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08.18.
충무공의 발자취를 찾아서
<우리문화유산 답사>
<20>
-경남 거제,한산도,통영 일대-
글, 사진: 김 한 종
임진왜란 시 중요 해전도)
4월 16일에 인천에서 출발해 제주로 가던 청해진 해운의 “세월호”가 진도 팽목항 맹골 수로에서 중심을 잃고 침몰하는 어처구니없는 사고가 발생하여 온 국민을 슬픔에 몰아 넣었다.
불행하게도 인천에서 출발한 6.800톤 급의 배에는 486명의 승객이 타고 그 중에는 안산 단원고교 2학년 수학여행 팀 5명이 승선하여 부푼 꿈을 안고 제주도로 가던 중이었다. 그리고 배에는 많은 화물을 적재하고 있었다.
기상 악화로 늦게 출발하여 지름길로 가다가 사고를 당한 것으로 되었으나 실제로는 제주도로 가는 여객보다는 화물을 중심으로 과적을 하고, 배의 하부에 안전을 위해 넣는 평형수를 빼고 지나친 화물을 싣고 제대로 안전조치를 취하지 안은 것이 엄청난 대 재난으로 변하고 말았다.
여객선을 운항하는 선사도 선장 이하 선원들에게 아무런 안전 대비 없이 늘 하던 관행대로 하다가 선장 이하 선원들이 위기를 당하면서도 우왕좌왕하다가 대피 퇴선 명령도 못 내리고는 아수라장을 이룬 것이다.
나중에 해경 경비정이 도착하고 헬기가 상공을 선회할 때만이라도 미리 퇴선하여 바다에 뛰어내려도 많은 인명을 구할 수 있었으나 그마저 하지 못하고 선장 이하 몇몇 선원들만 빠져 나와 해경에 구조 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물론 그런 와중에도 자기의 임무를 수행하다 목숨을 잃은 선원도, 학생을 구하다가 탈출기회를 잃은 선생님, 여러 의로운 사람들도 있었으나 모두 역부족이었다.
배에 화물과 더불어 화물트럭, 승용차 등도 함께 싣고, 기타 여러 대의 차량도 실었으나 규정에 맞게 움직이지 않게끔 고정하는 장치를 등한시하고 운항하다가 배가 급 조류에 휩쓸리면서 중심을 잃고 화물이 제대로 묶이지 않은 상태에서 한쪽으로 쏠리는 현상으로 인해 마침내 선채가 전복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2~3일 한 동안 전문가라는 집단의 안일한 진단으로 에어포켇 이론이 수중에서도 생존할 수 있다는 희망적인 기대를 갖게 하였으나 우리는 당시에 이런 해상사고에 대비해 전문적인 구조 체계를 갖추지 못한 것이 현실이었다.
나는 당시에 100년 전인 1912년 4.14일 영국의 호화 여객선인 “티이타닉”호가 싸우스샘턴항에서 2.200명의 승객을 태우고 출발하여 뉴욕으로 가다 대서양 심해에서 빙산과 충돌하여 침몰하는 사태를 소개하였다. 당시에 선장인 “에드워드 스미스”씨는 마지막까지 승객을 탈출시키면서, 그것도 어린이, 여성을 먼저하고 나이든 여성, 남성 등은 뒤로 미루면서 탈출시켰으나 생존자는 711명이었고 사망자는 1.513명이었다. 위기 속에서도 대처한 선원들과 승객들의 높은 질서 의식과 희생정신을 소개 하기도 하였다.
(사진: 대서양 심해 5700m 깊이에 가라앉은 “타이타닉”호의 모습)
우리나라도 선진국으로 가는 길목에 이런 후진국 형의 대참사가 일어나서 제대로 대처하지 못 한데서 그 원인을 찾고, 앞으로의 국가 안전망 구축에 근본을 마련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여기에 언론을 비롯한 각종 매체와 종편 방송들이 때를 만난 듯이 연일 경쟁적으로 보도하면서 여러 가지 현실을 부풀리는 현상마저 생겨났다.
이러한 현상은 연안 여객선 및 화물선의 안전불감증을 관행으로 일삼다가 재난을 당한 것이다. 통상적으로 여객은 제대로 확인도 안하고 승선 시키기 일수였고, 화물은 과적을 아무러치도 안다는 듯이 지나치게 많이 싣고 운행하는 일이 비일 비재로, 감독당국의 무사안일과 운행선사의 방심과 안전 불감증이 마침내 대형참사로 이어진 것이다. 이런 현상은 오랫동안 관과 결탁하여 모든 안전 검사나 출항 검사를 거의 하지 않고 관행으로 굳어진 것이 원인이 되었다. 이런 원인은 해사관계자들이 관에서 퇴직하면 곧바로 민간 해운 업체로 가서 서로 결탁하여 바주기 관행에서 비롯된 것이 주된 이유였다.
이번 사고의 원인으로 세월호 선사인 청해진 해운이 기독교 침례회 구원파 교도인 “유 병언” 일가가 운영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온 나라가 분노하고, 그들이 신앙을 빙자한 축재에 아연 실색하지 않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책임을 지고 사태를 수습해야 할 그는 어이없게도 도피행각을 벌이다 숲 속에서 비명 횡사하는 사태가 일어나 또 한번 세상을 놀라게 하고 그가 도피자금으로 25억 원 상당의 5만 원권 화폐와 16만 $를 챙겨가지고 도피한 사실은 종교인으로 구원자임을 자처한 그가, 신도와 국민들에게 엄청난 실망을 안겨주었다.
일례로 우리는 6.25후 1955년 혼란한 사회를 틈타 소사에 신앙촌을 세고 “천부교”를 창시한 기독교 장로교의 박 태선 장로, 그 후로 사화가 발전하고 세계화 되어가는 과정에 “통일교”라는 교파를 이끌면서 자칭 재림 예수라고 하던 문 선명 장로, 이번에 침례교 구원파 교도인 유 병언 장로 등 이 땅에 근대화 과정에서 정신적인 빈곤에 혹세무민(惑世誣民)하던 종교집단들이 존재하는 우리사회…. 이제 우리 대한 민국도 국가위상이 오르고 국민 수준이 세계화 되어가는 과정에서 파생된 것일 진데?
나라는 온통 100일이 넘도록 세월호 사고에 여, 야, 국민들의 저마다 논리를 달리하여 사회가 분열되고 혼란해지고 국가경제 마저 후톼하여 위기에 몰리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에 직면하고 있다.
이번에 남해안 일대에 과거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이 열세인 수군을 이끌고 어떻게 왜군과 싸워 16차례나 해전에서 승리하여 육지에서의 7년 전쟁을 종결 짓고 나라를 누란에 위기에서 구출하였는가를 돌아보는 계기를 마련 하였다.
때마침 국내에서는 <이 순신>의 “명량” 해전이 영화화되어 혼탁한 우리사회에 청량제가 되어가는 회오리를 일으킨 시점에서 다시 한번 충무공의 발자취를 따라가 오늘날을 조명해 보기로 한다.
(사진: "영화" 명령에서 이 순신 역의 최 민식)
그리고 어떻게 이 땅에 충무공의 정신인
1. 멸사 봉공 정신. 2. 창의와 개척 정신. 3. 유비무환의 정신
을 구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보는 계기를 마련하기 위함이다..
충무공 이 순신(李 舜臣)(1545~98)은 덕수(德水)이씨로 1545년 3월 8일(음) 한양 건천동(乾川洞)에서 부친 “이 정”(李 貞)과 모친 초계(草溪) 변(卞)씨의 3남으로 태어났다. 1576년 32세에 과거로 무과에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鍊院奉事)로 함경도에서 처음 봉직하면서, 발포수군만호(鉢浦水軍萬戶), 조산보 만호, 훈련원참군(訓練院參軍)등의 관직을 거치다가, 1589년 45세에 정읍(井邑) 현감을 지냈고, 1591년에 가서야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에 임명되었다.
1592년 48세 때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5월 7일 제 1차 옥포 해전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 후로 공은 실로 16차례의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으나 조정과 “원 균”의 모함으로 옥에 가치는 신세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수군을 관장하고 싸우던 “원 균”의 연패로 조선수군이 위기에 몰리자, 다급해진 조정에서는 그를 다시 수군 통제사로 임명하여 왜군과 싸우도록 하였으나 불과 13척의 함선으로 330척의 왜군과 명량 전투에서 100여 척을 격침시키는 전과를 올리었으나 마지막으로 노량(울돌목) 전투에서 싸우다 왜군이 패퇴하여 물러나는 것을 보지 못하고,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서 전사를 하니…. 오호 통재라! 그때 장군의 나이는 54세였다.
(사진: 제승당의 이 충무공 영정)
이 충무공의 묘는 충남 아산시 음봉면 어라단에 있다. 인조 때에 와서야 충무(忠武)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정조 때에 영의정으로 모시었고, 부인은 상주 방씨로 3남 1녀의 자녀를 두었다.
1. 한산도: 사적 제 113호
한산도는 충무공이 선조 25년 1592년 임진왜란 시 세계 해전사상 길이 빛나는 한산대첩을 이룬 후 운주당을 짓고, 선조 26년부터 30년 (1597)까지 삼도수군의 본영으로 삼고, 제해권을 장악하면서 국난을 극복한 유서 깊은 곳이다.
이곳의 제승당은 1597년 패쇄된 것이 142년 후인 1739년(영조 15년)에 통제사 “조 경”이 중건하고 유허비를 세운이래 1959년 정부가 사적으로 지정하고 여러 차례 보수하여 왔다.
1975년 고 박 정희 대통령이 이곳을 둘러보고, 공의 위업을 기리고 구국의 높은 뜻을 후대에 전하도록 하기 위해 이곳을 확장 보수하면서 1976년 후에 오늘의 모습으로 정화되었다.
이곳에는 충무공이 당시에 삼도수군을 지휘하던 제승당을 위시하여, 존영을 모신 영당, 유허비를 비롯한 송덕비, 사정, 수루 등 주변시설이 복원되어 당시의 조선 수군의 주둔하던 본영이 그대로 재현 되었다.
충무공의 조국 수호의 정신을 되새기고 후세에 길이 그 정신을 전하기 위함이다.
당시 복원하면서 충무공의 정신을 1. 멸사 봉공 정신. 2. 창의와 개척 정신. 3. 유비무환의 정신으로 정의 하였다.
(사진: 제승당 전경)
한산도의 한산만은 통영의 미륵도와 한산도 사이에 내륙 쪽에 있는 만 지형의 바다이다. 한산만의 남쪽은 통영만으로 불리고 있다. 한산만은 입구가 좁고 안쪽이 넓은 모양으로 남서쪽에는 두억포가 있고 남동쪽에는 고포가 있다. 한산만의 수심은 입구가 12~14m, 안쪽이 6~9m로 소형 선박의 출입이 가능하다. 한산만 남쪽의 통영만도 비슷하지만 입구의 폭이 1.2km로 더 넓고 수심이 10m이상으로 대형 선박의 출입도 가능하다.
임진왜란 때에는 두억포에 삼도수군의 본영이 설치되었는데 전함인 “판옥선”(板屋船) 과 “척후선”(斥候船) 100여 척과 740 여명의 조선 수군이 주둔 했었다.
충무공은 이런 지형을 이용하여 한산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작은 만과 포구들, 크고 작은 섬들이 곳곳에 있는 한산만의 지형에 낮선 왜군은 이런 것이 참패의 원인이 되었다.
a) 한산대첩기념비
충무공의 한산대첩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1979년 세운 비이다.
전면의 <閑山大捷記念碑>란 글씨는 당시 박 정희 대통령이 썼고, 뒷면의 글은 노산 “이 은상”이 짓고 무석 “김 봉균”이 글씨를 썼다.
비문은 1592년 7월 8일과 10일에 있었던 한산대첩의 내용을 서사시 형태로 썼다.
7월 8일 왜적선 73척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여 학익진(鶴翼陣)을 펴고 포와 화살로 47척을 격침시키고 12척을 포획하였고, 7월 10일 새벽에는 안골포(安骨浦)에 머물고 있던 왜적선 42척을 불태웠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 탑의 높이는 20m 로 거북선 대좌 위에 세워져 있어 웅장한 모습이다.
(사진: 1979년 당시 한산도 대첩비 제막식)
b) 거북등대
한산만 입구 바다 가운데에 떠있다. 이 충무공이 세계에서 최초로 만든 거북선을 기념하고, 한산만으로 들어오는 배들의 항로를 안내하기 위해 자연 암초 위에 거북형태의 등대를 세운 것이다.
c) 거북선과 판옥선
세계 최초의 철갑선인 거북선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과의 해전에서 판옥선(板屋船)과 더불어 큰 활약을 한 전투함이다. 조선 수군은 항상 거북선을 앞세우고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거북선의 제원을 보면 전면목재로 만든 3층 구조이다. 길이는 20.24m, 넓이 7.5m, 높이 6.1m 로 제작된 전함이다. 원래의 판옥선에 상장 갑판을 떼어내고 대신 둥그런 판자를 덮어 씨우고 배의 앞 부분에다 용의 머리를 달았다. 그 크기는 판옥선의 규모와 비슷하여 탑승인원이 125~130명 정도였다. 적의 근접과 등판을 막기 위해 철판으로 덮고 송곳을 꽂았다. 상장의 좌, 우현에 10개의 포혈을 만들고, 용머리 아래에 좌,우 2개 포를 설치하였고, 천지현 황포, 장군전, 신기전, 완구포 등을 장착하여 그 화력이 막강하였다. 주로 돌격선의 역할을 하여 적의 기선을 제압하는 전투함 이었다. 거북선이 먼저 돌격선으로 적함대로 돌진하면서 각종 화포를 쏘고, 용머리에서는 유황불을 쏘면서 적진을 혼란에 빠뜨리면서 공격선인 판옥선의 공격을 도았다.
거북선은 지붕 위에 적군의 오름을 막기 위해 칼과 송곳을 꽂아 접근할 수 없도록 만들었고, 앞머리는 용처럼 만들어 대포를 발사하도록 하였으며, 용의 입에서는 대포나 유황불을 뿜을 수 있게 하였다. 거북선은 판옥선과는 달리 노를 젓는 격군과 전투요원을 모두 개판 밑에 배치해 적으로 부 터 보호된 상태에서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고안 되었다. 그로 인해 거북선은 수많은 적함속에 들어가서 전투를 할 수 있었다.
(사진: 거북선의 모형-실물의 1/4로 제작)
이 순신은 사천해전에서 처음 거북선을 사용하였고 이후 당포, 당항포, 한산도, 부산포 해전에서 연이어 수백 척의 일본 함대를 격파하였다. 거북선은 돌격선으로 적함에 돌진하면서 각종 화포를 쏘고, 용머리에서는 유황불을 쏘면서 적진을 혼란에 빠뜨리면서 판옥선의 공격을 도와 승리로 이끌었다.
조선 수군은 항상 거북선을 앞세워 여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판옥선은 역시 목재로 만든 3층 구조로 길이 42m, 넓이 12m, 높이 7.2m로 평전선 선체 위에 상장을 덮고 신방을 세워 방패의 기능을 하게 하였고 포혈을 내어 국사로 방포를 하게 되었다.
중앙에는 장대를 높이 설치하여 수장의 지휘를 쉽게 하였다. 화력으로는 천지 현황포, 장군전, 신기전, 활 등으로 무장하고 포격 후에는 적의 상항을 살펴보며 작전 수행이 가능하게 하였다. 특히 병사 중에는 노젓기와 항해술이 능숙한 병사가 기동력을 높게 하였다.
난전 중이거나 근접전 중에도 노젓는 군과 치군이 적으로부터 안전한 2층에 위치하여 노출되지 않게 하였다.
판옥선은 당시 조선 수군의 주력 전투함으로 거북선의 기본형이었다. 160~190명의 탑승자중 100~120명이 노를 젓는 군이었다. 거북선이 돌격함이라면 판옥선은 위에서 내려다 보면서 포술과 궁술로 왜적을 무찌른 당시의 주 전함 이었다.
d) 제승당(制勝堂)
제 107대 조 경(趙 儆) 통제사가 운주당 자리에 현 건물을 복원하면서 제승당이라 불렀고 당시에는 수군 제독실이었다.
1593.7.15~1597.2.26일 한양으로 붙잡혀 압송되기 까지 3년 8개월 동안 이곳에 진영을 설치하였다. 이곳은 승리를 위한다는 이름으로 이곳에서 왜적을 물리칠 작전을 세우고, 총통(銃筒) 같은 신무기를 만들며 군무를 관장하였다. 총 1.491일분의 난중일기 중 1.029일의 일기가 여기서 쓰여졌고, 또한 많은 시도 이곳에서 지어 졌다.
현재의 제승당은 충무공이 한양으로 압송된 뒤 폐허가 되었다가 1739년 영조 15년에 통제사 “조 경”이 중건한 것을 1976년 다시 세운 것이다.
e) 한산정(閑山亭)
이 충무공이 부하 장졸들과 함께 활 쏘기를 연마하던 곳이다. 정자에서 과녁까지의 거리는 약 145m로 활터와 과녁 사이에는 바다가 들어와 있다. 이곳의 활터는 밀물과 썰물의 교차를 이용해 해전의 필요한 실전거리의 적응훈련을 위한 곳이다.
난중일기에는 이곳에서 내기 활 쏘기도 하고 패한 편에서는 떡과 막걸리를 내어 함께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함께 활 쏘기를 하던 장졸들은 1594년에 무과 특별시험에 선발 돤 경상, 전라, 충청 등 삼도 출신의 사람들이었다.
f) 수루(戍樓)
수루는 일종의 망루로서 임진왜란 때 충무공이 자주 올라가 왜적의 동태를 살피면서 왜적을 물리치려는 마음을 다지고, 우국충정의 시를 읊던 곳이다.
이곳에서 오른쪽의 고동산, 왼쪽의 미륵산, 뒤쪽의 망산을 연결, 봉화, 고등, 연등을 이용하여 남해안의 적의 동태를 파악하였다.
현 건물은 1976년 정화사업 때 한산만을 내려다 볼 수 있는 현 위치에 고증을 거처 신축한 것이다.
(사진: 수루 전경)
2. 옥포 대첩.
한산도 대첩이 가장 큰 승리라면 옥포 대첩은 1592년 4월 13일 왜군이 조선을 초기에 침공해 파죽지세로 승승장구하며 조선반도 부산 앞바다를 경유해 내륙으로 침공해 들어오는 것을 좌절시킨 최초의 승리였다. 무방비 상태의 조선 수군이 일본 수군과의 최초의 전투이자 완벽한 승리였다.
이때 이해 5월 7일 전라 좌수사로 있던 “이 순신”이 “원 균”과 함께 현재의 옥포만에서 왜선 50여 척을 만나 그 중 26척을 격침시킴으로서, 임진란 최초로 이 해전에서 승리함으로서 당시에 전세를 역전시키고 사기를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당포, 당항포, 한산도, 명량, 노량 전투 등 총 16회에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는 초석이 되었다.
(사진: 옥포 대첩 기념 탑)
옥포만은 지형이 복잡한 거제도 동쪽에 위치한 소규모 어항으로 임진란 이후 “구국의 고장”으로 자리매김 되었다. 당시 이순신을 위시한 우리 수군이 옥포에서 최초로 대승을 거둔 것은 “나라를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충무공 정신으로 일치 단결하여 뭉치어 전투에 임했기 때문이다.
왜군의 초기 침투로에서 통신 및 보급로를 차단해 왜군의 육상전을 저지 했고, 우리 군사들의 사기를 진작 시켜 역전의 계기를 마련한 전투로 청사에 길이 빛나는 현장이다.
한산도 해전을 기념하기 위해 한산도 일대에 유적지를 정화하다가 1991.12월에 와서 비로서 임진왜란 최초의 승리와 충무공 정신을 길이 계승하기 위해 이곳 옥포만에 30m 높이의 기념탑과 참배단, 옥포루, 팔각정, 전시관 등을 세워 96년에 준공 함으로서 임진왜란 당시 최초의 승리를 영원히 새기게 된 것이다.
3. 진주성: 사적 제118호
진주성은 남강을 끼고 외성의 둘레는 4km, 내성의 둘레는 1,7km에 이른다. 성내에는 촉성루, 창열사, 의기사, 북장대, 서장대, 영남포정사, 국립 진주박물관, 진주성 임진대첩계사 순리단, 촉성문, 공북문, 호국사 등이 있다. 1760m의 고성 안에는 1984년 개장한 임진왜란 전문 박물관이 있다
진주성은 원래 삼국시대 백제에 의해 건립되었고, 당시에는 거열 성지였으나 1379년 고려 우왕 5년에 진주목사 “김 중광”이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석성으로 개축, 고려 말 공민왕 때 7차례나 중수 되었고 주로 왜구를 방어하는 기지였다.
선조 24년 1591년 7월 경상도 관찰사 “김 수”는 진주성을 수축하고 외성을 쌓았다. 이듬해 선조 25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0월에 제 1차 진주성 전투에서 목사 김 시민(金 時敏)이 3.800여명의 군사로 3만 여명의 왜적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둠으로 그를 진주대첩이라 불렀다.
훗날 우리는 <이 순신의 한산도 대첩>, <권 율의 행주 대첩>, <김 시민의 진주대첩>을 임진왜란의 3대 첩으로 역사에 영원히 기록하고 있다.
1593년 6월에 2차로 진주성 전투가 벌어져 일본군 7만여 명에 대항하여 조선의 민관군이 항쟁하다 장렬하게 순절하였다. 이때 전사한 “최 경희”의 후처였던 “논 개”가 그 해 7월 7일 적장 ”게야무라 로크스케”를 껴안고 남강에 투신한 것이다.
1604년 선조 37년 마산 합포에 있던 경상 우병영이 진주성으로 옮겨, 경상우도 병마 절도영이 되었고, 1896년 8월에 경상남도 관찰사 감영이 되었다.
1925년 까지 촉석루 앞에 경남도청이 있었다. 촉석루의 누각은 6.25 전란으로 불타버렸으나 1960년 재건된 앞면 5칸 측면 4칸의 누각이다.
촉석루 복원을 계기로 72년 촉석문, 75년 공북문 등을 복원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a) 촉석루: 경남 문화재 제 8호
남 강가 의암 바위 위에 솟아있는 영남 제일의 누각. 1241년 고려 고종 28년에 부사 “김 충량”이 창건. 8차례나 중건 보수되었다. 유사시에 진주성을 지키는 지휘본부였고, 평상시에는 과거 또는 향시를 짓는 고사장으로 쓰였다. 1593년, 7월 29일 왜군이 2차로 10만 병력으로 공격해와 동문이 무너지자 ”최 경희”, “김 천일”, “이 종인” 등의 장수들이 필사적으로 항전하다 부하들이 모두 전사하자 3명이 남강으로 투신하였고, 촉석루 뒤쪽으로 논개의 넋을 기리는 의기사가 있다.
b) 의암: 도 기념물 지정 제 235호
논개가 적장과 함께 투신한 바위로 1629년 “정 문부”의 아들이 바위 벽면에 <義岩>이라고 새겼고, 남쪽에는 한 봉삼이 쓴 “의암”이 새겨져 있다. 주위에는 의암 사적비가 서있다.
c) 의기사
논개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곳. 입구에는 시인 묵객들의 충절을 찬양한 시비(詩碑)들이 있고 왼쪽으로는 을사 5적의 한 사람인 “이 지용”을 꾸짖었던 “산홍”의 시가 있고, 오른쪽에는 다산 “정 약용”의 촉석루 중수기가 있다.
d)공북문
진주성의 통로로 사용. 문안에는 김 시민 장군의 동상이 있고, 그 위쪽으로는 포정사가 있다.
e)포정사: 도 문화재 자료 제 3호
관찰사 감영의 정문으로 광해군 10년에 “남 이홍”이 건립. 관문으로 사용. 오른쪽에 하마비 (말에서 내리라는)가 있고 왼쪽으로는 문 충공 “하 륜”의 비가 있다.
f)북장대: 경남도 문화재 자료 제 4호
임진란 때 군 지휘소. 1618년 “남 이홍”이 중건. 내성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해 성내를 지휘하던 곳으로 “진남루” 라는 편액이 달려 있다.
g)국립 진주 박물관
1984.11.2일 개관. 임진왜란 실, 두암실, 영상관이 있다. 건축가 <김 수근>이 설계. 현자 총통, 비격진천뢰, 발사하던 대 완구, 중완구 등 3500여 점의 유물이 전시된 임진왜란 전문 박물관이다.
h) 창렬사: 경남 문화재 자료 제 5호
촉석정 충단비와 함께 “김 시민” 장군 외 39명의 순절 시위를 모신 사당이다.
(사진: 김 시민 장군상)
4. 통영향교: 시도 유형 문화재 제 218호 (88.08.06 지정) 통영시 광도면 죽림리
향교는 지방에 설립된 국립교육기관으로 교육과 함께 성현들의 제사도 함께 하였다.
1900년 (광무 4년) 고성현에서 분리되면서 진남군이 되어 분리 창건되었다.
대성전, 동무, 서무, 명륜당, 동재, 서재, 풍화루, 제기고, 내삼문으로 구성 되었다. 건물 배치는 전형적인 조선 향교의 형식으로 명륜당과 서재가 앞에 있고, 그 뒤에 내삼문 담장으로 구획되어 대성전이 있고, 그 옆으로 동무,서무가 있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식이다.
공자를 위시한 5성과 한국의 18현을 모신 대성전에서는 매년 2월, 8월의 상정일(上丁日)에 석전(釋奠)을 봉행한다. 명륜당은 삼강오륜(三綱五倫)을 강의 하는 강당이고, 동재와 서재는 학생을 가르치는 교실과 거처로 쓰였다.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팔작 지붕이고, 5 량구조에 민도리 집, 가운데 3칸은 대청으로 양 협칸은 방으로, 앞 뒷마루 바닥을 높여 평 난간을 설치, 처마 4귀에 활주를 받첬다.
명륜당 옆에는 정료대, 화광대라 불리는 돌기둥이 있는데, 이는 솔가지나 기름을 태워 밤에 불을 밝히는 곳이다.
(사진: 통영향교 대성전)
관(洗兵館): 국보 제 305호(02.10.14 지정)-통영시 세병로 27
세병관은 이 경준(李 慶濬) 제 6대 통제사가 두릉포에서 통제영을 이곳으로 옮기자 다음해 선조 37년 (1604)에 완공한 통제영의 중심 건물이다. 창건 후 약 290년간 삼도 수군을 총 지휘하였던 곳이다.
그 후 몇 차례 보수를 하면서 지방관사 건물로서는 가장 특이하였다. 1895년 고종 32년 갑오개혁으로 없어졌다가 118년 만인 2000~13년대에 복원 되었다.
전면 9칸, 측면 5칸 규모의 건물로 옆면의 지붕이 팔작지붕으로 되었다. 건물 내부 바닥에는 우물마루를 깔았고, 중앙 뒷면에 약 45㎝ 높은 단위에 궐패(闕牌)를 모시고 있다.
(사진: 세병관 전경)
a) 망일루
1611년 광해군 3년 제 10대 우 치적(禹 致績) 통제사가 세웠으나 그 후 소실되었다가 영조 45년(1769) 제 128대 “이 국현” 통제사가 일명 세병문이라 하며, 통행 금지와 해제를 알리는 종루역활을 하였디. 2000년에 중건.
b) 산성청
통영성을 지키는 산성 중군이 근무했던 곳. 숙종 44년(1718) 제 83대 오 중주(吳 重周)가 통제사 때 건립. 그 후 소실된 것을 유물발굴과 문헌을 토대로 중건 하였다.
6. 충렬사: 시도 유형 문화재 제 7호 (72.626.지정) 동래구 안락동 838.
1592년 발발한 임진왜란 당시 전사한 부산 지방의 선열을 모신곳. 임란 후 선조 38년(1605) 동래읍성의 남문안에 총렬공 “송 상현”을 모시고 인조 2년(1624)에 충렬사란 이름이 하사되었다.
그 후 효종 3년(1652)에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선현들의 충절과 학행을 전달하기위해 강당, 동재, 서재를 지어 안락서원이라 이름하고, 사원과 서원의 기능을 갖추게 되었다.
그 뒤 숙종 25년(1709) 전사한 선렬 8인의 위패를 별사에 모신 것을 영조 12년(1736)에 합사하여 모시고 있다.
a) 충열사 팔사품(八賜品): 보물 제 440 호. 통영시 명정동
펄사품은 중국 명나라 “신종”이 충무공 이 순신 장군에게 보내온 8종류의 물품이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왔던 명나라 수군제독 “진 린”(陳 璘)이 충무공의 뛰어난 전략과 빛나는 승리를 보고받고 감동한 나머지 신종이 충무공에게 지휘관을 상징하는 8종류의 물품을 보내 주었다.
그 동안 통제영에 보관되어오다 1895년 충렬사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팔사품은 도독인(都督印) 1개, 호두령패(虎頭令牌) 2개, 귀도(鬼刀) 2자루, 참도(斬刀) 2 자루, 독전기(督戰旗) 2 폭, 총소령기 2 폭, 남 소령기 2푹, 곡나팔(曲喇叭) 2개 등 8종류에 15개 품목이다. 당시에는 희귀한 것으로 여기에 소개한다.
(사진: 참도 2자루 모습)
7.문화동 벅수: 중요 민속문화재 제7호(1968.11.23 지정) 통영시 문화동 95
세병관으로 오르는 길가 오른쪽에 서있는 돌 장승이다.
장승은 민간신앙의 한 형태로 마을이나 사찰입구에 세워져 경계표식 겸 수호신(잡귀를 막는)의 역할을 한다. 이 장승은 남, 녀가 아닌 독장승이다.
이 부근의 기를 보강해 주고,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는 의미로 세워졌다. 이곳에서는 장승보다 “벅수”로 불린다. 이마에는 주름이 깊게 패여 있고, 눈은 둥글게 튀어 나왔고 코는 삼각형 뭉툭코이다.
(사진:돌 장승-“벅수”의 모습)
8.통영시립 박물관: 등록 문화재 제 149호 <055-641-8371>
1948년에 지어진 군청으로 95년 통영군과 충무시가 통합되기 전 약 50년간 통영군청으로 사용.
2002년 <윤 이상> 페스티벌 하우스가 되기도 하였다. 당시에 지역의 문화 예술활동의 중심지였다. 이곳에 통영 시립 박물관이 들어서고 내 외부를 새로 단장하여 개관하였다.
부지 4.790㎡, 연면적 169.199㎡, 지하 1층, 지상 2층은 수장고, 1층에 전시실과 세미나실. 2000여점의 유물로 이 지역의 신석기 유물 200여 점을 전시. 전시유물엔 독도가 “우산”이라는 이름으로 한국땅임을 표시한 지도, 19세기의 “해좌전도”, 안동 “하회탈”, “구운몽 병풍민화”, 고려시대의 불상 과 청자, 이조 백자와 민화류, 양주 산대놀이 탈 8(19점중)점도 전시되어 있다. 이곳에 있는 이 순신 영정은 “팔사품”이다.
(사진: 옛 통영시청 건물- 지금은 박물관이다.)
.거제 포로 수용소: 경남 문화재 자료 제 99호(1983년 지정)-거제시 신현읍
1950년 6월 25일 북괴의 남침은 25일 새벽 4시 38선 전역에서 일어났다. 그 후 53년 7월 27일 휴전하기까지 3년 1개월간 전쟁 중 한국군과 UN 군이 잡은 북괴군과 중공군 포로를 수용하기 위해 거제도에 1950. 11월에 설치된 것이다.
거제 수용소의 규모는 처음에 6만 명에서 전쟁이 길어지면서 22만 명으로 늘어났다. 1950년 섬의 중심부인 고현리 중심으로 총 1200㎡부지에 수용소를 설치 하여 1951년 6월까지 북괴군 15만 명, 중공군 2만, 기타 의용군, 여성 포로를 포함 17만 3000명을 수용하였다.
처음에는 한국군과 UN 군 경비 하에 자치제로 운영하였다. 그러나 반공포로와 북한으로 송환을 희망하는 포로의 대립으로 유혈사태가 발생하였다. 즉 1952년 5월 7일 친공 포로들이 미국인 “Francis Dodd” 수용소장 (당시 준장)을 납치, 4일만에 석방되는 사태가 일어났다. 그 후 소요사태는 6월 10일에서야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으로 33일에 걸 처 친공 포로는 북한으로 송환하였고, 반면 반공포로는 남한에서 석방하였다.
이 후 1983.12이후 6.25 참상의 역사 교육장으로 지정되어 95년부터 공원화 사업을 거처 99년 10월 유적관을 개관하였고, 총 6만 4224㎡의 부지에 분수광장, 철모광장, 흥남 철수 작전 기념비, 탱크 전시관, 무기 전시장 등 당시 포로수용소의 배치, 생활상, 폭동현장, 친공-반공 포로의 충돌과정 등을 재현 시켜 놓았다.
(사진:6.25 전쟁 당시의 전쟁 년표)
이 포로들은 1950. 8~9월 사이 사활을 건 낙동강 전투에서 급증하였고, 인천 상륙작전 후 후퇴하는 북한군과 겨울에 참전한 중공군 포로가 급증한것이다.
당시 제 76수용소에서 공산 포로들의 폭동으로 반공포로 105명이 죽고, 포로 송환 시 중공군 포로 132.442명과 UN 군 포로 11.559명이 휴전 후 교환되었고, 이 때 반공포로 48.000명이 석방 되었다. 포로 중 남북 어디에도 가기를 거부한 북한군 포로 74명, 남한군 포로 2명, 중공군 포로 12명 등 88명은 중립국으로 가기를 원해 인도, 남미 등지로 갔다.
해방 후 당시에 사회에 급증한 공산주의 사상, 이념 투쟁의 소용돌이에서 거제 포로 수용소는 우리 민족 상잔의 영원한 비극의 현장으로 남아있다.
이렇게 소련의 사주를 받고 대한민국을 침공한 북괴는 한반도의 우리민족에게 영원히 씻을 수 없는 한을 남기고, 오늘도 분단의 아픔을 이어가고 있으니, 2차 대전 이후에도 아직까지 남은 유일한 분단국가이다.
(사진: 상-포로 수용소 당시의 천막 막사, 하-취사장 전경)
10. 용화사
가야부인이 시아버지 허진사의 제사장을 보고 오다 이곳 골짜기에 반쯤 묻혀있던 미륵불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 절을 세우기로 하나 집안의 반대로 좌절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위가 대신 절을 지은 곳이 용화사 미륵당이다. 이 불상은 김해 감로사지에 있던 것이다. 일제 때에 일본이 가져가려다가 강변에 버렸다 한다. 이 석조 여래 좌상은 보물 제 491호로 용화전에 모셨다.
이 불상은 통일 신라 시대의 것으로”항마촉지인여래상”으로 발견 당시에는 훼손된 것을 공배와 대좌를 복원한 것이다. 광배의 뒷면에 하늘에서 내려오는 천인상 2구가 음각되어 있다.
(사진: 상-용화사 미륵당 전경, 하- 석조여래 좌상)
11. 장사도(長蛇島): 한려해상 국립공원지정-2011.12월)
통영시 한산면 매죽리로 해안에는 해식애가 발달하였고, 기후가 온화하여 난대림이 무성하며, 동백, 후박, 구심 잣, 밤나무 등이 10여 만 그루나 서식한다. 이른봄 동백꽃이 필 때는 섬 전체가 불타는 듯하여 장관을 이룬다. 카멜리아로 탄생하여 누에처럼 생긴 섬이다.
총면적 390.131㎡, 해발 101m, 길이 1.9km, 폭 400m, 개발면적 98.000㎡의 통영의 외딴섬으로 14채의 민가와 80여명의 주민이 살았고 분교와 교회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분교도, 사람도 살지 않으나 아름다운 섬으로 각종 볼거리가 조성되었고 영화촬영지로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이 찾아오는 곳으로 탈바꿈 되었다.
천연기념물로 팔색조, 풍란, 석란이 자라나고, 폐교된 학교와 집들은 예전 모습으로 복원하여 관광지화 되어 있다.
한려수도가 한눈에 보이는 전망대에는 12머리의 조각상이 둘러있고 야외 공연장이 자랑거리이다.
(사진: 장사도 안내도와 머리 조각상 )
12.난중일기(亂中日記)
조선 선조 25년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생하여 이 순신은 주로 제승당에 머물 때 일기를 쓰기 시작하였으니, 공은 실로 세계 해전사상 유례없는 전쟁일기를 쓰는 장수였다. 총 1.491일 분의 난중일기는 전쟁의 기록이자 그의 전략과 왜군과의 전투상황, 당시의 사회상, 조정과의 갈등, 원 균의 모함 등 과 더불어 그의 가정사와 조선 민중의 어려운 살림살이 등 사회전반을 다루고 특히 지방 현감들의 횡포를 자세히 표현 하였다.
여러 곳에서 그의 어머님을 향한 효심을 드러내고 모친이 사망한 날의 일기는 그의 나라에 대한 우국충정과 부모의 한을 그리고 있다.
그 많은 일기 중 임진왜란 당시를 그린 몇 편을 소개하려 한다.
:
a) 임진년 1592년 5월 2일 신미. 맑음
삼도 순변사 “이 일”(李 鎰)과 우수사 “원 균”의 공문이 도착 했다.
“송 한련”이 남해에서 돌아와 하는 말이 <남해 현령 “기 효근”, 미조 항천사 “김 승룡”, 상주포 곡포 평산포 만호 “김 축”등이 왜적의 소식을 한번 듣고는 벌써 달아났고, 군기 등의 물자가 흩어져 남은 것이 없다>고 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오시 정오경에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 진을 치고, 여러 장수들과 약속을 하니 모두 기꺼이 나가 싸울 뜻을 가졌으나 낙안군수 “신 호”만은 피하려고 하니 한탄스럽다.
그러나 군법이 있으니 비록 물러나 피하려 한들 될법한 일인가? 저녁에 “방 답”의 칩업선 3척이 돌아와 앞바다에 정박했다. 비변사에서 3장의 공문이 내려 왔고, 창평 현령이 부임하였다는 공문이 왔다. 이날 저녁의 군호(軍號)는 “용호”(龍虎)라 하고 복병(伏兵)은 “산수”(山水)라 했다.
b) 정유년 (1596년) 4월 16일 병자. 궂은 비가 왔다.
배를 끌고 중방포 앞으로 옮겨대고, 영구를 상여에 올려 싣고 집으로 돌아왔다.
마을을 바라보니 찟어지는 아픔을 어찌 말로 할 수 있으랴. 집에 도착하여 빈소를 차렸다. 비가 크게 쏟아졌다. 나는 기력이 빠진데다가 남쪽으로 갈 일이 또한 급박하니 부르짖으며 울었다. 다만 어서 죽기를 기다릴 뿐이다. 천안 군수가 돌아갔다.
c) 정유년(1598년) 5월 8일 무술. 맑음
아침에 승장 주인이 밥지을 승려 “두우”를 데리고 왔다. 종 한경은 일 때문에 보성으로 보냈다.홍양의 종 세충이 녹도에서 망아지를 끌고 왔다. 궁장 “이 지”(李智)가 돌아갔다. 이날 새벽 꿈에 사나운 범을 때려 잡아 가죽을 벗기고 휘둘렀는데 이건 무슨 징조인지 모르겠다. “조 종”이 이름을 연으로 고치고 와서 만났고, “조 덕수”도 낮에 망아지에 안장을 얹어 “정 상명”이 타고 갔다. 음 흉한 “원 균”이 편지를 보내어 조문하니 이 는 곧 원수 “권 율”의 명령이었다. “이 경신”이 한산도에 와서 흉악한 원 균의 일에 대해 많이 이야기 했고, 또 <원 균이 데리고 온 서리를 곡식을 사오라고 구실삼아 육지로 보내놓고 그 아내와 사통하려 하였는데, 그 여인이 악을 쓰며 따르지 않고 밖으로 나와 고함을 질렀다>고 했다. 원 균이 온갖 계략을 꾸며 나를 모함하려 하니, 이 또한 운수로다. 뇌물을 실어 보내는 짐이 서울 길을 연잇고, 나를 헐뜯는 것이 날로 심하니 스스로 때를 못 만난 것을 한탄할 따름이다.
d) 정유년 (1596년) 9월 15일 계묘. (속 정유일기)
조수를 타고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우수영 앞바다로 진을 옮겼다.
벽파정 뒤에 명량이 있는데 적은 수군으로서 명량을 등지고 진을 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약속하되 “병법에 이르기를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려고 하면 죽는다>(必死卽生, 必生即死)”라고 하였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一夫當㳌 足㺟天父)라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 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는 일이 있다면 즉시 군율을 적용하여 조금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재삼 엄중하게 약속을 하였다. 이날 밤 꿈에 신인이 나타나 가르치기를 “이렇게 하면 크게 이기고 이렇게 하면 지게 된다”라고 하였다.
위의 난중 일기 4일 분을 옮겨논 것에는 충무공의 모친 사망한 날에도 그는 군무를 보고 저녁에 장사도구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는 것이 표현되고 부모를 잃은 애끌는 심정으,ㄹ 한마디로 표현하였다.
정유년 5월 8일 자에는 “원 균”의 모함 내용이 표현되고, 당시에도 뇌물을 실어 한양으로 보냈다는 기록이 나오고 있고, “원 균”이 그의 부하를 육지로 보내 심부름을 시킨 사이 부하의 부인을 겁탈하려 했다는 기록이 적나라하게 표현되었다.
그리고 원 균이 모략을 하고 계략을 꾸며 순신을 모함하는 것도 운명이라고 생각하며, 스스로 덕이 부족하여 그런 것이라고 자책을 하는 심정을 그리었다.
당시에도 조정에 뇌물을 바치는 것이 성행하고 남을 모함하는 풍토가 있었다니, 그런 사화 풍토는 지금도 변함이 없는 것으로 생각되어 진다.
(사진: 이 순신이 32세에 무과에 급제하여 수여된 교지)
(사진: "필사즉생-필생즉사")
이렇게 공은 전쟁 중에도, 적과 조우중에도 매일 매일 일기를 기록으로 남김으로서 세계 해전 사상 유일무이한 기록을 남긴 장수로 기록되고 있다.
500여 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는 정치, 사회 현실이 얼마나 발전하였는가를 임진왜란 당시를 생각하며 나라와 백성을 섬긴다는 길이 위정자의 갈길 임을 다시 한번 깨닫는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심정으로 이 글을 마친다.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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