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한종 여행기/그리스에게해답사기

4.크레타 섬-미노아 문명 답사

땡큐 이영옥 2009. 11. 20. 16:08

4. 크레타 섬(Minoan Crete) - 미노아 문명

 

                (사진: 크레타 섬-미노아 문명 발상지) 

 Fira 항구에서 18:50 분이 되어서 붉은 선채를 드러낸 “Flyingcat 4”가 입항. 사람들과 짐을 순식간에 토해내고, 30 분 만에 다시 출항. 날이 어두워지면서 바다는 조용해진다. 21:20분이 되어 크레타 섬에 도착하여 늦은 식사를 한 후 “Capsis Astoria Hotel”에 들어가 여장을 푼다. (Tira~Heraklio 승선 요금 33.5 유로 )

 그리스에서 가장 큰 섬으로 그리스 고대문명의 발상지로 여긴다. 이 섬의 크노소스노아 궁전이 신화의 주 무대이며, 3800 년 전에 Crete 문명의 중심지였다. 이런 신화가 고대역사의 진실로 밝혀지는 무대이다.

 먼저 미노아 문명의 구체적인 이해를 위해 시대적 구분을 알아보고 박물관에서 전반적인 유물을 둘러보고 현장으로 가서 확인하는 과정을 가져보기로 한다.

 미노아 문명의 시대구분을 고찰해 보자.

1) 신석기 시대 (The Neo-lithic Period- 6800~3200 BC)

2) 전기 궁전 시대(The Prepalatial Period- 3200~2000 BC)

3) 고 왕궁 시대(The Old-Palace Period- 2000~1700 BC)

4) 신 왕궁 시대 (The New-Palace Period-1700~1450 B C)

5) 종교 숭배 시대(Religion-Worship Period-1450~1350 BC)

6) 후기 궁전 시대 (The Post Palatial Period-1350~1100 BC)

7) 고전 낭만시기(Classical–Romantimes-1100~4th A.D)

이러한 시대 구분으로 보면 크노소스 궁전은 3기 에 해당된다.

박물관에서 본 중요한 유물을 몇 가지 안내해 본다.

 

                                      (사진:황소의 프레스코화) 

 1) 황소의 프레스코화: 5기 시대의 종교의식 숭배의 조각품, 3 명의 젊은이들이 황소 뿔을 잡고 겨루는 모양의 프레스코화로 크노소스의 미노아 궁전 북쪽 입구에서 발굴 되었으며, 이 그림이 복원을 거처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2)“Parisian” 여인의 인물화: 회색의 돌에서 미노아 여인상을 확인 하였다. BC 1700 년 전 여성의 프레스코화로 의복, 머리모양, 화장한 모습의 여인상으로 크레타 섬의 제2 의 궁에서 발굴된 것이다.

3) 에나멜 동상: BC 1500년 전 것으로 크노소스 사원에서 발굴 된 것.

4) 왕궁의 의자와 주위 벽화 : 궁중의 가운데 방에서 발굴된 것으로 의자에 문양이 새겨져 있고 주위의 붉은 색에 벽에는 동물의 그림과 나무들이 그려져 있다. 문 위에는 고래 때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5) 제사장의 행렬: 제사를 드리러 제물을 갔고 가는 젊은이의 프레스코화 등

 

                                (사진: 프레스코화-파리의 여인 상)

 

                         (사진: 제물을 들고가는 여인들-프레스코화) 

6) 미노아 시대의 상형 문자 판: Arther Evans 경이 발견한 미케네인들이 사용했던 세개의 상형 문자판. 이것은 1908년 파이스토스(Phaistos) 궁에서 발견된 것으로 BC 1700 년대의 것으로 밝혀냈다. 돌 판이나 진흙으로 구 은 둥근 판에 새긴 것이다. 그는 이것을 궁의 이름을 따서 The Phaistos Disc 로 명명하였다. 이 상형 문자판이야 말로 세계에서 최초의 디스크 판으로 기록될만하다. 디스크 판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게 되어 있다. 한쪽에는 왕의 재산 목록이 기재되어 있는 것으로 판독 되었다.

 기타 대리석 석상,포로스(Poros) 여인의 상체 상, 헬레니즘 시대의 방랑 철학자의 마블상 등이 중요한 것이다.

 이제 미노아 궁전으로 가서 직접 눈으로 미궁의 옛 모습을 하나하나 공부해 보자.

 포세이돈의 저주를 받은 크레타의 왕 “미노스에겐 괴물로 반인반수(半人半獸)의 “Minotaur”(미노타우르)가 태어난다. 또는 제우스 신이 황소로 둔갑하여, 유로파 여신을 유혹하여 암소로 변해버려 괴물을 나았다고도 한다.

 미노스는 이 괴물을 가두기 위해 궁전을 짓는다.

 미노스는 아테네를 위협하여 괴물의 먹이로 10년마다 14명의 사람을 제물로 받는다.

 아테네의 왕자 “테세우스는 나라에서 바치는 제물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위장하여 미궁으로 들어간다. 왕자는 크레타의 공주“Ariadne”(아리아드네)의 도움을 받아 드디어 괴물 “미노타우르”를 죽이고 제물로 받혀진 사람들을 구한다. 그 후 공주가 건네준 실타래를 따라 미궁 속에서 빠져 나온다.

 케탈리아 언덕에 BC 1750년 이전에 2만 2천㎡ 넓이에 4~5층 규모로 채광, 통풍, 하수 등을 고려하여 정교하게 지은 건축물이다. 이곳에서 발견된 유적이 전시대인 BC 6000~1100 년 사이에 미노아 문명으로 판명된 것이다. 그 후 1906년 이후에 와서 크노소스의 궁전을 본격적으로 발굴하였다.

 

                   (사진:테세우스와 미노타우르의 모자익으로된 모습)

 미노아 궁전에는 1300여 개의 방이 있으며 의식을 치르기 전 몸을 씻기 위한 목욕소와 농산물 저장창고, 금속과 석재를 가공하던 작업장 등이 있다. 궁전은 160 m 의 정방형으로 높이가 4 층으로 추정되니 결코 빠져 나오기 어려운 곳이었다.

 급수와 배수 시설도 아주 잘 되어 있고, 당시 벽에 그려진 벽화도 많이 남아있다.

 이 섬에는 고대 그리스, 로마의 유적들도 남아있어 수많은 수도원과 동굴이 있고 사마리아 계곡은 무려 18 km 나 되며 여러 곳에 비잔틴 시대의 교회, 크레타만의 독특한 양식의 가옥도 여러 곳에 남아있다.

 궁전 창고의 규모로 보아 이곳에는 2 만 명 이상의 거주가 가능한 것으로 추정되며 항아리에서 아몬드 씨 등이 출토되었다. 현재의 발굴지에는 궁전, 신전, 창고가 함께 있는 것으로 판명되었고, 상수와 배수가 종합적으로 이루어진 건축물로 판명되었다. 궁정 옆에 봉납고, 화장실과 목욕실이 함께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사진:미노아 궁전의 왕의 방) 

 또 궁전 중앙에는 왕의 접견실이 1 층에 자리 잡고 있으며 이것은 3500 년 전 것으로 추정된다. 11개의 문기둥이 있는 왕비의 방도 확인 되었다 .

 당시에 사용하던 아주 대형항아리 4개는 최고로 오래된 것으로 추정 되고 대형 냉장 저장고도 확인 되었다. 유적지 아래로는 외국인 사절이 오던 넓은 길이 지금도 곧게 뻗어있다. 그 옆으로는 극장 터가 반원형으로 남아있고 계단식 의자가 설치되어 있다.

 미노아 궁전의 옛 유적지를 오전 내내 둘러보면서 우리는 옛 그리스 조상들의 뛰어난 건축술에 다시 한 번 놀라게 된다.

 우리는 오후 한시가 되어 “Petousis Restaurant”라는 식당에서 양고기 갈비구이, 빵 등 최고로 맛있는 점심식사를 아주 여유 있게 후식과 더불어 즐기었다.

 식후 걸어서 해안가로 나가 우산모양의 그늘 막이 늘어선 에게 해의 푸른 물이 넘실대는 해변으로 가서 시원한 바다를 구경한다. 윈드써핑을 하는 배가 물살을 가르고 시원스럽게 바다를 달린다. 음료수를 마시며 인제 언제 이런 곳에 다시 올 수 있을까? 를 생각하며 세월이 덧없음을 조용히 생각해 본다.

 마지막으로 오늘 일정에 “희랍인 조르바의 저자 니코스 카잔차키스(Nikos Kazantzakis)의 묘지를 방문하기로 한다. 그는 1883년 크레타 섬의 중심지 이라크리온(Heraklion) 에서 태어났다. 당시 크레타 섬은 터키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는 아테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프랑스어, 이태리어에 능숙하다. 외국문학에 심취하면서 불교와 기독교문명에 깊숙이 매료되었다.

“Ascetic Life”, “The Odyssey”,“Zorbas, the Greek”,“Christ Recruicified” 등 작품을 발표하였다. 그의 전작품의 일관된 사상은 철저하게 인간의 자유를 추구하는 경향으로, 일견 그리스 국시를 외면하는 듯한 면도 있었다.  한때는 무임소 장관, 유네스코 교육위원 등을 지내다가 독일로 건너가 더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다가 1857년 생을 마감하여 그리스 땅에 귀환하였다. 그의 묘지는 언덕 위에서 시내를 고즈넉히 내려다보는데 위치하고 있다.

 

                                 (사진: 발굴중인 미노아 궁전의 모습)

  “Zorbas the Greek 의 자유주의 사상을 간단하게 음미해 보자.

 이 책은 주인공이 피레우스 항에서 크레타 섬으로 가는 중 항구의 한 술집에서 조르바를 만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실제로 스토리를 이어가는 주인공과 조르바는 많은 차이점을 보인다. 주인공은 책벌레이고, 금욕적인 생활을 하고, 자신의 주변 세계를 문장 속에 용해시키려고 노력하는 인물임에 반해 조르바는 물레를 돌리는데 방해가 된다고 제 손가락을 도끼로 잘라 버리는가 하면, 호색한에, 수도승을 꼬여내 수도원을 방화하게 만드는 일 등 상식을 뛰어 넘는 행동을 한다.

 조르바는 주인공을 따라 크레타 섬으로 가게 되고 거기서 주인공의 갈탄 탄광의 책임자가 된다. 그렇게 몇 개월을 크레타 섬에서 보내고, 효과적인 석탄 채굴도구를 만들어 돈을 벌려고 했지만 시도가 실패하게 된다. 결국 갈탄 탄광은 망하고, 주인공과 조르바는 헤어지게 된다. 이 조르바와 만난 몇 달간의 이야기를 주인공의 시점에서 풀어나가게 된다.

 중간 중간에도 뜻 깊은 말들이 많지만 마지막에 조르바와 이별을 하는 주인공이 조르바와 함께 가겠다고 하자 조르바가 하는 말이다.

 “당신은 자유롭지 않아요. 당신이 묶인 줄은 다른 사람들이 묶인 줄과 다를지 모릅니다. 그것뿐이오. 당신은 긴 줄 끝에 있어요. 당신은 오고 가고. 그리고 그걸 자유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당신은 그 줄을 잘라버리지 못해요. 줄을 자르려면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바보. 모든걸 도박에다 걸어야 합니다. 하지만 당신에겐 좋은 머리가 있으니까 잘 해나가겠지요. 인간의 머리란 식료품 창고와 같은 거예요. 계속 계산 합니다. 얼마를 지불했고 얼마를 벌었으니까 이익은 얼마고 손해는 얼마다. 머리란 꼼꼼하게 챙기는 가게주인이지요. 이러니 줄을 자를 수 없지요. 아니 오히려 더 붙잡아 맬 뿐이지

 

                         (사진: 카잔차스키의 묘지 전경)

 실제로 작가는 조르바라는 사람을 만나고 나서 이 소설을 썼다고 하는데, 이렇게 본다면 주인공은 작가 자신이라고 이해 할 수 있고, 우리 자신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의 소설 속의 주인공이 그러했듯이 그도 역시 자유를 꿈꾸는 사람이었던 것이 틀림없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이다.”

 그는 부처에서 자비를 느꼈고, 기독교적인 세계에서는 자유를 갈구하는 경향을 유지하였다. 그의 묘비명은 오딧세이에서 따온 것이다.

 묘지방문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 Malia” 궁전 터를 방문하나 폐허에 불과하다. 그 옆 해안 가에서 산책한다. 모래톱에서 하얗게 피어나는 신비스런 꽃을 찾아내는 여유를 가졌다. 다시 이라크리온으로 돌아와 광장에서 시작하여 골목골목을 산책하여 본다.

 Dido 정교회 앞에서 Crete 섬의 일정을 마감한다.

“Lukoulos Restaurant” 에서 이 고대도시에서 우아한 만찬을 한 시간에 걸 처 여유 있게 한다. 21:00시에 항구로 가 “Minoan Lines” 승선. 밤 10:00 시에 출항한다. 우리 부부는 거대한 여객선 5001호 해상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밤새도록 아테네 항구를 향해서 간다.

 

                    (사진: 미노아 시대의 상형문자를 새긴 진흙 디스크-앞 뒤 판) 

 

박물관 및 크노소스 궁전 

 

 

 

 

 

 

 

 

 

 

 

 

 

 

 

 

 

 

 

(사진: 비석에 새겨진 묘비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