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Mycenae(미케네) 문명
유람선 Petos Palace호는 밤새도록 아테네 항을 향해 순항한다. 우리는 갑판위로 올라가 바람을 맞으며 멀어져 가는 크레타 섬을 바라보며 한없는 아쉬움에 잠긴다. 넓은 섬을 더 다니지 못한 아쉬움이 밀려온다. 밤늦게 5001호방으로 내려와 고단한 하루를 마감한다.
배는 밤새도록 운항하여 다시 피레우스 항구로 들어간다. 이제 아름다운 에게 해의 풍경을 멀리하고 새벽 일찍 일어나 한 시간을 대기한 후 06:00시에 배에서 내려 다시 아테네 시내로 들어간다. 시내로 들어가 교민이 운영하는 한식당 VIP 에서 육개장으로 아침식사를 한다. 김치, 깍두기, 고추장 고추 등이 나오는 한식을 보니 즐겁다. 아테네 시내에는 약 300 여명의 교민들이 살고 있다 한다. 이 식당은 강원도 출신의 김 기석 씨가 운영한다. 멀고먼 나라에 와서 한식당을 하니 그 노고도 크지마는 반갑고 고맙다.
한 시간을 쉬고 우리는 다시 미케네를 향해서 본격적으로 본토의 유적을 찾아 나선다. 아테네 산간 숲 지역을 지나 교외로 나가는 길 아래로 아테네 시내가 빽빽하게 내려다 보이고 고속화 도로를 달려 교외로 나가니 왼쪽은 바다 오른쪽은 돌산이 계속된다. 고린도 50 km 표지가 나온다.
얼마를 지나니 다리 밑으로 고린도 운하가 타났다. 바위산을 깍아 내려 직선으로 수로를 내 배가 통행한다. 1981~93 년간의 운하공사로 길이 6343 m, 깊이 8 m, 폭 21~25 m 암반을 절개하여 운하를 만든 대규모 토목 공사이다. 아테네와 이탈리아 사이를 320 km 나 단축시킨 대 작품이다.
(사진: 고린도 운하 전경)
미케네 유적은 1999년 UNESCO 에 등록. 펠로폰네소스 아르고리드(Argolid) 지방에 자리하고 있다.
우리는 우선 박물관으로 간다. 1인당 8유로.
박물관에서 독일인 하인리히 슐리만(Heinrich Schliemann)의 1870~1873 년 사이 발굴사실을 확인한다. 미케네 유적지에서 발굴된 여러 유물을 확인하고, 특히 Homer의 “일리아드”에 나오는 “아가멤논”이 전설의 인물이라고 여겨온 것을 실존인물로 증명하는 계기가 되어 세상을 놀라게 하였다. B C 3200~1600년 청동기 문명으로 571m~650m 산 사이에 왕궁을 건설하였다.
특히 산 위로 성벽을 축조하고 그 안에 왕궁을 건설하였다.
슐리만은 아르고리드의 에보니아의 좁은 골짜기에서 기원전 16~12 세기 사이에 번영을 이룬 미케네 유적을 발굴해 낸 것이다. 이곳에는 6~8 m 두께로 1620 m의 성벽을 쌓은 사실을 발굴해 냈다. 그는 “사자의 문”(Lion Gate)을 발굴해 냈고, 그 문 바로 안쪽 성벽 안에서 대형 무덤 군 (A군)에서 19기의 묘를 발굴해 냈다. 이 곳 여러 돌무덤에서 부장품을 찾아내어 청동기 시대의 문화를 가름하는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미케네 왕궁 터는 3만 평으로 추정된다.
(사진: 사자의 문 전경)
잠시 미케네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다.
당시에는 미케네의 힘이 에게 해 전역을 지배하고 BC 1450년에 테라의 화산 폭발로 미케네 왕조가 크레타 섬도 지배하였다. 미노아 왕궁이 파괴된 뒤에도 미케네인들은 여러 곳으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리파리, 시시리 섬에서부터 시리아 이집트에 이르는 해안까지 미케네의 세력이 확장되었다.
BC 1350 년 경에 미케네 언덕은 거대한 돌로 성벽을 구축하여 요새화 하였다. 그리고 성벽 안으로 왕궁이 세워졌다. 이런 것들이 진흙으로 된 판에 그리스 언어로 새겨진 것도 발굴되었다. 1952년에 가서야 미카엘 벤트리스(Michael Ventris)에 의해 이런 사실이 판독되었다. BC 1250년 경에 성벽이 무덤 A 군을 둘러싸는 서남쪽으로 확대되고 이 때 사자의 문이 축조되었고 북쪽으로도 조그만 문의 쌓아졌다.
13세기 중엽에 미케네 왕궁이 지진으로 인해 대파되고 그 후 복원을 거듭하고 1200년대에 가서 북동쪽으로 성벽이 확장되었고 지하 저수조도 마련하였다. 미케네의 몰락은 이집트 람세스 3 세시에 바다 쪽에서 침입하는 적군에 의해 붕괴되고 경제적으로 쇠퇴 되었다. 그 후 BC 3세기 까지 방치 되었었다.
(사진: 무덤 A 군 터의 전경)
이 무덤 한곳에서 황금가면을 찾아냈으니 이것이 바로 “아가멤논”의 가면인 것이다. 이 가면은 기원전 16세기 후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 하였다. 이것은 먼저 아테네에서 방문한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 소장되어 이미 기술된바 있다.
슐리만은 또 1951년 성벽 밖에서 원형 무덤 군(B군)에서 총 25기를 발굴하였다. 그 중에는 왕실 무덤 14기가 포함되어 고고학적으로 가장 큰 개가를 올리었다.
그는 (A) 군에서 무덤이 직 사각형, 수혈식으로 잡석으로 쌓아 올린 벽에 목재로 대들보를 이루고 나무로 지붕을 지지하는 형태의 묘를 확인 하였다. 이 무덤 하나에 보통 3 구 이상의 유골이 들어 있었다. 이들은 각기 시간 간격을 두고 매장된 것이었다. 이 시신들은 비싼 금속으로 만든 부장품에 쌓여 있었다. A 군 무덤에서 성인 17명, 황금 수의를 입은 어린이 2 명 등 19기의 유골이 발굴되었다. 그 중에서 죽은 자에게 씨우는 황금 가면이 압권이었다.
두 번째 분묘군 B 군을 발굴함으로서 당시의 매장 양식과 장례에 대한 관습을 규명하였다. B 군에서는 A 군 보다는 기교나 제작기술상 뒤떨어지는 유물이 발견 되었다.
A 군 무덤의 특징은 부장품의 엄청난 금은보화로 보아, B 군 보다는 시대적으로 앞서고 있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그러니 시대적으로 보아 B 군이 뒤처지는 생활상이라는 사실이 판명되었다.
당시 그들이 강력한 미케네의 지배세력으로 부상하였으며, 이 모든 부의 원천은 당시 지중해의 동부 및 중부와의 교역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하였다.
“사자의 문”은 4개의 거석을 쌓아 올려 틀을 만들고 위 문틀은 20 톤 이상의 돌로 쌓았다. 높이는 3 m, 문 폭도 3 m 로 되었고 두 개의 나무로 만든 문이 달려 있었다. 문틀 위의 돌은 가운데가 더 두꺼웠다. 그 위로는 두 마리의 부조된 사자가 뒷다리를 들고 있는 것을 좌우 기둥 사이에 새겨 넣었다. 기둥이 서 있는 제단을 앞턱으로 바치고 있다. 이는 미케네의 왕가를 상징하는 것이다.
이 문은 미케네 건축의 진수로 여겨진다. 이곳에서 문명의 발전이 크레타→에게해→그리스로 이전하였다는 단계를 보여 준다.
이곳에서는 앞으로는 아드리아 해가 보이고 뒤로는 두 산에 둘러싸여 있는 요새로 보인다.
1)미케네 왕궁: 왕궁은 2 층으로 된 복합 건물이었다. 윗 층은 잔해가 남아있으며 아래층은 언덕에 서남쪽으로 남아있다. 이곳에서 커다란 서쪽 복도가 시작되어 왕궁의 북서쪽입구로 이어졌다. 그리고 계단으로 북서쪽으로 연결되었다. 이곳은 미케네 시대의 중요한 왕의 거처가 되었다.
(사진: 미케네 왕궁 터)
이제 이러한 당대의 영화는 모두 사라지고 왕궁 터는 에게 해 방향으로 기단석만 남아있다. 정방형의 왕궁 터 위로는 신전 터가 남아있고 그 너머 계곡 쪽으로는 비밀의 문이 있다.
2)지하 저수조: 산의 하버스 계곡의 물을 저장하여 비상시에 쓸 수 있는 저수조가 마련되어 있고 입구에서 지하 땅속까지는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곳에는 5 m 깊이의 정방형 저수조가 축조 되었다. 지붕은 돌로된 뚜껑으로 덮여져 있다. 저수조의 벽은 방수가 되는 벽토로 발라져 있다. 이런 모든 건축물은 미케네 건축의 결정판으로 평가 된다. 이제 이곳을 두루 도보로 답사하고 폐허에서 무엇을 찾아내려는 노력이 참으로 어렵다는 사실을 다시 실감한다.
계곡위로 난 길을 따라 내려오니 먼저 들어갔던 박물관 건물을 위에서 보니 왕궁과 똑 같은 구조로 지어졌다.
3)아트레우스의 보물창고( Treasury of Atreus):이것은 아가멤논의 무덤 이라고도 한다. 언덕 위에서 약 400 m 남서쪽으로 떨어져있다.
입구는 수직 벽으로 36 m 길이와 폭 6 m 의 돌이 깔린 길로 되어 있다. 전면에는 10.5 m높이의 문이 있고 그 위로는 120 톤의 문틀이 두 기둥 위에 올려져있다. 그 위에 삼각형으로 통풍구가 쌓아졌다.
(사진: 아트레우스 보물창고 또는 무덤의 전경)
BC 1350년경 축조된 것으로 안에는 35단 높이로 돌로 원추형으로 쌓아 올려 역학적으로 보아도 신비스러운 일이다. 어떤 지지 물이나 연결된 구조도 없이 똑같은 크기의 돌로 차차로 지름을 줄이면서 점점 적은 돌로 원추형으로 쌓아 올라간 것이다.
문 위로는 한 개의 채광창, 우측으로는 창고 같은 것이 또 하나 있다. 이렇게 거대한 석재를 원추형으로 쌓아 올리고 지붕도 아무런 지탱 물이나 밭침도 없이 둥글게 돌로 된 것이 과연 지탱이 가능한 것인지? 갑자기 의심이 들며 혹시 순간적으로 붕괴되지 않을까? 착각으로 몸이 위축된다.
1886년 에 발굴된 기적으로 평가되는 유적이다. 음향소리가 울림으로 되돌아오는 현상, 올라가면서 좁아지는 원추형의 무게를 어떻게 견딜까? 밑에서 부 터 각도의 정교함으로 위까지 하나의 꼭지점으로 축조한 것은 기적에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도대체 그 당시 이 돌을 어떻게 쌓아 올렸을 까? 의문은 꼬리를 문다.
이것은 보물 창고로, 또는 아가멤논의 묘나 그의 아버지 다트레우스의 무덤으로 추정 된다.
(사진: 원추형으로 쌓아올린 내부의 모습)
우리나라의 고구려 장군총은 이보다 1800 년 후에 축조 되었고, 신라 천마총은 2100 년 후이니 비교가 안 된다.
미케네가 아주 대단한 문명을 남긴 고대국가라는 사실에 놀라고 당시 이런 것들을 지으려면 왕권의 실체가 아주 강력했던 것으로 가늠 되었다.
우리는 유적 터를 내려와 포도 덩굴이 입구를 드리운 “King Menelaos”레스토랑에서 양고기 구이를 주 메뉴로 점심식사를 하고 열린 포도를 따먹는 즐거움도 누릴 수 있었다.
고린도 운하와 미케네 박물관 과 왕궁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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