, 14, 20, 21, 22 건물터와 우물 터 가운데, 복원된 제 13 건물터는 고려 후기에 조성 되었고, 서쪽을 향한 건물이었고, 남아 있는 유구 중 가장 주목되는 건물터이며 긴 사각형의 다듬은 돌로 기단을 만들고 안쪽으로는 온돌 시설을 마련하였다.
제 14 건물터는 3차례나 지어진 건물 터로 확인 되었고, 20, 21, 건물터는 조선 중기에 만들어 졌다.
제 22 건물터는 고려 중기의 것으로 규모는 정면 1칸, 측면 1 칸만 남아 있다.
우물 터는 11 건물터의 서쪽에서 확인 되었고 고려 중기에 조성된 것으로 우물의 폭이 2.3m, 깊이가 3m 이상이 되는 곳이었다.
(사진: 17,18, 19 건물터 전경)
17, 18, 19 건물터 중 17 터는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4기의 적심석(주춧돌 위 기초)이 확인 되었고, 적심열 서쪽으로 기단열이 있어 건물지와 건물지를 구분지어 주고 있다.
복원된 제 18 건물터는 고려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10기의 주춧돌이 확인 되었으며 2기의 주춧돌이 없어 졌다. 정면 4칸, 측면 1칸으로 서쪽 열 1칸이 다른 곳보다 넓다. 건물의 기단이 밀려나가는 것을 방지하고 결구력을 높이기 위해 기단열 사이에 대형 석재를 끼워 넣었다. 제 19 건물터는 고려 후기에 만들어 졌으며 5기의 적심석이 확인 되었다.
2. 의림지(義林池): 명승지 제 20호
삼한시대에 축조된 저수지로서 처음에는 “임지”라고 했다 한다. 고려 성종 11년(A.D 992년)에 군현의 명칭을 개정할 때 제천을 의원현 또는 의천이라 불리었으나 그 후에 제천에 옛이름인 의자를 붙여 “의림지”라 부르게 되었다.
축조연대는 신라 진흥왕 때 우륵이 시축하였다 하며, 또 다른 설에는 그 이후 700년 후에 “박 의림”이란 현감이 축조하였다고 전해온다.
그 후 조선 세종조에 충청관찰사 “정 인지”가 수축하였고, 세조 원년 (1455)에 그가 제찰사가 되어 보수하였고, 그 뒤로 1910년 부 터 5년 간에 보수되었고, 1972년 대홍수로 뚝이 무너져 이듬해 복구되었다.
호반 둘레 1.8km, 만수 면적 158.677㎡, 저수량 600만㎡, 수심 8~13m의 대 수원지로 몽리면적 289 정보에다 관개를 했다.
이 의림지는 김제의 벽골제, 밀양의 수산제와 함께 삼한시대의 수리시설로 아주 오래된 갓이며 지금은 제천의 경승지이며 순조 7년(1807)에 세워진 “영호정”과 1948년 건립된 “경호루”는 휴식처가 되고 있다.
이곳에 특산물로 빙어는 진미로서 가장 각광받는 명물이다. 의림지 제방 위의 소나무, 버드나무 숲인 제림은 <제천현 지도> 와 <의림 지도> 등 고지도에도 기록되어 있듯이 예로 부 터 의림지와 함께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한다. 이 외에 연자암, 용바 위, 홍류정 지 등 전통의 시설들이 어우러져 경관이 뛰어나 명승 제 20호로 지정되었다.
또한 이 의림지에는 전설이 서려 있다.
옛날 의림지가 생기기 전에 이곳에 어느 부자집에 스님이 시주를 청하였을 때, 며느리가 쌀독에서 쌀을 퍼서 시주하였다. 이에 시아버지가 노하여 며느리를 뒷방에 가두었다. 그러자 번개가 치며 방문이 열려 며느리가 스님의 이야기를 생각하고 산으로 도망 가다가 집을 돌아보니 집이 땅속으로 꺼져 들어가고 물이 고이게 된 곳이 지금의 의림지가 된 것이다. 며느리가 변해서 돌이 된 바위는 “우륵”이 가야금을 타던 “제비바위”(연자암)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사진: 의림지 전경-중앙섬 주변)
* 우륵정(于勒亭)
의림지 축조설 가운데 신라 진흥왕(534~576)때 “우륵”이 돌봉재에서 살았다고 하며 유적으로 우륵당 옛터와 우물로 사용했던 우륵정(于勒井)이 있었고 제비바위에서 가야금을 탔다고 전해온다.
제천시는 2007년에 의림지를 명소화 사업으로 “우륵”의 예술혼을 기리기 위해 우륵이 가야금을 탓던 이곳에 정자를 건립하고 <우륵정>이라 이름 지었다.
의림지 제방에는 수백년 묵은 소나무 군락과 버드나무 숲의 제방을 배경으로 영호정(暎湖亭)과 경호루(鏡湖樓)와 같은 정자와 누각이 있고, 제비바위, 용바위, 홍류정지 등 전통적인 시설물이 함께 어울러져 경관과 역사적 가치가 뛰어나 국가지정 명승으로 되었다.
(사진: 우륵정 전경)
l 경호루(鏡湖樓): 제천시 향토문화자료 제 23호
의림지 서쪽에 위치하는데 1948년 당시 제천군수 김 득련, 서장 김 경술의 발기로 서울의 홍 순간, 오 세진의 협력으로 목조기와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을 지었고 이익공(二翼工-기둥상부의 공포를 배치한 주심포식이 단순화된 양식) 팔작집으로 단청되어 있다. 현재는 영호정과 함께 의림지를 찾는 관광객에게 휴식처가 되고 아람들이 노송 사이에 이 누각은 한 폭의 그림 같다.
l 영호정(暎湖亭): 제천시 향토문화자료 제 12호
의림지 남쪽의 제방 위에 위치. 조선 순조 7년(1807) “이 집경”이 건립 한 후 6.25 동란으로 파괴. 그의 후 손 “이 범우”가 1954년에 중건. 화강암 주춧돌 위에 건축된 목조 단층의 정자로 건평 4평. 팔작 지붕에 정면 2칸 측면 2칸으로 되어 있다. 이 범우는 3.1 운동 때 제천지방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사람이다.
3. 제천향교(堤川 鄕校): 충북 유형 문화재 제 109호
향교는 고려시대 부 터 조선시대에 이르기 까지 지방의 교육 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다.
건물의 배치는 전학 후묘(前學 後廟)로 앞에는 유교 교육을 위한 강당인 명륜당(明倫堂)과 학생들의 거처인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있으며 중간에 내삼문(內三門)을 두어 구분하고 그 뒷 편에 문묘인 대성전(大成殿)이 있어 <孔子>를 비롯한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봄, 가을로 제향을 받들고 있다. 그러나 갑오개혁으로 인한 근대 교육제도의 개편에 따라 점차 교육기능은 폐지되고, 문묘의 제향 행사만이 유지되어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
제천 향교는 고려 공양왕 1년 (1389)에 마산의 서쪽에 처음 지었다. 그 후 조선 선조 23년(1590)에 지금의 자리로 옮기었다. 순종 1년(1907)에 의병장 “이 강년”(李 康秊)이 왜군과 싸울 때 대성전이 불타자 위패를 “박약재”로 옮겼다. 1922년에 대성전과 명륜당을 복원하고 1980~81년에 동재, 서재를 복원하였고, 2012년에 “풍화루”를 복원하였다.
향교 앞 마을의 벽화는 내용이 다양하고 밝은 색갈로 그려져 있어 구경거리가 좋다.
(사진:상-대성전 전경. 하-마을의 벽에 그린 벽화 그림들)
4.청풍 문화재 단지
1985년 충주 다목적 댐이 축조 되면서 제천 일대의 수많은 문화재가 수몰되고 물에 잠기는 마을이 5개 면에 61개 마을이나 되었다. 그 가운데 청풍면은 27개 마을이 있었으나 2개 마을만이 남고 나머지는 다 수몰되었다.
수몰된 마을의 문화재를 대부분이 이곳이 옮겨 복원하였고, 옛날 고가 주택도 여러 채 이곳에 옮겨와 복원하여 지금 이 단지 안에 4채가 옛모습으로 복원 전시되어 있다.
a) 팔영루(八詠樓): 충북 유형 문화재 제 35호
이 루는 청풍부를 출입하는 관문으로 ”남덕문”(覽德門)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처음 축조시기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팔영루 사적비”에 의하면 숙종 28년(1702)에 부사 “이 기흥”이 중건하고 남덕문이라 한 것을 고종 7년(1870)에 부사 “이 직현”이 중수하고 사적비를 세웠다.
(사진: 팔영루 전경)
그 후 부사 “민 치상”이 청풍팔경을 시제로 한 팔영시를 지으면서 <팔영루>라 부르게 되었다.
본래는 청풍면 읍리 286번지에 북쪽에 있었으나 1983년 충주 다목적 댐의 건설로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하였다.
2.2m의 석축 기단을 쌓고 그 중앙에 4각의 문을 내고, 문 천장에는 호랑이 그림이 그려져 있다.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 지붕의 누각을 세웠다. 안에는 마루를 깔고 난간을 둘렀다.
b) 석물군(石物群)
수몰이전에 옛 청풍, 수산, 덕산, 한수 지역에 산재되었던 고대사회의 무덤인 지석묘 5점, 문인석 6점, 도호부 시대의 군수와 부사의 송덕비, 공덕비, 선정비 32점과 제천향교 경내에 보존하던 역대 관찰사, 현감, 군수의 치적, 공덕비 10 점등 총 42점이 이곳에 배치되어 남한강변의 비석문화에 대한 변천과 당시 인물들의 공적을 후대에 전하고 있다.
고인돌(支石墓)과 성혈(星穴): 고인돌은 선사시대 거석문화의 일종으로 지상이나 지하의 무덤방 위에 괴었던 거대한 돌로 이루어진 일종의 무덤 양식이다. 지역에 따라 형태의 차이는 있으나 일반적으로 받침돌 위에 덮개 돌이 있는 탁자모양을 띠고 있다.
이곳에 고인돌 군은 충주댐 건설로 수몰된 청풍면 황석리 지역에서 옮겨온 남방식 고인돌로 특히 중앙에 배치된 고인돌은 하늘의 별자리로 보이는 성혈이 새겨져 있어 특이하다.
약 2500 여 년의 세월이 흘러 풍화작용으로 인해 다른 별자리는 마모 되었지만 북두칠성(큰 곰자리)과 북극성(작은 곰자리)은 선명하게 남아있다.
이 성혈은 묻힌 사람의 영생불멸을 기원하여 새긴 것으로 보이며, 별자리의 위치로 보아 당시 4~5월 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사진: 거대한 고인돌 2기와 비석군 )
C) 한벽루(寒碧樓):보물 제 528호 (청풍면 물태리)
이 건물은 고려 충숙왕 4년(1317)에 청풍현이 군으로 승격되자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관아의 부속건물이었다. 1972년 대홍수로 인해 무너진 것을 1975년에 원래대로 복원하였다.
이 루는 석축 토단이 자연석 주초석 위에 기둥이 배가 부른 수법을 쓰고, 다시 층 위로 기둥을 세우고 마루를 설치 하였으며 정면 4칸, 측면 3칸으로 팔작 지붕에 주심포계(柱心包系)양식이다. 누각 우측에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 지붕으로 된 계단식 익랑(대문간에 붙여 지은방)을 달았다. 이는 밀양 영남루, 남원 광한루와 같은 양식이다.
(사진: 한벽루 전경)
D) 응청각(凝淸閣): 충북 유형 문화재 제 90호
이 건물의 용도는 알 수 없으나 본래 한벽루의 좌측에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처음 세운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명종 초 “이 황”(1501~70)이 단양군수로 있을 때 “응청각”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인조 15년(1637)에 충청감사 “정 세규”의 일기에 응청각에서 유숙한 기록이 있다. 고종 37년(1900)에 부사 “현 인복”이 중수하였다. 본래 청풍면 읍리 203-1에 있었으나 충주 다목적 댐의 건설로 1983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하였다.
2층 누각으로 아래층은 토석축의 담으로 벽을 만들고 그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각집이다. 목조계단을 만들어 2층으로 오르내리게 하였다.
E) 금병헌(錦屛軒): 충북 유형 문화재 제 34호
금병헌은 옛 청풍부의 청사로 쓰였던 동헌 건물이다.
청풍은 삼국시대에 사열이현(沙熱伊縣)이었으나 신라 경덕왕 때에 청풍현이라 하였다. 고려 충숙왕때 현의 승(僧) 청공(淸恭)이 왕사가 되면서 군이 되었다. 현종초에 도호부로 승격되었으며, 고종 32년(1895)에 군이 되었다가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청풍면이 되었다.
이 건물은 숙종 7년(1681)에 부사 “오 도일”이 처음 지었다. 그 후 숙종 31년(1705) 부사 “이 희조”가 중건하고, 영조 2년(1726)에 부사 “박 필문”이 중수하고, “권 돈인” 이 편액을 써서 걸었다. 그 후 고종 37년(1900)에 부사 “현 인복”이 전면 보수하였다.
정면 6칸, 측면 3칸의 팔작집이다. 일명 명월정(明月亭) 이라고도 하며, 내부에는 청풍관(淸風館)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사진: 금 병 헌 전경)
F) 망월산성(望月山城): 충북도 기념물 제 93호
이 산성은 현재 수몰된 옛 청풍소재지의 동남쪽에 위치한 해발 373m 망월산의 정상부를 둘러싼 작은 규모의 석축 산성이다.
현재의 성벽은 약 500m로 서남면은 너비가 16m, 높이가 3m, 남쪽으로는 너비가 15m, 높이가 4.6m가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있다. 본래는 남한강이 돌아 흘렀으나 지금은 청풍호가 감싸고 있어 수려한 경관이다. 정상에는 “관수정”이란 정자가 추후에 세워졌다.
청풍은 삼국시대에는 “사열이현” 이었으며 신라 문무왕 13년(673)에 사열이 산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어 삼국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신동국여지승람>에 성황산과 충청도읍지의 태산이 군의 동쪽 3리에 있다고 하였으니 이 산성임을 알 수 있다.
(사진: 상-정상의 관수정과 성 입구, 하-관수정에서 본 충주호 전경)
G) 금남루(錦南樓):충북도 유형문화재 제 20호
금남루는 옛 청풍부의 아문으로 <都護府 節制衙門>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순조 25년(1825)에 청풍부사 “조 길원”이 처음 세우고 현판도 걸었다. 고종 7년(1870)에 부사 “이 직현”이, 고종 37년(1900)에는 부사 “현 인복”이 각각 중수하고, 1956년에 새로이 보수하였다. 그 후 1983년에 이 자리로 옮겨 복원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집으로 팔각의 높은 돌기둥 위에 세운 건물이다. 1층은 3개의 문으로 되었고, 가운데로는 부사가 출입했고, 양쪽으로는 평민이 출입했다고 한다.
(사진: 상-금남루 전경, 하-도호부 절제아문 현판)
H) 청풍 석조여래 입상(石造如來立像): 보물 제 546호
수몰된 읍리에서 옮겨온 이 불상은 높이가 341㎝이고, 조각양식으로 볼 때 통일 신라 말기 10 세기경의 작품으로 보인다.
불상의 얼굴 모양이 풍만하고 자비로운 상으로 두툼한 양볼의 인중(코와 입술 사이)이 뚜렷하고 두 귀는 양 어깨까지 길게 드리워져 있고 목에도 3개의 주름이 새겨져 있고 왼 손은 땅을 가리키고 있다. 옷은 통 견의(양 어깨를 덮은 법의)를 걸치고 안에 속내의를 받쳐입고 있으며, 배에서 매듭을 지어 V자형으로 겹겹이 대좌에 까지 내려 왔다.
손은 오른손을 들어서 손가락을 구부렸고, 왼 손은 늘어뜨려 손가락을 펴서 밖으로 내보이고 있다. 불상에서 3m 쯤 떨어진 곳에 있는 원래의 대좌는 8각의 연화좌로 각 면에는 연꽃이 새겨져 있다.
(사진: 석조여래 입상)
I)청풍 단지내에 고가(古家) 주택
a) 제천 지곡리(至谷里) 고가: 충북 유형문화재 제 89호
이 집은 본래 수산면 지곡리 운말에 있던 민가 주택이다. 댐 건설로 1985년 이 자리로 옮겨 복원되었다. 집의 구조는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로 이루어 졌다.
안채는 ㄱ자형의 팔작 기와집이며, 사랑채와의 사이에 담장으로 경계를 두었고, 중문으로 출입하도록 꾸며져 있다. 사랑채와 행랑채는 일자형의 초가로 되어 있다. 행랑채는 대문간 우측으로, 외양간과 방앗간이 있고 상부에 다락을 꾸미고 있다.
이 집의 행랑채 구조 및 부엌의 배치 등은 지곡리 마을의 특징있는 일반형이다.
(사진:상-지곡리 고가 입구, 하-베틀 ,하-말구유, )
b) 후산리(後山里) 고가: 충북 유형 문화재 제 85호
이 집은 본래 청풍면 후산리 105번지에 있었던 민가다.
조선 말기에 지어진 ㄱ자 형의 팔작 기와집이다. 건물 가운데에 대청 마루가 있다. 대청의 우측으로 2칸 크기의 건너 방이 있으며 툇마루는 높이하고 그 밑에 함실 아궁이를 두고 있다. 대청의 좌측으로 웃 방이 있고 웃 방의 뒤쪽에 툇간을 두어 제사 방으로 꾸미고 있다.
전체적인 내부의 배치가 특이하다. 중부지방의 보편적인 민가 유형이다.
(사진: 상-주택의 마루 천장, 하--제기 도구, 하-옛 머리장)
c) 도화리(桃花里) 고가 : 충북도 유형 문화재 제 83호
청풍면 도화리에 있었던 조선 말기에 기와집이다.
건물은 경사진 대지를 이용하여 뒷면은 1 단의 댓돌 기단을, 앞면은 5~6단의 높은 기단을 구성하여 세운 “ㄷ”자형의 집으로 왼쪽에는 방, 부엌, 광이 배치되고 중앙에는 3칸 크기의 대청이, 오른쪽에는 방 2칸과 부엌이 배치되어 있다.
가구는 3량 가구이며, 벽은 부엌과 웃방 뒷벽을 제외하고 모두 심벽(心壁)으로 만들었다. 이 집은 본래 부엌 뒤뜰과 건물의 서쪽 부분에 각각 장독대를 두었고, 뒤뜰과 앞 마당은 밭으로 사용되었으나 이곳에는 건물만 이전하여 예전에 자연 환경을 찾을 수 없다.
(사진:ㄷ자 형의 도화리 고가, 하--가마,뒤주. 하-반다지 장)
d) 황석리(黃石里)고가: 충북도 유형문화재 제 84호
조선말기에 목조 기와집이다.
안채는 4칸 규모의 기와집으로 오른쪽 앞면에 툇간을 두었다. 정남향의 “—“자형 구조인데 왼쪽 부 터 부엌, 안방, 웃방을 나란히 배치하고, 끝에 사랑방을 두었다. 안방과 웃방 앞에는 마루를 놓았다. 이 고가는 조선 시대의 시골의 양반 가옥으로는 크지 않으나 구조형식과 건축공법이 특이하다.
(사진: 황석리 고가 주택 전경)
J) 제천 의병사(義兵史)와 의병 기념관과 자양영당
청일 전쟁 후 일제는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개화를 빙자하여 조정에 단발을 강요하였다.
이때 제천의 장담 마을에 모여 공부하던 선비들은 나라의 운명이 위기에 처해짐을 깨닫고 의병을 일으켰다.
제천 의병은 1896년 1월에 봉기 하였다. 처음에는 지평의 포수부대가 중심이었지만 “유 인석”(柳 麟錫)을 중심으로 장담의 선비들이 의병을 이끌면서 <호좌의진>(湖左義陣)으로 재 출범하게 되었다.
(사진: 제천 의병 기년탑)
친일적인 지방 관료들을 처단하며, 충주성까지 장악한 제천의병은 전국의 의병을 선도하고 <을미의병>(乙未義兵)의 상징이 되었다. 주변의 여러 고을을 장악하고, 가흥과 수안보 등지의 일본군 병참을 공격하였고 충남과 영남 쪽으로 활동영역을 넓혔다.
<아관파천>(俄館播遷)후에 해산 명령이 계속 이어지고, 근거지인 제천을 빼앗기고도 양서 지방으로 옮겨 재기하였고, 마침내는 압록강을 넘어갔다. 망명 후 의병들은 해산 되었지만 그 후에도 “유 인석”을 중심으로 해외에서 무장 투쟁을 계속하였다.
일본의 군사 강점과 침탈이 강화되고 1905년 주천과 단양에서 “원 용팔”(元 容八)과 “정운경”(鄭 雲慶)이 봉기하여 다시 제천 의병이 전국적인 항쟁을 이끌어 갔다.
고종이 퇴위 당하고 군대가 해산되던 1907년 여름 “이 강련”(李 康秊)이 다시 봉기하여 소백산 일대에서 일본 군경을 몰아내고 서울로 입성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이 강련이 죽은 후 “김 상태”(金 尙台) 등이 한일 합방 후까지 투쟁을 이어 갔다.
이처럼 제천 의병은 한말의 대표적 의병대로서 전국적인 항쟁을 이끌며, 해외에서 독립 투쟁으로 이어졌다.
l 자양영당(紫陽影堂)
“이 강년”의 의병 부대가 투쟁하던 1907년 가을에 세워졌다. “유 중교”의 옛 집 곁에 세워진 이 <자양영당>에는 주 희, 송시 열, 이 항로의 영정을 모신 뒤에 조선말에 13도 의군 도총재인 의암 “유 인석”이 배향되었다. 또한 이곳에는 의병사를 담은 <송원화동사 합편강목(宋元華東史合編綱目)의 목판이 보관되어 있다.
(사진: 자양영당 전경)
제천시는 2001.10월 6년이나 걸려 “유 인석”의 유지를 받들어 옛집을 복원하고 “자양영당”을 중수하여 제천 의병의 발자취와 의병장들의 유물을 전시하기 위해 <의병전시관>과 <의병 기념탑>을 세우고 그들의 뜻을 후세에 전하는 산 교육장으로 만들었다.
또 의병을 추모하는 숭의사(崇義祠)와 목판각(木板閣)을 새로 세우고 이곳을 성역화하였다. -끝_
(사진: 새로 지은 장판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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