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고아 구 시가지(Old Goa) 지역 답사
고아 구 시가지(Old Goa) 는 면적이 3.701㎢의 좁은 영역으로 1498년 포루투갈의 탐험가 ”Vasco da Gama”(바스코 다 가마)가 발견하여 이곳에 상륙하여 비로소 식민지를 개척하게 된다.
도시가 새로이 건설되면서 1510년부터 “아폰소”(Albuquerque de Afonso) 가 포루투갈의 수도인 리스본 식으로 도시를 건설하여 멋진 분위기였다. 그 후 1534년 부터 전염병이 3번이나 휩쓸고 가는 바람에 도시가 퇴조 하기 시작 하였다.
그 후 프랑스를 비롯하여 네델란드, 영국 등 서구 열강들이 이 지역을 공략하여 식민지를 개척하는 바람에 고아시는 피패하여 갔다. 포루투갈의 동방의 수도로서 명성이 사라지면서 1835년부터 수도가 빤찜으로 이전하면서 화려한 서구식의 고아는 마감되었다.
도시를 건설하면서 이때 건축한 성당이 이 일대에 200여 개나 있으나 8개가 큰 것이고 그 중에도 2개가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어있다. 현재는 인구 150만의 큰 도시다.
아침 식사 후 어제 늦은 관계로 조금 늦게 출발하여 고아시내를 찾아간다.
1) Bom Jesus the Bacilica (봄 지저스 대성당)-세계 문화 유산
1594년 11월 24일 초석을 시작. 이 성당은 조아 디아스 리베로(Joao Dias Ribeiro)와 그의 아들 도밍고스(Domingos)의 기부금으로 지어 졌다. 거대한 돔이 남쪽으로 지어지고 그 반대편으로 나무로 된 제단이 마련 되었다. 성당은 1605년 5월 15일에 봉헌되었다. 당시 Goa 대주교 메네지스(Dom Aleixo de Menezes) (1595-1609) 가 시무하였다.
당시 교회는 북쪽 외벽으로는 회로 칠해 졌다. 1591년에 가서야 포루투갈 건축가 키스트로(Baltazar de Castro) 에 의해 붉은 돌로 쌓아졌다. 당시에 지붕은 타일로 덮었다.
이후 교회는 “ Good Jesus” 의미의 “Bom Jesus” 로 명명 되었다.
교회는 전면에 순교의 모습을 새겼고, 서쪽 면은 도리아, 이오니아, 고린도 식을 가미한 건축물이었다. 교회는 길이가 55.77 m, 폭이 16.76 m, 높이는 18.59 m로 확장되었고 주 제단 위에 탑이 세워졌다. 제단가운데에는 대형 성상이 서있고, 앞 좌, 우로 마리아상, 이그나티우스(St. Ignatius) 의 거대한 상이 황금색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제단 입구에 왼쪽 아취형 밑에는 도미니크(St. Dominic)의 상이 서 있다.
오른쪽으로는 미카엘(St. Michael) 에게 바치는 제단으로 메리(Virgin Mary)의 성상이 서 있었다.
주 제단은 성소의 뒷면에 위치하고 교회 전체를 지배하는 형식이었다. 가운데는 St. Ignatius 예수회 설립자 상이 3m 높이로 서 있다. 오른쪽으로는 이태리 조각가“사비에르”(St. Francis. Xavier)의 시신이 1955년 2월 13 일에 은관 안에 새로이 안치 되었다. 이 날은 고아 주에서 가장 큰 축제일이며 시신은 10년을 주기로 일반인에게 개방되었다.
프란시스 사비에르는 예수회 소속의 선교사로서 고아 주를 비롯한 아시아 지역 선교의 큰 위업을 남긴 성자이다.
2) 캐더린 대성당(The Cathedral Catherine)
1510 년에 최초로 건축되고, 진흙재료로 사용하였다. 당시에는 제단이 하나 있었고 Alexandria의 St. Catherine의 초상이 안치되었다. 그 후 고아에서 가장 큰 성당으로 신축 되면서 첨탑이 쌓아지고, 세 개의 본당으로 나누어 졌다. 길이가 250 feet, 넓이가 180 feet, 높이가 120 feet로 확장 되었다. 오른쪽으로 “The Third Chapel, “The Cross of Miracles” 라는 작은 교회가 있다. 종탑에는 다섯 개의 종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고아 지역에서 가장 큰 황금의 종이 자랑 거리이다. 포루두갈은 힌두교인들이 카도릭으로 개종을 거부할 때 사형 시키면서 이 황금의 종을 울렸다고 한다. 중앙에는 아주 화려한 성찬대가 있으며 성녀 캐더린의 생애가 벽화로 화려하게 그려져 있다.
3) 카제탄 성당(St. Cajetan Cathedral)과 수도원
수도원은 이태리의 성 카제탄에 의해서 세워졌다. 그는 1640년에 남부 인도의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교황 “Urban 8 세”에 의해 Goa로 파견 되었다. 그는 1655년 3월 22일 포루투갈 왕에게 충성을 조건으로 이곳에다 수도원과 교회를 지었다.
이 성당은 로마에 있는 베드로(St. Peter) 대성당을 모방하였다. 성당 안에는 돔 형태의 반구형 천정에 화려한 성화로 장식 되었다. 중앙에는 4단 높이의 각종 성상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돔의 한 쪽 가장자리에 쓰여 있는 마태복음 6장의 구절이 보인다.
1961년 Goa가 푸루투칼로 부터 해방 되기 전에 이곳에는 포루투칼 군인의 관이 4개가 있었는데 그 중에는 어린이의 시신을 보관한 것도 있었다. 이 관들은 포루투갈로 돌아가지 못하고 1996년 빤찜(Panjim) 공동묘지로 이송하여 매장 하였다.
4) 캐더린 교회(The Chapel of Catherine)
1510년에 건축된 것이 남아있어 가장 오래된 건축물로 보인다. 붉은 벽돌로 지었고 초기건물이라 규모가 작고 보수를 하지 않아 원형대로 남아있다. 제단이 있던 곳이 중앙에 남아있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있어 당시 건축물의 남아있는 상징으로 보인다
이제 오전에 포루투칼 식민지 당시에 서양의 건축 양식으로 건축되어 현재 남아있는 성당과 수도원 건물을 여러 개 둘러 보았다.
오후에는 Old Goa 에서 1843년 수도가 빤찜(Panjim) 으로 옮겨가게 되어 빤찜이 서양의 고풍스런 도시로 발전하여 갔다. 당시에 포루투갈 풍의 건물들아 고스란히 남아있다.
지금도 많은 주민이 카도릭을 신봉하는 이곳에는 “동정녀 마리아 성당”(Church of Our Lady the Immaculate Conception) 이 시내에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하얀 칠을 하여 언덕에 자리잡고 있어 격이 높아 보이는 성당이다. 안에는 맨발의 관리인이 지키고 사진을 금지한다. 비교적 화려한 성화로 장식되고 고풍스럽다.
이제 인도에서 유럽의 분위기를 따라가며 도시를 산책하여 본다.
서둘러 시내로 들어와 시장을 산책하여 본다. 네모난 2층 건물 안에는 아래층 중앙에 야채, 과일, 꽃 시장이 중심이다. 모두 가공 안된 천연의 상품이다. 특히 꽃 목걸이의 여러 모양이 특이하다. 2층에는 주위로 인도의 고유의상, 신발, CD점 등 서민 생활의 냄새가 묻어나는 시골 시장의 풍경이다.
저녁에는 호텔로 돌아와 해변가로 나가 아름다운 일몰을 감상한다. 오늘은 호텔에서 야외 풀밭에다 저녁 식사를 마련한다. 인도 산 와인을 맛보며 시원한 가운데 민속춤을 보면서 하루를 마감한다.
(사진: 호텔 앞 인도양 해변가의 일몰 풍경)
오늘은 오전 09:10분 이제 고아지구를 떠나 바다미 (Badami) 지역으로 이동한다. 이번 인도 여행은 4개 주를 거처 간다. 고아 주, 카르나타 주 등 데칸 고원의 산간도로를 간다. 도로는 노폭이 좁고 포장된 부분도 좁아 차가 양 방향으로 다니기가 어렵다. 평원지대를 지나 산간으로 들어가니, 길은 구불 구불하여 지며 산으로 오른다. 길 옆에는 잡목 숲이 무성하고 하늘이 안 보인다. 원숭이 들이 길가 주변에 앉아 빤히 바라본다.
한동안 버스가 오르막을 오르니 4 톤 흙 운반 트럭이 수 십대가 줄지어 반대편에서 온다. 그 사이를 뚫고 오토바이, 승용차 등 제각기 먼저 가려 한다. 표지판도 없고 어디를 가는 것인지 분간하기가 어렵다. 길은 바닥이 붉은 흑으로 되어 있어 먼지가 날려 길가의 수목이 빨갛게 뒤집어 쓰고 있다. 고개를 넘어가니 평원이 나오고 사탕수수 밭의 하얀 꽃이 흔들리는 가운데 우리는 벨가움(Belgaum)시에 들어간다.
중식 시간이 되어 “Eefa Luxury Business Hotel” 에 도착한다. 호텔 1층 레스또랑에서 닭 양념 구이, 난 등 을 안주 삼아 킹 피셔(Kingfisher) 맥주와 더불어 오랜만에 얼큰한 안주와 더불어 목을 추긴다. 닭고기를 먹다가 아이스크림을 디저트로 함께하니 그런대로 조화가 된다.
이곳에서 우리들의 인도 안내인 “알람”의 여자친구 “가비타 조글라” 를 만난다. 그녀는 인도인으로 사회 복지사 공부를 하여 복지 방면에 종사한다고 하는 덩치가 큰 여인이다. 푸른색 전통복장을 한 모습이 조금은 세련되어 보인다.
그녀는 자기가 관여하는 맹인학교 “The Maheshwari School for the Blind”(Nehru Nagar Belgaum) 로 안내 한다. 이 학교는 “Dr. N.R Kulkarni” 라는 독지가가 1978년에 설립한 벨가움 지역의 맹아학교다. 초, 중, 고 과정을 전부 아우르는 학교로 주 정부와 독지가들의 후원으로 학생들은 전원이 기숙사 생활을 하며 연령층이 다양하다. 방마다 10여명의 학생이 선생님의 지도를 받고 있다. 교육은 컴퓨터 교육 등 IT 과정을 위주로 한다. 이곳에는 힌두어, 영어를 사용한다. 모두 학생은 70 여명으로 추산 된다.
(사진: 맹아학교 학생들의 연주 모습)
우리가 들어가 견학을 한곳은 컴퓨터 교실이다. 학생들은 우리가 방문한 것을 축하하기 위해 컴퓨터 실에서 15 명의 학생이 조그만 드럼과 소형 올갠을 연주하면서 노래를 부른다. 그런대로 하모니를 이루어 컴퓨터실에 울려 퍼진다.
우리는 교실을 나와 기념촬영을 한 뒤 쵸코 파이를 선물하고 금일봉을 학교 장에게 전달한다. 그리고 “가비타”의 집을 방문한다. 이 집도 복지관으로 사용한다. 이곳 에서도 우리는 거실에 들어가 쉬면서 이곳에 복지교육에 관해서 관심을 기울인다. 우리는 과자, 양파 튀김, 주스 등으로 대접도 받았다. 특히 콩으로 만들었다는 “준다” 라는 달콤한 것도 맛본다.
다시 버스에 올라 이번에는 “두르가 사원”(Military Durga Devi Mandir) 를 방문한다.
옛날 성벽 안에 군대의 보병 115 대대가 주둔하고 있는 요새지 이다. 이 안에 새로 지은 힌두교 사원을 방문하기 위해 성안으로 걸어간다. 새로 지은 사원은 맨발로 입장하여 한 바퀴 돌아 나오게 되어 있다. 호기심에 방문하나 큰 의의는 없는 것 같다.
(사진 : 상 - 두르가 사원 전경. 하-방문온 학생들)
이 제 벨가움 시를 벗어나 우리는 바다미(Badami)로 향한다. 도로가 좀 나은 듯 한데 어느덧 해가 버스 뒤로 기운다. 우리는 노상에서 내려서 일몰을 맞이한다.
해가 지면서 어둡고 길가에는 하얀 사탕수수 밭이 이어지고 바람에 나부낀다. 좁은 도로에 사탕수수 대를 수확하여 가득히 실은 트럭들이 앞다투어 간다. 그 사이로 트럭, 차, 오토바이, 사람들이 통행을 한다. 어둡고 위험한 길을 무사히 통과하여 바다미 시내로 들어오니 조금은 나아지고 거리가 밝아 졌다.
고아의 오키드 호텔을 떠난 지 12시간 만에 바다미 호텔에 오니 오후 9시, 저녁 식사가 준비되어 있다. 그러나 시설이 좋지 않은 곳이라 부실하다. 맥주 한 병에 “난”을 안주 삼아 한끼를 때운다. 2층 210호실에 저녁 10시경 들어가 고단한 하루를 마감한다. 인도에 중부 이남 지역이라 역시 문제이다.
식사가 부실하고 잠자리, 샤워시설 등이 수준 미달이다. 아침 식사를 빵, 바나나, 계란 삶은 것, 티 등으로 간단히 한다. 식 후 호텔 밖으로 산책을 나가니 길 건너로 3개의 바위 산이 성채처럼 연결되어 앞을 가로 막고 있다.
붉은 사암의 산이 아침 햇살을 받아 더욱 기괴하게 보인다. 호텔 밖 나무위로는 원숭이 무리가 올라가 있다가 내려와 호텔 바깥 담장을 타고 이동한다. 아주 발 빠르게 어미는 새끼를 앞 가슴에 매달고, 담 벽 위를 타고 가서 담밖에 서 있는 큰 나무로 이동 한다. 원숭이 가족이 이동하여 건너편 나무위로 올라가는 진풍경이 우리 에게는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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